몽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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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의복
4. 음악
6.1. 농구
6.2. 축구
6.3. 야구
6.4. 개인 격투 종목
6.5. e스포츠
7. 종교
8. 유목 문화
9. 건축
10. 성 문화


1. 개요


몽골의 문화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이다.

2. 의복


몽골의 전통 의상으로 이 있으며, 몽골이 한창 세계적으로 힘이 강했을때 한복과 상당한 영향을 주고 받았고, 그 이후에는 만주족의 치파오와 영향을 주고 받았다.

3. 음식


옛날부터 유목을 했기 때문에 주식이 고기와 유제품. 옛날에는 신선한 말고기, 양고기[1][2]를 많이 먹었는데, 이때 당시에는 몽골인들은 계절에 따라 수시로 이동해야했고 양이나 말을 치는 것이 생각외로 고된 일이었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은데다가, 대체로 싱겁게 먹어서 육식 위주의 식사에도 대체로 건강했지만,[3] 몽골의 도시인구가 늘어난 이후에도 도시 지역 사람들이 이전의 식습관을 유지하고 자극적인 음식들도 많아지는 바람에 비만율이 급증하여 사회문제가 되었고, 덕택에 채소과일을 서서히 먹기 시작하는 중이다. 대체로 당근 같은 뿌리는 옛날부터 잘 먹었지만, 풀잎이나 줄기류 식재료는 사람이 아닌 말이나 양들이 먹는 것이란 인식이 있었어서 잘 안 먹었던 편이다. 또 홍차와 우유차를 함께 마신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젓가락 대신 포크를 주로 쓴다. 물론 과거엔 몽골도 젓가락 문화권에 속했고 젓가락에 대한 예절까지 존재했다.[4] 그러나 근대 이후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젓가락 사용이 줄고 포크 사용이 늘게 되어 지금은 젓가락을 거의 쓰지 않고 포크를 쓴다. 그나마 내몽골 자치구의 차하르인이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오이라트인 같은 몽골계 중국인들 사이에서 몽골족의 젓가락 문화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아마 젓가락 문화가 건재한 중국 한족들의 영향으로 보인다.
새우를 벌레로 생각하고 먹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내륙지방이라 해산물을 별로 접하지 못해서 그런 것[5]으로 생각된다. 물에서 나는 것 자체를 거의 먹지 않지만, 호숫가에 사는 사람들은 생선을 잘 먹는다. 몽골 최대의 호수 훕스굴 호수가 있는 훕스굴 지방에서는 호수 물고기를 통째로 구운 것과 잼 병에 넣어 삭힌 것처럼 보이는 음식이 특산물. 서나래, 김진, 엄마와 딸X2를 그린 필냉이, 이렇게 웹툰 여작가 셋이서 몽골 여행을 갔을 때도 현지인 길라잡이는 훕스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그 자리에서 요리해준 걸 맛있게 먹고 다같이 먹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이런 경우는 일부일 뿐, 보통은 꺼려한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젊었을 때 아버지가 죽고 부족이 붕괴되어 거지꼴이 되자, 물고기를 잡아 먹던 일화가 당시의 비참함을 상징하던 일로 통할 정도. 한국에 유학 온 몽골 학생이 포장지에 새우가 그려진 새우깡을 먹는 한국 학생을 보고 "벌레가 함유된 과자를 먹는다"며 경악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몽골인이 새우를 모르고, 먹지도 않는다는것은 2~30년 전 이야기고 지금은 시내 식당이나 마트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해산물이나 새우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살아있는 생선을 수조에 넣어서 파는모습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새우를 꺼려할 수는 있어도 마치 새우가 뭔지도 모르는 것처럼 오버하며 경악했다는 썰은 거짓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우리나라 인터넷에 올라오는 몽골 글들은 몽골인들이 유목민이라 문명에 익숙하지 않고 미개하거나 말도 안되는 풍습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이는 거의 극단적으로 과장되었거나 거짓이다.

4. 음악


몽골의 전통 악기로는 머릉 호르(морин хуур)가 있으며, 이는 한국어로 마두금이다. 현악기인 야특, 텁쇼르, 관악기인 에웨르 부레, 림베가 있다.
흐미(Хөөмий)라는 독특한 창법이 유명하다. 성대기관을 단련시켜 한 사람이 여러가지 목소리를 내게 하는 창법이다. 주로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

근현대 들어와서는 러시아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민주화 이후로는 미국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고 한국노래도 많이 들어온다.
몽골의 현대적 모습 중 하나인 몽골어 갱스터랩을 들어보자. 노래 제목은 Буруу газар зөв цагт(Buruu gazar zuv tsagt). 부른 그룹의 이름은 Click Click Boom.

이쪽 곡은 몽골 + 부랴티야 공화국의 웬만한 래퍼들이 모여 만든 Az Jargal[6]이다. 몽골에는 래퍼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몽골과 부랴티야 래퍼들이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몽골 전통 악기와 흐미를 메탈과 결합시킨 포크 메탈 밴드인 The HUYuve Yuve Yu[7]


5. 영화



6. 스포츠



6.1. 농구


기후적 원인으로 실내 종목이 주로 많이 이뤄지고, 곧잘 하는 편이던 실내 구기종목인 농구가 가장 인기가 있다. 물론 농구 실력 자체는 그다지 내세울 게 없지만, 그래도 축구야구보다는 훨씬 잘한다. 남녀 모두 대학리그, 자국 프로리그를 갖추고 있고 외국인 선수도 뛰고 있을 정도로 기본 구성이 탄탄하다. 대한민국에서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3X3 농구는 중국이나 이란, 카자흐스탄을 제치고 아시아 최강급이다. 2017 3X3 농구 아시안컵에서 남자 우승, 2018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고 여자 대회도 준우승 1번을 거뒀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에서는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농구 7위를 거둔 몰디브를 112-54로 이겼고[8] 농구를 좀 하는 편인 요르단까지 83-74로 이기며 2차 토너먼트를 넘어섰다.[9] 비록 한국에 67-90, 중국에 67-108, 이란에 69-107 같이 강호들에게 참패를 면치 못했으나, 축구와 야구에서 그야말로 동네북인 걸 생각하면 농구는 아시아 중위권 성적.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참가국 16개국에서 8위를 차지했으니 꽤 한 셈이다.
박성근 전 성균관대학교 감독이 2005년부터 5년 간 대표팀 감독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6.2. 축구


실외 스포츠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약체 국가. 적은 인구와 경제적 문제 말고도 기후 탓이 크다. 축구가 그나마 인기가 많지만, 세계적인 최약체이다.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축구에서 우즈베키스탄에게 0:15로 대패당하면서 역대 아시안 게임 축구 실점기록을 가지고 있다. 몽골 축구 국가대표팀 참고할 것.
몽골은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들이닥치고 여름은 상당히 더우며, 봄에는 거친 바람과 황사까지 곁들어 제대로 축구경기를 치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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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국내 리그인 몽골 내셔널 프리미어리그[10]가 겨우 7월부터 9월까지 단 2달동안 치러진다. 모두 10팀으로 구성된 리그에선 9, 10위가 다이렉트 강등. 8위는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에르침(ERCHIM)과 호르무혼(KHOROMKHON)같은 구단들이 우승을 주로 차지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12년이 되어서야 AFC프레지던트컵에 겨우 참가할 수 있었을 정도.
추위와 더위 문제로 제대로 된 국제대회 예선 등을 치를 수 있도록 위하여 수도인 울란바타르에 전천후형 돔 경기장을 건설 중(2017년 완공예정)이다. 국제경기를 주로 내셔널 스포츠 스타디움(관중석이 2만석 정도)이나 MFF 풋볼 센터(관중석이 겨우 5천석 수준)에서 치른다... 그렇긴 해도 축구 인기는 꽤 있다.
한편 2015년부터 2부리그격인 몽골 퍼스트 리그가 출범했다. 총 10팀으로 구성되어있으며 1, 2위팀은 다이렉트 승격, 3위는 내셔널 프리미어리그 8위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6.3. 야구


농구같은 실내종목말고 실외 구기 스포츠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축구가 이러다보니 야구나 실외 구기종목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야구가 정식종목이 되던 대회에 처음으로 나와 대만에게 0-20, 한국에게 0-21로 졌다. 그 뒤 아시안 게임 야구는 참가하지 않다가 오랫만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에 참가한 몽골 야구 대표팀은 중국에게 0:15 콜드게임 패, 일본에게 0:24 콜드게임패, 태국에게 '''0:25''' 콜드게임 패를 당했다. 무득점에 64실점이란 최다 실점 기록 및 태국에게 허용한 25실점은 역대 아시안 게임대회 최고 실점 기록(!)으로 '''아시안 게임 축구, 야구 두 종목 최다실점 기록을 몽골이 가지고 있는 셈'''. 우습게도 종전 최다실점 기록은 1994년 대회에서 일본에게 2-25로 진 태국이었는데 그 태국이 반대로 기록을 세운 셈이다.
몽골이 야구로 참가한 것도 바로 이웃이 개최국이라 가까워서 참가한 것이지 비행기나 배를 타고가야했다면 차비가 없어 불참했을 대회였다.(1994년 대회 같은 경우 일본이 지원해서 참가했지만 그 뒤로 줄곧 불참했다) 결국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도 파키스탄에게 0-25로 참패했고 중국에게 또 0-15 콜드게임패를 했다.이제 남은 1경기 일본전에서는 또 0-24로 진다면 4년 전 대회랑 똑같은 무득점 64실점 기록을 연속으로 기록하게 되었는데 0-21로 져서 무득점 61득점을 기록했다. 역대 아시안 게임 성적은 8전전패 '''0득점 166실점.''' 이렇듯 도무지 1점을 내본 적 없으니 아시안 게임 야구에서 1점이라도 거두면 무척 기뻐할 듯 하다. 사실 야구선수들도 전문 선수가 아닌 그냥 야구를 좋아하는 조기 야구 수준의 평범한 사람들이긴 하다. 장비도 없어서 2014년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한국 야구계에서 야구배트 5개를 선물해주자 엄청 기뻐했는데, 몽골 선수들에겐 야구배트가 3개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때는 몽골은 야구배트가 딱 한 개라 이걸 가지고 경기에 임해야 했던 걸 한국에서 야구배트를 비롯한 여러 장비를 중고(!)로 무상지원해줘 연습하고 남은 것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2018 아시안 게임도 불참했다. 교통비가 없어서 불참한다고.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는 남녀농구에서 3X3 농구 남녀 모두 참가한 걸 봐도 야구에 대한 지원은 없다고 봐야 할 정도.

6.4. 개인 격투 종목


반대로 스모유도같은 개인 격투종목은 꽤 상당하다. 현재의 일본의 스모대회는 아예 몽골인들이 장악했을 정도로 압도적. 21세기에 접어든 이후로 나온 4명의 요코즈나 (아사쇼류[11], 하쿠호[12], 하루마후지[13], 카쿠류)는 몽골인이다.
아무래도 위에 나온 기후 탓에 제대로 구기종목은 훈련이나 경기를 치르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실내경기장에서 치르는 이 종목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훈련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골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북방계 몽골리안은 대체로 몸집이 크고 전통적으로 육식 위주의 식문화가 발달하여 소위 말하는 장사형 체형[14]에다가 팔다리가 길어 근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다. 투기 계열에 특화되다시피 한 피지컬을 지닌 사람이 많은 것. 추운 날씨 때문에 지방이 잘 붙는 체질이 많아 비슷한 양을 먹어도 증량이 더 잘 되는데 이는 체중이 곧 파워로 작용하는 스모나 씨름같은 레슬링 계열 종목에서는 엄청난 강점으로 작용하며 반대로 유연성이 중요한 농구나 축구 등의 구기종목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한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유도와 레슬링에서 여러번 나왔다. 공교롭게도 몽골 유도 발전에 한국이 기여했는데, 한국인 코치를 초빙하고 경기장 시설이 열악한 탓에 한국가서 훈련받은 몽골 선수들이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과 일본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받았었다. 일본에선 아시안게임에서 자국 유도 유망주가 몽골선수에게 패해 중도 탈락하자 한국을 비꼬는 기사를 싣은 적도 있지만 일본에서도 유도나 실내 종목 연습을 하러 몽골선수가 가기에 이건 지 얼굴에 침뱉기일뿐이다.
몽골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도 유도에서 나왔다. 유도 선수 나이단 툽신바야르(Найдангийн Түвшинбаяр)는 2008년 남자 100kg 금메달리스트, 2012년 동 체급 은메달리스트이다. 다만그는 어려서부터 유도를 해오던 선수가 아닌 몽골 씨름인 부흐를 하던 선수였다. 덕분에 올림픽에서도 부흐 기술을 응용한 하체공격위주의 유도를 보여주었으나 다리만 잡고 넘어뜨려서 치사하다는 불만도 있었다. 이 때문에 런던 올림픽부터 유도에서 다리잡기가 금지되었고 이후 유도는 침대축구처럼 침대유도가 되어버렸다. 어차피 하체로 공격이 안 들어오니 여차싶을 때 몸을 아래로 웅크려버리면 상대방의 공격을 봉쇄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바꿔말하면 나이단은 유도가 격투기로써의 정체성이 강하던 시절 최후의 금메달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레슬링도 꽤 잘한다. 올림픽 은메달까지 받은 적도 있다. 한국이 광복 이후 첫 금메달 획득 한 것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 선수) 바로 몽골 선수를 상대로 이겨 얻어낸 것이다.[15] 그 밖에 국제레슬링 대회나 아시안게임에서도 꽤 상위권 성적을 거두고 있다.
입식이나 종합격투기에서도 간간히 좋은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다. 단, 인프라가 열악한 것이 흠. 성공하는 선수들은 대개 해외에 정착해 급성장하는 경우다.

6.4.1. 부흐


매년 7월에 열리는 나담 축제(эрийн гурван наадам,Naadam Festival)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 몽골식 씨름인 부흐(Бөх)이다. 이 나담은 유목민의 삶에서 중요한 가축들의 성장과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와,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기를 통해 병사를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군사적 의미를 지닌 행사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몽골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되새기고 스포츠 경기로 전 국민을 단결시킨다는 정치적 의미가 강조된 행사로 그 성격이 변했다. 나담 축제는 몽골 기마병과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주민들의 행진으로 시작되며, 열띤 스포츠 경기 외에 몽골 전통 음악 공연, 음식과 공예품 판매 등이 함께 이루어져 몽골의 전통과 문화가 집약된 축제인데 기마, 활쏘기 등등 고유 놀이를 한번에 다한다. 이런 전통 대회 맥이 끊겨버린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몽골 최대 스포츠 행사로 인기가 많다. 때문에 부흐나 활쏘기나 기마에서 우승하면 후한 상금에 명예를 누리기에 인지도가 높다.
이 나담 부흐에서 우승한 씨름선수는 아와르가(Аварга)라고 불리우며 부와 명예를 누린다. 더불어 부흐는 일상 유목생활에서도 가장 흔하게 즐기는 스포츠이기에 이를 이용하여 스모선수나 레슬링 선수로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래도 스모 챔피언이 더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인지 주로 스모로 많이 진출한다. 스모에선 몽골 출신 역사들이 여럿 있고 요코즈나(아사쇼류, 바쿠호 등...)도 많이 나왔다. 2010년대부터는 한국 씨름 대회에도 몽골인 선수가 등장하는 등 부흐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6.4.2. 밴디


그 외에는 동계스포츠인 밴디를 그나마 좀 하는 편이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 해당 종목 은메달 획득. 사실 카자흐스탄(금메달), 키르기스스탄, 몽골 이렇게 3개팀이 출전해서 그 중에 2등한 것이라 잘한다기보다 아시아에선 보기 드물게 이 스포츠를 즐기는 나라이다.[16]

6.5. e스포츠


일반적으로는 아시아태평양(APAC)-동아시아권[17]에 포함돼있다. 인근 러시아, 중국이 e스포츠가 활성화돼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고 2010년대부터 여러 무대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CS:GO에서는 한때 동남아가 잘 나갈 땐 약소국이었지만 멈추지 않고 성장하면서 현재는 아시아 내에선 중국 다음가는 콩라인 정도의 강국에 위치해있고 기세를 타면 그 중국도 여러번 위협한다. 아직 서양팀에 대등한 경기력을 갖추진 못하고 있지만 중국, 동남아, 오세아니아 팀에 선수를 여럿 보냈었고 이런 외국으로 나간 선수들이 큰 활약을 하면서 국제 대회에서의 아시아 성적을 높이는 데 공을 세우는 일도 자주 있다. 몽골 플레이어 중 가장 유명한 Machingun은 아시아 최강 중 하나였던 The Mongolz에서 활동했고 미국의 Splyce에 이적해서 북미로 진출하기도 했는데 이건 아시아권에서 서양권으로 최초로 진출한 케이스이다.
스타크래프트 2 몽골 선수인 Sioras가 WESG 2017년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태평양 최종예선에 진출한다. 최종예선 12강에서 케유펑에게 0대3으로 완패를 당했으나, 본선 진출전에서 싱가포르의 게이머 Elusory를 3대0으로 누르며 WESG 32강 본선 무대에 진출한다.

7. 종교


몽골은 전통적으로 텡그리(Tengri) 사상을 중심으로 한 샤머니즘을 신봉하였다. 이는 몽골 제국 시절까지 이어졌으며 특별히 다른 종교를 편애하거나 탄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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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최대의 간단 사원의 법당. 높이 26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금동불상이 안에 모셔져 있다.
현대에는 과반수 이상의 몽골인들이 티베트, 부탄 등과 같은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7.1. 불교


몽골불교가 들어온 것은 흉노족이 몽골초원을 지배했던 기원전 1세기부터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부정하지만, 기원전 3세기부터 비단길초원길을 따라 전해진 불교는 중국이 서역이라고 불렀던 중앙아시아로 전해졌고, 이들 지역과 활발하게 교역했던 흉노족 일부도 불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서몽골 일대에서 발견된 당시 불교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흉노족, 선비족, 돌궐족, 거란족 등 몽골초원 지배자들의 흥망으로 명맥이 끊겼던 불교가 국교화된 것은, 칭기즈칸의 손자로 13세기말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 때부터였다.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에 멸망되기 전까지 원나라 내에는 4만여 개가 넘는 절과 20만 명이 넘는 승려가 활동할 정도로 불교 영향력은 막강했고 그 중심에는 티베트 불교가 있었다. 원나라 승려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파스파였다. 티베트 불교 승려였던 그는 제국의 불교계를 지배했고 티베트 문자를 기본으로 현재까지 공식 문자로 내려오는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14세기 말 원나라가 멸망하고 초원으로 물러간 몽골족은 불교로 인해 제국이 멸망했다는 이유로 이전 신앙인 샤머니즘으로 돌아갔다.
몽골 지역에서 불교가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 몽골 초원을 지배한 알탄 칸이 티베트 접경인 칭하이성 일대를 공격하면서부터였다. 티베트 고승 소남 갸초를 만난 알탄 칸은 그의 법력에 감탄해 달라이 라마(지혜의 바다)라는 칭호를 선사했고 소남 갸초 역시 알탄칸을 칭기즈칸 집안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부여했다. 알탄 칸의 비호 아래 티베트 불교는 몽골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지배 하에서도 불교는 더욱 확산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전 몽골의 수령들이 모여 모든 귀족 가문에서 아들 하나는 라마승으로 출가시키기로 합의했다.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당시에는 청나라 조정에서 몽골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승려들을 지원했고 불교의 정치·경제적인 영향력이 커지자 많은 몽골인이 승려가 됨으로서 19세기 말엽에는 성인 남자의 절반 이상이 승려가 될 정도였다. 한때 초원을 지배했던 몽골 남성들이 승려가 되고, 사원을 중심으로 한 정착이 이루어지면서 몽골인의 상무정신과 기상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지금의 몽골 지역에만 4천 개 이상의 사찰이 있었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붕괴하자 불교 지도자인 복드 칸이 몽골 최고통수권자이자 법왕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1924년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몽골 불교는 거의 뿌리가 뽑힐 정도로 암흑기를 맞이했다.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몽골 인민혁명당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간주하고 불교는 물론 전통 신앙인 샤머니즘도 철저히 탄압했다.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는 약 1만 7,000명에 달하는 승려들이 처형당하거나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거의 모든 사찰이 폐쇄되었다. 공산당의 불교 정책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1940년대 초까지 몽골에는 공식적으로 단 1명의 승려나 신자, 절도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고 1980년대에도 몽골인 대부분은 자신들이 무신론자 또는 무종교인이라고 응답하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찬란했던 몽골 불교의 유산이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오늘날 러시아의 불교 연구가 상당 수준에 오르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몽골도 동아시아 국가인 만큼 오늘날에도 무종교인들은 적지 않다. 일단 몽골인의 3명중 1명은 무종교인이라는 조사결과가 있다 종교는 대체로 유목민들이 믿고있으며 울란바토르에는 무종교인들이 많은편.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고 몽골도 무혈 민주혁명이 성공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티베트 불교가 국교처럼 존중되면서 많은 사찰이 복원되었고 승려 양성기관을 통해 많은 승려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1990년 민주화 혁명 이후 집권한 오치르바트는 취임과 동시에 소련으로 실려 간 간단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상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불사를 추진했고 몽골 국민 대부분이 보시했는데 그 열기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 몽골 불교는 티베트 불교(주로 겔룩파)의 영향으로 달라이 라마를 여러 차례 초청해 대규모 법회를 열고 개별 가정에서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나 조형물을 모셔놓은 경우가 많다. 승려들의 경우는 소련 지배 시절 강제결혼정책의 영향으로 독신인 비구승(Gelon)과 결혼한 대처승(Genen)으로 나누어져 있다. 자신의 근기에 따라 결정할 수 있고, 가문을 이어야 하는 독자들은 승려가 되더라도 대처승이 되어야 한다.
비구승도 한국의 스님들처럼 절 안에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이나 제도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절에 가고 저녁 때면 퇴근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가족들과 지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몽골의 불교 신자들은 절에 가는 것보다 스님들 집으로 찾아가 축복을 받거나 상담을 받는 경우가 많다. 승려 대부분이 세속과 분리되지 않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유흥업소나 극장을 자주 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몽골인들은 거의 없다. 최근에는 비구승인 티베트 고승들이 몽골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고 비구승들이 우대를 받으면서 몽골의 승려 사회가 조금씩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70년간의 공산시대가 끝나고 몽골에서 불교가 재도약을 하는 시기에 기독교 등 외래종교들의 영향력도 확대되고 있다. 최근에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있다. 특히 가톨릭은 주한 교황청 대사관 산하 지목구로서 한국 가톨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몽골 교회를 돕는 대표적 교구이며, 총 68명의 외국인 선교사들 중 한국인 선교사는 23명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현재 본당 수는 6개다. 4개 본당은 수도 울란바토르에, 2개 본당은 다르항, 우르항가이에 있다. 이외에도 5개 공소가 있다.

7.2. 가톨릭


소련이 무너지면서 소련의 지원에 의존하던 경제가 갑자기 무너지자 몽골 정부는 서방 세계와의 교류와 지원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교황청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992년 교황청이 몽골 정부와 수교를 시작하였다. 몽골 가톨릭교회에서 중요한 사업은 버려진 아이들, 노숙자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선교사를 초청하였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오히려 외국 종교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따라서 종교 활동을 교회 건물 안으로 제한하였고, 아직도 허가받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활동에는 추방이라는 강한 제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형식상으로나마 종교의 자유가 있긴 하지만 몽골 여론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또한 몽골인들은 신에 대한 종교성은 있지만 동방의 여러 나라처럼 기복신앙적인 면이 강하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누군가 아플 때, 죽을 때 신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자신이 힘들 때 찾는 신’으로만 받아들이는 수준이다. 그런 면에서 매주 주일 및 의무대축일 미사 참례가 의무인 가톨릭을 이해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한편 2016년 8월 28일 몽골인 최초의 사제가 서품되었다. 바타르 엥흐 (요셉) 신부는 한국의 천주교 대전교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고 2015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2016년 8월 28일 사제품을 받았다. 몽골 대목구장 웬치슬라오 파딜랴 주교의 주례하에 유흥식 주교, 교황청 한국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사와 몽골 내 선교사, 대전교구 성소국장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신부 등이 참석하였다.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 몽골인 신학생 1명이 재학중이며, 대전가톨릭대에 진학할 예정으로 논산대건고등학교에서 재학 중인 학생이 1명 있다.

7.3. 이슬람


몽골 서부에 사는 카자흐[18], 위구르족 등 튀르크계 소수민족들은 이슬람교를 믿는다.

8. 유목 문화


조상대대로 유목민들의 나라인 만큼 목축업을 하고 게르(Ger)에 살면서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는 유목민들이 많'''았'''다. 현대에는 유목민의 수는 줄었지만 가축의 수는 늘어난 것으로 통계되고 있다. 몽골의 카자흐 유목민들은 양과 염소를 지키기 위해 검독수리를 길들여서 늑대를 사냥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유목민들은 먼지가 많고 건조한 날씨를 견디는 방법 중 하나로 코담배를 한다. 진짜 담배가 아니라 향초와 약초 등을 섞어 만든 향유의 일종으로 손가락이나 손등에 발라 콧 속에 흡입하거나 바른다. 코담배는 찻잎을 넣어 끓인 우유차인 수테차와 함께 손님에게 제일 먼저 권하는 접대 중 하나이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만약 손님도 코담배를 가지고 있다면 서로의 코담배를 바꾸어 나누며, 아울러 손님 접대시 내온 음식 역시 남김없이 먹는 것이 전통 식사 예절이지만 현재는 많이 완화된 상태라고 한다.
현재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서 유목을 하는 이들은 소수가 되었으며 인구의 절대 다수는 도시민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몽골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초원에서 양 치고 염소 젖 짜먹고 '게르'에서 거주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몽골도 도시가 있고, 상대적으로 '촌'이 있을 뿐이다.[19] 많은 몽골인들과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국내 언론이 몽골의 발전상을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다만 현재도 게르에 사는 사람은 많다. 휴가철때 별장용도로 게르를 소유하는 경우도 많기도 하지만[20] 무엇보다 '''올란바토르의 집값이 왕창 비싸다보니까''' 게르에서 사는것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민층들은 게르에서 사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이런 이촌향도현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프로그램으로 몽골판 1박2일(?) "도시 아들"이란 예능프로가 있다. 2016년 몽골에서 가장 인기있는 예능이었으며, 컨셉은 1박 2일과 비슷하게 도시(울란바토르) 출신 몽골인이 몽골의 각 지방을 돌며 게르에서 먹고 자면서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단지 연기자(예능인)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PD가 직접 등장한다는 것이 다를 뿐. 한국에서는 MBC 세모방과 콜라보레이션해서 알려졌으며, 김수용은 여기서 말의 갓 잘라낸 불알을 먹었다(...)

9.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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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의 이미지가 커서 천막만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몽골의 궁전, 절들도 다른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전통 건축물처럼 기와를 사용한다. 복드 칸 겨울궁전, 초이진 라마 사원이 대표적인 예. 중국, 티베트 건축과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간단 사원이 대표적인 티베트식 건축물이다.
또한 수도 울란바토르를 비롯한 몇몇 주요 도시에는 소련의 지배를 받았을 당시에 지어진 흐루쇼프식 아파트도 꽤 많이 보인다.

10. 성 문화


유목 민족 출신이라서인지 의외로 성이 개방적인 편이었다. 허나 실제 동방에 갔는지 안갔는지도 불분명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마르코폴로가 몽골 지역에 갔을 때 부인을 빌려주는 풍습이 있었다는 내용이 확대 재생산되는 바람에 성문화가 문란하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일부 오지의 이누이트들이 고립된 지역의 근친결혼 문제 때문에 그렇게 하던 풍습이 있는것과 달리 이쪽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주거구역도 여성구역, 남성 구역을 나누기에 그런 거 없다. 또한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현재 개방적인 성풍속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그것과 문란함은 엄연히 별개. 몽골 정부는 2007년 부터 성매매 단속법이 시행하고 있으나, 효과는 미미한 상태이다.
2008년에는 일부 몰상식한 한국인들에 의한 단체 성매매가 자행되면서 반한감정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1] 다만 가축이 곧 재산이기 때문에, 늙어 죽기 전의 가축이나 겨울철을 앞둔 것이 아닌 이상은 유제품 위주로 먹었다.[2] 이 때문에 한국에서 양꼬치를 잘 먹는 사람들도, 몽골의 양고기는 누린내가 심해 못 먹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어린 양을 잡기 때문에 누린내가 덜 나는 것인데 만약 몽골로 가서 어린 가축을 잡자고 말하면 몽골인들은 '오래 산 것을 안 잡고 왜 어린 걸 잡어?'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3] 다만 이건 소금과 향신료가 구하기 쉽지않거나 구하려고 해도 비쌌기 때문이다.[4] 예를 들자면 남자들은 외출할 때 항상 담뱃불 붙일 부싯돌과 칼과 함께 젓가락을 챙겨가야 했다. 또 젓가락을 놓을 때는 절대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놓아선 안 된다는 예절이 있었다.[5] 이건 내륙국가, 게다가 수출입이 잘 안되고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그런 경우에는 더더욱 많다. 아프가니스탄으로 의료 봉사를 하러 간 종교 봉사단체 JTA측이 겪은 일화인데 새우 사진을 보여주자 아프가니스탄 오지 사람들은 이런 벌레를 먹냐고 어이없어 했다는 반응을 똑같이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내륙국이 아니라도 이런 경우가 있는데 인도 여행 간 배낭여행자가 말린 새우를 가져가 먹자, 인도 사람들도 벌레를 먹냐며 어이없게 반응했다는(다만 여기도 바다와 멀리 떨어진 지역) 일화가 있다. [6] 행복이라는 뜻이다.[7] "무엇이냐?"라는 뜻으로 가사 전체가 현재 몽골인의 근거 없는 자신감, 자국 내 타민족에 대한 차별 등을 까고 있다. 현재 유튜브 조회수 '''6000만'''에 육박하며 흥행하고 있다.[8] 2003년 축구에서 몰디브에게 0-12로 참패한 몽골이다. 뭐 몰디브가 2014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16위 꼴지이긴 했다.[9] 더불어 4년전 이 대회에서 요르단에게 패했던 걸 설욕했다.[10] 니슬렐 리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11] 최초의 몽골인 요코즈나. 일본으로 유학가서 하쿠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역대 요코즈나들중 최고 승률과 우승률을 자랑하며 일본 스모판에 혁명을 선사한 리키시이다.[12] 90%에 가까운 승률과 역대 요코즈나들중 압도적인 우승률을 가지고 있는 현역 리키시.[13] 스모선수 중에서는 체중이 가벼운 편이다.[14] 쉽게 예를 들면 마동석 같은 체형.[15] 당시 레슬링은 경기를 치르면서 전적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선수들이 차례로 탈락하고 마지막 3명이 남으면 리그를 통해 1-3위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사실은 양정모 선수는 몽골 선수를 이긴 게 아니라 그에게 졌다. 그러나 최후 3인의 리그와 그 앞 경기를 종합한 결과로 인해 양 선수가 1위, 몽골 선수가 2위가 된 것이었다.[16] 국제 밴디 스포츠 협회 가입국만 보면 인도, 일본, 미국, 캐나다,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들도 가입(한국은 미가입)은 했으나, 그냥 동호회 수준으로 하며 사실상 밴디를 확실히 자주 즐기는 나라는 러시아, 옛 소비에트 연방 나라 및 몽골,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로 보면 되겠다. 이래 봬도 2년마다 세계 대회를 꾸준히 치루고 있다.[17] 한국, 중국, 일본, 대만(+홍콩, 마카오)이 포함돼있다. 중국은 아시아권에서는 대체로 아시아권에서 가장 성적을 잘 내기도 하는 데다가 혼자만 인구가 너무 많아서 참가자 끼리의 비례가 안맞는지 최근들어 그때그때 필요하다면 동아시아가 아닌 독자적인 아시아 하위권으로 분리될 때도 있다. 홍콩과 마카오는 반대로 이런 규모가 너무 적어서 그냥 중국에 들어갈 때가 많다.[18] 카자흐스탄 사람이 아닌 몽골에 사는 카자흐 민족이다.[19] 한국의 남매 가수인 악동뮤지션의 사례에서 이러한 편견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악동뮤지션은 부모님이 개신교 선교사라 어렸을 때부터 몽골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처음에 몽골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소위 몽골의 스테레오 타입, 즉 게르와 초원, 양과 함께하는 생활(...)을 상상했으나 현실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했단다(...)[20] 구소련권과 그 영향을 받은 국가에서는 과거 국가에서 땅을 나누어줬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별장문화가 보편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