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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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인 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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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관평양냉면
1. 개요
2. 세부분야별 상황
2.1. 문학
2.2. 미술
2.3. 공연예술
2.3.1. 음악
2.4. 대중매체
2.4.1. 드라마
2.4.2. 영화
2.4.3. 애니메이션
2.4.4. 예능
2.6. 식문화
2.7. 기타
3. 이름
4. 문화 검열
4.1. 문화 검열의 역사
5. 지도자의 교시에 따른 신문화 창작
6. 서브컬처
7. 마약 문화
8. 교육
8.1. 초·중등 교육
8.1.1. 일반 학제
8.1.1.1. 관련 문서
8.2. 고등교육
8.2.1. 대학 입학
8.2.2. 북한 내 대학
8.2.3. 사범 교육
9. 관련 문서
10. 관련 자료


1. 개요


여타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문화예술도 개인의 창작 자유보다는 국가와 당의 주도에 훨씬 큰 비중이 쏠리는 집단적이고 총체적인 흐름을 띄고 있다. 그나마 현대예술에 대한 사조를 어느 정도는 용인해 줬던 소련이나 중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여전히 빗장을 꽉 걸어잠그고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 당시 예술가들이나 연예인들의 형편과 대우가 좋지 않았고, 북한이 사회적으로 더 안정적이었기 때문에[1] 인재풀 자체는 북한이 더 풍부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김일성이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문화통제를 단행하면서 자기한테 거슬리는 문화계 인사들을 차례차례 수용소나 지방으로 내쫓기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승희, 임화[2]
게다가 1950년 후반즈음 김일성이 북한의 학교를 시찰하던 도중, '''교실에 소련 음악가, 문학가의 초상화나 작품은 많은데 우리 민족 예술가나 작품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문화부분에서의 주체를 강화하자는 운동과 더불어,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 문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3] 사실 전통적인 소재의 작품을 장려하는것이야 남한에서도 하던 일이니 이상할것은 없는데 김일성은 여기서 내용전개까지 간섭했다는것이 문제점이다. 결국 북한에서 좋은소리 듣는 예술작품은 모두 '''북한식으로 토착화 된 사회주의적 집단주의 예술'''만을 뜻하게 된다.
흔히 1970년대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살았다고 하지만, '''대중문화를 누릴 자유나 창작의 자유까지 앞서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동시기 남한도 문화 탄압을 했다지만, 북한 수준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볼 수 있는데[4], 북한이 남한보다 문화적 역량이 꽤나 떨어졌다는 그 증거 중 하나가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문화예술가들이 몸보신과 출세에 급급하며 창의적인 작품보다는 그 나물에 그밥인 식상한 작품을 내놓는 경우가 많아 김정일도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남한에서 감독을 순수 수급(?)해온것이다.
그나마 '전통적인' 흐름에 몸을 맡긴 예술인들도 격변하는 내부 정세 속에서 자리를 잘못 잡거나 지도자들에 의해 안 좋게 찍혀서 탄광이나 수용소, 집단농장으로 보내진 경우도 꽤 된다. 특히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 김정일이 문화예술 부문에서 직접 지도자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개인에 의한 창작활동 보다는 여러 창작가들이 집단으로 모여 창작하는 소위 '집체 창작'이 일반화 되었다.
다만 김정일은 평소에 외국영화를 즐겨보고 영화에 있어서 전문가인지라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5] 김일성보다는 꼰대 기질이 덜했던지라 1980년대 쯤에는 이런 집체 창작 열기가 잠시 수그러들고, 시집이나 소설, 음악작품, 미술작품 등에 창작가 개인의 이름을 붙여 내는 경우가 다시 많아졌고, 로맨스 영화와 특촬물도 제작되어 인기를 끄는 등 영화의 소재도 다양화되었지마 냉전이 끝나며 북한이 고립되었고, 고난의 행군이라는 경제난도 겹치며 이러한 기조는 사그라들었고 다시 '우리 식대로 살자'는 식의 내용의 문학작품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다시 조금씩 외부 세계를 향한 개방의 움직임이 관측되고 있지만, 날로 악화되는 경제 사정과 주변국들의 이런저런 정치/경제 제재로 인해 앞으로 북한 문화예술계가 어떻게 흘러갈 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자료실에 들어가면 북한의 교육자료,영화자료등을 볼 수 있다. 물론 유튜브에 검색해도 북한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등 찾아 볼 수 있긴 하지만 찜찜한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찾아보길 바란다.[6] 무려 북한 영화 신청도 가능하다.
국가 공식 사이트에 게재돼 있는 만큼 코렁탕 먹을 일은 확실히 없다.#

2. 세부분야별 상황



2.1. 문학


광복 후 대부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들이 북으로 월북했으며, 황혼을 쓴 한설야의 경우는 북한의 소설학에 매우 큰 공헌을 했다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 북한은 도서정리사업을 단행해 철저하게 사상통제와 검열을 시행하여 체제 비판을 철저히 억제하고 있다.
북한의 문학은 보통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번째는 1945년에서 1958년까지의 시기로, 이 시기에는 통제가 크지 않았고 수많은 월북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들이 활동했다. 이때 이들의 활동하면서 남긴 문학적 유산들이 후에 북한 문학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독재가 강화되고 문인들이 대거 지방 등지로 추방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서 문학의 질이 쇠퇴하게 되고, 오로지 김일성만을 찬양하는 판에 박힌 형식의 문학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김일성이 독서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인지라 북한인민들이 책에 쉽게 접근할수있게끔 도서관을 많이 만들어놓았지만 막상 들여놓는 소설책의 질이 썩 좋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었다. 이렇게 북한 문학은 오로지 김일성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가다가 1966년 김정일이 부각되면서 김정일을 선전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북한 주민들이 문학에 쉽게 접촉하고 그를 통해 세뇌가 효율적으로 이뤄지게끔 다양한 정책이 실시된다.[7] 그래도 체제선전을 목적으로 한 문학작품만 있는것은 아니라서 역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나 연애나 가정문제, 사회상등을 다룬 통속소설들도 출간되곤 하며, 검열삭제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통속소설들은 북한의 사회상이 어떤지 알수있고, 북한사람들도 하도 질리게 많이 보는 체제선전 문학보다는 통속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심심풀이용으로 읽기도 한다.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자신의 작품을 밀반출해 한국에서 작품들을 출판한 반디라는 작가의 정체가 탈북하지 않고 여전히 북한에 거주중인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의 작가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2.2. 미술


북한/문화/미술 참고.

2.3. 공연예술


북한/문화/공연 영상 참고.
북한의 공연예술은 대부분 성악, 기악, 무용, 연극 등 거의 모든 형태의 무대 예술을 한 예술단에서 모두 소화할 수 있도록 통합된 체제를 취하고 있으며, 이는 평양에 밀집되어 있는 대표적인 예술단 외에 각 시나 도 등에 속한 예술단도 규모나 편제의 세세한 차이를 제하면 대부분 마찬가지다. 만수대예술단피바다가극단, 조선인민군협주단, 국립민족예술단 등이 이러한 통합 공연예술 단체에 속한다.
하지만 어느 한 장르나 공연 형태에 특화된 활동을 보여주는 단체들도 있으며, 교예(서커스) 전문인 평양교예단이나 관현악 전문 연주 단체들인 조선국립교향악단, 윤이상관현악단, 은하수관현악단[8], 만수대예술단 하부 조직인 삼지연악단, 취주악 전문 연주 단체인 조선인민군군악단, 남성합창단인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경음악 단체들인 보천보전자악단왕재산경음악단 등이 이 분야의 대표적인 단체들로 손꼽힌다.

2012년 7월 13일, 노컷뉴스가 공개한 북한 모란봉악단의 공연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전보다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의외로 외국 록 밴드나 뮤지션들에게 일종의 '''레어한 투어 장소 끝판왕'''같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록 밴드 라이바흐(록밴드)가 평양에서 콘서트를 연 바가 있다. 아직 북한이 구 공산권이나 제3세계권에서 방귀 좀 뀌던 시절에는 나름 진보적인 음악가들이나 동유럽 음악가들이 많이 공연을 하러 왔었다.그래서인지 생각보다 많은 뮤지션들이 북한에서 공연한 바 있다. 물론 대부분 평양에서만 공연을 했지만. 아주 드물지만 예전에도 록 밴드들의 공연은 간간히 있긴 했다. 일본의 헤비메탈 밴드 SHOW-YA는 1991년 6월 평양 만수대 극장에서 공연한 바 있고, 소울 플라워 유니온은 1993년 평양에서 공연을 한 바 있다.

위 영상은 2003년 베이비복스의 평이다. 이를 볼때 북한에서 자본주의적 음악에 위화감이 있어서 소리가 많이 나왔지만 사실 이 당시 북한에서 아이돌 음악이 별로 익숙치 않았던 시절이었고 이때까지는 남한노래는 트로트나 포크송 위주로 돌아다녔던지라 반응이 좋지 않았던것이 이상한일은 아니었다. 유명한 조용필의 경우는 굉장히 반응이 좋았다.#

2.3.1.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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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연관현악단의 서울 공연

북한에 방문한 노르웨이 사람들이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A-ha의 Take on me를 가르쳐 주었고, 그로 인해 이들이 연주하는 영상을 담을 수 있었다.
북한에서도 '''자본주의 세계의 음악과 영화'''를 볼 수는 있다고 한다. 평양 예술대학 도서관에 가면 각종 장르의 음악과 영화가 존재하는데, '''오로지 연구 목적으로 열람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한다.[10] 물론 아직도 이런 영상물과 음악을 공개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걸 연주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조치라고 한다. 다만 탈북 시인 장진성에 따르면 실력수양의 목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한다.[11] 만일 이걸 걸리면 자아비판정도는 기본이며 '''운이 안 좋으면 감옥이나 정치범수용소에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80년대부터 알음알음 남한 노래가 들어온데다가 90년대 이후로는 조선족들을 통해서 남한노래가 많이 전파되었다. 그래서 90년대 당시에는 남한노래를 연변가요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의외로 북한에서 남한 노래가 많이 인기 있으며 김정일이 살아 생전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고,[12][13] 심지어 이 노래는 북한에서 체제 선전 노래로 가사를 바꿔서 불리기도 한다.#[14] 북한에서 의외로 윤수일아파트가 인기 있었다거나, 개성이나 황해도 지역은 남한 라디오가 잡히고 함경북도 일대에서도 연변TV방송을 통해서 남한에서 유행하는 대중음악을 대충은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조선족 상인들을 통해서도 남한노래나 중국노래가 많이 들어온다고 하며, 외국을 가끔 드나드는 사람들의 경우, 일반적인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외국음악을 즐기고 있다. 마이클 잭슨을 좋아 하고 "나는 국내 음악은 안 들어요"라고 하는 북한 젊은이 이야기 다만 여기서도 취향차이가 있어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트로트 가요가 인기가 많았고 아이돌 음악이나 록음악은 코드가 맞지 않아서 그렇게 큰 인기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층들 사이에서 아이돌 댄스음악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는 듯 한다. 아직도 지방에서는 트로트 음악이나 90년대 음악이 인기를 얻고있다는 얘기도 있어서 취향차이가 뚜렷한 것을 알수있다.(...)
참고로 북한가요(북한식 표현은 '조선가요') 중 일부는 대한민국(남한) 내에서도 유통되는데, 하나는 중국 식품점에서 불법 거래되는 음반, 또 하나는 네이버 뮤직 등 음악 사이트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음원으로, 합법 유통 음원은 오리지널 곡을 편집한 것이다. 1988년 이후 <조선은 하나다>처럼 '북한 바로알기 운동'의 일환으로 남한 NL성향 민중가요 노래패들이 암암리에 들여와 부르기도 했고, 경기남부총련 노래단 '천리마'나 '희망새' 등 일부 노래패들은 절가형식과 주체창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노래들 대부분은 조선로동당 및 김씨 왕조를 찬양하는 노래들이다. 평양방송 등 북한 방송들을 시청해보면 이런 노래들을 수없이 들어볼 수 있고 다른 노래들은 나오지 않는다. 자세한 목록은 북한/노래 참고. 북한의 찬양가요라고 하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한 외신 기자는 북한 버스기사가 일할 때 듣는 노래라고 들려줬는데 가사는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멜로디는 뽕짝이였다고 한다.
2010년도 들어서는 MP3 플레이어에 노래를 넣어다니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대부분 한국 대중가요를 듣고, 미국 팝 음악을 듣는 사람도 꽤 많다고 한다. 물론 처벌을 받을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단속에 걸려도 뇌물 몇푼이면 해결된다고 한다.
참고로, 2001년에 김연자가 북한에서 공연을 한 뒤로 22곡의 대중가요가 해금되었다고 한다. #
북한에서는 독자적인 12율 반음 음계를 사용한다고 하고,[15] 평소보다 몇 옥타브 높여 부르는 특이한 가창법은 '주체창법'이라 부른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구 공산권 국가들과 교류하던 시절이 있어서인지, 러시아나 동유럽 노래들은 제법 많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 평양에서 "외국 음악"을 이야기 하는 경우 주로 동유럽권의 음악들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으며, 벨라 챠오같은 노래는 일종의 혁명 가요처럼 번안되어 알려져있기도 하다.
국악과 같은 전통 음악의 경우, 나름대로의 악기를 개량하는 등의 변화가 있다. 북한의 국악기에 대해선 북한의 악기 개량 문서 참조.
북한에서는 판소리가 소실되었다. 판소리를 '지주층이 민중을 노예처럼 부릴 때 생겨난 착취예술'[16]이라고 강하게 비판했고, 김일성이 개인적으로도 판소리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남희, 박동실 등 판소리 명창들이 월북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이 끊기고 판소리 인사들도 좌천되거나 지방으로 쫓겨나면서 소실되었다. 그래서 현재에는 당대에 찍었던 영상들을 통해 판소리에 대해 연구하는 수준이거나 간단하게 학습하는 수준이다.

2.4. 대중매체


만수대TV와 룡남산TV에서 간간히 서방영화나 서방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도 한다. 다만 만수대TV와 룡남산 TV는 2017년에 전국방송이 시작될때까지는 1991-94년도의 SBS처럼 평양과 그 인근지역에서만 송출되어왔다. 조선중앙TV를 통해서도 중국 드라마나 러시아 드라마가 수입되어서 방송되기도 한다.

2.4.1. 드라마


북한에도 드라마가 있는데 소설 등지를 원작으로 한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프로파간다적이거나 체제 선전을 위한것이 많다. 대부분 항일 무장투쟁 시기를 다룬 내용이거나 지역 당비서들이 열심히 일해서 직장과 지역을 일으켜 세운다는 내용들이다. 심지어 굉장히 비정치적인 작품들 조차도 어쨌든 극중에 체제선전이나 김씨집안 찬양이 꼭 한번씩은 들어간다. 유투브에 찾아보면 많이 업로드되어 있지만 함부로 올릴 시 코렁탕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생략하며, 제목도 어지간하면 명시하지 않는다. 그래도 참신한 소재의 드라마도 방송될때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드라마들도 계몽성 드라마 형태를 띄고있기 때문에 자극적인 소재를 덜 넣기 때문에 심심한 편이다. 그래도 북한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이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종종있기 때문에 이쪽에 관심이 있으면 볼만하다.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4%가 KBS를 수신한 적이 있고, 응답자 전원이 정기적으로 KBS를 시청했다고 답했는데,[17] 설문조사 대상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강원도나 황해도 출신의 꽤 많은 수가 남한 방송을 수신했음을 나타낸다. 심지어 중국에서 조선족을 대상으로 방송되는 연길TV의 정기적 시청자는 15%였는데, 북한 국영방송을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봤다는 응답자는 14%에 불과했고, 응답자의 절반이 '''국영 방송을 한번도 본 적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는 공통적으로 '''심각하게 재미가 없어서''' 라고 대답했는데, 이미 많은 북한 주민들이 DVD나 USB 메모리로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있지만 그건 북한 방송이 재미없기 때문이지 그걸 본다고 탈북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2010년대 이후로는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6시 내고향 등 여러 KBS 프로그램들을 벤치마킹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남한매체에서도 주목받기도 했다.
북한에서 주로 방영되는 드라마가 계몽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라서 북한내에서도 따오판-USB칩을 통해 남한이나 중국드라마가 널리 퍼지면서 별로 인기가 없어졌는데 2011년쯤 한번은 영화광으로 유명한 김정일이 "우리도 웰메이드 드라마 한번 만들어 봐라." 라고 해서 계월향이라는 역사드라마를 만들었는데, 10화쯤 방영되던 중에 김정일이 드럽게 재미 없다며 때려치우라고 하는 바람에 방영되던 드라마가 중간에 사라졌다고 한다(…). 탈북기자 주성하는 그 얘기를 듣고 유튜브에서 찾아봤는데 1편을 보다가 때려쳤다고 한다(…).
그래도 외국드라마를 수입해서 방송해주기는 하고, 외국영화도 틀어주기는하는데 주로 러시아나 중국쪽 작품을 수입해서 틀어준다. 1980년대까지는 동독, 소련, 폴란드 등지의 드라마를 수입해서 방영해 주던 시절도 있었다. # 중국 드라마도 수입해서 방영했다고 한다. # 마치 7,80년대 한국인들이 미드나 영드를 보며 외국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하듯, 북한 사람들도 이러한 드라마를 보면서 외국의 분위기를 어림짐작 한다고 한다.

2.4.2. 영화



2.4.3. 애니메이션


북한 내의 용어로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아동 영화의 하위개념인 만화 영화로 불리고 있다. 문화어에서의 아동 영화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그들의 교양을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라 정의되고 있다.
북한애니메이션을 전연령을 대상으로 한 매체로 여기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목적 또한 재미보다는 교육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어린이들을 체제에 순응시키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는 셈인데 이렇다보니 아동용임에도 불구하고 프로파간다성이 상당하다. 그러니까 호기심에 찾아보는 것 까지는 좋지만 이런 프로파간다적인 요소가 숨어있다는걸 기억해두자. 프로파간다의 목적 말고 진지하게 작품으로서 내는게 있는지는 불명.
다만 대놓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오지는 않는데 이는 김정일이 만화영화가 '''지도부 찬양에 활용하기 부적합하여 넣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18] 그래서인지 북한에서 제작되는 TV 프로그램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막장성이 적은 편(...). 사실 1950-80년대 남한이나 대만에서도 유독 반공물에 대해 심의가 '''심하게 관대'''했던 시절이 있었다. 똘이장군, 해돌이 대모험같은 반공 애니메이션이나 실화극장이나 지금 평양에선라는 드라마도 당대 심의에 걸맞지 않게 폭력성이 상당했으며(...) 여타 반공 영화나 애니메이션들도 자세히 보면 과연 이 때가 과연 만화나 영화, 방송을 검열하고 길거리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으며 민주화 시위를 하면 잡아가서 고문하던 시절인지 믿기지 않을정도로 수위가 상당했다. 대만에서도 장제스 집권 시절에는 아무리 SM적인 내용이라도 반공관련 내용만 넣으면 통과시켜주던 시절이 있었다. 다만 남한-대만의 경우 민주화 되면서 반공적인 영화나 애니, 드라마들이 그 동안 보여줬던 폭력성-선정적인 장면들로 인해 난타당하고 결정적으로 내용이 위낙에 '''거기서 거기라''' 인기도 없어 제작하는 일이 거의 사라진데 반해[19] 북한은 아직도 독재체제기 때문에 저러한 (북한 입장에서)적군의 악랄함을 강조하는 선전물을 제작할 필요가 있고 이러한 선전물 제작은 시장성을 따지지않기 때문에 수위같은건 크게 따지지 않는 거라고 보면 된다.
가난해서 밥 굶는 북한에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높은 퀄리티로 처음 접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데, 이는 북한에서 국가적으로 밀어주고 있어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다. 잘못 만들면 무조건 정치범 수용소행이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다.(...)
이 애니메이션이 고퀼리티로 느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북한 애니들은 규격적으로 초당 프레임수가 많다. 때문에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쓰는 일본 애니 제작을 하청받을 때 마찰을 빚기도 했었다고 한다. 사실 북한이 정규 풀프레임이 맞고 일본 쪽이 데즈카 오사무의 꼼수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프레임수가 기존보다 훨씬 적어진 것이다. 일본식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주로 보는 사람들의 경우, 프레임이 많은 다람이와 고슴도치가 상당히 부드럽게 느껴질텐데 사실 이런 건 오래 전부터 디즈니톰과 제리 등의 애니메이션에서 이미 해오던 것일 뿐이다.
북한에서 '꿈의 직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원이 잘 되는 편이라고 한다.[20]
또한 김일성이 만화 영화를 비롯한 아동 영화가 ‘매우 감화력이 크고 인식 교양적 지위가 큰 위력한 수단의 하나’라고 교시를 내린 적이 있는데, 애초부터 만화영화가 애들이 주로 보는것이다보니 애들 교육용으로 쓰기 딱 좋다는 판단을 했고 '''하청으로 외화도 벌수있으니''' 나름대로 국가적으로 육성했다. 그리고 북한내 주민들에게도 만화영화에 대해 인식이 우리와는 다른편에 속한다. 아예 교육목적인 '지식 공고화 주제 작품’이란 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각도기로 미군 때려잡는 연필포탄 같은 것(....)[21]이 그 예다. 거기에다가 북한에서 따로 상업방송국이나 상업영화회사가 있는것도 아닌지라 무조건 조선중앙TV를 통해서 방영되기 때문에 일거리도 안정적이다. 즉 애니제작이 일종의 국책사업인 셈이니(교육방송+유튜브에 업로드해 대외선전까지 해야 한다.) 크게 신경써주고 있는 셈. 대신 이 만화의 제작속도가 그때 그때 달라서 빠르면 한주 만에 나올때도 있었지만 느리면 몇 년 정도 걸릴 때도 있다고한다. 물론 해외하청쪽에 사업이 많지 집중되어서 그렇기도 하다. 물리적으로는 국산 만화영화 크게 늘리는게 불가능한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쪼들리는 경제상황상 해외하청쪽에 집중할수밖에 없다보니 국내 만화영화 제작은 적을수밖에 없기는 하다.
주로 아동용으로 사업이 획일화 되어있는 편. 하지만 선전물에 관련해선 과격하고 잔혹한 묘사까지 허용한다. 주로 우화물이 자주 제작된다. 다만 2010년 이후부터 우화물이 줄어들고 대신 역사물이 늘어났는데, 김정은의 지시라고 한다. 애니메이션의 질이 높은 비결은 사실 미술대학 졸업생들 중에 많은 숫자가 애니메이터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어디까지나 인민대중의 위로를 위해 예술이 존재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처럼 순수미술로 먹고 살거나 아니면 개인 작업물을 시장에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 그래서 많은 미술 전공자들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집체창작 제작소에 "취직"하는데,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이 해외 하청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일거리가 많고 급여도 좋아서 꽤 선호도가 높다고 한다.
프랑스 르네 라뤼 감독의 애니메이션 일부가 북한에 하청 준 것으로 유명했다. 사실 남한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 시즌 1도 남북합작으로 제작됐는데, 그림은 대부분 북한에서 그렸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시즌 2부터는 순수 남한 제작으로 바뀌었다.
중국 애니메이션 하청을 물려받기도 한다.

2.4.4. 예능


북한에서는 개그를 '화술소품무대'라 하여 조선중앙TV에서 방송중인데, 크게는 재담, 촌극, 희극교예(슬랩스틱 코미디) 3종류로 나뉜다. 개그맨이란 직업은 따로 없어서 화술조에서 양성된 배우들이 직접 코미디를 하는데, 체제 특성상 최고 권력자와 당을 비꼬는 정치풍자는 불가능하고 주로 사회계몽 등을 목적으로 한 사상무장 수단으로 쓰인다.(참고)

2.5. 만화


북한의 만화는 대개 "그림책" 내지는 "동화 만화"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 이 쪽도 주로 체제선전 목적으로 발간되는 작품들이 많다. 항일혁명 회상기라는 제목으로 김일성의 만주 게릴라 시절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나오거나, 미군과 전투를 벌여서 '''쳐부수는''' 이야기, 남한이나 미국의 간첩을 잡아내는 첩보물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그 외에는 남한의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도 있다. 1990년 작. "썩고 병든 세상" [22]
여담으로 국립중앙도서관 북한자료센터에 많이 비치되어 있다. 궁금한 위키러는 한번 가봐도 좋다.

2.6. 식문화


북한 요리 참조.

북한의 토착 음식 외에도 외국 음식들이 약간 들어와 있다. 평양에는 피자나 스파게티, 햄버거 등 서양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주요 지방도시에도 양꼬치같은 외국음식점들이 꽤 생겨난 모양. 다만 밀쌈같은 일부 길거리 간식류를 제외하면 대개 가격대가 비싸기 때문에 돈주나 당간부 정도급의 상류층이 아니면 아무때나 먹을수있을수 있는 음식은 아니고, 나름대로 고급요리 취급받는다.
북한 내에서 자체적으로 맥주를 제조하고 있다. 유럽식 맥주가 대세로 특히 러시아, 영국식 맥주가 주류를 이룬다. 대동강 맥주는 남한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맥주/북한 문서 참조.

2.7. 기타


북한 정부는 포르노 비디오나 영화를 '부르주아 사상이 가득찬 것'이라 하여 금지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1990년 3월에 당간부와 혁명유자녀 출신 미망인들이 해당 매체를 몰래 보다가 함북 무산광산으로 추방됐고, 1993~1994년경 즈음에 평양외국어대학에서 총장을 비롯해 교직원, 학생들이 비슷한 행위를 하다 30~40여명이 지방으로 쫓겨났다. 물론 공식적으로 들키면 경을 칠 일이지마 남한에서 그렇듯이 몰래몰래보는 경우도 적지 않은듯하다.
평양에도 오락실이 존재한다. 물론 수입산 게임이 절대다수이지만, 사격놀이등 북한식으로 개명해서 디스플레이하는 게임들이 몇몇 있다고 한다. 2010년대 이후로는 중국에서 제조된 각종 아류작 오락기도 들어오는듯하다. [23]
노소텍이 제작한 평양 레이서'''(링크막힘)'''(링크는 영어권 리뷰)라는 '''충격과 공포의 북한산 게임'''이 존재한다. 퍼블리셔는 고려투어인데, 실존하는 북한의 여행사[24]라고 한다. 플래시 게임(...)이긴 하지만 게임 언어가 영어로 된걸로 봐서 해외에 대한 북한 체제 선전용으로 제작된듯 하다. 참고로 해당 링크에서는 '''쓰레기 게임'''으로 분류되어서 리뷰하고 있다.[25]
201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도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면서 폰게임이 유행하고 있다. 다만 남한사람 기준에서 보았을때 게임 명이나 용어들이 웃겨보일때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은 구글 플레이에 있는 거 불법복제해서 문화어로 바꾸고 넣는다.(...)

3. 이름


북한에서는 남자 이름에 ‘철’자를, 여자 이름에는 ‘옥’, ‘순’, ‘별’ 등을 선호한다. 21세기 들어서는 북한 여자 이름의 말미에 ‘이’자가 들어가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크다.

4. 문화 검열


북한의 문화예술은 철저히 국가와 당, 수령의 뜻에 종속되어 있고, 어떠한 변화의 낌새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높으신 분들의 철저한 검열과 통제가 반드시 수반된다. 설령 그 변화가 부정적인 쪽으로 가더라도 그 분들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경우는 없다. '''자기들 밑의 몇 명만 시범 케이스 삼아 어디 무시무시한 곳으로 보내버리면 되니까.''' 가장 알려진 검열기구로는 2004년에 보위부, 보안성 등으로 구성된 비상설기구 '109상무'가 있다. 또 외국소설과 외국노래 역시 금지돼 있으며 외국소설 역시 검열된 것만 읽어야 한다. 보위부와 보안성은 한국 노래나 영상물, 책 등을 찾아내기 위해 불시에 가택수색을 실시하여 적발 후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기도 한다.
북한 정권 초기의 예술가, 문인들은 오로지 김일성과 당의 입맛에 맞춘 작품만 생산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는 소련이나 다른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의 가혹한 통제였다. 예컨대 북한 작가 이기용의 농지개혁을 다룬 은 김일성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이기용은 몇차례나 자아비판을 하고 소설을 다시 써야 했다. 특히 김일성이 마음에 안 들어한 것은 주인공 곽바위의 아내가 곽바위가 감옥에 간 사이 달아나버린 점이라던가 곽바위의 두번째 아내가 지주에게 첩으로 팔려가 남의 씨를 배어 낳았던 여자인 순옥이란 것. 결국 곽바위의 아내는 남편을 버린게 아니라 남편을 기다리다 굶어 죽은 것으로 바뀌었고 전체적으로 수정이 가해졌다. 이기용은 1974년 곽바위같은 혁명영웅에게 '''순옥같은 첩 출신의 중고품을 주다니 이 얼마나 혁명에 대한 모욕인가? 곽바위는 젊고 예쁜 처녀와 결혼해 마땅하다.'''(...) 나의 오류를 지적하신 위대한 지도자 동지에게 감사드린다는 오글거리는 자아비판을 했고 소만일 등의 작가들도 동참했다. 이후 재혼, 조혼같은 주제들은 북한에서 한동안 터부시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엄한 통제와 채찍질만 가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고, 적어도 주류에 편입되어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경우 특정 창작 집단 혹은 공연 집단에 배속되어 거의 평생 동안 일자리가 보장된다. 쉽게 말해 예술가들이 모두 국가에 전속 예술가로 소속되어서 일정 기간동안 작품 몇개를 만들어 내면 대가를 받는 형식이라고 보면 된다. [26] 몇몇 예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재능있는 이들은 공훈배우/공훈예술가, 인민배우/인민예술가, 김일성상 계관인, 김일성훈장 수훈자 같은 굉장히 끗빨있는 호칭을 수여받기도 한다.
물론 이들 집단과 예술인들 또한 모두 국가와 당 등에 예속되어 있고, 항상 당 지도위원(군대정치장교와 비슷함)에 의해 모든 제반 사항이 세세하게 통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술인 대부분의 충성도는 대단히 높은 편이며, 공연 예술의 경우 일단 '기교'는 꽤 먹어주고 들어간다. 1980~90년대 동안 북한에서 내려와 공연한 예술단이나 교예단(서커스단)의 공연은 꽤 화제가 된 바 있으며, 그 동안 대중들은 접할 수 없었던 북한 문화예술의 일부분이나마 체험하고 평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4.1. 문화 검열의 역사



5. 지도자의 교시에 따른 신문화 창작


북한 지도자의 교시에 따라 새로운 문화가 창작되거나 바뀌기도 한다. 북한의 악기 개량, 윷놀이 규칙 변경, 김정일이 창작한 카드놀이 보급[27]등이 있다.[28]

6. 서브컬처


전술했듯, 엄청난 가격이지만 1990년대에도 외국산 '''음란 비디오'''를 암시장을 거쳐 들여온 적이 있는 만큼 간부와 가족들을 중심으로 '외부 문화 콘텐츠'들의 소비가 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시청 시 옥살이는 기본이요 지방으로 추방된다.''' 즉 보는 것도 금지하는 셈.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다고 암암리에 많은 경로를 거쳐 이런저런 문화(?)들을 전파한다.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도 접속한다는 루머도 있다.[29]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북한에서도 프록시를 거쳐 몰래 인터넷 서핑을 한다는 보도가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사실인지는 불명이다.
이미 1990년대에 한국 대중가요가 '연변노래'라는 호칭으로 퍼졌고, 2000년대 이래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크게 퍼져 있어서 중국 국경 인접지대에서는 아예 조선족 상인들을 통해서 직접 공수하거나 연변TV를 통해서 남한(남조선)산 영상물을 직접 접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드라마와 영화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탈북하면 자신도 그런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한국에 오게 됐을때 현실과 창작물의 괴리감에 적응을 쉽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북한에서 중고 컴퓨터 부품들을 사서 조립하여 팔던 한 탈북자는 중국에서 들여온 컴퓨터 하드 디스크안에 한국 영화, 드라마가 엄청나게 많아서 그 안에 있던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팔아서 상당히 돈을 많이 벌었었다고.6분 15초부터 물론 잡힌다면 정치범 수용소에 갈지도 모르지만 돈만 있으면 조선인민군도 구워 삶아서 탈북도 하게되는 북한 특성상 뇌물로 어느정도 커버를 칠 수 있는 모양이다.
중국 거주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 영화가 담긴 VCD는 국경을 드나드는 조선족 상인들이 종종 전파하는 모양이다. 학교에서 자연학습 나갔더니 남녀 중고등학생이 수풀로 들어가 잉야잉야하여 임신했다가 걸린다거나(...) 음란하고 폭력적인 한국 영화가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나 뭐라나. 하지만 뒤에서도 말하지만 '''김정일의 아들부터가'''(...) 이런 영상물들의 가격대가 비싸기 때문에 일반주민들은 쉽게 접하지 못할것같이 보이지만 어차피 일반인들도 장마당에서 벌어들인 부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판인데다가 청소년층도 장마당에서 용돈벌이를 하기 때문에 가끔씩 남한 영상물을 찾아서 친구들이랑 같이 돌려서 보는 경우는 많다고 한다.
여담인데 플레이스테이션3의 성능을 써 사용자들이 그리드 컴퓨팅으로 단백질 연구에 도움을 주는 기능[30]을 켜면 현재의 위치에 빛이 반짝여 다른 유저들도 볼 수 있게 했는데 '''북한에서 빛 하나가 반짝였다'''고 한다(현재 뉴스 기사에 김정철로 추정 중). 근데 잘 보면 '''북쪽에도 불빛 2개가 있다!!''' 청진혜산 쪽인데 여기는 그나마 외부 문물을 구할 수 있는 접할 수 있긴 하지만, 당시 기준 플레이스테이션3을 일반 시민이 가지려면 엄청나게 어렵다. 혜산은 국경 도시라 중국 장백현의 불빛일 가능성도 있다. 장마당에서도 엄처엉엄처엉엄청나게 구하기 드물 것이다. 그리고 잘 눈여겨보면 남포특별시에도 불빛이 미세하게 있다! 평양에서의 불빛은 그래도 김정철이 그나마 백두혈통이어서 플3 정도를 구하기가 쉬웠겠지만 일반 시민이 그러려면 정말로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쪽 무역상이나 외국인일 가능성도 있다.

7. 마약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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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이 아예 일상문화로 자리잡았다. 주요 외화벌이 품목이다. 정치 문제에 깊이 관여한 문제라 객관적 판단이 매우 힘들지만, 현재 북한의 마약 사용 실태가 우려할만 하다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 아편전쟁으로 마약이라면 거품무는 중국에도 판매중. 이 문제는 바로 눈 앞의 돈만 탐낸 북한 정권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
북한은 70년대 중반 지나친 군수산업 확대 및 무분별한 외자도입으로 무역적자가 눈밭 위를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대책 없이 커지고 채무불이행 사태까지 갔다. 이때 북한 정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 보고자 해외공관의 외교관들에게 각자 알아서 수단과 방법에 무관하게 공관운영비를 충당하고 남은 외화를 보호비로 국가에 바치도록 했었다. 이 때문에 외교관들은 외화벌이를 위해 달러 위조나 마약을 생산, 수출(...)해왔으며 그러다 들켜서 해당 국가에서 추방당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마약이 퍼졌는데, 특히 중국 한자어에서 따와서 '빙두', 또는 이를 번역하여 '얼음'이라고 불리는 메스암페타민 종류의 마약(흔히 '히로뽕', '필로폰'으로 불린다.)과 아편이 많이 퍼져 있다고 한다.
사실 북한도 사형, 교화소로 보내는 조치로 이를 해결하려고 하나 그냥 메스암페타민을 박카스 대용으로 쓰거나, 진통제가 없어 아편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 그냥 약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이 문제며, 문제를 자각하고 나서도 자기 합리화를 위해 이를 중독성 낮은 약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메스암페타민도 발명 당시에는 그냥 각성제로 썼고, 아편도 진통제로 쓰였다. 정말 약으로 쓰며#, 탈북 마약 사범 중에는 이게 그냥 약인 줄 알고 유통시키다가 걸린 사례가 있다.
메스암페타민각성제이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면 고양감을 얻으며 피로를 잊고 뇌기능이 활성화되므로 고통과 굶주림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어서 인기가 많으며, 주로 비밀 공장에서 제조되어 각지에 유통되고 있다. 메스암페타민은 북한이 마약을 밀수출할 당시 만들어진 설비에서 대규모로 생산되어 북한 내부로 유통되고 있다는 증언이 있다. 자체적으로 만든 필로폰의 품질이 갈수록 높아지고, 한국 필로폰의 30~35%가 북한산이며, 동남아에도 북한 필로폰이 필로폰 소비를 담당하고 있다는 추정이 있다. 그나마 헤로인 제조 기술이 주민들의 낮은 경제력으로 수요 부족으로 사라졌다는 것이 다행이다. # 이 마약의 투여량은 지역마다 달라, 탈북자마다 북한 주민의 10% 이하가 마약을 할 것이라는 주장부터 90% 이상이 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
아편의 사용도 만만치 않은데, 90년대 이후 의약품이 크게 부족해지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없이 주민들은 민간요법으로 양귀비꽃을 재배하여 끓여먹는 식으로 쓰고 있다.
맨 처음에는 라오스레바논 등의 생산지에서 아편헤로인을 비밀리에 사들인 뒤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써 외교행낭을 거쳐 주로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서유럽 등의 소비지에 재판매하는 방법을 썼다. 이런 불법거래가 수익이 많이 나고 북한 경제가 80년대 들어서면서 더더욱 악화되자 그 해결책으로 밀매물량을 늘려갔다.
하지만 세계 각국이 북한의 행태를 비난하고 단속하자 문제가 생겼다. 자국 내에서 대대적으로 양귀비꽃이나 대마 같은 마약 작물을 재배해 자체적으로 생산했는데 처분할 곳이 없어진 것.
90년대 들어서도 경제가 쪽박을 찰 정도로 몰락하자 당시 북한의 집권자였던 김정일은 "농사가 안 되는 고산지대에 양귀비꽃을 재배하여 외화를 획득하라" 며 내부교시까지 내려가며 마약 작물 재배를 장려해서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양귀비 생산량이 3톤에서 30톤으로 10배나 폭증하는 등 본격적으로 마약 사업을 시작했다. 관련 자료.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이런 마약산업도 북한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잠시동안만 호황을 맞았을 뿐 각국 정부가 좌시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북한산 마약을 단속했다. 특히 주거래 통로였던 중국이 철저했다. 아편전쟁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중국은 마약에 아주 민감해서 그 처벌도 매우 강도가 높다.[31]
이렇게 2000년대 들어 판로가 좁아지자 북한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세계 각국으로 퍼져야 할 물량이 팔리지가 않아서 죄다 북한으로 쏟아졌다. 마약으로 외화벌이를 하려던 계획이 제대로 틀어져서 뒷감당이 곤란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제 외화 좀 벌려고 막무가내로 시작했던 일이 오히려 북한을 옥죄는 족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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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국내에서 일반 주민들이 마약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2005년, 2006년 정도라고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국가 차원에서 아편을 많이 생산하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수출을 위한 생산이었다. 북한 국내에서 마약은 처음에 간부나 돈 많은 장사꾼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0년을 전후로 평범한 일반 사람들도 마약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북한 주민들 2000년대 중반부터 마약 심각
마약에 대한 인식이 낮고, 대체재가 없는 상황이며, 과학자들이 마약 제조 아니면 먹고 살기 어려워 마약이 만연하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이화여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양옥경 교수에 따르면 2014년 3월부터 2016년 9월까지 1467명의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2015년 탈북자의 36.7%가 마약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그나마 직접 마약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마약에 접촉한 경험(직접 투약이나 투약장면 목격)'이긴 하다. 투약장면을 보는 것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2015년 마약 소비의 비율은 2010년에 비해 2.7배나 높아졌다. 또한 2010-2012년 사이 탈북자들의 13.6%가 마약을 했다고 밝혔다. ##
북한인권정보센터(NKDB)는 2016년 기준으로 평양에서 0.8~1g 당 대략 30~40달러, 다른 지역에서는 100위안(미화 약 14.5 달러)이고, 여기에 100위안은 ‘고정 가격’으로 더해진다고 한다.
함경북도 청진시 출신 여성 탈북자는 빙두의 가격이 2006년의 1~1.5kg 상당의 쌀 가격과 비슷하다고 증언했다. 어린아이들과 10대들까지도 마약을 사용하고 있으며 ‘성별, 직업, 경제 능력,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마약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는데, 장마당이 많아지면서 여성들의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의외로 남성보다 여성들이 많이 한다. 특히 평양의 메스암페타민 소비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는데, 탈북자의 말에 따르면 “평양 사람들은 메스암페타민은 안하는 사람을 두고 ‘머저리’라고 부른다”라고 한다고..
필로폰을 하면서 일어나는 범죄도 심각하며 원나잇 스탠드는 물론 심지어는 강간에 근친상간까지 일어나서 수많은 사생아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각성 상태가 너무 심해 수면제가 필요해지는 부작용도 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필로폰이 그냥 약이 아니라 뒤늦게 무서운 마약이라는 것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실제로 이렇게 마약을 가볍게 생각한 탈북자들이 조직적으로 마약 밀매를 저지르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뉴스(유튜브) 심하게는 필로폰에 취해 출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어린이들까지 마약을 접하자 마약 중독인 부모들이 자식들이라도 구제하려 탈북을 종용하는... 그런데 탈북 자체가 북한에서 일부 지역만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 다른 지역에서는 탈북 종용도 힘들 수 있다. 2천만이 넘는 북한 인구 중 3만명 가량이 탈북하여 한국에 정착한 상황이다.
통일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면 북한에 만연한 약물남용은 심각한 문제이다. 필로폰 투약을 범죄가 아니라 약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마약', 특히 필로폰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어서 고위층이나 청소년들에게도 마약이 퍼져 있고 식량보다 마약을 구하는 것이 더 쉬울 정도이며, 마약을 부조금 대신 선물로 쓰기도 한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고급 식당에서 대놓고 디저트로 필로폰을 판다는 보도가 있다.
남희석이 진행하던 방송에서 마약 문제를 증언한 탈북 여성이 있는데, 그녀도 "힘이 들 때면 가끔 북한에서 맞았던 아편이 생각난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방송에서는 유머로 웃고 넘어갔지만 북한 출신에 대한 혐오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처럼 마약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모습을 보면 더 그럴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북한 놈들은 약쟁이라는 글도 간간히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남한과 어울리지 못하고, 다시 이것이 마약에 대한 인식 개선을 늦추는 악순환이 이어질 우려가 있다.
다만 탈북자인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실제 탈북자들은 그나마 한국에 오면 의식주는 보장되기에 북한에서 많이 유통되는 필로폰은 담배보다 끊기 쉽다는 주장을 한다. # 남한 경쟁 사회에 비교해보면 북한의 사회가 훨씬 끔찍하므로 그나마 낫다고 한다. 그런데 탈북자의 대다수가 마약을 끊는다는 것이지, 탈북자 중 마약사범이 전체 탈북자의 0.15%, 일반 국민은 0.02%다. 이것을 북한 인구에 대입하면 남북한 마약 사범 중 북한 출신이 남한 출신의 3~4배가 된다는 것이며, 그나마 탈북자도 남한 교육 환경과 생활 환경이 좋아서 약을 끊을 수 있게 되는 경향이 있어 주의가 없으면 북한 출신이 약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가능성이 높다. # 근본적으로 북한 정부의 잘못이 고스란히 주민에게 뒤집어 씌어지는 고달픈 운명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8. 교육


현재 북한은 초·중등교육에 명목상 12년제 무상교육제도를 편다. 이 무상교육제도는 학비 뿐만 아니라 학용품, 교복과 같은 소비품, 급식 및 식료품, 교재, 교통비 등등을 모두 주는 식이었고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시스템이 그럭저럭 굴러서 중등교육 대중화가 남한보다 10여년 일찍 이루워졌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배급을 비롯한 각종 사회복지제도들도 일시에 무너지면서 무상교육제도의 체계도 많이 허물어졌다.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경제가 어느정도 회복되고나서도 완전 복원은 이루워지지 않고 있다. 이 무상교육연한은 원래 11년이었다가 최근에 12년으로 연장했는데 북한 주민들은 오히려 학교만 1년 더 다닌다고 불평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호응을 받겠지만, 북한처럼 먹고 사는 것이 근본적인 생존의 문제라면 일할 기간이 중요해 문제가 다르다.
현재 대한민국이 아는 북한의 교육은 북한의 실제 현실과는 많이 다르며, 이러한 차이점은 북한의 교육 분야에 종사했던 탈북자나 북한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탈북자들이 알린다.

8.1. 초·중등 교육



8.1.1. 일반 학제


북한의 학제는 학교 전 교육 과정(유치원[32])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이다.[33] 그런데 북한의 교육은 '교육'도 있지만 사상적 주입식 교육도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 시기에는 고등중학교-중학교라는 명칭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쳤지만 김정은 정권대에는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교육연한을 늘리고 중학교를 초급중학교와 중동중학교로 분리시키며 남한과 비슷한 체계로 교육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친 바 있다.
북한의 초·중등학교의 특징은 한 사람이 한 학교에 입학해서 만난 담임은 졸업할 때까지 간다는 것이다. 또한 담임을 고정한 만큼 교사의 전근 제도가 없다. '''즉 한 교사가 한 학교에 발령을 받으면 은퇴할 때까지 그 학교에 근무한다는 뜻이다.'''
탁아소 제도가 잘 갖추어져있으며 특히 주간 탁아소의 경우에는 직장인 여성의 부담을 크게 줄이고 보육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지만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탁아소 대부분이 돈을 받게 되면서 부담이 커지게 되었다. 당연히 유치원도 잘 갖추어져있지만 역시 부담이 가는 편이다. 한편으로는 '''유치원에 입학하자마자 김일성과 김정일에의 세뇌 교육을 시작한다.''' 북한의 모든 유치원에는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 모형이 있어서 유치원때부터 이 모형을 활용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탄생에 대한 우상화 교육을 받는다.
소학교에 입학하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의 어린 시절', '경애하는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어린 시절', , '공산주의 도덕', '국어', '수학', '사회', '자연', '음악', '체육', '미술', '로작'[34] 등 총 12과목을 공부한다. 이 중에서 중요한 과목은 단연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父子) 관련 과목이다. 최근에는 일반 중학교와는 다른 특수 중학교를 부각하면서 이러한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예술, 외국어, 과학 등의 과목도 점점 중요시한다고. 수학 문제도 남한과 확연히 다른데 8-5=3을 남한에서는 ‘팔 빼기 오는 삼’이라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여덟 덜기 다섯은 셋’이라고 한다,
초급 중학교에 입학하면 소학교의 과목에서 더 확장해 총 23개 과목을 공부한다. 이 시기 때는 소학교에서 배운 김일성, 김정일 부자 관련 과목뿐만 아니라 '현행 당 정책' 등과 같은 북한의 정책에 관한 것들도 배운다. 초급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급 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런데 이 초급 중학교와 고급 중학교는 학교급제는 다르지만 보통 같은 건물 안에 함께 있다. 원래는 이 초급 중학교와 고급 중학교가 고등중학교로 묶여 있다가 나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특이하게 과학 과목 중 지구과학이 없는데, 지리 과목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을 배운다.
이 고급 중학교에 입학하면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갈지, 전문학교에서 기술이나 실무적인 기능을 배울지, 대학에 입학할지를 결정한 뒤 공부한다. 외국어의 경우, 소련이 건재했던 당시에는 러시아어가 제 1 외국어의 지위를 가졌지만 현재는 영어로 완전히 옮겨진 상태이다. 대한민국과 달리 영국식 영어를 가르친다. 그리고 중국어의 선호도도 높은 편이다. 교재에는 남한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고급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을 가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편인데, 이런 방식으로 입학한 학생을 직통생이라고 한다. 직통생은 대학 입학자의 15~3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만일 이렇게 직통생으로서 대학을 못 가면 짤없이 군대를 가야 하니 북한에 재수생이라는 개념은 없다. 당 간부 자녀라도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 군대를 간다'''.[35] 그렇다고 해도 딱히 직통생들이 부럽다고만 할 수는 없는게, 북한에서는 대학생들도 군대생활과 맞먹는 단체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편하고 안 편하고는 출신성분이 결정할 일이지, 직통생이냐 아니냐는 그닥 의미가 없다.

8.1.1.1. 관련 문서


8.2. 고등교육



8.2.1. 대학 입학


북한의 대학 입학은 크게 고급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험 성적으로 진학하는 경로와 고급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나 직장에가서 일정 기간 근무하고 진학하는 경로, 당의 방침에 따라 진학하게 되는 세 경로로 나뉜다.
먼저, 시험 성적으로 진학하는 경로는 '예비시험 - 추천 - 본고사'의 단계를 거친다.
고급 중학교 2학년 말이 되면,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서 별도의 학급을 구성해 3학년으로 진학시킨다. 이 학급은 대학이나 고등전문학교[36] 진학을 준비하는 학급이다. 이 학급의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수능과 비슷한 '대학추천을 위한 예비시험'에 응시한다. 이 시험은 1983년부터 실시되었는데, 혁명역사, 문학, 수학, 화학, 물리, 영어 교과로 구성되어 있고, 전부 객관식 시험이다. 도입 초기에는 대한민국의 예비고사처럼 암기 위주의 시험이었지만, 1996년 대한민국의 수능 시험에 대응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수능과 같은 형식으로 마개조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의 교육과정 역시 암기 위주의 교육에서 논리력, 사고력, 이해 중심으로 마개조되었다.
이 예비시험은 10월에 실시되며, 그 결과에 따라 어떤 대학에 갈 수 있을지(추천 받을지) 대충 윤곽이 드러난다.
예비시험 문항의 형식은 대한민국의 수능과 비슷하나 난이도는 훨씬 어렵다. 1996년 교육과정이 개정되면서 북한은 주입식, 암기식 교육의 기본 토대 위에서 논리력, 사고력, 이해중심 영역을 강화시켰다. 실제로 예비시험 문항에는 다양한 개념을 복합해야 하거나, 고도의 형식논리를 알고 있어야 수월하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상당수 출제된다. 쉽게 이야기해서 암기와 논리적 사고력 이 둘을 모두 갖춰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예비시험의 성적이 나오면 교사와 학생이 의견을 모아 진학할 대학, 전문학교를 3개 정도를 지망 순위를 정한다. 흔히, 북한에서 대학 진학 시 학생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한에서 학력은 직업, 사회생활, 당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대학 진학 결정 시 오히려 학생이나 학부모의 의견이 최대한 수렴되는 구조이다. 이렇게 지망 순위가 정해지면 학교에서는 학생의 출신성분이 포함된 인적사항, 고급 중학교의 성적, 예비시험 성적 등을 기입한 추천 조서를 도 교육국에 내신한다. 도 교육국은 각 도에 할당된 대학, 전문학교 정원에 따라 내신 받은 추천 조서를 보고 가추천을 한다. 이 가추천은 예비의 성격으로, 교사와 학생의 의견에 따라 조율, 수정을 거칠 수 있다. 조율과 수정을 거치면 도 교육국에서는 확정 추천을 공고한다.
이러한 추천 과정은 대학, 전문학교의 '''본고사 응시에 대한 추천'''으로, 실질적으론 원서 지원과 같다. 대한민국식으로 따지자면 원서 지원을 할 때 교사나 교육청의 제한을 받고, 대학과 전문학교 각각 한 곳에만 지원할 수 있는 셈이라 보면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추천 과정에서 당연히 지원자의 출신 성분이 고려되며, 출신 성분이 매우 좋지 않은 학생을 교사와 학교가 억지로 대학 추천 조서를 밀어 넣어도 교육국에선 반려할 권한이 있다. 다만,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고 무조건 대학, 전문학교 진학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출신 성분이 나쁘다면 그것을 만회할만큼의 성적을 얻으면 된다. 탈북자 가족이 있는 가정과 같이 출신 성분이 최하위 급인 가정에서 자란 학생이 만점에 가까운 예비시험 성적을 얻어 중앙대학에 추천되어 합격한 사례도 상당 수 있다. 실제로 북한 중등교사 출신 탈북자들은, 출신 성분이라는 것이 점수화되어 있으며, 대학 추천 조서 내신 시 점수화된 출신 성분을 고려한다고 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출신 성분이 우수하면 시험 성적이 약간 낮아도 추천을 받을 수 있고, 출신 성분이 나쁘다면 그만큼 만회할 성적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추천을 받으면, 제로 베이스에서 본고사를 보게 된다. 추천을 받았다는 것은 교육당국에서 어느 정도 사상, 당성, 출신 성분을 보증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신원 조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본고사의 형태는 대학마다 다르며, 보통 혁명역사, 수학, 외국어(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독일어)는 공통적으로 포함된다. 대학이나 선발단위에 따라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해당하는 교과들이 포함되기도 한다고 한다. 본고사는 과목 당 2~3문항의 논서술형이고, 일부 대학은 면접 고사도 있다.
예비시험이 도입된 1983년 이전에는 위와 같은 성적 위주의 대학 진학 방법이 없었다. 즉, 추천이나 당의 방침에 의해서만 신입생을 선발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성적 요소가 아예 배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무적 판단이 결부되기에 대학 입학 자격은 북한의 기득권층 위주로 분배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성립 초기부터 이러한 제도가 지속되자 1970년대 초반 대학 교육의 질이 급격히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대학 강단 내에서 학업 성적 위주로 신입생을 선발해야 대학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커졌다. 이러한 여론을 잘 정리하고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보고한 이가 바로 황장엽이다. 당시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었는데, 학업을 멀리했던 제대군인이나 직장인들이 출신성분이 좋다는 이유로 입학생의 다수를 차지하고, 학업 성적은 좋지 못한데도 강의실에서 군림하는 모습을 매우 좋지 않게 봤다고 한다.
위와 같이 시험 성적으로 대학을 가는 것은, 전체 대학, 전문학교 입학자의 30% 정도에 해당한다. 다만, 북한의 교육제도 특성 상 전체 중등학교 졸업자의 20%정도만이[37] 대학과 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30%만이 성적 위주로 대학에 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전체에서 최소 상위 7~8% 이내에는 들어야 대학이나 전문학교 진학을 꿈꿔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한 대학의 본고사에만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진학의 난이도는 더욱 상승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은 본고사를 다른 대학에 비해 2주 일찍 실시하는데, 김일성종합대학 본고사에서 불합격한 학생은 다른 대학의 본고사에 한 번 더 추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김일성종합대학은 고사하고 중앙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선 왠만큼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도 내에서 순위권 안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방의 군 단위에서는 10년에 한 번 꼴로 김일성종합대학 합격자가 1명 나올 정도로 입학이 어렵다[38]. 이처럼 성적 위주로 단 한 번에 대학, 전문학교 입시를 통과한 이들을 '''직통생'''이라 부르고, 수재로 여겨지며, 집안의 자랑거리로 여겨진다. 오죽하면, 뜬금 없이 2018년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리선권이 자신의 자녀도 아니고 조카가 직통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고 자랑을 했겠는가. 이는 북한에서 성적 위주로 직통생이 되어 대학에 간다는 것은 출신성분이나 사회적 계층과 무관하게 대단히 어려운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직통생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출신 성분이나 부모의 사회적 지위 따위와는 관계 없이 짤 없이 군대에서 10년간 의무 복무하게 된다.'''
하지만 의무 복무 기간에도 사회의 직장 추천이나 대학 추천을 받으면, 이후의 군 복무는 직장과 대학에서 하는 걸로 간주한다. 즉, 의무 복무 기간 중 추천 여하에 따라 직장에도 갈 수 있고 대학에도 갈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추천은 군 복무 기간 3년 이후 복무 평정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이 평정이지, 북한 내부 사정 상 이 게 공정하게 이루어질리가 없다. 부모의 영향력이나 금전적 대가를 통해 추천이 이루어진다는 증언이 주를 이룬다. 군에서의 대학 추천은 위 성적 위주의 추천과 달리 확정된 입학 정원만큼을 할당해 추천 받기 때문에 별도의 시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입학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추천은 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직장에서도 있으며, 군-직장-대학 테크를 밟는 경우도 상당하고 한다. 이러한 추천 입학생은 전체의 40%가량에 육박한다.
위의 추천 입학과 비슷한 맥락에선 '''방침 입학'''도 있다. 즉, 조선로동당의 방침에 의해 입학하는 것이다. 북한의 대학 역시 당의 통제 아래 있으며, 다른 사회 조직과 마찬가지로 대학내에 당 조직이 구성되어 있다. 이 방침 입학은 본래, 북한 내의 사회적 소수자(동요계층, 적대계층)을 대학에 보내 북한의 주류 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한 선의의 제도로 시작된 것인데,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일부 언론에서 '1000달러를 주면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라는 식이 바로 방침 입학이다. 그러면 이렇게 돈을 주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북한 제도 내에서 불법이냐? 그것도 아니다. 아예 '누군가 외화난을 겪는 당에 외화를 충성으로 기탁하고, 당이 그것에 대한 사의의 표시로 대학 입학을 시켜주었다'라고 공식 발표해버린다. 즉, 대학 입학마저도 북한에선 당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침 입학이 변질되기 전까진, 방침 입학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인원이 매해 많아야 100명 내외였으나, 지금은 전체 대학 입학생의 30%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비율이 늘어났다. 여하튼, 이유가 어찌되었건 당에서 방침을 주면 대학은 정원 사정과 관계 없이 무조건 입학생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요새는 아예 대학에서 방침 입학생을 받기 위한 정원을 비워놓는다고 한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성적 위주로 대학에 진학하는 직통생은 전체의 30%, 군이나 사회에서 추천으로 입학하는 인원은 40%, 방침 입학이 30%가랑이 된다.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좋은 가정의 학생들은 직통생으로 대학에 가면 큰 영예이긴 하나, 출신성분을 활용한 추천이나 방침 입학의 경로가 훨씬 넓기에 학습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죽도록 공부하기 보단, 고급 중학교 졸업 직후 군에 입대해 부모의 사회적 후광을 이용해 근무 여건이 좋은 부대에서 편한 보직에 있다 대학에 들어가는 편이 훨씬 편하다. 또, 사회적 지위는 그리 높지 않으나 대외 무역이나 장사를 통해 외화를 많이 벌었다면 그 경제력을 이용해 방침 입학을 하는 길도 있다. 결국 출신 성분도 나쁘고 돈도 없다면 공부밖엔 없는 것인데, 생계 유지가 어려운 가정이라면 공부에 전념하기 힘들어, 도리어 성적으로 대학을 가는 학생들도 대부분 기득권 가정 출신인 것이다.

8.2.2. 북한 내 대학


북한의 대학 중 김일성종합대학은 대한민국에도 잘 알려진 대학으로 대학 명칭에 김일성의 이름이 돋보인다. 그 밖에도 김책공업종합대학이나 김형직사범대학[39] 정도는 북한에 교양이 있으면 알 만한 대학이다. 실제로 김일성종합대학의 인지도는 대한민국 안에서도 상당히 높은데 북한 관련 교육을 전혀 안 받은 사람들도 '북한의 대표적인 대학은?'하고 물으면 대개 '김일성대학'이라고 빠지지 않고 대답한다.
이처럼 김일성종합대학이 대한민국에까지 잘 알려진 것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달아서'''라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북한 내 최고 유력 대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흔히 대한민국에선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면 미래가 보장된다', '북한 안에도 학벌이 있다'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탈북자들 중 고등교육을 거친 이들은 이를 부정한다.
일단 북한에는 대학 동창, 동문 개념이 없다. 북한에서는 사전에 허가를 안 받은 모든 모임, 결사체를 불허하며 이러한 조직을 만들면 보통 종파로 간주한다. 그래서 ○○대학 '''동문회를 열었다간 강제 수용소행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같은 학벌 풍조가 거의 없으며 누가 무슨 대학 후배니까 끌어준다는 식의 문화도 실제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김정일이 후계자 시절에 학벌 풍속을 박멸시키라고 교시한 바가 있어, 학맥으로 밀고 당기기를 했다간 큰 화를 겪는다고 한다. 김정일은 자신이 정권을 잡자 자신과의 친소관계를 쓸 수 있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대학 동문들을 다 퇴직시키거나 한직으로 전보도 시켰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 시기 들어 정권이 안정되자, 김정일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정일의 대학 시절 이야기나, 대학 동창들을 출현시켜 김정일의 위대성을 알리는 식의 정치 선전이 점증하고 있다. 동문 개념이 전무한 북한 사회에서 이러한 정치 선전은 특기할 만한 것으로, 김정일이 명문 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을 다닐 때도 비범한 인재였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립대 개념과 비슷하게 중앙대학이 있다. 이 중앙대학은 중앙(평양)에 있는 대학이 아니라 중앙(교육성)에서 관할하는 대학이라는 뜻이다. 중앙대학은 국가적인 관리와 투자가 따르니 지방에 있더라도 상당한 명문 대학으로 손꼽힌다.
지방 소재의 유명한 중앙대학으로는 정준택 경제대학, 원산농업대학[40], 희천공업대학, 평성리과대학[41], 함흥(흥남)화학공업대학[42], 함흥수리 동력대학[43], 함흥의학대학[44], 청진광산금속대학 등이 있다. 이들 지방 소재 중앙대학의 입학 성적은 평양 소재의 대학들과 대동소이하며 이러한 대학을 졸업하면 중앙 기관이나 최소한 도급 기관에 배치를 받는다.
평양 소재의 대학의 상당수가 중앙대학이며 평양시 교육국의 감독을 받는 지방대학도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이 대표적인 평양의 중앙대학이며 평양외국어대학, 김형직 사범대학, 평양철도대학, 평양기계대학, 평양건축대학, 조선미술대학, 평양음악무용대학, 조선체육대학 등이 중앙대학이다. 평양시 소재의 지방대학에는 김철주 사범대학, 평양교원대학, 평양경공업대학, 장철구 평양상업대학 등이 있다.
많은 탈북자들에 따르면 한국에서 알려진 소위 '김일성종합대학 지상주의'는 북한의 대학 시스템을 곡해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대학의 입학도 중요하지만 대학 졸업 뒤 배치 받는 직장이 입학보다 더더욱 중요하니 자신의 출신 성분이나 집안 배경을 고려해 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다고. 즉, 그러한 자신의 배경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좋은 대학에 가면 졸업 이후의 진로가 문제라 오히려 인생이 꼬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북한에서는 대학 입학 이전에 지원 단계부터 자신의 진로를 고려한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부모가 고위 간부인 사람과 부모가 지방의 농부인 사람이 '''간부 양성 자체가 궁극적 목적인 김일성종합대학을 입학해 향후 직장 배치를 받을 때 엄청난 차이가 난다.''' 부모가 고위 간부인 사람은 부모의 도움으로 정부 기관이나 좋은 기업소에 직장 배치를 받겠지만 부모가 지방의 농부인 사람은 직장 배치 시에 부모의 힘을 전혀 못 빌리니 최악의 상황에선 직장 배치를 못 받을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실업자가 없어야 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이러면 인간의 대접을 못 받는다는 뜻이다.''' 더욱이 북한에서 대학씩이나 졸업한 사람이 직장 배치를 못 받는다면, 인간다운 삶을 못 산다라 볼 수 있다. 부모가 농부인 사람은 오히려 현실적으로 북한 안에서 공부로 승부할 이공계통[45]으로 진학해야 오히려 미래를 위해 좋다.
한때 북한의 대학 시스템은 구 사회주의권의 것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중요하고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는 대학을 '종합대학'이라 칭하고, 나머지 대학은 (단과) 대학 형식으로 운영했다. 이 시기 공식적인 종합대학 명칭을 가진 곳은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개성성균관경공업종합대학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 대학 중 '종합대학'이라고 하면 단연 김일성종합대학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김일성종합대학만이 인문사회계 및 자연공학계열에 걸친 여러 학문단위를 가진 대학이기도 하다.
하지만 2015년 말부터 위와 같은 명칭 시스템은 완화되었고, 2016년부터는 영문 상 University로 표기할 수 있는 대학은 모조리 종합대학으로 칭하고 있다. 기존의 평양건설건재대학이 평양건축종합대학으로 바뀌었고,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도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서양식 대학 체계를 보고 배운 김정은이 기존의 사회주의권 대학 체계는 부자연스랍다고 느껴 이처럼 시스템을 갈아치운 것과 같이 보인다.
하지만 이름을 종합대학이라 쓴다해서 그 학교들이 기존의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과 같은 조직과 규모를 갖추는 것은 아니다. 특히,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은 북한의 모든 고등교육을 관장하는 고등교육성[46]의 고등교육상을 겸직하므로 그 위상 자체가 다른 대학과 넘사벽이다.
2019년 들어서는 위와 같은 변화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 많은 고등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고 기존의 대학은 종합대학화하고 있다. 이러한 승격 개편 과정에서, 고등교육기관이 도시에 집중된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시 단위에 소재한 학교를 군 단위로 이전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각 고등교육기관의 규모를 늘리고 정원도 대폭확대하여 대학 진학율을 높이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더욱이 8월에는 각 도에 종합대학 하나씩을 설립하는 계획이 발표되었는데, 이 종합대학은 기존의 김일성종합대학의 규모에 준하는 것이어서 북한의 교육 지형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처럼 고등교육기관의 확대를 위해 박사원 정원도 확대하여 대학 교원 수급 역시 안정화하겠단 계획도 발표했다.
이는 기존의 경직된 고등교육체제에서 탈피하고, 고등교육 수학 인구를 늘려 국가 경쟁력을 높여 보겠단 시도로 보인다. 이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 대한민국에서 대학 정원이 급속도로 확대된 것되 비슷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8.2.3. 사범 교육


북한에서 교원 양성 교육인 사범교육은 고등교육 단위에서 실시된다. 크게 김형직사범대학, 사범대학, 교원대학으로 이뤄져 있다. 사범대학과 교원대학은 모두 지방대학으로, 각 시/도의 교육위원회 산하에 있다.
중등교원은 사범대학에서, 유치원 및 초등교원은 교원대학에서 양성한다.
김형직사범대학은 일반적인 사범대학과 다른 대학으로, 내각 교육성 직할의 중앙대학이다. 이 대학은 전국의 사범대학과 교원대학의 대학교원(교수)를 양성하는 것이 주 목적으로, 대학교원 임용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평양시 내의 중등교원으로 임용된다. 이 대학 졸업만으로도 대학교원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김형직사범대학과 평성사범대학과 같은 일반 사범대학과는 위상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9. 관련 문서



10. 관련 자료



[1] 사실 이건 존 하지 미군청장의 삽질때문이었다.[2]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대표작가였고, 해방정국 때 월북한 뒤 한국전쟁 내내 조선인민군에 종군했지만, 임화 자체가 워낙 다다이즘부터 맑시즘까지 다양한 영향을 받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문화 통제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로, 박헌영 리승엽 간첩사건에 휘말려 사형당한다.[3] 이 운동의 여파는 도서정리사업의 전조가 된다.[4] 'XX를 하지 말라!' 와 'XX만 하라!' 의 차이는 엄청나다.[5] 심지어 자기를 왜곡하면서 비하하는 드라마인 지금 평양에서도도 가끔씩 시청해서 연기력을 비평하기도 했다.[6] 물론 찾아보기만 한다고 문제는 없다. 북한 정권이나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 자료를 보고 내용을 공유/전파하지만 않으면 이적행위에 해당되지 않아 국가보안법에 처벌받지 않는다.[7] 이상우, '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 을유문화사, 1990, pp284-285[8] 북한 최초의 팝스 오케스트라다![9] 한 외국 유튜버가 모란봉악단을 북한의 블랙핑크(...)라 소개하며 둘을 비교하는 영상도 있다.[10] 한 평양예술대학 출신 탈북자는 섹스 피스톨즈를 평양에서 들었다고 이야기 했다. [11] 장진성의 탈북수기 '경애하는 지도자에게'에서 따옴.[12] 참고로 김정일은 살아 생전에 남한TV방송도 종종 봤던것으로 알려져있다, 심지어 지금 평양에선이라는 반공드라마도 가끔씩 시청해서 연기를 호평했다는 후문도 들려온다. [13] 참고로 이 노래는 인민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고 한다.출처[14] ...아니면 노래를 부르다 잡혀가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가사를 바꾼 것일수도 있다. 일단 좋은 노래라서 부르고는 싶은데 체제 찬양 가사로 바꿔버리면 딱히 트집 잡을게 없으니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이 노가바를 통해서 체제 비판을 했던것과 정 반대의 상황(...).[15] 이상우,'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을유문화사,1990,p286[16] 웃긴 건 그 판소리 가운데 가장 유명한 춘향전(춘향가)는 '''봉건 지배층에 대한 인민의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고 호평을 받아 가극으로도 몇 번이나 각색되었다.[17] 심지어 김정일도 KBS를 자주 봤다고 하는데, 왜 KBS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국영방송이 익숙해서"(...)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남한 동향파악을 위해 KBS를 시청했지만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까지도 같이 시청하면서 애청자(?)가 된듯하며 심지어 자기를 비하하는 지금 평양에서는이라는 드라마를 보기도 했다.[18] 일단 북한의 수령과 그 족속들을 다루는 예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근엄, 위엄, 엄숙으로 장식해야 한다. 그런데 김정일 눈에는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근엄함과 거리가 있어 우상화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것으로 보인다. 애니 산업이 전연령이 아닌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그렇고...[19] 다만 아예 사라진건 아니고 국방부에서 간간히 홍보영화를 제작하기는 하다.(배달의 기수) 군부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1980년대 당시에는 TV로도 상영을 했고, 영화를 틀어주기전에 반드시 상영을 하도록 강제했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TV나 영화 상영이 폐지되고 국군TVKTV에서나 간간히 틀어주는 수준으로 전락했다.[20] 종사자들에겐 쌀, 소고기 등의 포상을 주기도 하며 군대도 면제시켜준다고 한다.[21] 『북한 애니메이션』, 이대연 · 김경임, 살림[22]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읽어보면 알겠지만, 포스팅 내내 혀를 끌끌 차고 있고 문제의 여자 캣파이트 경기 장면에서는 '''지랄하네'''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에 20년 전의 넷 우익의 대선배라고 평하는 건 덤 (…) .[23] 북한의 선전용 오락실에서 댄스게임을 플레이하는 기사가 올라온적이 있는데, 중국에서 제조된 게임으로 추정됨.[24] 단 실제 소재지는 중국.[25] 하단의 관련 기사 링크는 더 가관이다. 메가드라이브판 액션 52의 레이싱 게임과 DRIV3R, '''빅릭스'''를 추천하고있다.[26] 김정일은 그래서 '''남조선의 예술가들은 알바를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데 우리는 국가의 영도 하에 먹고 살만한 환경에서 창작을 하니 우리가 더 최고다'''라고 주장한다. (...) 완전 팥 없는 팥빙수.[27] '''재미가 없어 흑역사'''가 되었다. [28] 사실 봉건사회였던 일본에서도 쇼기의 규칙이 천황의 명령에 따라 바뀐 적이 있지만 말이다. [29] 미국의 경제 및 무역 제재를 받는 국가의 접속을 허용하면 법 위반으로 벌금이 나올 수 있으니 블리자드에서는 몇몇 국가의 IP를 막아 자사 게임 접속을 못하게 한다지만 바로 다음 문장에 적힌 VPN 등의 방법을 쓰면 IP를 속일 수 있다.[30] 이 애플리케이션의 명칭은 folding@home이라고 한다.[31] 특히 중국도 북한만큼 마약중독자가 250만이 넘을 정도로 심각하다.[32] 높은 반만 해당. 북한 유치원의 낮은 반은 의무교육이 아니다.[33] 개정 전에는 유치원 높은반 1년 (낮은반 1년은 의무교육 범위가 아니다.), 인민학교(소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중등학교 4년 + 고등학교 2년) 체계였다.[34] 勞作. 사회주의 노동자들에게 특화된 도덕(혹은 일반사회)과목이라 보면 된다.[35] 당 간부 자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래야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 죽어라고 공부하는 대신 좋은 부대에서 좋은 보직으로 3년의 군 생활을 하면 대학 입학 추천을 받을 수 있어서다.[36]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으로 보면 된다.[37] 사실 1990년대 중반 이전의 남한의 대학진학률도 정원제한을 걸어놓았기 때문에 이 정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에도 정원제한을 걸어났음에도 대학에서 알음알음 정원을 늘린데다가 대학 입학을 위한 사교육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자 문민정부 들어 대학설립 자율화와 정원제한을 완전히 없애버린덕에 대학진학자수가 급속히 불어나면서 대학진학률이 북한과 천지차이로 차이가 나게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38] 북한은 도농 간 교육 격차가 극심해서, 지방의 큰 도시와 군 단위의 농촌과 대학 진학자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진다. 함흥, 청진과 같은 대도시 지역에선 매년 수 천 명의 대학, 전문학교 진학자를 배출하지만, 낙후된 군 단위에서는 대학, 전문학교 진학자가 한 자리수에 그친다.[39] 탈북시인 최진이가 나왔던 대학.[40] 원래는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였다. 한국전쟁 중 대학이 공중분해하자 원산으로 내려갔었는데 휴전 뒤에도 그냥 원산에 눌러앉아 독립했다.[41] 북한에서 자연과학 분야의 최고 수재들이 가는 학교이다. 학생 선발 과정에서 성적뿐만 아니라 실제 지능 지수도 고려할 만큼 고르고 골라서 인재를 선발한다.[42] 이승기 박사가 설립한 대학[43] 이 대학은 한때 관개농업으로 아시아 전체에서 유명한 대학이었다.[44] 북한 최고의 의과대학 중 하나이다. 흔히들 북한 최고의 의과대학 하면 김일성종합대학 부속 의학대학(평양의학대학)을 생각하지만 만수무강연구소의 연구원을 다량 배출한 대학이 함흥의대이고, 북한 내 1급 의사들의 출신학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학교가 함흥의대이다. (북한에서는 의사들의 실력을 정기적으로 검정하여 1~5급까지 등급을 부여한다.)[45] 북한 안에서 그나마 사상 측면에서 자유롭고 해외 유학의 길이 열리는 분야이다.[46] 대한민국으로 치면 교육부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