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제

 


'''
英宗
영종 정통제
'''
'''묘호'''
'''영종(英宗)'''
'''시호'''
법천입도인명성경소문헌무지덕광효예황제
(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
'''연호'''
정통(正統) / 천순(天順)
'''성'''
주(朱)
'''휘'''
기진(祁鎭)
'''생몰 기간'''
1427년 11월 29일 ~ 1464년 2월 23일(38세)
'''재위
기간
'''
'''1차
(정통)
'''
1435년 2월 7일 ~ 1449년 9월 1일
(14년 206일)
'''2차
(천순)
'''
1457년 2월 11일 ~ 1464년 2월 23일
(7년 12일)
'''부황'''
주첨기
'''모후'''
효공장황후
1. 개요
2. 어린 황제
3. 황제의 삽질
5. 퇴위 (태상황)
6. 탈문의 변으로 중조(重祚)하다.[1]
7. 황후 전씨와의 금슬
8. 어진
9.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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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명나라의 제6대 황제. 묘호는 영종. 시호는 법천입도인명성경소문헌무지덕광효예황제(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 휘는 주기진(朱祁鎭). 여러 모로 인상적인 기록을 많이 남긴 황제로, 명 왕조 사상 첫 복위를 하여 복위 후에 연호를 바꾼 유일한 황제며, 또한 외적에게 포로로 잡힌 마지막 한족 황제다.
명나라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2]를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다른 황제들은 연호가 하나이지만 이 사람은 혼자 둘인 까닭에, 이 사람을 연호로 부르면 이름이 두 개가 돼(정통제, 천순제) 혼란이 생긴다. 그래서 묘호인 '영종'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꽤 많이 있다.[3] (이하 영종으로 서술한다.)

2. 어린 황제


[image]
영종은 선종 선덕제의 장남으로, 선덕제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9세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의 할머니인 태황태후 장씨와 삼양(三楊)이라고 불리는 3명의 훌륭한 신하들이 보필을 해서 나라를 적절히 꾸려 나갔다. 그러나 3양은 이미 너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이들이 은퇴한 뒤에 영종은 총애하는 환관 왕진[4]이 전횡을 일삼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3. 황제의 삽질


환관의 전횡 등으로 명나라 초기의 탄탄했던 조정은 해이해졌다. 1449년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는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을 늘리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5] 명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족장 에센이 이끄는 오이라트족이 명의 변방에 침입하였다.
이에 환관 왕진은 영종에게 친정을 간청했고, 여러 신료들의 만료에도 불구하고 어린 황제 영종은 이를 받아들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였다. 그러나 이 군대는 전쟁과 무관한 이들까지 싸잡아 넣어 숫자를 과시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군대의 질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선발대가 오이라트족에게 대패했지만, 그럼에도 영종과 왕진은 친정을 계속하였다.

4. 토목의 변


한편 오이라트족에게 보급이 차단당한 명군은 고립되었고,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삽질을 거듭 일삼던 왕진은 마침내 피살 당하였다. 에센의 오이라트족이 토목보를 포위하여 황제를 잡아가니 더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이들의 패배 소식에 북경의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아 남쪽으로 천도하자는 등의 논의로 시끌벅적했으나, 결국 북경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5. 퇴위 (태상황)


명나라를 혼내 주는 것을 넘어 황제를 포로로 잡는 의외의 성과를 이룬 에센은 다시 명과의 교섭을 시작하려 했으나 북경 조정은 이미 영종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렇게 경태제가 즉위하니 교섭에서도 영종의 존재감은 0에 수렴했고, 때문에 에센은 다음해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영종을 명 조정에 '''무조건으로 송환'''했다. 그렇게 개망신만 당하고 돌아온 영종은 송환되어 태상황이 되었으나, 형인 영종의 존재는 경태제에게 압박을 주었는지 영종은 남궁에 유폐되었다.[6]

6. 탈문의 변으로 중조(重祚)하다.[7]


이렇게 영종이 유폐되자, 조정은 영종 파와 경태제 파로 나뉘었다. 경태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 황태자였던 영종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주견제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1457년 1월 경태제가 병을 앓아 누워 있는 중에 대장 석형(石亨), 태감 조길상(曹吉祥), 서유정(徐有貞)이 정변을 일으켰고 경태제는 폐위되었다. 폐위된 지 한 달 후에 병사했다.[8]
그렇게 영종은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전 연호를 그대로 쓰지 않고 천순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내걸었다. 일단 정통제 때와는 달리 꽤 괜찮은 정치를 하긴 했지만 두 번째 재위도 편치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조길상에게 휘둘렸으나, 조길상은 천순제를 폐위하고 황태자를 옹립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책형에 처해졌고 7년 후 영종은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한다.
황제로 지낸 두 번째 시기 동안에는 상당히 개념찬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자기를 다시 황제로 만들어주었지만 간신으로 평가받는 조길상이나 석형 등을 제거하고 이현(李賢)과 같은 훌륭한 신하를 기용하기도 했다. 이때 영종은 자기의 하루 일과를 설명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조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 다음에는 조회를 보고 그 다음에는 밥 먹고 상주문 읽는 것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꽤 열심히 일했다.
다만 조길상, 서유정의 모함에 속아서 토목의 변 때 북경을 지킨 공신인 우겸을 죽이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비록 우겸이 경태제를 옹립한, 영종 본인에겐 반역자와 같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매우 불가피한 경우인 데다 우겸 본인은 청렴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있는 인물이라서 대국적으로 용서해 주었다면 우겸 또한 영종에게 충성했을 것이므로 이는 실책이라는게 후대의 평가. 영종도 이후 우겸이 훌륭한 신하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건문제의 유일한 후손이자 그의 차남 윤회왕 주문규#s-2를 56년만에 유폐에서 해방시켰으며[9] 자신이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힌 쓰라린 기억을 참고해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비빈들의 순장을 금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명나라 내부에 남았던 몽골의 풍속은 뒤틀린 폐습인 경우가 많아서 매우 개념찬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담으로 영종이 천순제로 복위한 이후 어진들을 보면 곤룡포가 선대에 비해 화려해진 것이 눈에 띈다.

7. 황후 전씨와의 금슬


영종은 15세때 할머니[10]가 선택한 전씨를 황후로 맞이하였다. 전씨의 집안은 평범했지만 품성이 훌륭하여 황후와의 금실이 아주 좋았다. 다만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1]
토목의 변으로 영종이 포로로 잡히자 전씨는 깊은 슬픔 속에서 영종의 무사귀환을 위해 엄동설한에도 기도를 올리다가 건강악화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영종이 풀려난 후엔 유폐되어 먹을 것이 곤궁해지자 전씨와 궁녀들이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전씨에 대한 영종의 애정도 매우 깊어, 영종이 다시 즉위하자 법도에 따라 황태자를 낳은 후궁 주씨를 황후로 앉히자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영종은 전씨를 다시 황후로 앉혔으며, 이후 죽으면서 '황후 전씨가 죽으면 자기 곁에 묻어달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상술한 비빈의 순장을 금지시킴과 동시에 자신이 죽은 뒤 황후가 쫓겨날 것을 걱정해 내린 결정이었다. 결국 전씨는 영종의 사후 4년 후 숨을 거두었으며, 영종의 유언대로 영종의 곁에 묻히게 되었다.

8.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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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젊은 나이에 죽은 황제라는 인식과는 다르게 어진을 보면 관우 수염이 돋보이는 괄괄한 풍채를 지닌 황제이다. 사실 명나라 황제들은 지방 군벌 출신인 홍무제를 조상으로 두고 있고 영락제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황제이자 명장이기도 했던 영락제의 후손들인지라 명 전반기의 황제들은 풍채도 크고 수염도 풍성한 편이다.[12]
특기할한한 사항은 아들인 성화제의 어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똑같다는 점인데 부자관계라지만 같은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똑같다는 점이다. 아래는 성화제의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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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KBS 2TV 대하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오승윤이 정통제를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2016년 방영된 드라마 여의담윤현에서 정통제와 경태제를 다루고 있다.#

10. 둘러보기




[1] 복벽왕정 복고와 같은 뜻으로 쓰이므로 다시 즉위하는 것을 따로 뜻하는 재조(再祚)나 중조가 적절하다.[2] 한 황제마다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것.[3] 가령 명나라의 각 황제에 대해 서술한 영어 위키백과의 문서들은 기본적으로 각 황제를 연호로 칭한 이름을 문서 제목으로 사용하지만, 정통제 문서만큼은 묘호로 칭한 이름을 문서 제목으로 사용한다.[4] 건달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연거푸 낙방하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히자 처벌을 면하려 자진해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되었다. 이후 영종이 황위에 오르기 전 글 선생을 하여 친해지고 이후 영종 즉위 이후 권력을 잡게 되었다.[5] 조공으로 바치는게 많아지면 명나라로부터 돌려받는게 많아진다. 한국사에서도 고려가 이를 노리고 뻔질나게 송나라 국경을 넘나들어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이라는 책까지 쓴 바 있는 서긍이라는 인물이 고려에 사절 좀 작작 보내라고 요구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비슷하게 류큐 왕국조선에 열심히 조공을 바쳐 조선이 골머리를 앓았다.(…)[6] 그나마 이것도 운 좋은거다. 송나라 때 휘종과 흠종은 송 고종의 정통성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송환되지 못하다가 휘종은 죽어서야 유해로 돌아왔고 위험요소 1순위였던 흠종은 아예 금나라에서 먼저 송환 제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송 측에서 거부하여 유해조차 송환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정통제는 취급이 좋았던 편.[7] 복벽왕정 복고와 같은 뜻으로 쓰이므로 다시 즉위하는 것을 따로 뜻하는 재조(再祚)나 중조가 적절하다.[8] 여담으로 정변 과정이 좀 황당하다. 석형과 조길상이 군대를 이끌고 궁 문 앞에 나타나자 병사들이 경계태세를 갖추었는데 태상황이던 정통제가 앞으로 나와 '''"짐이 태상황이니라!"'''라고 외치자 경비병들이 일제히 무장을 해제하고 궁궐 문을 열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9] 정난의 변을 일으킨 영락제가 유폐시켰다.[10] 홍희제의 황후. 시호는 성효소황후.[11] 영종은 후궁 주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셋 낳았다.[12] 다만 정통제의 손자인 홍치제는 이전의 황제들보다 덩치가 작은 편이고 그 다음 대 황제인 정덕제부터는 수염도 빈약해진다. 정덕제 이후의 황제들 중엔 만력제가 그나마 풍채가 있는 편이지만 수염이 빈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