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보병사단

 





'''제1보병사단'''
'''第一步兵師團'''
'''The 1st Infantry Division'''
[image]
'''천하제일사단'''
'''창설일'''
1947년 12월 7일(제1여단)
1949년 5월 12일'''(제1보병사단)'''
'''상징명칭'''
'''전진부대'''
'''소속'''
[image]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image] 제1군단
'''규모'''
사단
'''역할'''
JSA 지원, 파주 일대 및 강안 경계 및
개성공단 관련 임무
'''사단장'''
[image] 소장 강호필(육사 48기)
'''위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1. 개요
2. 상세
3.1. 위치
3.2. 상세
4. 예하부대
4.1. 사단직할대
5. 과거부대
6. 출신인물
6.2. 장교/부사관
6.2.1. 6.25전쟁 전후[1]
6.2.2. 6.25전쟁 이후
6.3. 병
7. 기타
7.1. 근무환경
7.3. 사단가
8. 사건사고
9. 여담

'''보병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보병사단(이하 "사단"이라 한다)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육군 1군단 예하 '''제1보병사단'''. 별칭은 '''전진부대'''[2]. 경례구호는 '''전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하고 있다.

2. 상세


경기도 파주에 주둔하고 있으며 주둔 지역은 임진강을 넓게 끼고 있다. 개성공단 출입인원을 관리하는 서해지구 군 운영단(舊 도라산 CIQ)와 임진강을 건너는 통일대교도 관리하고 있어서 각종 미디어에 출연 빈도가 아주 많은(?) 부대이다.
사단이 수도권에서 가까운 최전방 지역이어서 안보견학 및 어르신들의 효도관광(?) 코스로도 인기 있는 지역. 수도권에서 제일 가까운 최전방 부대라는 이유로 정치인, 국빈들의 외부 부대방문도 잦은 편. JSA 경비대대 또한 1사단의 지역에서 행정 지원 및 보급을 받지만 이쪽은 1사단 소속이 아니며 일단 유엔사에 정보작전권한이 있다. 물론 JSA 근처에 국빈이 오면 몇 일동안 그 지역엔 비상경계가 내리는건 마찬가지. 그래서 미국 국빈방문이 종종 있기도 하다. 아님, 중립국감독위원회 측 외빈이 찾아오거나(...) 군생활 동안 외빈들이 절대로 안 오길 기도하자. 또한 1사단은 담당하는 곳이 제일 많은 사단이라 할 수 있다. DMZ수색작전, 개성공단 출입관리, GPGOP경계, 임진강 및 통일대교 경계, JSA 작전지원 등 임무가 많은 부대이다.
이런 탓인지 지리적인 조건은 최전방사단 가운데서는 가장 좋은 축에 속한다. 일단 휴전선의 서쪽 끝이기도 하고[3], 전반적으로 담당지역이 평야와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고저차가 크지 않다. 특히 12,15연대의 경우 도라산 외 몇 곳을 빼면 작전구역 내 해발 100미터를 넘는 고지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동부전선 GOP출신 전역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자동으로 장탄식이 나오는 신비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실 1사단을 지형적으로 편한 사단이라고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1사단 전 지역이 지형적으로 편한 건 아니다. 12여단과 15여단의 경계구역이 임진강과 평야지대기 때문에 생긴 이미지다. 11여단의 경우 담당 경계구역의 상당부분이 산악지대로 이뤄져 있으며 물자 보급을 케이블카로 받아야만 하는 소초들도 있다. 더불어 1사단 내에서는 가장 추운 곳 중 하나.
서울에서 매우 가깝기도 한데, 사단 위수지역 내로 서울 소속 버스들과 서울가는 전철이 둘 다 들어오는 유일한 최전방사단이기도 하다. [4] 때문에 외출나온 장병들이 서울로 점프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여기까진 좋은데 여름철에는 파주의 유명한 모기와 사투를 벌이며 클로로퀸이라는 아주 독성이 강한 말라리아 약을 먹어야 한다. 약의 부작용이 심한 사람은 차라리 말라리아에 걸릴 각오로 약을 버리기도 하지만 말라리아가 잘 걸리는 지역이다보니 간간히 말라리아에 걸려서 실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거기다 말라리아의 경우 잠복기간이 6개월~1년이 넘기도 하므로 전역후 발병하는 재수없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헌혈의 집에서도 이쪽에서 복무했던 사람을 잘 안받아준다.[5] 이곳은 들쥐로 인해 전염되는 제2종법정전염병인 유행성 출혈열로 유명하다. 한탄바이러스의 한탄강이 이곳 관할이다.
앞에서 서술했듯 임진강 하류를 넓게 끼고 있다 보니 GOP경계와 동시에 강안 경계도 맡고 있다. 실제로 95년 임진강 벼락바위 일대에서 임진강 하류로 침투하는 간첩을 격멸한 사례(벼락바위사건)도 있다. 제3땅굴 발견 등과 함께 부대의 자랑거리 중 하나.
게다가 이 부대는 전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거점인 관계로 완벽한 진급코스이다. 장교라면 이 부대에서 한 번 이상은 복무해야 장성까지 무난하다. 병들 역시 1사단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메이커 사단임에도 불구하고 선호한다.
위수지역2011년까지는 파주시 시내, 그중에서도 금촌역까지가 대부분이었으나, 2012년에 하창호 사단장[6]이 부임한 이후 제1군단과의 협의를 통해 1사단 전 부대의 위수지역을 고양시까지 확장하였다. 이에 따라 일산신도시까지 합법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서울특별시계와 한강을 건너지 않으면 가능하다.
미군정이 1946년 1월 15일 창립한 국방경비대는 동년 6월에 조선경비대로 명칭을 바꾸고서 1947년 12월 1일에 3개 여단을 창설하였는데 그중 '제1여단'(서울)이 1949년 5월 12일 '제1사단'으로 승격된 것이 제1보병사단의 시작이다. 초대 여단장은 중국 국부군 및 독립군 출신의 송호성[7] 준장이었다. 그러나 일본군 출신이 군을 장악함에 따라 김구와 가까웠던 송호성 준장이 밀려나고 1948년 2월 5일에는 일본 육사 26기 이응준 대령이 제2대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49년 1월 7일에 일본 육사 27기 출신의 김석원[8] 대령이 3대 여단장으로 부임하였고 1949년 5월 12일에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됨으로써 여단장 김석원 대령이 그대로 초대 사단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인 1949년 5월에는 11연대가 북한군과 개성에서 5.4 송악산 충돌(육탄10용사) 국지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개성등을 포함하는 38선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9년 10월 1일에는 일본 육사 26기 유승렬 대령이 제4대 사단장을 맡았으며, 1950년 4월 22일에는 역시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개성과 임진강파주에서 방어전을 펼쳤고, 개성에서 방어전을 펼치다가 김포 및 파주로 분산 후퇴한 12연대를 제외하고 11연대 및 13연대, 증원된 5사단 15연대는 한강교 폭파이후 에는 한강을 도하하여 시흥지구방어사령부까지 후퇴하였다. 비록 한강도하철수 당시 변변한 도하장비가 없어 중화기는 모두 파기한채 시흥지구 까지 철수하였지만, 이 곳에서 분산된 12연대 및 타 연대병력까지 최대한 수습하고 중화기도 다시 보충받아, 사단 및 연대 건제를 유지한채 지연전을 벌이며 낙동강까지 철수해 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10월 19일 평양 전투에서 북한군들을 물리치고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부대가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섰던 미1군단에 소속된 부대 중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보병사단, 1보병사단 간에 평양 선봉 입성을 위한 경쟁이 붙었다. 1보병사단에는 미군 전차부대가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속도에 맞추기 위해 전차부대는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휴식, 보병부대는 낮이나 밤이나 그냥 걸었다(…). 당시 미군들도 '우리는 미군이지만 지금은 1사단이다'라면서 결국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가 되었다. 평양 입성 다음날인 10월 20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 선봉 입성을 기념하여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전진이라는 부대 명칭을 내린다.
참고로 7사단도 부대 역사에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9] 18일 오후 평양에 입성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평양 점령이라기 보다는 평양 강행정찰에 가까운 성격이다. 실제 평양에 입성한 7사단의 부대라고는 8연대 9중대 하나 뿐이고, 뒤따라 들어온 부대들도 3, 8연대와 얼떨결에 따라와 임시 배속되었던 15연대 대대 하나뿐인지라 대외적으로는 전투지경선을 지키며 사단 전체가 직접 평양으로 진군해 동평양(11/12연대)과 본평양(15연대) 전역을 점령한 1사단을 평양선봉입성 부대로 인정하고 있다.[10] 자세한 건 평양 전투 참조.
이후 중공군의 개입 이후에도 사단 건제를 유지한 채 후퇴하였다가 다시 북진해서 개전 직후 방어하였던 임진강-파주 지역에 되돌아오게 된다. 이후 6.25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후방 재편성 및 일부부대 전용을 제외하고는 해당진지를 고수한 채 휴전을 맞는다. 물론 그동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것은 다른 지역과 동일했다.[11]
6.25 전쟁에서는 개전 전에 편성된 사단이면서 줄곧 미군에 배속돼 풍부한 지원을 받으며 백선엽 장군 휘하에서 오랫동안 싸우되,[12] 정전 때까지 사단 건제를 끝까지 유지한[13] 정예사단으로 평가받았으며, 미군이 항상 신뢰하는 유일한 국군 사단이었다. 당장 백선엽 사단장이 승진과 보직변경으로 물러날 때는 이미 타 사단의 사단장들은 다른 인물로 여러번 교체된 이후였다.
자주국방네트워크 신인균 대표는 2013년 7월 종편 채널A의 시사프로 쾌도난마에 출연하여 정전 60주년 기념특집으로 6.25 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5대 국군부대를 꼽았는데, 전진부대는 2위로 평가받았다.[14]
1위-육군 제6사단(청성부대. 춘천 전투, 용문산 전투 등)
'''2위-육군 제1사단(전진부대. 육탄10용사, 다부동 전투 등)'''
3위-해병대(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도솔산 전투 등)
4위-육군 제3사단(백골부대. 38선 첫 돌파, 원산 전투, 현리 전투[15] 등)
5위-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진천 전투, 안강-기계 전투 등)
참고로,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6.25 전쟁 초기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국군 부대로 육군의 6사단, 8사단, 1사단을 꼽았다.
1978년에는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도라산 바로 밑에 있기에 도라산역 관광코스로 끼어있기도 한다.
참고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작업반으로 위장한 특전사가 진입할 때 판문점을 둘러싸고 수색대대, 중대 병사들이 전투태세를 취한 채 수풀 안에 매복해있었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

3. 신병교육대




3.1. 위치


'''제1보병사단 신병교육대 (전진신병교육대)'''
'''第一步兵師團 新兵敎育隊'''
'''The 1st Infantry Division recruit training center'''

'''위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 516

3.2. 상세




4. 예하부대




4.1. 사단직할대


  • 본부근무대
  • 수색대대
  • 공병대대[16]
  • 제7전차대대[17]
  • 정보통신대대
  • 보급수송대대[18]
  • 정비대대
  • 군사경찰대대[19]
  • 신병교육대대[21]
  • 의무근무대
  • 화생방지원대
  • 방공중대
  • 토우중대
  • 보충중대[22]
  • 군악대
  • 교육대
  • 유격대
  • 통일대교 검문소
  • 도라산역 경비대
  • 전진회관
  • 서해지구군운영단(CIQ)
  • [23]

4.2. 제11보병여단 육탄


[image]
  •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1대대 일월성
  • 2대대 율곡
  • 3대대 백학


4.3. 제12보병여단 쌍용


[image]
  •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1대대 마정
  • 2대대 운천
  • 3대대 도라


4.4. 제15보병여단 무적칼


  •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1대대 방미
  • 2대대 필승(장단)
  • 3대대 여우고개


4.5. 포병여단 으뜸


  • 여단본부 및 본부포대
  • 제17포병대대 백곰 [24]
  • 제58포병대대 백호
  • 제59포병대대 사자
  • 제629포병대대 독수리


5. 과거부대



6. 출신인물



6.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1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25]
송호성
준장
보정군관학교
前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2대[26]
이응준
예) 중장
일본육사 26기
육군참모총장

3대[27]
김석원
예) 소장
일본육사 27기
前 수도사단장
국회의원
4대
유승렬
예) 소장
일본육사 26기
前 육군 경북지구 계엄사령관

'''5·7대'''[28]
'''백선엽'''
'''예) 대장'''
군사영어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1야전군사령관
교통부장관
6대[29]
최영희
예) 중장
군사영어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2작전사령관
국방부장관
8대
강문봉
예) 중장
군사영어
제2작전사령관

9대
박임항
예) 중장
육사 특7기
제1야전군사령관

'''00대'''[30]
'''전두환'''
'''예) 대장'''
육사 11기
국군보안사령관
대한민국 대통령
00대
최연식
예) 중장
육사 11기
육군사관학교장

'''00대'''
'''김동진'''
'''예) 대장'''
육사 17기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한미연합군부사령관
국방부장관
'''00대'''
'''길형보'''
'''예) 대장'''
육사 22기
육군참모총장, 제3야전군사령관

00대
송영근
예) 중장
육사 27기
기무사령관
19대 국회의원
'''40대'''
'''정승조'''
'''예) 대장'''
육사 32기
합동참모의장, 한미연합군부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

41대
이성호
예) 중장
육사 33기
국방대학교 총장
국민안전처 차관
'''42대'''
'''신현돈'''
'''예) 대장'''
육사 35기
제1야전군사령관

43대
서형석
예) 소장
육사 37기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겸 군사정전위원회 한국군 수석대표

44대
하창호
예) 소장
육사 39기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

45대
장경수
예) 소장
육사 41기
前 국방정책실장 직무대리

46대
이종화
예) 소장
육사 42기
육군학생군사학교

47대
박정환
중장
육사 44기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48대
김홍석
소장
육사 46기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

49대
강호필
소장
육사 48기
사단장


6.2. 장교/부사관



6.2.1. 6.25전쟁 전후[31]


  • 송석하 : 6.25전쟁 이전(1948년) 12연대장 → 6.25전쟁기 사단 포병단장 역임
  • 채명신 : 6.25전쟁 이전 개성 송악산 전투 당시 11연대 4중대장 역임
  • 최경록 : 6.25전쟁 발발 당시 11연대장 역임(후임 김동빈)[32]
  • 김동빈 : 6.25전쟁 초반 11연대장 → 6.25전쟁 중반 사단 참모장 역임
  • 전성호 : 6.25전쟁 발발 당시 12연대장 역임(후임 김점곤)[33]
  • 김점곤 : 6.25전쟁 발발 당시 12연대장 역임[34]
  • 박기병 : 6.25전쟁 초반 12연대장 역임[35]
  • 김익렬 : 6.25전쟁 발발 당시 13연대장 역임(후임 최영희)
  • 조재미 : 6.25전쟁 초반 15연대 1대대장 → 15연대 부연대장 → 15연대장 역임(후임 김안일)
  • 노재현 : 6.25전쟁 발발 당시 사단 포병대대장 역임
  • 박영식 : 6.25전쟁 초반 사단 포병대대장 역임
  • 김영석 : 6.25전쟁 초반 사단 공병대대장 역임
  • 석주암 : 6.25전쟁 초반 사단 참모장 역임
  • 김덕준 : 6.25전쟁 발발 당시 사단 작전참모 역임(후임 문형태)[36]
  • 문형태 : 6.25전쟁 초반 사단 작전참모[37] → 6.25전쟁 중반 11연대장 역임
  • 박경원 : 6.25전쟁 초기 사단 군수참모 역임
  • 동홍욱 : 6.25전쟁 초반 사단 통신중대장 역임
  • 윤혁표 : 6.25전쟁 초반 사단 통신참모 역임
  • 김판규 : 6.25전쟁 초반 사단장 부관 역임
  • 최재명 : 6.25전쟁 초반 15연대 작전참모 역임
  • 김재명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1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이두황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1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차갑준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1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정영홍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1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김소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1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한순화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2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조성래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2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박병수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2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김진위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5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유재성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5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안광영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5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최병순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5연대 예하 대대장 역임
  • 김국주 :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 당시 15연대 6중대장 역임[38]
  • 유흥수 : 6.25전쟁 중반 부사단장 역임
  • 박진석 : 6.25전쟁 중반 사단 작전참모 역임
  • 김안일 : 6.25전쟁 중반 15연대장 역임
  • 문중섭 : 6.25전쟁 정전 이후(1955년) 12연대장 역임[39]

6.2.2. 6.25전쟁 이후



6.3. 병


자대 배치를 이 부대로 받았다. 입소대대는 55사단.
12연대 전투지원중대에서 복무 도중 GOP에 올라가지 못하여 본부중대로 전입 후 점심시간 방송병(정훈과)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사단 군악대 출신.
2017년 10월 23일, 파주시 소재 1사단 신병교육대로 현역 입소했다. 원래는 심장질환으로 4급 판정을 받았지만 꾸준한 관리로 재검결과 1급 현역 판정을 받아 입대하게 된 것이다. [YTN] 공익에서 현역으로.. 김수현, 오늘(23일) 군 입대 신교대 수료후 사단 수색대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원래는 특전병으로 지원하려고 했으나 특전병은 만 28세 이하만 지원이 가능해 수색대로 바꿨다.
훈련소에서 동기들끼리 가위바위보 했다가 꼴찌해서 딱밤 30대 맞았다고 한다. 훈련소 때 인터넷 편지가 혼자서 몇 바구니가 나왔다.
1사단 15연대 수색중대 출신이라고 한다. 원래 잠복고환이 있어 병역면제 대상이었으나 본인이 잠복고환이 병역면제가 되는 병인지 몰라서 그냥 현역복무를 했다고 한다.
탈영 전과가 있다.
1993년 12월 입대, GOP 근무
배우. 포병연대에서 근무했다.
  • 이중석(해커스 공무원 한국사 강사)
1사단 조교 복무했다고 강의에서 언급하신 바 있다.
2018년 2월 19일, 최전방 수호병 모집에 합격하여 26세의 나이로 전진부대 신병교육대입대하여 1사단 전진부대 수색대대로 전입하였다. 기사 하단 참조
11연대 소속 GOP 근무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11연대 3대대 11중대에서 대대 천주교 군종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2020년 10월 26일에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했다.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2020년 10월 26일, 입대한다고 밝혔다.#
사단 문화선봉대에서 병사로 복무하며 부대 행사의 사회자로 활약.

7. 기타



7.1. 근무환경


12연대의 경우 11,15연대에 비해 생활 환경 개선이 늦은 편이었으나 지금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7.2. 전진회관


'''전진회관
前進會館
Jeon Jin Hall
'''

'''위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임당로 104

7.3. 사단가


'''내 조국 삼천리를 지켜서 싸워가는'''

'''우리는 맹호 같은 필승의 용사로다'''

'''송악산 10용사의 투혼을 본 받아서'''

'''옹진전투 싸워 이긴 명예로운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세계에 이름떨친 평양성 공략작전'''

'''서울을 재탈환한 우리의 장한무훈'''

'''임진강 대반격전 신벽제 봉일천들'''

'''차례로 싸워이긴 승리의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인류의 자유평화 위하여 진격하는'''

'''용감한 유엔군과 굳세게 뭉치었다'''

'''조국의 통일위해 들끓는 이 가슴들'''

'''화랑의 정신으로 단결한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충성과 명예로써 단결된 전진부대'''

'''우리의 가슴에는 통일의 굳은 의지'''

'''3 땅굴 발견하여 드높은 이 기상을'''

'''통일의 그날까지 떨쳐가는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1사단가'''


8. 사건사고


  • 2007년 3월 9일 15연대 모 대대에서 대대장과 대대 주임원사가 반환미군기지[40]에서 나온 고철을 무단으로 매각했다는 이유로 군사경찰대에 연행되는 일이 있었다. 해당기사매각한 대금은 대대장과 대대 주임원사가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고 부대 시설개선(주로 운동기구 마련)에 사용했다. 당시 대대원들은 대대장이 결백하다는 탄원서를 쓰기도 하였다.
  • 연평도 포격 도발 후 당시 1사단 포병연대의 모 포병대대[41]에서 북 도발에 대한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155mm 자주포로 실탄 장전 연습 도중 실수로 적 GP 부근 DMZ를 향하여 실탄을 발사하였다. 당시 1사단장은 당장 전 병력 방탄착용 후 대피하라 지시를 하였고, 다행히도 큰 일없이 잘 넘어갔다.[42]
  • 2015년 10월 29일 새벽 5시, 경기도 파주시 육군 1사단 GOP에 근무하던 박 일병이 후임과 같이 경계근무를 서던 중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비운 뒤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터트려 자살했다. 박 일병이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조사했지만 “가족에게 미안하다” 등 선임들의 구타와 부대 내 부조리를 암시하는 내용의 메모를 발견되면서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인해 자살한 걸로 밝혀졌다..보도 기사자세한 내막의 기사

9. 여담


  • 제1보병사단이 선봉으로 평양에 입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하 연대들이 서로 자기가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한 부대라고 자랑질을 하는데 진실은 저 너머로... 15연대는 부대 정문에 "평양선봉입성부대", 12연대는 부대 정문에 "평양입성선봉부대" 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백선엽장군 기록에 따르면 15연대가 선봉 입성이다.
2016년 8월 기준으로 12연대 정훈장교가 기록을 모조리 뒤져 12연대가 먼저 입성했다는 증거를 찾았다며 예하부대를 돌아다니면서 교육했다.
12연대에 배속된 미군 전차부대를 선두로 평양 외곽에 입성하여 15연대가 안전하게 입성할 수 있게 방비해줬다고 한다.
  • 대동강을 기준으로 우측을 동평양, 좌측을 본평양이라고 하며 12연대는 동평양에, 15연대는 본평양에 먼저 입성하였으며 북한의 주요시설이 본평양에 위치하여 있어 15연대가 선봉입성의 기준으로 잡는다.(12연대, 15연대 모두 복무한 정훈장교가 확인)
  • 6.25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제1보병사단이 등장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미군과 자주 붙어다녀서이다.
  •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진석 형제의 소속은 이 1사단이다. 다만 진석의 경우 마지막 두밀령 전투에서 형을 찾기 위해 인근 부대(정황상 8연대)로 자진 전출가는 바람에 기록이 꼬여버렸다. 그나마 감식단이 전화할 때 8연대 부분은 빼고 불렀다.
  • 도라산 정상의 도라전망대도 같이 관리하는데, 도라전망대에서 망원경쪽 벽을 월담하면 바로 DMZ다. 덤으로, 도라전망대엔 군인들만을 위한 공짜 망원경이 있는데, 민간인도 몰래몰래 이용한다. 보다보면 중국인 관광객도 와서 구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12.12사태 당시 신군부측에서 동원된 전차부대가 1사단 전차대대 소속이라는 오해가 있는데, 당신 동원된 전차대대는 제1군단 황영시 중장 예하 제2기갑여단 이상규 준장의 16전차대대이다. 1사단 관할지역은 서울 근교가 아닌 최오지 전방이라 12.12사태에 낄 수 없는 부대이다.[43]
  • 이 부대의 위수지역에 초평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임진강 중류에 위치한 하중도이며 현재는 민통선 내에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원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섬의 규모도 상당히 넓은 섬이였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휴전이 성립되어 휴전선이 결정되자 이 섬은 민통선 내에 들어가 버려 그 이후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현재는 무인도가 되었다.
    • 추가)소변을 볼 수 없고 강수량이 많은 장마철에 섬이 물에 잠기기도하며 만조간만의 차이가 있기에 사람이 산적은없다.
  •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 때 협조 해줬다. 가요제가 임진각에서 했는데 가뜩이나 대중교통이 불편한 이곳에 사람들이 그렇게 몰리니 별수 있나. 1사단 군인들이 인원통제를 도와줬었다.
  • 일본 방송국에서 1사단 전방을 방문,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적이 있다. 내용이 크게 잘못된 것은 없었고 한국의 징집된 장병들이 이전에는 각자 사회에서 했던 일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단의 비극을 보여 주려 했다.
  • 단대부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 군사경찰대대와 공병대대는 한 위병소 두 집 살림을 살고있으며(유격대 및 사단법무부 또한 영내에 위치해 있다), 한때 정비대대,보급수송대대, 의무근무대가 한 위병소 세 집 살림을 하였으나 현재는 의무근무대가 신병교육대대로 이사갔다.
  • 같은 시기에 서욱 중령(육사 41기)은 11연대 2대대장, 서욱과 같은 해에 임관한 남영신 중령(학군 23기)은 11연대 3대대장을 역임했다. 모두 대장까지 진급했다.
  • 같은 시기에 안영호 대령(육사 42기)은 11연대장, 김승겸(육사 42기) 대령은 12연대장, 김정수(육사 43기) 대령은 15연대장을 역임했다. 2021년 2월 현재 김승겸 장군은 대장, 김정수 장군은 중장이며, 안영호 장군은 중장 계급으로 군문을 나섰다.

[1] 6.25전쟁 당시의 장교 보직 자료는 백선엽의 "老兵이 걸어온 길"(국방일보 연재) 19~69 참조[2] 공식별칭은 천하제일 전진부대[3] 우리나라 지형은 동고서저임을 기억하자.[4] '서울 가는 전철' 한정으로는 수도권 1호선이 다니는 5사단과 28사단도 있다.[5] 정확히는 복무 후 2년 동안 헌혈 불가 대상으로 분류되며 예외적으로 혈장헌혈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입대 전까지 전혈헌혈만 해왔던 사람은 전역 후 혈장헌혈을 처음 해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끔찍한 소요시간 탓에 고개를 가로젓게된다...[6] 육사39기, 춘천제1고 졸업[7] 김구가 장제스에 위탁 교육을 맡긴 조선 청년들 중 하나로 국부군에서 장교를 하고 이후 독립군에 편입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 국군 창립군의 장교가 되고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였으나 이후 여순사건 진압 등에서의 책임을 물어 일본군 출신들(이응준, 채병덕 등)에 밀려 점차 요직에서 밀려났다. 그리하여 6.25 전쟁 발발 후 청년방위대 고문이었던 장흥 대령의 권유에도 피난을 가지 않다가 한강 철교를 건너지 못한 3명의 장교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에 북한에 납북되었고 대남방송을 하거나 북한에 투항한 국군포로부대를 지휘하기도 했으나 후에 반혁명분자로 몰려 북한 양덕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위에 대남방송과 거꾸로 총을 돌린 것 때문에 초대 조선경비대사령관이었던 송호성은 대한민국 국군에서 사실상 병적이 말소되어 버렸다. 하지만 최근 송호성이 북한에 납북된뒤 한 대남방송 등은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어 논란이 있다.[8] 초대 1사단장. 김석원은 중일전쟁의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에게서 공3급 훈장을 받은 일본 육사 27기 출신이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있는 인물이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에는 일본군 평양병사부에서 대좌로 근무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성남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다.[9] 이는 서울 선봉을 미 해병대에게 빼앗긴 트라우마가 있는데다 미군에 배속된 1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엎치락 뒤치락한다는 소리까지 들리자 미군과 협의 없이 국방장관에게 말한 결과이다.[10] 육군 공간사에도 1사단을 공식 입성부대로 명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사단 전체를 1계급 특진시키고 1사단의 부대애칭도 "전진"으로 명명한 것이다.[11] 김만술 상사 지휘하의 국군 1개 소대(11연대 6중대 2소대)가 중공군 1개 연대와 싸워서 이긴 베티고지 전투가 대표적인 예. 참고로 2소대는 24명이 전사하고 12명이 생환하였다.[12] 사실 한 부대를 계속 이끌어 나가면 예하 부대들 상황이 어떤지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예하 장병들도 큰 사고없이 잘 이끌어 나가면 신뢰감이 쌓이는 등 유리한 점도 있으나, 반대로 이 때문에 지휘관의 사병화가 되는 부작용 역시 있다.[13] 일단 빛나는 전공의 6사단조차 사창리 전투에서 간부고 병사고 무질서하게 패주해 이 오욕을 씻기 위해 용문산 전투에서 분투했을 정도다.[14] 신인균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15] 다만 이건 사단 전체가 와해돼 패주한 경우라 자랑거리가 아니다.[16] 군사경찰대대와 사단 법무부, 유격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다.[17] 보병사단 전차부대 중 최초로 K-1 전차를 장비하였으며, 반대로 7사단은 최초 전차대대인 제1전차대대를 예속받았다.[18] 육군훈련소보다 많은 전국 최대의 식수 인원을 자랑한다.[19] 현병대에서 2014년 대대 편제로 개편되었다.[20] 실거리 사격(전차대대 주둔지 바로 옆에 있다.), 수류탄, 지뢰 및 BT(부비트랩), 각개전투숙영[21] 신병교육대대는 전차대대와 의무근무대가 주변에 이웃해있다. 신병교육대대에서 영외에서 실시하는 교육훈련 교장[20]으로 이동할 때 거의 필수적으로 전차대대 주둔지를 통과한다.[22] 전차대대 영외 중대와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23] 지상작전사령부 직할 부대이다. 다만 1사단에서는 행정지원을 받는 형식. 여담으로 1사단장이 JSA로 출입 하려면 1주일 전에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24] 대한민국 최초로 창설된 6개의 포병부대 중 하나[25] 초대 제1여단장[26] 2대 제1여단장[27] 3대 제1여단장 겸 제1사단장[28] 6.25 전쟁 초기 사단장[29] 6.25 전쟁 초기 15연대장 및 13연대장 → 부사단장 → 사단장 역임. 백선엽이 2군단장 전출 후 3일만에 1사단으로 복무하면서 사단장 역임 기간은 3일 천하로 종결.[30] 제3땅굴 발견[31] 6.25전쟁 당시의 장교 보직 자료는 백선엽의 "老兵이 걸어온 길"(국방일보 연재) 19~69 참조[32] 김석원 장군 수도사단장 부임시 수도사단 전보[33] 전투 중 중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34] 6월 26일자 부임[35] "老兵이 걸어온 길" 28편에 따르면 잠시 동안 김점곤과 함께 12연대장을 동시 역임[36] 김석원 장군 수도사단장 부임시 수도사단 전보[37] 전쟁 발발 당시에는 5사단 작전참모였으나 "老兵이 걸어온 길"에 따르면 전쟁 초기에 1사단과 5사단이 통합되면서 1사단에 합류함.[38] 후일 제17대 광복회장 역임[39] 예비역 소장. 제 12대 국방대학교 총장[40] 해당 대대가 경비임무에 투입되었던 기지는 캠프 자이언트와 캠프 게리 오웬으로 모두 문산읍 선유리에 있었다.[41] 629포병대대[42] 이게 그때 당시에 사격제원으로 로켓탄(RAP)에 장약을 8호를 사용해 실제로 적 GP 부근 DMZ를 타격할 수 있었으나, RAP탄의 로켓추진마개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발사되어 넘어가지 않고 남측 구역에 낙하하며 끝이 났다. 낙탄 직후 남측에서는 북측에 오발 사고임을 즉각 통보하였고 북측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3] 당시 전방병력을 빼려면 한미연합사 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