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천도교의 상징 궁을기(왼쪽)와 궁을문양(오른쪽). 1905년 처음 만들어진 유서 깊은 상징이다.* 좌우로 반반씩 바탕이 흰색과 빨간색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린란드의 기처럼 바탕이 빨간색인 쪽은 반대로 무늬가 흰색이 된다. 깃대에 게양할 때는 바탕이 흰색인 쪽으로 깃대가 오도록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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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모습.* 오른쪽의 빌딩은 천도교 중앙총부가 있는 수운회관.
천도교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2. 역사
3. 용어
4. 기념일
5. 특징
5.1. 교리
5.2. 예복
5.3. 의례
6. 역사
6.2. 신구파 갈등과 신파의 친일 행적
6.3. 해방과 군사정권 시기
6.4. 현재
7. 북한에서의 천도교
8. 신자인 유명인
9. 둘러보기


1. 개요


天道敎
Cheondoism[1]
동학의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가 1905년 동학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해 성립시켰다. 즉, 전신인 동학과 마찬가지로 발원지는 경주, 교조(교주)는 최제우가 된다. 1908년엔 춘암 박인호가 4대 교주가 되어 대를 이었다.

2. 역사


개칭 이전의 역사는 동학 참조.
일제강점기 교세가 막강해 당시 신문엔 교인이 300만 명이 넘는다고 나온다. 재정 또한 건실하여 일제강점기 당시 신문기사는 3대 교주 손병희의 장례식에 10대의 자동차, 200대가 넘는 인력거,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다고 나온다. 손병희는 생전에 조선인 최초로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심지어 캐딜락이라 고종황제의 차보다 비쌌다.
경술국치무단통치3·1운동에 교단의 역량을 쏟아붓다시피 하는 등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민족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으나 일제에게 강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에 모두 승리하여 대만대한제국을 병합하며 승승장구했다. 1919년 3·1운동이 진압되고 나서 천도교 신파는 조선의 자력독립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일본 통치 아래 조선의 자치성을 성장시키자는 자치론 계열로 전향한 덕에 총독부가 지지했고, 천도교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3·1운동 직후 천도교 신파는 일본과 미영 양국 사이가 머지 않아 적대 관계로 변하리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 구파는 교단의 친일화에 반대하여 신파와 자주 충돌했고, 결국 민족말살통치기 일본의 손으로 강제로 분쟁이 봉합된 채 광복을 맞았다.
구한국 시기 동학의 진보회 파벌로서 일찍이 친일로 전향했던 시천교 세력은 식민시대 초반 무단통치기에 그나마 일본에게 배려를 받았다. 그런데 3·1운동 후 대중들이 시천교를 외면할 뿐 아니라 교세도 천도교에 비하면 미약해서 활용가치가 하락하자 일제도 외면해버렸다. 조선 내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영향받아 급진화된 시천교 내 청년들과 좌파 세력이 나름대로 교단을 쇄신하고자의 노력했지만 좌절되었고, 교단의 지도부 자리를 놓고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결국 시천교는 침체될 대로 침체된 채 광복을 맞았고 시천교 대교당은 대관 장소 등으로 이용되다 안식교에 매각되었다. 한때, 한 종교의 본부로 있었던 역사를 대변하듯 지금도 그 건물은 크게 변형되지 않은 채, 안식교의 서울중앙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시천교는 침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때 으르렁대던 천도교의 힘을 빌려 간신히 버티다가 결국 1982년 12월 25일 결의를 통해 천도교에 귀일하였고 시천교유지재단도 1988년 2월 20일 해산되었다이창번 선도사의 간략한 시천교 역사 정리.
그렇다하여 천도교도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1945년 예상치 못하게 광복된 뒤, 대한민국 정부는 천도교 인사들도 친일파로 간주했다. 또한 천도교 내부적으로도 구파와 신파로 분열이 심화되어 점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어졌다. 구파는 공산주의자가 되고 신파는 친일파로 몰리는 형편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돌아온 김구 등과 함께 남북분열 저지 운동을 펼치긴 했지만, 당시부터 현재까지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민감한 지역이라 강대국들 사이에서 이념과 체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에 서있는 자들은 이념론자들로부터 방해물 취급을 받았다. 우익계열 자유당을 위시한 남한 단독정부를 주장하는 이승만 정권이 천도교 인사들을 검거하자 교단의 발언권 및 사회적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천도교에서 기회를 찾았던 많은 젊은이들과 교인들이 떠났다.
또한 공화정국가이자 준법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정부가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내걸자 구한말부터 일제시대 내내 90년 가까이 번성했던 천도교는 더 이상 매력적인 종교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정부 수립 이후에 서구문명이 본격적으로 남한에 들어와 전쟁 등을 거치며 빈곤을 종식시키는 등 의식주, 산업화와 경제 ,안보까지 책임지는 것을 보고 많은 교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남은 천도교 교단은 내부적으로 의견일치가 되지 못한 채로 몇십년간 유지되었지만 교세는 더욱 줄어들었고, 외무부 장관까지 지낸 교령(교주) 최덕신이 아내와 함께 1986년 월북해버렸다.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는 천도교인이자 김일성의 스승이다.[2] 1997년 오익제 교령까지 납북되었는데, 북한에서는 월북했다고 선전하여 교단 이미지가 더욱 안 좋아졌다.
2015년 기준으로[3] 100여개 교구, 6만 6천여 신도들이 남아 있다.
흔히 1, 2, 3대 교주까지만 이름이 알려졌다. 3대 교주 손병희가 1922년 사망한 뒤 교단이 둘로 분열되어 한동안 교주를 뽑지 못하였고, 4대 교주를 뽑은 이후로도 두 파가 계속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분규를 겪었다. 이후 천도교단은 종신직 교주제를 폐지하고 3년 임기제로 교령을 뽑아 교단의 지도자로 삼는다.

3. 용어


천도교에서는 포교를 포덕, 집회를 여는 장소를 '교당(敎堂)',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를 교령[4], 중요 종교건물을 '수도원'이라고 통칭한다. 또한 천도교 신자를 교인이라 칭하고 교인끼리는 서로를 동덕이라 부른다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천도교 교단의 지원하에 발전했으며, 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가 천도교의 미션스쿨로 출발한 것이다.
'포덕'(布德)이라는 말은 연호로도 사용한다.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신인에게 계시를 받았다는 1860년(조선 철종 11년)을 원년(1년)으로 삼아 헤아린다. 2020년 기준 포덕 161년.
사족으로 국궁에서 국궁인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접장이란 말도, 원래는 천도교의 포접제 하에서 쓰던 말이었다.
수운 최제우를 대신사(大神師)라,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신사(神師)라,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를 성사(聖師)라, 4대 교주 춘암 박인호를 상사(上師)라 칭한다. 또한 4대 교주까지 각기 기념일을 정하여 천도교의 절기로 삼았다.

4. 기념일


  • 천일(天日): 4월 5일. 1860년에 최제우가 상제로부터 계시받음을 기림.
  • 지일(地日): 8월 17일. 1863년에 최시형최제우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 인일(人日): 12월 24일. 1897년에 손병희가 최시형으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 도일(道日): 1월 18일. 1908년에 박인호가 손병희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원래는 음력으로 기렸으나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옮겼다. 예를 들어 천일은 원래 음력 4월 5일이었는데 지금은 양력 4월 5일이다.

5. 특징



5.1. 교리


동학을 계승한 종교답게 기본적인 골격은 동학과 큰 차이가 없다. 최제우 스스로가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가 합일된 것이라. 그러나 도인즉 같으나 이치는 다르니라" 고 하였다.[5]
최제우가 종교적 수행을 통해 신과 만나 대화한 얘기가 경전에 있는 것으로 보자면. 주신인 한울님은 아브라함교와 같은 초월적 절대자의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내면에 신이 있고, 나아가서는 천지 만물에 근원으로서 잠재한 신격이라는 범신론과는 다른 범재신론적인 교리를 갖고 있다. 이것이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시천주(侍天主) 사상. 일종의 애니미즘적 성격도 있지만, 일본의 신토와 달리 들을 개별적 객체로 보지 않고 한울님이라는 통합된 표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정확히 말하면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초대 최수운 시절에는 상제와의 문답을 나누거나 신령한 부를 내려받는 등 인격신의 면모가 있었으나 점차 인간 내면에 잠재한 신격을 강조하는 모습이 나타나면서 최시형, 손병희를 거치면서 사인여천/시천주, 인내천 사상이 나오게 된다.
모태인 동학이라는 종교가 본디 서학인 그리스도교에 반발해 형성된 만큼, 신을 인간과 분리시켜 절대적 위치로 상정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특히 반발하는 입장을 취한다.
세상엔 보이지 않지만 퍼져서 활동하는 기(氣,에너지)가 있다고 믿으며 이러한 에너지의 활동들이 세상을 주관해 우주 만물의 모든 활동과 생물을 소생 시킨다고 믿는다. 기가 모여 응축되면 지극한 기운이 되는데, 이것을 '신(한울님)'으로 믿는다.
지극한 기운(지기)는 그냥 얻어지는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정성, 공경, 믿음 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또한, 육신의 쾌락과 고통 관념에서 벗어나 깊은 도에 이른다는 건 불교와도 비슷하다. 지기가 사람의 몸과 마음에 임하면 비로소 깨어있는 상태가 된다.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마음에 지극한 기운(신, 한울님)을 영원토록 몸과 마음에 모시는 것이 천도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며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기운인 정신 에너지는 영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한 사람이 죽을 때의 기운의 남아서 떠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귀신 등 전통 민간신앙 요소 또한 내포하고 있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의 하는 근본원인은 한울님이라고 기록되어있다. 1860년 최제우는 한울님을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고, 후에 한울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최제우도 처음에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거부하였으나, 한울님의 도움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결론적인 교리는 생로병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부와 주문을 믿고 정성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태어나는 것은 한울님의 은덕이고, 은혜이지만, 살고, 늙고, 병걸리고, 죽고의 문제는 자연의 흐름이다. 하지만 이런 운명을 극복하는 것은 얼마나 믿고 정성을 다하는 것에 달려있라고 말했다. <동경대전 포덕문 논학문>
참고로 오늘날 어린이날은 천도교에서 시작되었고, 어린이라는 단어는 천도교에서 나왔다.[6]사람의 마음은 모두 평등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천도교는 정성, 공경, 믿음을 중요시하는데, 그 중에 하나인 공경은 사람의 언행과 관련이 깊으며, 사람 대하기를 한울(하늘)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도 나의 마음만큼이나 소중하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함부로 해치면 자신의 마음도 해치기 때문에 신(한울님)을 모시는데 방해가 된다고 믿는다. 즉, 나이 많다고 아랫사람 함부로 대하지 말고, 신분 높다고 함부로 갑질하지 말란 뜻이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퇴폐적이며 저속한 사회는 지극히 암울해지며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고 본 것이다. 최제우는 말기조선 양반들의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 갑질, 허세에만 치중해 안분지족하는 모습들과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하며 비발전적인 사고방식을 슬프게 생각했다.

5.2.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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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구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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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발표 후 검토를 거쳐*, 2014년 3월 25일(포덕 155년) 정식 발표된* 천도교의 신 예복.* 왼쪽부터 교역자복(남/녀), 집례복(남), 수련복(남/여), 청수봉전복(여), 설교자복(남)이다.

5.3. 의례


모든 천도교 신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5가지 의무인 오관(五款)이 있다.

  1. 삼칠주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수행하기.
  2. 청수봉전(淸水奉奠), 즉 모든 행사에 맑은 물을 모시기
  3. 시일(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시일식(천도교의 종교행사를 말함)에 참여하기
  4. 성미(성금 내기),
  5. 기도(한울님에 대해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리는 심고)
여담으로 대부분의 백과사전을 비롯한 사전에는 오관 중 성미(誠米)를 설명하면서 '매일 아침저녁마다 쌀 한 숟가락씩 떠서 모아 한달에 한번 교단에 바친다'라고 설명하나, 이건 옛날 이야기. 지금은 당연히 돈으로 낸다.(...)[7]
천도교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사상을 차릴 때 벽 쪽에 위패를 놓고 벽 쪽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8] 이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시천주 사상에 입각해 1897년 4월 5일 동학창도38주년기념식전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1900년 <천도교의절>에서 공식화되었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 지내는 차례의 경우 전통방식대로 제물을 진설하기도 한다.
천도교의 삼칠주는 최제우가 했던 선생주문과 추종자들이 했던 제자주문이 다른데, 제자주문이 표준이다. 선생주문은 최제우 본인이 해야 말이 되는 내용이라 드물게 개인적으로 선생주문으로 수도해보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주문을 잠시 사용하기도 했고[9], 또한 처음 천도교에 입교할 때는 주문의 일부만 전해주기도 했지만, 점차 제자주문 전체를 입교하는 날 전해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4대 교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 시절인 1908년, 천도교단 차원에서 종교축일을 전부 양력으로 기념하기로 정하고 1909년부터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기존의 음력 날짜를 따로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고, 날짜를 그대로 옮겼다. 예를 들어 최제우가 1860년 음력 4월 5일에 신인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양력 4월 5일에 기념하는 식이다.[10] 천도교 내부에서도 이렇게 날짜만 옮기지 말고 양력으로 환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교단이 방침을 바꿀 정도는 아닌 듯하다.

6. 역사



6.1. 일제강점기


전신인 동학이 구한말 반외세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했듯이, 천도교 또한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에 맞서 활약한다. 가장 유명한 업적으로서 1919년 3.1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주축이 되어 주도했으며, 1920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기관지인 개벽을 간행하여 민족 정론지로 발돋움시킨다. 이런한 배경으로 1920년대 이후 발흥하였던 사회주의세력이 천도교를 좌우합작을 위한 민족주의세력의 대표로 인식하였다. 이는 종단이라는 특성상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단체보다도 재정적인 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인식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소려공산당은 한반도 내부의 사회주의 세력에게 천도교 세력과 함께 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6.10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어린이, 여성인권은 물론 심지어 지구 환경까지 존중(천지부모 일체설)하는 상당한 선구자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 당시 천도교의 활약은 어린이날 지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대표적인 천도교인이다. 그는 당시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의 셋째 사위였다. 게다가 '어린이'라는 용어 자체가 천도교에서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린이에게 경어 사용 역시 천도교가 만들고 시작한 것이다.
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동덕의숙도 천도교에서 설립한 일종의 미션스쿨이었다. 또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도 이용익에게서 김성수가 인수하기 전까지 천도교에서 운영하였다.

6.2. 신구파 갈등과 신파의 친일 행적


손병희를 수반으로 하는 대통령제 임시정부가 대한국민의회에서 조직되었다는 설이 인터넷에 돌아다니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대한국민의회는 소비에트 제도를 수용하였기에 단순한 의회기능뿐만 아니라 사법, 행정의 기능까지도 통일적으로 공유한 조직이었다. 따라서 의회와 구분되는 내각, 즉 행정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부분은 이미 1988년에 반병률의 실증적인 연구로 충분히 반박되었고, 현재 학계에서도 대한국민의회에는 별도의 대통령제 임시정부가 없었음이 당연한 통설이다. 여전히 웹상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닌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1922년 손병희가 사망한 후 천도교 내부는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는데, 이를 '신구파 갈등'이라고 칭한다. 기존 독립투쟁 노선을 따르던 손병희 계열 구파와 민족개조론자치론을 주장한 최린 계열의 신파간 갈등이 심했다. 그래도 신구파 갈등이 심각함을 신파와 구파 모두 알아서 1930년대 초반 일시적으로 신구파가 통합됐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분열되었다.
이후 신파가 천도교를 장악해 천도교는 3.1 운동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주 노골적인 친일 종교로 변질되었다. 자치론과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며 노골적인 친일파로 전향했고, 그 거두가 최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반감을 가진 일반 신도들을 억지로 동원해가며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사종교단체 취급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끌려간 최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는 말도 있다.[11]
일진회도 엄밀히 말해서 이쪽 계열이다. 애시당초 동학이 이름을 천도교로 바꾼 이유가 손병희가 일진회 창립 멤버인 이용구와 손을 끊으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구파는 반일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무인멸왜기도운동(1938년 무인년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일제에 적발되어 구파의 세력이 거의 사라졌다. 신구파가 혁파된 것은 8.15 광복 이후다.


6.3. 해방과 군사정권 시기


해방 후에는 세력이 급속히 미미해져 현재는 꽤나 마이너한 종교가 되었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지독한 신구파의 갈등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와중에서 조직과 세력이 대부분 와해되었고, 신도의 상당수가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12]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국전쟁 직후 월남한 천도교인들이 많았고[13] 박정희 정권 때 정권의 지원으로 인해 교세 재건을 시도했다.[14] 이 시기 1960~1970년대 당시 천도교는 '반공종교'라는 이름하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종교였고, 교령에도 정치와 연줄이 닿은 사람들이 많이 앉으면서 종교집단보다는 정치집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불교, NCCK계열의 개신교, 가톨릭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 때 천도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1978년 천도교 춘천교구장이 유신정권에 반대해 분신 자살한 것이 거의 유일한 민주화 운동 참여다.
그러나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개입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서독 대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최덕신 교령이 1986년 4월에 월북하는 사건이 터졌고, 천도교 교단은 이 사건에 타격을 받아 거의 교세가 무너졌다. 거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1997년 8월 오익제 교령(2012년 9월 1일 북에서 사망)의 월북 사건이다.

6.4. 현재


원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취지는 난세에 흔들려서는 안되는 조선인들의 근본 신앙관과 마음가짐이었다. 이후 변질되어 정치집단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다 교령들의 월북 사건으로 결정타를 입어 흔들리고 교세도 쇠퇴하였던 천도교는 이후 종교 본연의 성격을 되찾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 등 학자들의 교학 연구에 대한 노력을 했으나 신도수의 감소폭만 줄였을 뿐이다.

위의 서울교구 중앙대교당만 보면 지금도 교단활동이 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국내의 민족종교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본부를 제외하면 상황이 상당히 열악하다. *

2014년 12월에는 서울 서소문 성지화 사업과 관련해 천주교 서울대교구과 마찰을 빚었다(관련 링크 참고). 천도교 측에서는 서소문에서 동학 신자들도 순교했고 효수당했는데[15] 천주교만 서소문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에 세워진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성지화 사업을 추진했는데, 천주교의 순교지이자 최제우 순교지여서 천도교에서 반발했다(관련 링크).
이외에 식목일 폐지[16] 를 반대한 곳이 천도교인데 최제우 선생이 동학의 깨달음을 얻었음을 기념하는, 천도교 최대의 축제일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1908년까지는 음력 4월 5일에 기념하였는데, 1908년에 천도교에서는 음력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옮겨 기리기로 결정하고 1909년부터 최제우가 계시받음을 양력 4월 5일에 기념하였다. 식목일과 천도교 그 자체는 연관이 없지만 4월 5일을 천도교의 날로 동시에 기념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으며 실제로 신도들은 4월 5일을 누가 물어보면 식목일과 천도교 창시일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2개를 동시에 대답한다.

7. 북한에서의 천도교


김일성세기와 더불어에서 천도교를 다소 찬양하였고, 북한 지역에서는 천도교청우당이 우파 종교정당이 되어 당초에는 막대한 당원을 바탕으로 무시 못할 세력이었으나, 1950년 영우회(靈友會) 사건을 비롯한 탄압과 숙청, 지도부 장악을 당한 끝에 어용 위성 정당으로 전락해버렸다. 현재 북한에서는 공식적인 천도교 조직으로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와 "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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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평양교당에서 봉행되는 시일식
북한 정부 및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가 UN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북한 천도교는 신자 1만 5천여 명에 교당 52개 시설이 있어서 북한에서 가장 신자 수가 많은 종교라고 한다. 평양에는 평양교당이 있고 남북천도교 합동시일식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북한이 주장하는 통계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8. 신자인 유명인



9. 둘러보기





[1] 실제로 영문 웹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다 나오는 개념이다. 심지어 관련 상품도 제작되고 있다.[2] 물론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3] 출처 통계청[4] 1955년 1월 13일 천도교 교헌(敎憲)이 나오면서 공식적으로 대표를 교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기는 3년이며 3년에 한 번 열리는 천도교 전국대의원회의에서 새 교령을 선출한다.[5] 다만, 동학의 탄생이 유불도와 관계가 없는 한국의 고유 사상이라는 연구논문도 있다.[6] 당장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이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위였고 방정환 본인도 천도교인이었다.[7] 대신 액수가 정해져 있다. 한때는 1인당 5,000원이었으나 포덕 155년(2014년)부터 10,000원으로, 반년마다 내는 연성금은 1호당 40,000원을 내던 것에서 1인당 20,000원을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포덕 160년(2019년) 기준[8] 반대로 일반적인 유교식 제사에서 벽 쪽에 위패를 놓고 위패를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는 방식을 향벽설위(向璧設位)라고 한다.[9] 조선 조정의 탄압을 피해 최시형이 별개로 만든 주문도 있었고, 그외에 교파에 따라 다른 종교 영향을 받아 불교나 도교의 주문을 같이 하거나 창작하기도 했다. 다만 현 천도교에서는 최제우가 받았던 주문들만을 인정한다.[10] 1860년 음력 4월 5일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5월 25일이다.[11] 심문장에서 자기변호에 바쁜 이광수를 향해 입 닥쳐!를 외친 일화로도 유명하다.[12] 광복 당시 북한지역에는 천도교도가 150만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북한의 다른 종교 신자를 합친 수보다도 많은 수였다. 천도교 다음은 37만 5천명의 불교.(북한 "조선중앙연감", 1950).[13] 1920년대까지만 해도 무려 300만이라는 신도 수를 보유했고, 그 이후로 신도 수가 대폭 하락했음에도 60년대 당시 기록에 따르면 무려 60만명이 넘는 천도교인들이 월남했다고 한다.[14] 대표적인 예로 수운회관 건립, 용담정 정비 등이 있다.[15] 순교: 최시형, 이필제, 전봉준, 최재호, 안교선/효수: 김개남[16] 정확히는 공휴일에서만 제외하는 것이지만 뜻도 불명확한데 쉬는 날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냥 폐지로 보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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