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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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Forces armées françaises
French Armed Fo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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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비군
301,000명[1]
예비군
195,770명
육군력
3.5세대 전차[2]
200대[3]
장륜형 대전차 장갑차
248대[4]
'''장갑차(APCs/IFVs) 총합'''
3,671대 (2017년)
견인포
12문[5]
자주포
109문
MLRS
13대
수송 차량
13,748대
공군력
4.5세대 전투기[6][7]
150기[8][9]
4세대 전투기[10][11]
137기[12]
조기경보관제기(AWACS)
4기
조기경보기
3기[13]
전자전기(SIGINT)
2기
공중급유기
30기
'''공군기 총합'''
약 790기
헬리콥터
810기 (2011년)
'''항공기 총합'''
1,757기[14] (2011년)
해군력
해군 '''전투함 총합'''
86척
주력 수상함
7천톤 이상 ~ 8천톤 미만 준이지스 전투함
2척[15]
6천톤 이상 ~ 7천톤 미만 준이지스 전투함
5척(+3척)[16]
4천톤 이상 ~ 5천톤 미만 준이지스 전투함
(+5척)[17]
4천톤 이상 ~ 5천톤 미만 전투함
6척[18]
3천톤 이상 ~ 4천톤 미만 전투함
5척[19]
2천5백톤 이상 ~ 3천톤 미만 전투함
6척[20]
1천5백톤 이상 ~ 2천톤 미만 전투함
1척[21](+18척)[22]
1천톤 이상 ~ 1천5백톤 미만 초계함[23]
10척[24]
1천톤 미만 초계함, 고속정
18척
모함, 상륙함, 수송함
4만톤 이상 ~ 5만톤 미만 항공모함
1척[25]
2만톤 이상 ~ 3만톤 미만 강습상륙함
3척[26]
1만톤 이상 ~ 1만5천톤 미만 LPD
1척[27]
1천톤 이상 ~ 1천5백톤 미만 LST
3척[28]
1천톤 미만 상륙함
24척[29]
잠수함
1만2천톤 이상 ~ 1만3천톤 미만 SSBN
4척[30]
4,500톤 이상 ~ 5,000톤 미만 SSN
(+6척)[31]
2,400톤 이상 ~ 2,500톤 미만 SSN
6척[32]
'''잠수함 총합'''
10척(+6척)
예산
'''국방비 총합'''
638억 달러 (2013년)
1. 개요
2. 수뇌부
3. 예산과 경제규모
4. 역사
4.1. 고대
4.2. 중세
4.3. 근세
4.6.1. 엘랑 비탈 교리
4.6.3. 서부전선의 주력
4.10. 현대
4.10.1. 현대 프랑스군 이미지
5. 군별
5.1. 육군
5.1.1. 편제
5.1.1.1. 육군인적자원국
5.1.1.2. 지상군사령부
5.1.1.3. 지상장비정비운영통합구조본부
5.1.1.4. 국토지상사령부
5.1.1.5. 육군특수전사령부
5.1.1.6. 육군경항공사령부
5.1.1.8. 국외 및 해외영토 참모본부
5.1.1.9. 육군기술국
5.2. 해군
5.3. 공군
5.4. 국가헌병대
6. 계급
7. 프랑스군의 무기개발사
7.4. 개인화기
7.5. 공동개발 관련 에피소드
7.5.1. 유로파이터 프로젝트
7.5.2. 토네이도 프로젝트
7.5.4. 차기 호위함 사업: FREMM급
7.5.6. 기타
8. 장비
8.1. 제1, 2차 세계 대전
8.2. 현대
8.2.1. 육군
8.2.2. 해군
8.2.3. 공군
9. 관련 인물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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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군대다.
제1차 세계 대전 전, 대전 중의 실수와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한심한 모습들 때문에 굉장히 저평가되기도 했다.[33] 제2차 세계 대전 말고도 양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에서 가장 주요한 전쟁 중 하나였던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참패한 것,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알제리 전쟁에서의 만행과 베트남 전쟁의 패배 등도 프랑스군에 대한 평가를 낮추는 데 일조했다. 대표적으로 마지노 선 같은 경우는 군대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어느 정도 알 정도니 이미지가 안 좋을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엘랑 비탈이나 청년학파, 1인승 전차포탑, 베아른급 같은 프랑스군의 흑역사들이 군사무기 매니아들이 관심 있어하는 시대 중 하나인 근현대 시기에 몰려있는 점도 프랑스군의 저평가에 한몫하고 있다. 대비적으로 미군이나 영국군, 소련군, 독일군은 하나같이 근현대 전사에 큰 임팩트를 남겼지만, 프랑스군은 결정적인 순간에 안 좋은 꼴을 보여주고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그런 이미지가 더욱 부각된 것. 특히 정규군인 독일군한테는 보불전쟁 때도 2차 대전 때도 허구헌날 털리던 주제에, 2차대전 종전 이후에는 독일에 국토가 유린당해서 복구하느라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을 때도 그놈의 제국주의 시절 자존심 때문에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베트남의 사정 열악했던 독립군들 앞에서는 정반대로 여포처럼 굴다가 그나마도 또 졌다는, 분노조절잘해 방구석 여포같이 보일 정도로 비웃음 당하기 딱 좋은 역사 때문에(...) 더 그런 면도 있다. 오죽하면 오늘날에도 프랑스와 백색깃발이 하나의 밈(인터넷 용어)으로 정착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현대 시기의 몇몇 졸전으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역사적으로 볼 때 프랑스군은 고대부터 매우 강력한 군대로 손꼽혀왔다. Telegraph에 따르면 '''유럽 역사상 가장 군사적으로 성공적인 국가'''가 바로 프랑스이다. (링크, 그 내용인즉, 니얼 퍼거슨에 따르면 기원전 387년 이래 프랑스는 168번의 전투에서 109승 49패 10무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의 기사 외에 다른 출처의 자료를 보더라도 프랑스의 역사상 승전 횟수는 상당한 수준이며 특히 군사학적인 측면에서도 나폴레옹이 전쟁을 수행할 당시 급진적으로 새로운 보병 전술과 전투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베르됭 조약으로 서프랑크 왕국이 프랑크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이후부터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까지의 전투들만 따로놓고 봐도 프랑스의 승전이 적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는 프랑스 외에 다른 육군 강국인 스페인, 오스트리아(또는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의 쟁쟁한 나라들과 수세기에 걸쳐 대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17, 18세기까지만 해도 일 대 일로 프랑스를 인구와 본토 경제규모 모두로 압도할 수 있는 나라는 그 어떤 나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프랑스는 인구 2천만을 넘어 3천만에 육박했고, 순수한 본토 생산력도 단일 국가 중 1등이었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 이 시절 프랑스를 가르키는 별명 중 하나가 '''유럽의 중국'''이었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는 영국이, 인구 수준으로는 러시아가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프로이센이 버티고 있었지만 모두 그 외에는 부족했다.
물론 루이 14세 시기 말년엔 패했지만(사실 패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루이 14세 말년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반에는 영국과 오스트리아를 위시한 유럽 동맹군에게 처발리긴 했지만, 말플라케 전투에서 영국군과 오스트리아군에게 피로스의 승리를 안겨주어 전쟁이 끝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치세 내내 최전선에서 활약한 군의 높은 전투력, 국내에서 내정을 잘 꾸린 관료행정체계[34]에 힘입어 유럽에서의 패권을 유지했고 해상에서도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과 경쟁해야 하는 조건 속에서도 당대 열강의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없으며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영국을 상대로 17-18세기 동안 전 세계의 바다에서 충돌하는 저력을 보여준 군대였다. 특히 나폴레옹의 대육군 시기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온 힘을 합해 공격을 해도 국가와 개인을 일체화시켜 애국심이 높은 자원들이 들어오고 하급제대에도 바로 상위제대의 작전계획의 대략적인 개요 정도는 알려주어 유연성을 높이고 바로 이시기 유능한 인재들이 여기저기서 나와 그것을 바탕으로 연승행진을 이어가는 엄청난 전투력[35]을 보여줬으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로 인한 몰락 이후에야 다구리를 쳐서 간신히 프랑스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 이후 가장 큰 전쟁이었던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군에 궤멸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겪으면서 프랑스군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19세기 이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쳐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도 육군, 해군을 통틀어 유럽 내 주요 군사강국 지위를 계속 이어갔다. 물론 근현대에는 군사력에 걸맞지 않은 성과를 보인 것도 사실은 사실인데 실은 러시아 제국 역시 그와 비슷했고 소련도 동부전선 이전까지는 성과 자체가 썩 훌륭하다 할 수 없었다. 영국 육군 역시 전투에선 지고 전쟁에서 이기는 타입이라[36] 전공이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군사력에도 전술적 승리를 자주 거둔 프로이센군이 유럽 열강 중에서도 돋보였던 것이다. (괜히 세계적으로 프로이센빠가 있었던 게 아니다.)
육군의 경우 근대에 영국, 독일 등이 치고 올라오기 전까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제외하고 프랑스를 전력으로 상대할 만한 적수가 없었으며 세계대전 당시에도 리타이어하거나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는 지상전의 핵심을 담당했다. 군사 기술상으로도 프랑스가 남긴 거대한 족적은 현대까지도 충분히 알려져있다. 최초의 회전 포탑을 장착한 현대 시대의 모든 전차의 아버지인 르노 FT-17 전차도 프랑스에서 개발한 것이며, 총검을 뜻하는 영단어 바요넷(bayonet)이라는 말이 프랑스어 바요네뜨(baïonnette)에서 유래되었듯이 근대적 총검술도 프랑스에서 검술을 바탕으로 연구되어졌다. 무연화약 소총탄과 스피처 탄두 역시 프랑스에서 처음 개발하고 도입한 것이다. 최초의 현대적인 야포인 1897년식 75mm 야포도 이 나라에서 나왔으며, 프랑스산 75미리 야포는 훗날 2차대전시기의 대전차포, 대공포, 분야를 가르지지 않고 어쩃든 포술이 들어가는 분야에선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백병 근접전 같은 현대전에선 사실적으로 사라진 분야는 빼더라도 요새 축성술에서 포술, 기갑까지 프랑스군의 병기, 노하우, 기술자들이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은 현대 군사 분야를 찾기 힘들다. 기술적 한계 때문에 전열보병들이 전장식 소총들고 우르르 몰려 쏘는게 아니면 화기의 최대 효율을 발휘하는게 불가능했던 근세적 보병전투를 퍼커션 캡의 개발과 더불어 현대적인 후장식 소총을 중심으로 한 산개 보병 전투로 진화하는 데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긴 미니에 탄도 당연히 프랑스에서 나온 것이다. 당장 상술한 분야만 봐도 현대 포병, 개인 화기, 전차 등 현대 지상전을 주름잡는 핵심 분야가 모두 프랑스의 기술력이 막대한 공헌을 했다는 걸 볼 수 있다.
해군에 있어서도 영국 다음의 거대한 규모를 갖췄고 최초의 군용 스크류 추진 증기선 나폴레옹 호의 도입,[37] 최초의 항양장갑함 글루와 호의 도입[38] 등으로 해양제국 영국과 경쟁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육군, 해군, 공군과 핵전력 모두 균형잡힌 전력을 보유하여 강대국에 걸맞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것은 변함이 없으며[39] 냉전 시기에도 나토 통합군에서 탈퇴한 상태에서도 서유럽 방위에 한 몫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도 소규모 군사개입에서 대규모 전쟁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좋은 성과와 활약을 보여왔다.
현대의 프랑스군(Forces armées françaises)은 육군(Armée de terre), 해군(Marine nationale), 공군(Armée de l'air), 국가 헌병대(Gendarmerie nationale)[40]의 4군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군대의 허리를 책임지는 장교들에 대한 대우가 전세계 모든 국가들 중 가장 좋다.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판사나 의사급의 대우를 받을 정도로 장교가 엄청난 상위 계층의 직업이다. 어지간한 나라들은 자국 군대의 장교에 대한 대우가 좋은 편인데 프랑스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이유인 즉 프랑스의 사관학교는 그랑제꼴 수준의 두뇌와 매우 뛰어난 체력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며 외인부대에서 병부터 올라간 장교들의 경우 정말 극단적으로 엄선하여 선발된 인원이기 때문이다.

2. 수뇌부


대통령
국방장관
국방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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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마크롱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수아 르쿠앵트르 육군대장
육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
국가헌병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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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장
장 피에르 보시
장군
해군대장
피에르 방디에
제독
공군대장
오드라 라나타
장군
헌병대장
리샤르 리즈레
장군

3. 예산과 경제규모


'''프랑스 역대 국방 예산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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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전체 명목 GDP
(10억달러; 약 1조원)
경제성장률
영어위키 국방비 자료
SIPRI(10억달러; 약 1조원)
2000년
1,496
4.3%
33.8
2001년
1,485
2.1%
33.2
2002년
1,623
2.2%
36.4
2003년
1,877
3.9%
45.9
2004년
2,221
3.1%
53.0
2005년
2,324
3.2%
52.9
2006년
2,486
2.7%
54.5
2007년
2,858
3.4%
60.5
2008년
2,709
-0.7%
66.0
2009년
2,217
-5.1%
66.8
2010년
2,296
1.6%
61.7
2011년
2,464
1.1%
62.7
2012년
2,470
0.2%
58.9
2013년
2,523
1.7%
61.2
2014년
2,847
3.2%
-
2015년
-
-
-
2016년
-
-
-
2017년
-
-
-
2018년
-
-
-

중국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관중(관이오)이 말하길 부국강병, 즉 경제력이 곧 군사력이라 했다. 사실상 군사력과 경제력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국가의 경제규모나 경제력이 떨어지면 군사력도 쇠락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군사력의 예산 항목을 볼 때는 해당 국가의 경제성장률, 명목 GDP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GDP 대비 국방비도 국방예산의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프랑스의 국방예산은 2009년에 정점을 찍은 후 경제위기(유로화 사태) 등의 영향으로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2009년 당시 역사상 최고점 수준이던 유로화 대비 달러 교환비의 원인이며, 유로화 기준 국방비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이다.
현재 프랑스군은 파리테러 등의 안보적 위협이 증가하자 GDP대비 국방비를 2.3%로 늘린상태이다. 또한 마크롱 대통령은 징병제 도입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크롱의 국방정책 때문인지 프랑스군 예산이 세계 5위라고한다. 군사력에 거의 몰빵하는 러시아보다 많다.#

4. 역사



4.1.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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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 지역은 고대에는 갈리아라고 불렸고, 골족(켈트의 한 일파. 속칭 갈리아 켈트.)의 영역이었다. 골족은 전사계급을 우대하는 호전적인 종족이었으며 강력하고 정교한 정부 체계를 이룬 로마나 그리스계 국가들에 비해 아직 발전 단계가 부족 연맹 사회 정도에서 머물어 있는 야만족이었다. 이들은 가끔식 로마를 침략하기도 하였는데 아주 오랜 고대에는 로마를 점령하네 마네 하는 수준으로 위협적이었다.[41] 로마 공화국의 갈리아 신임 총독이자 사령관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인들의 이탈리아 침입을 원천 봉쇄하고 켈트 족속들 이외에 로마의 새로운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게르만 족[42]을 막아낼 전방 방어선을 형성하겠다는 명분으로 갈리아로 진격, 부족 사회에 머물러 있던 골족을 정복하고 10여 년 만에 갈리아 전체를 로마의 영토로 삼았다.
물론 당연히 모든 부족들을 해체하고 직할지로 삼은 게 아니라, 우호적인 부족들을 포섭하고 적대적인 부족들을 이이제이 + 자신의 군단으로 직속 타격하여 제압해낸 것. 그렇다해도 엄청난 전공으로 순식간에 갈리아를 정복해내었다. 이는 당시 카이사르의 정치적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에 비해 한참 부족했던 카이사르의 군공을 크게 끌어올려 카이사르가 차후 로마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골족에서도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베르킨게토릭스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여 로마에 적대적인 부족들은 물론 우호적인 부족들까지 최대한 설득, 골족 대다수를 규합하여 로마 군에 대항했으나, 베르킨게토릭스 본인의 기반이 그렇게 강한 부족 출신이 아니라는 점으로 인해 자신이 추구하는 전략, 전술을 휘하 부족장들의 의견 때문에 제약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베르킨게토릭스는 필요 이상으로 잔혹한 결정을 많이 내리기도 했다. 자신의 부족 배경이 약하니 휘하 부족장들을 고분고분하게 다루려면 힘과 잔혹성을 보여줘야했기 때문이다. 반면, 공화국이기는 하지만 해당 지역 사령관-총독에게 매우 막강한 권한을 주고 중앙 집권적인 정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제대로 된 '''국가'''인 로마는 힘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골족에 비해 한참 우위였기 때문에 사투 끝에 골족 연합은 로마와 카이사르에게 패배한다.
기본적으로 축적된 전략, 전술의 경험적 차이도 컸으며 이 때문에 로마 말기로 갈수록 본디 체격과 힘은 더 센데 전략, 전술, 이를 구사할 조직력이 미약하던 켈트, 게르만 야만족들이 점점 나라 꼴을 갖추고 이 분야에서 로마를 따라잡으면서 로마가 더 이상 야만족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어려워졌다. 국가 시스템의 수준 차이 때문에 로마가 구사할 수 있는 대전략과 골족 연합이 구사할 수 있는 대전략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베르킨게토릭스 본인도 이를 알았는지 카이사르를 일단 내쫓기 위해 청야 전술을 구사하며 카이사르를 궁지로 몰기까지 했다. 이렇듯이 골족이 약세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로마군에게 항상 개털린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는 사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대봉기 이후로 자신이 이전에 점령했던 갈리아 땅 대부분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갈리아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처럼 통합된 '국가'를 이끈 인물이 아니라 '야만족들의 부족 연합'을 이끈 인물이었기에 휘하 부족장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고 끝내 몇 차례의 전략적 오판을 저지름으로써 완전한 청야 전술로 카이사르의 숨통을 끊을 수 없었다.
부족장들의 요구 때문에 청야 전술에서 제외시킨 도시인 아바리쿰을 카이사르가 함락시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카이사르는 허덕이던 보급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자신의 군단을 정비하여 베르킨게토릭스에게 재도전할 수 있게 된 것.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전투에서 기적적 대승리까지 거두면서 골족 연합을 박살낼 확고한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결국 자신의 대전략이 실패했음을 직감한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하면서 이후 갈리아는 완전히 로마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로마 제국의 장기간에 걸친 통치 끝에 골족은 거의 정체성을 잃고 로마화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 언어까지 잊어버리고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된다. 로마의 모든 속주들 중에서도 가장 충실하게 로마화된 지역이었기에 갈리아인들은 거의 제2의 로마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 이를 흔히 '갈로-로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갈로-로만 문화는 훗날 이 지역을 장악한 게르만계 민족인 프랑크족의 문화와 섞이면서 오늘날의 독특한 프랑스 문화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이렇듯이 갈리아 켈트족에 대한 개념은 훗날 거의 사그라들어버리지만 19세기 민족주의가 고양되었을 당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베르킨게토릭스를 필두로 당시의 갈리아 켈트 전사들은 외세의 침입에서 프랑스 민족을 지키려한 영웅처럼 그려지게 되었다.
이후 게르만 계통 민족들이 동쪽에서 온 아바르, 과 같은 유목민 세력들의 침략을 받아 게르마니아나 오늘날의 폴란드 땅에서 더더욱 서쪽으로 대대적인 이주를 시작하면서 갈리아 지역은 곧 게르만계 민족들에게 개발살이 나버린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게르만 족은 현대 독일 민족을 말하는게 아니라 게르만 계통의 잡다한 민족들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이 족속들 중에는 앵글로, 색슨, 알레만, 프랑크, 부르군드, 프리스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제일 막강한 세력을 자랑한 것은 프랑크와 색슨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게르만이라 불린 이유는 로마인들이 라인 강 너머 동쪽을 야만족들 사는 동네라는 의미로 게르마니아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프랑크족은 단순히 갈리아 땅을 약탈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정착한 고트, 반달, 수에비 족들 과는 달리 갈리아 땅에 아예 정착해버렸고, 그래서 이것이 현재의 프랑스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봐도 좋다. 프랑크족은 평야가 대부분이고 온후한 기후에 농사도 잘 되는, 그야말로 유럽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한 덕에 다른 게르만계 부족들이 세운 정착 국가들보다 훨씬 빨리 안정된 국가를 건설했다. 클로비스를 시작으로 서고트, 동고트의 세력과 서유럽 패권을 삼분한 프랑크 왕국은 꾸준하게 성장하여 고대 말에서 중세 초로 넘어갈 무렵의 프랑크 메로빙거 왕조 말기,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멸하고 이베리아를 석권한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당시의 궁재이자 뛰어난 지휘관인 카를 마르텔이 격퇴하여 유럽 기독교의 방파제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에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이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것이 흔히 말하는 카롤링거 왕조이다. 카롤링거 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당연히 카롤루스 마그누스, 즉 샤를마뉴이다. 이 샤를마뉴의 시기를 서유럽 고대의 종식이자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프랑크 왕국은 유럽의 한복판에 있는 그 위치적 특성 + 지형적 특성(평야가 대부분) 때문에 이슬람 세력을 격퇴해낸 카를 마르텔 시기에서 서유럽 판도를 완전히 구축한 샤를마뉴 시기에 이르는 동안 꾸준히 군제를 개혁하여 기존의 보병 중심[43] 체계에서 소수 정예의 중기병 중심 체제로 국가 군사 체계를 변환한다. 이는 히트 앤 런에 능한 아랍 - 북아프리카 이슬람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는 학설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사방 팔방의 적수들을 빠르게 타격하여 무너뜨리고 다음 전장으로 가기 위해서, 그리고 평야 지대에서는 중기병이 효율적이라는 점 등의 이유가 근본적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동시에 부족장, 부족 귀족 출신들로 형성된 초기적 봉건 영주 체계의 시스템상 대량의 보병 동원력보다는 봉건 영주들의 소수 정예 군단을 소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요소도 크다. 이는 훗날 중세 프랑스가 기사 전술의 본고장이자 중세 전술을 완성시키는 본고장이 되는 첫 단추로 작용한다.
순수하게 아랍 - 북 아프리카 이슬람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한 맞춤형 경기병 전술은 당장 이슬람 세력과 칼 맞대고 허구한 날 싸워야하는 아스투리아스 왕국 계통의 이베리아 기독교 왕국들이 훨씬 더 발달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기병 중심 편제는 사방에서 싸워야할 적들을 빠르게 분쇄하고 다음 전장으로 가기 위한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훨씬 컸다.

4.2.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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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의 왕, 현대 프랑스어로 샤를마뉴라 불리우는 인물인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아버지 피핀으로부터 나라를 분할 상속받고, 자신의 동생이 의문사하면서 통합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재위한다. 그야말로 중세 서유럽의 판도를 홀로 만들었다는 평가까지 받는 '''성황'''답게 카롤루스는 생애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내면서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혔고 당시 게르만의 한 일파로써 이탈리아 전역을 가까스로 통일한 롬바르드 족의 롬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북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었으며 할아버지가 격파한 이슬람 세력들을 일소하고자 이베리아 원정을 하였다[44]
또한 당시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독일 지역은 제대로 기독교화 되지도 않았고 여전히 오딘, 토르 등을 섬기는 게르만 계 군소 왕국들이 난립하고 그 와중에 두각을 드러내던 색슨(독일어로는 작센. 브리튼 제도로 나아가서 잉글랜드를 건설한 색슨 족과는 다르다. 같은 친척에 가깝긴 하지만.) 세력이 독일 지역에서 패권을 확립할만한 위치에 있었는데 카롤루스는 독일 지역에 수 차례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그야말로 일생에 걸쳐서 색슨과의 대전쟁을 펼쳐 색슨을 끝내 무력화하고 독일 전역을 장악하는 것에 성공한다. 카롤루스 덕분에 독일 지역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기독교와 라틴 문화가 유입되며 발전할 수 있었던 것. 마침내 서로마 황제 제관까지 쓰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카롤루스는 이후 사망할 때에 자식들에게 나라를 삼분할(정확히는 사분할이다.)해서 나눠준다. 이것은 동아시아 특유의 유교적 장자 상속 질서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는 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중세 초기만 해도 아들들에 대한 분할 상속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이에 서 프랑크(오늘날의 북부 프랑스), 아키텐(오늘날의 남부 프랑스), 중 프랑크(오늘날의 라인란트 지역과 북 이탈리아), 동 프랑크(오늘날의 독일)가 생겨났고 서 프랑크는 카롤루스의 후손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다 왕조가 끊어지면서 파리 백작 위그가 왕위에 올랐고 이로써 그 유명한 카페 왕조가 구축되어 오늘날의 프랑스가 되었으며 아키텐은 서 프랑크에 흡수되었고 중 프랑크는 서 프랑크와 동 프랑크에 나눠 먹혀서 사라졌다.[45] 왕권이 미약했던 동 프랑크는 비록 하나의 강력한 단일 왕조가 등장할 순 없었지만 신성 로마 제관까지 얻어 유럽 역사를 관통하는 신성 로마 제국 개념을 만들어낸 오토 대제와 같은 명군이 등극하여 동 프랑크 - 신성 로마 - 독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당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인근에 퍼져서 거주하던 유목민들인 마자르 족은, 샤를마뉴의 공세로 궤멸당하고 이후 구축된 동 프랑크 왕국에게도 짓밟혀 유목민으로써의 역량은 물론 농경 국가가 되기도 어려울 정도로 상황 열악했던 아바르 족을 공격하여 그 세력을 흡수해버렸고 아바르 족의 터전이던 카르파티아 분지를 장악했다. 아바르 인들, 카르파티아 슬라브 인들과 섞이면서 그들의 인력을 얻어낸 마자르 족은 더욱 더 서진하여 중부 유럽을 가로지르는 강력한 유목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지만 동 프랑크의 오토 대제에게 레히펠트 전투에서 대패당하였다. 격파당한 마자르 족은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농경민이 되면서 카르파티아 분지에 국가를 건설하였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헝가리이다.
이 모든 것이 카롤루스가 벌인 정복 전쟁의 결과물임을 생각하면 프랑크 왕국의 군사 활동이 훗날 유럽의 판도 형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다.
이후 노르드의 약탈자 무리들[46] 중 한 일파가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지역을 약탈하고 격퇴당하기를 반복한 끝에 서 프랑크 왕실에 복종하기로 하고 노르망디 지역을 작위로 받아 서 프랑크의 귀족 세력에 편입되었고, 이들의 후손이 노르만 족이 되면서 중세 서유럽 기사 전술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을 이끌어낸다. 프랑크 인들의 기병 전술에 영향을 받은 브르타뉴 인들과 노르만 인들은 점차 기병 전술을 개량하여 프랑스 북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기사 집단이 되었다. 11세기, 상속권 문제로 인해 정당한 잉글랜드 정복 명분을 얻은 노르망디 공작 정복왕 윌리엄이 바로 바다 건너 맞은 편의 영국을 공격할 때의 핵심 주력도 바로 이 노르만, 브르타뉴 기사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몇몇 노르만 세력들은 따로이 지중해까지 진출해 교황과 야합하여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과 이탈리아 반도에 남아있는 친 동로마 영주들이나 동로마 총독들을 박살내고 아풀리아 공국과 시칠리아 백국을 건설한다. 후에 그 유명한 효웅 로베르 기스카르와 교황청의 야합하에 이 노르만 시칠리아 세력은 시칠리아 왕국으로 승격되는데 이 시칠리아 왕국은 한국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꽤나 강력했던 왕국으로 국력 상 압도 우위인 동로마 제국을 수시로 위협했을 정도였다.[47] 당시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는 북 아프리카의 아랍 이슬람 토후 세력들과 토착 롬바르드-이탈리안 계 영주들, 로마 제국의 3개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각축장이었는데[48] 로베르 기스카르와 노르만 세력에 의해 이들이 싸그리 박살나서 그대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헌납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전쟁 역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프랑스 기사단과 군대의 용맹은 십자군 전쟁에도 크게 활약을 했다. 십자군의 중심은 프랑스 출신의 기사들이었고 이들은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함께 서 프랑크 왕국은 카페 왕조의 장기적인 통치 아래에 점차 오늘날의 '''프랑스'''의 개념을 확립하였다. 당시 프랑스 왕국은 1214년, 프랑스 북부의 부빈에서 '''존엄왕''' 필리프 2세가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어 영국의 존 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4세가 결성한 3만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본디 필리프 2세 생애 최대의 장벽으로써 지용겸비의 명장이자 일신의 엄청난 무용을 자랑한 괴물인 잉글랜드 국왕 '''사자심장''' 리처드 1세가 필리프의 원대한 계획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그가 사망한 이후로 잉글랜드는 더 이상 필리프 2세를 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 리처드 1세의 사망 이후,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 군과 싸우는 족족 개박살이 나며 참패를 당했는데 이를 만회하기 위한 존 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와의 친분을 이용해 연합군을 결성해서 도전했다가 또다시 개박살이 난 것. 존은 이후 분노한 귀족들 앞에서 마그나 카르타를 서명하며 데꿀멍해야했다.
이후 필리프 2세의 아들 '''사자왕''' 루이 8세 시기에는 아예 잉글랜드 침공까지 감행한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원정은 실패했지만 루이 8세 본인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무패의 국왕이었기에 '사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루이 8세의 아들 '''성왕''' 루이 9세가 비록 실패했으나 그동안 쌓여온 국력을 방출하며 두 차례 십자군을 주도하면서 13세기 프랑스는 서유럽의 중심 국가로 크게 부상한다. 이 루이 9세 통치 시점이 카페 왕조와 중세 프랑스의 최대 전성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듯이, 그전까지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던 프랑스의 왕권이 출중한 권모술수의 달인이자 위대한 행정가였던 필리프 2세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부빈 전투를 기점으로는 아예 프랑스 국왕의 위상이 하늘을 찌르게 되면서 프랑스 제후들의 위세가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결국 프랑스는 카페 왕조의 기치 하에 강한 단합력을 얻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옆의 신성 로마 제국이 장기간의 통치 왕조를 형성하지 못하고 제후 선거제의 질서 하에서 지방 분권적인 특색을 발달시켜 근현대까지 역사가 흘러간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형태로써 프랑스가 일찍부터 중앙집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가장 기본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필리프 2세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제도 설립자였고 그가 진두지휘하여 만든 여러 개념 하에 기존의 '''서 프랑크'''라는 개념은 이 시점부터 확실하게 '''프랑스'''라는 개념으로 변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루이 8세가 군사적인 업적으로 왕조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키고, 그 뒤의 루이 9세가 신앙심(십자군 주도, 이단 숙청, 유대인 탄압 등등), 능숙한 행정 통치 기반 확립을 이어나갔다. 3대에 걸친 명군들의 즉위로 인해, 프랑스라는 개념이 완전히 뿌리 깊게 형성됨과 동시에 군사, 경제적으로도 유럽 최강국이 된 것이다.
이러한 카페 왕조 최전성기 때에, 잉글랜드는 과거 헨리 2세 - 리처드 1세 때에 유럽 최강을 논할 정도로 강력했던 세력(소위 앙주 제국이라 불리우는)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대륙령을 잃어버린 잉글랜드의 국력으로는 카페 왕조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프랑스의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 그렇다고 영국이 유럽 대륙 이외의 지역으로 진출할 어떠한 항해 기술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샤를 4세가 죽고 카페의 부계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버리고 살리카 법으로 인해 가문 모계 상속이 불가능해지자 카페 가문의 방계 일족인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가 가장 가까운 친척 가문의 당주로써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발루아 가문이 카페 왕조를 대신하여 프랑스의 새로운 왕조가 되었으며 이것이 발루아 왕조이다. 그러나 발루아 왕조의 시작과 함께 프랑스는 내외적으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조인 플랜테저넷 가문은 카페 가문과 인척 관계였으므로 외손자의 권한으로 끊어진 카페 왕조의 대를 이어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위치였고 발루아 가문이 이를 거부할 명분도 딱히 없었기 때문. 따라서 발발한 전쟁이 백년전쟁이다. 백년전쟁을 흔히 국가 대 국가의 싸움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백년전쟁은 프랑스 내부의 영주들이 어떤 가문을 따라야하는가 하고 시종일관 이합집산을 반복한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 왕위 계승 전쟁이었다.[49] 자세한 것은 백년전쟁 항목을 참조.
이로인해 백년전쟁 초기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를 비롯하여 온갖 내부적 삽질로 인해 국왕 장 2세까지 사로잡히는 등, 발루아 프랑스 군은 잉글랜드 군에게 계속 대패를 당했으며 압도적으로 승리해야 마땅한 전력 차이였던 아쟁쿠르 전투에서 마저도 잉글랜드에 탈탈 털렸다.[50] 후에 잔 다르크의 활약 및 '''친 발루아 가문 영주 세력들'''인 아르마냑 파가 반 발루아 가문 영주 세력들인 부르고뉴 파를 누르는데 성공하면서 국력을 회복하고 영국을 프랑스 영토에서 상당 부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근본적으로 잉글랜드가 패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은 친 잉글랜드 파인 부르고뉴 세력이 잔 다르크와 발루아 가문, 아르마냑 파 영주들에게 차츰 개발살이 나기 시작하면서 대륙에 대한 교두보가 줄어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잉글랜드는 이후 역사 속에서 더 이상, '''자신들의 유럽 대륙 영토를 주제로''' 프랑스와 싸우지 않았다. 그럴만한 대륙 영토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 물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연합군 또는 그냥 해외 식민지를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는 여전히 프랑스와 꽤 자주 싸운 편이다. 어쨋든 플랜테저넷 가문은 얼마 안 가서 그 혈통이 끊어지고 이후 새로운 왕좌에 오르기 위한 영국 귀족들 간의 왕위 쟁탈전 '''장미전쟁'''이 발발하면서 잉글랜드는 대륙에는 더 이상 진출 욕구를 보이지 않았다. 장미 전쟁 이후의 잉글랜드의 최대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를 아우르는 브리튼 제도 지배권 확립 + 해외 식민지 확보였을 뿐.
덕분에 중세 초중후반에 걸쳐 싸웠던 최대 주적이 사라진 프랑스는 중세 말 - 근세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중세 말 - 근세 프랑스 출신 용병들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교활하고 잔혹한 것으로 화젯거리가 되었다. 백년전쟁을 통해 얻은 중세 전술의 완성판이 프랑스 용병들의 전쟁 감각으로 발현될 수 있었던 것. 어쨌거나 프랑스 군은 이후, 1515년에만 해도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강의 용병 집단으로 명성이 드높던 스위스 용병대들을 기사 돌격만 가지고도 박살내버리는 등 백년전쟁을 통해 얻은 군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상 '''중세적 전술을 완성시켰다.'''

4.3. 근세


백년 전쟁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군사강국으로 떠오른다. 전쟁중의 경험과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와 경제력, 강한 왕권[51]을 바탕으로 한 상비군으로 자연스레 대외 팽창 정책을 본격화하여 15세기말 샤를 8세 시기 이탈리아 원정에서 초반에 선전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후 프랑수아 1세 때 결국 그 유명한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의 정예군에 제대로 궤멸당해 왕이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다. 그리고 이후 스페인테르시오가 유럽 최강의 지위를 차지하고 프랑스군은 군사 강국임에도 유럽에서 패권국의 위치로는 아직 떠오르지 못했다. 기병 대국답게 16세기에도 기병+포병의 체제를 고수했으나, 아무리 유럽 제일의 기병을 갖고 있어도 파이크 때문에 돌격을 하지 못하니 하고는 게임이 안 됐다.
이후 17세기 직전까지 위그노 전쟁으로 한동안 자기들끼리 투닥대며 구석에서 버로우하다 안정을 되찾고 30년전쟁을 기회로 군비를 증강한 데다가[52] 루이 14세 때에는 사실상 서유럽 내 가장 강력한 군대로 떠오른다. 네덜란드의 마우리츠가 개혁한 방식인 '''머스킷 총병 중심의 선형진'''이 스페인의 테르치오를 압도하고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군사체제가 표준화된 상황에서는 인구나 경제력, 즉 물량빨에서 가장 강한 프랑스가 우세를 확립할 수 있었다. 루이 14세 때 상비군이 '''40만'''[53]이었다. 루이 14세의 군대는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전 유럽군대를 상대로 혼자 싸웠지만 '''유럽 전체를 합친 병력보다 프랑스 병력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물론 이게 가능했던 건 17세기 루이 14세 때 이미 프랑스 인구가 2천만을 넘기고, 훗날 18세기 말에 이르면 3천만에 달할 정도로 영국의 네다섯 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거의 세 배[54]에 달하는 인구수에 넓은 농경지를 바탕으로 한 본토 경제력 때문이다.[55] 말 그대로 주변국들에게는 냉전 당시의 소련군과도 같았으리라....
이에 반해 동시기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면
1. 바다 건너 영국은 겨우 겨우 1천만을 목전에 두고 있었거나 넘겼었는데, 이쪽은 섬나라에다가 인구가 적고, 가장 가까운 지역이 프랑스여서 유럽 본토 진출이 힘들다는 자국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팽창정책도 유럽 본토는 진출보다 힘의 균형 유지에 맞추는 대신 해외 식민지 확장에 집중했고, 군사 정책도 해군을 최우선으로 육성하는 대신, 육군은 해군이 육지로 투사하는 포탄 같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실탄 사격 등의 고강도 훈련을 시키고 빨간 군복을 채용[56]하는 등 철저히 소수 정예로 키웠다.
2.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57]는 전체 영토나 인구, 경제력을 보면 프랑스와 그럭저럭 비등비등했지만 이 가문이 거느린 각각의 세습령이 처한 현실 때문에 모든 영지 중에서 최후의 한 방울까지 역량을 쥐어짜낼 수 있는 영토는 고작해야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령인 오스트리아 지역 뿐이었다. 심지어 그 오스트리아조차도 단일 통치령이었던 게 아니라 오스트리아 지역 내의 소규모 영방 국가들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들이 작위를 겸하거나 영방 국가들의 제후들을 봉신으로 거느리는 식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다. 여하튼 합스부르크 가문이 거느린 모든 세습령을 살펴보면 자신들의 본토이자 직할령인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북부의 보헤미아와 슐레지엔, 오스만 제국 쪽 국경 수비에 집중해야 했던 동부와 남부의 크로아티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지역이 주요 세습령이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헝가리는 직할령인 오스트리아 지역과 맞먹는 인구와 경제력을 갖고 있었지만, 토착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황실을 고깝게 여겨왔고[58], 북부의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다음의 경제력과 인구를 갖고 있었지만 30년 전쟁 이후 프로이센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가 급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던 구성국으로 상공업과 지식의 중심지라는 특성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의 상기된 현실 때문에 반골 기질이 매우 강했다.[59] 이러한 현실 때문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방어전이 아닌 침공전에서는 총력전을 펼칠 수 없었다.'''
3. 스페인이야 가격 혁명과 상업 혁명이라는 시대적 조류를 잘 넘지 못한 데다가 네덜란드와 영국에게 제해권과 해양무역 패권을 차례대로 뺏기고, '''1억 두카트'''[60](...)가 넘는 부채[61]에 짓눌렸으며[62] 많지도 않던 국내 인구가 아메리카로 유출[63]되는 등 내우외환으로 몰락을 거듭해 이류 열강으로 밀려난 지 오래. 군사적인 면에서도 그들이 무적이라고 자랑하던 테르시오도 화기와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머스킷-선형진 위주의 전술이 표준화되면서 구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루이 14세 때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으로 인해 부르봉 왕가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프랑스 2중대로 전락[64]했다.
4. 그나마 프로이센은 병력의 질에서 프랑스보다 나았는데, 안타깝게도 이쪽은 프랑스와 체급 격차가 너무 심했다. 당연히 당시 1천만은 커녕 5백만도 간신히 넘길까 말까한 인구(18세기 중반에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 지역을 병합하기 전에 2백만 밖에 안 되었고, 병합 후에도 고작 3백만으로 늘어났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로 영토와 인구를 프리드리히 2세 초기의 배 이상으로 늘렸지만, 그래도 1천만 명을 밑돌았다.)에 신성로마제국 내 일개 선제후[65]에서 칭호만 왕[68]으로 바꾼 프로이센군이 라이트급이었고 그 몇 배가 넘는 병력과 인구를 보유한 프랑스군이 헤비급이었다.
이렇듯 프랑스의 상황과 프랑스를 견제할 만한 나라들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잘 나가는 놈은 일단 두들겨 패고 본다."'''라는 유럽의 유구한 전통(...)을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의 연횡책 같은 외교적 수완으로 보완하고 군사적 행동과 병행했다면 유럽을 정복했을 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오히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라이벌격인 국가들 모두를 상대로 프랑스 혼자 본토와 식민지 양쪽에서 양면전쟁을 펼친 게 대단해 보이는 건 과장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이후 루이 14세 말기, 17세기 말 ~ 18세기 초부터 프랑스의 국력이 휘청이기 시작하는데 대규모 상비군의 바탕이었던 프랑스의 경제력이 루이14세의 잦은, 그리고 실익이 떨어지는 전쟁 수행으로 국고가 바닥나면서 펠리페 2세의 스페인처럼 재정이 무너지기 시작[69]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루이 14세부터 시작된 신교 탄압으로 프랑스 사회의 지식인, 상인, 기술자 계층이던 위그노들과 유대인들이 영국, 네덜란드, 독일로 모두 탈출하면서 프랑스의 경제력과 기술력이 전반적으로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부잣집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프랑스는 본토 자체 생산력이 받쳐주는 유럽 최강국이었기 때문에 군사력에서도 오랜 전통과 뛰어난 장군들을 바탕으로 패권을 놓지 않았는데, 루이 14세 시대에는 네덜란드로 여러 번 레이드를 뛴 끝에 사실상 열강에서 탈락시키고[70] 스페인에게서 벨기에 일부를 빼앗았으며[71] 아메리카와 인도 식민지에서도 각각 퀘벡 지역과 콜카타 지역을 기반으로 식민지를 확장했 다.
하지만 마지막 전쟁인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는 프랑스는 단독으로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 전체와 대등한 수준의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지만 영국의 존 처칠[72]과 사보이의 외젠[73]의 활약에 의해 한때 큰 위기에 몰렸다. 드냉 전투에서는 영국이 빠지자마자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였지만 전쟁에서 프랑스가 기사회생한 건 연합국측이 밀던 요제프 1세의 형(레오폴트 1세)이 갑자기 죽어서 계속 밀다간 카를 5세처럼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같이 먹을까봐 틀어진 것[74]이라 프랑스가 외교적 수세에서 벗어난 거지 프랑스의 군사적 승리로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75] 루이 14세 시절에 있던 다른 전쟁과 달리 전 유럽을 압도하지 못했고 오히려 밀리게 됐는데, 사보이의 외젠과 영국의 존 처칠에게 여러차례 패배하면서 루이 14세의 유럽 패권 장악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후 루이 15세 시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는 모리스 드 삭스(Maurice de Saxe)라는 걸출한 군인이 활약하며 바이에른카를 7세프로이센 편을 들면서 숙적 오스트리아를 터는 데 일조했고, 동맹의 역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총부리를 틀어 영국과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에 맞서 7년 전쟁에 뛰어들지만,역시 프랑스의 유럽 지배 야욕(?)을 분쇄하려는 영국, 영국의 유럽 본토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76]에게 패배했다. 7년전쟁에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군대는 프로이센 군대를 연구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몇 번 격파하기도 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한테 프랑스군은 그냥 승점 셔틀이 됐다. 한편, 영국은 7년전쟁에서 식민지 전쟁에 집중해 프랑스와 지구 방방곡곡에서 치고박고 싸웠고, 유럽 지상전은 돈줄을 대면서[77] 잘 싸우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맡긴 반면, 프랑스는 이도저도 아닌 전략으로 힘이 분산되면서 식민지에서 분투한 병력들은 영국에서 충원되는 압도적인 적군 물량[78]에 밀리면서 사실상 프랑스 식민제국들은 코딱지만큼 남기고 몰락했다.
유럽 지상전에서 졸전의 원인은 지휘관 인선이 퐁파두르 부인이랑 친하냐에 따라 결정되었었고 로스바흐 전투의 참패 이후에도 지휘관[79]이 퐁파두르와 친해서 처벌은 흐지부지 넘어갔다.
프로이센은 총사령관이자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부터 독약이 든 로켓[80]을 들고 다니며 '이걸 오늘 먹어야 하나, 내일 먹어야 하나'할 정도로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81] 러시아 옐리자베타 여제의 사망과 영국의 유럽 전선 재참전으로 인해 기사회생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오래 전에 로스바흐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하여 전열에서 이탈해 있었다. 전쟁 말에 영국과 동군연합인 하노버에 찝적거리다가 영국, 하노버, 헤센-카셀, 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에 박살나면서 라인강 서쪽으로 철수했다.
이렇듯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많이 쳐주면 7년 전쟁까지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국력이 최강이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면에서 양과 질을 모두 갖춘 절대적인 육군 강대국'''이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제 이후 프로이센이 잠시나마 프랑스를 질적으로 추월했고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7년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사이의 러시아 또한 프랑스 못지 않게 양과 질을 모두 갖춘 육군을 보유한 국가이기도 했다.(영국은 지리적, 정치적, 인구적 여건 상 해상력으로 특화됐지만 육군은 전쟁의 역사의 저술자 몽고메리 장성의 평가로는 존 처칠 이후 암흑기라고 본다. 특히 러시아군은 18세기 후반쯤엔 카프카스와 크림미아 지역을 터키에서 빼았고 인구와 국력이 급신장해 현재의 미래 패권 국가로 예약된 것으로 보는 중국 취급이었다. 이미 이 시기 프랑스의 인구 수를 훌쩍 뛰어 넘었다.) 한편, 루이 15세는 7년 전쟁 때의 프랑스 육군의 한심한 전투력에 충격을 받아 귀족들의 반발에도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전통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자녀들도 받아들이는데, 이 수혜자가 10여년 후 입학하는 나폴레옹이다. 연대장(대령)들의 추태와 머릿수 부풀리기 스킬로 군수품 떼먹기를 감시하기 위해 중령(Lieutenant-colonel)직위가 나오게 되는 것도 이 시대이다.
10여 년 후 프랑스군은 미국 독립전쟁 덕분에 '''미국 본토에서 미국과 연합하여 대규모로 작전한 유일한 군대'''이다. 미국 독립은 프랑스가 완성시켰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랑스군의 참전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현재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보면 참 역사의 아이러니, 놀랄 일은 아닌 게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을 바랐다기보다는 눈엣가시인 라이벌 국가인 영국을 골탕먹이기 위해 미국을 지원한 것이었다. 이렇듯 서로 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 지속적으로 바뀌는 게 국제 정세이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의 최우방국임에도 미국과 프랑스 사이가 딱히 원만하지 못하다.[82]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4.4.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사실 프랑스 혁명 하면 시기에는 프랑스 군은 개판이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귀족들이었던 프랑스의 장교집단 대부분은 죽거나 국외로 도망갔다. 이 사람들 무능하다고 비판받았으면 유능한 인물이 나오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혁명에 참가한 명망가들이 장교로 임명되니 의사 출신 장군, 변호사 출신 참모가 등장하고 혁명정신에 찼던 이들은 장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일종의 민병대인 국민위병이 가장 심각했지만, 정규군도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혁명정부는 국민개병제를 실시해서 머릿수로 상대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머릿수만 늘어나니 보급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서 군대가 몽둥이로 무장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전쟁 문서는 나폴레옹 이전 혁명군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 물량이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 프랑스의 군사적 황금기라는 것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는 듯 인재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나폴레옹 등장 전에는 1793년에 당시 국방장관 역할을 맡았던 라자르 카르노가 의용군과 기존 상비군30만과 합쳐 75만의 혁명군을 징집했는데, 이러한 국민개병제 실시를 계기로 프랑스군은 전례 없는 규모로 팽창했다. 더구나 7년 전쟁 이후 프랑스군은 사단의 개념을 고안하고 포병을 혁신[83]하는 등 크게 발전했다.
프로이센의 상비군은 20만 오스트리아는 상비군이 3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물량대군 취급받던 러시아는 프랑스처럼 징병제를 안 해도 인구 수가 엄청 많았다. 그렇지만, 왕당파와 가톨릭 교회에 옹호적이고 혁명에 부정적인 방데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사 반란이 일어났고 프랑스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방데 학살 사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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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테르미도르 반동이 터지고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는 등, 이상에 올인하고 내부에서도 격렬하게 끓어오르던 진짜 '''혁명'''정부의 시대가 끝나고, 현실적인 문제를 바로보기 시작한 부르주아 세력이 중심이 되는 혁명'''정부'''의 시대가 안정적으로 이어지면서 혁명에 찬동하거나 반항하지 않는 성향의 귀족 출신 장교들 중 유능한 이들이 복직[84]되고 유능한 병사들이 장교로 승격되면서 서서히 프랑스를 노리는 유럽 각국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기 시작했으며, 나폴레옹과 그의 유능한 원수들이 군을 지휘하면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을 지상전에서 격파, '''프랑스 대 육군'''[85]은 사실상 무적의 군대로 변신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육군의 최강 시대는 앞서 루이 14세 시기와 나폴레옹 시기를 뜻한다. 또한 이 시기 나폴레옹이 거대한 규모의 육군을 바탕으로 현대적 개념의 군단급 작전제대를 사상 최초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빛나는 성공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었다. 프랑스의 산업과 경제도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와 비례하여 군대가 팽창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 중 대표적인 게 바로 보급 문제였는데, 프랑스의 대 육군은 보급의 상당부분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이것은 프랑스군의 규모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불어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는데, '''절대왕정 시대의 군대는 물질적 대가를 구심점으로 모인 용병'''인지라 약탈을 허용하면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거나 심하면 와해되기 쉬웠지만 '''혁명기의 프랑스군은 애국심을 구심점으로 조직된 국민군'''이었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약탈이 가능했고, 그러면서도 군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프랑스 혁명 정부와 혁명군 수뇌부는 이를 역이용해서 보급이 따라오는 속도에 구속되지 않는 기동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혁명 초기에 다른 나라는 상비군 전력이 많아야 20만~30만이 한계였고 국경 밖으로 싸우러 가는 병력은 그보다 한참 적었지만,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뜩이나 인구도 많은데다 전술한대로 애국심에 기초한 징병제로 국민군을 모집하여 70만이라는 대병력을 보유했다. 군의 규모가 리즈 시절이 지나고도 1812년 러시아, 1813년 독일 전역에서 수십만씩 말아먹고 나폴레옹 전쟁 끝물이던 1814년에도 징집가능 연령 인구가 100만에 실제로 40만 이상을 동원해서, '''유럽의 중국'''이라는 별명을 절대 노름으로 딴 게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물론, 병력의 질이 떨어지는 건 별개였지만 애국심에 기초한 덕분에 사기는 매우 높았고, 이들을 지휘한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도 매우 강했으며, 그 나폴레옹도 1814년에 누가 봐도 막장테크 탄 상황에서 뭘 믿고 버텼냐를 보면 이런 국민군 덕분이었다. 이런 대육군(''Grande Armée'')을 바탕으로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이 가능했지만 다른 국가들도 프랑스에 패배한 뒤, 가만있지 않아 병력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프랑스와 유사한 동원 체제를 확립하자 일반 병력 간에서의 양적 비교우위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육군이 엄청나게 팽창한 것과는 달리 해군은 기술병력과 장비 위주의 군종이라는 특성상 빠르게 불어날 수 없었다. 군함 건조용 주요 자재였던 발트산 목재[86]는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입수할 수 없었고, 배를 건조하는 기술이나 해전에서의 기술과 같은 것은 혁명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프랑스 해군은 조선술보다 나머지 부분, 특히 인적자원 면에서 숙련된 선원의 부족과 함께 군함과 함대를 지휘할 함장과 제독 등의 역량도 해군장교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구호기사단 출신 귀족사관들이 혁명 때문에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잔류한 일부 사관들과 고참선원들이 제대로 된 훈련과 검증과정을 밟지 않고 승진하는 바람에 영국 해군에 비해 전반적으로 모든 능력이 부족했다.(간단히 정리하자면 하드웨어는 쓸만했지만 이를 운영할 소프트웨어가 꽝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의 사관들은 '''혁명 이전에도 영국의 해군사관들에 비해 저돌적으로 적함에 접근하여 싸우는 경향이 부족해 완승할 싸움을 고전 끝에 신승하거나 무승부로 낼 싸움을 참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 독립전쟁 중 인도양에서 자신의 함대보다 압도적인 영국 인도양 함대를 상대로 초근거리 접근전을 영국보다 먼저 강요해 대등하게 싸워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쇠퇴일로이던 인도 내 프랑스의 영향력을 회복시킨 쉬프랑 생 트로페와 같은 장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은 육군은 전투력이 최강이었지만 해군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때에도 유럽해양의 패권은 대영제국이다. 그렇기에 해군이 동원된 적은 이집트 정복과 트라팔가르 해전외에는 거의 도크에서 대규모로 빼낸 적 없다.
또한 육군의 보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은 비교적 부유한 지역에서만 효과적이었다.[87] 농업 기술의 낙후[88]와 산지가 많은 환경 탓에 가난한 스페인 농촌은 반도 전쟁 때문에 대규모로 들어온 프랑스군을 부양하는 데 무리가 있었고, 이 때문에 소수 정예의 영국군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러시아 원정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청야작전에 동장군 크리까지 겹쳐서 같은 결과가 훨씬 대규모로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프랑스군을 부양해야 하는 '해방된'[89] 피지배 국가들과 민중들의 분노는 계속 쌓여만 가고 있었다. 결국 스페인에서의 끝이 안 나는 게릴라 전쟁[90], 그리고 러시아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전 유럽이 대프랑스 동맹을 체결, 다시 프랑스의 적이 되어 총공세를 가했고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타를 날림으로써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4.5.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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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왕정 복고를 거쳐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기에는 다시 프랑스군의 위세를 떨치기 위한 전쟁을 추진한다.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프랑스 식민제국)에서 자주 밀렸지만[91] 또한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함으로써 프랑스군이 유럽내에서 아직은 강국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듯이 보였다. 크림 전쟁 전쟁에서 오랜 원수지간 영국과 손잡고 러시아군을 격파한다. 단, 크림전쟁은 전쟁사적으로 유례없는 한심한 일들의 향연으로 영국과 프랑스군 모두 지휘관들이 무능했는데(단, 프랑스에선 발라클라바같은 누가봐도 정신나간 심한 바보짓은 없었다.), 연합군인 영국군 25만, 프랑스군 40만, 러시아군 70만이었는데 실질적으로 승기는 전쟁 초기에 연합국이 잡았지만 '''영국 프랑스 지도부가 둘다 너무 무능해서'''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돈잡아 먹고 시간잡아먹고 병력잡아먹는 요새 포위전에 투입하면서 전쟁이 길게 끌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국, 프랑스가 승리한것은 '''러시아군은 더 사정이 안좋았기''' 때문이었다.[92] 그 외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해로를 통한 보급에 별 문제가 없었던 반면 러시아군은 마차를 이용한 보급에서 한계[93]를 드러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라이플의 발전으로 화력이 강화된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처럼 종대로 돌격하는 한계를 노출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이 훈련이 부족하고 아직 라이플의 화력을 충분히 활용하는 법을 익히지 못해서 종대로 돌격한 프랑스군이 승리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살려 화력에 의존하는 대신 종대로 돌격해서 백병전을 벌이도록 군대를 다시 훈련시키는 바람에 프로이센에게 참패했다. 뒤이어 프랑스군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군에게 패배하면서 위대한 군대의 후예의 유산은 화려한 군복과 철지난 명성임이 확인된다. 프랑스는 프로이센보다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자국 무기의 우수성을 너무 믿었는데, 몰트케가 나폴레옹처럼 교전 지역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소수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다닌다. 전쟁 기간 병력 손실은 프랑스군 38만, 프로이센 위주 독일군 11만이었다.[94]
이 결과에 대해서 나폴레옹 3세의 삽질, 혹은 단지 몰트케가 너무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를 개인적인 역량의 차이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프로이센은 참모본부를 구성해서 작전의 계획과 실행을 위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장교들을 통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 점만으로도 다른 나라의 군대에 비해 선진적이었지만, 이때까지는 전쟁을 지휘하는 것은 여전히 고전적인 장군들이었으며 참모부는 단지 작전을 건의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통을 살려 국왕이 직접 전쟁을 지휘한다"는 명분하에 국왕이 자신을 '보좌'하는 참모본부에 힘을 실어주는 형식으로 사실상 참모본부가 전쟁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했다. 원수 진급도 국방부 장관 론(Von Roon)보다 참모총장 몰트케가 빨랐을 정도. 육군 최고사령관은 명목상 국왕이었지만 참모총장이 군의 실질적 통수권자로, 총리나 민간정부 국방부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덕분에 참모총장인 몰트케는 민간정부와 국방부, 그리고 심지어 국왕에게조차 일일이 허가를 받지 않고 직접 군을 지휘할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95]
또한 프로이센 참모본부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지휘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에도 미래의 전쟁을 대비해서 사전에 작전을 세워두고 실행할 준비를 하는 역할 또한 수행했다. 이는 현대에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놀라운 발상이었고,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떳떳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반면 프랑스군은 (다른 대부분의 국가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중시하고 지식과 지성을 사용하는 일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제2제정의 유명한 군인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Patrice de MacMahon)은 책을 저술한 군인은 승진에서 제외시킨다고 할 정도로 제2제정의 장군들은 군사상을 무시하고 경험을 통해 배운 터프한 군인을 선호했다. 당연하게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전쟁을 지휘하거나 작전을 세우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프랑스군으로서는 불운하게도, 이 시대는 후장식 소총과 기관총이라는 새로은 무기체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경험뿐만 아니라 지성도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즉 프랑스군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던 것이다. 예컨대 이 시대에는 프로이센 이외의 국가에서는 여전히 사격을 엎드리지 않고 서서 하도록 병사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전장식 소총은 엎드려서는 장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장식 소총과 기관총이라는 화력의 발전 앞에서 이런 방식이 어떤 참상을 불러왔을지는 명백하다. 그 외에도 유선통신망 등의 기술적 진보를 프로이센군의 장교들은 군의 지휘체계에 통합시킬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보불전쟁은 이러한 프로이센군과 전통적인 프랑스군의 차이가 극적으로 드러난 전쟁이었다. 프랑스군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상황을 점검하고 군대를 동원하며 작전을 세우기 위해 부산을 떠는 동안 프로이센군은 이미 신속하게 동원을 마치고 준비해 둔 작전대로 공격을 시작해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프랑스군을 압도적인 병력으로 무너뜨리고 포위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몰트케가 대군을 동원한다는 '천재적 작전'을 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은 대군을 동원하고 운용할 작전을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고 그 작전을 실행할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장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대군을 동원해서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병사들은 특히 스당 요새에서 포위 당했을때 자살에 가까운 기병돌격을 하는 등의 용맹성을 보여줬으나, 그것으로는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 제국은 보불전쟁에서 패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하는 대굴욕을 맛보게 된다.
보불전쟁 이후 프로이센군은 전 유럽의 모범이 되었고, 프랑스군도 보불전쟁 이후에는 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략전술적인 면 등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 제3공화정의 군사상가이자 1차대전의 유명한 명장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은 제2제정 시대의 경향을 벗어나 독일의 클라우제비츠로부터 배우려 노력했으며 보불전쟁의 패배를 분석하면서 프로이센군의 활약을 높게 평했다. 그에 비해 제2제정의 장군들과 그들의 보불전쟁에서의 폐착은 가루가 되도록 깠다.
즉 프랑스군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노력했다. 프로이센처럼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정립해 뛰어난 장교단을 기르려 노력했으며, 독일에 비해 뒤떨어진 동원능력을 개선하려 매우 노력했다. 1898년에 계획된 제14계획에서 악명높은 제17계획까지 모두 독불전선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짧은 기간 내에 전개하는 방법을 위해 강구했다.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덕분에 프랑스군은 1914년에 갑작스럽게 독일과의 전쟁을 직면하자 열흘 좀 넘어서 백만병의 병력을 독불국경에 전개할 수 있었고, 이러한 숫자빨은 프랑스군이 전술적으로 패퇴하는 도중에 프랑스군이 버틸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작용했다. 또한 하늘이 독일을 버리는 행동을 해 주었는데 독일군 참모본부의 대몰트케의 조카 소몰트케는 양면전쟁을 수행해야 된다는 것에 부담을 너무 심하게 가졌는지 사단단위의 행동의 자유가 아닌 군단위의 행동의 자유를 부여해 각군이 제대로 협동하지 못한채로 따로 놀며 서로의 의도를 추측해가며 전쟁을 펼쳐나가야하는 막장 상황을 연출했다.
다만 노력은 노력이고 결과는 결과다. 프랑스군이 변신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은 분명하지만, 정말 체질을 개선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프랑스군이 독일처럼 사전에 전쟁계획을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그 유명한 제17계획도 이름만 작전계획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부대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진격하며 후속 부대와 보급 부대는 어떤 식으로 조직될 것인가 등의 세부 내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 측에서 17계획이 배치계획일 뿐 공세계획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반박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프랑스군에는 제대로 된 작전계획이 없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17계획이 '제대로 된 계획'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애당초 17계획은 작전계획조차 아니라는 말로 반박하는 것은, 프랑스군에는 '제대로 된 계획'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작전계획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기관총이 발전한 시대에 병사들에게 기관총 앞으로 자살돌격을 시킨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영국군이 포격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무모한 공격을 감행한 것은 포와 포탄의 질이 생각 이상으로 떨어졌다는 이유라도 있지만, 프랑스군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군사교리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 앞으로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시키지 않은 나라는 없다시피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에 따른 엄청난 인명피해에 놀라서 공세를 중단하거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머리를 짜내곤 했다(전차, 대규모 폭약 매설, 후티어 전술 등). 그러나 프랑스군은 '엘랑 비탈' 교리에 충실하게도, 그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했다.

4.6.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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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일반보병
1914년 프랑스군 9군단, 17사단, 34여단, 125연대 소속 병사들
대전 초기의 프랑스군 모습이다.
프랑스군 군복은 대혁명 이후 전통적으로 파란색이었으나 보불전쟁 이후 검은색으로 바뀌었다가 1차 대전 직전에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다시 파란색으로 바뀐다. 빨간바지에서 볼 수 있듯이 외모를 실속보다 더 중요시한 결과,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기관총과 참호전에서 수많은 인명을 손실하였다. 기병 제복을 입으면 무릎을 접기 불편해 앉아 쏴 자세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19세기에 사용되던 주아브 복장까지 존속 중이었다. 이 외에 식민지에서 고용된 티레뢰 산병(skirmisher)도 고용했다. 산병이란 밀집대형의 측면이나 전면에 약간 떨어져 배치된 소규모 부대이다. 현대로 치면 정찰조 정도로 보면 될듯하다.
19세기까지 유럽 각국은 위장 효과보다는 사기와 지휘의 편리성을 이유로 전통적인 원색군복을 대체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보어전쟁 초기까지는 눈에 잘 띄는 붉은색 군복과 하얀색 방서모를 착용했던 영국군도 보어인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저격을 당해 대량의 인명손실을 내고 나서야 저시인성 카키색을 정식 군복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문제는 독일이나 러시아 등 영국의 이러한 뼈아픈 교훈을 즉시 받아들인 나라도 많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였던 것. 프랑스군 수뇌부는 위장색을 받아들이자는 말에 분노하며 위대한 군대는 저런 수치스러운 군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한술 더 떠 프랑스 국방장관은 "붉은 바지는 곧 프랑스다(Le pantalon rouge c'est la France!)"라고 선언하며 위장색을 거부해버렸다. 그 결과 1차 대전 초기 수많은 보병들이 기관총 앞에 어육 신세가 되었다. 이 때문에 개전 초기부터 말이 많았지만, 전통을 고집하는 일부 장군들 때문에 한동안은 이런 고채도의 군복이 존속된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어서 결국 알록달록한 제복은 프랑스에서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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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 프랑스군
그러나, 채도 높은 군복은 포기했으면서도, "프랑스군의 상징"이라는 파란색은 포기할 수 없었던 탓에 채도가 낮은 지평선 청색이라는 색의 군복이 신형 군복으로 채택된다. 초기의 채도가 높고 알록달록한 복장에 비하면 인시성이 낮아졌으며, 이론상으로는 하늘의 색과 비슷하기 때문에 낮은 참호에 있는 적군을 상대로 위장효과가 있다는 것. 실제로 프랑스군이 활동한 북부 프랑스와 벨기에의 축축한 진흙밭에서는 채도가 낮은 파란색 위장이 좋았다고 한다. [96][97]
대중적으로는 이 당시 프랑스군이 병력 수만 많고 정예도가 떨어지며 똥별이 지휘하는 한심한 군대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프랑스 군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삽질과는 달리 나름 준비를 철저히 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보불전쟁의 원한을 갚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수복하기 위해 다가올 독일과의 전쟁을 나름 튼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1914년 개전 당시 (동원 직전의) 프랑스군은 독일군 84만 명보다 약간 많거나 비슷할 정도였다. 물론 추가 동원시 400만 명 대 368만 명이라는 수적 차이가 있었고 독일의 인구가 프랑스의 1.7배에 달했기 때문에(프랑스 4,000만 명, 독일 6,700만 명) 인구 수 차이에서 이어지는 군 병력 차이를 메우기 위해 프랑스군의 병역기간이 길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군은 양면전쟁을 하느라고 그 병력을 제대로 사용 못할 판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방침 때문에 군 운영이나 동원이 훨씬 효율적이었고 제국 내의 반독립적인 왕국군이나 공국군이 반독립상태로 존재하며(독일 제국군의 주력은 프로이센군이었지만 이밖에도 바이에른군, 뷔르템베르크군 등의 소규모 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로따로 사령부나 교육기관을 운용하던 독일군보다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군은 일반적으로 식민지 전쟁으로 장교들의 실전경험도 독일군 측보다 훨씬 많았다.(식민지 전쟁 참전이 장교의 출세코스였다.) 보불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이 한동안 없어졌고 독일군 장교들은 보불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한 고위급을 제외하면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프랑스군 장교들, 특히 초급장교들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국(청불전쟁), 그리고 중동에서 여러가지로 실전경험을 쌓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군의 병역대체제도가 병사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나라가 마찬가지였으며, 영국은 아예 지원병제였고, 미국은 (계속 지원병제였으나) 징집이 필요할 때(특히 남북전쟁)는 돈을 내고 병역에서 빠질 수 있었다. [98]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만)에서는 '''공격정신에만 집착하면서도 공세를 취할 작전능력은 매우 떨어져서''' 1차대전 직전 20세기 초에 독일에 대응하여 징병제를 3년으로 늘렸지만 1년에 겨우 12일만 소집하고 의회에서 좌파 계열 정당이 의회에서 "프랑스를 병영으로 만들 셈이냐!!"라는 비판 덕에 하루마다 출퇴근하며 복무할 지경이었다. 1913년 프랑스 육군의 군사훈련 판단으론 '''공세를 위해서는 준비가 무려 1주일이 소요되며 공세는 3일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고 나와 있다.
프랑스의 국력이 독일에 뒤진 것은 양국의 체제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역량과 독일은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고 프랑스는 그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저조한 것도 있겠지만 사실 프랑스의 인구증가 정체도 한몫했다. 프랑스의 인구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유럽의 중국으로 불리던 물량을 내보낼 수 있었지만, 과거의 화려한 영광과 달리 심각한 저출산으로 19세기에 이미 독일에게 인구가 추월당하고 수백년 전 백년전쟁 당시 10분의 1에 불과했던 영국에도 밀리는 인구 상태에 있었다. 혁명 시기 프랑스 인구(2800만 명)는 서유럽에서 가장 많았고 유럽 전체에서도 러시아 다음 가는 엄청난 인구였다. 게다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숙적 영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러나, 120년 뒤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인구는 두 배도 늘지 않은 4000만, 영국은 4배가 증가하여 4500만, 독일은 통일 후에 6500만에 달했다.[99]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대육군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졌다.
게다가 보불전쟁 이후 석탄-철강 산지(당시 프랑스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었다. )였던 알사스-로렌을 빼앗기면서 본격적인 산업화의 시기인 19세기 말 철강 생산이 독일의 4분의 1, 영국의 절반 이하일 정도로 프랑스의 산업이 정체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알사스-로렌 상실 때문으로, 사실 철강생산량만 보면 독일이 1차대전 이후 알사스-로렌을 다시 상실하면서 철강생산량이 반으로 뚝 떨어진 것을 보면 #, 프랑스의 공업생산량 문제는 알사스-로렌의 상실로 인한 것이었다. 프랑스가 보불전쟁 이래 알사스-로렌 수복을 위해 이를 갈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엘랑 비탈(Elan Vital)'이라 불리는 왕성한 공격정신을 중시하는 사기론과 해군의 '청년 학파(Jeune École)' 등 독자적 군사노선을 지향했는데, 이 두 가지가 프랑스군의 흑역사로 남게 되지만, 당대만 해도 프랑스군에 대한 전반적인 평은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온몸을 불살라 탱킹을 안해줬으면 독일이 이기는 구조로 전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기술적으로 독일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공중전에서 캠축을 활용해 프로펠러가 기관총 앞에 오면 아예 발사가 되지 않도록 하는 '''싱크로나이즈드 기어'''는 프랑스와 독일이 각각 독립적으로 특허가 나왔다. 그리하여 독일군과 치고받았으며[100] 연합군 공인 최고 격추기록을 가진 르네 퐁크를 비롯한 수많은 에이스들을 배출하기도 하는 등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또한 프랑스판 MIT나 KAIST라고 할 수 있는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들이 군수기업이나 기술장교로 가서 만든 프랑스군의 야전포 등은 전장에서 통용이 되었고 생산성이 우수해서 유럽에 파병된 미군도 초기에는 프랑스제 장비를 대량으로 운용했다.[101]

4.6.1. 엘랑 비탈 교리


  • 엘랑 비탈[102] 항목 참조.

4.6.2. 청년학파


제2제정기에 대대적인 투자를 받아서 강력한 함대를 건설했으면서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제3공화국 시기에 '''해군예산이 감축일로에 이르렀던''' 프랑스 해군 내부에서 영국이 주도한 건함 경쟁과 전함 중심의 해군체계에서 벗어나 당시 신기술이었던 어뢰정잠수함 중심의 체계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던 해군 전략을 주장하던 장교단들의 총칭이다. 청년학파의 주장은 일종의 비대칭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전함은 넬슨 시대처럼 거대한 전함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포화를 주고받는 해전을 가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함의 대구경 대포는 위력은 강했지만 매우 부정확했고 사정거리도 짧았다. 더구나 이러한 대포는 주로 전장포였기 때문에 장전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렸다. 따라서 작은 어뢰정이 어뢰를 쏘고 달아나는데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103]
그런데 소형함이라도 어뢰라면 한 발로도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소형의 어뢰정이 대형함보다 훨씬 강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고 '장갑함 1척을 만들 예산으로는 어뢰정 60척을 건조할 수 있으므로 연안방어를 위해서는 어뢰정을 만드는 것이 보다 유효하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당시 상황에서 영국과의 전쟁을 상정한다면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전략은 지나치게 영국만을 고려한 수세적인 전략이었다는 점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연안방어 임무에 있어서는 다수의 미사일 탑재 고속정이 소수의 대형 전투함들에 비해 유리한 게 사실이지만, 대형 전투함들은 다양하고 많은 무장과 전천후 활동능력, 우월한 장거리 항행능력으로 인해 해상교통로 보호나 장거리 원정, 초계 등등 범용적으로 쓸 수 있는데 비해, 소형함 위주의 해군세력은 연안 방어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크게 받는 편이며 악천후 하 작전에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결국 이와 같은 세력 편성안을 채택하는 것은 해상에서의 무력 투사를 포기하고 해안선에서의 수세전략을 편다는 것과 사실상 같은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전세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다른 강국보다 해군력에서 우위를 점할 능력이 있었다. 청년학파의 비대칭 전략은 이러한 해양 강국으로서의 지위(1등은 아니지만)를 스스로 버리고 수세만이 가능한 3류 해군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프랑스와 같은 대국에게 적합한 전략이 아니었다.
또다른 문제는 프랑스의 전략이 영국 해군을 자극해서 적극적인 기술 혁신을 일으켰기 때문에 결국 영국 해군도 제대로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어뢰정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해군은 암스트롱 후장포를 도입했고, 대포의 사거리와 정확도, 장전 시간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어 어뢰를 명중시킬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공격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결국 적당한 속사포를 갖춘 구축함[104]이 어뢰정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어 어뢰정은 군사적 가치를 거의 상실했고, 이는 청년학파가 건설한 프랑스 해군 역시 군사적 능력을 급격히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05]
결과적으로 청년학파의 전략은 해군력의 약화와 건함경쟁에서의 이탈, 그리고 대형함 제조 능력의 저하만을 가져왔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타국이 3년에서 4년 사이에 12인치포 4문을 연장포탑으로 장비하는 상비배수량 1만 5천 톤 규모의 표준형 전함을 만들어 내는 것에 반해서 프랑스는 1만톤에도 못미치는 11인치포 2문 장비형 해방전함조차 7~8년에 걸쳐서 만들고 있었다. 정규의 표준전함도 마찬가지였고.'''
그렇지만 이런 개판 5분 전의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간기에 리슐리외급같은 건실한 전함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프랑스의 저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6.3. 서부전선의 주력


프랑스군은 처음부터(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서부전선의 군대 그 자체에 가까웠고 1916년에 영국군이 대거 투입된 이후에도 여전히 주력이었으며 1918년의 백일전투에서도 주력이었다) 끝까지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주력군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고의 전투력과 병력을 자랑했다(제2차 세계 대전 소련군의 역할을 1차대전에서는 프랑스군이 한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 몸빵). 초반에 패배한 제2차 세계 대전과는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프랑스군은 전쟁 내내 주역이었고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다. 사실 서부전선이 거의 대부분 프랑스 영내거나 프랑스 근처에서 벌어진 전장이다.
이는 1차대전 종전까지 서부전선 연합군 최고사령관 역할을 포슈가 맡았던 것을 보면 된다(독일이 힌덴부르크의 이름으로 보낸 휴전협상 제안의 수신자는 포슈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반 서부전선에 전개한 연합군 병력은 프랑스 250만명, 미군 190만명, 영국군 180만명으로서 수적으로도 프랑스군이 가장 많았으며 병력의 질 또한 다른 참전국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기존의 소수정예군에 의존해 1916년에야 대군을 투입하는 영국군,[10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격파해버리는데 유독 독일군에게 역대급 실수로 털려(탄넨베르크 전투 자체는 1개군이 전멸할 정도의 대패였지만 마른 전투 시기에 독일군 일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서 프랑스엔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개전 초반 승기를 빼앗긴 러시아군[107]과 전쟁 후반에 참전한 미군을 대신해서 독일군과 전쟁에서 주력군을 맡을 수 있는 가진 군대는 프랑스군밖에 없었다. 애당초 영국-프랑스 동맹에서 해군은 영국 해군이, 지상군은 프랑스 육군이 주력이었으며 나중에 미군이 참전한 뒤로도 프랑스 육군은 여전히 연합군 지상군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었다.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백일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숫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2차 마른 전투에서도 50개가 넘는 연합군 사단중 40개가 넘는 사단을 프랑스군이 맡았다는 것은 프랑스군이 서부전선 연합군의 중핵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삽질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4.7. 전간기


전간기 시절 프랑스군은 탱크, 항공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독가스 생산도 실시한다. 수상기 모함과 전함을 대거 건조하고 리프 전쟁에 참전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4.8.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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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 전쟁과 함께 강군 프랑스군의 이미지가 망가지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 시기의 프랑스를 밈으로 만듦으로써 조롱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 국기 만드는 법이라면서 빗자루대에 흰 천을 붙힌다던가,[108] 평화로운 파리에서의 하루라면서 독일 국방군이 개선문에서 행진하는 사진을 올린다던가(...). 미국인들이 가지는 거만한 유럽 본토인이라는 선입견과 이 시절 프랑스군의 부진, 그리고 후일 프랑스가 베트남과 중동건으로 은근히 미국을 디스하던 건 등이 절묘하게 겹치면서 이런 이미지가 더욱 고착되었다.
역사가와 군사무기 매니아들 사이에서 프랑스군이 '유럽의 당나라 군대' 취급을 받고 지나친 폄하를 당하게 된 이유는 대부분 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처참한 모습에서 기인한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높으신 분들의 뻘짓 때문에 6주 만에 파리를 점령당하며 전선에서 이탈했다.[109]
전간기 시기, 소련, 독일이 앞으로의 지상전은 전차 중심의 기동전이 될 것으로 예상한데 반해,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의 전쟁 준비는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참호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프랑스군은 기동전보다 우주방어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극단적인 군사교리에 의거여 니벨 공세같은 무모한 공격을 펴다가 프랑스의 20~40대 남자 1/3이 전사-전상을 입었던데다가 북프랑스 일대가 주 전장이 되면서 피해가 컸던 상황이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심지어 미국으로부터의 밀 수입이 며칠만 늦었어도 쫄쫄 굶을 뻔했던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프랑스는 공세보다는 수비에 집착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지노 선은 열심히 건설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전략, 전술 발전은 거의 없었다. 초기 연합군 동맹인 영국과 마찬가지로 기동전과 보병전 독트린을 놓고서 지휘부가 치고 받는 바람에 실 전술 개발[110]은 지지부진했으며 더 나쁜 것은 참호전의 트라우마 탓으로 구식 보병전에 압도적으로 경도되었다는 점이다. 해군 강국인 영국과는 달리 전통적 육군국인 프랑스에게 있어 이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단 독일군이 마지노선을 우회할 것은 예상하고 벨기에 국경에 주력을 배치했지만 독일군이 프랑스군이 전혀 생각못한 아르덴 숲을 관통하여 진격하자 혼란에 빠졌다.
사실 전쟁 발발 전에도 아르덴이 기존의 인식처럼 천연 요새이기는 커녕 적들 기갑 병력을 위한 고속도로 수준이라며 방어를 보강해야한다는 보고서가 여럿 제출되었지만 장성들이 무시하는 바람에 6주만에 파리가 함락되는 일이 시작되게 되었다. 게다가 공군 발전을 등한시하여[111] 제공권이 장악당해 독일 공군의 폭격에 대응하지 못하고[112] 보유한 전차는 무전기도 없어 유기적인 전투를 전혀 치르지 못하는 등 삽질의 극에 달하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결국 파리가 함락당하자 항복한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군함들이 독일군에 넘어갈 두려워한 영국 해군이 프랑스 군함들을 자침시키는 등 안습한 상황이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몇몇 무능한 상층부 때문이 아니라 19세기부터의 프랑스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심화된 결과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7계획 정도의 작전계획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계획을 들고 전쟁을 시작했던 프랑스군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제대로 된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계획이 없는 것이 교리(!)였다. 즉, 사전에 세밀한 작전을 세워 봐야 어차피 그대로 되지도 않으니 상황을 보며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작전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했다. 변하는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각 부대로부터의 정보의 신속한 취합, 상부에서 하달하는 작전을 통한 재빠른 대응, 현장에서의 상황 파악을 통한 즉흥적 대응 등이 필수적인데 프랑스군은 이러한 측면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은 종종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문서로 된 명령문을 수령하기 전에는 행동에 나설 수 없다"며 지휘관이 직접 상급부대로 가서 명령문을 받아오느라 시간을 끌다가 상황을 망치는 모습이 거의 모든 부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상황에 맟춰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려면 어떤 식으로 군이 운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고려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계획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딜 계획'이다. 프랑스는 마지노선의 방어력은 확실했고 벨기에 남부도 마스 강과 아르덴 삼림지대 때문에 돌파가 어려운 지역이었지만, 벨기에 중부와 북부는 평탄한 지형으로 방어에는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독일군이 슐리펜 작전으로 바로 이 지역을 노렸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이 침공하면 신속하게 벨기에로 진입해 나뮈르-딜(Dyle) 강-앤트워프를 잇는 선을 확보기하기로 했다. '딜 계획'이라는 이름은 물론 딜 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런데 이 계획이 딜-브레다 계획으로 확장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오히려 없느니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군은 벨기에에서 멈추지 않고 네덜란드까지 진입하게 되었고, 그러한 넓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가용 병력을 모두 방어선에 투입하게 된 결과 벨기에 방면의 프랑스군에는 전략적 예비군이 전혀 남지 않게 되었다. 물론 프랑스군에도 바보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서 북동부군 사령관인 조르주는 예비대가 없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된 것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독일군이 아르덴을 돌파한 이후의 상황은 정확히 조르주가 경고한 대로 흘러갔다.
더구나 구체적인 작전계획은 없는 상태에서 딜-브레다 계획에 따른 프랑스군의 신속한 배치만이 강조되다보니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예상을 뒤엎고 아르덴 삼림지대를 돌파했을 때 거의 대응하지 못했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전선을 돌파했을 때 프랑스군 지휘부는 현지의 방어군에게 여러 차례 반격을 지시했지만 하급부대들은 대부분 시간만 끌다가 반격을 취소하거나 반격을 시행하더라도 소규모의 부대의 무의미한 축차투입을 반복했을 뿐이다. 이들 하급부대들은 방어를 위한 배치만이 되어 있었을 뿐 기동을 위한 계획이나 훈련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참호전이었다면 이런 상황이라도 천천히 병력을 재배치해가면서 공세를 준비할 수 있었겠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군의 속도는 따라갈 수 없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참호전과 같은 느린 속도의 전쟁만을 예상했기 때문에 특별한 준비 없이도 임기응변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당시 프랑스군과 싸운 독일 병사/장교들의 평가처럼 프랑스 군대의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은 독일군에 뒤지지 않는 왕성한 투지를 가지고 있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초반부에는 짧은 시간만에 주력이 날아가버리는 치명타를 입었지만 됭케르크 이후에도 남아있던 프랑스군은 각지에서 필사적으로 싸웠고 다 이겼다고 생각하던 독일군은 지헬슈니트 작전 때보다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러나 수뇌부는 바보인데 하사관이나 병사들은 잘 싸운다는 평가는 이탈리아군이나 일본군도 받은 평가이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프랑스군에서 수뇌부만 문제였다는 변명으로 저평가를 피할 수는 없다.
됭케르크 철수 이후 프랑스군은 마른 전선에서 며칠이나마 버티며 분투했고 최후까지 벌어진 브레스트 일대의 공방전에서도 전황타개를 모색했지만 초반에 손실병력과 장비가 너무 컸고 공군력 자체가 열세한 관계로 패전을 피하지 못했다. 당시 레노 내각이 보르도까지 수도를 옮겨가며 항전 의지를 다졌지만 독일군이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한지 3주가 되지 않아 이미 파리가 함락되고 2집단군 50만 명이 포위섬멸된 상황에서 더이상의 항전은 무의미했다.
프랑스군은 과거부터 요새 축성 등에는 상당한 기술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특기인 요새를 지나치게 맹신해 마지노 선에 거의 올인하다가 육군의 기갑현대화나 전술개발, 공군력 정비 등에 있어서 여력이 없었다는 측면도 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독일군과는 달리 유럽 제2위의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잖아도 빡빡한 국가 운영에 해군에도 투자해야 했고 덕분에 육군은 산하 136개 사단중 정규급 및 A급 사단이 전체 편제에서 절반 정도밖에 확보가 안된 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군력은 1940년 ~1944년까지 별 활약 못하다가 영국군에게 공격을 당하고 자침하거나 이탈리아 해군에게 인양되는 수모까지 겪는다. 이를 두고 육군에나 투자할 것이지 해군에 쓸데없이 투자했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가 많아 강력한 해군력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애초 육군이 A급 사단이 절반 뿐이었다 쳐도 운용만 제대로 했다면 독일 육군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기에 해군 탓을 할 처지는 못 된다.
당시 영관급 장교였던 샤를 드 골은 1930년대 중반부터 독일군의 기계화를 예상하고 프랑스군도 기갑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가올 독불 전쟁을 예상한 몇 권의 저서를 내어 참호전을 고집하는 육군 수뇌부를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했으나,[113] 당시 프랑스 정국은 개판이었고 군 수뇌부는 정치권의 비위를 맞추느라 혁신적인 시도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프랑스 정국은 1939년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거국일치내각으로 전환하고 타협에 의해 정국이 굴러갔으나, 프랑스 군부는 파벌 중심의 고질적인 사내 정치로 그 어떤 안건도 채택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진 시점부터, 거국일치내각을 구성한 정치권에서는 군부에 계속해서 개혁을 요구했으나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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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등한시한 대가는 '''아돌프 히틀러에펠탑 인증샷이라는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굴욕'''이었다.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 전차들은 독일의 주력이었던 2호 전차에 뒤지지 않았으며 전격전 따위는 최근에는 거의 신화로 치부되는 현실이라서 수뇌부만 개념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프랑스군은 그렇게 참패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일단 독일군이 아르덴 숲을 넘어오자 프랑스군 지휘부는 공황에 빠져서 순식간에 무너저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임기응변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전선을 뚫고 후방으로 진입해오자 상황을 파악할 수단도, 부대에 효과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단도 없었다. 지휘관이 직접 사령부로 가서 명령문을 수령해 오는 상황에서 그 중간에 독일군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손발과 눈이 한꺼번에 떨어져나간 격이다. 게다가 프랑스군 부대들 역시 그러한 상황에 대응할 작전계획 따위는 없었다.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독일군에 대한 반격은 지휘체계도, 작전계획도, 훈련도 아닌 전적으로 프랑스군 지휘관 개개인의 똑똑함에만 달린 것이 되었다. 당시 독일군 지휘관들처럼 기갑전에 대한 이해가 풍부했던 드골 대령은 200대의 전차를 가진 제4기갑사단을 이끌고 1940년 5월 14일 아르덴 숲 접경 몽코르네에서 독일군에 반격을 가하여 승리했고 이게 프랑스 침공에서 거의 유일한 프랑스군의 승리였다. 이 공적으로 드골은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전의를 잃은 프랑스군 지휘부는 파리가 함락당하자 항복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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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던 프랑스 외인부대[114]
영국으로 철수한 장병들이나 식민지에 있던 프랑스인 밎 식민병들은 드골의 지휘아래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였다. 자유 프랑스군은 1944년 당시, 55만명이나 되는 비교적 대군이었고,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에는, 150만으로 병력이 급격히 늘어나서 미군과 함께 서부전선을 담당하였다. 이런 대군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제2차대전 종전 후에 승전국의 말석에 낄 수 있었다. 자유 프랑스군은 영국과 미국의 원조로 무장하고 있었고, 특히 무장은 물론 육군 군복마저 장교의 케피나 일부 식민지군이 쓴 아드리안 헬멧을 제외하곤 대부분 미 육군과 같을 정도였다.
공군의 경우는 뻘짓의 강도가 더욱 심했는데, 주력 전투기인 D.520의 '''절반'''을 후방에 배치하고 나머지 절반 조차 축차투입하며 날려먹으며 총 500여대의 D.520을 무기력하게 독일군에 헌납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 전투기들은 독일군이 1941년까지 유용하게 사용했다.
이후 프랑스 침공 당시 아무것도 못해보고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공군 조종사들은 동서에서 전투를 벌였다. 서부에서는 영국 공군의 제326, 327, 328 비행중대를 이루면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몰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활동했고 동부에서는 소련 공군에 편입되어 유명한 노르망디-니에멘 연대로 개편, 야크기를 운용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스탈린은 감사의 표시로 그동안 정들었던 야크기를 몰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부대(1/30 노르망디-니멘 전투비행중대, Escadron de chasse 1/30 Normandie-Niemen)는 아직까지도 프랑스에서 현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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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한국전쟁


세계대전 종전 후 다시 군대를 재정비한 프랑스의 첫 대규모 전장은 한반도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여유전력이 없었지만, 영국이나 터키도 여단 병력을 보내는데 자기들만 뒤처질 수는 없었기에 2차대전 및 인도차이나 전선의 참전경험자들을 중심으로 지원병을 모아 파병했다. 이때 지휘관도 물론 자원을 받았는데, 여기 지원한 양반이 나르빅 전투의 영웅이자 프랑스군 '''현역 중장'''인 몽클라르 장군. 이 부대는 규모가 대대였기 때문에 미군 23연대 휘하로 배속되었고 연대장인 대령중장을 지휘해야 하는 괴상한 모양새(…)가 되자 스스로 대대장을 자처해 중령계급으로 부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그를 장군으로 대우해줬다.
사실 프랑스군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연합군 수뇌부는 물론이고 일반 장교들 및 언론기자 전원이 가진 '프랑스군'에 대한 이미지는 1940년의 패배한 군대의 이미지였던 탓에 어느 지휘관도 이 1천 명의 프랑스군 보병들을 자기 지휘하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을 배속받은 미 23연대장도 명령을 받았으니 받아들인 것 뿐이지, 받아놓고서도 과연 프랑스군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프랑스군의 실제 전과로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중에 본대의 측면을 방어하던 1개 소대, '''단 25명'''의 프랑스병이 '''총검돌격'''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쫓아버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 이런 짓을 하고도 프랑스군의 피해는 '''부상자 단 2명'''이었다. [115]
돌격을 지휘한 소대장은 그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고 은성훈장까지 수상했는데, 이에 대한 프랑스 대대 장병들의 평가는 간단했다고 한다. 다음은 대대장 몽클라르 중령의 발언.

"뭐라고! 우리 병사들이 한 총검돌격은 '''보병전술의 기초 중의 기초'''잖아! 그런데 저 양키놈들은 그걸 가지고 왜 난리인 거지?!"

[116]
몽클라르 중령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미군은 감명을 받았고, 8군 사령부는 예하 전 미군에게 총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명의의 이런 명령서를 내려서 경악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총검은 아마도 연합군의 최후의 비밀무기는 아닐지라도, 귀관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총검이 '''단지 통조림 깡통을 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장병들은 유의해 주길 바란다. - 리지웨이 -

이후 1951년 9월에 가진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는 중공군에게 패배하여 100여 명 사상자를 내기도 했지만 프랑스군은 10월에 전열을 가다듬고 재공격하여 2개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이 점령전에서 중공군에게 4,000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안겨주며 수십배 설욕에 성공하는 맹활약을 했다. 이렇게 프랑스군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치열하게 계속해서 싸워 연인원 3,421명이 참전,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의 손해를 냈다. 참전병력은 적었지만 워낙 치열한 전투에 많이 투입되었던 터라, 한국전쟁 참전 외국군 사상율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 병력들은 베트남전이 격화하면서 한국에서 철수, 베트남으로 간다.
미군 부대의 카투사처럼 프랑스군에도 일부 한국인 장병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프랑스군이 베트남으로 가기 직전까지 프랑스군과 함께 복무했고 일부는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인도차이나전쟁과 알제리 독립전쟁 등에 참전한다.

4.10. 현대


세계대전 이후 국력저하[117]로 식민지 유지를 하지 못하게 된 실정에도 식민지의 독립 요구를 깔아 뭉개려다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디엔비엔푸 전투로 참패를 당하고 알제리 전쟁으로 망신을 당한다. 사실 이것은 프랑스군의 문제라기보다는 프랑스 정치가들의 문제가 더 크다. 당시 프랑스는 더이상 해외 식민지들을 유지할 국력이 안 되는 상황인데 무리하게 유지하려들고 독립을 시켜줘야했을 때 안 들어줬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수습하느라 능력 밖의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참패를 면치 못한다. 그저 그런 이미지와는 별개로 냉전기 프랑스군은 실제로는 다방면으로 고른 능력을 갖춘 강한 군대였으나 비교대상이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 같은 유럽의 강대국 영국과 영연방, 독일이었고 2차대전 후에는 북한군, 중국군을 상대로 선전하여 체면좀 살리나 싶었는데 베트민에게는 정규전으로 붙어서 패전하고 알제리에서는 그나마 뒷마당이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진압하려 들었으나 제대로 진압도 못하고 밀리다가 결국 국제여론에 밀려서 독립을 시켜줘야 했으므로 이미지를 회복할 기회가 없었다.
냉전시대에 미/영과의 마찰로 나토를 탈퇴한 바 있다. 다만 이 사건은 탈퇴는 프랑스만의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1956년에 있었던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소련은 이집트군을 제압한 영/프 연합군에 대해 핵공격 위협을 한다. 아직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던 영/프 연합군은 다 이긴 전쟁에서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양국의 핵개발 드라이브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여기까지는 딱히 문제가 없었으나 핵실험에 성공한 영국은 자국을 배신했던[118] 미국편에 곧바로 붙어 프랑스의 핵개발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동맹군으로서 함께 싸웠고 함께 핵공격위협을 받았던 영국이 미국 편에 서서 적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프랑스의 국내여론은 좌파/우파, 보수/진보, 여당/야당 할 것 없이 단결하여 조국의 핵무장을 지지했고 이러한 범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은 프랑스 정부는 국방비의 무려 25%를 핵개발에 쏟아넣는 강경하게 한 끝에 1960년 핵개발에 성공한다. 이 와중에 영국에 느낀 배신감, 미국이 소련과 손잡고 프랑스의 핵개발을 저지하려고 나섰던데서 깨닫게 된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등은 프랑스가 나토를 탈퇴하는 초강수를 두도록 만든 원동력이 된다. 물론 이것 때문에 미국과 영국이 크게 반발했고 미국도 가만있지않고 프랑스에 주둔한 미군을 전원 철수시켜 버렸으며 지금까지도 프랑스에 미군을 주둔시키지 않고 있다.
냉전시기 프랑스군과 프랑스 외인부대콩고 내전이나 아프리카 각지의 내전에 직간접적으로 많이 개입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미국이나 소련과는 좀 다른 독자 노선을 걸으며 중동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 무기를 판매하였다. 이스라엘이 중동전쟁에서 미라지로 재미를 보자 아랍 각국이 소련제 무기 대신 미라지를 사들이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제 무기보다는 싸고 러시아제 무기보다는 신뢰도가 있다는 이미지 때문에 틈새시장에서 의외로 많이 팔았다. 걸프전 직후 걸프전에 투입된 미제 무기의 압도적인 성능 및 냉전의 종료로 미제 및 러제, 독일제 등의 무기들을 구하기가 쉬워진 덕분에 틈새시장도 많이 넘아가 판매량이 상당히 감소했지만 2000-2010년 10년간의 무기 수출량은 미국,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의 무기 판매국이었다.[119]
어쨌든 냉전 기간 동안에는 비록 나토에서 탈퇴하긴 했지만 집단안보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냉전기간 중에는 징병제를 통해서 6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전쟁 발발시 나토의 지휘 체계 내에 편입되어 영국군/|서독연방군과 함께 나토 지상군의 중핵을 맡을 예정이었으며 규모 역시 6개 기갑사단/3개 경기갑사단/3개 기계화보병사단, 거기에 각 1개의 공수사단/공중기동사단/해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프랑스군이 전 부대 기계화에 신경 쓴 결과인데 이는 보병 위주의 요새화와 참호전에 고집하다가 나치 독일군 기갑부대의 전격전 앞에 허무하게 돌파당했던 프랑스 침공의 전훈을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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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ISAF의 일원으로 작전중인 프랑스군 보병, 여단 규모급으로 파견되어 있다.)
다 과거 이야기이고 냉전 종식 이후 대대적인 군개편에 들어가서 1997년 징병제를 폐지하였고 현재 병력 22만 명으로 거의 3분의 1로 줄었다. M1A1과 챌런저를 운용하던 걸프전 시점에 AMX-30을 파견하는 등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전력증강이 늦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육군 병력은 12만 명에 전차는 비축전력을 제외하고 운용대수는 현재 200여대 수준이다. 냉전의 종결과 함께 상당한 규모로 감축이 지속적으로 진행돼서, 과거의 육군 대국의 모습을 연상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과거 독일에게 전격전으로 나라를 뺏긴 경험이 있어 상당히 기동성에 역점을 두는 경향이 짙으며 군대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많은 장갑차를 보유 중이며 기계화율이 높은편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특수부대 위주로 옛 세력권인 아프리카 지역에 제한적으로 개입하거나 미군을 보조하는 정도만 가능하지 실제론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대규모 독자작전 능력을 상실했다. 특히 NATO 전체 방위비의 70% 이상을 미국이 부담하는지라 미군하고 비교하긴 민망한 상황이다.
샤를 드 골급 항공모함으로 상징되는 해군 역시 상당한 경험과 규모를 갖추고 있다. 예산이 부족해 드 골의 후속함 건조 사업이 휘청이고 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와 합작으로 FREMM 프로젝트호라이즌 프로젝트를 통해 대잠/방공 호위함 도입 사업을 성공리에 이어가고 있고, 신형 공격원잠 바라쿠다급의 취역 역시 착착 맞춰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거기다 러시아에 수출까지 된 강습상륙함 건조 노하우를 갖춘 데다[120] 신형함도 취역 중이라는 점까지 봤을 때 프랑스 해군의 전력은 상당히 탄탄하다. 게다가 전략 원잠도 갖추고 있으니 핵 억지력의 한축으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의 전력증강이 지지부진해 지고 영국이 파리 테러 이래 국방비를 증대시키고, 해군력을 늘릴 예정이라, 프랑스 해군이 영국을 압도적으로 넘어서기는 힘들것이라는 게 현재 전망.[121] 하지만 프랑스도 현재 건조, 배치가 진행중인 준이지스급 호위함인 FREMM급을 8척으로 완편하고 추가로 대잠, 대공성능이 향상된 4000t급 신형 FTI중형호위함 5척을 2020년대 중반까지 건조,배치할 예정이다. 현재 프랑스해군의 전력증강계획이 완료되면 2020년대 중반에 프랑스해군은 총15척의 준이지스급 호위함을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영국의 차기 31형 호위함과 유사한 현 프로레알급의 대체함으로 저강도분쟁용 호위함 6척의 건조를 2020년대에 계획하고 있고 바라쿠다급 신형 공격원잠 6척의 취역도 예정되있어 미래에도 영국에 비해 떨어지지않는 대등한 전력을 보유할 예정이다.
공군은 현재 약 250여기 안팎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리비아 내전때 유럽공군 중에선 공습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편이긴 한데 파리테러 이후에 공군 전폭기가 부족해 영국에 도움을 부탁한거 보면 이쪽도 상황이 심각해 보인다.
말리 내전에 개입하고 아프리카 정치 분쟁에도 끼어드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2017년 프랑스 육군의 타이거 공격헬기 59대의 가동율은 25.6%이며, 해군의 NH90 17대의 가동율은 47.6%로 운용하는 날 보다 정비하는 날이 더 많다고 비판받고 있다. 심지어 이보다 수명이 오래된 퓨마의 경우 가동율이 2016년 12.2%에서 9.9%로 더 떨어졌다. 
2018년 초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2020년까지 영국군과의 공동군 1만명을 창설키로 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2020년께 차세대 항공모함 건조를 시작할 예정이다.# 2010년대 들어 자신들의 옛 나와바리인 아프리카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전술했듯 리비아 내전 때 가장 적극적이었고, 코트디부아르 내전에 참여 내전을 종식시키고 말리에서 투아레그 반군을 정리했다. 그리고 우주군 사령부를 창설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 사헬지대에서 주도하는 대테러전에 유럽 통합 특수전 사령부을 설치 예정이다.#

4.10.1. 현대 프랑스군 이미지


세계 군사력 5~7위를 왔다갔다하는 군사강국이고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유럽 군사력의 자존심을 지키는 군대이지만, 20세기 말에 소련이 무너지고, 그로 인한 경제난 때문에 러시아가 대책 없는 군축을 감행하자, 프랑스군도 대규모 감군을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투자는 하고 있기에 독일보단 나은 편이다.
또한 군사력 감축으로 인한 전력 축소와는 별개로 정예도와 실전 경험은 21세기 이후로 미국, 영국과 함께 세계의 분쟁에 자주 개입하는 만큼 상당히 강력한 편이다. 프랑스 특수부대는 과격 이슬람 세력이 판치고 있는 아프리카의 서부에 계속 전개하고 있으며, 해군과 공군도 이들과 함께 계속 실전경험을 쌓으며 유지되고 있다. 냉전시절에는 총 70만, 육군만 45만의 대병력이었지만 현재는 군축으로 인해 대부분의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그 1/2~1/3로 줄었으며, 20만의 소수정예로 운영되고 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영국은 유지할 능력이 안 되는 식민지들은 쿨하게 놓아주되 아르헨티나만큼은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확실하게 조져놓아 품위 유지에 성공했지만,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하고 전후 식민지들의 독립 과정에서도 여기저기 끊임없이 패배하는 모습만 보여준 탓에 실력도 없이 자존심만 강한 군대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물론 식민지에서 영 좋지 않은 일을 겪은 것은 정치권의 잘못된 결정과 핵무기 전력 증강으로 예산도 없고 상황도 나쁜 프랑스군이 독박을 쓴 것일 뿐이다. 그래도 나토에서 해군만 집중적으로 키운 영국[122]과 육군만 비대해진 독일에 비해 3군이 가장 균형을 이뤘다고 평가받고 있다.
핵무기항공모함도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 러시아와 같은 초강대국에는 비할 수 없지만, 핵무기를 이용해서 적국의 대도시들은 충분히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수 있다. 그래서 예전 식민지에서 정변이 일어났다고 하면 프랑스군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많은 사상자가 생겨도 정치적으로 문제될 것 없는 외인부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국외 파병에도 나름 공을 들이고 있다. 알제리와 베트남에서의 실패 사례가 눈에 띄지만 단기간에서는 아프리카의 프랑스어권에서 프랑스군의 개입은 상당히 효과적인 사례도 많았다.
외인부대가 가장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국외에 투입되기 때문에 이들이 프랑스군의 정예인 것처럼 보이고 이는 사실이긴 하지만, 외인부대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규군의 정예도도 그에 뒤쳐지지 않게 높다. 특이하게 국외에 자주 출동하는 해병대(Troupes de Marines)는 해군 소속이 아닌 육군 소속이다. 그 외 해군 육전대를 별도로 보유중이다. 프랑스군의 전체적인 전력 자체는 축소되는 추세이지만 병사 개개인의 정예도, 특히 외인부대와 프랑스 특수전부대와 같은 정예군들의 실력은 세계에서도 손에 꼽는다.
친미적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집권 이후 수십년 만에 나토에 복귀했다. 나토에 복귀한 이유는 사르코지의 성향도 성향이지만, 실상은 현재 프랑스 경제상황이 나빠서 프랑스가 예전처럼 자주 국방을 수행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국 혼자 떠받들고 미국이 중심되는 나토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파리 테러 이후 올랑드 대통령이 보복을 천명했지만, 실제론 프랑스순의 사정상 해군 항공대와 공군의 공습 이상의 실질적인 보복이 가능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본인들도 그걸 아는지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헌병군 및 예하의 대테러부대GIGN은 상당한 실력을 자랑한다. 1950년대부터 70년까지는 독립을 요구하는 바스크인이나 알제리 독립단체의 테러를 겪고 70년대부터는 프랑스에 몰려 사는 각국의 망명자들을 노리는 암살 및 테러 등에 시달려온 탓에, 그동안 축적된 대테러전 노하우는 세계 여러 유수의 최정예 특수부대들과 함께 세계 최고의 경지에 달해 있고 이에 영향을 받아 다른 프랑스 특수전 관련 부대들 또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 1994년에 테러범에 납치된 에어 프랑스기 납치사건도 인질 전원 무사, 테러범 전원 사살로 깔끔히 해결하여 프랑스군의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말리의 한 결혼식을 테러집단의 비밀 회합으로 오인폭격해 수십 명이 사망하여 국제적 이미지가 굉장히 나빠졌으며 프랑스 밖 국가 국민들의 선진국 환상을 깨뜨리는 사례가 되었다. # 다만 프랑스군 측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닌 게, 중동 쪽에선 결혼식장에 AK를 그냥 이유없이 흥을 돋구겠다는 이유로 난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인폭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5. 군별



5.1. 육군


[image]
  • 프랑스 육군 상세정보는 항목참조.


Armée de terre française, L'Armée de terre

5.1.1. 편제



5.1.1.1. 육군인적자원국

Direction des ressources humaines de l'Armée de terre, DRHAT
  • 인적자원교육사령부(Commandement des ressources humaines et de la formation, COM RH-FORM)
    • 육군국방고등학교(Lycées de la défense-Terre)
육군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군사 훈련을 하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재학생의 70%가 전현직 군인의 자녀들이다. 나머지 15%는 공무원 자녀고 나머지 15%는 공평한 공립교육의 기회를 주려는 정부 정책에 의해 들어온 이들. 군사 관련 그랑제콜 입시생에 특화된 준비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 오툉군사고등학교(Lycée militaire d'Autun)
  • 엑상프로방스군사고등학교(Lycée militaire d'Aix-en-Provence)
  • 생시르군사고등학교(Lycée militaire de Saint-Cyr )
  • 라플레슈군사유년학교(Prytanée national militaire de La Flèche)
  • 기초학교
  • 생시르육군사관학교(Écoles de Saint-Cyr Coëtquidan)
  • 국립현역부사관학교(École Nationale des Sous-Officiers d’Active)

5.1.1.2. 지상군사령부

Commandement des forces terrestres, COM FT
  • 통합전투훈련교육사령부(Commandement de l'entrainement et des écoles du combat interarmes, COM E2CIA)
    • 지휘소통제훈련센터(Centre d'entraînement et de contrôle des postes de commandement, CECPC)
훈련부대가 되기 전 부대명은 제3포병연대(3^e^ régiment d'artillerie, 3^e^ RA).
  • 전투훈련센터(Centre d’entraînement au combat, CENTAC)
훈련부대가 되기 전 부대명은 제1엽병대대(1^er^ bataillon de chasseurs, 1^er^ BC)
  • 시가전훈련센터(Centre d'entraînement aux actions en zone urbaine, CENZUB)
훈련부대가 되기 전 부대명은 제94보병연대(94^e^ Régiment d’Infanterie, 94^e^ RI).
  • 제1아프리카엽병연대(1^er^ régiment de chasseurs d'Afrique, 1^er^ RCA)
장갑차 및 전차의 운전병과 포수, 미사일 사수를 훈련시키는 부대.
  • 통합보급지원훈련센터(Centre d'entraînement interarmes et du soutien logistique, CENTIAL)
훈련부대가 되기 전 이름은 제51보병연대(51^e^ Régiment d’Infanterie, 51^e^ RI).
  • 보병사격훈련센터(Centre d'entraînement de l'infanterie au tir opérationnel, CEITO)
훈련부대가 되기 전 이름은 제122보병연대(122^e^ Régiment d’Infanterie, 122^e^ RI).
  • 국립코만도훈련센터(Centre national d'entraînement commando, CNEC)
  • 제17포병대(17^e^ groupe d'artillerie, 17^e^ GA)
대공사격 훈련과 군견병 교육을 담당하는 부대.
  • 보병학교(École d'infanterie, EI)
  • 기병학교(École de cavalerie, EC)
전차장, 기갑소대 지휘관, 기갑중대 지휘관을 양성하는 시설.
  • 공병학교(École du génie, EG)
  • 포병학교(École d'artillerie, EA)
  • 통합화생방방호센터(Centre interarmées de la défense NRBC)
  • 프랑스 신속대응군사령부(Quartier général du corps de réaction rapide - France, QG CRR-FR)
  • 제1사단(1^re^ division, 1^re^ DIV)
  • 제1포병연대(1^re^ régiment d'artillerie, 1^re^ RA)
  • 제19공병연대(19^e^ régiment du génie, 19^e^ RG)
  • 제132육군군견대대(132^e^ bataillon cynophile de l'armée de Terre, 132^e^ BCAT)
  • 제27산악보병여단(27^e^ brigade d'infanterie de montagne, 27^e^ BIM)
    • 제7산악엽병대대(7^e^ bataillon de chasseurs alpins, 7^e^ BCA)
    • 제13산악엽병대대(13^e^ bataillon de chasseurs alpins, 13^e^ BCA)
    • 제27산악엽병대대(27^e^ bataillon de chasseurs alpins, 27^e^ BCA)
    • 제4엽병연대(4^e^ régiment de chasseurs, 4^e^ RCh)
    • 제93산악포병연대(93^e^ régiment d'artillerie de montagne, 93^e^ RAM)
    • 제2외인공병연대(2^e^ régiment étranger de génie, 2^e^ REG)
1999년 창설된 연대로 외인부대 연대들 중 제일 늦게 창설되었다.
  • 고산지대 전투학교(École militaire de haute montagne, EMHM)
산악전 및 극지방 전투 기술을 교육하는 시설이다.
  • 산지적응단(Groupement d'aguerrissement montagne, GAM)
산악 지형 전투에 대한 훈련을 담당한다.
  • 제9해병여단(9^e^ brigade d'infanterie de marine, 9^e^ BIMa)
    • 제2해병연대(2^e^ régiment d'infanterie de marine, 2^e^ RIMa)
    • 제3해병연대(3^e^ régiment d'infanterie de marine, 3^e^ RIMa)
    • 제126보병연대(126^e^ régiment d'infanterie, 126^e^ RI)
    • 해병전차보병연대(Régiment d'infanterie chars de marine, RICM)
AMX-10 RC 장갑차를 주력으로 운용하는 경기갑연대.
  • 제1해병연대(1^er^ régiment d'infanterie de marine, 1^er^ RIMa)
AMX-10 RC 장갑차를 주력으로 운용하는 경기갑연대.
  • 제11해병포병연대(11^e^ régiment d'artillerie de marine, 11^e^ RAMa)
  • 제6공병연대(6^e^ régiment du génie, 6^e^ RG)
  • 제7기갑여단(7^e^ brigade blindée, 7^e^ BB)
  • 제35보병연대(35^e^ régiment d'infanterie, 135^e^ RI)
VBCI 보병전투차를 운용하는 기계화보병연대.
  • 제152보병연대(152^e^ régiment d'infanterie, 152^e^ RI)
VBCI 보병전투차를 운용하는 기계화보병연대.
  • 제1산병연대(1^er^ régiment de tirailleurs, 1^er^ RTir)
VBCI 보병전투차를 운용하는 기계화보병연대.
  • 제1엽병연대(1^er^ régiment de chasseurs, 1^er^ RCh)
AMX-56 르클레르 전차를 운용하는 기갑연대.
  • 제5용기병연대(5^e^ régiment de dragons, 5^e^ RD)
AMX-56 르클레르 전차를 운용하는 기갑연대.
  • 제68아프리카포병연대(68^e^ régiment d'artillerie d'Afrique, 68^e^ RAA)
CAESAR 자주포와 120mm 박격포, 미스트랄 지대공미사일을 운용하는 포병 및 방공연대.
  • 제3공병연대(3^e^ régiment du génie, 3^e^ RG)
  • 독불여단(Brigade franco-allemande, BFA) - 주둔지: 뮐하임
이 문서에서는 프랑스군 부대만을 소개한다.
  • 제1보병연대(1^er^ régiment d'infanterie, 1^er^ RI)
  • 제3후사르연대(3^e^ régiment de hussards, 3^e^ RH)
AMX-10 RC 장갑차를 주력으로 운용하는 경기갑연대.
  • 지휘지원대대(Bataillon de commandement et de soutien, BCS)
  • 제3사단(3^e^ division, 3^e^ DIV)
  • 제54포병연대(54^e^ régiment d'artillerie, 54^e^ RA)
미스트랄 지대공미사일을 운용하는 방공연대.
  • 제31공병연대(31^e^ régiment du génie, 31^e^ RG)
  • 제2용기병연대(2^e^ régiment de dragons, 2^e^ RD)
본래 제2기갑여단 소속 전차연대였지만 2005년 화생방 방호부대로 재편되었다.
  • 제11공수여단(11^e^ brigade parachutiste, 11e BP)
    • 제1공수엽병연대(1^er^ régiment de chasseurs parachutistes, 1^er^ RCP)
    • 제3해병공수연대(3^e^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3^e^ RPIMa)
    • 제8해병공수연대(8^e^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8^e^ RPIMa)
    • 제2외인공수연대(2^e^ régiment étranger de parachutistes, 2^e^ REP)
산하의 GCP(공수특공대)는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전 부대다.
  • 제1공수후사르연대(1er régiment de hussards parachutistes, 1^er^ RHP)
AMX-10 RC 장갑차와 ERC-90 사게 장갑차를 운용하는 경기갑연대.
  • 제35공수포병연대(35^e^ régiment d'artillerie parachutiste, 35^e^ RAP)
CAESAR 자주포와 120mm 박격포, 미스트랄 지대공미사일을 운용하는 포병 및 방공연대.
  • 제17공수공병연대(17^e^ régiment du génie parachutiste, 17^e^ RGP)
  • 제1공수수송연대(1^er^ régiment du train parachutiste, 1^er^ RTP)
  • 공수부대학교(École des troupes aéroportées, ETAP)
  • 제6경기갑여단(6^e^ brigade légère blindée, 6^e^ BLB)
  • 제2외인보병연대(2^e^ régiment étranger d'infanterie, 2^e^ REI)
  • 제13외인부대반여단(13^e^ demi brigade de Légion étrangère, 13^e^ DBLE)
  • 제21해병연대(21^e^ régiment d'infanterie de marine, 21^e^ RIMa)
  • 제1기병외인연대(1^er^ régiment étranger de cavalerie, 1^er^ REC)
AMX-10 RC 장갑차를 주력으로 장비한 경기갑연대.
  • 제1스파히연대(1^er^ régiment de spahis, 1^er^ RS)
AMX-10 RC 장갑차를 주력으로 장비한 경기갑연대.
  • 제3해병포병연대(3^e^ régiment d'artillerie de marine, 3^e^ RAMa)
CAESAR 자주포와 TRF F1 견인포, 120mm 박격포, 미스트랄 지대공미사일을 운용하는 포병 및 방공연대.
  • 제1외인공병연대(1^er^ régiment étranger de génie, 1^er^ REG)
  • 제2기갑여단(2^e^ brigade blindée, 2^e^ BB)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필리프 르클레르 장군 지휘 하에 파리를 해방한 제2기갑사단의 후신이다.
  • 차드행진연대(Régiment de marche du Tchad, RMT)
VBCI 보병전투차를 운용하는 기계화보병연대.
  • 제16엽병대대(16^e^ bataillon de chasseurs, 16^e^ BC)
VBCI 보병전투차를 운용하는 기계화보병대대.
  • 제92보병연대(92^e^ régiment d'infanterie, 92^e^ RI)
VBCI 보병전투차를 운용하는 기계화보병연대. 골루와(갈리아인)라는 별명이 있다.
  • 제501주력전차연대(501^e^ régiment de chars de combat, 501^e^ RCC)
AMX-56 르클레르 전차를 운용하는 기갑연대.
  • 제12흉갑보병연대(12^e^ régiment de cuirassiers, 12^e^ RC)
AMX-56 르클레르 전차를 운용하는 기갑연대.
  • 제40포병연대(40^e^ régiment d'artillerie, 40^e^ RA)
AU-F1 자주포를 운용하는 포병연대.
  • 제13공병연대(13^e^ régiment du génie, 13^e^ RG)
  • 정보사령부(Commandement du renseignement, COM RENS)
  • 제2후사르연대(2^e^ régiment de hussards, 2^e^ RH)
VBL을 주력으로 운용하는 정찰연대. 인적자원을 통한 정보수집을 임무로 두고있다.
  • 제44통신연대(44^e^ régiment de transmissions, 44^e^ RT)
전자전을 통한 정보수집을 임무로 둔 전자전연대.
  • 제54통신연대(54^e^ régiment de transmissions, 54^e^ RT)
전자전을 통한 정보수집 및 통신망 교란을 임무로 둔 전자전연대.
  • 제61포병연대(61^e^ régiment d'artillerie, 61^e^ RA)
전술무인기를 운용하는 무인기연대.
  • 제28지형대(28^e^ groupe géographique, 28^e^ GG)
지형 정보의 수집 및 지원을 임무로 둔 지형정보부대.
  • 환경기능통합센터(Centre Interarmées des Actions sur l’Environnement, CIAE)
심리전부대.
  • 제785전자전중대(785^e^ Compagnie de Guerre Electronique, 785^e^ CGE)
  • 육군정보교육훈련센터(Centre d'enseignement et d'entrainement du renseignement de l'armée de terre, CEERAT)
  • 정보통신사령부(Commandement des systèmes d’information et de communication, COM SIC)
  • 제28통신연대(44^28^ régiment de transmissions, 28^e^ RT)
  • 제40통신연대(40^e^ régiment de transmissions, 40^e^ RT)
  • 제41통신연대(41^e^ régiment de transmissions, 41^e^ RT)
  • 제48통신연대(48^e^ régiment de transmissions, 48^e^ RT)
  • 제53통신연대(53^e^ régiment de transmissions, 53^e^ RT)
  • 제807통신중대(807^e^ compagnie de transmissions, 807^e^ CT)
  • 통신학교(École des transmissions, ETRS)
  • 군수사령부(Commandement de la logistique des forces, COM LOG)
  • 군수군지휘소(Poste de commandement de force logistique, PCFL)
  • 지상수송센터(Centre des transports et transits de surface, CTTS)
  • 제121수송연대(121^e^ régiment du train, 121^e^ RT)
  • 제503수송연대(503^e^ régiment du train, 503^e^ RT)
  • 제511수송연대(511^e^ régiment du train, 511^e^ RT)
  • 제515수송연대(515^e^ régiment du train, 515^e^ RT)
  • 제516수송연대(516^e^ régiment du train, 516^e^ RT)
  • 제121수송연대(121^e^ régiment du train, 121^e^ RT)
  • 의무연대(Régiment médical, RMED) - 사령부: 앵
  • 제14공수군수지원보병연대(14^e^ régiment d’infanterie et de soutien logistique parachutiste, 14^e^ RISLP)
  • 제519해양수송단(519^e^ groupe de transit maritime, 519^e^ GTM)
  • 제24보병연대(24^e^ Régiment d’Infanterie, 24^e^ RI)
  • 작전군수수송학교(École du train et de la logistique opérationnelle, ETLO)
  • 정비사령부(Commandement de la maintenance des forces, COM MF)
  • 제2장비연대(2^e^ régiment du matériel, 2^e^ RMAT)
  • 제3장비연대(3^e^ régiment du matériel, 3^e^ RMAT)
  • 제4장비연대(4^e^ régiment du matériel, 4^e^ RMAT)
  • 제6장비연대(6^e^ régiment du matériel, 6^e^ RMAT)
  • 제7장비연대(7^e^ régiment du matériel, 7^e^ RMAT)
  • 제8장비연대(8^e^ régiment du matériel, 8^e^ RMAT)

5.1.1.3. 지상장비정비운영통합구조본부

Direction centrale de la Structure intégrée du maintien en condition opérationnelle des matériels terrestres, DC SIMMIT
  • 국토산업정비대(Service de la maintenance industrielle terrestre, SMITer)
    • 제12장비지원기지(12^e^ base de soutien du matériel, 12^e^ BASMAT)
    • 제13장비지원기지(13^e^ base de soutien du matériel, 13^e^ BASMAT)
    • 제14장비지원기지(14^e^ base de soutien du matériel, 14^e^ BASMAT)

5.1.1.4. 국토지상사령부

Commandement terre pour le territoire national, COM TN
  • 육군예비군대표단(Délégation aux réserves de l'Armée de terre, DRAT)
  • 군지원대(Service militaire volontaire, SMV)
  • 파리소방여단(Brigade de sapeurs-pompiers de Paris, BSPP)
  • 민방위군사부대(Formations militaires de la sécurité civile, FORMISC)
    • 민방위교육지원대 1(Unité d'instruction et d'intervention de la Sécurité Civile n°1, UNISC 1)
    • 민방위교육지원대 5(Unité d'instruction et d'intervention de la Sécurité Civile n°5, UNISC 5)
    • 민방위교육지원대 7(Unité d'instruction et d'intervention de la Sécurité Civile n°7, UNISC 7)
  • 제25항공공병연대(25^e^ régiment du génie de l'Air, 25^e^ RGA)
  • Service militaire adapté, SMA
  • 제519해양수송단(519^e^ groupe de transit maritime, 519^e^ GTM) - 사령부: 툴롱

5.1.1.5. 육군특수전사령부

Commandement des forces spéciales terre, COM FST
  • 제1해병공수연대(1^er^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1^er^ RPIMa)
  • 제13용기병공수연대(13^e^ régiment de dragons parachutistes, 13^e^ RDP)
  • 제4특수전헬리콥터연대(4^e^ régiment d'hélicoptères des forces spéciales, 4^e^ RHFS)
  • 특수전지원단(Groupement d’appui aux opérations spéciales, GAOS)
  • 특수전학교(Académie des forces spéciales, Académie FS)

5.1.1.6. 육군경항공사령부

Commandement de l'Aviation légère de l’Armée de terre, COM ALAT
  • 육군비행분견대(Détachement avions de l'armée de Terre, DAAT)
  • 제9항공지원연대(9e régiment de soutien aéromobile, 9e RSAM)
헬리콥터 정비를 담당하는 부대. 2017년에 대대에서 연대로 승격된지라 업데이트가 느린 프랑스 국방부 사이트에서는 아직 대대라고 써져있다.
  • 제4공중기동여단 (4e brigade aéromobile, 4e BAM)
    • 제1전투헬리콥터연대 (1er régiment d'hélicoptères de combat, 1er RHC)
타이거 HAD 공격헬기와 카이만 수송헬기를 운용하는 항공연대.
  • 제3전투헬리콥터연대 (3e régiment d'hélicoptères de combat, 3e RHC)
가젤 다용도헬기와 퓨마 수송헬기를 운용하는 항공연대.
  • 제5전투헬리콥터연대 (5e régiment d'hélicoptères de combat, 5e RHC)
타이거 공격헬기와 가젤 다용도헬기, 쿠거 수송헬기와 퓨마 수송헬기를 운용하는 항공연대.
  • GAAC
  • 육군경항공학교(École de l'aviation légère de l'armée de Terre, EALAT)

5.1.1.7. 외인부대사령부

Commandement de la Légion étrangère, COMLE(외인부대사령부)
  • 훈련센터 - Groupement du recrutement de la Légion étrangère (GRLE)
  • 제1 외인연대(오바뉴 소재) - 1er régiment étranger (1er RE) 행정부대.
  • 제4 외인연대(카스텔노다리 소재) - 4e régiment étranger (4e RE) 교육부대.
  • 제1 외인기병연대 - 1er régiment étranger de cavalerie (1er REC) -제6경기갑여단 예하.
  • 제2 외인보병연대(님 소재) - 2e régiment étranger d’infanterie (2e REI) -제6경기갑여단 예하.
  • 제1 외인공병연대 - 1er régiment étranger de génie (1er REG) -제6경기갑여단 예하.
  • 제2 외인공병연대 - 2e régiment étranger de génie (2e REG) -제27산악보병여단 예하.
  • 제2 외인공수연대(코르시카 섬 칼비 소재) - 2e régiment étranger de parachutistes (2e REP) -제11공수여단 예하.
산하의 GCP(공수특공대)는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전 부대다.
  • 3 외인보병연대(프랑스령 기아나 주둔) - 3e régiment étranger d’infanterie (3e REI)
  • 13 외인반여단 - 13e demi-brigade de Légion étrangère (13e DBLE)[123] -제6경기갑여단 예하.
  • 마요트 분견대(아프리카 코모로 제도 주둔.) - Détachement de Légion étrangère de Mayotte (DLEM)[124]



5.1.1.8. 국외 및 해외영토 참모본부

État-major de spécialisation de l'outre-mer et de l'étranger, ESOME
  • 제2해병공수연대(2e régiment de parachutistes d'infanterie de marine, 2e RPIMa)
레위니옹 주둔부대.
  • 제3외인보병연대(3e régiment étranger d'infanterie, 3e REI)
  • 제5해외혼성연대(5e régiment interarmes d'outre-mer, 5e RIAOM)
지부티 주둔부대.
  • 제9해병연대(9e régiment d'infanterie de marine, 9e RIMa)
  • 제33해병연대(33e régiment d'infanterie de marine, 33e RIMa)
과들루프 주둔부대.
  • 태평양-폴리네시아해병연대(Régiment d'infanterie de marine du Pacifique - Polynésie, RIMaP-P)
  • 제5흉갑기병연대(5e régiment de cuirassiers, 5e RC)
아랍 에미리트 주둔부대.
  • 제6해병대대(6e bataillon d'infanterie de marine, 6e BIMa)
가봉 주둔부대.
  • 마요트 외인부대 분견대(Détachement de Légion étrangère de Mayotte, DLEM)
마요트 주둔부대.
  • 제43해병대대(43e bataillon d'infanterie de marine, 43e BIMa)
코트디부아르 주둔부대.

5.1.1.9. 육군기술국

Section technique de l’armée de Terre, STAT
  • 육군기술국 공중기동부대(Groupement aéromobilité de la section technique de l'Armée de terre, GAMSTAT)

5.2. 해군



5.3.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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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mée de l'air française
프랑스 공군은 현재 영국과 함께 서유럽에서 1위를 다투고 있다. 라팔 99대, 미라지 2000 124대를 운용하며, 보잉제 KC-135를 14대를 운용중이다. 또한 특이하게 다른국가에선 대부분 SLBM으로 대체된 핵공격능력에 추가적으로 공중발사핵순항미사일을 사용하는핵공격전용 기체를 따로 운영하여 유럽에서 유일하게 공중핵공격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조기경보기로는 미국에서 들여온 E-3를 자체적으로 개량한 E-3F 4대를 운용중에 있다. 프랑스는 해외 파견을 하여 작전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세네갈, 레위니옹, 지부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기아나, 뉴칼레도니아, 아랍에미리트(...) 등에 공군기지를 두고 있기도 하다.

5.4. 국가헌병대



6. 계급



7. 프랑스군의 무기개발사


자주국방이라는 이름하에 무기체계 국산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유럽 내에서의 패권 추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데, 독자적인 군사적 역량이 없이는 동서의 초강대국-미국/러시아와의 유럽 내 패권 경쟁에서 적극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위해 무기의 국산화에 많은 역량을 투입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핵개발에서 보듯이 미국과 영국에게 크게 뒷통수를 맞아본 경험때문에 최근까지도 이러한 경향이 심했으며 최소한 공동개발은 하되 개발을 주도하거나 대등한 입장에서의 공동개발주도권은 반드시 추구하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나토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무기체계 구축을 목표로 했으나 가용가능한 예산의 제한되지만 투자해야하는 분야는 다양하기 때문에 무기체계의 신규 구축에 적은 예산이 투입되고-적은 예산으로 개발기간이 길어지고-개발기간이 길어져서 소요 예산이 증가하고-예산이 없어 개발이 지연되고-그러는 사이 신기술이 개발돼서 개발목표가 변경되고-그러다 보니 다시 개발기간과 소요예산이 늘어나는 식으로 비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125][126] [127] 또 이를 위해 독자규격을 사용하다보니 총기류와 같이 민간 시장의 파이가 큰 분야의 경우 범용성 부족으로 세계시장에서 퇴출당하다시피 하게 되기도 했다. 또한 지나치게 프랑스 우선주의를 채택하는 바람에 같이 개발하던 국가들의 반감을 사게되어 다른 국가들 간의 공동개발사업을 여러 번 파토내기도 했다.
미스트랄, 미라지, 엑조세 시리즈 등은 호평을 받으며 오랜시간을 지내왔지만 냉전이 끝난 현재는 더이상의 틈새시장 개척 및 가용가능 예산이 한계에 부딪혀 미제와 러제,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른 중국제가 무기시장을 지배하는 요즘에는 더이상 수출길을 뚫기가 힘들어진 탓에 다시 나토 및 공동개발 쪽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지만 프랑스가 독자무기개발을 포기한 것은 아니며 프랑스제 무기는 여전히 해외 무기수출시장에서 미국과 러시아와 함께 강자로 선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정상급의 국방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독일, 영국이 자국의 자연조건에 특화된 특정 분야에서만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것에 비하면, 다소 비효율적이지만 전 분야에서 일정수준을 달성하고 있는 프랑스의 역량이 과소평가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님을 기억하자. 특히나 항공우주산업의 기술력은 군용기, 특히 전투기를 엔진까지 전부 자국기술로 자체생산할수있는 기술력과 인프라를 가진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128] [129]
2018년 국방기술품질원에서 발간한 각 국가별 국방과학기술력수준평가에서는 러시아를 뛰어넘은 세계2위수준의 국방기술력을 가진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2015년 국방과학기술수준조사 무기 수출에서는 미국, 러시아에 이은 세계 3위를 하고 있다. SIPRI 2019 , 경향신문
또한 프랑스는 안으로는 2020년까지 ERBC 재규어와 그리핀 장갑차를 도입하고, 2030년까진 HK416(F)를 10만 정 도입할 예정이며, 밖으로는 독일과 MGCS 주력전차, 페가수스 레일건, 새로운 전투기를 공동 개발하고 실용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7.1. 전투기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으로 활약한 미라지 전투기, 그리고 그 후계기종인 미라주 2000, 엑조세 공대함 미사일 등이 장기간 호평을 받아 왔다. 인도군의 미라지 2000의 운용은 매우 만족스러워서 인도군은 Su-27이나 MiG-21 같은 러시아제 전투기와 함께 프랑스제 전투기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라팔은 카길 전쟁 때 미라지 2000의 성능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한 인도에 팔렸으며, 그 뒤로 이집트카타르에도 파는 데 성공했다.

7.2. 헬리콥터


가젤 무장헬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유로콥터의 헬기들이 다 프랑스 손이 닿은 헬기들이다.

7.3. 미사일


프랑스가 만든 엑조세 공대함 미사일은 포클랜드에서는 아르헨티나군이 발사하여 영국군 구축함 하나를 침몰시켰고, 이란-이라크 전쟁 중이었던 1987년에는 이라크군이 당시 이라크 우방이었던 미 해군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 스타크호를 적인 이란의 군함으로 오인해 발사, 대파시키기도 했다.
미스트랄 휴대용 대공미사일은 성능을 인정받아 25개국에 수출되었으며, 크로탈 지대공 미사일은 웬만한 친서방 국가들에게는 다 팔렸고 한국의 천마 지대공 미사일의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7.4. 개인화기


서유럽 국가 모두가 나토 표준인 7.62mm탄을 쓰고 있는데 유일하게 7.5mm탄 사용을 고집하며 30년을 버틴 근성(?)을 자랑한다. 사실은 대전 후의 경제적 혼란과 이어서 벌어진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막대한 자금소모 및 핵개발에 우선적인 국방예산 배정으로 인해 나토 규격으로 소총탄약을 교체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토 탈퇴로 탄종을 통일할 이유도 없었고...결국 이것은 프랑스제 총기가 세계시장에서 퇴출되는 결과만을 불러왔다. 그래도 핵개발이 일단 마무리된 1970년대 이후에 채용된 돌격소총이나 다른 화기들은 나토 규격의 탄약을 사용하는 화기로 통일시켰다.[130]
기관총계의 흑역사인 쇼샤 경기관총[131][132]을 제외하고서라도 1차 대전 시 주력 소총르벨 M1886소총은 볼트액션 + 관형탄창이라는 부적절한 결합으로 재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으로 유명하고,[133] 2차 세계대전 중 쓰던 주력 소총 MAS-36은 그럭저럭 괜찮은 볼트액션 소총이었지만, 당대의 다른 프랑스 총기들과 마찬가지로 수동 안전장치가 없었다.
그래도 냉전을 기점으로 이런 안습한 상황에선 어느정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후 전군을 최대한 빨리 무장시키기 위해 '급조한' MAT-49는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국의 스텐 기관단총보다 높은 생산성과 신뢰성을 가지고 있어서 만족할만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고, 베트남 전쟁 및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통해 공산권으로 유입되면서 만족스러운 평가를 얻고 또 공산권에선 이걸 7.62X25mm 토가레프 탄을 사용하는 버전으로 마개조해서 써먹었는데 역시 만족스러웠다고. 주력 반자동 소총인 MAS-49/56은 가늠자 부분에 레일을 부착되있어 손쉽게 전용 스코프를 장착할 수 있었고, 가스 직동식 설계로 부품수가 적었으며, 분해가 쉽고 걸레와 윤활유만으로 청소가 가능할 정도로 관리가 간편했다고 한다. 또한 알제리, 베트남등의 가혹한 환경에서도 견딜 수 있었다. 20, 30발 탄창 시대에 10발 탄창을 끝까지 고집하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반자동 소총인 만큼 10발 탄창도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쓰고 있는 제식 소총인 FAMASAUG와 함께 실전배치된 대표적인 불펍소총으로 알려져 있다. SA80 못지 않은 똥총이라는 평가와 쓸만한 불펍 소총이라는 평이 공존하는데, 불펍형의 일반적 문제인 탄피배출을 FAMAS의 특유의 문제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다. 일단은 결함투성이였던 영국의 SA80보다는 훨씬 낫고 안정성으로도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SA80이 현역을 지키는 와중에 퇴출당하고있다. 자세한건 FAMAS해당항목으로.
권총은 옛날부터 유독 약했다. 과거 식민지겸 이웃인 벨기에가 총기류로 유럽과 미국을 쥐었다폈다 하는 것을 비교하면 미묘한 부분. 현재도 주력 권총으로는 이탈리아베레타를 자국의 독자 사양으로 맞춰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되지 않는 국산 권총들도 대부분 해외제품의 모방 수준. 그래도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Mle. 1935 권총은 후에 SIG P210 계열의 조상에 해당하는 우수한 설계였다...탄이 약해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7.5. 공동개발 관련 에피소드


"항상 일관적으로 독자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만사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할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설이 한국 밀덕 사이에서 주장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에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인도양 , 남태평양...등에 산재하고 있는 해외영토-영해 떄문에 미국이 맹주로 있는 나토체제에서 제역할만 하면 되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과는 전략적 위치가 전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자국의 국가전략에 맞는 무기를 개발해야 했고, 당연히 합작사업에서 타협이 불가능할 때는 독자노선을 걷는 게 합리적.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공동개발하다가 취소되거나 삽질하는 경우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나온다. 미국과 독일이 공동으로 개발하다가 엎어진 MBT-70, 영국과 독일이 공동으로 개발하다가 엎어진 MBT-80라거나 영국과 독일이 공동으로 개발하다가 독일이 빠져나간 ASRAAM 등.

7.5.1. '''유로파이터 프로젝트'''


유로파이터 개발 시 '''프랑스산 엔진 사용'''과 함재기형의 개발, 그리고 '''최종 조립공장을 프랑스에 둘 것'''을 주장했다가 제뜻대로 안 되자 탈퇴했다고 한국의 밀덕후들에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고 실제로는 설계 컨셉에 영국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134]
이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와 가까운지라 공대공/공대지 모두를 커버할 수 있는 기체'를 원하는 프랑스의 컨셉과, '대륙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북해를 건너 날아드는 소련 폭격기의 요격에 중점을 둔 기체'를 원하던 영국의 컨셉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벌어진 일로, 이를 프랑스의 이기주의 때문이라 모는 것은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이기주의라면 자국의 지정학적 특성에 맞추었기는 마찬가지인 영국의 주장 역시 이기주의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유로파이터는 공동개발국들이 자국이익만 우선시한 결과 유지비가 극도로 치솟았으며, 개발국들조차 어떻게든 내다 버리려고 애쓰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반면 라팔은 리비아 내전등에서 준수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인도와 이집트에 팔리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다. 심지어 유로파이터 측은 인도에 어떻게든 팔아보기 위해 프랑스가 과거 제안했던 함재기형 유로파이터까지 '돈만 내면 만들어 드릴게요' 라고 내밀고 있다.

7.5.2. '''토네이도 프로젝트'''


토네이도 역시 프랑스 입장에서는 애매해 보일 만도 한 것이, 프랑스는 이미 토네이도와 유사한 쌍발/가변익/대형기체인 미라지G 시리즈를 만들어 본 바가 있었으며, 너무나도 비싼 획득비용 및 유지비에 놀라[135] 시제기까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접고 주머니 사정에 맞고 대량운용이 가능한 단발 소형전투기인 미라지2000을 만들었던 선례가 있었다.

7.5.3. '''라파예트급 호위함'''


프랑스해군의 라파예트급 호위함은 프랑스 해군의 주력함인 1등호위함을 보조하기 위해서 건조된 2등호위함이다. 국내에서는 체급에 비해서 무장이 빈약한 호위함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처음부터 라파예트급 호위함이 빈약한 무장을 계획 했던것도 아니다. 프랑스 해군은 라파예트급을 경무장만 장착한 상태에서 실전배치를 한후에 레이더를 보강하고 함교앞에 여유공간에 실버 VLS를 증설해서 15 대공미사일을 운용하는 현대화된 자함방공이 가능한 호위함으로 쓰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90년대에 프랑스 해군의 예산부족으로 실행되지 못했으며 실전배치 후 거의 20년간을 텅빈 B포지션을 가진 경무장호위함으로만 쓰여야 했던 비운의 함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프랑스 해군의 바램이 해외에서 실현된 함정이 바로 라파예트급의 설계를 베이스로 VLS를 이용한 방공시스템과 대잠시스템을 갖춘 사우디아라비아 해군의 알리야드급 호위함과 싱가포르 해군의 포미더블급, 대만 해군의 캉딩급 호위함이다.[136] 라파예트급은 자국 해군에 배치된 함정 수보다 해외에 수출된 함정이 더 많은 함정이며 시대를 앞서간 스텔스 설계와 뛰어난 센서체제, 균형잡힌 전투시스템으로 세계적으로 우수한 전투함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전 기술에서는 프랑스가 해외영토 초계임무를 위한 경무장 원양초계함을 필요로 해서 라파예트급을 건조했다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프랑스 해군 내에서 라파예트급은 주력함대에서 사용하기 위한 2등 다목적호위함으로 분류되며 먼 해외영토를 초계하기 위한 원양초계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라파예트급의 작전해역은 프랑스와 접한 대서양과 지중해이다. 오히려 프랑스 해군에서 이러한 원양초계함의 목적에 어울리는 함정은 프로레알급 호위함으로 전 함정이 프랑스 본토가 아닌 해외영토에 현지에 모항을 두고 있다. 모든 라파예트급 호위함은 모두 모항을 프랑스 본토에 두고 있다. 이 말은 라파예트급은 프랑스 주력함대에 속하는 함정이고 멀리 떨어진 해외영토에 갈일 없는 함정이라는 뜻이다. 이는 프랑스 해군의 자금사정에 의해서 라파예트급이 체급에 비해 가벼운 무장을 가진 것 때문에 만들어진 오해일 뿐이다.

7.5.4. '''차기 호위함 사업''': FREMM급


영국, 이탈리아와 공동으로 차기 호위함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자국산 방공체계, 자국산 방공미사일, 자국산 선체로 건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느라 사업을 질질 끌다가 결국 참다 못한 영국이 나가버림으로써 사업이 반쯤 박살나 버렸다.
허나 초도함이 건조되기로 예정되었던 시기보다 '''22개월'''이나 늦긴 했으나, 어차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은 무기개발이 예산부족으로 인해 지지부진한 것이 일반적이다. 22개월 지연 정도면 어찌보면 준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유로파이터 프로젝트의 경우엔 프랑스 탈퇴 후에도 독일(어휴 바르샤바조약군 지상군 막아야 하거든요? 지상공격능력&인해전술 가야해요!)과 영국(안돼 폭격기 막아야돼!)이 컨셉안을 놓고 다투느라 컨셉 확정에만 '''10년''' 가까이 걸렸으며 2013년 현재도 개량안에 대한 공동개발국의 생각이 전부 달라... 업그레이드형의 개발이 난항을 겪고 있다.
그리고 프로젝트에서 탈퇴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려던 영국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직격탄을 맞고 그만...

7.5.5. '''에어버스 A400M'''


A400M프로젝트 역시 프랑스가 부당하게 까이는 경향이 있는 사업이다.
라팔의 엔진인 M88을 베이스로 하는 터보프롭 엔진을 프랑스가 주장했던 것을 예로 들며, '''조루엔진 M88을 쓰는 바람에 A400M도 막장이 됐어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웹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M88 베이스의 엔진은 A400M계획 초기에만 주장되었고 실제로는 채택되지 않았으며, 검토착수 후 오래지 않아 포기되었으므로 A400M 개발지연의 주역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는 최대도입예정국이었던 독일이 물량을 줄이고, 영국이 C-130을 구입하면서 도입수량을 줄이는 과정에도 자국물량을 줄이지 않고 사업축소의 충격을 흡수한 바 있다.
그리고 M88은 한국에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조루가 아니며, 컴팩트하면서도 크기에 비해 강력한 출력을 내기 때문에 라팔의 성능에는 별 이상이 없다.[137] 그리고 사실 M88 ECO엔진의 출력은 20,000lb다. 다만 무게가 늘어나 기체 균형 문제가 생겨 못 달 뿐이다.

7.5.6. 기타


현재는 최신전차인 AMX-56 르클레르와 신형 전투기 라팔의 도입으로 위세를 떨치지만, 신무기 도입에 군예산이 거덜나서 병사들의 복지 비용이나 장비 가동 비용에 빵구가 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8. 장비



8.1. 제1, 2차 세계 대전



8.2. 현대



8.2.1. 육군


  • 장갑차량
    • AMX-56 르클레르 3.5세대 MBT
    • 레오파르트3 차세대 MBT[138][139]
    • AMX-10P IFV[140]
    • AMX-10 RC 장륜 장갑차
    • AMX-13 경전차
    • AMX-30 2세대 MBT
    • VAB 장륜장갑차
    • VHM(Véhicule à haute mobilité)
    • VBL(Véhicule blindé léger) 경장갑차[141]
    • PVP(le Petit véhicule protégé) 경장갑차
    • VBCI(le Véhicule blindé de combat d'infanterie) 장륜보병전투차
  • 군용차량
    • 푸조 P4(Peugeot P4)[142]
      • VPSP(Véhicule patrouille spéciale Panhard)
    • 랜드로버 디펜더(Land Rover Defender)
    • 포드 레인저(Ford Ranger)
    • 포드 에베레스트(Ford Everest)
    • 르노 캉구
    • 르노 트래픽 III(Renault Trafic III)
    • 폴라리스 스포츠맨 400 4륜 ATV(Quad Polaris Sportsman 700)
    • 야마하 XTZ 660 Ténéré 군용 바이크(Yamaha XTZ 660 (moto))
    • 까기바 T7 군용 바이크(Cagiva T7 (moto))

8.2.2. 해군



8.2.3. 공군


  • 라팔
  • 미라주 III
  • 미라주 IV
  • 미라주 V
  • 미라주 F1
  • 미라주 G8
  • 쉬페르 에탕다르
  • CN-235
  • 에어버스 A310[A]
  • 에어버스 A330[B]
  • 에어버스 A340[A]
  • 에어버스 A400M
  • C-130 허큘리스
  • C-160 트란잘
  • 다쏘 팔콘 7X(Dassault Falcon 7X)[C]
  • 다쏘 팔콘 2000(Dassault Falcon 2000)[C][143]
  • 다쏘 팔콘 900(Dassault Falcon 900)[C]
  • E-3F 센트리
  • KC-135
  • 알파젯(Alpha Jet) 훈련기[144]

9. 관련 인물



10. 관련 문서



[1] 육해공군과 프랑스 국가 헌병대를 전부 합친 결과[2] 전차를 세대별로 구분하는 기준[3] 프랑스군의 전차 보유 수량, 프랑스 육군의 AMX-56 르클레르 전차3세대 전차와는 별도로 3.5세대로도 분류한다. 주력 전차 항목을 참고 바람.[4] AMX 10 RC는 장갑차이나 105mm 주포를 탑재해 화력전차급이다. 이러한 종류의 병기는 준전차급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물론 객관적인 수치에서는 수평적인 비교를 위해 전차로 포함시키면 안된다. (AMX 10 RC 관련 데이터)[5] TRF1 155mm 견인포 12문. 9 해병 보병여단 소속 포병대대가 운용한다.[6] 4.5세대 전투기 분류법 참고.[7] 4.5세대 분류법 (2)[8] 프랑스 공군 전투기 보유 수량[9] 프랑스 해군 항공대 전투기 보유 수량[10] 4세대 전투기 분류법 참고.[11] 4세대 전투기 분류법(2)[12] 4세대 전투기인 미라지 2000을 9대 추가로 보유하고 있으나 훈련기이다.[13] 프랑스 해군 소속[14] 이 항목에 기재된 항공기 총합은 유사시 동원 가능한 헬기나 경찰급의 헬기도 모두 포함하는 수치다. 공군기 총합과는 다르니 사소한 오해로 삭제하거나 수정하지 말기 바람.프랑스군의 항공기 총합 출처[15] 만재 7,050 톤 호라이즌급 (2척)[16] FREMM급[17] FTI중형호위함[18] 방공 호위함 카사드급 만재 4,950 톤(2척)/대잠 호위함 조르쥬 레그급 만재 4,500 ~ 4,830 톤(4척)[19] 경 스텔스 호위함 라파예트급 3,600톤(5척)[20] 경 정찰 호위함 프로레알급 2,950톤(6척)/OPV[21] OPV 고윈드급 1,500 톤 (1척)[22] BATSIMAR(해양감시 및 대응함정, Bâtiment de surveillance et d’intervention maritime) A69형 데스티엔도르브급 초계함 대체[23] 1천 5백톤 미만 초계함이나 고속정은 대부분 대규모 함대전에서 유효한 전력이 아니다. 이것들은 특작부대를 막을 때 한정적으로 유효하다.[24] 초계함 데스티엔도르브급 1,250 톤(9척)/OPV 르 말린급 1,100 톤(1척)[25] 항공모함 샤를 드 골급 42,000톤[26] LPH 미스트랄급 만재 21,300톤(3척)[27] LPD 푸드로급 12,000톤(1척)[28] BATRAL급 1,330톤(3척)[29] LCU CDIC급 750톤(1척)/LC CDIC급 300톤(4척)/LCM CTM급 150톤(19척)[30] 자세한 내용과 출처는 SSBN 항목을 참고하기 바람. 르 트리옹팡급, 수상배수량 12,640 톤[31] 수상배수량 4,765톤 바라쿠다급[32] 수상배수량 2,400톤, 루비급[33]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진격에 순식간에 무너져내린 것은 거의 황당할 정도라 아주 조롱거리로까지 쓰인다. # '프랑스 육군 소총 팝니다. 쏜 적은 없고, 버렸던 적은 있습니다(French army rifle for sale, never fired, dropped once.)'라든가 '프랑스 전차의 기어는 전진 1단에 후진이 5단이다. 전진은 적이 뒤에 있을 때 쓴다.' 같은 농담이 유명하다.[34] 이 당시 재무총감이었던 콜베르의 성과가 워낙에 혁혁했던 덕분에 콜베르티즘(Colbertism)이라는 명사가 중상주의의 다른 명칭으로 당당하게 사용되고 있다.[35] 그 산물 중 하나가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선임근위대였다. 이들의 행진곡이 들리면 주변에 있던 적군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고 한다.[36] 애당초 영국은 최소한 유럽에서는 단독으로 여러나라와 전쟁을 하지 않았다. 영국의 기본 전략은 항상 유럽에서 초강대국이 탄생하지 않도록 나머지 나라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강성할 때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독일이 강성할 때에는 프랑스를 지원하고 러시아가 강력해지니 서유럽을 지원하는 식이었다. 어차피 바다에서의 패권을 잡은 상태이고 알짜배기 식민지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국제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입장이라 유럽 대륙에서 다른 강대국이 출현하는 것을 방해하기만 해도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유지하고 전략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국 육군이 전술적으로는 패배하더라도 전쟁에서는 결국 이긴 경우가 많았다.[37] 스크류 추진 증기선은 이전까지 쓰이던 외륜 추진 증기선에 비해 포격에 의한 손상 가능성이 없고, 특히 속도면에서 압도적인 고성능을 발휘했다.[38] 프랑스가 도입한 글루와 호는 기존의 목재 선체에 장갑을 증설한 형태로, 지금과 같은 철제 선체에 장갑을 두른 형태는 글루와에 대항하여 건조된 영국의 워리어 호가 최초다.[39] 사실 이건 주변국들이 평화시대에 맞춰 군축을 한 탓이 더 크다. 쥐꼬리들 가운데에 닭꼬리가 커보이는건 당연한 이치[40] 한국군의 헌병과는 달리 인구가 적은 시골이나 정부기관에 대한 경찰 업무도 담당한다. 옛 일본 육군 헌병대와 비슷하다.[41] 물론 그 때에는 로마가 일개 도시 국가 수준이었음을 고려해야하지만[42] 오늘날의 독일 사람들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냥 로마인들 입장에서 '게르마니아 땅에 거주하는 야만족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게르만계 민족들은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보다 훨씬 다양하고 포괄적이다.[43] 훈족의 침략 시기에만 해도 프랑크는 고위 부족장이나 귀족들을 제외하면 죄다 뚜벅이 보병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뚜벅이 프랑크 보병들이 던져대는 투척 도끼 '''프란시스카'''는 훈족에게 꽤나 충공깽이었다고[44] 단 이것은 별 소득이 없었다. 그래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먹어치우는 것을 막는 것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45] 그러나 이렇게 단기간에 유야무야 먹혀서 없어져서 역사적으로 별 영향력이 없어보이는 중 프랑크조차도 당시 ''로타링기아''라고도 불리웠던 라인란트-저지대의 정체성을 미약하게나마 만든 역사적 시작이기도 하다.[46] 흔히 바이킹이라 불리우는 세력들.[47] 물론 이것은 당시 로마 제국이 워낙 사방에 적을 많이 두고 있었기에 화력 집중 투사가 어려웠던 점도 크다.[48] 그러나 대체로 동로마의 세력이 가장 강한 편이었다.[49] 물론 이 백년전쟁 때문에 프랑스 인들의 단합력과 민족 국가 의식이 더욱 강화된 것도 사실이다.[50] 그만큼 당나라 군대였다는 것. 물론 이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프랑스의 내부적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백년 전쟁을 마치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 대 국가'''의 싸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중세 유럽의 '''왕위 계승 전쟁'''이라면 어느 한 쪽의 정통성이 심하게 후달리는게 아닌 이상, 국가 내부적으로 파벌이 갈릴 수밖에 없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미비하던 때이기 때문. 따라서 모든 프랑스 영주들이 압도적으로 발루아 왕조를 지지하는게 아니라 자기들 멋대로 플랜테저넷을 따르거나 혹은 중립을 지키며 간만 보거나 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으며 이것이 발루아 가문이 개고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물론 전술적인 관점에서 발루아 가문 측이 압도적 유리한 상황의 전투에서도 개발살이난 부분은 할 말 없는 한심한 부분.[51] 백년 전쟁 이후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영주 휘하의 병력들을 왕이 거둬들이고 이들을 앞세워 영주들로부터 영지를 몰수하거나 제압하는 식으로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물론 귀족의 권한은 여전히 강하다보니 국왕은 항상 귀족들을 경계해야 했다.[52] 이 당시 전쟁사적으로의 의미지만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는 영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아닌 바로 스웨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대였다. 그가 남긴 유산은 칼 12세때까지 스웨덴이 군사강국으로 군림하게 하는 발판을 다졌다. 물론 병력이나 물량 면에선 당시에도 프랑스에 비할바가 아니었다.[53] '프랑스의 절대왕정' -서정복(충남대 명예교수)-[54] 여기도 오스트리아 외에 합스부르크 왕실이 거느린 속령들을 닥닥 긁어모으면 프랑스와 그럭저럭 인구수를 맞출 수 있었지만 각종 산재한 문제들이 있었다. 자세한 건 하술된 부분 참고.[55] 단, 이 시기의 병력은 농사꾼들을 징병시킨 게 아니라 세금을 바탕으로 고용한 용병이었다. 여담이지만 최초의 국민개병제는 전술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치하의 스웨덴 바사 왕조였다.[56] 빨간 염료가 저렴하기도 했고, 총상이나 자상, 열상 등으로 피를 흘려도 핏자국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심리적 효과도 좋았다고 한다.[57] 전 버전에서는 신성로마제국으로 언급했지만,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제후국들, 특히 선제후국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차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보는 건 명백한 오류''''다. 당시에 제국 내에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칭호를 썼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두 차례나 전쟁을 벌인 것만 봐도 제국 내 강대한 제후국들은 잘해봐야 중립, 최악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58] 사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가 스위스 아르가우의 산골 왕초를 벗어나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자리잡기 전까지만 해도 동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강국이었다. 그런 헝가리의 귀족들이었으니 자긍심+자존감이 엄청나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건 당연한 사실. 그나마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의 세습령 중에서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국력이 센 지역이라 나름 좋은 대우를 받아서 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이중제국의 수립을 통래 오스트리아와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59] 후스 전쟁의 원인이었던 얀 후스가 프라하 대학의 교수였고, 30년 전쟁의 발단이 같은 곳에서 터졌던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었다. 그리고 먼 훗날, 냉전 때도 반골 기질이 드러났으니 바로 프라하의 봄이 그것이었다.[60] 1두카트=순금 3.5그램 짜리 금화. 1억 두카트는 녹여서 금괴로 만들면 순금 350t이었다. 당시 스페인 GNP의 170%였다고.[61] 카를 5세가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과 플랑드르, 나폴리 왕국, 유럽 외 지역 식민지를 상속할 때 같이 상속한 부채가 3천만 두카트였는데, 펠리페 2세의 오만가지 삽질 때문에 펠리페 3세가 제위에 오를 즈음에는 부채가 1억 두카트에 달해 사실상 변제가 불가능했다.[62] 실제로 이 부채 문제 때문에 펠리페 2세는 치세 동안 무려 4번이나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63] 스페인이 중남미에 확보한 대규모 식민지가 화근이었다. ''''신대륙'''으로 건너가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이 스페인 본토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연해진 바람에 본토에서 식민지로 인구가 자꾸 유출됐다.[64] 그나마 유럽 다른 국가들이 전쟁을 마무리 짓고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할 때 프랑스 부르봉 왕조랑 스페인 보르본 왕조는 절대로 서로의 왕위를 겸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삽입해서 대서양 일대와 지중해 서부를 장악할 수 있는 불-서 동군연합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간신히 막았다.[65] 물론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는 제국 시종장 같은 지위와 화폐 주조권, 재판권 등 선제후 고유의 특권을 누렸지만, 상대가 그 신성로마제국과 맞먹는 면적에 생산력과 인구는 곱을 뛰어넘는 프랑스였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발루아 왕조 시절에 종교법학자들을 동원해서 ''''각 왕국의 왕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국가의 통치권과 왕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는 황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가진다.''''라는 왕권신수설적 논리를 정립하여 신성로마제국의 내정간섭을 원천봉쇄한 뒤, 유럽의 패권을 두고 수세기에 걸쳐 신성로마제국, 정확히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하고 있었다.[66] 보헤미아 왕을 차지한 이들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많이 즉위했었고, 당시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제후국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67] 그렇다면, 이렇게 제국 내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보헤미아 왕국의 통치권을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이 왜 그 국력을 활용하지 못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그건 유럽의 뿌리 깊은 봉건제도에서 비롯된 '''자치 체제''', 상공업의 중심지라는 특성에서 기인한 '''자유에 대한 갈망''', 가톨릭에 기반을 둔 합스부르크 가문과 달리 신교에 가까운 후스 파가 득세했던 '''종교적 차이'''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 내의 크고 작은 통치자들을 어르고 달래거나 두들겨 패는 등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실제로도 30년 전쟁 초반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도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대 진영에 붙어 번번히 대차게 뒤통수를 후려갈겼다가 응징 당하길 반복했다.[68] '''그나마 그 왕이라는 칭호도''' 영어식으로 쓰면 King of Prussia가 아니라 King in Prussia였는데, 전자는 프로이센 왕이 프로이센 밖에서도 왕이라는 표현이었고, 후자는 프로이센에서만 왕이라는 것으로 동양식으로 정리하면 외왕내제의 하위호환인 '''외'''이었다. 때문에 프로이센의 군주는 여전히 유럽 세계에서 공식적으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겸 프로이센 공작이었고, 그나마 브란덴부르크 대신 '''프로이센의 왕이라 칭한 것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사실상 세습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알아서 기었던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발루아 왕조 치세의 프랑스에서 외왕내제 이론을 정립한 이래로 유럽의 거의 모든 왕국들이 이 이론을 도입했는데, 형식적이나마 '''제국의 일개 제후국을 다스리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겸 프로이센 공작이 감히 왕을 칭한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나아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차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 게다가, 제국 내에서 '왕'의 호칭을 쓸 수 있는 건 차기 황위 계승자인 '로마 왕'과 선제후 중 한 명인 '보헤미아 왕'[66]이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두 왕의 자리를 수세기에 걸쳐 독식해왔다.[67] 물론, 이 당시의 프로이센은 인구 대비, 절대 숫자, 질적 수준 모두 유럽 내 순위권으로 인정받는 막강한 육군을 갖춘 데다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맹위를 떨치면서 대외적으로도 사실상 왕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정식으로 왕국을 선포한 것은 1772년의 일이었다.[69] 그래도 프랑스는 본토 생산력이 워낙에 튼실해서 충격이 덜했지만, 본토가 부실했던 스페인은 펠리페 2세 사후 겉잡을 수 없는 망조가 열리기 시작했다.[70] 1678년 영국의 찰스 2세와 손잡고 네덜란드를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그러나 승자였던 네덜란드의 국력도 기울었다. 참고로 17세기 중엽까지의 네덜란드 국력의 일면을 살펴보면 전 세계 바다를 다니는 무역선 1만 척 중 70%에 육박하는 7천여 척이 네덜란드 국적선이었을 정도로 국력이 최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4세 군대의 인해전술을 막아 내느라 국력이 기울었는데 가장 심각했을 때는 간척지를 만들기 위해 세웠던 제방을 터뜨려 적들을 수장시키는 고육지계까지 썼다고 한다.[71] 루이 14세의 아내(스페인 공주)가 지참금을 챙겨오는 대신 스페인 상속권을 포기한다는 결혼이었는데 스페인의 국력이 기울어서 지참금을 덜 챙겨온 걸 빌미로 상속권 드립을 치며 벨기에를 뺏으러 갔다. 애초에 마자랭이 스페인이 재정이 어려워 결국 지참금을 미납할 것을 내다보고 결혼을 추진했다고 한다.[72] 20세기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9대 조상이다. 초대 말버러 공작[이상] 나폴레옹 1세가 꼽은 7대 명장[73] 현재 프랑스 영토인 사보이 출신의 대공으로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나 출세를 못하자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맹활약을 펼친 불세출의 명장. 혈통상으로는 이탈리아인, 교육은 프랑스식으로 받았지만 활동지 오스트리아의 독일식 발음인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의 위상은 천하의 나폴레옹조차 '''"내 승리의 비결은 별 게 없다.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프리드리히 2세, 구스타프 2세, 사부아 공자 외젠, 튀렌[이상](의 전쟁기록)을 읽고 또 읽을 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그 정도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가적 영웅이었던 덕분에 비엔나에 벨베데레 궁전을 남길 수 있었다.[74]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도팽(왕세자)의 둘째 아들 필리프(펠리페 5세)를 밀었는데, 당연히 왕세손 (프티 도팽)은 따로 프랑스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루이 14세가 사실상 위성국화되는 것을 저지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반대편 오스트리아를 밀다가는 오스트리아 스페인이 아예 통합되어 동군연합이 되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전쟁명분이 완전히 퇴색돼버렸다.[75] 유럽 각국들로서는 반드시 막아야 했다. 두 나라가 하나로 합쳐졌다면 프랑스-스페인 연합에 의해 유럽 각국이 고사했을 공산이 컸기 때문. 게다가 '''가공할 본토 인구와 생산력을 자랑하는 프랑스'''와 '''광활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가진 스페인'''은 상호보완적인 부분이 있어서 1+1이 단순히 2가 아니라 그 이상의 상승효과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불-서 연합은 반드시 막아야 할 문제였다.[76] 사실, 이 당시 영국 왕실이었던 하노버 왕가와 프로이센은 혈연적으로도 친척이었다.[77] 영국이 유럽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의 식민지 우선정책과 달리 조지 2세는 열렬한 유럽파였다. 그 이유는 아직 조지 2세까진 하노버 선제후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세대였기 때문.[78] 물론 프랑스가 식민지에 전력과 물자를 충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영국 해군의 노략질과 공격에 바다 밑 정모 행을 면치 못했다.[79] 샤를 드 로앙(Charles de Rohan, Prince of Soubise, 1715-1787)이라는 인간으로 방탕하고 놀기 좋아하는 똥별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름 보면 알겠지만 다이아몬드 사기 사건의 로앙 추기경의 아저씨뻘이다.[80] rocket이 아니다. locket이라고 조그만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갈 수 있는 목걸이다.[81] 아닌 게 아니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 지역의 수도였던 베를린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짓밟혔고, 전 국토가 전쟁에 휩쓸리면서 프로이센으로서는 7년 전쟁이 이겨도 이긴 전쟁이 아니게 됐다.[82] 이는 한 번도 유럽 정치와 그 확장판인 세계 정치, 최소한 유럽과 이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에서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프랑스가 경찰 역할을 자처하고 실제로 세계 경찰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데서 기인한 결과다. 오죽하면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자국을 '라 그랑드 나시옹'(La Grande Nation, 불어로 위대한 국가라는 뜻)이라 부르겠는가. 물론 그런 단순 자존심 싸움 말고도 프랑스의 핵개발 같은 문제도 끼어있다.[83] 때문에 프랑스 포병대는 유럽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고, 이들을 초빙한 마라타 동맹의 포병대는 당시 그들과 싸우던 영국군으로 하여금 '이것들이 프랑스 포병대를 고용했나?'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84] 그 중 한 명이 나폴레옹의 26원수 중 강철원수라고 불렸던 루이 니콜라 다부였다.[85] La Grande Armee, '위대한 군대'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대규모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86] 침엽수의 특성상 매우 단단하고 튼튼하고 건조 과정도 짧으며 그 과정에서의 뒤틀림과 균열, 부피&질량 감소 정도도 활엽수 목재보다 훨씬 덜하기 때문.[87] 화려한 프랑스 요리들이 보여주듯이 프랑스의 농업생산력은 굉장히 우수하다. 알단 배부터 채운 다음에 맛을 따질 것이 아닌가? 프랑스는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비옥하고 넓은 데다 다양한 기후대의 국토를 바탕으로 서유럽 제일의 농업생산력을 자랑하는데, 농산품 가격 유지를 위해서 전체 경작지의 일정 부분을 놀리고 있다. 그런데도 식량자급률이 독일과 더불어 15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각주에 취소선이 된 게 농담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보다 더해서 '''식량자급률이 300%를 뛰어넘고, 수확량이 예상보다 더 많으면 아예 밭을 갈아엎거나 태워버리는 건 예사로 취급된다.'''[88] 레콩키스타 완성 뒤에 발표한 알람브라 칙령이 직격탄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수준급의 생산력을 유지하게 했던 관개 기술을 도입한 무어 인들이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내 금융의 중심축이었던 유태인들이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네덜란드나 영국에 금융시장을 잠식당했다.[89] 프랑스군은 압제자에게 억압 받는 민족들을 '해방'시킨 군대라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물론 프랑스군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민족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나폴레옹 이후 각국에서 일어난 혁명에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90] 영국이 지원해주는데다가 러시아 원정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는 바람에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다.[91] 말이야 '쟁탈전'이라고 하긴 하지만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문제로 총탄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 두 나라는 19세기에는 대체로 같은 편이었다. 유명한 '파쇼다 사건' 때마저도 두 군대는 그냥 대치하기만 했다.[92] 버나드 로 몽고메리著 <전쟁의 역사> 무능과 별도로 시대상이 변했는데 각국의 전쟁수행방식 자체가 뒤떨어것도 큰 요인이다.[93] 장거리 운송에서 마초를 출발지에서 모두 싣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길가의 풀을 소모하게 되었는데, 풀은 일단 먹어치우고 나면 다시 자라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94] 사망자만이 아닌 실종 포로등의 전투 손실이다. 당시 국력을 보면 프로이센은 인구가 1800만 프랑스는 3000만이었다.[95] 물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국왕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야 했다.[96] 그런데 독일군 측도 이런 면이 없는 건 아니었으며, 1차 대전 중반까지 프로이센군 전통의 피켈하우베(스파이크 철모)를 고집하다가 엄폐가 중요한 참호전에서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다.[97] 현대 군대에도 사기 증진을 위한 이런 류의 멋 중시는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미군이 사기 증진을 위해 2001년부터 모든 부대에 베레모 착용을 지시했다가 이라크나 아프간 같이 그늘이 거의 없는 곳에서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다시 전통적인 군모를 보급한 사례가 있다.[98] 이 때문에 1차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징집할 때는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어 반전여론에 불을 붙일까봐 이런 제도를 상당히 보완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버렸다.[99] 다른 나라에 비해 프랑스의 인구증가저조는 유럽사의 미스테리라 학자들 연구 대상이다. 영국과 독일은 신대륙으로 인구 유출이 있는데도 몇 배씩 늘었는데 프랑스는 이민자도 적었다. 그렇지만 인구증가의 필수조건인 경작지는 독일이나 영국보다도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매우 미미했다. 나폴레옹 시절 상속법 변경으로 인한 저출산 여파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100] 프랑스군의 방식이 독일군보다 먼저 발명되었다. 그러나 그 프로펠러를 만든 사람은 독일군 진영에서 격추되어 불시착하고 말고 결국 독일군 역시도 비슷한 장치를 개발한다. 출처: 무기의 세계사[101] 야드파운드법 일색인 미군에서 인치가 아닌 155mm 구경 포탄을 쓰는 이유가 바로 프랑스의 영향이다.[102]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쓰인 단어인데 오용되었다.[103] 사실 당시 영국에도 장전시간도 짧고 사정거리도 길고 정확한 강철 후장포가 있었다. 문제는 이들 대포는 민간업자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국영 조병창에서는 이런 후장포를 만들 값비싼 시설을 도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 해군은 민간업자들이 만든 대포를 채택할 것을 거부했으며, 이런 자세는 프랑스 청년학파의 전략이 심대한 위협으로 다가올 때까지 계속되었다.[104] 구축함(destroyer)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뢰정 구축함(torpedo boat destroyer)를 줄인 말이다.[105] 사실 대형함에 비해 딱히 확실한 우세를 유지하지도 못할뿐더러 소형함이 가진 신무기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면 군사적 가치가 뚝 떨어져버리는 것은 비대칭 전략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만하다. 청년학파 시대의 어뢰정은 영국 해군이 암스트롱포를 장비하게 되면서 몰락했고, 현대 시대의 미사일 고속정은 대형함이 헬기를 장비하게 되면서 몰락했다. 둘 다 신무기로 무장하고 나올 당시에는 위력적인 무기체계로 평가받았으며 얼마 못가서 대책이 나와버려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무기를 장착한 소형함이 출현하면 기존의 대형함들을 위협할 수 있지만 대형 플랫폼은 그러한 신무기를 활용하는데 있어서도 훨씬 선택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106] 그러나 전초에 소수 "정예"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게 숙련된 영국군은 매우 뛰어난 분전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정예병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그래서 1916년까지 전선에 숙련된 영국군이 적었고 피터 심킨스의 경우에는 독일군이 상대적으로 영국군이 약체화된 1915년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하지 않고 만만한 동부전선에서 전과를 올린게 결과적으론 마지막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독일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것이라 평가할 정도였다. 1915년 이후엔 서부전선에선 프랑스군, 영국군, 독일군 가릴 것 없이 충원율 100%가 넘는 부대가 속출했다. 사망, 부상, 실종, 포로 등으로 손실된 병력이 편제의 100%를 넘어 일부 운이 좋은 베테랑을 제외하고는 싹 물갈이가 되었다.[107] 러시아군의 장비 교육훈련과 장교 수준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떨어졌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정도는 격파했다. 독일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갈리치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에 붕괴되었을 정도이다. 러시아군은 병력은 유지하면서 전선을 축소시키는, 러시아군 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해야 했고 서부전선에서 압력이 줄어들었기에 프랑스군에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애초에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병력을 투입한 것도 러시아군 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니콜라이 2세가 투입을 지시한 것, 이는 동맹국 프랑스와의 의리 때문이었다.[108] 사족으로, 프랑스는 부르봉 왕정복고 시절에 국기가 백기였던 때가 있었다.[109] 이 뻘짓들중에 가장 심각한것이 '''벙커가 불에 타고 있는데도 무조건 사수를 명령하는 바람에 안에 있던 수백 명의 병사들이 전부 다 질식사한 대참사가 있었다.'''[110] 독일군은 프랑스에게도 KV 쇼크 비슷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프랑스군의 기병전차라는 놈은 1, 2호 전차를 아득히 뛰어넘는 넘사벽 스펙이었고 보병전차이자 중전차인 샤르 시리즈에 오면 1:13의 전설까지 자랑했다. 문제는 역시 전술 교리와 무전기 장비 여부이다.[111] 포슈가 "비행기는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발언한 것 때문에 종종 욕먹는데 사실 이 발언은 1911년에 한 것이다. 이후 포슈는 1915년부터 항공 정찰에 적극적이었고 1916년에는 항공정찰을 토대로 한 포병지원을 강조했던 바 있다. 따라서 프랑스군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공군 발전을 등한시한 것을 포슈의 책임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112] 전투기 실 보유수에서는 프랑스가 독일 공군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공군을 통합적으로 운용한 반면 프랑스군은 축차적인 항공기 투입으로 자멸해버렸다.[113] 오히려 독일군 총참모부가 이 책을 가져다가 프랑스군의 대응방안을 연구했다고 한다.[114] 북아프리카 전역 중 영연방군과 함께한 가잘라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빼앗긴 벙커를 재탈환하기 위해 돌격하는 모습이다. 이들의 분전으로 독일군은 유리한 위치에서 공세를 가하면서도 큰 손실을 입었고, 이들은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한계까지 버티다가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격전지였던 비르하케임은 지금도 외인부대에서 전설로 언급되는 성지이다. 여담으로 나치 독일에 항거하던 독일인들이 자유 프랑스군에 많이 자원했다고 한다. 주로 통역이나 도청 임무를 맡았지만, 전투 부대에도 투입되었다.[115] 사실 저런 소수 정예부대가 상대적으로 기량 및 훈련도는 낮고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적을 상대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총검돌격밖에 없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저런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총검돌격은 '''생각보다 성공율이 높다.''' 물론 상대 나름이지만 말이다. 북한군이 한국군에게 총검 돌격을 한다 생각해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지평리 전투 당시 중공군의 의표를 효과적으로 찌른 측면도 컸는데, 당시 꽹과리 등의 악기로 한국 및 UN군을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어내는 게 중공군의 기본 전술이었고, 재미를 많이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중공군이 쳐들어오자, 프랑스군은 '''사이렌'''을 울려 꽹과리보다 더 큰 소음으로 중공군을 역 으로 놀라게 했고, 이는 적 전열 붕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116] 반자이 돌격과는 다르게 봐야할 것이 일본군들은 '''전차부대에 착검돌격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만 질리도록 봐온 미군 입장에서는 총검돌격 자체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을 것이다.[117] 다만 국력저하가 되었다고 해도 UN 상임이사국, 핵보유국이며 영국보다 훨씬 큰 해외영토보유하고 있다.[118] 미국은 영국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맺었던 핵기술공유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영국의 핵개발에 도움을 주지 않은 전과가 있다. 당연히 영국은 이에 격분했다.[119] 단, 이탈리아와 더불어 중국에게도 무기 수출을 할 정도로 유럽 내에서 아웃사이더였다.[120] 그러나 러시아 수출 예정이던 미스트랄급 강습상륙함은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프랑스가 인도를 취소하고 러시아쪽에 보상금을 지불하였다. 완성된 함정은 이집트군이 사갔다.자세한 내용은 미스트랄급 항목 참조.[121] 영국은 2030년까지 중형항모 2척과 초대형 호위함 (8,000t급, 26형 호위함) 8척, 그리고 신형 31형 호위함 (만재 6,000t) 6척을 추가할 예정이다.[122] 현재 대한민국 육군이 매우 비대해진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23] 부대명칭과는 다르게 대대급 부대이다. 이유인 즉 지휘관의 계급에 따라 부대 단위가 결정되는데 이 부대 지휘관이 중령이라서다.[124] 지휘관이 대위이기 때문에 중대급 부대로 분류된다.[125] 가령 라팔의 경우 이런 식으로 개발되다보니 30년 이상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또 다른 예로 라파예트급은 전투체계 개발에 시간이 걸려 임시로 운용되고 있고, 예산부족으로 루비급 같은 소형 공격원잠을 만들기도 했다.[126] 그러나 유로파이터도 라팔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어 비슷한 시기에 시제기가 나온 것을 보면 프랑스만이 삽질했다고 보는것도 좀 무리가 있다.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세계경찰노릇을 하는 미국과는 달리 유럽국가들은 냉전이 해소되자 군비 확장에 큰 정치적, 경제적 부담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사업이 지지부진해진 것이지, 프랑스 혹은 다른 나라들이 전차 하나 만드는데 30년을 잡아먹고도 제대로 못한 모국가처럼 막장이라서 전투기 하나 만드는 데 30년이 걸렸던 것은 아니다.[127] 그런데 전세계 밀덕들의 예상을 뒤엎고 유로파이터의 막장같은 현실이 알려지며 오히려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았던 라팔이 수출과 실전에서 좋은 성과를 보여주면서 재평가 받기도 했다.[128] 현재 전투기용 엔진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정도만이 만들수있다. 중국에서 개발한 엔진은 아직 신뢰도가 담보되지 못하여 중국정부에서 J-20에 자국산 엔진 장착을 꺼리는 상황이다. 일본도 X-2에 이은 F-3 개발로 이 대열에 낄 기술력을 보유하게 될것으로 보인다.[129] 한국에서는 라팔과의 악연으로 스네크마 M88이 성능에 문제가 있단 식으로 한국 밀리터리계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놀림감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성능상 F404와 대등한 엔진이며 성능도 상당히 우수하며 향후 발전 가능성도 높다.[130] 일부 저격총들은 전용 탄약을 사용하지만 프랑스군의 특수부대용 화기나 하다못해 기관총 경우에는 FN 미니미FN MAG를 사용한다.[131] 총열이 앞뒤로 길게 움직이는 괴이한 구조에, 잔탄 세기 쉬우라고 20연발 탄창의 옆면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놨다![132] 다만 이와 같은 쇼샤에 대한 악평은 미군의 총기사용 미숙과 전장환경 차이에 의해 과장되어 퍼진 경향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쇼샤 항목 참조.[133] 그래도 프로이센이 Gew88을 만드는 데 이놈을 베껴가기도 했고(물론 실패했지만 말이다.), 8mm 무연화약 채택으로 몇몇 구석에서는 나름대로 선진적이었던 녀석이긴 하다. 문제는 타국보다 먼저 채용하는 바람에 상당한 기술적 모험을 하느라고...[134] 아무리 프랑스가 자국이익을 내세워도 단순히 이런 문제로 탈퇴한다면 궁극적으로는 프랑스에게 더 해가된다. 한국 밀덕후들이 잘못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의 지도국인 프랑스는 자국보다 훨씬 경제사정이 안좋은 이탈리아나 스페인등의 합작국을 앞에 두고 이런식으로 행동할 수가 없다.[135] 유로파이터의 위엄에 눌려서 그렇지, 토네이도의 운용비 역시 절대 저렴하지 않다.[136] 다만 캉당급의 경우 클리어 스트림 스캔들이라는 좀 거시기한 일이 있어서 무조건 좋게 보기에는 좀...[137] 일부 밀덕들이 먼저 나온 GE F414와 비교하며 프랑스의 M88은 늦게 만들고도 출력이 더 작다고 주장하는데, 출력이 작은 건 사실이지만 (각각 58kN, 50kN), 무게(약 1,100kg, 900kg)와 부피도 작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투기의 기동력에 기여하는 수준은 F414나 M88이나 거기서 거기다.[138] 항목에도 씌여있지만 2030년까지의 독일군과의 공동도입을 목표로 KMW와 넥스터가 공동개발 중이다. [139] 유로파이터[140] 구식화한 AMX-10P를세대교체를 하기 위해 후속모델인 "VBCI"에게 바톤 터치하고 2008년 이후 퇴역하기 시작하였다.[141] 출처(프랑스어 위키)[142] 군용 벤츠 G클래스의 라이선스 생산판[A] A B 전략 수송기[B] 대통령 전용기[C] A B C 정부 소속 비지니스제트[143] 해당 기체는 대한민국 공군이 신형 백두 정찰기로 해당 기체를 도입 중인 상태이다.[144] 프랑스 다쏘와 독일 도르니에가 1970년대 공동개발한 제트훈련기 겸 경공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