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대한민국'''
'''일본'''
영어
Japan-South Korea relations
한국어
한일관계(韓日關係)
일본어
日韓関係(にっかんかんけい[1]
1. 개요
2. 한국과 일본 단순 비교
3. 기본 전제
3.1. 한국과 일본의 갈등 원인
3.2. 정치 체제의 차이
3.3. 한일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국제 변수
3.3.1. 북한
3.3.2. 중국
3.3.3. 일본과 다른 국가
4. 2000년대 이전까지
4.1.1. 백제 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원한?
4.4. 강화도 조약 이전까지 조선시대
4.7. 1997년 미일가이드라인 논란
5. 2000년대 이후
5.1. 정치
5.2. 경제
5.2.1. GDP
5.2.2. 1인당 GDP
5.2.3. 엔터테인먼트 산업
5.2.4. 식문화 교류
5.2.5. 대일 무역적자 추이
5.2.6. 대일 전체 수출의존도 추이
5.2.7. 대일 전체 수입의존도 추이
5.2.8.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 추이
5.2.9. 대일 소재부품 적자 추이
5.3. 군사
5.3.1. 한미일 삼각동맹
5.4. 여론, 언론
5.4.1.1. 한국의 내셔널리즘 발생과 경과
5.4.2.1. 일본의 내셔널리즘 발생과 경과
5.5. 문화
5.5.1. 일본의 한국 문화
5.5.2. 한국의 일본 문화
5.6. 과거사
5.6.1. 야스쿠니 신사/신사 참배
5.6.2. 일본의 피해자 행세
5.6.3. 일본의 우익사관
6. 미래
6.1. 개요
6.2. 긍정적 전망
6.3. 부정적 전망
6.3.1. 한국의 대안 전략과 한계
6.3.2. 일본의 대안 전략과 한계
6.4. 결론
7. 참고 문헌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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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일본의 관계. 한국에서는 '한일관계', 일본에서는 '일한관계(日韓関係; 닛칸칸케)'라 칭한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국교가 정상화된 이래 정치·경제·문화·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2. 한국과 일본 단순 비교


항목
대한민국
일본국
면적
100,401km² (명목상 220,941km²)
377,973km²
인구
51,833,175명
126,856,000명
수도
서울특별시
도쿄도
언어
한국어
일본어
명목 GDP[2]
$1조 6,463억 # (10위)
$5조 817억 # (3위)
1인당 GDP[3]
$31,838 #
$40,241 #
GDP(PPP)
$2조 2,934억 7,500만
$5조 2,361억 3,800만
1인당 PPP
$44,292
$41,637
국방비
$440억
$490억
IMF 분류
선진국
선진국
정치형태
공화제대통령제
입헌군주제의원내각제
국가원수
문재인 대통령
나루히토 천황[실질적]
정부수반
스가 요시히데 내각총리대신

3. 기본 전제



3.1. 한국과 일본의 갈등 원인


현재 한일 양국은 상호 간 국민 감정이나 여러 분쟁, 대립이 있지만 우선은 미국의 영향 하에 간접적인 동맹국으로 냉전 시대부터 협력했으며 서로에게 우방국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현대의 한일 양국은 '''외부적으로 미국에 의해 계획적으로 육성되어 사이좋게 소련, 중국, 북한을 견제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던지라 과거사가 있음에도 대놓고 서로를 적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과 일본은 경제 및 안보에서 긴밀한 협력을 이어왔으며 이는 국민감정이 악화되든 호전되든 상관없이 계속되었다.[4]
이와 대조적으로 내부에서는 전국적으로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대 시위가 발생했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해 진압하고 강행하였다.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제한적으로 교류를 확대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기조는 크게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외교적으로는 공조를 유지해야 하는 대상이자 국내적으로는 내부 단결을 위한 공공의 적이라는 모순되는 스탠스를 시스템을 바탕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지만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맺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정치적 논리에 의해 제한되어 있던 비판이 터져 나왔고 때문에 양국이 과거사 문제로 지속적으로 갈등이 있긴 했다. 이에 따라 일본 또한 한국의 IMF 외환위기 당시 선진국 지원 80억 달러 중 일본이 가장 많은 47억 달러를 부담했으며 미국은 17억 달러를 부담했다. 김대중 정권 당시 위안부 위로금을 제공하거나 고노-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지는 정부 차원의 사죄 성명을 내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총리의 친필 사과 친서 등의 성의도 보인 바 있었다.
이렇듯 일본 정부는 한국에 꾸준한 저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국도 이러한 행보에 응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부터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문화 교류를 시작하고 수입자유화를 통해 보호무역을 완화하였다. 또한 일본에 가기도 더욱 간단해졌다. 물론 상대적으로 가기 쉬워졌다는 의미지, 지금보단 훨씬 가기 어려웠다. 2018년 기준으로도 지금 일본이 무비자를 허용하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해당 항목 참조.
그 결과 많은 한국인들이 당시 기준으로는 한국제보다 훨씬 질 좋은 일본제 문물을 접하고 일본에 여행을 가게 되는 등 일본을 접할 일이 많아졌고 자연스레 한국에서의 대일 여론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개선되었다. 실제로 1990년대~2000년대 초반 한국의 대일정서는 현재보다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일례로 도호쿠 대지진 당시 한국은 일본이 당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에 범국민적인 도와주자는 운동이 발생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보냈으며 한국의 아이돌 및 배우들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진출해서 활동하던 시기도 2000년대부터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당연히 상대적으로 품질이 좋은 일본제를 수입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고, 일본 자본의 한국 시장 진출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일본 자본은 한국 시장에 제한적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락받는 대신 나머지 점유율은 한국 자본이 일본 제작법을 베껴서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팔아먹어 채우는 것을 허용하였다. 한국의 대기업 중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계획적으로 육성되었고 이것이 사실상의 일본 전범기업, 재벌 그리고 관료의 트라이앵글이었는데... 이를 개방한다는 의미는 일방적인 보호무역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지였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또한 근대 민족국가 성립 전 식민지배와 전란을 겪은 한국이 일본에 문화적으로 잠식되지 않고 민족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실상은 일본 문화 개방 이전에도 보고 즐길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접하고 있었다. 이를 개방한 것은 한국 정부가 문화적으로 일본을 배척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시기 국민감정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 실무적 영역에서 의미하는 한일관계는 1950년대로부터 진전이 없던 상황에서 벗어나 문자 그대로 격변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대일 감정은 상당히 복잡한 구도를 바탕으로 움직여왔다.
대한민국 본연의 민족주의, 중국 중심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태도, 친미에 대한 관점, 자본주의와 반공주의, 자유시장주의, 개인적 경험과 편견 등 여러 요소에 의해 반일이냐 반중이냐가 갈리고 둘 다 동일하게 심한 사람도 있으며 그런 감정을 극복하여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이루자는 의견도 있다. 이는 안중근이나 현대의 동아시아 평화주의 좌파의 생각과 유사하기도 하다. 일단 민주/진보 진영에서도 일본/중국에 대한 평가는 민족주의가 큰 영향을 끼친다. 이와 별개로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 타이틀을 빼앗아간 중국을 훨씬 경계하는 편이다.
한일관계 파탄의 원인을 찾자면, '''양쪽 모두에 존재한다.''' 일단 기본 조약에 대한 해석부터가 다르다. 일본은 한일합방조약에 대하여 합법으로 보고 한국은 불법으로 본다. 식민지배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일본은 "개인 배상청구권은 인정하나 그것을 국가가 외교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안된다."라고 보고 한국은 "정부 간의 배상이 끝났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당시 논의되지 않았던 문제와 개인적 배상은 아직 남아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공식 입장을 대충 추린 것으로,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다. 애시당초 한일기본조약이 '''이미 무효'''라는 '''중의적 표현'''을 써가면서 애매하게 맺은 조약이고 한국 행정부사법부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도 정권마다 과거사에 대해 해석차이가 있다.
한일기본조약 유무상 8억 달러[5] 로 포스코가 설립되었고, 소양강댐 건설비와 건설할 장비까지 구매하여 현대건설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미쓰비시그룹과의 기술제휴로 현대자동차 포니가 탄생하였고 도시바의 낸드플레시 메모리반도체 원천기술을 제공받아 2010년대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의 실적 호조의 기틀을 닦았다. 이런 한국의 움직임은 사실 일본도 어느 정도 의도한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경제는 60년대 이후 일본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발전했으며 21세기 현재 일본-소재, 한국-완제품으로 분업화 되어있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이 1960년대~1990년대까지 연평균 9.5%가 넘게 성장한 한강의 기적이었고 가난한 이들이 매우 많아 세금이 안 걷혀 원조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국가예산의 절반인 전형적인 농업 후진국이 고도로 공업이 발달한 선진국대열에 진입해 라디오보급사회에서 마이카사회로 변모하여 이는 "전 국민이 간접적으로 보상을 받은 셈"이다.
정부는 일제에 의한 피해가 입증된 이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청구권자금 백서에 의하면 1976년까지 민간인 청구권 보상금액은 약 86억 7천만원으로 청구권자금 중 5.9%이며, 이중 징용으로 인한 사망사례 9500여건에 대한 보상액이 약 28억 6천만원이다.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politic/305764/1/1[6] 하여간 일본에 의한 직접적인 보상은 미비하였고 일본은 과거사 만행을 부정하려 드는 움직임이 팽배하며, 전범기업들의 책임 및 보상 논란 등으로 지금도 첨예한 갈등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연하지만 일본이 한국만 일방적으로 좋으라며 거액을 제공하고 저런 구조를 확립시킨것이 아니며 이런 과정을 거쳐서 상호 이득이 될만한 협력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구축되었고, 이는 국민감정의 출렁임과 별개로 언제나 공고하였다. "한일관계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언제나 양호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고, 미우나 고우나 한쪽이 망하면 나머지 한쪽이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 측은 한국에 한일수교 당시 이루어진 한일수교를 기점으로 보상을 한국에 진행하고 당시 한국을 포함한 5개국에 거액을 지급하였지만 유일하게 선진국에 떠오른 성과의 기반을 만들어낸 의의를 모르는 일반 한국 대중 및 그 대중을 대변하는 정치권에서는 이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으로 인식하거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한국 정치권이 반일 정서를 민주화를 이룩한 21세기에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진절머리가 난 상황이다. 흔히 말하는 '''한국 피로''' 현상이다.
반대로 한국 또한 해당 문제를 실무적으로만 접근할 뿐 이와 별개로 이뤄지는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식민 지배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자국 정치인들의 각종 망언을 통제하지 못하는 일본 정부에 진절머리가 난 상황이다. 일장기를 냅두고 틈만 나면 흔들어대는 욱일기나, 멈출 생각이 없는 일부 공인들의 망언 트위터는 덤. 그리고 일본 정부가 한편으로는 미래지향적 관계를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역사 왜곡으로 위대한 잊기스러운 정책을 국가적으로 시행하였기에 오히려 반일정서는 커졌다. 더군다나 그 잘못된 역사 교육이 일부 일본인들의 생각 없는 망언들이나 인터넷에서의 우익의 준동을 이끌어내어 악순환시키고 있다.
다만 이런 최고조를 달리는 험악한 정치적인 갈등과는 별개로 경제 부문의 교류는 수십 년 이상 상당히 큰 규모로 이뤄지고 있으며, 실질적인 측면만 보면 딱히 갈등이랄 것이 없었다. 단 일본과 한국의 주력 산업종이 상당부분 겹치는 부분은 잠재적인 갈등 요소이기는 한데 이는 사실 한일기본조약을 기점으로 일제 용역과 설비가 한국에 상당수 흘러들어가서 대기업들이 클 수 있었다. 한일기본조약 보상금을 이용하여 포스코가 설립되었고, 소양강댐 건설비와 건설할 장비까지 다 구매하여 현대건설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미쓰비시그룹과의 기술제휴로 현대 포니가 탄생했으며, 도시바의 낸드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원천기술을 제공받아 2010년대 삼성전자하이닉스의 실적 호조의 기틀을 닦았다. 경우는 다르지만 롯데그룹이나 방림같이 재일교포가 일본에 세운 기업들도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나라 경제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해냈다.
이런 한국의 움직임은 사실 일본도 어느 정도 의도한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경제는 60년대 이후 일본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발전했으며 21세기 현재 일본-소재, 한국-완제품으로 분업화 되어있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례로 일본의 재무장 등의 이슈에서 일본이 재무장한 군대로 한국에 총부리를 겨눌 가능성이 희박하다. 오히려 중국을 견제하는데 도움이 됨에도 대놓고 찬성하는 대신 침묵을 유지하는 것도 국민정서를 고려한 판단이다.
그러나 한일관계를 다룰 때 경제적인 측면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온전히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한일 양국이 민주주의 국가인 이상 각국의 국민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배상을 통해 과거사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다는 지극히 실무적 태도로 접근하는 일본 정부와 달리, 한국의 경우 이미 실제로 당한 역사와 한국 국민들의 대일 정서가 최악 수준까지 치달은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도 "보상 받았으니 다 끝난 문제고 상호호혜적 관계 구축에 방해가 되는 과거사는 잊어버립시다" 하고 주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실무적인 태도는 한국 입장에선 "이면 다 된다."는 기만으로 보일 수 있다. 결국 2013년부터의 노골적인 아베 정권의 '과거사 재정의' 시도로 다수의 한국 국민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듯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국민감정은 개인이 일본 제품을 불매하거나 여행을 가지 않는 수준의 추상적인 영향력이 아닌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고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특정 요소를 우선시하여 급격하게 관계가 호전되는 상황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3.2. 정치 체제의 차이


한국은 공화제이자 대통령중심제인 반면 일본은 입헌군주제이자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양국민 사이에 의식 차이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냥 체제가 다른 것뿐이라면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뿐 두 나라 전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국가이다. 마찬가지로 입헌군주제인 영국이나 스페인 등에 대해서 한국이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역시 공화제이자 이원집정부제인 프랑스와 입헌군주제이자 의원내각제인 영국이 상호 국민감정은 어떨지 몰라도 서로의 정치 체제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유라시아 외의 국가를 봐도 마찬가지인데, 아프리카의 경우 알제리모로코가 아무리 서로 사이가 안 좋아도 서로의 정치 체제(알제리 - 공화제/이원집정부제, 모로코 - 형식상 의원내각제가 도입된 반입헌군주제)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으며, 아메리카의 경우 미국캐나다미국 독립 전쟁이라는 역사적 악연과 별개로 서로의 정치 체제(미국 - 공화제/대통령중심제, 캐나다 - 영연방 입헌군주제)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일관계에서 이런 차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이 과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실행했던 방식이 천황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전체주의 체제였다는 것이다. 패전 이후에 반성을 했다고는 하지만 식민지배를 당한 국가에서 그들이 자신의 대표자로서 여긴 천황이 그리 좋게 보일 수는 없다는 점, 패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책임을 져야 했던 천황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점은 전후 일본 내에서도 비판을 받은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영국 등 유럽의 왕실은 그저 놀고 먹는 플래티넘 수저라는 인식을 스스로 개선하며 스스로 관광 상품화되거나 군 자원입대 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실천하는 등 왕실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반면에 일본의 천황 가문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고대 신정 사회의 우두머리와 같은 종교적 상징으로서 폐쇄적 지위만을 누리며 또 일본 국민들은 이런 자들을 천황 폐하라고 부르며 따르는 모습을 봤을 때, 한국인들의 눈에 이러한 일본은 시대에 뒤떨어진 중세 봉건적 사회로 보이기 쉽다.
물론 천황 내외는 국제 행사에 참석하거나 필리핀이나 대만 등을 방문하여 보조적 외교업무를 수행하므로 마냥 놀고먹는 직책은 아니다. 다만 일본 정치권에서 천황이 가지는 사회적, 국제적 지위나 위상을 이용하며 또 용인하지만 이들이 자국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시키며 기본적으로 '''천황 가문을 현실 정치권의 감시와 보호를 받는 하위 권력'''으로 대우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입헌 군주제 국가와는 달리 왕실의 실질적 권한이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영국만 해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최근 브렉시트 관련한 발언을 했다고 보도가 되거나 국내 정치문제에 조언 형식으로 의견을 말하기도 하며,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왕실의 일족이 국영 스타트업 지원기관 특사를 맡는 등 현실정치 참여에도 활발한 반면, 일본은 천황 가문의 대외적 행보나 국내 정치 참여에 매우 큰 제약을 두고 있어 '''원치 않게''' 폐쇄적 지위만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최근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 퇴위'를 언론에 알린 일본 궁내청 직원을 아베 총리가 '''해고해 버렸는데''' 이것만 봐도 천황 가문의 권위나 위치가 일본 행정부의 하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제 일본도 천황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문화적 형식으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아 졌지만 극우파들이 이따금씩 천황을 내세워서 구 일본제국 시절을 상기시키는 망언을 하기라도 하면 그게 단순히 문화가 아니라 정치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신경 쓰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섬나라 체제와 반도국 체제가 다르다는 것도 그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인데, 섬나라는 주어져 있는 섬으로 곧 영토가 규정되는 반면 반도는 영토로서의 형상이 반은 주어져 있고 나머지 반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바다와 맞닿은 부분은 눈에 보이는 한계선으로서 확실하게 그 경계를 보여주지만 대륙과 맞닿은 부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영토를 규정하고자 하는 마인드 자체가 섬나라와는 달라지게 된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도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 포함된 섬이기 때문인데, 섬나라에서 영토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임에 비해 반도국에게 영토는 뺏길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반도국은 대륙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빼앗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도 마찬가지로 독도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을, 일본은 그런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에 협상 과정 속에서 독도를 한국 정부에 반환하라는 명기를 서류상에 표기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긴 하지만 그 원인으로부터 드러나는 양국의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일본은 서류에 나와 있지 않았으니까 우리 땅이라는 거고, 한국은 옛날부터 자연법상으로 인정받은 땅이었으니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경제적인 부분에서 봤을 때는 양국 모두 겹쳐지는 경제수역 안에서는 공평하게 조업을 할 수 있고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도 않은데도 넘어오는 중국에 비하면 실제로 경제적인 이해관계 안에서의 충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두 나라를 암묵적으로 성립시키는 정치체제가 디테일한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다만 이 설명은 완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섬나라인 영국이 일본과는 달리 주변국과 영토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면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심지어 일본보다도 훨씬 넓은 영토를 가져본 적이 있으며, 식민 제국 중 하나였던 과거가 있음에도 현재의 영연방 영토를 제외하고 영토문제로 타국과 갈등을 겪는 경우는 전혀 없으며, 영연방에 속한 국가들조차 거의 독립국 수준으로 자치를 인정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영토갈등은 섬나라와 반도국가라는 지리적 차이 때문이 아닌 역사라는 원초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3. 한일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국제 변수



3.3.1. 북한


우선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게 되는데, 이는 북한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느끼는 체감상의 접근성이 극명하게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의 설계자는 미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설계 구조상 하면 좋은게 당연한 동맹은 안 맺고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은 북한에 대해 한국이 느끼는 위협과 일본에 대해 한국이 느끼는 위협의 크기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미약한 가능성보다 이 가능성 자체를 일본이 카드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가능성에 대해 한국은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 실질적인 적대적 수준에서 보면 북한이 일본에 비해 훨씬 크지만 승산으로 놓고 보면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북한에는 없는 승산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일본 군대를 한반도 내에 들이는 일 자체도 국민 정서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우며, 되려 일본의 신 군국주의에 빌미를 줄 공산이 있는 것으로 보여도 한국 입장에서는 이상할 게 없다. 실제로 역사에 비추어 봐도, 일본 군대가 한반도 내에 들어와서 좋았던 일이 없다. 그나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일이라면 백제부흥운동 당시 원군으로 온 정도 뿐이다.
북한의 핵은 실제로 쏘게 되면 외교적으로도 수세에 몰리게 되고 UN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따라서 북한이 남한을 향해 핵을 쏘는 순간 미국이 북한을 향해 가지고 있는 모든 가용전력을 동원해 보복에 나설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전에서 핵무기는 대량인명살상을 하는 도시공격용이 아니라 고도로 요새화된 미사일 사일로, 군사기지를 사전에 파괴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도시공격은 굳이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데이지 커터(Daisy Cutter)나 기화폭탄으로도 충분히 '''값싸고 방사능 걱정 없이 핵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실전에서 쏠 수 없는 핵을 가지고 있는 북한이 한국을 상대로 도발을 하면서 외교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듯이 일본의 경우에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북한군의 미약한 전력을 이유로 들어서 그 위협을 무시하는 면도 있는데, 물론 북한군의 전력은 상당 부분 과대평가되어져 왔고 대한민국에 있어서 북한군 '''따위'''가 무서운 게 아니긴 하지만, 애초에 우리는 '''전쟁이라는 그 자체'''가 무서우니까 이러는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래야 정상이다. 전쟁으로 잃어버리는 것도 많거니와 그 피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가들인 유럽국가들이 겪어야 했던 후유증과 재건에 걸린 시간등을 생각하면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같이 경제라는 것이 국력의 그 자체라는 개념으로 여겨지는 현재에는 '''"전쟁 = 국가의 패망"'''과 같은 인식이 박혀있다. 당장 베트남 전쟁살수대첩 항목들을 보면 무모한 전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소련도 아프가니스탄과 싸웠으나 아프가니스탄이 죽기살기로 나오자 줘 터지고 gg쳤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불리하다 싶을때 얼른 도망가서 이 사태를 방지할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내용이 너무 길어지니 한국군 vs 북한군 문서 참조.
물론 북한이 가지고 있는 대량살상무기는 큰 위협이다. 우리가 북한을 경계하는 이유는 북한이 가진 생화학무기, 더티 밤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한반도 자체가 전후 회복이 불가능한 죽음의 땅이 되버릴 우려 때문이다. 여기에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몇 천만의 인구가 그대로 난민이 되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북한이 남한에 대량살상무기를 마구 사용해봤자 북한이 승리해서 적화통일에 성공하긴 커녕 한국과 미국의 보복공격으로 '''북한이 지도에서 지워질 게 확실하니''' 어디까지나 대량살상무기는 위협용 겸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또한 북한이 가진 지하자원에 대해서는 북한/지하자원 문서에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사실상 떡밥 수준을 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뭔가 대단한 가능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이미 쓸만한 지하자원 상당수는 북한 정권이 중국에 몇십년 채굴권을 댓가로 헐값에 팔아 먹은지 오래다. 북한의 인력을 단지 저렴한 노동력으로 생각하는 것도 너무 단순한 발상이다. 애초에 같은 나라의 국민이 된다면 당연히 임금 기준도 같아져야 하므로 저렴하지도 않다. 물론 인구 자체가 필요하다는 전제하에서는 쓸모가 있기 때문에 아직 남북통일에 대한 찬성 여론이 높다. 게다가 이는 그 땅에 있는 인력과 자원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렇게 본다면 북한이라는 '''체제'''는 오히려 커다란 벽일 뿐이며 애당초 통일 자체가 얼마나 걸릴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야 하는지 가능하기는 한 건지 통일이 되더라도 어떤 위험성과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인 상황이다. 남북통일이 한국에 있어서 최대의 도박이라는 평가나 통일반대론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치적으로도 한국에 대한 군사적인 도발을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써먹으면서, 한국을 인질 삼아 미국에 원조를 해달라는 식으로 써먹는 북한은 한국에 있어서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 북핵문제를 생각하면 한국과의 관계를 넘어서 세계적인 골칫덩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재무장에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과거사 부정이나 역사 왜곡, 영토 분쟁 등의 문제로 걸고 넘어지는 작금의 일본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행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과거사 문제와 영토 분쟁에서 편을 들어준다는 정도를 가지고 북한을 좋게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 이유로 아직까지는 북한을 일본보다 더 경계하고는 있지만 일본이 한국과 동떨어진 이해관계를 추구하게 된다면 한국도 이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3.3.2. 중국


문제는 중국인데, 중국의 경우에는 지상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확장을 지속하고 있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항모와 원자력 잠수함 건조.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해를 수비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항모가 애당초 수비용으로 운용하는 함선도 아닌데다가 오히려 항모와 원잠의 경우에는 바다 건너에 있는 적을 타격하는 것이 목표인 공격용 함선이다. 당연히 중국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
현재 서 태평양 연안의 중국 포위망은 자연스럽게 남쪽은 미국 주도 하의 호주 등 동남아 국가. 센카쿠 열도 중심의 중부는 일본이 맡는 쪽으로 진행되는 상황이다. 미국은 제주 서쪽의 남-서해 중심의 북부는 한국이 맡는 것을 바라고 있다.
중국의 경우, 현재 중국은 한국 입장에서는 개입하기 좋은 발전 단계 중인 시장이다. 여기에 한국과 중국의 무역규모는 한국과 일본의 무역규모보다 커지게 되었다. 물론 대중무역은 실제 시장에 대한 수출보다는 중간재가 많고 중간재의 성격상 언제든 대체할 수는 있지만 한국 경제가 중국 경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긴밀하게 내부에서 연결되어 있는 자본의 존재로 인해 미국의 글로벌 기업이나 대형 펀드조차도 철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 한국 경제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할 여지가 없다. 그런 한국에 있어 일본의 시장은 중국의 시장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시장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중요도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달라지게 된다는 것.
문제는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제 시장의 룰을 자의적으로 조절할 가능성을 가진 세력에 대해 견제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곧 이러한 판단에 근거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과 이어진다. 즉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개입해 한국과 함께 싸웠던 미국에 있어서 한국이란 나라는 자신들이 지키게 된 나라라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에 근거한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을 마냥 못마땅하게 취급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문제는 그 상대, 즉 중국이 국제 시장의 룰을 자의적으로 조절할 가능성을 가진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게 되었던 것. 이에 더해 미국 자신이 그렇게 나서서 싸워온 결과로서 안정된 무역 체제와 국제적인 자본망의 존재로 인해 하드파워로 인한 직접적인 견제만으로는 충분치 않게 되었고, 그 결과로 외교와 자본에 대한 개입이라는 카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와중에 한국이 AIIB에 먼저 가입을 해버렸고, 일본은 이에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니 미국 입장에서 일본은 당장 급한 불은 꺼주고 있는 존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최근에는 그렇게 우선순위가 변동한 결과로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비난마저 하게 되었다. 동시에 중국에 대한 외교적 견제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는 일본에 대해서도 한국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역사 문제에 대해 마찬가지로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은 역으로 일본을 견제하기에 더없이 좋은 카드다. 문제는 중국 역시 국가 규모에 비해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매우 미약한 국가이며 무엇보다 중국은 국제 사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 좁게는 지역적 헤게모니를 두고 넓게는 냉전을 방불케하는 서방진영과 반서방 진영의 대립에서 반서방 진영 가장 큰 축중 하나인 국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중국을 일본을 견제하는 카드로 사용하기엔 국력 차이는 물론이고 같은 서방 국가와의 대립을 해결 하기 위해 반서방 국가와 협력한다는 점에서 서방의 공조를 얻기가 힘들다. 체제 차이, 인권 탄압 등으로 소소한 마찰을 겪긴 해도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으로 얻을수 있는 이득을 감안해 사실상 명분상의 대립 정도로 그쳤던 이전과 달리 미국의 본격적인 견제와 화웨이 사태로 중국은 사실상 서방 주요국 대부분과 대립하고 있다.
중국 역시 한국을 한미일 삼각 공조를 '''무력화시키는 카드'''로 한국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 뿐이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중국 노선을 고려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에 들어 중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미일관계의 격상을 가져와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실리는 별로 없이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3.3.3. 일본과 다른 국가


한국은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과 대륙의 문물을 전해주는 역활을 해왔지만 대륙국가와 반도국가, 섬나라가 한 지역에 존재하며 교류했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것이며 따로 일본이 감사히 여기거나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와 별개로 정한론 등의 사상을 가지고 '일본을 겨누는 칼' 드립을 치면서 한반도를 노렸던 전례가 있다.
전 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이 아닌, 현재의 일본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나쁜 나라는 한국, 북한, 중국 외에는 별로 없다. 어차피 북한처럼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는 나라가 아니라면, 원래 멀리 떨어진 국가들 간의 인식은 대체로 국력과 선진화도에 비례하는 편이다. 특히 일본처럼 문화, 경제 대국에 정치적으로도 제1세계의 핵심인 나라가 좋은 이미지를 갖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까놓고 말해 한국에서 형제의 나라 운운하는 터키도 아랍 국가들이나 그리스에겐 죽일 놈이고, 미국도 우리에겐 고마운 동맹이지만 쿠바처럼 18~20세기 미국의 경제적 종속을 당했던 중남미 국가들이나 중동에선 이를 벅벅 간다. 독일이 유럽에서 갖는 이미지는 한국인이 가지는 이미지 마냥 여전히 긍정적이지는 않다. 요지는 우리가 일본을 경계한다고 해서 세계의 다른 지역 국가들도 그래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세계적인 이미지가 좋다고 해서 과거 주변국들에게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책임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각자의 입장에서 평가가 나오는 것일 뿐이다.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 외에는 북한[7], 중국과 러시아 정도인데 각각 독도, 센카쿠 열도, 쿠릴 열도의 영토 분쟁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북중러 모두 본질적으로는 반서방 국가이며, 특히 북한은 한국과 국가 정체성을 두고 다투는 주적이기 때문에 일본이 북한과 서로 가까워지는 데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한국과 같이 영토분쟁 지역을 실제로 점유하고 있는 상황이며, 극동의 어차피 일본이 군사적으로 러시아를 위협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음을 서로가 잘 알기 때문에 반일감정이 큰 편은 아니다.
실제로 최근 들어 일본은 러시아와의 경제적 교류를 통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복원하려 힘쓰고 있다. 북한 문제로 인해 지지부진한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사업을 일본이 홋카이도를 통해 연결하여 선점하려는 시도 뿐 아니라 북방 영토 역시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이용해 대규모 사업을 진행 중이다. 애초 러시아는 쿠릴열도가 문제인 것이니까. 일본이 러시아와의 관계에 공을 들이는 것 역시 일본의 생각으로는 한국과의 관계가 그간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어느 정도 주도권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에 대해 실질적으로 견제를 할 수 있는 국가 역시 러시아이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일본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중국 견제의 경우 러시아반미라는 기치를 아직도 고수하고 있기에 일본이 친미노선을 버리지 않는 이상 힘든 상황이다.
한국도 문재인 대통령이 대러 관계에 힘쓰려고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이상 경제적 의도이다. 그리고 북한의 존재때문에 일본에 같이 대항한다던가, 중국을 견제한다든지 하는 것은 힘든 상황이다.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역시 중국에 대해서는 비난을 끊이지 않는 것과 비교해 러시아에 대해선 완화된 표현으로 '''언급'''하는 것만 봐도 오월동주 관계인 중국과 러시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선 러시아의 역할이 중요함을 트럼프 역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림반도 사태 이후 경제적 제재로 곤란을 겪고 있는 러시아는 중국에 '''북한처럼''' 천연가스의 몇십년 채굴권을 내주며 중국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자존심 강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어떤 심경을 갖고 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언급한 반미 감정은 아직도 남아있다. 사실 이렇듯 러시아와 중국은 중소 국경 분쟁과 같이 사소하게 다투면서도 미국에 있어서는 연합하는 사이라 자존심으로 어쩔 관계가 아니다.

4. 2000년대 이전까지


현대의 한일관계에서 고대부터 근세 역사까지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적다. 즉, 근현대에 있었던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반일감정이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과거에, 임진왜란 직후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게 되어 반일보다 반청감정이 주류를 이뤘음에도 병자호란이 지금 반중사상들의 근원이 되지 않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와의 국교 정상화 및 통신사 파견으로 일본과의 관계는 점점 회복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현대의 한일관계는 근대 이전의 관계 악화와 소강, 회복 사례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루어진 한국의 식민지화 및 현대에도 이어진 일본의 역사 왜곡이 현재 양국 관계의 뿌리라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 일제 강점기와 같은 일본의 일방적 수탈이 벌어진 것은 근현대사 이후이고, 일본이 개화하여 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딱히 일본에 비해 한국이 그렇게 꿀릴게 없었고 오히려 앞서나가던 시기도 있었으므로 그저 얻어터지기보다는 한대 맞으면 한대 돌려주는 대등한 관계에 속했다.
실제로 왜구의 약탈이나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에 이를 바득바득 가는 한국인들 중 신라구의 존재나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으로서 한국이 일본을 침략했다는 과거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삼포왜란 또한 조선인들이 하등한 오랑캐인 왜구를 학살하고 멸시하던 것이 도화선이 되어 발발했다고 전해진다.
후술한 내용에서 일본과의 갈등이 벌어진 '사건'들이 여럿 언급되지만 '''평온하게 지낼 때는 굳이 언급할 만한 별다른 사건이 없다'''. 즉, 무조건 우호적인 사이도 아니었고 악화 일로의 관계만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4.1.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국의 상황에 맞게 일본과 서로 다른 관계를 구축하였고 이러한 관계 양상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고구려광개토대왕 시기 왜와 백제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해 원군을 파견해 왜와 싸운 이력이 있으나 고구려의 주적은 위나라, 당나라, 수나라, 전연, 후연, 숙신, 돌궐, 부여 등 중원 일대와 만주, 요동 지역의 여러 국가들과 이민족들이었고 왜와는 물리적 거리가 있어 장기간의 대립은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 후기에는 담징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호류사의 벽화를 그려주는 등 왜와 감정이 나쁠 이유가 없었고 삼국시대 말기에는 고구려 또한 적국인 신라의 후방에 위치한 왜와 사신을 주고 받으며 우호 관계를 모색하며 고구려-백제-왜의 삼국 연합으로 신라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왜의 입장에서도 백제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외교 전략에서 탈피해 또 하나의 대륙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 도움이 되었기에 대 고구려 관계를 중시했다. 고구려 멸망 후 많은 고구려 귀족들과 유민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고 고구려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사이타마현의 고마 신사가 바로 그 흔적이다.
백제의 경우 전반적으로 일본의 전신인 야마토 정권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백제와 왜의 우호관계는 근초고왕 시기부터 시작하는데 백제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이 무렵 근초고왕은 아들인 근구수왕을 보내 백제 국왕의 칠지도를 선물했고 이로서 백제 왕실과 왜 왕실은 동반자 관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양국은 백제는 왜에게 선진적인 기술을 제공하고 왜는 정치지형상 불안정한 백제를 유사시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백제는 국왕의 자제들을 일본에 보내 본국의 왕에게 변이 일어날 때 이들은 이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하고 왕의 급사시 신속하게 후계자가 귀환해 백제 국왕 자리를 계승할 수 있게 시스템을 마련해 놓았고 왜 역시 파견된 백제의 왕족들을 통하여 백제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수받을 수 있어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이들이 또 왜국 정치에도 상당히 관여했는데 백제 입장에서는 파견된 왕족들이 왕에 오르기 이전에 정치를 먼저 배움으로써 훗날 백제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었고 왜국 입장에서는 중요한 정치 파트너가 생긴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백제와 왜의 우호관계는 이는 야마토 정권의 군사적 지원을 보면 알 수 있다. 백제의 전쟁을 돕기 위해 아신왕 때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 기록들이 나오기도 한다. 성왕관산성 전투 당시에도 가야와 더불어 백제를 지원했다. 백제가 멸망하려고 하자 자기네 군주의 즉위식까지 미루고 대규모 병력을 백강 전투 때 백제를 지원한 걸 보면 마지막까지 동맹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백제와 왜 사이에도 감정의 골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8] 7세기경 들어 왜는 백제의 영향력에 벗어나 자체적으로 중국과 통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백제 역시 이러한 왜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었다. 백제 무왕 시기 즈음엔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왜국 사신이 동봉하던 당 황제의 친서를 백제가 강탈한 적도 있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왜는 일본서기에 백제를 '신의 없는 나라'라고 비난하는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렇듯 백제와 왜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은 존재하였다.
결국 왜는 각종 연유들로 인하여 백제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던 대 한반도 정책을 삼국 모두와 독자적으로 외교하는 노선으로 변경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백제가 대 신라전쟁에 집중하게 되면서 한반도의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컸다. 이 시기의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국가 정통성, 영토 문제로 치고박고 싸우기 바빴던 고구려와도 연합을 맺고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백제의 유화적인 분위기 덕분에 고구려-왜의 교류도 보다 수월해 질 수 있었다. 반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게 된 신라도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래 후술된 신라-왜 사이의 문제점들을 뒤로하고 왜에게 화친의사를 내비치니, 왜의 입장에서는 굳이 백제 하나만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고구려-왜의 교류는 애초에 백제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예전부터 쌓여 온 왜의 반 신라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다가 기존 친 백제계 정계인사들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보니 신라와의 관계가 눈에 띌 정도로 호전되지도 않았다. 결국 왜는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는 등의 기존 외교노선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신라의 경우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왜와 맞닿아 있었고, 교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왜인들이 자주 신라를 노략질하여 감정의 골이 깊었다. 이들 왜인의 노략질 기록은 신라 건국 박혁거세의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됐으며, 문무왕이 대왕암에 묻힌 것도 바다를 건너 오는 왜인들을 막으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왜가 하필이면 나제동맹 기간을 제외하고는 원수 사이였던 백제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가끔은 백제-가야-왜 3국 연합이 신라로 침입해 들어와 경주를 약탈하고 신라를 괴롭히기도 하였다. 이때문에 신라인의 반일 감정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 역시 대 신라 감정이 안 좋았고 이는 삼국사기일본서기에 모두 실린 박제상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왜계 신라인인 호공이나 일본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는 석탈해,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연오랑, 신라왕이 조상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는 일본 황실의 시조인 진무의 형 이나히노미코토, 신라에서 강림한 뒤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스사노오, 신라에 도래했다는 천일창 등의 기록들을 보면 감정싸움과는 별개로 인적, 물적 교류가 성행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사실 세계사적으로도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들 간에 사이가 나쁜 경우는 적지 않다.
또한 7세기 중반에는 신라 역시 삼국통일 이전에 왜와의 우호적 관계를 조성할 필요성을 느꼈고 왜 역시 백제와의 적잖은 갈등으로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물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서로 사신도 자주 왕래하였고 나름의 친선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도 친신라 노선의 세력을 일시적으로 득세하기는 했으나 결국 백제 멸망 즈음의 왜국의 정권을 전통적인 친백제 노선을 고수하던 보수 세력이 잡게 되면서 양국의 노력은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663년 백강 전투에서 적으로서 대면하게 된다.
그 외에 가야의 경우 역사가 부실해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어려우나 가야의 여러 소국들이 일본 열도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일본에 철기를 전수하고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내에서도 가야계 유물이 현재까지도 많이 발굴되고 있다.

4.1.1. 백제 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원한?


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사'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고위층이 일본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를 쓰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한일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했다.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고사기 다음으로 간행된 역사서인데, 이 책에서 신라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대목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1970년대 한국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는 한국의 역사 및 정치에 대해 기술한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에서 노태돈 교수와 비슷한 의미에서 '백제의 망령'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즉, 일본서기에 쓰인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신라(한국)에 대하여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 실제로 일본서기의 집필진은 가야와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주적 내지 속국으로 간주하는 서술 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한민족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한일 민족 감정의 한 축이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기 한참 이전에도 신라는 일본과 적대했기 때문에, 멸망한 백제의 왕족이 일본서기에 끼친 영향으로 인해 일본이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적대감이 생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저자들이 백제의 역사서를 참고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백제를 마치 왜의 속국이었던 양 자기들 입장으로 왜곡해서 기록하는 등, 백제인들이 일본서기 편찬에 주도적으로 개입했다고 볼 수 없는 정황도 있다. 그리고 역사를 보더라도 신라 이외의 한반도 국가들과는 대체로 관계가 양호한 편이었다. 허구한 날 싸우던 유럽의 이웃나라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어디까지나 주장의 하나로 참고만 할 것.

4.2. 남북국시대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은 발해와 가깝게 지냈지만 신라와는 비교적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물론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국제 관계가 파탄나면서 신라가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물색하였고 잠시 양국간 우호관계가 이어지기는 하였지만 향후 발해가 건국되고 신라가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양국 간 관계는 다시금 예전처럼 소홀해졌다.
하지만 통일신라 시대에도 후대인 고려, 조선시대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등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5백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9] 다만 교류는 교류일 뿐 국가 감정은 많이 안 좋은 편이었다. 한편 통일신라 후기에는 신라구가 일본 해안을 노략질하는 일이 벌어지며 삼국시대 내내 지속되었던 왜구의 신라 침입이 역전되는 현상도 발생하곤 하였다.
발해는 중국의 당과 한국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은 바 있다. 발해 초기 고왕 시절에는 발해의 국력이 많이 약해 일본에 조공까지 하였으나 점차 무왕과 문왕 시기를 거쳐 발해의 국력이 많이 강성해지자 동등한 국제관계로 전환되었다. 일본은 발해와의 동맹을 이용해 신라 침공을 구상하며 발해의 참여를 독촉하지만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발해는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해 이 계획은 좌절된다. 한편 5경 중 하나인 동경용원부를 통해 해상로인 일본도가 뻗어있어 이 곳을 통해 발해와 일본은 관계를 맺어왔다.

4.3. 고려시대


'''고려 전기에는 한일 역사상 가장 교류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교류가 적었다.''' 기록이 적어서 알려진게 적었을 수도 있지만, 남은 한일 역사서 기록을 뒤져보면 이전의 신라, 발해 보다도 교류가 적었다. 벽란도에 송나라, 심지어 아라비아 상인들도 왔을 정도로 송나라와 교류는 많았다. 그러나 고려는 조선보다 무역, 상업이 활발했다는 인식과 달리 일본과 교류는 매우 적었다. 고려시대 당시의 일본은 헤이안 시대,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대였다.
하지만 성종 이후, 문종 때는 교류가 늘었다.
서로 간에 무역 정도나 하던 양국 사이에 커다란 변화가 온 건 몽고의 등장 때문. 몽골 제국이 일본을 침략할 때 고려군과 함께 쳐들어가는 바람에 양국은 마찰을 빚었다. 외국 정규군에게 침공당해 본 것이 역사상 처음이었던 일본인들은 이 전쟁을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민간에서는 무쿠리코쿠리(むくりこくり, 일명 '몽골 고구려') 귀신 괴담까지 등장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한편 여말선초에 극성이었던 왜구가 반일감정을 조장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 무렵 발생했을 반일감정의 깊이나 지속 기간에 대해서 검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한편 이에 대해 왜구는 일본의 정규군도 아니었고, 일본인들도 오히려 피해를 입기도 했으니 조선인들은 왜구의 문제로 반일감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단순히 독립적인 해적집단이 약탈만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규군이 지속적으로 침략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10] 당시 일본 중앙 정부 격인 막부도 이들을 토벌할 역량이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일본이이 왜구가 머무는 땅을 일본의 영토로 주장하는 이상 막부의 책임일 수밖에 없으며, 이 문제에 대해 사과 한마디조차 받지 못한 '''한반도 사람들이 이해해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국가 간 외교적으로 문제가 없었다고 해서 민간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일본 정치 상황의 세세한 내막까지 알 길이 없다시피한 여말선초의 한반도 백성들은 어차피 똑같은 약탈자이자 침략자인 왜구와 일본 정부 소속의 정규군들을 구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임진왜란에서 비롯된 반감도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 역시 16세기의 반일감정이 20세기까지 지속됐다기보다는 일제강점기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임진왜란을 상기시키게 하여 일제강점기에 대한 분노가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 것에 가깝다.


4.4. 강화도 조약 이전까지 조선시대


무로마치 막부가 지방 세력들을 제압한 후 한일 관계는 교린 관계로 그럭저럭 평온하게 유지되었다. 세종의 대마도 정벌 이후 15세기 중후반에는 왜구가 한반도를 노략질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삼포왜란, 을묘왜변이 발생하여 조선이 피해를 입었다. 동 시기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가 이미 통제력을 잃고 전국시대의 혼란 상황이었다. 이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했고,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까지 발발'''했다. 선조가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나서고, 명나라의 손을 빌려 간신히 일본을 패퇴시키는 등 이 과정에서 많은 이가 일본군 또는 전염병으로 죽거나 다치고 국토도 황폐화되었다. 당연히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조선 측에서는 새로운 승리자가 된 그와 적대를 할 이유가 없어 광해군1년인 1609년 빠른 관계 회복을 원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멋대로 국서 바꿔치기 주작을 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마지막 막부 정권인 에도 막부를 열었다.
하지만 왜란 직후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반청 감정이 앞서게 되고,조선은 조선 통신사 등을 정례화하는 등의 노력으로 일본과 함께 교린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 조선 수도로 파견된 일본 사신의 왕랫길을 '''일본군이 그대로 침략 루트로 써먹는 바람에''' 조선 측은 일본 사신의 한성 진입은 커녕 동래 왜관 이외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에도까지 불러 네덜란드인들에게 난학을 배울 때 한 대접조차 초월하는 융숭한 접대를 하였다. 막부가 국가 재정에 무리수를 두면서 통신사를 대접한 것은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시기에 따른 추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수평적이거나 한국이 조금 우위였던 한일 관계가 기울어진 건 일본이 개화를 하면서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국력을 구축한 근현대사 시기부터이다.

4.5. 강화도 조약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근대 이후 한일 관계는 급격히 일방적인 쪽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한 시기가 조선의 개항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조선이 개혁개방에 지지부진한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히 발전한 일본 제국은 막부 시절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했다. 이에 따른 첫 결과물이 바로 운요호 사건강화도 조약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열강으로 부터 한국의 식민지배를 인정받고, 을사조약,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한국의 반일 감정은 급속히 오르게 된다

4.6. 8.15 광복 이후


1945년 태평양 전쟁의 결과로 광복을 맞은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다고 보면 된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며 와해시키고 완전한 친일 인적 청산에는 실패하게 하였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을 통틀어 가장 대외적으로 강경한 대 일본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해방 과정에서 다소 애매한 위치에 놓인, 오늘날까지도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독도를 일본이 미군정의 통치로 인해 손을 쓸 수 없는 틈을 노려 수복하였다. 다만 애매하다는 말은 한반도 및 부속 도서로서 한국이 돌려받았는가, 아니면 연합국 군정의 점령지로 남았는가의 문제일 뿐, 행정구역에서 제외당한 일본 정부가 엉뚱하게 가타부타 뭐라 할 여지는 전혀 없다. 미국이 독도를 요구한다면 모를까. 결과적으로 독도를 한국이 실효지배함으써 독도 분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지만 동시에 일본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이를 가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6.25 전쟁 당시 미군정 치하의 일본이 경찰예비대(구 일본군, 지금의 자위대)를 파견하려 하자,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총부리를 북한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겠다는 발언을 해서 대놓고 파견하지는 못했다.[11]
이승만 정부 시절에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해 보상금을 받아 경제발전에 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승만정부는 일제의 피해로 22억 달러의 손실을 당하였다며 이를 청구하였으나 일본은 근거가 없다며 한국에 남겨진 일본인 재산을 돌려달라는 역청구권까지 제시하며 거절하였다. 1953년 10월 회담에서 일본의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의 한국 지배는 유익한 것이었으며 일본이 아니더라도 중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발언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크게 훼손하였고 회담은 결렬되었다. 1957년 일본은 이 발언을 취소하고 다시 회담이 열렸지만 1959년 일본 정부가 재일 한국-조선인을 북한으로 송환하자 일시 중단되는 파국을 면할 수 없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가 들어서고 회담이 개최하였지만 지지부진하였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 관계는 새 국면을 맞는다. 조속한 경제성장이 절실했으나 돈이 없었던 한국과 미국의 강력한 요구, 그리고 과거 문제를 청산할 필요성이 있었던 일본 정부의 이해관계 일치로 인해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유무상 8억 달러를 받았고, 일본은 표면적으로나마 과거사 문제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었으나, 이는 표면적인 합의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과거사와 조약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한일 관계가 꼬일대로 꼬이는 원인이 되고 만다.
과거사 문제를 비롯해 정치적 문제까지 겹친 박정희정부 시절 일본과의 관계가 다시 끊어질 뻔한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조총련을 위시로 한 재일 한국인(조선인)들 간의 이념적 갈등으로 인한 문제,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크게 항의를 받았으며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에 일본인 2명이 구속되었고 북한-일본을 왕래하던 만경봉호에 승선해 북한의 공작지도원과 면담을 하는데 남조선 대통령 암살은 김일성의 명령인 혁명과업으로 성공해야 한다며 당부하고 이에 주석 님의 혁명 과업을 위해 기필코 성공하겠다고 대답한 재일 한국-조선인 문세광이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29회광복절 기념행사장에 난입해 영부인을 암살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노신영 외무차관은 다음 날인 16일 주한 일본 대사를 소환해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발급한 데 대한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김호룡 당시 조총련 오사카지부 정치부장 등 일본 내 공범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일본의 수사가 정부가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 내에서는 내정간섭을 받고 있다는 여론이 조성되어 당연히 국내에는 반일 여론이 거세졌고, 주한일본대사관주변에 매일 같이 시위대의 항의집회가 벌어지고 자칫하면 흥분한 이들에게 점거당할 수 있어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데모 대의 대사관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렸다.[12] 이러한 때 한국 정부는 을미사변을 파헤쳐 공론화할 것을 지시하며 일본과의 단교까지 고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박 대통령 저격' 배후 수사 한·일 첨예 대립 이러한 사태는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외무장관을 맡았던 시나 에츠사부로를 특사로 파견해 일본의 책임 인정과 한국 수사기관과 협조한다는 내용의 친필을 전달해 일단락되었다.[13]
1980년의 5.18 민주화운동과 이후 계속된 사회적 혼란은 일본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으며,이를 두고 당시 일본인이나 일본 언론들은 한국을 보고 "식민지 통치 시기가 더 행복하지 않았느냐" 식의 망언을 할 정도로 한국을 얕잡아 보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실제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넷 우익 중에는 이 시기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는 중노년층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이는 한국에 알려지면서 반일 감정의 소재로 활용되었다.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언급이 잘 안되는것이 있는데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하고 국민적으로 이와 관련된 교육을 적극적으로 처음 시행한 것은 권위주의 정권들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가 유공자에 대한 보상'''이 실시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들이나 한국전쟁 유공자들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1962년안중근, 강우규, 윤봉길, 이준(열사), 김구 등을 포함한 18명을 건국훈장-대한민국장에, 이봉창, 나석주, 신돌석, 신채호, 장인환, 홍범도, 지청천 등을 포함한 58명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수훈하였다.
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 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려 이는 지금의 광화문에 조성되어있는 이순신 동상이다. #
1982년 일본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 당시 문부성이 한국에 관련된 내용을 일본 측에 유리한 형태로 수정하면서 역사왜곡 이슈가 터졌다. 한국 내 여론은 독립운동과 같은 역사를 보존하고 후대에 알려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고, 500여억 원의 국민성금으로 지금의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였다.[14]
이러한 정치적 문제들을 보면 험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냉전이라는 국제정세에서 북한, 중공,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을 해야 하는 공통점으로 안보 공조체계를 이루어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분야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근현대의 일본은 한국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반대로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눈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한국의 경제는 70년대에 이미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리며 주목받고 있기는 했지만, 일본은 그 수준을 넘어 이미 1970년대에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기점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상태였다. 또한 1980년대에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문제가 드러나기 전까지 미국을 뛰어넘고 최고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받고 있던, 경제력과 국력 면에서 절정기에 있는 나라였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일본의 제품과 경영전략을 벤치마킹하기 바빴고, 미국식 경제모델[15]을 받아들인 경제관료와 달리 일선 기업인들은 일본 모델을 택했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 성행했던 평생고용제도나 연공서열제, 사업다각화, 장인정신, 잇쇼켄메이, 직장가족주의, 인사관리제도 등이 일본에서 배워온 것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영전략은 1980년대까지 줄곧 일본 기업 모방이었으며, 롯데그룹처럼 재일교포가 세우거나 진출시킨 기업들은 일본식 경영제도가 몸에 밴 경우가 있었다. 일본 상품이나 일본 문화의 경우 수입이 금지되어 있어 쉽게 접할 수는 없었으나, 암암리에 부유층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위에서 설명한 1965년을 기점으로 선진 기술과 자본 부품 소재들이 쏟아져 들어와 이를 조립.가공해 미국 시장에 파는 당시 태평양 삼각 경제구조로 불리던 "양국은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16]
1980년대에는 정치적인 관계도 매우 호전되었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현직 수상으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하였고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도 일본 방문을 했으나, 이들은 공식적인 차원에서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전두환 대통령과 만찬에서 “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 양국간의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언급을 하였다.전두환1984년 방일때 일왕 과거사 ‘첫 언급’ 이유는
1990년대에는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가 전쟁과 식민 지배에 사과를 표명했고, 1998년 일본 정부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으로 방문했을 때 만찬 자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일본 천황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언급한 것이 그 예다.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일본 국왕 김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하지만 1990년대에도 결코 우호적인 관계로 일관된 것이 아니었다. 1995년 11월 8일에 전해진 에토 다카미 총무청 장관은 "한일합방은 나라의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해준 것이 학교도 도로도 지어주었다. 창씨개명도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에토 다키미의 발언 며칠 후 열린 1995년 11월 14일 김영삼장쩌민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을 화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난징대학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장쩌민은 “어렸을 때 내가 직접 봤는데도 일본은 그런 일 없었다고 잡아뗀다"라고 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라고 했다. 일본은 경악했다. 대통령 외교비서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유 전 장관은 “이 발언이 IMF 행을 불렀다"라고 한다.22년전 IMF 위기는 일본 은행에 의해 터졌다.

4.7. 1997년 미일가이드라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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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9월, 미국과 일본이 미-일 방위협력 지침을 19년 만에 개정해서 일본 자위대가 해외에 군사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논란을 빚기도 했다.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법적 근거를 마련한 미일 가이드라인에서 일본은 97년 7월 캄보디아 자위대 수송기 파병을 통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반응을 떠보고 한반도 북핵위기시 자위대의 한반도 합법적 군사활동 근거를 이 법안을 통해 공식화하기도 했다. 미일 대등한조건서 군사협력
1년 5개월만의 개정협상 끝에 합의된 미-일 방위협력 지침에는 일본 주변사태에 관한 항목이 새로 등장했는데 이 규정에 따라 일본의 육·해·공 자위대는 미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군사적 역할의 범위를 사실상 해외로 확대할 수 있게 됐다. 미국과 일본은 일본 주변의 개념이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외교적인 수사를 합의문에 명기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한반도, 그 다음은 중국과 대만간의분쟁을 상정한 것으로 일본군 해외군사 개입의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우선 미국은 일본과 방위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전력을 극대화하고 군사비부담을 덜 수 있게 된다. 일본 측은 군사 안보 면에서의 역할 증대를 노려 자국방위라는 기존의 동맹 틀을 의도적으로 깼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신 방위협력에 대한 위험 론이 고개를 들고 있으며, 국민적 합의 과정 없이 안보를 종속화시켰다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과 일본은 유사시 주변 사태의 대상국이 된 한국과 중국에 사절을 보내 군사팽창주의의 우려를 해명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은 일본이 미국의 대리 역할을 구호처럼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만 수행할지, 전쟁 피해 대상국들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아 논란을 빚었다.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개정, 주변국들의 우려 높아져
최첨단 장비로 무장돼있는 육상과 해상 그리고 항공을 포함하는 일본의 자위대 병력은 모두 20만3천 앞으로는 새로운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아시아와 태평양 전지역에 출동할 수가 있게 됐으며 자위대가 맡게 될 후방지원은 우선 미군의 전투지원을 위해서 일본 열도의 군사기지 뿐만 아니라 민간공항과 항만시설을 미군에게 제공하게 된다. 또한 무기와 탄약을 비롯해서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체의 물자와 연료를 일본의 자위대가 수송을 맡게 된다. 아울러 미군기와 함정의 수리와 정비도 일본이 담당한다.
달라지는 자위대의 역할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위기에 처한 미군의 수색과 구조작전에 자위대가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긴급한 사태일 때는 적지에도 들어가는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확정;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
당시 미일가이드라인에 대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미일가이드라인의 골자는 유사시 자위대한반도에 진출하여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하는 것이 큰 문제"며 "주권국인 한국의 동의 없이 이런 법안이 통과된 것과 우리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에 분노할일"이라고 김영삼 정부를 비판했다.남북정상회담 개최될 것 김대중후보 발언 김대중 후보는 유사시 자위대의 한반도 군사개입에 대해 한국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자위대의 한반도 군사개입에 대해 조건부허용 입장을 내놨다. 97대선 정책대결로

5. 2000년대 이후



5.1. 정치



5.1.1. 한국에 대한 옹호


본 단락에는 한국에 대한 옹호'''만'''을 서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한일관계 악화의 최대 원인은 물론 과거사를 둘러싼 인식 차이이다.
우리로서는 제국주의 시기의 식민통치의 굴욕과 해방후 후유증으로 한반도 분단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등 과거사에 대한 부정적인 배경을 깔고들어가고 있다. 거기에 전범들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범죄 미화, 고대사를 둘러싼 역사교과서 왜곡, 일제강점기에 대해 식민지 수혜론 같은 적반하장·아전인수 격의 해석등을 지켜보며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비록 일본 총리들이 몇 차례 사과를 하기는 했으나, 극우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이를 뒤집어 버리는 망언을 일삼아 온 데다 국가 차원에서도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점차 더 정계의 중심으로 보내주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특히 아베 신조 정권에서 한국 외교의 이중성을 문제 삼아 양국 간의 현안들에서 모조리 강짜를 부리는 태도는 결국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 내에서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다 보니 일본 내 지한파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일본 역시 한국 국민들의 시선이 점차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서 상식적인 국민들조차 "이건 좀 아닌데"라고 고개를 저을만한 언사들만 반복하면서 한국의 지일파에게 외교적인 지지를 보내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설 자리를 잃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재무장이나 평화헌법 폐기, 과거사 배상 문제에서의 입장, 독도 분쟁 등은 한국인이 아니라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해 줄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군국주의를 옹호하거나 의외에서 식민지 수혜론을 주장하거나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을 강요하는 식의 태도는 국적을 떠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고, 일본 내에서도 비상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의 문제가 외교에 지나치게 도덕률을 주입하는 것이라면, 일본의 문제는 외교에 도의를 지나치게 배제하고 실익만을 쫓는다는 것이다. 잘못된 건 잘못된 거고, 그걸 해결하려면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해야지 정상적인 다른 부분까지 일부러 망가트릴 필요는 없는 것.
이명박 정부천황에게 직접 사과를 요청하고 문재인 정부가 전 정부의 협약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정부끼리의 다툼으로 끝나야지 과거사 자체를 부정하고 사과의 필요성이 없다는 주장의 타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또한 한일기본조약에서 소멸시킨 청구권은 한일합병과 그 이후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일본인의 불공정한 재산·권리 취득 및 국가 간 법률 문제에 대한 것이며, 개개인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불법 행위를 총망라하는 개념인지는 여전히 법적인 해석이 나뉘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일기본조약은 물론이고 위안부 합의 역시 일본의 과거사를 둘러싼 수많은 망언이나 위안부 소녀상 설치를 방해하는 등의 극우적인 행보를 죄다 용인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사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것은 아무리 넓게 해석하더라도 이를 통해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뿐, 과거사를 잊고 완전히 없었던 일로 하자는 의미는 결코 될 수 없다. 이건 강도강도질을 해놓고 재판도 끝났는데 계속 자신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피해자 앞에서 범죄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의 논리이다.
한편 일본은 자신들이 애써 만든 자산들을 모조리 강탈당했다는 인식이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본국 정부나 총독부가 건설한 사회간접자본 민간인이 설립한 기업들을 전혀 보상하지 않았다. 3년 후에 성립된 한국정부가 인수하거나 귀속불하로 자산가들이 기업체들을 헐값으로 매수하였는데 당시 일제가 만들어놓은 자산을 3000억으로 추산되어 1948년 정부 세출의 9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1965년 기준으로 물가는 28배 증가 했으므로 "8조4000억"에 해당한다. 소비자 물가지수와 상승률 당시 달러당 300원 정도였던 시장환율 기준으로 환산하면 "280억 달러"다. 물론 일제가 만든 시설들과 기업들은 한국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대다수가 유실되어 이를 제외하고 계산해야 하지만 1950년대 당시에는 주요 대기업체 89개 중에서 40%(36개사)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이런 사유로 일본은 1965년 국교정상화 회담 당시에 이에 수혜를 입은 한국 측이 어떠한 형식으로든 보상을 하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적산 문제야 말로 한일기본조약으로 배상 논의가 끝난 부분에 속한다. 조약 체결 이후에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새삼스럽게 적산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17]
과거 한일관계는 경제개발 년대에 대일 유화책에 힘입어 국민감정과는 별개로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래 양국의 수교와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었으나, 한국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북한·중국·소련의 공산블록에 맞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처지였다. 이는 미국의 강권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당시 우리나라는 큰 혜택을 보았다. 물론 이후 사죄 면에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및 총리 친필 친서 등 일본 정부의 노력도 어느 정도 있었고 배상 측면에서도 한일기본조약에 따른 "독립 '''축하'''금" 3억 달러와 5억 달러의 유상 차관, 그리고 일본에게 받은 건 아니지만 미국을 위시한 제 1세계 선진국으로부터 아시아여성기금, IMF 지원금 등을 계속 지원받았기 때문에 일본을 마냥 적대할 명분은 딱히 없었다.
참고로 2018년 한국의 외환보유고 규모는 4,200억 달러 가량이나, 1960년대와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8억 달러였다. 그리고 유상 차관은 일종의 대출이라고 보면 된다. 반드시 상환해야 하며 차관을 상환하지 못할 경우 독일이 그리스에 그랬던 것처럼 국고 압류가 들어간다.
당시 주변 환경도 녹록치 않았는데, 당장 양쪽 모두 미국의 동맹이며 냉전 구도에서 함께 소련 및 북한을 견제해야 했고, 소련 붕괴 이후에도 어느정도 상황을 수습한 러시아와 급팽창하는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숙명이 있었다. 때문에 일본과의 공조에 균열이 갈 정도의 적대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당시 한국에게도 매우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동맹국인 양국이 상대국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면 먼저 적대시한 쪽이 미국의 눈치를 받게 될 것은 안 봐도 비디오이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한일관계는 독도 등 몇몇 분쟁 요소가 있었음에도 한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80~9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회복되어 아베 2차 내각 출범 이전까지 나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간 나오토 정권 당시 도호쿠 대지진이 터졌을 때 한국에서 민관을 가리지 않고 일본에 물자 및 자금을 지원하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여론이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 한국의 여론은 그 본격적인 이유를 도호쿠 대지진 후속 조치의 미비로 출범한 아베 2차 내각의 과거사 부정 행보 때문으로 본다. 한국은 지진 당시 지원을 안했다고 조작하는 일본 언론, 다케시마의 날 따위를 지정하면서 영토 문제로 지속적으로 도발해오는 일본 정치권, 731비행기에 탑승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 총리를 지켜보았고, 식민지배 피해자로서는 이러한 일련의 일본 정책 변화에 당연히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양국관계의 급냉각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일본의 '노력', 이른바 '저자세 외교'는 사실 경제적 지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한국도 6.25 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 수준에서 재기하기 위해 한푼이 아쉬운 시절에는 일본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90년대 한국의 경제규모는 일본의 1/20 수준을 따라잡았고, 2000년대 중반 일본의 1/10 수준까지 따라잡았으며, 아베노믹스를 위시한 강도높은 양적완화로 인한 착시라는 주장도 만만찮지만 일단은 2017년 기준으로 일본의 1/3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현 상황에서는 경제적 지원이 크게 와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은 일본의 저자세 외교가 진정성이 부족하다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일본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강행하며 자국의 전통문화를 중시해달라는 식의 콧대높은 모습을 보인 점, 그리고 위안부 소녀상에 대한 고압적 태도를 보인 점 등을 이유로 삼는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두 정권의 대일 스탠스의 이면에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했음이 드러나면서 미국의 입장에서도 섣불리 한국에 압력을 행사했다가는 한국 내에 잠재되어 있던 반미 감정을 건드릴 수 있을까 조심스러운 형국이다. 당장 박근혜 정부가 대일관계의 레버리지로 중국을 활용하려다 미국의 압박을 맞고 부랴부랴 급조한 협약이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이고 이를 한국 국민들이 잘 아는 상황이다. 오죽하면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아베 사이의 정상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대놓고 '일본은 한국의 동맹이 아니다.'라고 발언했고, 트럼프도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이해한다'''라는, 한국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줬을 정도다.
그리고 미국 고위 군사 관계자들이 줄곧 주장해 온 한미일 군사 동맹에 대해서도 입장차만 재확인한 채 귀국했는데 한국 측에 강한 항의를 하지 않은 점 또한 미국이 일본이 한국의 역린임을 알고 일단은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이 점은 일본이란 나라가 한국의 역린이기 때문에 한미일 군사동맹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일 간의 과거사 갈등을 단순히 한국인들이 과거에 집착한다는 식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일본은 단순한 체급으로 비교해 봐도 한국의 실효지배 면적의 4배, 인구의 2.5배 가량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자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외교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계적 강대국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우리가 단독으로 어떻게 해 보기는 버거운 상대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큰 틀에서는 한미동맹으로, 보다 작은 틀에서는 남북관계·한중관계 개선을 통해 일본을 견제해 왔다.
그러므로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의 과오를 분명히 인식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곧 "훗날 외교적인 상황이 변화할 경우,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다시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이어진다. 즉,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고 앞으로도 역전의 가능성이 별달리 보이지 않는 북한, 그리고 외교적인 목표 자체가 완전히 달라서 주적으로 삼기보다 오히려 전략적인 제휴를 시도해야 할 대상인 미국·중국·러시아와는 달리, 일본은 한국을 위협할 역량이 있음은 물론이고 대륙 진출을 꿈꾸는 섬나라의 지정학적 특성상 미국이 흔들리거나 한미동맹이 사라진다면 상황에 따라 한반도에 또다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이 충분한 국가라는 것이 문제이다. 이미 한국은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라는 사건들을 통해 현실적으로 겪어보기도 했다.
때문에 한국이 한일관계에서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면 지난 세기의 영·프처럼 양국이 부딪칠 때는 부딪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 연대해서 공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라는 신뢰가 필수적이며, 이러한 신뢰 관계는 단순히 배상금 같은 숫자놀음이 아니라 군국주의·제국주의가 판쳤던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일관된 반성과 한국민들의 정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대북문제나 대중 관계 설정을 두고 연일 한국에게 '한미일이 공조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고 있으나, 정작 자신들의 태도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음은 물론 고작 10년도 채 되지 않은 외교적 충돌을 견디지 못해 외교청서에서도 "미래지향적 관계"를 지워 버리고 손바닥 뒤집듯 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될수록 한일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처지인 한국으로서는 일본에 더 큰 위협을 느낄 것이고, 설사 이후에 다른 총리가 집권해서 사과한다 해도 언제 또 적대적으로 돌아설지 모르기 때문에 점점 더 방어적이고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서로 간의 파탄의 원인이 될만한 잘못을 고치지 않고 상대방이 먼저 양보하기를 바라는 태도는 일본도 사실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당선 직후에는, 이유는 불투명하나 다케시마의 날 지정 등의 외교공약을 하나도 안 지키면서까지 한일관계의 완화에 나서고 있다. 굳이 새로 들어설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워봤자 피곤하기만 하고, 둘 다 국내의 경제문제를 해결봐야 하는 만큼 서로 신경을 쓸 일이 없다는게 좋다는 생각인 듯하다. 이로써 한일관계는 다시 진정 측면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한일관계는 한국의 정권 초기에는 우호적 분위기로 흘러가고, 한국 정권 후반기에 악화되어가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새 대통령 당선인이 나온 현재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된 일이었다. 일본은 의원내각제 국가라서 정권 교체시기가 일정치 않으므로, 기준은 한국 대선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인 2005년 독도문제가 심각하게 터졌을 때 정도가 유일한 예외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대중의 일반적인 입장을 정리하자면
  • 한일기본조약으로 국가가 대표해서 청구권을 포기하고 일본 정부가 독립 축하금과 경제적 지원을 해줬지만 그것은 배상 차원의 문제이지 과거사를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닌데 일본 정치권이 이를 호도하고 있다.
  • 고노 요헤이고노 담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무라야마 담화를 시작으로 해서 수십년 동안 여러 차례 사과했다지만 이를 손바닥 뒤집듯이 터져나오는 전범자 신격화와 여러 인사들의 망언, 일본 정계에서 이런 극우 진영이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는 현상은 일본의 사과가 진심이 아니라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정황이다.

  • 북한중국의 위협에 대한 한국의 미온적인 태도는 필요 시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 해결할 별도의 문제이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곧 일본의 잘못과 책임이 면제받는 것이 아니다. 또한, 북한과 중국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고 싶으면 일본 역시 북한, 중국과 다름 없던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가치관을 반성하면서 이를 역행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5.1.2. 일본에 대한 옹호


본 단락에는 일본에 대한 옹호'''만'''을 서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일본인들은 일본 정부의 잇따른 과거사 부정 발언보다는 한국 정부가 과거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일본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한일관계 파탄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당연히 상당수 한국인들의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로 201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의 일본 내 주류 여론은 ''일본이 한국에게 더 이상 과거사를 이유로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없다"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가' 등의 문항으로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아사히 신문처럼 그나마 한국에 가장 우호적인 편인 좌익 언론지에서조차 2018년 시점에서는 한국에 대한 우호 여론이 거의 자취를 감춘 상황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1965년 이래 일본 정부는 한국에 꾸준히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한국에 나름대로의 성의를 보여온 바 있었다. 설명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3억 달러의 무상 원조와 5억 달러의 유상 차관을 제공하여 한국의 청구권을 청산하는 한일기본조약을 맺음.
  • 한국의 IMF 외환위기 당시 선진국 지원 80억 달러 중 일본이 가장 많은 47억 달러를 부담했으며(미국은 17억 달러), 김대중 정권 당시 위안부 위로금을 제공함.
  • 고노 담화 -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부치게이조 선언 - 고이즈미 담화 - 간 담화로 이어지는 정부 차원의 사죄 성명이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총리의 친필 사과 친서 등의 성의를 보인 바 있음.
  •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자 일제의 피침략국들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도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및 아시아여성기금(Asian Women's Fund) 등을 통해 같은 전범인 독일을 상회하는 규모의 지원을 함.[18]
이에 응하여 한국에서의 대일 여론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그럭저럭 개선되어가고 있었고, 실제로 1990년대~2000년대 초반 한국의 대일정서는 현재보다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일례로 도호쿠 대지진 당시 한국은 일본의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에 대해 국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보내기도 하였고, 한국의 아이돌 및 배우들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진출해서 활동하던 시기도 2000년대부터이다.
심지어 과거 아베 1차 내각 시절의 아베 신조는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었다. 지금과 같이 우익 정치관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한국의 국립현충원에 일본 총리 사상 최초로 참배하며,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거나 제2차 세계대전에 자의에 상관없이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는 등, 과거 무라야마-고노 담화가 이루어지던 시절과 비교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스탠스를 유지하며 한국의 이해를 구하면서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구축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이 사실에 대해 잘 모르는 이유는, 한국 미디어에서 이 사실에 대해 제대로 조명을 하지 않고 "그런게 있다 카던데 신경 쓸 건 아니다" 식으로 흘러 넘겼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와 진영 논리에 따라 진실보다는 구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만 찍어내다 보니, 일본의 역사 왜곡에 비판하면서도 정작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부분들은 숨기기 급급했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한일기본조약은 과거사 갈등에서 일본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근거이며, 한일 관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 내에는 그 내용은 커녕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또 1990년에 아키히토 덴노가 '통석의 념' 발언에 대해 한국인들이 무작정 분개하는 것도 일본인들이 체면을 위해 '사죄' 같은 직설적 표현을 피하고 우회적 표현을 쓰는 고유 풍습[19]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룬 이 조약은 광복 이후 단절된 외교 관계를 복구시키고, 오랜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으며 발생한 각종 청구권·보상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체결된 조약으로,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반영하는 조약이기도 했다.냉전이라는 구도하에서 동북아진영을 반공 진영으로 묶으려는 미국의 의도는 일본으로 거액을 지급하도록 압박하였다. 이전의 문서에 나오는 "하여간 배상금은 실제로도 포항제철 설립, 소양강댐 건설에 사용되어 포항과 춘천의 지역 경제 발전을 하였다, 일본 자본으로 인한 경제적 기여가 어느 정도 있었음에도" 이러한 서술들은 수박 겉핥기이다.한국사회의 저변에는 일본에 거액을 받았지만 개발도상국으로 남아있는 국가들과 다르게 어떤 식으로 투자하여 농업 후진국에서 고도로 공업이 발달한 선진국 대열로 이끌어낸 한강의 기적에 이어 2010년대선진국에 진입해 유일하게 일본을 우습게 보는 한국인이라는 조크가 발생하게 만들 정도로 어떻게 기여하게 되었는지 모르는 이가 너무 많다.
하여간 한일 관계가 악화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배상 유무에 대한 의견 차이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인식 차이'''이다. 사실 한국에서 배상을 요구하는 여론이 꾸준히 나오는 이유는 한국 정부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는데, 1965년 당시 한일기본조약이 양국 정부 간 밀실 협약으로 추진되어 협정 내 정보가 양국 간에 서로 다르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은 국내의 반대 여론을 수렴하고 설득하는 절차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반대에 부딪친 것은 사실이다.[20]

당시 박정희 정부는 배상금을 직접 피해자들에게 전달하겠다는 일본에게 '''한국 정부가 전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 배상금을 대표해서 받아온 뒤, 배상금을 배분할 의무를 소홀히 하고 이를 모조리 가로채 피해자들이 일본이 배상을 하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가로채진 배상금은 국가 기반 시설과 같은 경제 자금으로 이용되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은 물론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의한 피해자들에게는 그 어떠한 한푼도 돌아가지 않았다. 한일관계 악화에 일본의 책임을 추궁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부분은 명백하게 한국 정부의 실책이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제3공화국 시절 일본 정부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배상과 사과를 제안받았으며, 이를 수락하였다. 비록 제3공화국 이래 헌법이 여러 차례 개정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1948년 수립된 제1공화국 정부에 그 정통성을 두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모든 권리와 의무들 역시 이로부터 계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제6공화국이 기존의 정파와 적대적이라 할지라도, 한일기본조약 공식 파기 선언을 천명하지 않을 거라면 그에 따르는 의무도 계승해야 하는 것이다. 65년 맺은 조약으로 문제점이 있다면 이는 제3공화국을 계승한 현대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것이고, 국가 발전을 위해 사용해 전국민에 혜택이 돌아가게하고 이를 계승한 오늘날의 한국 정부가 그렇게 발전된 조국의 과실에서 나아가 더 늦기 전에 다소 부족한 직접적인 보상액을 지급하는 것이 합리적인 귀결인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일본에서는 한국의 정치권에서 반공과 더불어 반일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비판을 제기하고는 한다. 이는 한국에서도 제기되는 비판이기도 하다. 한국 국민들의 반일 정서는 항상 불씨로 남아있었으며, 실제로 이는 선거철마다 반일 정서를 선거 전략에 써먹는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한국만 모르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한국과 중국에서 근무한 일본 외교관이 쓴 책에 이와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선거철에 국회의원 후보가 연설을 하는데, 그 내용이 "일본 놈들을 모두 때려 죽이자"와 같은 내용이었으며, 연설을 끝마치고 내려온 후보에게 왜 그런 연설을 한 것이냐고 묻자, 후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정치질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21]
이명박정부도 레임덕이라는 내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아키히토 덴노에게 사과를 요구한다는 외교적인 무리수를 던졌다. 정상회담과 같은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서의 조율을 거치지 않은 채 미디어 앞에서 적국의 국가원수를 직접적으로 지칭하여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심각한 외교 결례이다. 최근 일본 정부가 문재인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여 위안부 합의 판결에 실력행사를 하라고 요구했던 것이 외교 결례로 비난받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
게다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국왕들은 선출직 정부수반보다 의전상 살짝이나마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 외교가의 전통이며, 심지어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쇼와 덴노와는 달리 아키히토 덴노는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하고 평화헌법의 가치를 인정하며 반전주의를 설파하며 A급 전범 합사 이후 야스쿠니 신사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극우는커녕 항상 주변 국가들에 사죄와 반성을 표명해 온 대표적인 유화파 인사에게 단지 내정을 이유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셈이며, 천황이 실권이 거의 없으니 망정이지 아키히토가 조금만이라도 삐딱선을 탔다면 일본 내 친한파의 최고 구심점을 혐한으로 돌려버렸을 가능성도 있는 최악의 악수였다.
박근혜정부 때는 한일 정상간의 셔틀 외교마저 끊겼다. 문재인정부에 대해서는 일본의 보수·진보 언론과 정부가 합세하여 다같이 자신의 지지율을 위해 반일 감정을 활용한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 특히 일본의 대표 진보 언론인 아사히 신문마저 문재인 정부가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며 비판하는 상황이다. 난형난제격으로 "일본 정부가 지지율이 떨어지면 북풍이나 '한국 때리기'로 대중을 자극한다" 는 동일한 맥락의 비판 또한 한국 내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어쨌든 산업 태동기부터 이어진 교류로 한일 각국의 경제의 상호 의존도는 크게 증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북핵 리스크 등 외교안보 상의 문제에서도 한미일 3국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편이었다. 대일 부품 의존도와 같은 직접적인 부분부터 네이버 라인 등 자본의 교류까지 워낙에 얽힌 부분이 많은지라, 한 쪽의 경제에 이상신호가 감지되면 나머지 쪽도 크게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다만 중국이 부상하면서 대일 의존도 자체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한미일 3국은 미국의 강력한 중재 하에 일본의 과거사 청산과 한국의 입장 변화를 이끌어낼 새로운 협약을 준비하였으며, 대신 과거 한일기본조약이 밀실 조약으로 추진된 점이 한일관계 악화의 큰 요인임을 인지하였기에 이전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대외홍보 면에서 만전을 기하여 매우 시끌벅적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이 2015년에 이루어진 위안부 협상이다.
일본에서는 이 협상을 두고 "'''또 호구같이 돈 뜯긴다'''"는 자국민의 반발을 무릅써야 했다. 당장에 일본에선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배상을 끝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의 사죄와 배상은 일본 정부가 아닌 개개인의 사죄와 배상의 형식으로 진행된 것.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잘못으로 '''또 한번의 밀실조약''' 비슷한 것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얻게 된다.
단 대외홍보에 만전을 기한 덕에 해당 협상은 어쨌든 진행 절차부터 세세한 내용까지 양국의 모든 국민들이 너무나 잘 알게 되어 버렸고, 외교적인 대북 접근이 무위로 돌아가고 중국이 점점 더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시국이 심상치 않다 보니 한국에서도 냉정하게 덮을 부분은 덮고 가자는 입장이 과거보단 힘을 얻고 있기는 하다.
아베 2차 내각이 과거사 부정 등으로 한국의 공분을 사던 시절에도 일본의 여론은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겠으나 입은 다물었으면 좋겠다"라는 여론이 과반을 차지했다. 물론 산케이 신문 등 우익 언론지에서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였으나 최소한 중도 우파를 견지하는 요미우리 신문 등에서의 여론조사에서는 일관적인 스탠스를 견지하고 있었다. 즉 일본 국민들은 아베의 경제 정책을 지지하여 아베 2차 내각의 자민당을 지지했고, 경제 성장의 실적을 평가하여 이후에도 자민당을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아베의 사상까지 동조하지는 않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오히려 재특회 등 과격 극우단체의 시위에도 불만이 쌓인 시민들이 반-시위대를 구성하여 대립한 사건까지 있었다. 물론 이들의 성향 뿐만 아니라, 이들이 평소에 차에 확성기와 욱일기를 달고 질주하는 등 소음을 일으킨 점도 불만에 한 몫 했다.
어쨌거나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본도 수긍하는 사실이지만, 아베 2차 내각에서는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권보다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문재인 정부의 태도를 한일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군사적인 우경화를 두고 한국 정부 및 민간의 인식이 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반면, 일본과 아베 내각으로서도 당면한 주적인 중국의 커져가는 패권주의에 맞서려면 재무장을 포기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서로가 점점 더 양보할 수 없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상황이다.
아베 신조 총리 부터가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고 전차와 전투기에 올라타며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한일관계를 냉각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실권을 가진 정치인이 아닌 나루히토 현직 천황 역시 황태자 시절 UNSGAB의 명예총장 자격으로도 대구에서 열렸던 세계 물 포럼에 참석하지 못했을 정도로 한일관계는 냉각된 상황.
결론적으로 일본 대중의 일반적인 입장을 정리하자면
  • 한국은 1945년에 끝난 일제강점기로 일본은 두고두고 비판하면서, 정작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중국에는 미온적으로 반응한다. 일본은 적어도 전임 총리나 덴노들의 몇 차례 사과와 물질적인 보상금도 있었지만, 북한과 중국에게는 그러한 보상도 받지 못한채 지금까지도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북한과 중국에는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일본에게만 주구장창 비난하는 한국의 과거사 대응은 감정적이며 이중적인 것이 아닌가?[22]

5.1.3. 2013년


그러나, 기어코 2013년 2월 22일 아베 정권이 일을 저질렀다. 박근혜 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불과 3일 전이다. 시마네 현 독립 행사였던 다케시마의 날 식전 행사에서 내각부 정무관(중앙정부 차관급 인사) 시마지리 아이코(島尻安伊子)를 보냈다.연합신문
이로써 양국의 관계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미국 워싱턴 D.C.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특별강연을 하던 아베가 자신의 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와 당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언급하면서 한일관계의 완화를 원하는 발언도 했다한국일보
게다가 2013년 4월 22일, 아소 다로 부총리 등 각료 몇 명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 때문에 한국은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의원 168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서 우경화의 속도를 한 층 높였다.
여기에다 2013년 9월 일본 수산청 관계자가 한국의 수산물 금지조치에 항의하기 위해서 방한을 하고 WTO에 제소하겠다고 하자, 한국내에서 반일혐일을 부르게 하는 자초를 낳기도 하였다. 정작, 같은 조치를 위한 중국이나 미국에 관해서는 침묵을 하더니 국력이 약한 한국에 대해서는 오히려 강하게 나가고 있으니 국민들의 반일감정혐일정서도 이를 계기로 더욱 심해져 갈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일본과의 완전한 국교단절,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경제투자 전면금지" 등으로 초강경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물론 단교 같은 요구가 이뤄질 확률은 거의 없다. 미국이 가만 있을 리 없는데다 국교가 단절될 경우 현재로서는 한국이 불리하다.
실제로 일부 어민들이나 어촌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계기로 '''혐일 성향'''을 드러내었던 경우도 있었다. 잘못은 일본 측이 한 것인데, 일본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이 손수 생산한 수산물 및 해산물이 팔리지 못하게 되니 어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혐일정서가 드리운 상태였으며, 특히 동해안 지역 어민들이 이 문제로 혐일성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산물 종사자들조차도 일본놈 때문에 한국 어촌이나 어민들이 졸지에 죽게 생겼을 지경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할 정도다. 그래서 "쪽바리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 이 놈들아!"하는 식의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이 심하게 폭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역시 할 말이 있는 것이 동해 지역 한국 관할권의 수역에서 어족 자원이 씨가 말라가자 한국 측 어선들이 공공연히 일본쪽 수역으로 몰래 넘어와 어업을 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일본 쪽에서도 해양 순시선을 보내 경고하는 등 일본 어민들 입장에서도 한국에 대한 불만이 상당수준 존재하는 상황이다.
2013년 12월 2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면서 다시금 관계 악화에 기여하였다. 심지어 아베 신조 한국 비하 발언 논란까지 나오면서 한일관계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중이다.
당분간 한일관계는 경색을 유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도 한국은 제일 싫어하는 국가 순위 1위를 일본으로 꼽는 반면 일본은 제일 싫어하는 국가 1위로 중국을 꼽는다. 하지만 후술되겠지만 2014년 설문조사에서 싫어하는 국가 순위에서 항상 중국과 더불어 한국이 포함되며 점점 반한 수치가 올라가고 있다고 뉴스에서 보도됨에 따라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동안 일본에서 중국을 싫어했던 이유는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반일감정이 높지만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를 투영시킨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며, 중국은 정부와 민간 모두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반일감정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죄파문, 중국과 연대하여 위안부 성노예 지정 등 한국이 국제사회에 반일감정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반한감정이 일본에서 높아진 것이다. 물론 정치 체제도 다르고 적대감 면에서 월등히 높은 중국을 여전히 더 싫어하긴 한다.
어차피, 일본으로서는 적어도 현 상황에서는 굳이 한국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할 필요성과 명분도 없고, 한국도 역시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없다. 게다가, 중국과의 관계도 일단은 서로 이용해 먹는 일반적인 국가간의 관계라서 더욱 그렇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항간에서는 한일관계가 악화된 대신 한중관계에 친밀감이 짙어진다는 것과 한국일본보다는 중국에게 무게를 둘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는데, 현재의 중국 역시 일본센카쿠 열도 문제로 갈등하고 있고 한국독도 문제와도 맞물려서 한국중국 사회에서 반일감정이 생기고 양국이 이렇게 동병상련에 있는 입장에서 양국관계가 더욱 친밀해질 것이라는 설도 있다. 게다가 경제에 있어서도 독도 문제와 맞물려서 백지화될 처지에 놓인 한일 FTA 체결 추진이나 통화 스와프를 축소한다거나 한국 국채매입을 하지 않겠다는 일본에 비해서 중국한국한중 FTA 체결 시행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등, 한중관계가 활발하게 나가는 것과 비교해봐도 대조적이다.
다만, 한중간의 지정학적인 문제 때문에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에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중국과 어느 정도 이상으로 긴밀해지기는 어렵다. 당장 두 나라가 상대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봐도, 답이 뻔히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에게 있어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한국으로서는 최악의 경우 결국 중국이 아닌 일본과 손을 잡게 되어 있다. 한일 FTA도 결렬은 됐지만 한일 FTA는 한국에게 득보다 실이 많아 결렬된 측면이 크다. 그리고 한중일 FTA, RCEP, TPP등으로 우회로를 찾고 있다.
다만 일본은 중국이 주도하는 경제체제에 대해 외교상으로는 참여한다고 언급은 하지만 실제 가시적인 성과나 노력은 전혀 보이고 있지 않으며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체제인 TPP에 오히려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한국이 지나치게 중국의 경제체제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간접적인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강화에 힘쓰는 동안 미국과 일본은 엄청난 수준의 관계격상을 이루었고, 한국은 미/일간 관계 강화로 인해 소외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어 뒤늦게 미국과의 관계 강화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5.1.4. 2014년


결국 2014년 4월 4일 일본 측에서 한국에 기어코 3연타를 때려버렸다. 우선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사실을 삭제하고 독도를 "한국이 불법점령중인 지역"으로 왜곡해서 서술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검정통과했으며, 일본 외교부는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기술한 홈페이지를 작성하였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다케시마'(일본에서 주장하는 독도의 이름)는 일본의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점령중임!!이라는 망언을 날렸다.


5.1.5. 2015년


2015년 1월부터 아베 내각은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의 서술 삭제를 허가하고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영문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다시금 수위 높은 도발을 자행해 한일 수교 50주년을 무색하게 하고 있는 중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차 시점에 단 한번도 한일정상회담도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재 한일관계의 외교상태가 얼마나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중국과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5회 정상회담을 하였고 한중 FTA와 창립국 가입은 포기했지만 중국 주도의 AIIB 가입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황을 보면 정부의 대중국 정책이 대일본 정책보다 상대적으로 중시됨을 알 수 있다.
2015년 6월 21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21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주간지에 따르면 이에 대해 아베 총리가 '''"내가 말했잖아. 기다리기만 하면 한국이 스스로 찾아올 거라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는 3억엔이면 해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돈 문제만은 아니다” # 아베 총리의 발언에 대한 진위는 돈을 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일 위안부 협상에서 비슷한 액수인 10억 엔으로 일본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종결'''지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니 외교적으로 강력한 구속어구를 통해 국제법 적으로 입막음을 해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5.1.6. 2016년


2016년 북핵 국면에서 일단 협조체제는 강화되어가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 3년간의 친중 정책이 그 정점을 찍었던 2015년 전승절(중국) 참석 이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터진 북한의 4차 핵실험 사태 이후 실패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됐으며 중국과 공조를 통한 대일 강경책 또한 일본의 역사 수정 움직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음과 동시에 박근혜 정부의 대일 강경책으로 내놓은 정책들의 한계성들을 2015년 내내 체감한 상황이다.
거기다 사드 배치 국면에서 중국이 북한는의 편을 들면서 한국에 대해 노골적인 주권침해와 내정간섭이나 다름없는 발언들을 쏟아내면서 예전부터 누차 제기되었던 중국위협론에 대한 인식이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에 강경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포위망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한미일 국가간의 공조가 필수적이라, 그간의 강경책은 모두 접어두고 일단 한일관계 개선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는 움직임이 또 다시 한 번 반복된다면 걸림돌로 작용한다. 당장에 일본은 체결된 위안부 협상에서도 자국 내에서 협의하지도 않은 헛소리나 하고 있고, 한국 정부에서 이에 반발하면서 항의를 하는 것이 현재의 정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빠른 시간 내에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특히 임기 말 오바마의 히로시마 피폭지 방문이나 아베의 진주만 방문 등 과거사를 매듭짓고 미일관계는 밀월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모습이다. 이는 최근 한국 박근혜 정부의 친중국 행보로 인해 중국과 대립하는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2016년에는 부산에 위치한 일본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동구청측과 시민단체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고, 이후 일본은 여기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자세한 건 소녀상 항목을 참고할 것.

5.1.7. 2017년


2017년 3월 24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한국 정부가 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고 한일정부가 위안부협의를 했다는 내용을 담은 교과서를 무더기로 통과시켰고,# 2018년과 2019년부터 일본의 모든 초중고생들이 배우게 되면서 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거기에다 고대사(!)까지 왜곡했다는 비판도 생겼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주도로 위안부 합의 TF가 발표되자 일본은 재협상은 있을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5.1.8. 2018년


2018년 2월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 인권이사회 자리에 호리이 마나부 일본 외무성 정무관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실조사를 했지만 얻을 수 있는 자료에선 일본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확인할 수 없었다." 라며 위안부 강제동원이 날조라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
최근 북한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밝히고 남북관계가 급격히 개선되면서 일본의 대북 역할론을 내세우던 아베 신조의 정권의 정치, 외교적 입지가 축소되는 중이다. 과거 일본이 한국에게 고압적일 수 있었던 이유가 사고뭉치 북한을 견제함에 있어 일본이 필수적인 존재이니 한국은 어쨌든 일본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북한의 태도 변화 이전까지만 해도 대북 유화책을 제시하던 한국에 대해 코리아 패싱 논란이 나올 정도로 미일 양국이 신나서 북한을 후려치던 형국이었기 때문.
그런데 이러한 대북제제에 대한 무조건적 강경노선의 결과는 북한의 핵무기 완성이었다. 일본은 이와 더불어 일본만의 독자 제재까지 추진하려 하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의 유화책이 북한의 핵무기 폐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이 적잖게 당황하는 눈치. 특히 칼자루를 쥔 북한이 한중미 3국과 협상하겠다며 일본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일본이 무력하게 이에 끌려가는 모습이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아베 내각 지지율 하락은 북한 이슈보다는 총선 이후 잠잠해졌던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이 재점화된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일본은 이후 진행되는 남북정상회담에서 납북자 송환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한국에 요구하며 매우 고압적이던 기존의 태도를 다소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미국 정계에서 잇달아 '''리비아식 해법으로 북한을 무장해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비아에서 호의호식하던 카다피가 어떤 꼴이 됐는지 생각해보면 사실 미국의 입장은 크게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핵무기 치우면 도와주겠지만, 핵무기 안 치우면 죽는다는 뜻. 이에 북한이 크게 반발했는데, 미국을 비판하는 와중에도 트럼프는 비판하지 않으면서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렇게 분위기가 묘해지자 다시 '''역시 북한은 믿을 수 없는 국가'''라는 여론이 확산되고 아베 정권에 대한 대북 역할론 압박도 다소 누그러졌다. 게다가 5월 남북고위급회담이 무산되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참관에 한국 기자를 배제하려 하는 등 남북관계도 다시 경색되면서 이러한 기조는 더욱 강해졌다. 다만 북한이 막판에 맘을 돌려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참관에는 간신히 참가했다 자세한 내용은 2018년 북미정상회담 참조.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건에 대해 신일본제철에 '''배상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에 일본 정부나 정치권, 우익 지지자들이 심한 반발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에서는 벌써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며, 한국 조선업계의 한국 정부 공적자금 지원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원폭 티셔츠'로 촉발된 넷우익발 방탄소년단의 일본 방송 활동 제지 탄원 파동에 불을 끼얹었다. 또한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에미넴의 랩 가사와 같이 똑같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을 언급한 것에는 침묵한다고 이중적인 일본의 피해자 행세라며 비판하고 있다. 강제징용 판결로 인해 2018년 연말의 한일관계는 다시 급속히 경색될 것으로 보인다.
막상 연말에는 김앤장이 미쓰비시 그룹의 변호를 맏고 양승태와 직접 대면했다는 소식으로 시끄럽다. 이렇듯 한일 양국은 서로간 뿐만 아니라 서로 내부의 입장 정리와 문제 해결에도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 일본의 경우 아베 신조총리가 전 정부들의 사죄 행보를 부정하고 역사 왜곡을 적극 추진하는 등의 행동 등.
그와는 별개로 2018년 하반기 들어서 아베 신조문재인 양국 정상은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 위와 같이 '정부 대 정부' 식으로만 싸우고 있다. 전략적인 방치 외교인 셈.
2018년에는 강제징용공 배상에 관한 한일기본조약의 시선차이, 한일 레이더 갈등, 위안부 합의의 사실상의 파기로 인해 최악의 한일관계를 보냈다.
강제징용 판결에 불만을 가진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제재을 가진다고 하지만 경제적 제재를 가지면 일본에게도 타격이 만만치 않을 뿐더러 한국의 대일의존도도 예전같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다카스기 노부야 전 한국후지제록스 회장을 비롯한 일본 국내의 경제 전문가들도 경제보복 무용론이 나오는 상황이다. 일본도 이를 아는지 한국의 TPP 가입 거절 쪽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에 대한 WTO 2심 판결에서 한국의 손을 들어주는 등 그동안 일본의 외교력에 밀려 제대로 한일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은 외교청서에서 한일관계에서 '미래 지향적'을 빼고 북일관계에서 '북한의 압력'을 삭제했다.# 또한, 한국에 대해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는 표현 역시 지난해부터 없어졌다. 그 외 징용 문제나 독도 문제 등 다른 여러 쟁점에 있어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쉽게 말하면, 진전은 없고 오히려 중국이나 북한에 호의적으로 서술하고 한국만 겨냥해서 책임을 물렸다.

5.1.9. 2019년



2019년 5월 20일에는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중재위원회 설치를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신중히 검토한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이에 대한 분석기사
동년 7월 1일에는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부품 관련 수출 규제를 실시한다. 이것은 강제 징용 관련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반발하여 사실상의 경제 보복으로 이에 대해 한국 정부의 후속조치가 있을 전망이다. 사실 한일관계가 좋았던 적은 매우 드물었고 매번 티격태격하던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으며 두 나라의 관계회복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제25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 맞춰 일본 국내 여론을 결집하기 위한 정략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30년간 한국통인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 대학교수는 일본의 보복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7월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일본 호감도는 12%로 1991년 이래 28년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1%포인트) 다만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는 호감 41%, 비호감 43%로 2015년도 조사(호감 40%, 비호감 47%)보다 소폭 올랐다. 이번 조사에서도 이전 여론조사들과 비슷하게 20대의 일본/일본인 호감도가 가장 높았고, 60대 이상이 가장 낮았다.
한동안 증가세에 있었던 방한 일본인의 수도 10월 기준 14% 이상 줄어들면서 한일간 민간교류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있다. #
일본인들이 2019년에 한국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은 최저수준인 것으로 나타난 반면, 중국에 대한 친밀감은 높아졌다고 마이니치 신문이 보도했다.#

5.1.10. 2020년대




5.2. 경제


한일 교역 갈수록 위축…국제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
수많은 수치들이 존재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데 경제 부분에서 한일관계는 양국의 국민감정, 수없이 많이 발생한 외교적 갈등과는 별개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이원복 교수가 저술한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등과 같은 어린 아이들이 보는 교양/시사책 등에서도 기본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경제성장정책을 모방하여 대기업 위주의 수출경제 정책을 수립했고 이는 경제적 성공을 거둬 한강의 기적을 이룬다. 물론 그 이면에는 한일간의 연대를 통한 동아시아 반공 전선을 구상할려는 미국의 의도가 있었고 일본은 기술과 경제협력을 해주면서 초창기 한국의 경제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23]
2000년대 이후 일본과 무역, 경제적인 접점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중국과 동남아시아, 기타 신흥국이 성장하면서 한국 경제에 갈수록 비중을 늘리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경제적인 관계는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추이가 나타나게 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점차 경제적 관계가 다변화되는 추세에 있다.


5.2.1. GDP


명목 GDP로 비교한 것이다. 단위는 달러.
연도
한국
일본
한국:일본[24]
1960
20억
443억
0.05
1965
30억
910억
0.03
1970
89억
2,090억
0.04
1975
216억
5,128억
0.04
1980
643억
1조 0,869억
0.06
1985
985억
1조 3,845억
0.07
1990
2,704억
3조 1,036억
0.09
1995
5,311억
5조 3,339억
0.10
2000
5,333억
4조 7,311억
0.11
2005
8,448억
4조 5,718억
0.18
2010
1조 148억
5조 4,953억
0.18
2012
1조 1,295억
5조 9,602억
0.19
2013
1조 2,218억
4조 9,015억
0.25
2014
1조 4,495억
4조 7,698억
0.31
2015
1조 3,786억
4조 1,232억
0.33
2016
1조 4,148억
4조 9,507억
0.29
2017
1조 5,404억
4조 8,732억
0.32
2018
1조 6,555억
5조 0,706억
0.33
60년대 이래로 경제 규모는 최대 30배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났으나,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으로 성장을 멈춘 사이 한국이 열심히 따라와 2013년에는 4배까지 그 차이를 좁혔다. 그리고 일본이 이 시기를 전후로 아베노믹스를 위시한 강도높은 양적완화를 실시하면서 2015년에는 연중 엔달러 환율이 120엔 후반대를 기록하는 등 33%에 달하는 달러 기준 명목 GDP가 증발하여 한국은 일본과의 차이를 3배까지 좁힐 수 있었다. 참고로 PPP 환산 기준의 GDP에서는 2020년 기준 일본 5.23조$, 한국 2.29조$로 일본의 44%이다. 한국과 일본의 인구가 2.5배 정도 차이나기 때문에 1인당 GDP에서 일본과 동일할 때 한국의 GDP는 약 40% 정도가 되므로 33% 수준이면 상당히 올라온 셈.
근본적인 인구 수 차이 때문에 전체 GDP 일본 추월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1인당 GDP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2.5배 이상 높아야 GDP에서 추월이 가능한데, 일본이 4만$일 때 한국이 10만$ 이여야 하므로 정상적인 경제성장으로 이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타 강국과의 전면전급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자연재해 등 초대형급 악재가 일본에 발생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아주 어렵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일본의 절반 정도만 도달해도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2018년 기준 일본의 절반인 2.5조$ 달러면 2조$의 이탈리아를 가볍게 넘고 세계 8위에 해당하는 수준이며 프랑스 2.7조$, 영국 2.8조$와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다. 물론 이정도 달성은 현시점에서도 우리나라의 1인당 GDP가 5만$가 넘어야 하고 미래에 더 성장한 일본이라면 당연히 한국도 그 이상으로 성장해야 가능한 수준. 물론 1인당 GDP에서는 일본 추월을 어느정도 노려볼 수 있다.
다만 명목 환율 환산시의 수치상 이득과 별개로 일본의 양적완화 상황은 한국에도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엔저로 일본 수출기업들의 실적개선과 이전 잠재성장률보다는 웃도는 성장을 통해 10년 이상 만성적인 디플레이션 상황을 벗어나고 경제 활성화가 가능했다. 다만 현재 2018~2019년 기준으로는 그 효과도 미미해져 일본은 다시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은 양적완화를 못했는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명박 정부 당시 강만수의 "원없이 돈 써봤다"로 대표되는 '''사전 합의 없는 초보적인 양적완화'''를 진행하는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이 환율조작국 지정을 검토할 정도로 이에 진지하게 대응하게 만들었다. 결국 환율조작국 지정은 피할 수 있었으나 대신 한국은 박근혜 정부에서부터 양적완화를 실시할 운신의 폭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하지만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 트럼프 당선으로 인한 불안감 등 국제사회의 여러 악재가 안전자산인 엔화에 대한 선호를 끌어올려 엔화 가치가 환율시장에서 다시 높아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환율 변동폭만큼 일본의 명목 GDP가 다시 증가하였다.
2008년의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수습된 2010년 이후로는, 한국은 연 2~3%대의 경제성장률을 꾸준히 기록하였고, 일본은 연 0~1%대의 경제성장률을 꾸준히 보였다. 양국 다 잠재성장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경제규모 격차가 상당히 요동친 것에 관해서는, 딱히 한국이나 일본 둘 중 한 곳의 경제성장이 흔들린 결과라고 보기 보다는 일본의 강력한 양적완화 정책(아베노믹스)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해석이 옳다.


5.2.2. 1인당 GDP


아래 표는 각각 각국의 물가 및 실질구매력 차이를 반영한 PPP 기준과 명목 달러환율 환산 기준의 1인당 GDP 비교이다.
1인당 GDP(PPP)
연도
한국
일본
한국:일본[25]
1980
2,190$
8,948$
0.24
1985
4,131$
13,685$
0.30
1990
7,548$
19,861$
0.38
1995
12,134$
23,750$
0.50
2000
16,517$
26,955$
0.61
2005
22,734$
31,755$
0.72
2010
29,731$
35,148$
0.85
2011
31,228$
35,775$
0.87
2012
32,386$
37,087$
0.87
2013
33,755$
38,599$
0.87
2014
35,320$
39,502$
0.89
2015
36,501$
40,510$
0.90
2016
37,810$
41,352$
0.91
2017
39,548$
42,942$
0.92
2018
41,415$
44,549$
0.93
2019
44,740$
45,546$
0.98
2020[26]
44,292$
41,637$
1.06
#
1인당 GDP(명목)
연도
한국
일본
한국:일본[27]
1980
1,704$
9,466$
0.18
1985
2,457$
11,580$
0.21
1990
6,516$
25,379$
0.26
1995
12,332$
43,441$
0.28
2000
11,947$
38,535$
0.31
2005
18,639$
37,223$
0.50
2010
22,086$
44,673$
0.49
2015
27,105$
34,568$
0.78
2016
27,608$
38,804$
0.71
2017
29,749$
38,344$
0.78
2018
31,345$
39,305$
0.80
2019
31,431$
40,847$
0.77
2020[28]
30,644$
39,049$
0.78
인구 차이에 따른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제 규모를 제쳐두고, 개별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일본의 성장이 정체된 20여년간 한국이 부지런히 성장하여 2018년에 들어서 한국의 1인당 명목 GDP와 환율과 물가 차이를 반영한 구매력 환산(PPP) GDP의 격차는 상당히 줄어 들었다.
참고로 1995년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43,445$, 1인당 PPP GDP는 23,750$로 동시대의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크게 높은 수준이었다. 95년 일본은 당시 명목 기준 1인당 GDP에서 세계 3위에 달할 정도라 일본보다 위는 스위스나 룩셈부르크같은 소국 외에 없었고, 영국의 2배, 미국 및 프랑스의 1.7배, 독일의 1.5배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반면 1995년의 한국의 경우 막 선진국 단계에 접어들고, 1998년 외환위기를 맞기 전 까지 선진국 도약을 꿈꾸던 시기였다. 이 때 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12,332$, 1인당 PPP GDP는 12,134$ 정도로 각각 일본의 28%, 51%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이 초 엔고 상황이었음을 감안해도 PPP와 명목을 둘 다 고려했을 시 한국의 개개인 개별 경제력은 일본 개개인 개별 경제력의 절반 미만 수준 밖에 못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18년에 들어서는,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39,305$, 1인당 PPP GDP는 44,549$ 정도로 동시대 서유럽 국가들에 비교하면 약간 낮은 정도까지 내려와 경제성장이 더뎠음을 알 수 있다. 2020년 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30,644$, 1인당 PPP GDP는 44,292$#로 각각 일본의 78%, 106% 수준까지 성장했다. 소득과 임금에 대한 부분은 일본/경제의 해당 부분을 참고.
OECD는 2020년 3월 3일, 2017년부터 한국의 구매력 기준 1인당 GDP(PPP)가 일본을 추월했다고 발표했으며, 이후로도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진다고 한다. #[29]
요약하자면, 과거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경제력 차이는 일본이 한국을 상당히 압도하는 수준에 있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은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일본은 장기 침체를 겪으며 양 국간 격차는 상당히 줄었으며, 심지어 한국이 몇몇 부분은 따라잡거나 추월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5.2.3. 엔터테인먼트 산업


사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합법적으로 개방되기 전에도 이미 음성적으론 일본 문화가 꽤 유입되어 있었으나, 1990년대 후반 일본 문화가 양성화되기 시작하고 21세기 들어 여행이 자유로워졌다. 그 결과 '''문화적으로는''' 많이 가까워졌다. 정부에서 일본 문화를 차단하기는 했지만, 워낙 음지에서 받아들여 온 것이 많은 탓에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다.[30]
사실, 일본 여행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도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2005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여행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그러던 것이 2005년 아이치 세계박람회 때 일본 정부가 한시적으로 한국인의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뒤, 이듬해부터 90일 이내의 체류에 대해 무비자 입국을 완전히 허용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 여행이 국내여행처럼 쉬워졌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아예 1960년대 말부터 수입을 했는데, 제작비 탓이 주요 이유 중 하나다. 대표적인 것이 마징가Z, 베르사유의 장미, 우주소년 아톰 등이 있다. 다만 왜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로컬라이징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이 시대 만화를 보던 어른들 중에는 아직도 이 만화들이 국산 만화인 줄 아는 분들도 있다.
만화, 드라마와 예능 프로의 경우 2000년대 이전만 해도 대 놓고 표절을 한 것이 여백이 부족하여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실 한국의 예능프로의 경우는 일본의 만담문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한국의 예능프로와 일본의 예능프로는 그 양상이 비슷할 수 밖에 없다. 당장 한국 예능의 대부라 불리는 이경규도 일본식 만담개그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절 문제는 지금도 가끔씩 보인다.
일본의 넷 우익 사이에서는 한국 지상파 방송에서 '일본 드라마가 아직도 방영될 수 없다는 사실'이 논란거리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잘못된 주장일 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완전히 이루어져 있기에 지상파 방영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일드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인기가 적은 데다가 심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지상파 PD들이 굳이 시간대를 내어서 일본 드라마를 편성할 이유가 없을 뿐이다. 즉 인기가 있으면 방영되는데 인기가 없을 뿐.
반대로 지상파에서 '경쟁력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잘만 방영해온 것을 보면 '일본이라서'가 아니라 '재미가 없어서'인 것을 알 수 있다. 인기 없는 다른 나라 드라마를 수입해서 자국 드라마를 제치고 틀어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하나도 없다. 한류 드라마가 중국, 일본, 동남아 심지어 중동 등에서까지 방영되는 것은 자국의 드라마보다 재밌거나, 자체적으로 고퀄리티의 드라마를 제작할 여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원작 드라마의 스토리나 감정 표현이 한국 시청자 취향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어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부분이 있다. 여왕의 교실이나 노다메 칸타빌레의 경우만 보더라도 원작에서 보이는 과장된 감정 표현, 지나치게 현실적인 데서 오는 거부감으로 주로 한국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하여 방영하였으며, 노부나가 콘체르토와 같은 역사물의 경우, 작중 등장하는 키노시타 토키치로,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한국인이 싫어하는 일본인이 상당히 카리스마 있고 비중 있는 매력적 역할로 등장하는 등,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만화나 드라마를 한국판으로 로컬라이징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는데[31]대표적인 작품들이 바로 하얀거탑올드보이. 이 중 올드보이는 성공적인 실사 영화화로 인해 원작이 재조명된 경우이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드라마 시청자 대부분이 성인 및 중년층이 많은 편인데다가 이들 사이에서는 일본 문화에 호응적인 젊은 층과는 달리 반일정서가 남아 있어서 드라마 주 시청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을 의식하여 방영하지 않는다는 일설도 있는데 위에서 이미 반박되었다. 게다가 한국 배우가 나오는 것과는 달리 일본 배우가 나오는 편인데다가 국내에서는 일본 배우에 대한 인식이 매우 없는 편인데다가 굳이 방영을 해도 드라마 주 시청층인 성인 및 중년층들의 이질감과 반발을 부를 것을 우려하여 방영할 이유가 없다는 일설도 있다. 할리우드 스타까지 나오는 미국 드라마도 거의 방영 안 하는데 굳이 일본 드라마를 편성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일본은 드라마 강국도 아니고.
하지만 2016년 상영한 영화 곡성에서 쿠니무라 준이 출연했는데, 조연이긴 했어도 주연에 버금가는 열연을 펼쳤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쿠니무라 준은 2016년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동시에 그는 한국 내 영화시상식에서 최초로 수상한 외국인 배우 1호라는 기록까지 남겼다.
또한 한국 연예계에 강남, 오타니 료헤이, 후지이 미나 등 상당수의 일본 출신 연예인들이 진출하고, 급기야 요즘 한창 주가를 날리는 아이돌 걸그룹에는 무려 세 명의 일본인 멤버들이 포진해 있을 정도. 그러나 이들은 한국 연예계에서 철저히 한국 문화에 맞추어 활동하기 때문에 다국적 이상의, 일본 문화가 직접 유입된 사례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애니메이션이야 어린애들과 청소년 그리고 젊은이들이 보는 것이었고 개방 이전에는 한국식 분위기로 수정한 후 방영하도록 국내의 별도 심의를 거쳐야만 방영이 허용될 정도였지만 드라마는 실사판인데가 어린층보다는 성인층 특히 중장년층이 본다는 점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
이 심의 문제 때문에 수입된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이 일부가 잘린 채 수입되며, 일본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어 15세 판정을 받는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는 19세 판정을 받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쿠라장의 애완그녀 로 작중 마시로의 '섹스 해 본적 있어?(セックスしたことある?)' 이 한 마디 대사와 작중 마시로의 노출신 때문에 19세 판정을 받았다. 어차피 볼 사람은 보게 되지만, 한국의 심의 체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편 에로망가선생은 15세로 방영했으니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또한 중장년층 대부분이 일본 문화를 자연히 받아들이는 젊은층에 비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편인데다가 개방 이후에도 일본에 대한 적개감이 있어서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방송사의 시청률 하락 문제도 있는데 드라마의 시청률 대부분은 이들 중장년층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한국 드라마 시청률이 중장년층에 달려있었던 것은 90~00년대 이야기이며 최근에는 2~30대 젊은 여성층이 프라임시간대 드라마의 시청률을 주도하는 상황이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중장년층이 주도하는 시청률이 더 높지만, 각 방송사마다 주력으로 런칭하는 프라임 시간대 드라마 시청률은 2~30대 여성층이 주도한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 드라마는 2~30대 한국 여성층이 선호하는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이들 계층의 일본 문화 선호도와는 상관없이 일본 드라마가 한국에서 원작 그대로 방영하여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5.2.4. 식문화 교류


21세기에 들어 한국 요리일본 요리의 접점이 많아지면서, 양국의 요리는 서로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먹거리로는 대동단결.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 요리 상당수가 한국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고, 한국 요리도 매운 요리를 제외하면[32] 일본인 입맛에 잘 맞는 요리가 많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삼겹살삼계탕 등이 알려져있다. 일본 도쿄에는 한국식 삼겹살집이 굉장히 많다. 한국을 방문한 일본 관광객들 중엔 한국 막걸리 맛에 빠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식 양념을 곁들인 양념 치킨 맛에 빠진 일본인들도 많다. 일본 내에서는 일본인 입맛에 맞게 변형된 김치인 '기무치'도 잘 알려져 있다.
앞의 요리들 만큼 일본에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국의 간장게장은 많은 일본인들이 상당히 좋아한다. 특히 간장게장은 일본인들이 대중적으로 좋아하는 들쩍지근한 맛의 간장과 해산물의 요소를 충족한데다 게장에 쌀밥을 비벼먹는 것이 많은 일본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기 때문인 듯하다. 한국의 비빔밥처럼 요리를 쌀밥과 '비벼먹는' 문화는 일본인들이 한국적으로 여기는 요소이다. 카레라이스도, 동(일본식 덮밥. 대표적으로 '규동' 등)도 일본인들은 '비비는' 것이 아닌 곁들여 '떠먹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비빔밥도 인지도가 늘어가고 있다. 일본의 비빔밥은 한국의 비빔밥보다 고추장의 맛이 덜 자극적인게 특징이다. 한국의 부침개, 지짐류 역시 일본의 한국 가정식 가게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의 명란젓과 김 역시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식품 중 하나이다. 명란젓은 본래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요리이고, 한국산 은 일본에 한화(韓貨) 500억원을 훌쩍 넘게 수출 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다만 이 경우들은 "한국에서 수출하는 것", "한국 요리에서 기원한 것"이며 "외국 요리로서 일본인이 즐기는 한국 요리"가 아니므로 식문화 교류에는 해당하나 한식의 확산으로서는 모호하다 할 수 있다.
실제 예시로 일본 인기 아이돌 아라시의 멤버 사쿠라이 쇼는 한 예능프로에서 퀴즈를 맞추고 난 후 상으로 받은 설렁탕과 같이 나온 반찬 깍두기를 먹고는 그 맛에 반해버렸다. 이후 계속 깍두기만 집어먹다가 한 출연자에게 "설렁탕 먹으라고!"라는 핀잔을 듣고는 설렁탕을 먹었다. 물론 설렁탕 맛도 극찬했다. 삼계탕은 일본의 인기 남성 아이돌 그룹 아라시마츠모토 준이 굉장히 좋아하는 요리이다. 일본 예능방송에서 '오골계 삼계탕'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진공팩으로 포장되어 가정에서 즉시로 조리가능하게 레토르트형으로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준이 맛을 보고는 당장 주문하자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화과자사케등을 백화점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며, 일본 맥주 역시 어느 편의점에나 있을만큼 흔하다. 스시우동, 일본식 돈가스, 나베(일본식 전골), 라멘, 일본식 덮밥(규동 등) 가게 등도 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일본 가정식의 경우 오코노미야키오차즈케,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도 만날 수 있다. 일본에서 기원한 왜간장은 21세기 한국 요리에서 곧잘 쓰인다. 일본의 발효식품인 미소(일본식 된장국)와 낫토도 한국에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겨울 길거리 간식 중 빼놓을 수 없는 붕어빵의 원형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며 카스테라, 카레라이스도 일본에서 기원한 것이다. 다만 정확히 카스테라는 포르투갈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변형되어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진 물건이고, 카레 소스는 인도-영국-일본을 거쳐 변형되어 구 일본군의 짬밥(...)으로 쓰이던 것이 기원이다. 카레 소스를 쌀밥에 부어 먹은 것이 카레라이스의 시작이다. 일본식 덮밥요리와 인도식 향신료, 영국식 소스 개념 의 만남인 셈. 여기다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한국식 발효 채소와의 만남이다. 이렇게 보면 카레라이스는 한일교류를 넘어 만국 교류의 대표적 예시인 음식인 셈.
이외에도 간식류는 가다랑어포(가쓰오부시)를 친 타코야키가 잘 알려져 있으며, 모나카 역시 일본 과자이다. 일본식 말차, 다도의 유입은 차 애호가들에 의해 한국의 전통 다례와 만나 고려시대 이후로 위축됐던 한국 차(茶) 문화의 한 흐름이 되었다.
한국에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인기있는 오리온 밀크 카라멜의 경우 일본 모리나가제과사의 기술 제휴를 통해 만들어졌었고, 한국 과자 칸쵸빼빼로의 원류는 일본 과자 팟쿤쵸, 포키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사례를 아는 일부 일본인들은 일본에 대한 한국의 지적재산권 문제로 여기고 있다. 한국이 일본 제품을 배꼈다는 것. 제품화된 과자류의 형태, 맛 등이 비슷한 것을 지적재산권 침해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식품류는 미국의 문파이(Moon pie)와 한국의 초코파이, 미국의 게토레이와 일본의 포카리 스웨트 사례처럼 다른 제품의 특징을 벤치마킹한 경우가 흔하며, 우연히 비슷한 경우도 많다. 때문에 무조건 한국이 일본 과자를 베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일본에 없는 맛을 한국 회사에서 개발해 판매하기도 하기 때문.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쉽게 "표절"따위로 결단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단적으로 초코 막대 과자의 경우, 한국의 빼빼로가 일본 과자 포키를 벤치마킹했다고 여겨지지만 일본의 포키 데이는 한국의 빼빼로 데이를 일본이 벤치마킹 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반한(反韓)감정에 의한 한국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한다. 단순히 특정 한국 요리가 입에 안 맞는 경우라면 해당 음식에 대해서만 거부감을 표시하는게 일반적인 일이다. 일부 일본인들의 한국음식에 대한 거부감, 경계심은 한국 음식의 맛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 반한 감정에 기인한 것이므로 문제가 된다.
"사쿠라장의 애완 그녀"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삼계탕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우익의 큰 반발을 샀고, 2017년에는 쇼기(일본식 장기 게임) 기사 후지이 소타가 대국 중 점심에 돼지김치우동을 먹었다는 이유로 일본내에서 '자이니치'냐는 극우들의 어처구니없는 비방(誹謗)을 들었다. 참고로 자이니치라는 것은 재일동포, 즉 재일조선인 내지는 재일한국인이라는 뜻으로 본래 비하의 의미는 없으나 저렇게 줄여 사용하면 일본 내에서 차별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일본은 2010년 이후 급증하는 극우화 분위기 속에 한국 음식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참고할 만한 공신력있는 통계가 없으므로 한국 음식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완전히 단언할 수는 없다.
당연히, 위와 같은 사례의 경우는 '''"햄버거 먹으면 미국 사람, 파스타 먹으면 이탈리아 사람"'''과 같은 엉터리 논리와 다를게 없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설령 반한정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도, 정상적인 일본인들은 당연히 한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이상한 비방을 하진 않는다. 한식의 인기와 인지도 자체는 일본에서 증가하고 있으나 반한 감정으로 인해 한식의 위상 상승에 대한 견제나 반감도 동시에 늘어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도 반일(反日)감정 때문에 일식의 확산을 경계하는 경우가 소수 있다. '일식의 확산'과 '한류'를 고찰한 연관 기사, 누군가가 삼일절에 홍대 앞 일식집 테러 기사, '''모르고''' 명란젓을 일본 기원 요리처럼 설명했다가 한국 악플러들과 극우들의 심각한 악플 공격을 받은 친한(親韓) 일본인
다만 두번째 삼일절 일식집 뉴스는 많은 이들의 심증을 배경으로 주목된 사건으로, '''정황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음'''을 명시하자. 그러나 심증대로 저 사건이 삼일절의 애국심을 일식에 대한 극단적 배타성으로 드러낸 것이라면 굉장히 잘못된 일이다. 삼일절이 범민족적 '''평화''' 독립운동의 의의를 지녔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당장 일식집을 운영하는 멀쩡한 한국인 사업가, 요리사들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사건을 저지른 사람의 애국심은 참으로 비뚤어진 애국심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일식집에서 스시 같은 일본 요리를 먹었다는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식집에서 스시를 먹으면 고급 요리를 먹는다는 인식이 있다.
이런 인식은 일식이 일찍이 세계화,고급화가 성공한데 비해 한식이 상대적으로 뒤늦게 세계화되기 시작한 점도 한 몫 할 것이다. 객관적인 음식점의 수를 봐도 한국 내 일식집의 수가 일본 내 한식집의 수보다 많다. 그리고 한국, 일본 현지인들의 인식으로도 한국에서 일식의 위상이 일본에서 한식의 위상보다 더 큰게 사실이다. 한국인으로서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처럼 한국이 반일감정이 심해도 일본 요리에 대한 배타성, 혐일 시위 또는 혐일 서적이 대두돼 국제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본에서 일어나는 한국 요리에 대한 배타성, 혐한 서적과 혐한 시위등의 대두는 한국과 굉장히 대조적이다. 이렇게 식문화 교류에서도 드러나는 양국의 차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학적 분석이 필요할 듯하다.
한국에서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라는 속담에서 드러나듯이 식사를 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먹거리에 관한 참견을 보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반일감정이 있더라도 일식 취향에 대해 비난을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일본도 '메이와쿠(미혹)'라 하여 남에게 폐를 끼치는걸 극도로 꺼리는경향이 있는데, 이는 남이 선호하는 요리에 대해 참견하는 것도 폐를 끼치는 것이므로 꺼릴 것이라고 예상된다고 생각하면, 반감을 지닌 상대국에게 지나친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개인들의 사례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5.2.5. 대일 무역적자 추이


[image]
연도
대일 무역적자
2010년
361억 2,000만 달러
2011년
286억 4,000만 달러
2012년
255억 7,000만 달러
2013년
253억 6,700만 달러
2014년
215억 3,000만 달러
2015년
202억 8,000만 달러
2016년
231억 1,000만 달러
2017년
283억 달러
2018년
240억 7,500만 달러

다만 이는 가짜뉴스의 성격이 강한데 그 이유가 설명되어있다.

5.2.6. 대일 전체 수출의존도 추이


연도
일본에 대한 수출의존도
2012년
7.1%
2013년
6.2%
2014년 상반기
5.7%

5.2.7. 대일 전체 수입의존도 추이


연도
일본에 대한 수입의존도
2009년
15.3%
2010년
15.1%
2011년
13.0%
2012년
12.4%
2013년
11.6%
2014년
10.2%

5.2.8.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 추이


2013년 기준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 추이 (단위: %)[33]
연도
일본에 대한 부품 수입의존도
2001년
28.1%
2002년
28.1%
2003년
'''28.4%'''
2004년
27.5%
2005년
27.1%
2006년
25.6%
2007년
24.4%
2008년
23.3%
2009년
'''25.3%'''
2010년
25.2%
2011년
23.6%
2012년
23.0%
2013년
20.8%
2014년
18.2%
2015년
17.2%
2016년
17.8%
2017년
17.3%
2018년
16.3%
소재, 부품은 대일무역 수지 적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만,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 수입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데 비해, 부품 국산화의 진척과 지진으로 인한 공급 불안정 우려로 수입선을 유럽 등 다른 곳으로 돌린 영향을 받고 있다. 관련기사 2014년에도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11년만에 최저를 기록하면서 특히 소재, 부품 분야에서 대일 무역적자액은 2012년 243억달러 적자에서 2013년 205억달러, 2014년 163억달러로 감소하고 있다. 2015년 1분기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는 17.1%로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2016년 상반기 대일 부품 수입의존도는 17.1%였으나 2016년 전체는 17.8%를 기록하였다. 2017년은 17.3%으로 다시 감소했다. 2018년은 16.3%으로 역대 최저를 갱신했다.

5.2.9. 대일 소재부품 적자 추이


대일 소재부품 적자 추이 (단위: 1억 달러)[34]
연도
부품 무역적자
2001년
105
2002년
118
2003년
139
2004년
159
2005년
'''161'''
2006년
156
2007년
187
2008년
'''209'''
2009년
201
2010년
'''243'''
2011년
228
2012년
222
2013년
205
2014년
163
2015년
142
2016년
146
2017년
160
2018년
151

5.2.10. 무역 분쟁


2019년 일본 아베 정부에 의한 대 한국 경제 제제가 실행되어서 큰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한일 무역 분쟁 참조.

5.3. 군사


[image]
[image]
2013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초급장교 교류행사. 한국군주일미군, 자위대의 위관급 장교들이 참석했다.
일반 한국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정부차원에서는 군사적으로 간접적인 그리고 실질적인 교류가 오고가고 있다. 1950년대부터 함께 미국을 필두로 한 반공전선을 수행했으며, 자위대의 출범에는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로 파병된 주일미군의 공백이 컸다. 6.25 전쟁 이후 53년을 방위청으로 지낸 방위성이 성급으로 격상되는데는 북한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교류의 대부분은 미국의 반강제적인 압력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당장 우리나라가, 단독으로 일본과 대규모 군사교류를 갖는 경우는 전무하며 대부분 미국의 요청(및 좌판을 깔아 주선함)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image]
김용환 인천해역방어사령관에게 경례하는 해상자위대원들. 해상자위대 소속의 연습함대가 2007년에 인천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다.
[image]
2007년에 방한했을 당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분향하는 일본 사이토 다카시 통합막료장.
연합작전은 하지 않지만 위관이나 영관, 사관생도 등의 인적교류는 이미 빈번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의 후보생들이나 따라온 자위관들이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기도 했는데, 현충원은 일본군과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야스쿠니 신사는 절대 무리지만 일본에서 순직자 대체 추도시설이 생길 경우, 한국의 정부 관계자가 참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미국은 밀고 있다.
당의 군사위원회가 정부의 국방기능을 앞서는 북한이나 중국과 달리, 한국이나 일본은 미국의 군사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있다. 합참 등이 그렇다. 정복도 비슷한 편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북한이나 중국 등에 대한 견제 노선으로 한국군자위대가 손을 잡자는 주장이 있다. 다만, 과거의 역사적인 문제나 독도같은 영토분쟁의 문제 때문에 앞으로의 일본 정부가 모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최근 한중관계가 밀월관계라고 불릴 정도로 급진적으로 우호적인 관계가 되어 가고 있는 반면에, 일본과는 서로 못죽여서 안달난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보니 한국군과 자위대가 손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드논란 이후에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사실 지리적으로 볼때 순망치한의 관계라 아무리 한일관계가 악화되도 그건 국민여론만 그렇고 군사적 교류는 지속되고 있었다.
일단, 중국이 북한에 끼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고, 거기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얻는 경제적 이익이 굉장히 큰 우리나라가 중국을 상대로 일본과 손을 잡을지는 심히 미지수다. 당장, 최근 일본이 반대하고 난리친 안중근 기념관 설립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이 연대체제를 구축했다지만, 이건 그냥 일본이 막장이었던 것이고.
현안을 덮어두고 군사적인 부분에서 이익만 챙기자는 식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도 한일관계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당면한 적국인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데 자국의 동맹국들인 주요 파트너인 한국일본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으니까 말이다. 2013년 11월 주일대사로 부임하는 존 F. 케네디의 딸 캐럴라인 케네디의 부임 행사에서 미 국무장관존 케리는 '''"제발 저 두 국가 좀 어떻게 해봐라."'''고 이례적으로 거론을 했다. 보통은 덕담 수준만 오가는 자리다.관련기사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미국의 대아시아 외교 실패가 원인이다. 미국은 한일 양국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라는 점을 간과한 데다가, 아직까지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는 한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가까운 역사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한일 양국에서 역사 갈등 문제가 터졌을 때, 미국은 애매한 반응만을 보여주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미국이 우리 편을 들어주는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아베 신조 정권의 탄생을 계기로 더욱 막나가는 도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저지른 각종 만행들과, 위안부, 독도문제는 단순히 '일본이 왜곡하는 역사를 재조정' 하는 문제가 아닌, 양국의 국가관계를 재조정하고, 나아가 한국의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은 결코 저 문제들에 대해서 양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시절 정부차원에서 추진하던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 사실상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2014년 12월에 결국 미국의 중재로 북한 관련 정보에 대해서 양국이 미국에 정보를 요청하면 미국이 중간에서 나눠주는 식으로 공유하는 한미일 정보공유 약정을 맺었다. 그런데 이 약정도 이명박 정권 때 정부 주도로 단독 처리하려다가 들켜서 결국 '매국노냐?'는 욕을 먹은 것처럼 국방부가 단독으로 서명한 뒤에 국회에 보고해서 국회 국방위와 네티즌들에게 욕을 무수히 먹었다. #
박근혜 정권 시절 위안부 협상 체결 이후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 이루어졌으며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간의 군사협력이 강화되는 추세이다. 박근혜 정권은 2015년까지만 친중일변도 였고 심지어 중국 열병식까지 참가했지만 북한의 핵 실험 사태가 터지자 후 중국에게 SOS을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은 말로만 유감이다 하고 북한을 방임하자 미국과 사드배치 협상을 시작했으며 친중에서 친미로 급격하게 선회했다. 한국,미국,일본관계에서 완전히 수세에 몰려 버린 박근혜 정권은 미국의 압력과 중국의 위협에 결국 근 1년 만에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논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처리했으며 국민의 반발과 중국의 반발은 덤이였다. 이미 중국과는 척을 졌고 미국에게는 진정성을 의심을 받는 상태에서 또 다시 사드 배치를 무효화한다던가 이러면 정말 중국에겐 얕보이게 되며 호구처럼 볼것이다.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체결 이후 일본은 한술 더떠서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까지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까지 체결하면 한국군이 일본본토에, 일본 자위대가 한국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중국의 북한 방임속에 한-미-일간의 3각 연대는 국민감정과 다르게 공고해지는 중이다.
한국 정부에서 제주도 국제 관함식에서 욱일기를 자제해달라고 하자 해상자위대는 차라리 불참하겠다, 예의가 없다며 그냥 달고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MBC, SBS 그러나 이에 대응해 한국측에서 좌승함을 독도함으로 변경하자 불참을 선언했다. 자세한 내용은 제주 국제관함식 자위대 욱일기 논란 참조.
2018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두달간 4회에 걸쳐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이 일어났다.

5.3.1. 한미일 삼각동맹


마크 리퍼트 대사는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를 제안하였으며, 서서히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해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사실 중국의 팽창정책과 미국의 국방 예산 삭감이 원인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미국 중심의 동맹체제에 공동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미국을 중간에 징검다리로 놓고 있는 군사우호적 관계이다. 미국의 계획은 기존의 한미+미일동맹에 한일동맹까지 완성하여 삼각동맹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동맹체제를 더 견고하게 만들고 나아가 비용도 절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미국한국주한미군을 배치하고 일본주일미군을 배치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안보에 필수적 존재이며, 그 점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가장 바라고 있다. 그런 미국의 의견을 한국과 일본은 무시할 수 없다. 2016년엔 한국은 위안부 협상과 사드배치를 했다. 한국은 국내 여론 반발과 중국의 반발로 홍역을 겪었고 일본 또한 지지층인 극우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두 국가 모두 강행했다.
다만 일본의 극우층이 반발한 이유는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일본 외환보유고의 절반 이상인 6억 달러를 유/무상 차관형식을 통해 지급하였는데, 이번 위안부 협상을 통해 10억 엔의 위로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그때 돈 줬는데 왜 또 주냐'는 반응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이라는 외교상 가장 강력한 구속어구를 달아 한국과의 외교에서 위안부 문제는 '''완전히 종결될 것이다'''는 설득을 통해 이러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볼때 국민 감정은 나빠도 국가간의 관계는 한층 더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사드 배치에 중국은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일본은 환영을 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중국과 러시아, 그와 반대로 환영하는 일본
얼마전 한국과 일본은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일본은 한술 더떠서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까지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까지 체결하면 한국에 일본 자위대가 상륙 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한일정보보호협정 체결에 일본 군국주의 확대를 우려하는 중국, 한일군사협정으로 한중관계 냉각 우려
한일관계가 국민감정은 좋지 못하지만, 최근 위협적 행보를 하는 북한, 중국에 의해 정치, 군사적 협력은 가속화 되어가고있다. 그리고 한국은 중국에게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체결 의도를 보였지만 중국은 침묵 중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다시 미국 편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야 3당에서는 박근혜 정부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논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해서 모두 비판적이지만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쉽게 변하긴 힘들다. 한 번 합의하기로 결정한 걸 파기한다는 건 국제 관계에서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이다. 외교는 국민 감정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논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전부 다 미국이 압력을 넣어서 달성시킨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아베 정권 또한 위안부 합의를 하고나서 한국에게 10억엔을 뜯겼다는 비방도 듣는 중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중국의 묵인 하에 지금도 계속 되는 중이다. 사드배치 논란 때 중국은 역시 북한의 우방이란 걸 한국은 체감했고 갈수록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할것인데 미국의 의중이 들어간 저런 조약들을 미운털이 박힌 한국이 정권 바뀐다고 손바닥 뒤집듯이 파기하는 건 어렵다고 본다. '''황교안 권한대행은 “이미 미국과 국제적으로 사드 배치와 관련한 약속이 있고, 우리 필요에 의해서 사드를 배치하고 미국의 제안을 우리가 받아들인 상태에서 바꾸기는 쉽지 않다”고 발언''', '''황교안 "사드배치, 유예해도 중국 입장 바뀌지 않아"…내년 배치 입장 고수''', '''황교안 "사드 유예 안 돼...신속 배치해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대해서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용감한 결단'''이라고 했고 연합뉴스
위안부 합의에대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가 '''정의 , 용감한 결정'''이라고 했었다 경향신문
2017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또한 마찬가지로 센카쿠 열도까지 보호한다고 천명했다. 트럼프·아베 정상회담…“센카쿠 열도 안보 대상” 중국 견제
박근혜 정권은 2015년까지 친중일변도 였고 심지어 중국 열병식 까지 참가했지만 북한의 핵 실험 사태가 터지자 후 중국에게 SOS을 요청했다. 하지만 중국은 말로만 유감이다 하고 북한을 방임하자 미국과 사드배치 협상을 시작했으며 친중에서 친미로 급격하게 선회했다. 중국은 개거품을 물며 발광했고 미국 또한 미중사이 간을 본 한국을 섭섭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박근혜 중국 열병식 참석에 대한 서구권의 반응 박근혜 중국 열병식 참석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반응
이명박 정권 시절만 하더라도 정권 말기에 천황 사죄 발언으로 한일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었지만 미국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지나친 친중정책을 펼쳤고 그로 인해 미국은 일본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게 되었으며, 2016년 5월 오바마의 히로시마 원폭지 방문으로 이어진다.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소식에 불편한 한국, 일본 아베 총리를 박근혜 대통령보다 우선,하지만 중국견제 위해 한일 양국을 화해하도록 강요, 미-일 동맹이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하며,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이라는 미국 국방부 카터 장관의 발언 미국-일본은 가장 긴밀한 친구라는 미국 태평양 군사령관 해리스의 발언, 오바마의 히로시마 원폭지 방문 및 피폭자들 위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 헌화는 하지않음, 최근 한술 더 떠 아베가 진주만 방문과 더불어 오바마의 미일 동맹 칭송으로 화답
2016년 12월 아베 총리가 진주만 방문시 오바마 대통령은 "미·일 관계는 세계 평화의 주춧돌이며 두 나라의 동맹은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고 선언,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 자격으로 미/일 정상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미국 노병은 "아베는 최고다. 사죄할 필요 없다." 라고 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아베의 진주만 방문은 미국 참전 용사 및 미국 대중들의 시각에서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트럼프 “美·日 안보동맹 확고, 트럼프 “미국은 100% 일본과 함께한다”, 펜스 부통령 또한 펜스 美부통령 "미국은 100% 일본과 함께 할 것"
한국,미국,일본관계에서 완전히 수세에 몰려버린 박근혜 정권은 결국 근 1년 만에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논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처리했으며 여론의 반대를 무릎쓰고 강행하는 이유 역시 미일관계가 한국이 예상하는 범위 이상으로 격상되고 있어 자칫하면 한미일이 동등한 관계로서 3각외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간에만 긴밀한 외교가 이루어지고 한국은 참여하지 못하고 미/일간 협의 후 결과에 대한 통보만 받는 들러리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미 중국과는 척을 졌고 미국에게는 진정성을 의심을 받는 상태에서 또 다시 사드 배치를 무효화한다던가 이러면 정말 중국에겐 얕보이게 되며 호구처럼 볼것이다. 그리고 미국에겐 믿을 수 없는 국가로 취급당할 것이다. 현재 쟁점이 되는 외교 사안은 크게 3가지 사안으로,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 그리고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문제이다.
그 중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은 피해자인 위안부 생존자분들도 원하지 않고, 대내외적, 특히 같은 서방 국가에서도 비판점이 나왔던 만큼, 효력을 정지해도 여기까지는 미국이 수긍할 수도 있다. 반면 나머지 두 사안은 이미 대중국 경계선을 펼치고 한미일 공조체계를 굳히려는 미국의 의중이 반영되었고, 이미 체결된 사안인 만큼 차기 정부에서 두 사안의 효력을 정지시켜 버리면, 그만큼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미 한국은 박근혜 정부 초기의 친중정책으로 인해 미국과 관계가 다소 틀어져 있다가 북핵문제가 터지고 중국과 관계가 다소 틀어지면서 이를 통해 미국과 관계 개선을 도모한 상황이다.
'''전 주한 미대사가 사드 배치 철회시 한미 동맹 약화 언급''', '''미국 백악관에서 한국 사드 배치는 변동 없다고 단언''', 미 국방부 대변인의 사드 배치는 계속되며 최대한 빨리 배치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계속된다”는 발언,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한 미국의 반응, '''한일 위안부 협상이 중대한 협상이라는 미국''', 한일 위안부 협상을 대폭 환영하는 오바마, '''미국의 압력이 들어간 위안부 협상''' 美 하원의원, '한미일 3각동맹 중요성 재확인' 결의안 발의"
미국과 중국을 자꾸 언급하는건 한일관계는 미국과 중국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야권(민주당계)쪽에서도 안희정 도지사 매일경제 인터뷰 , 안철수 의원 연합뉴스 인터뷰중에서 언급 , 문재인 # 전 대표도 취소가 어려운 건 인정했다.
하지만 안희정 도지사는 이걸로 한일관계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했고 이재명 시장은 '''일본에 대해서 적성국가'''라고 하기도 했었다.연합뉴스 일본은 군사적 적성국 그리고 안희정 도지사는 한일관계에대해서 투트랙 전략을 허락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뉴스 영상
'''사드 재배치 논의를 한다며 2번씩이나 중국으로 가는 민주당 의원들, 중 외교부 간부 “한국 사드 배치땐 단교 버금가는 조치”, 中, 사드 보복 사실상 시인…, 中 사드보복에 '대응' 선포한 정부… 한중관계 '인내의 끝'?, 김장수 주중 대사 "사드 배치는 변수 아닌 상수"
위안부 합의가 된지 1년째에도 야권 대선주자들은 파기,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긴하다. # 외교 관계는 유동적이기 때문에 합의는 물론이고 그보다 중요도가 높은 조약 또한 파기되거나 재검토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기에 이는 나중에 가봐야지 알 일.
일본측에서는 이를 두고 한국이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본 관련 이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흔들기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에서 유화적인 접근을 포기한 이유라고 말하며, 한국측의 주장은 일본이 한국을 제대로 된 외교 객체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유화적인 단계가 한국측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강압적이고 표리부동한 모습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일본이 주요 외교 상대국인 중국과 미국에 대해 여당인 자민당과 야당인 민진당 모두 비슷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입장만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는 지지세력의 성향 차이에서 오는 문제이며 그럼에도 최근까진 전향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의 경우 중국과 미국에 대한 외교적 노선이 여당과 야당 모두 완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대통령이 어느 당 소속이었냐에 따라 외교 노선과 방향이 큰 폭으로 변하는 등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에서만큼은 한국의 야당과 여당 모두 표면적으로는 중립적 스탠스를 보여주지만 전향적인 방향으로는 '''결코 가지 않는''' 형태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독도를 다케시마''', '''동해를 평화의 바다'''라고 발언하여 당시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받은 바 있다. 물론 사실은 2010년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 이후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일본측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에 대해 언급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 라고 발언한 말 실수일 뿐이며, '평화의 바다' 역시 2006년 아베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라고 가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단순한 의견 전달에 그친 문제였으며 이를 보도한 언론사 역시 세계일보 단 한 군데 뿐이라 신뢰성 면에서 문제가 많은 기사일 뿐이다. 다시 말해 단순한 말 실수와 확인되지 않은 신뢰성 낮은 기사였음에도 그것이 일본과 관계된 이슈였기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진위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정치적 공격에 직면해야 했다.
'''일본이 최고 동맹국이고 한국은 하나의 중요한 파트너로 차등화 한다는 미국 국무부 장관 렉스 틸러슨''' 세계일보, 그 후에 아니라는 부인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립서비스일 경우도 충분하다. 원래 외교적 언사를 직접적으로 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걸 생각해보자.
물론 몇 년 사이 미일간의 행보는 한미관계보다 더 밀착해왔던게 사실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 친중외교의 여파로 미일관계가 한미관계보다 한층 더 돈독한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5년까지 꿈쩍도 안하던 한국이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 위안부 협상이나, 한일군사정보호협정을 급속도로 체결했는데 이러한 조약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드러났다. 미국이 이러한 조약들을 한국에게 반강제한 것을 볼때 당시 오바마 행정부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더 중시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아베-바이든 통화, 위안부 합의 美 압력 확인'''', ''''속전속결' 한·일 군사협정…미국 '입김'
2017년 3월부터 북한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 급부상하면서 미일 간의 공조가 긴밀하다는 점을 국제 사회에 부각시켰다.트럼프, 아베와 35분 통화…"北 도발 대응 모든 선택지 검토" 심지어 (아무리 탄핵정국인점을 감안해도) '''한국은 한반도 문제 당사자임에도 전화통화에서조차 배제되는 모습이다.'''트럼프, 日아베와만 통화…한국은 왜 뺐을까?
2017년 10월 중국이 사드 보복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한국이 3불 약속, 1. 사드 추가배치 관련해서 우리 정부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 2.우리 정부는 '미국의 MD체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정부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 3. 한미일 삼국간 안보협력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다란 조건을 제시해 # 당분간 한미일 3각 동맹은 힘들어졌다.
2017년 9월 문재인 현 대통령은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지만 일본은 동맹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한·미·일 정상 업무오찬에서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에 대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2018년에 와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급격히 완화되고 화해무드가 조성됨에 따라, 정말로 한일동맹의 필요성은 더욱 옅어졌고, 거꾸로 일본이 소외되는 모습도 나오고 있다. 자세한 건 재팬 패싱 문서 참고.
한편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이 일어난 뒤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 관련에서도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을 비롯한 한-일 간 군사공조에 금이 가고 있는 형편이다. 참고로 삼국간 동맹이라고 볼 수 있는 한미일동맹은 실존하지 않는다. 한미동맹, 미일동맹을 묶어서 미국을 축으로 한-미-일 동맹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자세한 건 한미일관계 문서 참고.
표면상 일본이 한국에 "군사 물자"라면서 수출 통제를 걸고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원인이 한국에 대한 안보 관련 불신 문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 심지어 '''사린가스'''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이는 한국을 '''옴진리교에 비교하는''' 단어 선택이다. #
청와대에서는 지소미아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이었는데, 결국 2019년 8월 22일 협정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청와대 측이 밝혔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2019년을 끝으로 이 협정은 종료되는데, 2020년 8월 24일자로 정상가동되어 재연장되었다.

5.4. 여론, 언론


한국인들 입장에선 임진왜란, 정유재란, 일제강점기 등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은 좋지 못하다. 다만 경제성장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일본의 성공신화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국민감정상 대외적으로 내비치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 얘기만 나오면 견해는 둘로 갈라지며, 일본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해도 칭찬은 커녕 야단만 맞았다. 그래서인지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민족감정과 과거사 콤플렉스에 집착해 일본을 '일본'으로 보지 말고 지천에 널린 외국 중의 하나로서 객관적으로 봐야 된다는 견해를 펴기도 했다.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이 표출되기 쉬운 인터넷으로는 앙숙이지만, 인터넷을 벗어나 오프라인에서 한국인, 일본인과 사람 대 사람으로 섞어보면 역시 같은 문화권의 이웃 나라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외국인에 비해 쉽게 친해지고 서로 잘 지내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소리지만,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숨기는데 급급해하고 재특회, 넷우익 같은 정신 나간 혐한 세력들이 활개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소의 성향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냥 자기 삶을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또한 일본인들 중에는 한류 문화를 좋아하면서 한국에 대체로 호감을 가지게 되는 사람도 많고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일본의 서브컬처 문화를 접하면서 일본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사실 사람 사는 곳이 생각보다 다 비슷비슷하듯이 사람들의 생각도 만나보면 의외로 비슷비슷하다. 한일문화 교류가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프로듀스 48이 성공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흥행한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이 모이더라도 웬만한 정치병 환자들이 모인게 아니라면 비교적 친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잘 지내기 때문이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사실 한국인이 사는 생활이나 일본인이 하는 생활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서 쉽게 구분이 불가능하다. 단지 일본이 한국보다 더 유명하니까, 한국 사람한테도 일본어로 먼저 인사하는 것일 뿐이다. 유학생이나 관광객에게 사건 사고가 나면 일본인으로 뉴스가 나갔다가 한국인으로 정정되는 경우도 흔하고, 드물게 한국인으로 뉴스가 나갔다가 일본인으로 정정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태권도가 초기에 외국에서 보급되었을 때도 가라데 도장인 줄 잘못 알고 왔다거나 현대나 대우와 같은 자동차나 삼성과 LG와 같은 전자제품도 현지인들이 이름 없는 일본 기업의 제품인 줄 잘못 알고 사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는 일화도 흔하다.
물론, 양국 간의 기본적인 감정이 안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각국의 왜곡된 역사교육 등으로 인해서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거나 그로 인해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국가 간의 감정을 굳이 개인과 개인 간의 인간관계에 끌어들여야 할 이유는 없으며, '''오해가 있다면''' 무작정 다투거나 반발을 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대화와 이해를 통해서 서로를 알고 바로잡는 게 최선'''이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민감한 부분'은 애당초 서로 안 건드리고 지나가는 게 편하긴 하다. 애초에 한국인과 일본인 관계에서 부정적인 얘기를 양해없이 꺼내는 것은 서로 간에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일본의 장년, 노년층 중에는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를 '''비슷하게 보며 동질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라고 하겠지만, 일제강점기라고 해서 일본인들이 다 잘 살았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대다수의 일본인들 역시 '''군부독재 체제'''하에서 '''고생'''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군부독재 체제하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우환을 표현한 대표적 작품으로 만화 맨발의 겐이 있다. 읽어보면 좋은 책이고, 권장도서이기도 하니 꼭 읽어보자. 당시의 일본이 얼마나 단단히 맛이 가버린 상태였는지에 대해서 한국에서 만든 작품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세하고 신랄하게 그려져 있다.
일본의 우경화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와 일본의 국채 문제가 복합적으로 터지고 그 결과 일본이 장기 디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침체되는 동시에 한국이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을 마무리하고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우경화는 커녕 전범들을 다 잡아 족쳐야된다느니, 기성세대들의 전쟁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전범들을 상당히 혐오했다. 당연히 이 당시의 교과서에는 일본의 근현대사가 지금에 비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나오는 편이었으며, 역사왜곡 역시 상당히 적었다.
일본의 근대화 이후의 정치체제는 명목상 민주주의 체제였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장식이었을 뿐, 치안유지법 때문에 사실상 귀족 중심의 독재와 지역연고 코드인사로 굴러갔다. 여기서 치안유지법이란 일본판 국가보안법으로 애초에 이 쪽이 원조다. 한마디로 일본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위해서 만든 법이다. 나중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들과 지식인들까지 이 법으로 탄압했다
하지만 이는 촌숙(村塾,손슈쿠) 또는 정경숙(政經塾, 사람 이름 아니다!!. 정치경제학원이란 뜻)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독특한 정치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의 정치체제는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구에서 급하게 민주주의를 들여온데다가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이 합쳐져 정치인 조차 세습계층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서 일본에서는 혈연이나 학연으로 지역구를 물려받는 정치인의 비율이 타국에 비해서 높은 편이다.
얼마 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는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松下村塾,쇼카손슈쿠)처럼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정치학교'를 세워 정치 지망생을 모집하고 그 중 될성싶은 문하생을 자신의 정치 파벌에 소속시켜 성장시켜주는 문화이다. 물론 정치 지망생 외에도 정치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일정 수강료를 내고 세미나나 정치인의 정치 강연을 들을 수 있다. 최근 도쿄 도지사로 당선된 고이케 유리코가 자신의 정치학원인 '희망의 학원'을 세워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 학원을 만든다는 것은 본격적인 거물급 정치인으로 나가겠다는 일종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의 친박, 친문 처럼 자신만의 정치파벌을 만들고 자신이 그 중심에 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통해 더욱더 막장으로 흘러갔다. 이 당시의 일본은 2.26 사태 등으로 군부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한 상황이었으며, 1900년대부터 미쳐돌아가던 군부의 병폐들이 정계를 넘어 민간사회로까지 퍼져나가던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전쟁을 일으켜서 식민지를 수탈한 돈은 모두 높으신 분들과 재벌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인구 급증과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인해 일본 국민의 대다수의 생활수준은 거의 나아지지 않고 여전히 어렵기만 했다. 서구 열강들이 미리 겪었던 산업혁명의 부작용들이 일본에도 발생한 것이지만, 시민혁명을 겪어보았던 노동자들이 차티스트 운동 등으로 국가에 시위하던 서구 열강과 달리 일본은 이 당시 아직까지 계층의식이 남아있었고, 국가에 대항하는 것을 비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어 반역자 수준으로 바라보며 탄압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로 인해 대다수 서민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서민들은 한반도, 만주, 몽골, 중국 등지의 개척단에 반강제로 끌려나갔다. 지역마다 인원을 할당해서 할당된 인원을 채우지 못할 경우, 세금 감면을 안해주거나 자치단체 보조금을 깎았다. 이때 떡밥으로 내건 것이 세금 감면, 중국인, 조선인에게서 빼앗은 농토 지원, 군 면제였다. 하지만,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에는 농토 지원 그런거 없었고, 개척단이고 뭐고 얄짤없이 다 징집해갔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막장 상관으로 유명한 일본군 장성들 휘하에서 강제징집된 젊은이들이 헛되이 목숨을 버리다가 결국 패망하게 된다. 패전 이후 식민지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이 소련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중국, 북한, 한국 등에 강제로 남게 되어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국교 정상화가 빨라서 60년대, 중국은 국교 정상화가 된 80년대에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있었지만, 북한에 있는 잔류 일본인들은 생사조차도 불분명해졌다. 미군의 폭격으로 본토는 폐허가 되었으며, 1945년 이후에는 GHQ 군정 하에서 1958년 전쟁 이전의 경제수준으로 회복 선언을 할 때까지 반쯤 식민지 상태를 13년 정도 경험을 한다.
물론 당시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생활수준은 식민지였던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생활수준보다야 훨씬 나았고, 생활이 어려워서 개척을 하러 갔다는 농토 역시 식민지 주민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서 사용한 것이다. 식민지였던 한반도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일본인 세대들은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식민지 한반도에서 부유하게 살며 재산을 모았으나 일본 패망 이후 일본으로 쫓겨갈 때 하나도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빈털터리로 다시 시작해야 했는데 일본에서 차별에 시달렸다고 한다. 보통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규슈 쪽에 정착했는데, 이들을 히키아게샤 라고 한다.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도움이 매우 컸음에도 자신들은 맨주먹으로 조선에 와서 자수성가했다고 느끼고 있으며, 지금도 본인 재산을 완전히 몰수를 당하고 쫓겨난 생각을 하면 이를 간다고 한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모은 재산의 당위성은 둘째치더라도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한 주체'는 '남한'의 경우 '주한미군'이니 아이러니할 따름. 당시에는 '''한국에 귀화를 시도'''하려는 일본인 대지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군정의 반응은 쿨하게 '''"No. 니네 일본은 패전국이고 우리 미국은 승전국이니까 니네 재산은 전부 우리 미군정이 압수합니다. 절대로 한푼도 가져갈 수 없으니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조선에서 꺼지세요."'''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사실, 히키아게샤들도 하루 빨리 조선을 떠나지 않으면 성난 조선의 군중들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해 두들겨 맞고 죽어나갈 판이었다. 실제로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이후, 복수심에 눈이 멀어버린 소련군은 베를린을 점령한 이후부터 독일 남성들은 머리채를 잡혀서 폭행한 뒤 총으로 살해당했으며, 독일 여성들도 8살짜리밖에 안되는 나이어린 여자아이나 80세 이상의 노인들까지 닥치는대로 붙잡아서 강간을 하고 살해까지 저지르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이처럼 패전국의 국민들은 잔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특히 일제강점기동안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매우 강했다. 미군정은 이렇게 몰수한 재산을 신한공사란 형식을 통해 한국에 돌려줬고, 이는 농지 개혁 등의 밑바탕이 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도 읽어볼만하다.
일본 국민들도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았으며, 한국인이 듣기에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만 들리는 '우리도 전쟁 피해자'라는 일본인의 항변은 이러한 일에서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재벌들의 기초는 일본이 패망 이후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남겨두고 간 공장을 불하받아 설립한 '적산기업'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스스로 피해자 운운하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제대로 반대하기는 커녕 전쟁으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좀 얻어먹으려고 침략 전쟁을 옹호한 사람들이 당시 일본 국민이므로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피해자 행세 문서 참고.
심지어 2010년대에 와서도 반성은 커녕 일제가 저지른 흑역사를 미화하고 얼버무리며 피해자인 척하는 몰지각한 '''일본 정부와 혐한 세력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개개인이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야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 이끄는 정부가 이런 몰상식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대놓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0년 ~ 2011년 정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인 60% 정도가 한국을 좋아하고 있었으며 한국이 세계에 미칠 영향이 부정적인가에 대한 대답도 당시 설문에 응한 나라 중 제일 최저치인 9%였다. 거기다, '신뢰할 수 있는 나라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대한 설문에 한국이 '자국민인 일본인보다 더 신뢰 가능하다'고 답한 사람이 대다수였으며 신뢰 못할 나라 1위는 중국이었다. 물론, 스포츠 경기 때 제일 지기 싫은 나라에는 1위를 차지했었다. 당연하지만 나쁜 쪽이 아닌 선의의 라이벌 쪽으로 말한 대답이였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일본은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당시에는 삼성이나 LG같은 한국의 대기업들과 일본 기업 등을 비교하면서 한국이 승승장구하고 일본이 침체하는 기사가 나가면 '역시 한국 형님', '한국은 형님국가니까...' 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드립들이 댓글로 달리기도 했었다. 물론, 우경화가 진행되고 인터넷 커뮤니티 대부분이 혐한 세력에 점거당한 지금은 '한국의 날조' 라거나 '일본 기술을 베낀 것' 이라는 정신승리나 하는 어리석은 댓글이 대부분이다. 이 당시에 중국이 센카쿠 열도 문제로 한창 격한 반일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어느 정도였나면 일본 기업이면 전부 다 때려부수는 데다가 일본 물건, 일본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던 사람을 때려죽였을 정도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러한 중국보다는 한국이 더 낫다고 생각한 여론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저 당시 일본인이 한국인을 신뢰한다는 여론조사는 무려 '''60%''' 이상인 반면 한국은 일본이 싫다는 응답만 70%가 넘었으며 일본에 대한 신뢰도도 25% 정도밖에 안됐다. 이 정도면 진짜 일본이 짝사랑하고 있었던 수준이다.
하지만, 위에서 서술했듯이 여러 요인에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서 2013년 11월, 일본 국민 58%가 한국에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다. #
당연히 이를 본 국내의 반응은... 다만 여기서 말한 '친근감'이라는 게 상당히 애매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일본인들과 별 탈 없이 지내더라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친근감을 갖는 것이 힘든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한국 국민들의 대부분이 독일에 대해 친밀감을 가지고 호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독일의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물론 이 설문조사에서 남한과 북한을 구분짓지 않고 조사를 한 맹점은 있지만... 애시당초 서구권에서 단순히 Korea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2014년 일본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을 신뢰한다'는 사람이 1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고, 한국은 못 믿을 나라라는 응답이 72%로 조사되었다. 이제는 비단 아베 신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보통의 일본인들조차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내에서 중국의 초강대국화에 따라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이나 냉전 시기핀란드처럼 일단 중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일본에 반격할 기회를 노리자는 의견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긴 하다.
안보를 잘 아는 일반인들조차도 인접국과의 관계를 잘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 웬 핀란드라는 희귀한 나라가 언급되는지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많다. 핀란드가 2차 세계대전때 엄청 고생했다는 것 자체가 한국에는 잘 알려져있지도 않으니 일반인들 수준에서는 익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가 2015년 1월쯤에 조사한 결과에는 '''60%가 넘는 일본인들이 한국에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이 통계자료를 본 한국인들도 일본을 향해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나빠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2014년 3월 한국 프레시안이 '''한국을 위협할 국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통계한 결과 한국 국민 사이에서 한국을 위협할 국가 1순위로 일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위가 중국이고 3위는 북한이었다.
특히 북한의 경우 이산가족 상봉 등이 이뤄진 후 설문된 조사였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보다 위협도가 하락했다. 북한의 경우는 어차피 국력 수준이 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시되는 측면도 있다. 당장 김정은이 수시로 정전협정 파기, 전쟁 준비 등을 떠들지만 한국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 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4년 4월 아사히신문 여론조사 결과 한국인 67%가 일본을 혐오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같은 결과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본일본인을 보는 시각이 반일감정을 넘어서 혐일(嫌日)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결과로 온라인뿐만 아니라 실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혐일이 생겼음을 입증하고 있고, 이와는 반대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감도는 불과 4%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니 결국 실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단순한 반일감정을 넘어서 점차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는 결과이기도 하다.
2014년 기준으로 봤을 때 일본에 대한 전반적인 국민 정서상으로도 '자신들이 아시아 최강인 양 떠드는 놈들'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한국 정서상의 대대적인 혐일화(嫌日化)가 시작되었다는 수치다. 여기에 미국이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미국의 명백한 동북아 외교 실패다.
미국에서도 오바마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에서 꼭 한번씩 언급하는 수준으로 불거졌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중국의 성장을 눈여겨보고 소극적인 친중파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역사관련 한일갈등 문제가 불거지면 친중파들이 인터넷에서 날뛰곤 한다.
하지만 이건 미국 내에서의 한 관점일 뿐이며, 웬디 셔먼 전 미 국무부 차관보의 '값싼 박수' 발언처럼 한/일간 관계의 불협화음으로 결집되지 못하는 '''한미일 3각공조 난항의 주된 책임으로 한국을 직접 거론하는''' 등 오바마 정부의 친일본적 외교와 미일관계 격상에 대한 원인이 한국의 반일감정 때문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는 자국이 태평양 전쟁의 승전국이기고 하고, 한반도에 미군정을 수립하기 이전까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예 모른다고 봐도 될 정도로 상황파악이 안 된 상황이었다. 미국이 한일간의 역사갈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빨라야 1990년대, 늦으면 2000년대 중반부터이며, 그마저도 한국에 비해 국제적 영향력이 큰 일본의 입김과 미일간 이해관계로 인해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상황파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이 이 시기와 관련하여 한국의 편을 확실하게 들어주는 경우는 위안부와 같이 인륜적으로 문제가 있는 전쟁범죄거나, 아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이 자국과도 연관되는 역사적 문제인 경우에 한해서이며, 나머지의 경우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예 관심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미적지근한 태도는 일본이 진짜로 한국을 침략하여 철저하게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생겨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최근 친중국 지지 여론이 높아진 건 이런 점에서 일본과 미국 둘 다 나쁘고 미국이 지켜줄 가능성이 없으면 차라리 상대적으로 나은 중국에 붙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심지어 일부는 국방백서나 군 장병 정신교육에도 북한과 함께 일본도 한국과 한민족을 위협하는 주적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적개심은 강하게 퍼져있다. 즉 대적관 교육이 없어도 적개심이 번질 정도로 일본 정부의 태도가 개막장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에서 기인된 결과이다. 이전 일본 민주당 내각이나 자민당 내각에서와는 달리 아베 내각에서는 한국을 오로지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도로 치부하고, 대신 상위 관계라 할 수 있는 서방 진영, 미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한국과 중국 같은 반일 국가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얻는 방향으로 외교 방향을 개편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과의 관계가 최고 수준으로 격상되어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위령비에 참배를 하고 '과거의 적이 최고의 친구가 되었다'와 같이 한국 들으라는 식의 립 서비스를 해주는 수준까지 그 친밀도가 높아졌다. 또한 한일 정보보호협정,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와 같은 외교적 이익을 죄다 얻고 있는 중이다.
이후 아베가 오랜 기간 미국과의 관계에 크게 공을 들였음에도 이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일했을때 공개석상에서 “미국과 일본의 무역은 공정하지도 개방되어 있지도 않으며 미국은 오랜기간 대일무역적자 겪었다고 공개적으로 지적 했으며 일본이 아직도 추진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올바른 대답이 아니라는 공개적인 거절을 당했다. 일본이 AIIB에서 끝내 가입을 거부하고 TPP를 추구하는등 미일관계에 오랜기간 공을 들였음을 결국 미국은 일본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뭉개는 요구들을 하며 자신의 입장을 일본에게 관찰시키는데 성공한 것.
트럼프가 이처럼 일본에게 접대 받으면서도 자신이 얻어야 할 이득을 얻는데 성공한 결정적인 요인은 현재 일본이 이미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설정하고 힘을 실어왔기 때문에 미국이 요구하는 것을 대부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제대로 공략한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 소홀해졌던 한국은 그렇다 처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가장 크게 공을 들였음에도 일본은 한국과 똑같이 미국의 무역적자 개선 요구를 받아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과 아베에게 가장 뼈아픈 것은 이번 방일로 TPP 추진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이다. 과거부터 미국에게 공을 들여왔음에도, 트럼프는 아베의 극진한 접대와 여러번 이어진 호의적인 제스처와 벌언들에도 불구하고 TPP를 단칼에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 이는 여러번 언급되었듯이, 트럼프가 미일외교에서 갑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미국이며, 현재 동아시아 국제관계상 일본은 미국을 절대로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다만 TPP는 '포괄적/선진적 환태평양 제휴협정(CPTPP)'으로 개편되어 추진될 예정이고 일본과 호주, 캐나다 등 미국의 최우방국이 다자협정을 주도하고 있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애초부터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때부터 TPP에 부정적이었고 미국 공화/민주당 모두 TPP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 아니었기에 예상된 결과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한국과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 대해선 과거의 발언을 재차 언급하는 수준에 그쳤다. 미국 군사무기 구매야 일본이 늘 하던 것이었고 무역불균형 언급 역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해왔던 발언들의 연장선일 뿐, 실질적 조치를 요구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한미FTA의 조속한 재협상, 막대한 경제협력 금액이라는 '''실질적 청구서'''를 받았으며, 중국은 3자리 조단위의 경제협력금액 청구서를 받았다
조기 선거로 묻혔지만 이미 일본은 올해 2월 초 미국에서 열렸던 미일 첫 정상회담 전에 일본의 미국 경제 기여도를 강조하며 10년간 4500억 달러 규모의 시장 및 70만명 고용 창출 효과를 위한 경제협력 투자를 발표하였다.(미국의 인프라 프로젝트에만 17조엔(1500억 달러)이 투자된다.) 하지만 아직도 개선이 안되고 있는 미국의 엄청난 대일무역 적자에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트럼프는 이미 올해 초 엄청난 액수의 경제협력금액을 약속받았음에도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 또다시 자동차 산업과 미국 무역적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2015년 2월에는 일본 공명당에서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혐한 정서와 한인들의 피해 조사를 실시할 정도로 일본 내의 혐한 정서와 그에 대한 위험수위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관련기사 거기다 이 기사의 댓글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한국 내 혐일감정도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니 적어도 현재로선 한일관계의 개선은 그저 요원할 수밖에 없으며, 멀리 갈 것 없이 현재 양국 관계가 매우 좋지 않은데다 양국 국민들이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서로 나쁘다는 것은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확실한 상황이다.
2015년 2월 갤럽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17%에 불과했다. 이는 역대 조사 중 최악인 수치로, 현재 한일관계가 얼마나 나쁜지 알려주는 것. 그러나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는 40% 정도로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보다 높다. 아마도 일본 시민 개개인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세대별로 보았을 때에는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가장 높은 20대(29%)에서는 20%를 넘겼으나, 가장 낮은 60대 이상(9%)에서는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의 경우 20대(56%), 30대(43%)에서는 호감이 비호감보다 높았으나, 60대 이상의 경우 67%의 응답자가 일본인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호감이 간다는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사실 세대별 경향은 옛날(1992년) 여론조사를 봐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6페이지 참조
광복절에 조사한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을 위협할 위험한 국가 투표에서 일본이 13%를 차지했는데, 이는 북한 '''56%''', 중국 '''16.2%'''보다 낮은 수치다. 북한의 경우에는 최근에 도발은 물론 사건사고도 꾸준히 일어나는데다 엄밀하게 '''정전 중인''' 적성 국가이기때문에 가장 크게 와닿으며 중국은 일본보다는 강대국인 데다가, 엄연히 다른 진영의 공산권 국가인데다가 북한의 뒷배나 다름없기에 북한과 세트로 엮어서 적으로 여기는 여론이 많다.
한편 일본의 경우 '''일본의 군사력을 대단하다고는 생각해도 무섭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직접적으로 피부로 위협을 느끼는 북한, 중국과 달리 일본은 과거사 문제가 많을뿐 현재 직접적으로 군사적 위협이 되는 요소는 훨씬 적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대량살상무기로 분류되는 대륙 간 탄도탄과 같은 '''순수 공격용''' 무기에 대한 보유를 평화헌법에 따라 금지하고 보유하고 있지 않은 반면 한국은 미사일의 보유량과 기술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일본을 앞선 면도 있다.
하지만 일본이 최근 2017년 방위비 책정에서 대학에서의 군사지원 연구 비용을 전년도 2016년 대비 '''18배'''나 늘렸는데, 최종적으로 약 1800억 원 가까이 책정되었다. 또한 평화헌법 개정 및 군사무기 수출을 신 성장동력으로 지정, 독려하는 상황이라 무기의 개량 및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다면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평가도 다소 달라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대륙 간 탄도탄 역시 일본이 자체 개발한 고체연료 로켓인 엡실론 로켓이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무기화 전환은 단시일 내에 가능할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최근에 북한의 꾸준한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로 말미암아 순항미사일 등으로 일컬어지는 ‘적 기지 공격 능력’ 확보에 대하여 일본 정치권 차원에서 논의가 활발해진 상태이기도 하다.
또한 자민족 우월주의로 가득한 중국이나 세계가 인정하는 꼴통 집단인 북한과 달리 서방 자유진영의 일원인 일본은 그나마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기도 했던 것도 원인이 있다. 물론 일본도 과거사, 영토문제에서 점차 감정에 매몰된 발언들을 내뱉고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자극하는 행동들을 자주 번복하면서 신뢰도가 상당히 낮아지고는 있다.
다만 그래도 중국처럼 국력만 믿고 대놓고 막나가지 않고 그럴 힘도 없는 데다가, 어찌되었든 중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일간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는 양국의 의견이 일치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남북한마냥 관계가 철천지원수가 되지는 않았다.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던 일본 오타쿠 문화에 갈수록 극우적 색채가 짙어지면서 비교적 호의적이던 일본 서브컬처물에 대한 적개심과 경각심이 이전에 비해 심해졌으며 일본 음악 아티스트나 미디어 등의 매체의 대중적 인지도들도 이전보다도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어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가끔씩이나마 볼 수 있었던 일본 음악가, 가수 등의 초청 및 공연은 현재로서는 사실상 사라졌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부터 일본의 서브컬쳐 시장이 날이 갈수록 극우편향적인 작품을 지향하는 세태가 만연해지고 있다. 일본의 서브컬처 시장이 점점 경쟁력을 잃어가고 내실이 없는 방향으로 변해가면서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는 장기간의 경제침체로 인해 서브컬쳐를 즐길 수 있는 잠재적인 소비계층이 늘어나지 않는 것도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인터넷은 5ch이 반쯤 점령한 상태인데 서브컬처가 고정화된 오타쿠들만을 타겟으로 보고, 날이 갈수록 시장이 축소하는데다 영향력이 줄어드는 상태까지 되다보니 편협한 극우성향을 즐기는 계층의 입맛에 맞는, 왜곡적인 작품을 만들게 되고, 이하생략....
또한 극우적 색채만이 아니더라도 일본 서브컬쳐 시장이 모에 일변도로 변화하고 컨텐츠가 극도로 부족해지면서 한국의 오덕들이 "일본 만화도 이제는 한물 갔다"라면서 점점 덕질을 그만두고 있는 점도 있다. 당장 2010년대에 방영하는 일본 애니들을 보면 판타지물이든, 일상물이든 전부 여캐릭터의 노출과 모에 하나만을 들이밀고 있으며 옛날 애니들처럼 스토리가 뛰어나거나 특별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드물어졌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이 일본 애니임에도 한국 극장에서 큰 인기를 얻고 한국 인터넷 문화에서 하나의 유행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다만, 한국인들이 이러한 일본의 극우 미디어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당장 극우 미디어물/일본 항목에 있는 작품들을 보면 퀄리티는 정식 수입판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질지언정 비공식 번역이 나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애초에 비공식 번역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컨텐츠들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착한 우익 문서 참조.
'한류의 성지' 신오쿠보에서도 거리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은 보기 힘들어졌다. 한국 관련 가게가 차례차례 문을 닫기 시작했고, 한식 전문점들도 문을 닫기 시작했다. 점점 일본 내의 혐한 감정이 높아지고 더욱이 한국의 국민 감정 악화로 한국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면서 친한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시장이 자리를 잃은 것이다. 중국인 관광객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그 자리를 중화요리점과 중국 관련 상점, 면세점 등이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일본 내 반한감정이 원인이라기 보단 일본을 찾는 중국 관광객의 수가 워낙 급증하여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상점들이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 업종을 바꾼 탓이다. 실제로 한국 관련 점포가 사라진 자리에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업건물이 대신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과 관련된 상품들이 장사가 잘 된다면 같이 겸업하면 될 문제인데 한국 대상의 상업만 쇠퇴한다는건 결과적으로 일본 내 반한감정과 한국의 반일감정으로 한국 관련 장사가 일본 내에서 신통치 않아졌다는 의미이다. 물론 겸업이라는 것이 그리 쉬울리가 없기에 양자택일로서 인기있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때 잘 나갔던 한국 스마트폰(삼성 갤럭시 등)들도 '한국 상품이라면 안 산다.'라고 하는 등 극단적인 반한 불매의식이 커지면서 삼성 측은 결국 대외적으로 사명을 갤럭시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즈로 바꾸고, 신형 갤럭시 S6 | S6 엣지를 비롯한 모든 제품에 삼성 로고를 빼는 극단의 조치를 써서야 일본에서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제품에서 로고를 빼는 정책은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반론을 해야하다.
사실, 이런 일본 소비자의 반응은 과거 플라자 합의 전 일본의 자국제품 선호로 인한 미국의 압력때와도 유사하다. 특별히 반한감정이 높아졌다기 보단 일본 소비자의 성향이라 보는게 지배적이다. 물론, 애플 아이폰과 같은 예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일본 소비자들은 과거부터 사용하던 브랜드만을 계속 쓰는 보수적인 소비패턴으로 유명하다.
이렇게만 보면 망했어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본 서브컬처물이 한일 양국 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오히려 일본 내부에서의 극우적 색채보다는 미국, 유럽에서의 자포니즘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헐리우드 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 중 '도쿄 드리프트'는 일본이 배경이고 일본산 자동차를 튜닝한 '임포티드 카'의 화려한 튜닝들 대부분이 와패니즈 느낌이 강하며, 심지어 '더 세븐' 시리즈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폴 워커가 '''일본 욱일 문양이 프린팅된 티셔츠'''를 입고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2019년 현재는 2015년 당시보다 혐한 세력이나 반한 감정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로 인해 아직 냉담한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3차 신한류 시대가 왔다고 부를만큼 한류 바람이 다시금 뜨고 있는 중이다.
이로 인해 어린 학생들과 20대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하지만 장년층인 40대 이상 연령층과 30대에서는 여전히 반한 심리를 가진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지금의 어린 학생과 청년들이 한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30대는 자민당집권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세대이자, 잘못된 역사 교육으로 인해 인터넷에서 물의를 빚는 주범(?)으로 꼽힌다.
2019년 1월 21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 실시한 일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를 묻는 설문에서 한국이 61%로 북한,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응답자의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한국을 싫어한다는 비중이 늘어나, 특히 60대에서는 70%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일본 가정의 10~20대 밀레니엄 세대와 50대 이상 부모 세대들의 갈등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밀레니엄 세대는 어릴 때부터 한국 문화를 즐기게 되어 역사나 정치 문제에 덜 영향을 받는 반면, 1960~70년대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컸던 시기의 기억이 남아 있는 중장년층들은 정치적 문제에 영향을 받아 한국의 인식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과 발언권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상승했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딸은 아빠 몰래 한국 갔다···요즘 일본 '혐한 세대갈등'''' 기사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최근에는 정부의 정책과는 정반대로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이 줄어들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일본에 대한 비호감도보다 높아졌다. 타이완 넘버원 영상들의 댓글을 보면 타이완/코리아 넘버원과 재팬 넘버 쓰리 그리고 차이나 넘버 99(나인티-나인)가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정치적인 문제지, 상당수 반한 일본인들도 이렇게 거의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주적인거 마냥 으르렁거리는 분위기는 꺼리고 바뀌었으면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지금 한일관계 수준보다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 독일 정도의 약간의 라이벌 의식 수준으로 변하길 원한다고 한다.
솔직히 일제강점기를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나이가 90대 초중반 이상 아니면 현재 없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 자체를 잊어선 안되겠지만 사회, 문화적으로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으면서 동질성이 강한 이웃국가이면서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제1세계 우방이니 분위기를 전환시켜서 화해하고 교류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 득이 되면 득이지 실이 될 일도 없다. 그리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웃국가끼리의 무조건적인 혐오 의식은 그만두고 지양해야 하는 것이 맞다. 게다가 한일양국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에는 한일 무역 분쟁으로 서로의 여론은 더욱 더 악화되어 가고 있다.
'''결국 까놓고 이야기하면, 국제적인 분위기나 경제 사정에 따라서 한국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이 오락가락한다.'''

5.4.1. 한국의 내셔널리즘


한국은 일본에 비하면 비교적 독자적인 근대 국민국가를 이룬 기간이 짧은 데다가 단기간에 급속도로 발전한 경제인프라, 소냉전이나 다름없는 분단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점진적으로 바뀌어 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민족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 혈통의 동질성을 상대적으로 중히 여기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문화와 남북한으로 나뉜 분단 상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한쪽으로 뭉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족(한민족)의 동질성을 정치 사회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으로 흘렀으며, 이로 인해 국적만을 기준으로 삼는 서구권식의 유연한 피아 구분은 아직까지 보편적인 것으로서 여기기 어려운 상황이다.
물론 서구권의 경우에도 언어가 통하거나 조상이 같은 범 문화권의 경우(예를 들어 영미권, 히스패닉 등등) 동질성을 좀더 느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근대적인 혈통 구분개념과 적극적인 한 민족 개념은 완전히 옅어진지 오래다. 옛부터 워낙 많은 혼혈과 지역적으로 많은 인구가 오고감이 많았기에 이런 것들보다는 현재 본인이 속한 국적 자체만 따지는 경우가 많으며 국적을 바꾸거나 이중국적을 취득하는 개념도 훨씬 간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적으로 아시아계 이민자가 미국, 유럽권에서 아직까지도 이방인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낯선 인종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유독 아시아계 인종이 외국에 나가서도 같은 민족, 혈통끼리만 뭉치려는 경향이 유독 강하여 이들 사이를 타 인종이나 타 문화권의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가기가 워낙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최근 들어서는 매우 옅어지긴 했지만 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이 국적을 바꾸거나 이민을 가는 등의 행위 자체를 쉽사리 납득하지 못하거나 매우 극심할때는 민족과 국가를 버린 사람들이라고 혹평까지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며 국적이 다르고 자란 국가적 환경이 다르면 실상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외동포를 같은 민족성을 공유하는 동지로 인식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현재 한국인들 사이에서 외국인 범죄로 인해 인식이 좋지 못하고 대중문화에서도 부정적으로 그려지기 일쑤인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는 불과 2000년대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달랐다. 순박한 연변 처녀가 서울로 상경하여 겪는 로맨스 드라마나 조선족에 대한 신파 드라마가 미디어의 주류였으며 엄연히 국적이 다른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한국말을 하고 조상이 같다는 이유로 감싸주는 듯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결과적으로 혈통이 다른 이방인과 조상이 같은 한반도계 민족을 태생적으로 구분하게 되는 경향을 따르는데, 여기서 한국이 뚜렷하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방향 중 하나가 식민지배를 했던 일본과의 민족성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다. 일본도 미국에 철저하게 깨지고 식민지를 해방시켜야 했던 경험 때문에 한국과 민족성이 섞이는 것을 경계한다.
다만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고 서구권의 문화와 생활방식(개인주의의 확산, 민족주의와 공동체 의식의 쇠퇴)에 더욱 익숙한 신세대들이 등장함에 따라 현재 한국은 민족에 대한 가치관을 기존의 한국계 혈통만이 아닌 한국 국적을 갖고 한국의 가치관을 수용하는 국민으로 점차 전환하는 반면 일본은 한국에 비해서 다소 그렇지 않은 차이점이 있다.
이게 가능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이 혈족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파란만장하게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식민지배를 겪으며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민족을 배반하거나 하루 아침에 높은 신분의 인물들이 일본인과 민족반역자들에 의해 몰락하는 장면을 숱하게 목격했고,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 차이로 서로 죽고 죽이는 한국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겪으며 혈통도 혈통이지만 무엇보다 뜻이 맞아야 우리 편이라는 의식이 한국에서는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거 역사를 통한 인식의 변화가 2010년대 이후부터는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비록 점진적이긴 하지만 서구권의 유연한 가치관에 더 가깝게 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역사적으로 혈족에 대한 가치관이 재구성될 만한 역사적 계기가 없었기 때문에, 혈족 문화가 현재에도 잠재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한민족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서 두고 있긴 하지만,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주를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민족의 기준을 혈족으로만 환원시키지 않고 타 문화의 이질적인 부분을 수용할 수 있는, 일본에는 없는 유연함이 생겨났다.
일본은 그게 근본적으로 매우 힘든데, 당장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다문화에 대한 반대 여론은 유럽이나 미국과 비슷하게 민주적 가치관을 무시하는 일부 타자에 대한 반감, 그리고 노동과 사회적 계층 문제를 포함한 경제적인 원인이 큰 반면, 일본은 최근들어 바뀌는 추세이긴 하지만 불과 수십년전만 해도 아예 외부인을 내부로 받아들인다는 발상 자체가 크게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외부인을 내부로 받아들인다는 발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이나 중국을 중심으로 외교는 물론 인적교류가 활발했던 데다 1858년에 일본과 미국 간에 체결된 통상 조약인 미일 수호 통상 조약과 유럽 5개국과의 협약을 통해 1899년 폐지되기 전까지 츠키지, 요코하마, 카와구치, 고베, 나가사키, 하코다테 등 외국인들에게 제약이 있기는 했지만 여러 지역에 외국인 거류지가 존재하였으며 근현대에 들어선 지금도 일본에 오는 외국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외국인과의 통혼도 잦아짐에 따라 혈통으로 기준을 보는 것이 점점 옛말이 되어가는 추세이다.
독일인 의사 시볼트와 일본인 게이샤인 오다키 사이에서 나온 딸인 '구츠모토 이녜'는 이후 일본인 최초의 여성 서양 의사가 되기도 한다. 일본은 대체적으로 자국인과의 피가 섞이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대체적으로 일본인으로 인정해 주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조건에서 다소 동떨어진 자이니치와 같은 재일 외국인 집단에 대해 다소 경시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정말 일본인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여 아시아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거나 차별이 심한지는 반일감정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한국에서 보다 일본에 거주하는 아시아 사람들의 이야기나 통계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재일교포는 한일관계의 특수성이 큰 원인이고 일본의 인기 아이돌 그룹 노기자카 46에서 미얀마 혼혈이 인기 멤버이다. 말인 즉슨 여전히 타국에 비해 폐쇄적이긴 하지만 세계 정세 변화와 세대 교체에 따라서 일본 내부의 인식도 조금씩이나마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원인에 대해서는 모두 파악하기 어렵지만 명확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은 타자를 내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그들의 존재와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공공성이 있고, 한국은 이를 구분하는 한에서 가능한 다소 옅은 공공성이 있다는 것이다.


5.4.1.1. 한국의 내셔널리즘 발생과 경과

위에서 언급한 일본과의 철저한 민족성 구분을 통한 내셔널리즘 구축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더 설명하자면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구 일본 제국에 대한 반발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움직임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수 세월 동안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거쳤던 인도인이 영국식 사회구조를 따라가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민족성을 따르듯이 한국 또한 그렇게 본래 자신들만의 특성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굳이 미국이나 일본을 제외한 여타 선진국을 따라가려는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까지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이들 또한 예외는 아닌데, 한일 간에는 민간 교류도 잦다 보니 그 구별 지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흐름은 막대한 힘으로서 작용하기에 대다수 국민들은 이에 동조하게 된다.
하층민으로 갈수록 이러한 흐름에는 면역이 없어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특히 저소득층이나 상대적으로 현실 정치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갖추지 못한 계층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민족주의) 말고는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없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자국과 그외 국가들의 혈통에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말을 필터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일단 그렇게라도 하면 최소한 자기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는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결정해야 하고 이는 사람들이 계급 투표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계급투표는 암묵적으로 자신의 스탠스를 하위 계급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등을 요구하기 때문에 누구나 국가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이 내셔널리즘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수출 위주의 경제로부터 구축한 정치 판도에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어서 기존까지 고수해오던 가치관이나 정치적 스탠스가 위기 상황에 봉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문에 기존의 해방 이후 한국을 지탱해오던 내셔널리즘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패러다임으로서의 타 민족에 대한 증오가 다시 중요한 코드로서 작용하고 있기도 한 것. 현재 신 자본구조가 구 자본구조와 부딪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기에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있던 지역들이 하나 둘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비단 일본에 대한 반발로부터 성립시키는 작용으로서의 내셔널리즘에만 해당하는 국소적인 얘기가 아니다. 해방 이후 미국식 판도를 따라가고 있었던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반이슬람주의와 이와 정반대 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개신교와 같은 종교를 공격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내셔널리즘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종교를 향하는 반발과 일본을 비롯한 타국에 대한 반발에는 국가를 통합하기 위한 내셔널리즘의 구성이라는 구조적인 상동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요구가 현실 정치에 반영되기도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이민자의 수용조차도 민족의 개념에서 혈통주의만을 포기할 뿐, 기본적으로 독일식의 동화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게 현실이다.

5.4.2. 일본의 내셔널리즘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근대화/산업화를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이룬 국가이며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며 20세기 초반에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가졌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던 국가이다. 하지만 시대의 한계상 당시 일본이 이룬 민주주의도 민족의 동질성과 일본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우수함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흘러갔다. 물론 이 때문에 일본 또한 외국인과 일본인을 철저하게 구분하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이후 군국주의로 흘러가면서 이러한 성향이 적극적으로 강조되었다. 귀축영미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
최근 한국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에서도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점차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우려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우방인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의 전범자들이 안치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통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도발에서도 보이고 있다.

다만 보이는 것과 달리 현재 일본 내에서도 일본의 이러한 흐름에 대해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 네셔널리즘과 강경한 흐름을 부추기는 정부의 일부 정책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이 상당히 거세다.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도 원래 이를 파고들은 정치인이 해당 학원의 포스터를 보고 우익 성향의 학원의 학원이 아닌가 라는 의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정부에서도 일부 정책을 제외하곤 인종차별과 혐오발언에 대해 결코 약하지 않은 제재를 내리고 있다. 혐한도 인종차별로 분류하여 처벌을 올려버렸다. 이에 일본 우익에서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소수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으며 일본 사회에 여전히 만연해 있다. 결국 시대에 아주 뒤쳐진 어린 아동들에 대한 현 정부에 대한 찬양 및 주변 국가에 대한 반발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등이 발생하여 일본 사회 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한국의 내셔널리즘이 기성 세대와 노년층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젊은 세대로 갈수록 해외와의 잦은 교류 등으로 인해 낮아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일본은 반대로 젊은 세대에서 내셔널리즘이 강해지고 나이 든 세대가 내셔널리즘에 부정적인 영향을 보이는 패턴이 조금씩 확인이 되고 있다.
이는 일본의 기성세대가 당시 일본 제국의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에 의해 일어난 2차 대전과 그 여파로 인해 초토화된 국가상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내셔널리즘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젊은 세대의 경우 버블 붕괴 이후 사회에 진출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 불안정한 미래 등으로 인해 과거의 일본 제국, 1970, 80년대의 경제 호황시절과 같은 일본의 전성기 시절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가야 한다는 극단적인 성향에 의해 내셔널리즘이 강해지는 경향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가 불안할수록 내셔널리즘이 강해지는 현상을 보인다.
다만 이를 일본의 젊은 세대 전체가 다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 더 나아가서 과거의 전체주의화로 경도되어 간다고 단정지어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우경화와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움직임이 심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일본의 5ch, 넷우익의 활동을 배제하면 이런 현상이 일본의 사회적 주류라고 하기 힘들며 한국의 일베워마드같은 사이트만으로 한국의 청년, 청소년 세대가 모두 막장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교류가 오프라인으로 비교적 한정적이었고 정보 수집에 대해서도 느렸던 과거와는 다르게 당장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나 유튜브 몇 분 들여다보고도 국제적인 정세와 세계의 흐름을 발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는 글로벌리즘 시대이다 보니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일본만이 갖고있는 단점이나 고리타분함에 대해서 자기 비판을 하거나 이제는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매우 많아졌다.
당장 위에 언급된 5ch같은 막장 사이트에서 조차도 자국인 일본의 모든걸 추앙하거나 무조건 뭉치려는 민족주의, 공동체주의적 성향보다는 한국의 헬조선처럼 일본을 중세잽랜드라고 멸칭으로 부르며 자국의 단점이나 문제점에 대해 서슴없이 비판, 비난을 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단순히 우경화의 조짐이 보인다고 해서 과거 일본제국처럼 회귀한다는 발상은 어찌보면 너무 단순한 해석일 수 있으며 그렇다기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교육이 전 세대적으로 보편화되어 과거처럼 한데 뭉치려는 경향이 확연히 약해진데다가 위의 한국의 내셔널리즘 문항 내용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폐쇄적이고 외부에 경계심이 강했던 일본 민족사회 조차도 글로벌리즘과 교통 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라 활발한 다문화적 교류나 이방인을 사회 내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점진적으로 개방되어 감을 알 수 있다.
일본 우경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5ch에서 조차도 아베 정권의 징병제 도입에 대해 단순히 검토해보겠다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엄청나게 반발을 하며 격렬하게 비판을 할 정도로 우경화 된다고 해서 과거의 일본 제국처럼 국가와 정부의 명령을 정언명령처럼 따르던 전체주의 시기의 국민성과는 확실히 차이점이 보인다.
넷 우익들의 성향은 한 마디로 한국의 일베와 같은 자국과 자국 정부 비하까지 포함하는 모두까기 성향의 막장성일 뿐이다. 이들에게 철저하게 국가에 의해 통제받고 이를 중심으로 뭉치려는 성향은 거의 없다. 진정한 의미의 내셔널리즘을 통한 공동체 전체주의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


5.4.2.1. 일본의 내셔널리즘 발생과 경과

일본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민족성 구분을 통한 내셔널리즘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어 구축 되었다.
근현대사에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발생과 경과의 흐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몇가지들이 있다. 하나는 메이지 유신천황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주도된 내셔널리즘, 일본의 제국주의 시기, 세계대전과 여기서 비롯된 수많은 침략 전쟁을 치루면서 국가에 의해 강행되고 강요된 내셔널리즘이다.

메이지 유신에서 천황에 대한 위치 격상 및 인식 전환을 위한 노력은 국가의 주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이뤄졌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천황에 대한 일본 사회의 모습이였는데 학교에서는 메이지 정부의 의해 천황과 관련된 신화들이 언급하고 가르쳤으며 천황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을 모셔 놓고서는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천황을 섬기게 만들었다. 불타는 학교에 그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들어갔다 죽는 교사의 일화가 전설적인 미담으로 그려졌다.
이후로도 이러한 천황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히 크게 남아서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다이호가 피격당해서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함내에 걸린 어진영을 다른 구축함에 옮기겠다고 해서 화재유폭-굉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장려의 영향은 현재 일본에 아직도 남아있는데 현재까지도 일본 천황 대한 비판은 평가에서 제외대상이며 평가하는 것이 금기시 되는 사회 터부가 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시기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타국과의 전쟁에서 결속력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자신들의 침략 전쟁의 당위성을 위해 내셔널리즘이 더욱 활기를 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인 흐름은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여서 이에 대한 우려나 반발은 별다른 변화나 제고의 여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내셔널리즘의 흐름에 휩쓸려버렸다.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던 일본 공산당도 이 때문에 탄압당했다.
전쟁 중 일본의 일본과 일본 민족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강조되었고 최우선시되는 가치관이였으며 프로파간다로 교전중인 상대국에 대한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프로파간다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당시 일본국민들은 국가의 프로파간다에 별다른 저항없이 철저하게 세뇌되었다. 그 유명한 비국민(非國民 非国民: ひこくみん)이란 표현도 이시기에 나왔다.
이 프로파간다는 실제로도 상당한 부작용을 야기했는데 태평양 전쟁 시기 동남아시아에 있던 일본 민간인들이 미군에 투항하는 것을 거부하고 집단 자살하였다. 사이판 전투가 대표적. 이 사건은 사실 또 다른 불씨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 천황이 직접 일본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권했다는 논란이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내에서 미군을 두려워한 일본 주민들이 집단 자살을 하였던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집단 자살은 더 큰 논란을 몰고 왔는데 미군이 두려워서 일본 주민들이 집단 자살한게 아니라 일본군들이 자국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하는 것에 관여되었다는 폭로가 터져 나왔다.
사실 과거는 물론 지금도 일본 또한 하층민으로 가면 갈수록 전통적인 내셔널리즘에 대해 비판은 커녕 그대로 휩쓸려 나갔었다. 물론 부라쿠민은 예외. 부라쿠민은 오히려 이러한 내셔널리즘으로 인한 차별의 피해자에 속한다. 다만 하시모토 도루 같은 예외도 있다. 부라쿠민 항목 참조.
특히 저소득층이나 상대적으로 현실 정치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갖추지 못한 계층들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 말고는 내세우거나 자신들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이 도가 지나쳐 자국의 역사에 사소한 비판과 이의제기도 용납하지 못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넷우익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폐쇄적이고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의 내셔널리즘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허물어지고 있다. Japanese only로 상징되는 폐쇄적인 외국인에 대한 거부가 암암리에 묵인되어왔던 과거와 달리 온라인 등을 통해 속속 공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국의 비판과 함께 일본 내에서도 부끄럽다, 개선해야 하는 문제점이라는 반성이 점차 대두되고 있으며,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숫자는 날이 가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저출산 문제로 인한 인구 감소와 노동력 부족이 크다. 일본 정부에서도 혐한등 증오 발언들에 대해 인종 차별로 규정했으며, 우익성향의 혐한 단체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명예훼손 등으로 속속 손해배상이 이뤄지고 있다.
주의할 점은 이러한 변화와 별개로 일본은 강경한 내셔널리즘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UN 등에서 인종차별 금지법을 권고했지만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며 거부해왔다. 결국 논란이 점점 커지자 이를 견디질 못하고 2016년에 헤이트스피치 대처법이 시행되었다.


5.5. 문화


한국과 일본은 문화 부문에서 떼어 놓기 힘들다. 주력산업이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에 경쟁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은 B2B로 얽히고 설켜 있다. 삼성전자가 자사 제품에 쓰일 부품을 생산하는 일본 중소기업들을 먹여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삼성전자에 납품하려고 서로 경쟁까지 할 지경. 한국도 일본 부품이 없으면 자국에서 구하기 힘든 부품이 많고 유럽에서 구할 수는 있겠지만 수송비용에서 이익을 많이 까먹는다. 또한 일본의 기업들도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거나 한국에서 싸게 구할 수 있는 부품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중이다.
21세기 이후로 중국 시장이 성장해나가면서 중국과의 협력에서 얻는 이득 또한 높아지고 있는데, 중국의 기술력과 자본력, 시장 규모 등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자면 양국 모두 한국이나 일본보다 중국에서 사업하길 선호한다. 이는 한국과 일본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며, 돈이 흐르는 대로 경제 주체가 움직이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당연한 수순이다. 이 때문에 중국위협론처럼 중국의 독재정치, 경제적 위협, 유한양행을 비롯해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 측에 기술이 유출되거나 핵심 인력이 스카우트돼 버리는 등 중국이 모든 곳을 집어 삼킬 것이라는 경계심이 점차 성장하고 있다. 중국이 워낙 괴물처럼 커져가는 탓에 경제적인 틀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양국의 정치적 감정과는 달리 상호간의 방문객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기사
세계의 여러 이웃 국가들 중에서도 한국, 일본만큼 서로에 대해 알고 관심을 가지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당장 유튜브 등 다양한 SNS들에서도 나타나지만 한국 국민과 일본 국민은 서로를 매우 의식하고 있고 라이벌, 적, 동료, 친구 등등 부정적인 측면에서든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한국과 일본은 다양한 관계로 엮여있는,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라다.'''
물론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호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당장 일본 2ch의 극우 혐한 네티즌들만큼 한국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한국에 우호적인 것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더 잘 알고 관심이 많을수록, 더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5.5.1. 일본의 한국 문화


문화 부문의 경우 두 국가는 친밀해지고 있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혐한이 강해지면서 과거에 비해 한류 열풍은 전성기에 비해서 상당 부분 식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한국 역시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서브컬처 문화에서는 덕후층이 형성이 되어있으며, 일본 역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영화나 한국 아이돌의 수십만 장의 앨범이 판매된다.
문화적으로는 한국에 예전보다는 친밀함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긴 했지만, 대중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부분들이 많다. 양국에서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음식문화 정도이나 일본 장기 '돼지김치우동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한국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일본 국내의 인식은 악화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베 총리는 한국 음식점을 자주 찾는 것으로 유명한데 방문할 때마다 일본 우익에게 까인다.
하지만, 2017년부터 번지기 시작한 3차 신한류 열풍이 일종의 변수가 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한류 문서 참조.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좋은 파트너이다.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 업체 대다수가 한국인에게 하청을 의뢰하기도 하며 한국도 일본과 공동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만 수십 개이다. 괜히 신카이 마코토가 인터뷰에서 한국 기업과 일본 애니메이션은 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일본 애니메이션 최대 수입국도 한국이며, 한국 가수들이 제일 많이 찾아가는 외국도 일본인 동시에 한국 가수들에게 제일 열광하는 나라도 일본이다.
한류의 영향 등, 현재진행형으로 한국 여행을 오는 일본인도 많은 편이다. 2016년 9월까지 일본의 방일 관광객 수사 1978만 명으로 연내 2천만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중 과반수가 중국과 한국 관광객이다. 2020 도쿄 올림픽까지 관광객 4천만 명을 목표로 하는 일본 입장에서 한국 관광객의 증가는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다소 부정적인 방향으로 서술되기도 하지만, 일본인 모두가, 한국인 모두가 서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문화 문단에서도 서술했지만 K-POP의 인기가 현재도 여전하며 쿠니무라 준이 외국인 배우로서는 사상 최초로 국내 영화 시상식에서 수상한 기록을 세웠다. 실제로 이러한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서 한국인, 일본인이 서울-도쿄 릴레이 프리허그 캠페인을 열었으며 일본인 혼자서 이 캠페인을 연 적도 있다.
한일간의 갈등속에서도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배우면서 TOPIK을 응시하는 일본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 젊은층도 10년새에 증가했다.## 그리고 일본의 10대 ~ 20대 젊은 층에서는 한국산 화장품과 패션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20년 4월 19일에 카카오는 출시 4주년을 맞은 일본 만화 플랫폼 픽코마가 3년 연속 거래액이 두 배 이상 증가하는 고속성장을 이어가며 올해 첫 흑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4월 21일에 주일한국문화원이 코로나19 확산 상황에 맞춘 온라인 문화원 사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한일간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지만, 일본내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높은 편이다.#
배우 현빈이 슈칸아사히의 표지모델이 되면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일본에서 재점화하는 신한류의 주인공으로 소개됐다.# 또한, 달고나 커피와 K-POP 등의 인기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사랑의 불시착'이란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을 일으키고 있고 심지어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도 한국 드라마인 '사랑의 불시착'을 시청했다.#1#2#3
일본 작가의 한국 드라마 그림전이 열렸다.#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모여 도쿄·후쿠오카에서 걷기와 문학 이야기를 하며 상호 이해를 넓히는 교류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10월 3일에 도쿄에서 온라인으로 한국 문학의 매력을 주제로 한 토크쇼가 개최됐다.#
배우 손예진이 화상 메시지를 통해 한일이 서로 협력해 코로나19를 이겨내자고 밝혔다.#
2020년에 일본을 휩쓴 유행어 대상 후보에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제4차 한류붐'이 올랐다.#
한국관광공사는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을 할 수 없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여행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11월 26일과 28일에 도쿄에서 2020 코리아 위크 인 도쿄(2020 Korea Week in Tokyo)를 연다고 밝혔다.#
이러한 문화적인 교류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수있다. 한국 내에서도 일본으로의 문화컨텐츠 수출을 단절해야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보통 일본 젊은이들은 한국 문화에 관심이 없다며 정신승리를 하며 자국혐오를 일삼는 사람들도 있으나 사실 실상은 그 반대이다. 일본내에서도 우익사관들과 극우들이 제일 우려하는것이 한국의 문화가 깊숙하게 일본에 침투하는것이다.
일본문화를 신봉하는 한국의 사람들이 일본을 변호하게 되는것처럼 정치와 문화는 따로라고 하더라고 한국문화에 익숙해질수록 한국을 변호하는 일본인들또한 늘어나기 때문. 그리고 그 우려가 현실이 되듯 현재 젊은 층이 즐기는 일본의 다수의 문화와 컨텐츠에는 이미 한국이 깊게 관여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절대다수가 우익이라 금한(禁韓)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마저 젊은 여성성우들과 음악, 패션등을 비롯한 영향으로 한국의 언급비중이 높아졌다.
일본과 미국에서만 서비스하는 훌루에서는 박진영이 프로듀스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니지 프로젝트가 2019년 원피스를 제치고 전세계적으로 메가히트했던 귀멸의 칼날을 스트리밍 순위로 이겼을 정도이다. 소녀만화잡지와 픽시브 연재만화에서는 한류 아이돌 그룹을 주제로 한 만화가 연재되고 있으며 이런 유행을 따라 인기 여성성우들이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방송과 라디오까지 생기는 등. 젊은 층의 경우에는 한국문화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유행에 따르지 못하는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비춰질정도로 비주류 서브컬쳐라고 취급받던 한류가 일본 엔터테이너 산업에서 함부로 포기할수없는 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것. 흡사 90년대 일본 문화개방이 이뤄진 후 대다수의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선진적인 일본의 문화에 열광하던 그 시절과 입장이 반대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그에따라 비교적 보수적인 젊은 남성층에 비해 일본 여성들은 과거청산이나 위안부같은 전쟁범죄, 여성문제에 적극적으로 한국을 변호하는 경우도 늘고있다. 이러한 여성들을 골빈년들이라며 비하하며 이를가는 극우들과 중년층 남성들만 봐도 문화적인 침투가 정치적으로도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수있다.
반면 현재 우리나라의 20대 남성들이 보수진영에 가까운것처럼 일본의 남성층도 그러한 성향이 강하며 그러한 사람들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서방진영의 우방국이라는 인식보다 아직도 전쟁중이며 사상을 확립하지 못한 혼란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한국과의 친목도모를 흡사 중국, 북한과의 친목을 도모해야하는것과 동급으로 국익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35]

5.5.2. 한국의 일본 문화


물론 한국에서 일본 만화, 게임, 애니는 주류 문화까지는 아니다. 드래곤볼, 도라에몽, 짱구, 원피스, 명탐정 코난, 나루토 같이 그나마 일반인들도 보는편인 만화들은 한국 출판 만화 시장이 몰락한 이후 웹툰이 주류가 되기 전의 공백기에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90~2000년대에는 만화라고 하면 일본 만화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국 웹툰이 성장한 다음에는 인지도에서 밀리며 게임 역시 온라인 게임에 많이 밀린다.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인데 앞에서 설명한 대중성있는 만화 원작 애니나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 흔히 덕후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특히 오타쿠 대상의 애니메이션은 정서적으로 워낙에 이질적이라 매니악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본다고 하면 사회성이 부족한 오타쿠 라는 선입견을 받게 된다.
한국 내에서 일본 공산품의 영향력이나 문화적 영향력은 오히려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애니메이션이나 그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이고, 그럼에도 과거에 비해 밀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방송매체를 통한 잦은 노출과 일상화로 보는 게 맞다. 과거 왜색문화라 치부해 방송출연조차 금지되던 것과는 달리, 각종 프로그램에서 일본 관련 여행이나 문화콘텐츠를 방송하며, 일본인 연예인의 출연, 아이돌 그룹 멤버 등 친숙하고 가치중립적으로 꾸준히 대중들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양국내에서도 언어 교류가 자주 이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어는 주요 외국어중의 하나이고 일본에서도 한국어는 주요 외국어중의 하나에 속해 있다. JLPT는 한국에서 실시되고 TOPIK도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다.
관광 산업에서도 그렇다. 국적별로 따져보면, 일본을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은 한국인이었고 현재도 꾸준히 일본에 관광을 가고 있으며, 엔화가 강세인 엔저 현상 시절 한국을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 또한 일본인이었다. 다만 2013년부턴 한국을 가장 많이 찾는 관광객 수는 중국인에게 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인 관광객이 적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인이 넘사벽으로 많을 뿐이다.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코로나19 확산으로 한국에서 일본 문화의 흐름이 크게 뒤 바뀌었다. 관광의 경우 안그래도 포화상태라 점차 정체되던 일본 여행이 직격탄을 맞았으며, 코로나 여파로 경제건 문화건 교류가 가로막히는 상황이다.


5.6. 과거사


한일 관계에서 과거사 논란은 핵심적이다. 한일관계의 주요 쟁점중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들도 궁극적으로, 과거사 문제이다. 또 한국인들은 1998년 10월 이전까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말하고자 해도 '유감'이나 '통석의 념' 같은 말을 쓰자 한국 입장에선 진정성이 없다고 분노하는데,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2000년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1탄에서 일본인들이 체면을 지키고자 과격한 표현을 우회적으로 에둘러 말하는 특성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정치는 물론 문화 교류에서도 과거사가 문제시 될 정도. 심지어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덕후라고 일컫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이 일본 문화와 서브 컬처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해 날선 비판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극우 미디어물의 범람과 관련이 있다.


5.6.1. 야스쿠니 신사/신사 참배


대표적인 것이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정치인이나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 참배. 한일관계는 물론 중일관계가 잠잠했다가도 순싯간에 나락으로 처박히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다.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선 학을 떼게 만든다. 기껏 일본에 대해 반감이 잠잠해질려다가도 신사 참배 한번에 바로 급상승하기 때문.
야스쿠니 신사는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이에 대해 총리가 자국 추모시설을 방문하는 것에 왜 왈가불가 하느냐 내정간섭이다라고 치부하고 한국과 중국에서 조용히 넘어갈래야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자세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 참조.


5.6.2. 일본의 피해자 행세


한일관계 악화에 영향을 끼치는 또다른 요인중 하나. 다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과도 동맹인 미국에서도 이것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바로바로 비판하고 문제시 삼는다. 해당 사항은 일본의 피해자 행세 참조.

5.6.3. 일본의 우익사관


일본의 우익 성향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태평양 전쟁을 비롯한 일본 제국의 근현대 행보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일본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리는 자학사관으로 규정한다. 당연히 이 또한 장기적으로 한국과 중국에 대해 일본의 강경한 태도와 이에 대한 여론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일본 우익사관 참조.

6. 미래



6.1. 개요


'''日韓交誼 善作紹介(일한교의 선작소개): 일본과 한국의 교의는 서로를 잘 아는 것에 있다.'''

- '''안중근'''

한국일본중국과 함께 서로가 서로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이웃나라이며, 유사 이래 각국의 역사적인 고비마다 때로는 우호적인 형태로, 때로는 적대적인 형태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쳐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한반도 국가의 국력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메이지 유신으로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을 강제병합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은 패망했고 한반도는 다시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전후 미국은 인위적으로 역내 세력 구도를 재편성하였으며 일본은 주변 국가들이 부진하는 사이 미국의 보호 아래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일구어내며 다시금 세계적인 선진국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장제스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중화민국의 승리는 압도적인 인력과 국토를 이용한 지연전의 결과였을 뿐 내부적인 발전도는 일제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승자인 중화민국국공내전의 패배로 자신들의 승전국으로서의 입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때문에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의 외교적 목소리에 직접적으로 클레임을 걸 수 있는 아시아 국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20세기 전반기에는 유럽 열강들, 후반기에는 미국과의 외교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일본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신생 대한민국은 광복에 이어 분단과 내전을 겪으며 최악의 스타트를 끊었으나, 불과 반 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내에 산업화민주화를 모두 달성하며 일본을 위협하는 선진 지역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나 일본과의 역사적 악연이 깊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 이후 빠르게 발전하며 오늘날 역내 패권은 물론 세계 패권마저 꿈꾸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이 가졌던 독보적인 입지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고, 일본이 각국에 남긴 역사적 상흔은 냉전의 유산과 함께 여전히 한일관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동북아시아 내에서 일본의 독보적인 지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이며, 한일관계의 흐름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세력균형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의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역내 최강국이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중화민국과 연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일본이 주변국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합병할 능력을 상실한 현 시점에서 한중 연대의 의미는 과거에 비해 많이 퇴색된 상황이다. 또한 20세기 후반기의 우리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상황에서 북한중국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웠기에 미국의 주도 하에 한일관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현 한국은 주적인 북한을 압도하며 중국에 맞서서도 최소한의 자위가 가능한 군사·외교적 레버리지를 확보한 상황인지라 굳이 일본에 원치 않는 양보를 할 필요 또한 없는 처지이다. 게다가 일본이 20세기 전반에 가졌던 동북아시아 내의 군사 패권을 상실하였음이 명확하고 미국 중심의 질서에 재도전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길을 택한 현 시점에서, 한일간의 주요 이해관계는 주로 역사·문화·경제적인 측면에서 얽혀 있을 뿐 한국 입장에서든 일본 입장에서든 일본 열도 혹은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할 의도도 역량도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국가 정체성을 걸고 대립하는 북한[36]이나 스스로 역내 패권을 추구하고 그 첫 타자로 한반도를 눈독들이고 있는 중국[37]에 비한다면 일본 문제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래의 한일관계는 20세기를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항상 그래왔듯 역내 다른 국가인 미국, 중국, 북한과의 외교적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전략적 우호와 전략적 경계 사이를 맴도는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첨언하자면, '부차적인 관계'라는 것이 반드시 우호 혹은 적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일관계의 중요성 자체가 동북아시아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예컨대 한국의 외교에서 남북통일은 헌법에 명시된 대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최우선 목표이다. 그러므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 정책을 포기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한미동맹 역시 안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므로, 예컨대 한러관계를 아무리 우호적으로 끌어올리더라도 미국과의 관계를 희생하는 외교는 결코 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과의 관계는 북한이 도발하고 중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을 때는 좋아졌다가, 한중관계가 개선되고 남북이 화해무드를 이루면 나빠지고, 다시 미국한테 뭔가 양보를 얻어내야 할 때는 좋아지는 식으로 전개된다.
즉, 한국의 입장에서 대일관계는 타국과의 최우선순위 외교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외교적 카드로서 활용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최우선순위 외교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 속 한반도 국가들도 중원이나 만주의 대륙세력과는 끊임없이 전쟁과 교류, 침략과 복속을 주고받으며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온 반면, 일본과는 몇 차례의 전란기를 제외하면 적당히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으면서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편으로, 이는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떠나 반도국가로서의 지정학적 특성이라 할 만하다.

6.2. 긍정적 전망


오늘날 한국일본은 동북아 내에서 단 둘뿐인 대형 선진국이며, 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공산당 일당독재·권위주의·국가자본주의·중화 패권주의를 내세우며 인권·민주주의·자유주의·시장경제·다자주의로 대표되는 서방세계의 가치들에 정면 도전하고 있고, 북한은 급작스런 공산권의 붕괴가 불러온 안보위기와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내부 불만을 잠재우고자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위협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북한이 비록 알려진 것처럼 혈맹관계는 아닐지라도 큰 틀에서 같은 편에 서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포화된데다 체급의 한계가 명확한 한일 어느 쪽도 반서방진영의 점증하는 위협을 단독으로 관리할 역량이 없다. 따라서 '''현재의 신냉전 구도가 지속된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일관계는 자연스럽게 개선될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군사동맹이나 그에 준하는 동맹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민주평화론 역시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오늘날 한일관계의 부정적인 인식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제강점기 문제는 이를 직접 겪었거나 윗세대를 통해 직접 전해들은 세대가 사망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조금씩 옅어져 갈 가능성이 높다. 또한 현대 한국의 경제·외교적 영향력은 더 이상 국제적으로도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며, 군수산업 능력 역시 조선 시대나 구한말처럼 약하기는 커녕 세계 10위권의 무기 수출국으로 올라선 지 오래다. 즉, 우리가 과거와 같이 방어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한 일본은 재무장을 하더라도 한국을 직접적으로 침공할 역량이 없으며,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의 양국은 같은 진영에 속해 있기에 그럴 명분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한일 양국의 가상적국이자 적개심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관리하는 것은 현실적인 과제이다. 수백년 넘게 싸워댄 영국프랑스조차도 독일의 위협 앞에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듯 역사적인 은원은 현실의 총칼 앞에서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과거사 문제를 제외한다면, 한일관계의 현안들은 역내 다른 대국관계에 비해 덜 심각한 편이다. 예컨대 독도 문제는 양국의 국민감정 때문에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고 있을 뿐,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군사적 요충지도 아닌 조그만 무인도에 불과하다. 메탄 하이드레이트같은 독도 해저의 천연자원 이권과 관련된 문제들이 있다고는 하나, 이건 해저밑이면 넘쳐나는 관계로 어디까지나 있으면 좋다는 거지 굳이 한일관계를 파탄내면서까지 절실하다고 보긴 어렵다. 정 공동개발이 필요하다면 역으로 일본 측이 협상 우위를 가진 7광구 채굴권과 연계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기도 하고. 실제로 일본은 독도 문제에 대해 "공인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한일기본조약 당시의 암묵적 입장을 상당 기간 유지해왔으며, 이후에도 한일관계가 나빠질 때 한국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로 쓰긴 했을지언정 조어도 문제에서처럼 대놓고 군함을 보내 충돌한 적은 없었다.
다른 중요한 현안인 일본의 재무장을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기실 서독나치의 잔재를 아직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1950년대에 이미 독일연방군을 창설하고 정상국가화를 이루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본의 재무장은 그 자체로 막을 명분이 뚜렷하지는 않다. 게다가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 이론의 대전제 중 하나는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의지를 관철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으며 보유한다."는 것이고, 실제로 이를 강제적으로 억눌렀을 때의 부작용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미 드러났다. 게다가 한국으로서도 유사시 조선인민군은 어찌저찌 막는다 쳐도 인민해방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자위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재무장을 한들 일본은 한국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은(=한미동맹 단독으로는) 중국을 막기 어려우며" "재무장을 한 일본은 중국에 맞서 더 큰 도움이 되는"''' 이상 우리에게도 마냥 부정적인 일이라 보기는 어렵다. 현재처럼 한일관계가 극한으로 나빠진 상황에선 힘들겠지만, 지금처럼 중국의 위협이 가속화되면서 한국이 일본의 입장을 이해하고 일본도 한국의 안보불안을 해소시킬 대안을 제시한다면[38] 협상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 외의 자잘한 분쟁들도 마찬가지이다. 2019년 한 해 이슈로 떠올랐던 일본의 대한국 경제보복 역시 명분이야 어쨌든 본질적으로는 강제징용, 즉 거사 문제와 얽혀 있는 사안으로, 일본이 딱히 이득을 보는 것도 없이 제 살 깎아먹기를 하면서 한국을 때리고 있는 치킨게임 상황인지라 과거사 갈등이 해결되면 어떤 식으로든 간단히 풀릴 가능성이 높다. 후쿠시마 수산물에 관한 논란 역시 처음부터 일본 측의 논리에 헛점이 많은 상황이었던지라, 한국이 WTO에서 승소한 뒤로는 다소 반발은 했어도 별다른 잡음 없이 유지되어오고 있다.
반면 한국 내에서 북한이나 중국의 군비 확충은 찬반여부를 떠나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며, 항의하고 비난은 할지언정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재무장처럼 지속적인 외교현안이 되지는 못하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한미동맹은 북한과 중국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군대를 확충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외교적 반발을 하느라 진을 빼느니 그냥 거기에 맞서 우리도 군사력을 증강하고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이 훨씬 경제적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토분쟁의 대상 역시 일본과는 독도라는 섬 하나, 중국과는 서해 해상수역(과 산 하나)에 불과하지만, 북한과는 '''전 국토'''이다. 게다가 북일관계에서 현재진행형인 납치 문제같은 걸 생각하면 한일관계의 현안들은 사실 "사소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아무리 한일관계가 악화되어도 일본이 한국을 겨냥해서 미사일을 발사해 민간인을 다치게 한다거나, 한국 정부가 일본인을 납치해 생사도 알려주지 않고 돌려보내지도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일본이 최근 수출규제라는 예상치 못한 강경책을 꺼내들자 한국 내부에서 반발심리가 격화되었던 것이기도 하고.
장기적으로 볼 때, 외교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진실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국익'''을 취하는 것이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전쟁이나 북한의 대남 도발 대신 김정은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부각시키는 반면 한일관계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과거사를 끊임없이 들추는 것도, 결국 문재인 정부가 남북한관계를 개선하고 일본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북외교에서 국민을 설득하기 가장 좋은 이미지와 대일외교에서 일본을 압박하기 가장 좋은 명분을 찾아 도구로 삼은 것일 뿐이다. 반대로 박근혜 정부북한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한편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나 위안부 문제에서 지나치게 양보한다는 비판을 받아가면서까지 합의를 추진했던 것도, 박근혜 정부의 관점에서는 우리를 배신한 중국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접근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요는 만일 과거의 진실보다 더 시급한 현재의 문제가 닥친다면 그에 걸맞는 명분을 찾아 그에 걸맞는 상대에게 적용하는 것이 곧 외교이며, 현재의 신냉전 구도 하에서 중국의 성장이 지속됨에 따라 패권의식과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북한분할안 같은 극단적인 안보 위기가 현실화된다면 국민적인 여론이란 자발적인 인식변화에 의해서든 통제와 검열에 의해서든 쉽게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는 한국이 일본을 (그리고 일본의 관점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적대할 만한 충분한 사유이기는 하나, '''한일 양국이 공동의 위기에 놓였을 때까지도 양보 없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만들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외의 사안들이 당장은 실현 불가능할지라도 대부분 양국이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출구전략이 존재하는 만큼, 한일관계는 장기적으로 우호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6.3. 부정적 전망


민주주의 국가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쉽지 않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여론은 무시하기 어려운 파급력을 지니기도 한다. 비록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고 넘어가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양국 모두에게[39] 도움이 될지라도, '''과거사 문제로 인해 양국 간 국민감정이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면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다른 부분에서까지 감정적으로 충돌하며 더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당장 아베 신조가 자국 중견기업들의 공급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한국에 경제 보복의 칼날을 들이밀고, 코로나 시국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방역 협력조차 한국에서는 "주지 말자", 일본에서는 "받지 말자"는 식으로 국민적 반감을 사고 있는 것이 그 실례이다.
이처럼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인기없는 국익을 운운하기보다 화끈한 강경책으로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려는 정치꾼들이 득세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 국내 정계에서 지일파로 통하던 사람들도 한 번 말 잘못했다간 친일파로 몰릴까봐 의견을 표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일본 자민당 내에서도 지한파는 자국민들에게 자이니치 소리나 들으며 배척당하고 있다.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40]의 비극적인 사례가 시사하듯, 이런 분위기에서는 지도자가 설사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타협점을 찾아내더라도 정치적인 문제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결렬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궁극적 동맹'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신냉전 구도가 '''현재처럼 지속'''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한국일본 모두 중국의 지역패권 장악 시도에 대응할 방도가 한일관계 강화 이외에도 없지 않고, 20세기 중반에 비해 국제정세가 많이 달라진 이상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가 반드시 고착화되리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6.3.1. 한국의 대안 전략과 한계


  • 전략
먼저 한국의 경우 북한 문제가 있다.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북한과 중국이 약화되면 약화될수록 무조건 좋은 일본의 입장과는 달리, 한국은 '''북한을 견제하면서도 일정 부분 끌어안고 가야 하는''' 복잡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다 통일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국과의 관계 역시 정도 이상으로 포기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극단적인 예로 일본 입장에서는 "한반도 교두보의 일부를 되찾는 대신 북중의 강대국화를 허용한다"와 "한국을 반중동맹에 완전히 끌어들이고 자국이 그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두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후자가 더 국익에 부합한다. 열도국가의 최우선 목표는 대륙에서의 단일 패권을 견제하며 역내에서 자국이 경제적으로 쌓아올렸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며, 일본의 예에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궁극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41] 반면 한국은 '''"대미, 대일관계의 부분적 등가교환을 대가로 한 북한과의 통일"'''과 "반북-반중 선봉에 서는 대가로 얻는 신뢰할 만한 한일동맹 체결"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면 '''전자가 더 우선순위'''에 놓여 있다. 반도국가의 최우선 목표는 통일을 통한 대륙으로의 경제적인 (그리고 어쩌면 먼 미래에는 군사적이 될지도 모르는) 진출 가능성이며, 한국의 예에서 일본은 근본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한 유용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의 도전에 맞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역내에서 누려온 지위를 부분적으로라도 유지하려 드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현실적으로 생존에 더 방점이 찍힐 수밖에 없는 처지이므로 오히려 중국의 신흥 패권에 어느 정도 전향적으로 협력할 여지가 남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친중 정책을 펼치고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몽에 동참하니 어쩌니하는 발언을 했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비록 한국과 일본 모두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일본은 엄연히 인구 1억에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지닌 강대국으로서 미국 중심의 질서를 인정하되 부분적으로 역내 패권을 추구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으며, 실제로 일본이 동남아와 중동, 유럽 등지에서 중국과 외교전을 벌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반면 우리는 현재로서는 내수조차 불가능한 작은 국가이기 때문에 통일되기 전까지는 중일이라는 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으로 역내 질서를 선도할 만한 역량이 없으며, 통일된다 치더라도 중국 대륙이 분열되지 않는 한 기껏해야 중립국화 정도나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한국의 입장에서는 민주화되고 선진화된 중국으로부터 오늘날 캐나다 정도의 위치만 보장받을 수 있다면 갈아타기도 고려해 볼 만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중일관계미국러시아의 관계처럼 양국의 체제나 국민감정과 상관없이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전략적 동반자 이상으로 나아가기란 어려운 상대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냉전 구도 하에서 한미일 동맹이 현실화되면 결국 최전선은 일본이 아닌 한국이다. 이미 냉전 질서로 인해 한국전쟁을 겪은데다 오늘날에도 징병제를 비롯해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굳이 일본과의 친교에 안달할 이유가 없다.
예컨대 북한을 어떻게든 개방시켜서 서방진영으로 끌여들여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중국에 맞선 남북미일 동맹을 형성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겉으로는 한미일 삼각동맹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일지 모르나, 같은 한민족이자 한반도 국가로서 부분적으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북한을 동맹 내에 끌어들임으로서 우리의 발언권이 커짐은 물론, 중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닿아야 하는 부담 역시 덜어낼 수 있다. 말하자면 동구권의 붕괴 이후 NATOEU가 취한 동진 전략과 유사하다.
반대로 중국민주화와 선진국화가 이루어진다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미국이 완전히 쇠락하지 않는 한 한미관계는 유지되어야겠지만, 만일 한쪽의 편에 서되 다른 쪽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형태의 중립 외교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한일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더라도 별 신경쓸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인도가 중국을 견제하면서 미국, 러시아와 모두 친밀하게 지내고, 러시아가 중국의 우호국가이지만 중인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기보다는 오히려 중국 견제에 인도를 이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인도, 중국, 미국, 러시아를 각각 한국, 일본, 중국, 미국으로 치환하면 된다.
최근 대한민국 정부가 한일관계를 희생하되 한미관계를 관리하면서 남북관계한중관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대안외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 한계
그러나 한국이 대일관계의 대안으로 고려하는 대북접근전략과 대중접근전략 모두 현재로서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북한의 경우, 수령 절대주의 체제 아래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지도부가 굳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개방에 응할 동기가 부족하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역사에서도 드러나다시피, 외부의 자유로운 문물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지식인들이 늘어나면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도전 역시 필연적으로 증가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북한의 현 실태를 감안하면, 설령 김정은이 의지를 갖고 개방을 밀어붙이더라도 중국처럼 체제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초강대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주지도, 한국처럼 불만을 뛰어넘을 폭발적인 성장을 제공하지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한국과 중국이 돕는다지만, 끝없는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 오랜 폐쇄정책으로 기본적인 인재풀조차 부족한 북한이 마약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데리고 베트남 수준까지라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덧붙여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사회적으로는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지면서 김씨 일가가 저질러온 패악질의 증거들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면, '''과연 북한 주민들이 가만히 있을까?''' 반대로 김정은이 '''그런 상황을 감내하고 개방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우파 일각의 지적처럼 한국의 대북 접근은 북미일 동맹이니 일본의 대안이니 하는 원대한 구상과는 달리 김정은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북한이 설사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성공적으로 개방한다 해도, "국제사회의 정상국가로 복귀하고 경제도 어느만큼 성장한 '''북한이 과연 한국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북한의 지도부가 한국의 전략에 호응하여 남북미일 동맹 구상에 가담하려 든다면 '''과연 중국은 가만히 있을까?''' 이 동맹이 누가 봐도 중국을 겨냥하는 게 분명한 이상, 중국의 선택은 국경이 인접한데다 (아마도) 남북미일 중 가장 약한 고리일 '''북한에 무력을 행사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이가 험악해졌을 한일과 그걸 중재하기 바쁠 미국은, 아직 진의를 확신할 만큼 충분한 신뢰가 쌓이지 않은 북한을 제대로 지원해주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북한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역사적인 이유로 나쁘지 않은 사이인 중국을 등에 업고, 발전된 국력과 정상국가화된 자국의 지위를 이용해 납북 일본인 문제 등을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독자적인 북일관계 개선을 추구하며 한국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자국 대신 북한을 택함으로써 발생하는 안보불안을 해소할 수 있고, 북한으로서는 중국의 안전망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잘만 하면 적화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성사 가능성이 결코 낮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민주국가가 아니기에 (과거 박정희가 그랬듯) 국익에 부합한다면 과거사쯤은 얼마든지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북일관계의 현안 대부분은 북한의 공격적인 외교에 기인하므로 정상국가화된 북한으로서는 충분히 양보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으로서는 현재의 답답한 냉전구도보다도 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어떨까. 우선 서구 학계에서는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이 자연스러운 민주화를 유도하리라는 가능성에 회의적으로 돌아선지 오래다. 기실 중국인들이 공산당 일당독재의 종식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판국인데, 아직까지 중국인들의 대다수는 대국굴기를 이루어낸 현 체제에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시진핑 주석 시대에 들어서는 중국 특유의 권력견제장치인 집단지도체제조차 위협받으며 마오쩌둥 시대로 퇴보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는 처지다. 즉, '민주화되고 선진화된 중화인민공화국'는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표류하고 있는 한일관계의 대안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중국이 선진국화되고 민주화 되었다 하더라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력에 편입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중국의 팽창은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한 이념적 반미라기보다는, 과거 조상들이 누렸던 초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비슷한 예시로 소련 해체 이후 부분적으로나마 이념적인 색채를 청산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반미감정 및 미국에 대한 라이벌 의식은 전혀 식지 않은 러시아를 들 수 있다. 사실 "구 패권국과 신 패권국 간 힘겨루기란 반드시 충돌로 이어진다"는 현실주의 이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담고 있지 않으며, 그나마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한다는 대영제국미합중국 간 헤게모니 전이조차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세계대전이 직전까지 서로를 상정한 작전계획까지 세워놓을 만큼 불신 속에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일본 제국에 맞서 싸운 동맹국이던 미국과 중화민국 역시 전쟁전략과 전후처리를 두고 몇 차례 충돌한 바 있으며, 만약 국부천대가 없었다면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될 소지도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례들을 감안하면, '''중국이 민주화되고 선진화되더라도 미국과 대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물론 해당 시점에서 미중관계가 어떻든 한국의 입장에서는 민주화 되지 않은 현재의 중국보다는 더 안정적인 외교를 할 가능성이 커지기야 하겠으나, 중국에 접근하는 만큼 미국과 멀어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딜레마는 해결하기 힘들 것이고 결국 그 차분은 일본이나 북한 같은 주변국과의 관계로 메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3.2. 일본의 대안 전략과 한계


  • 전략
일본 입장에서는 ''''"믿지 못할 동맹'에 집착하느니 아예 한반도를 포기하고 미일관계를 확고히 하며 스스로 선봉에 서는 비용을 감내한다"'''는 선택지가 있다.
일본은 지난 하반세기 내내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름대로 의욕을 보여온 바 있으나 한일관계는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일본 정계에서는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위안부 합의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내의 정권교체를 이유로 이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말바꾸기,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문희상 의원의 천황 사죄요구 발언같은 무의미한 도발 등에 돌리는 편이며, 이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한국과의 직접적인 우호 관계는 어렵다는 입장이 점점 힘을 받고 있다.
사실 우리는 피해자의 논리에 입각하여 일본이 잘못했으니 당연히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은 '''일단 잘못은 잘못인데 구체적인 청산은 어디까지나 도덕률이 아닌 외교논리 안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러니까 한국 입장에서는 '당해보지 않은' 일본이 뻔뻔하게 오리발 내민다고 불평하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아무튼 현 시점에서 서로 국익을 두고 셈을 해보면 좀 '양보할 만 한' 문제들까지도 과거사를 이유로 양보를 안 하는 한국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사실 이건 옳고 그름 이전에 양국의 경험적 가치관에 가깝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적 외교, 즉 '''"국익을 최우선에 두고 다른 모든 명분은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외교'''로 20세기 전반기에 막대한 성공을 거둔 역사적 경험이 있다. 반면 한국은 조선시대를 지배해온 성리학적 관념의 영향으로 '''눈앞의 이익보다는 옳고 그름과 명분을 최우선'''에 두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비스마르크가 엠스 전보를 조작해서 보불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했던 걸 두고, 누군가는 "독일 제국의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위해서 기민한 전략을 취한 국제 외교가의 영웅"이라 평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도 않은 말을 명분삼아 전쟁을 일으키다니 못 봐줄 전범이다"고 평할 것이다. 정답은 없지만, 전자는 일본의 스탠스에 가깝고, 후자는 한국의 스탠스에 가깝다. 오늘날 국제외교의 근간이 되는 유럽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기만과 배신의 역사가 수도 없이 많으며, 아편전쟁처럼 정말 우리가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은 수준의 전쟁이 아닌 다음에야 "당하는 사람이 바보" 정도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폴란드에게 구원받고는 폴란드를 집어삼킨 유럽 제국들이라든가.. 반면 조선 사대부들은 임진왜란의 구원을 명분삼아 구한말까지도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이런 '''인식의 차이'''가 구한말 조선의 파멸과 일본의 도약을 불러왔지만, 동시에 일본의 전쟁 범죄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피해자 행세를 유발하기도 했으며, 또한 전 세계가 과거사를 청산하고 나아가는 와중에 유독 한일이 과거사 문제로 마지막까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일본 입장에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해 주기 딱 좋은 위치에 있고, 문화적 동질성도 짙은데다 경제·군사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국력을 갖춘 최적의 동맹 파트너이기는 하다. 그러나 단순히 반중동맹 파트너만을 놓고 보자면 호주인도, 동남아시아 국가들 같은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들의 국력이 한국보다 특별히 부족하지도 않으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막강한 경제력과 문화력을 바탕으로 잠재적 파트너들과의 우호관계를 구축해 둔 상황이기도 하다. 즉, 일본은 주요 현안들에서 굳이 양보하면서 애써 못 믿을 동맹에 들러붙기보다 한국이 대륙세력에 접근하는 것을 내버려두되 한미관계를 흔들면서 미일관계에서 상대적인 이익을 얻고, 한국이 열도를 직접적으로 겨냥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관리만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직접적인 역내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는 외부의 중견 강소국들과 연대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이 한국 대신 신냉전의 최전방에 서게 된다는 것은 곧 일본이 직접적인 안보 위협을 받는다는 의미로, 보통의 일본인들에게는 불편한 일이겠으나 일본 정치를 장악한 우파들로서는 필생의 숙원인 보통국가화를 이루어낼 최고의 명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근 일본의 언론 보도 등에서 한미동맹을 음해하려는 시도가 종종 포착된 바 있으며, 아베 신조 정부는 북한중국에 더해 한국에도 은근히 '못 믿을 국가'의 이미지를 씌우면서 '조국 일본이 주변국들로부터 위협을 받으니 하루 빨리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재무장, 평화헌법 폐기, 보통국가화의 단계를 착착 밟아나가고 있다.
만약 한국이 대일관계를 경시하고 대미관계마저 일부 희생하면서 대륙세력에 접근했는데 정작 중국이나 북한이 예상했던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혼자서 독고다이가 불가능한 한국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기존보다 저자세로 미일동맹에 다시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국내정치에서의 반대세력이 이러한 외교적 실패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도 없다. 아베의 계산법이 정확하게 먹혔던 것이 전승절 참가로 한창 중국과 밀월관계를 가지다가 사드 배치 논란으로 뒤통수를 맞고 일본에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케이스이고, 문재인 대통령 역시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이 궁극적인 실패로 판명된다면 파멸적인 역풍을 받으며 전통적인 관계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42]
2019년 일본은 중국의 직접적인 위협을 줄이고 한국의 미일동맹에 대한 외교적 의존도를 높이기 위해 아베 총리가 직접 중국 TV에 나와서 신년 인사를 중국어로 발표하고 정상회담은 물론 실무자급 회담을 급격히 늘리는 등 중일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한일관계 개선이 아닌 대안외교 쪽으로 선회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이러한 의도를 장기적으로 방어하지도 설득하지도 못한 채 외교적 실패를 거듭한다면 한반도 문제에 중국과 일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리는 역사의 비극이 반복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43]
현재 한국이 경제·군사적으로 자기 방어가 가능한 건 어디까지나 북한, 일본, 그리고 한미동맹 유지를 전제로 중국과 일대일로 맞붙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만일 한미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에서 중국과 일본이 모종의 형태로 작당한다면 한국으로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를 막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44]
  • 한계
일본의 외교방식이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자국의 입장만 고집하며 한국을 국제사회의 비이성적인 플레이어로 몰아가는 것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기본 진리를 망각한 태도이다. 모든 교류가 그렇지만 외교 역시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난하고 낙후된 채 동맹 없이 고립된 북한의 안보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파탄국가라고 으름장놓는 것만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자기기만에 불과하듯, 민주국가인 한국을 상대하면서 한국인들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떡만 몇 개 던져주고 무조건 과거를 덮으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일본의 외교적 오판에 불과하다. 과거사가 국민정서에 직결된 만큼 도덕률을 떠나 해결할려는 행보는 오히려 한일관계에 있어서 개선의 지름길을 차단하는, 일본 스타일로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실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냉전의 영향으로 서독과 폴란드 간 과거사 갈등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던 상황에서, 빌리 브란트는 돈이니 조약이니 하는 것들 대신 폴란드에서의 무릎꿇기 한 번으로 여론을 반전시켰다. 오늘날 폴란드는 NATO의 가장 충실한 전위대이다. 그것이 지혜라면 그 또한 지혜가 아닌가.
일본의 한반도 포기 및 대안외교 전략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가진 '선택지'일 뿐이다. 일단 군사적인 면부터 살펴보자. 일본 열도와 한반도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상기해본다면, (미국을 제외하고) 저 멀리 떨어진 국가들과 친목을 다져본들 한국을 적대함으로써 발생하는 열도의 안보불안을 해소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호주나 인도, 대만은 저 멀리 떨어진 일본이 인접국과 벌이는 분쟁에 개입할 의지도 이유도 없으며, 그 대상이 중국이나 북한도 아니고 역시 서방세계의 일원이자 선진국인 한국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설사 한국이 반일이 아닌 중립을 취한다 해도, 한반도가 일본 열도의 방파제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일본은 직접적으로 북한과 중국의 공세에 노출되는데, 과거의 일본이면 모를까 현재의 일본은 순수 외교전에서조차 중국에게 우위를 점한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과 한미동맹이 단독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없듯 일본과 미일동맹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일동맹의 해상전력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육상전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과거 프랑스[45]독일[46]이 영국을, 그리고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열도는 고립과 봉쇄에 취약하다. 그나마 영국은 식민지라도 있으니 버텼지, 산지인데다 식량자급률도 밑바닥인 일본으로서는 답이 없다.
더하여 미국이 이런 꼴을 가만히 내버려둘 가능성도 적다. 한미일 공조는 21세기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일본이 싫답시고 한국이 자청해서 미일동맹을 걷어차고 중국에 붙는다면 모를까, 일본이 한국 싫답시고 한국을 중립 혹은 적이 되게 만들면 미국으로서는 동북아시아 최대의 주한미군 기지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육군 강국이자 산업지구를 상실하는 셈이다. 일본이 그 반대급부를 미국에게 제공할 수 있다면 모를까, 현재의 일본은 경제와 군사 양면에서 그럴 능력이 부족하다. 30년 전과 달리 지금 일본의 경제는 미국에 뭘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굳이 뭘 제공한다 치더라도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가 활성화된 한국이 더 가망성이 있다[47]. 또 일본 육상자위대가 한국 육군 수준으로 재무장하는 건 이미 한 번 뒷통수를 맞은 전례가 있는 미국으로서도 꺼림칙한 선택지일 뿐이며, 일본 스스로도 징병제를 포함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48].
대신 일본이 북한이나 중국에 접근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건 바로 윗 단락에서 서술된 "북한과 중국이 자기네들 뜻대로 움직여 주리라는" 착각을 반복하는 꼴일 뿐이다. 당장 한일 갈등의 가장 큰 주범인 과거사 문제는 북한 및 중국과의 문제이기도 하며, 그나마 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패권을 추구할 의도도 능력도 없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은 역내 주도권을 두고 일본과 경쟁하는 사이이다. 게다가 일본은 대만, 티베트, 위구르 등 중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소수민족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본은 중국에 접근해봐야 믿을 수 없으니 이처럼 중국을 견제할 명분론적 레버리지를 버릴 의향은 없을 것이고, 역으로 중국도 이런 일본의 의도를 신뢰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게다가 중국 입장에서 '미일동맹에 버림받은 한국'은 애매한 사안들에서는 중립을 지키며 중일관계 문제에서만 간간히 자국 편을 들어줘도 충분한 도움이 될 만큼 매력적인 파트너이고, 어차피 경쟁해야 할 일본보다는 당연히 이쪽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반발도 문제다. 일본이 미국의 안전 보장과 경제적 파트너쉽 모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역사적인 정책 선회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한국이 그러하듯 중국을 이용할 수는 있으되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일관계를 완전히 포기하고 대안외교로 완전히 전환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과거사는 주변국과의 갈등을 떠나 일본사를 정립하는 취지에서라도 언젠가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문제[49]이고, 일본 우파가 재무장과 개헌을 숙원으로 삼든 말든 핵무기도 없는 일본이 다시금 세계대전을 일으켜봐야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다. 격차가 여전히 크기는 하나 한국이 느리게나마 조금씩 성장하는 반면 일본이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안 그래도 몇 개 없는 동북아의 "정상국가"와 등을 돌리는 대가라기엔 일본이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빈약한 셈이다.
아베 정부는 꾸준히 한국을 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한국에 대한 관계개선 의지를 표명하고 있고, 자국의 목표는 거칠게 말해 "한국이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지 "한국을 적대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 차례 분명히 했다.[50]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일본 내각에도 한일관계가 비생산적 표류를 하고 있으며, 현 상태가 결코 정상이라거나 "뉴 노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에서 스가가 신임 총리로 등장하고, 미국에서도 한일관계 개선을 압박하리라고 예측되는 조 바이든이 당선되면서, 한일관계 역시 코로나바이러스 판데믹이나 2020 도쿄 올림픽 등 산적한 현안들에서 협력이 필요하다는 공동의 인식 하에 서서히 해빙기를 갖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일본의 "대안 외교 전략"이란 어쩌면 일본이 한국의 양보를 유도해내기 위한 블러핑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6.4. 결론


이처럼 한일관계는 가까워지면 참 좋기야 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대안 외교에 비해 분명 안정적이지만 현상유지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일본 입장에서는 여전히 미결 상태인 역사청산 문제와 맞물리며 자국의 합리적인 국익추구에 안 내도 될 불협화음을 낼 가능성이 높다는 한계가 있다.
사실 일본의 재무장이나 보통국가화는 그 자체로는 분명히 명분이 있고, 일본이 군사협정이나 영토분쟁에서 자국의 입장을 강경히 관철하는 것 역시 일본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의 한국처럼 애매하게나마 동맹의 동맹에 해당하는 국가들끼리라면 원래 큰 반발 없이 합의할 수 있는 일들조차 경계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은 근본적으로 역사청산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일본의 원죄이다.
일본이 과거사를 끝없이 부정하기 때문에 우리 정부에서 위안부 문제로 받은 돈을 나누어 배상해도 될 일임에도 끝까지 사과와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고, 중국의 부상에 맞서기 위해 한국 입장에선 오히려 적극 지지해야 할 재무장에 격렬한 반발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이야 어차피 적성국가이니 일본이 무슨 짓을 해도 불편하게 받아들였겠지만, 적어도 한국이 일본의 '합리적인' 정책에마저 클레임을 걸기 시작한 건 일본이 그만한 신뢰를 주지 못했던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이든 일본이든 지역 정세에 종속된 처지에서 현재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고, 각국의 입장을 부정하면서 상대에게 무조건적인 양보를 요구해 본들 받아들여지기는 커녕 당연히 관계만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한일관계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한국의 '친북-친중' 전략이나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 모두 장밋빛 가능성을 상회하는 명확한 위험성이 존재하기에, 양국 간의 인식과 교류를 적당한 수준에서 유지·관리하다 보면 정세가 변함에 따라 다시 양국이 친밀해지는 상황이 올 것이다. 오랜 라이벌이던 영국프랑스가 양차대전에서 공동의 적을 두고 협력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교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고, 독일프랑스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이념적으로 청산할 건 청산하고 용서할 건 용서한 뒤에 유럽연합으로 뭉칠 수 있었듯, 한일관계의 궁극적인 미래는 결국 공동의 적인 북한과 중국 문제가 어떠한 형태로 풀리고 일본의 역사 청산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도 2000년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권에서 말하길, 아무리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과거사가 있다 하지만 미래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해선 양국 간에 과거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히 과거를 청산하고 새 관계로 발전시켜야 하며, 한국인 역시 일본에 대해서 공과 과를 분명히 하고 세계 각국처럼 하나의 '외국'으로 봐야 한다는 원론적 주장을 했다.
'''외교란 '상대국의 이익과 자국의 이익을 합치시키는 것''''이라는 격언이 있다. 한일관계에서 양국이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한일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양국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상황이며,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서로의 외교우선순위에서 덜 중요한 부분을 양보함으로써 더 중요한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 받겠다는 전향적인 접근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이 서로를 잘 아는 것이 교의의 근본'이라는 경구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한일관계를 관통하는 조언이자 경고라 하겠다.

7. 참고 문헌


  •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1: 일본1 일본인 편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13~16.

8. 관련 문서



[1] 닛칸칸케이, 일한관계[2] 2020년 10월 IMF 기준[3] 2020년 10월 IMF 기준[실질적] 엄밀히 말하면 일본에는 국가원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따라 일본국 천황은 '국가원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국가의 상징'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의 지위만이 존재한다.[4]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부터가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약이다. 한국 외에 일본에 피해를 입은 여러 나라에에도 귀찮은 배상 문제 같은 것은 전부 각국이 알아서 하도록 하였다.[5] 이것은 배고픈 한국에 대한 배려로 미국은 일본이 거액을 지급하도록 요구하여 미국이 주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당시 시장환율은 달러당 300원으로 2400억을 받은 셈이다. 이는 1965년 예산의 2.8배에 해당한다.대한민국/예산참고.[6] 훗날 참여정부는 보다 많은 피해자들에게 훨씬 증액된 금액으로 보상하였다.[7] 한국 정부의 입장으로는 반정부단체[8] 현재의 한미 양국 역시 동맹관계임에도 감정의 골이 적지는 않다. 백제와 왜 역시 아무리 동맹일지라도 수백년간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안 좋은 감정도 쌓였을 수 밖에 없다.[9] 우선 인구 자체가 신라시대보다 조선시대에 몇 곱절 늘었음을 상기해보면 된다.[10] 다이묘(영주)의 사병들이나, 혹은 수군이라고 불렸던 사병 집단을 말한다.[11] 비공식적으로 일부 파병하기는 했다.[12]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9060032920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9-06&officeId=00032&pageNo=1&printNo=8907&publishType=00020.[13]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9190032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9-19&officeId=00032&pageNo=1&printNo=8918&publishType=00020.[14] 정재정,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서울: 역사비평사),[15] 공정거래법, 카르텔방지법, 반독점법 등이 대표적이다.[16] K-stat: 한국의 10대 무역국 수출국/수입국 버튼을 누르면 1988년까지 이러한 무역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17] 미군정이 광복 후 한국 내의 일본의 재산을 처분한 부분도 한국에 있는 일본과 일본 국민의 재산에 대해 미 군정 처분의 적법성을 인정한다고 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가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 실제로 회담 초기에 일본은 적산의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대한 해석이 담긴 외교문서를 정부에 보내왔다. 내용은 '일본은 대한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 외무성은 우리 측 회담 대표부에 서한을 다시 보내서, 적산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공식 철회했다.#[18] 독일은 어느 정도로는 일반 국민들의 과거사 인식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간의 인식이 무색하게도 독일의 과거사 청산은 힘있는 유대계와 서방 열강들에게만 사과와 반성을 표하고 힘없는 독일 제국 시절 아프리카 식민지배 피해자들은 모르쇠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19] 예컨대, 일본에서 엘리베이터 고장이 나면 '고장'이란 직설적 표현이 아니라 '수리중'을 쓴다.[20] 이렇게 된 것은 일본 정계의 의사결정 방식과 관련이 있었다. 내각책임제의 일본에서는 당시 정계 실력자들의 합의에 따라 중요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은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도 언급하였지만, 냉전시대 자유진영을 결속시키고자, 일본으로 하여금 배고픈 한국에 막대한 금액을 지급하도록 만들었기에 받은 것이다. 이승만 정부때부터 시작해 15여년간 끌어온 과정은 회담 개최와 결렬 다시 개최하는 과정이 반복된, 세계 외교사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줄다리기 협상이었다. 당시 반대 여론에 경청하고 수렴해 설득해가는 과정을 거쳤다면 미국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시간만 끌어가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맹으로 판단하여 우리나라가 손해만 보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21] 다만 이 부분은 일본의 정치인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으며, 특히나 아베 총리의 한일 무역 분쟁에서도 어느 정도 증명되고 있다. 즉 내셔널리즘을 악용하는 것은 한일 양국 모두에게 지적되는 비판점이라는 것이다.[22] 출처[23] 포항제철을 비롯해서 한국 지하철 1호선도 일본 기술의 도움을 받아 건설했고 국내 대기업들의 초창기 역사를 보면 일본과의 협력은 빠지지 않고 나온다.[24]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25]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26] 10월 추산[27]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였다.[28] 10월 추산[29] 물론 IMF 등과 기준은 다르다.[30] 문화 개방 이전 전자상가에서 일본산 만화,게임,잡지,음반을 구입할 수 있었다.[31] 반대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들여오는 매체 역시 일본에서 로컬라이징 되기도 한다. 가장 빈번한 것이 웹툰.[32] 최근에는 한국 요리가 더욱 인기를 얻으면서 닭갈비, 떡볶이 등 매운 요리를 일부러 찾는 일본인도 늘었으며, 이전에는 일본에서 파는 한국 음식은 매운 맛은 거의 없고 달기만 했다면 최근에는 한국에서 파는 것 못지 않게 매콤한 음식을 파는 경우도 많아졌다.[33] 출처: 2013년 7월 19일 산업자원통상부-보도자료, 사무관 김형태[34] 출처: 2013년 7월 19일 김선민[35] 우리나라의 보수진영과도 비슷한 양상인데 북한과의 미적지근한 태도, 중국과의 친목도모를 극좌진영의 공산화라고 생각하는것과 비슷하다.[36]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두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 전체를 자국의 영토로 규정하며, 한국전쟁휴전일 뿐 종전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대북전략이 남북통일을 기저에 두는 것처럼, 북한 역시 적화통일 야욕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37] 물론 중국은 한일이 아닌 미국을 경쟁자로 상정하고 세계 전략을 추구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중국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취하는 태도들조차 주변의 소국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이 된다.[38] 예컨대 기뢰·소해 전력처럼 열도국가의 방위에 필수적인 해상전력에 집중하고 육상자위대해병대처럼 유사시 한반도를 건드릴 수 있는 전력은 제약하기로 약속한다거나, 평화헌법 개헌 논의 과정에서 유사시 한반도 개입을 억제할 조항을 첨가한다거나, 지소미아를 확장시켜 한일이 관련 군사정보를 더 긴밀히 공유한다거나.[39] 한국 입장에서도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일본의 전쟁범죄 피해자든 대부분 사망하였거나 사망을 앞둔 상황에서, 한 세기 전의 일로 티격태격하느라 현재의 정치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느니 적당히 받을 거 받아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방비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게 합리적이다. 반대로 일본 입장에서도 한국이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매달린들 일본제국이 돌아올 것도 아닌 이상, 솔직하게 범죄를 시인하고 현재의 외교에서 한국의 협조를 구하며 역내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유럽의 실례를 보면, 연합국은 나치즘이 여전히 독일 정계를 위협하던 50년대에 서독의 재무장을 용인했으며, 로베르 슈망 등 당대의 지식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의 실패를 교훈삼아 독일에 과도한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거나 영토를 빼앗는 대신 EEC의 형태로 서로의 경제적 약점을 해소할 수 있는 동조화(커플링)을 추진하였다. 반대로 독일 역시 폴란드의 그단스크(구 단치히)나 프랑스의 알자스-로렌(구 엘자스-로트링겐),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구 쾨니히스베르크) 등 실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영구적으로 포기하면서까지 과거의 적성국에게 신뢰를 주려 노력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영프독 3국은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독일은 전범국의 멍에를 넘어 실질적인 유럽 연합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다. 한일 양국의 문제는, 서로가 양보하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는데도, 상대를 지나치게 불신하며 눈앞의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뻐팅긴다는 것이다.[40] 이스라엘의 전쟁영웅이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정에 불만을 가진 자국 극우파의 손에 암살당했다.[41] 영국이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유럽의 통합에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윈스턴 처칠드골에게 "영국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유럽이 아닌 대서양을 선택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42] 실제로 2020년 6월 북한에서 민간 차원의 대북전단 살포 자제를 촉구하며 제재하지 않을경우 남북정상회담을 무위로 돌려버리겠다고 협박하자 몇 시간만에 법 개정까지 검토할 것을 밝힌 바 있다. 지난 몇십년간 인질외교에 도가 튼 북한 정권이 해당 회담 결과물들의 의의를 모를 리가 없다. 트럼프 또한 코로나와 흑인인권시위 등으로 개판이 된 국내 정치판을 뒤집으려면 북미관계 외에 마땅한 수가 없어서, 북한이 저 두 회담을 가지고 협박하면 한국과 미국은 아니꼽더라도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판국이다.[43] 물론 적과의 동침이 계속될 순 없고, 독소 폴란드 분할 이후 독일이 뒤통수를 치며 독소전쟁이 터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소련이 뒤통수를 맞은 게 고소하다고 해서 '''죽었던 폴란드인들이 살아 돌아오겠는가?''' 2차대전에서 폴란드는 소련과 중국 다음가는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입었고, 그 전쟁범죄의 가해자 중 하나인 소련이 승전했기 때문에 전후 합당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한국으로서는 어디까지나 "독일"과 "소련" - 즉 일본과 중국 - 이 작당해서 "저 놈부터 조지고 생각하자"는 식으로 한국을 압박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둘 중 적어도 하나와는 우호 이상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44] 물론 국제사회가 예전처럼 군사적인 점령과 식민지배를 허용하지는 않겠지만, 국가가 종속국이 되는 방법은 꼭 직접적인 지배만 있는 것이 아니다.[45] 나폴레옹대륙봉쇄령[46] 크릭스마리네 유보트의 봉쇄 작전[47] 아무리 기술이나 역량이 뛰어난 일본이라 하더라도 지금같이 뒤쳐진 첨단 산업 부분을 단숨에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올리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를 책임져야 할 일본의 대기업은 도산하거나 타기업에 흡수 합병된지 오래다. 더욱 암울한 것은 아직 4G 기반도 못살린 일본의 인프라로선 5G도 언감생심이다. 2020 도쿄 올림픽을 최초의 5G 올림픽으로 치루겠다고 선언했지만 제반기술도 없다보니 한국의 삼성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열악하다.[48] 당장 아베가 오매불망 바라는 평화헌법 개정도 일본 국민들이 반발하는 판국에 징병제같은 악수를 두는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다.[49]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제국은 당대 전세계에서 기술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장 빠르게 진보하며 단기간에 열강으로 도약했음은 물론 글로벌 패권까지 꿈꾸던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본인들의 '자랑스러운 조국'은 '''어째선지''' 이길 수 없는 전쟁으로 치달은 끝에 패전하고 해체되었으며, '''일본의 진정한 전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후의 민주주의와 평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겉보기엔 찬란했던 제국이 불과 10여년만에 파멸했던 이유를 이해하려면 군국주의천황제 파시즘의 문제를 파고들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문제를 미국이나 연합국, 혹은 세계정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일본 극우들의 태도는 훗날 '''자신들의 조국이 같은 기로에 섰을 때 같은 오판 끝에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한국의 교과서는 구한말 패망사를 폐쇄적인 국정 운영과 당파싸움, 시대착오적인 체제가 낳은 결과라고 가르치며 반성하고, 독립 이후 다시는 세계적인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냉전의 최전방에서 자본주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국제주의적인 선택을 해왔다. 중국 역시 부패와 자만심이 잉태한 결과물인 치욕의 세기를 반면교사삼아, 시진핑이 발톱을 드러내기 전까지 반 세기 가량 절치부심하며 도광양회의 자세로 실력을 키워왔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입장이 다르니 일본인 입장에서 굳이 식민지배제국주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치더라도, 일본의 자칭 우익들이 진짜 자기네 조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군국주의파시즘, 정신주의에서 비롯된 여러 비이성적인 정책결정 과정, 그리고 그 와중에 저질러진 수많은 전쟁범죄만큼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마땅한 것이다. 누구보다 국가주의적일 구 일본군 내에 해군반성회같은 집단이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일제 패망사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그건 주변국에도 비극이겠지만 결국 일본의 미래에도 심각한 손해를 미칠 뿐이다.[50] 물론 백색국가 제외 및 수출규제 등으로 일본이 한일관계에서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지소미아는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피력해 왔고, 한국이 협정 종료를 위협하자 주일대사를 불러 항의하기까지 했다. 만일 일본이 한국을 정말로 적대국으로 본다면, 지소미아에서도 일본이 먼저 파기하자고 나서지 않겠는가?[51] 2020년 11월 15일부터 한국과 일본은 RCEP 회원국이 되었다.[52] 한국도 TPP에 가입할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