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리방쯔

 

高麗棒子/高丽棒子(Gāolí bàngzi)
한국 한자음: 고려봉자
1. 개요
2. 상세
3. 유래
3.1. 고구려 유래설
3.2. 방자 유래설
3.2.1. 방자 유래론에 대한 반론
3.3. 일제강점기 시절 유래설
3.3.1. 일제의 이간질설
3.3.2. 일부 조선인 지주들과의 갈등설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이는 중국 욕설. 줄여서 그냥 ‘방쯔’라고도 하지만 한국에선 '빵즈'라는 표현으로 자주 번역된다.
중국에서 한국인이나 조선족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며, 한국인 외에 북한인, 산둥성 사람에게도 사용한다. 더욱 심화된 '''동북공정'''의 영향으로, 2019년 전후부터는 고려를 뜻하는 '가오리'는 빼고, 그냥 '빵즈'라고 욕하거나 '한궈(한국) 빵즈'라고 바꾸어 부른다. 가오리방쯔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발음은 '까오리 빵즈'.

2. 상세


한국식으로 읽으면 고려봉자(高麗棒子),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고려몽둥이', 의역하면 '고려놈'이라는 뜻이다.[1] 중국에서 방쯔라는 건 주로 행동에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사람들에게 자주 붙여지는 별명인데 중국에서는 산둥 성 사람들에게 산둥 방쯔(山東棒子)라는 별명을 사용한다.
'방쯔'는 중국에서 남성기를 뜻하는 은어로도 쓰인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몽둥이를 남성기를 뜻하는 은어로 쓰기도 하니 이 같은 경우는 특정 국가를 비하하는 욕설로는 보기 힘들듯.
그 밖에 방쯔란 말이 저고리식의 한복을 지칭한다는 말도 있고 그 밖에 중국 북방 사투리로 '가난뱅이'를 지칭하는 '방쯔'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개의 별명이 그렇듯이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의견만 분분할 뿐이다.
한국어로 친다면 강원도 감자바위와 비슷한 어감인데 약간 비하의 의미는 있지만 그냥 별명이기 때문에 흥분할 것 없다는 사람도 있고[2] 한국인을 경멸하는 비칭이라며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원래 별명이란게 좋은 의미를 가진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이 경우는 특히 의도가 친근함 보다는 비하에 더 가깝다. 그런데 한국인이 들으면 전혀 욕같이 들리지 않기 때문에(...)[3] 그냥 씹거나 같이 웃어주면 된다.
사실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중국인들은 저 말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비하적 표현이라는걸 잘 알기 때문. 하긴 당연한 게, 한국인도 같은 한국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 앞에서 대놓고 '짱개', '쪽바리'라고 하고 있으면 나라 망신으로 여기며 안 좋게 쳐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족 비하욕은 부모욕과 함께 욕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상욕이므로 원래 해당 욕이 쓰이는 사회에서도 경멸받게 되어 있다.
참고로 연변조선족들은 한족들의 가오리방쯔에 대한 대꾸로 '쭝꿔쭈(中國猪,중국돼지)'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돼지새끼라는 말은 '개새끼' 보다도 강도가 낮아 별 모욕이 안되지만 중국에서는 매우 심한 욕설에 해당된다. 한족들을 돼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한족들이 위생을 청결하게 관리하지 않아 더럽다는 의미로 쓰이면서 부터이다. 그래서 조선족들은 한족들에게서 뙤놈냄새가 난다고도 한다. 여기서 '뙤놈(되놈)'이란 물론 중국 한족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욕설에 밀려나서, 젊은 중국인들은 돼지라는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3. 유래


조선국의 백성들을 세속에서 고려봉자(高麗棒子)라고 부른다. -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1751)

수십 명 아이들이 떼를 지어 가오리방쯔(高麗幇子)라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다. - 홍대용(1731~1783)의 《담헌서(湛軒書)ㆍ연기(燕記)[4]

1700년대에 이 말이 쓰인 사실을 청나라조선의 문헌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3.1. 고구려 유래설


가오리방쯔를 한족들의 고구려인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경우이다. 알다시피 가오리(高麗)는 고려(고구려), 방쯔(棒子)는 몽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중국 한족들에게 있어 용맹한 고구려인들은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고구려와의 수많은 전쟁(대표적으로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중에 많은 중국 한족 병사들이 고구려에 포로로 붙잡혔었는데 당시 고구려인들(또는 한족 포로들을 관리하던 고구려 병사들)이 자신들을 침략하다 포로가 된 한족 병사들(당연히 무장해제가 된 상태였을 것이다.)을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팼고 이후 고구려에 포로로 붙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한족 병사들이 그 당시 고구려인들에 대한 두려움을 '고구려 몽둥이' 즉, '가오리방쯔'라고 표현하면서 가오리방쯔라는 비칭이 유래됐다는 설이다.
자신들을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패던 무서운 고구려인들을 지칭하던 가오리방쯔(고구려 몽둥이)라는 비칭은 이후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예 중국에서 한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멸칭으로 정착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의 주장이 대부분 그렇듯 특별한 증거는 딱히 없다. 하지만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이 학설에 대해 듣고 자라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고려봉자(高麗棒子, 가오리방쯔, 고려몽둥이놈)의 자매품인 일본귀자(日本鬼子, 르번구이쯔, 일본귀신놈)라는 단어도 제국주의 시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귀신같이 무섭다며 쓰인 표현이나 오늘날에는 그냥 일본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비칭로 쓰이는 것처럼 고려봉자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3.2. 방자 유래설


2012년 중국의 남경대학 학보에[5] 황푸지(黃普基)라는 이가 가오리방쯔의 방쯔는 한국 관아의 심부름꾼인 방자[6]에서 나온 단어라고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원문. 번역문.
이 글에 의하면 고려봉자라는 단어의 최초 출현은 청나라 강희제다. 청나라 강희제때 왕일원(王一元)의 요좌견문록(遼左見聞錄)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공사(貢使)의 종자(從者) 이외에, 오가면서 일을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빵즈(棒子)'라고 불렀다. 그 나라(조선)에서 부녀가 음행을 저지르면 관기로 만드는데, 관기가 자식을 낳으면 '방자'라고 했고, 일반 백성들이 멸시했다. 머리는 봉두난발이며 망건을 할 수 없었고, 만리를 걸어가도 말을 탈 수 없었으며, 풀을 깔고 땅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고, 구들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나라안에서 천한 일을 하는 자들이다."
사절단에 포함된 노비인 방자가 하도 민폐를 끼치다보니 방자라는 단어를 멸칭으로 쓰게 되었고, 그게 조선인 전체의 멸칭으로 어의가 확장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유일하게 문헌적 근거, 그것도 17세기 지식인이 직접 저술한 문헌에 있는 주장이다.[7]

3.2.1. 방자 유래론에 대한 반론


'''하지만''' 최소한 명나라 시절에 이미 방쯔가 욕설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때 사람이 이런 주장은 시기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어원에 대한 주장이 근거를 가질려면 언어학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정합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시기적으로 과거의 주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근거가 있다고 한다면 조선 시대에 나온 그 수많은 한자부회의 민간어원들도 전부 근거 있는 얘기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설사 당대인의 주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감자탕의 어원이 감자뼈에서 나왔다는 엉터리 얘기가 바로 현재에 살고 있는 당대인들에게서 나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이 역사 기록과의 차이다. 역사 기록은 시대적으로 앞서는 기록이 뒤에 나오는 기록들에 비해 월등한 권위를 가지게 되지만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언어학에 부합하는 근거를 가지지 않는 이상 시간적으로 앞선다고 해서 특별히 권위를 가진다고 할 수 없다. 하나의 어원을 찾으려 할 때 발음의 유사성은 대단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 항상 주의해야 한다. 어원을 찾을 때 언어학에서 인정하는 엄밀한 과학적 방법을 따르지 않고 발음이나 의미의 유사성만을 보고 직관적인 연상이나 추정을 하는 건 언어학의 금기에 가깝다.
하지만 청나라 왕일원이나 황푸지의 주장은 '''바로 이 금기를 바로 범하고 있다.''' 민간어원, 가짜동족어 문서를 참고하라. 다만 가짜동족어는 어원이 같으면서 의미가 다른 단어들을 말하는 거라 이 경우와는 정 반대다. 이 경우는 민간어원과 가짜동계어가 합쳐진 거라고 해야겠지만 가짜동계어는 아직 문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 방자에서 방쯔로 넘어가는 음운 변화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 방자의 한국어 음은 bangja 인데[8] 방쯔의 음은 bangzi다. 한국어에서 子는 ja로 발음되고 중국에서는 zi 로 발음된다. ja 발음이 zi 발음으로 변하는 데 관한 해명이 필요하다.
  • 음운 변화에 대한 설명 대신 저 글에서는 장황하게 한국 노비의 처지와 행실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을 곤장으로 처벌하는 것 때문에 房子 혹은 幇子가 棒子로 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먼저 방쯔가 방자에서 나왔다는 결론을 내려두고 뒤에 이유를 억지로 끼워 넣는 것에 불과하다.
  • 중국에서 가오리방쯔라는 단어가 나오기 이전 명나라 시대에 이미 방쯔가 욕설로 사용되고 있었다. 위의 주장이 사실이 될려면 반대로 가오리방쯔라는 단어가 먼저 사용되고 그 뒤에 방쯔가 욕설로 사용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간 순서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
  • 윗 글의 저자는 방자를 한국 노비 계층에 대한 총칭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방자는 관아에서 심부름하는 심부름꾼에 대한 칭호이지 천민 계층 전부에 대한 총칭이 절대 아니다. 조선의 중국 사행에 방자가 끼어 있었다고 해도 고위직 몇 명의 심부름꾼 몇에 불과했지 사행 인원 대부분이 방자라고 불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 저자는 주로 노가재연행일기에서 인용하여 한국의 사신 행렬에 소속된 천민들이 저지른 여러가지 불량한 소행들을 말하면서 전부 방자가 저질렀다고 적고 있지만 정작 저들 중에 방자는 한 명도 없다.
어떤 어원을 설명하려면 발음에 대한 부분부터 들어가야 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인데도 불구하고 윗 글의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한 흔적조차 없다. 단지 앞글자의 발음이 같고과 뒷글자의 한자가 같다는 점을 가지고 논지를 펴고 있지만 당대 중국인 대중이 한국 대중이 사용하던 한자를 알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또 윗 글의 저자는 송라역자 정잡노미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잡종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노가재연행일기 원본에 나온 이름은 정잡노미가 아니고 정잔노미(鄭自卩老味)이다. 卩는 이두나 구결에서 "ㄴ" 받침을 나타낸다. 잡종이란 뜻이 아니고 집안의 막내이거나 실제 덩치가 작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국어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고, 저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준 사람이 잘못 가르쳐줬을 수도 있지만 저자가 한국의 성씨나 천민 계급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것은 확실하다.
윗 글의 저자인 황푸지(黃普基) 씨를 검색해보면 윗 글 빼고는 연행록에 대한 논문을 썼다는 사실만 나오는데 역사학 관련 졸업생이거나 연구자로 보인다. 윗 글도 아마 연행록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지만 저자가 언어학에 관련된 지식이 부족하고 한국의 방자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위에 올렸듯이 여러가지로 헛점이 많다.
특히 방자를 한국의 천민계급 전체에 대한 총칭으로 오해하고 있는 점이 치명적이다. 저자는 사신행렬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전부 방자가 한 짓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방자로 불렸을 사람은 사실 한 명도 없다. 사실 숫자가 제한되는 사신 행렬에 개인 심부름꾼을 끼워넣기는 어려운 일이라서 600 명 가까운 사신 행렬 중에 진짜 방자라고 불렸을 사람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고 1-2명 많아봤자 3-4명에 불과했을테니 솔직히 당시 요동 지역에 살던 중국인들이 방자라는 한국 단어를 알아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다만 윗 글이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뒤에 이를 보완하는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은 약간 남아있기 때문에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고 이런 주장도 있다는 정도로만 알아두는 게 좋을 듯 하다.
한자학에 대한 오랜 연구와 축적 때문에 중국의 언어학, 음운학은 그 폭이 넓고, 깊이도 깊다. 이들 중에 한국어가 가능하고 한국 역사에 정통한 이가 나오고 다른 자료들이 더 발견된다면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이 나와 줄 수 있다.

3.3. 일제강점기 시절 유래설


위 문헌 기록을 통한 고증이 있기 '''전에는''' 일제강점기 시절과 관련된 유래설이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명나라 시절에 이미 방쯔가 욕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일제강점기 유래설은 시기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3.3.1. 일제의 이간질설


청나라 말기부터 해서 만주지역에서는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충돌이 잦았다. 만주 침략에 대한 밑준비로 일제는 언론이나 잡지등을 통해 조선측에 혐중국인 정서를 부풀리거나 사고를 조작하는 등 민족 갈등을 유발시켰다. 충돌이 일어나면 '대일본제국 2등신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무력개입하고 중국인 지주들은 땅을 뺏기고 쫒겨났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일제가 일부러 식민지 백성 조선인보다 못한 처우를 중국인이 당하는 듯 느끼게 이간질시키는 술책을 썼고# 이주된 많은 조선인들도 일제의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강제 이주당해 통제된 생활과 엄격한 규제 속에서 마치 수용소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물론 세뇌작업도 심하게 했다.# 분명히 피해자인 조선인이 상당히 많다. 즉 저런 갈등은 일제의 이이제이 전략에 말려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일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주를 먹을 셈이고 일제에게 땅을 잃고 수탈을 받는 조선인 측에서는 조선 땅보다도 만주로 가는 것 혹은 피해가는 쪽에 희망이 있었는데 청-중화민국의 영토인 만주에 땅을 얻으려면 청국인-중국인으로 민족을 바꾸는 것이 필요했지만 일제 강점 이후 조선인이 국적을 바꾸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런 만주라는 땅을 두고 애매한 관계가 얽혀서 만주국 건국을 앞둔 북방에서는 중국인과 조선인 vs 일본으로 침략에 맞서는게 아니라 만주로 살 길을 찾는 조선인과 침략 목적으로 그 편을 든다는 명분을 백분 활용하는 일본 vs 중국으로 만주 땅을 노리는 구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은 일본의 앞잡이'라는 인식이 생기고 여기에서 앞잡이라는 의미의 고려봉자가 나온 것이라고. 일본은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펴는 것을 가장 경계했기 때문에 만주에서 민족 이간질 차원의 여러 장치를 두었는데, 그 한가지로 주로 조선인에게 만주 지역에서의 중국인 감시 등을 맡겼다. 실제 만주국 하급 공무원이나 하급 군경은 일본인이 직접 안하고 조선인들을 주로 이용했는데 특히 경찰들 중에 조선인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때 조선인들이 반기를 들 것을 경계해 일본인들과 같은 총검을 지급하지 않고 몽둥이만 지급했다는 물증이 있는데, 이것과 연관이 있어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만주에서 일제의 경찰로 근무하던 몇몇 조선인 경찰들이 육모방망이 같은 몽둥이를 들고 중국 한족들을 구타했단 것. 그런 상황속에서 가오리방쯔 라는 멸칭이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일제면서 탄압은 조선인에게 떠밀어 자신들은 손에 피를 안 묻히겠단 것.

3.3.2. 일부 조선인 지주들과의 갈등설


일본이 만주 중국을 지배했을때 일부 조선인 지주들도 만주에 터를 잡았는데 그때 거주하면서 취했던 쌀이 만석이 넘는 만석꾼들이 되었고 중국인들과 만주족들을 소작농으로 쓰면서 당시 중국 만주에서 살던 중국인과 만주족들의 여성들을 첩으로 취하고 그것에 항의했던 중국인들과 만주족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쫓아내면서 천시와 멸시를 하여 고려봉자(고려몽둥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일부 조선인들은 중국인 여성과 만주족 여성들을 첩으로 취했고 그 모습에 중국인 남성들이 조선인 남성들을 보고 아랫도리 몽둥이를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이라고 비하한 것이 유래가 됐다는 설도 있다. 즉, 조선인들을 지칭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 만보산 사건의 경우도 그렇듯이, 청나라 말기부터 해서 만주지역에서는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의 충돌이 잦았다.
당시 만주에 대한 일본의 탐욕과 침략은 매우 강했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인은 조선인 군인들 경찰들 그리고 많은 조선인 학자들과 조선인 지주들을 만주로 보냈다. 1931년부터 만주 지역에 정착한 조선인 수는 6만명이 넘었고 1934년에는 20만명이 넘었다. 또한 불만이 많았던 조선인들을 만주로 적극적으로 보냈다. 특히 1940년도는 만주에 진출한 조선인의 수가 '''100만명'''을 넘었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조선인들이 만주로 진출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때는 조선인들의 강제 징용을 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의 경우 일본에서 만주 지역으로 건너가길 꺼린 일본인들이 많았으며 그로 인해 조선인의 진출이 많았다고 한다. 즉, 고려 몽둥이라는 단어가 조선인을 지칭하는 것에는 많은 조선인들과의 갈등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조선인 지주들은 평양에서도 많은 땅을 사들였으며 만주국이 망하자 대거 평양으로 돌아왔다. 일제 패망후에 평양에는 소련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에 서울로 피난을 간 지주들도 많았으며 그들이 나중에 서북청년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4. 기타


  • 추신수 선수의 2호 홈런 보도기사에서 대만 언론이 추신수 선수 소개에 앞서 '가오리방쯔'란 표현을 써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대만 언론의 이런 짓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마 이때 상대 투수가 대만 국보급 선수인 왕젠민이라서 그런 듯.
  • 중국 웹에서 한국을 비하할 때 방궈(棒國)라고 쓰기도 하는데 어감은 짱깨국과 비슷.
  • 간단한 중국어 표현을 익힌 다음 실제 중국인을 만나서 자기 소개를 저걸로 하면 어쩔 줄 몰라한다. 외국인이 자국민 비하어로 자신을 소개할 때 부끄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국인 입장에선 전혀 욕으로 안들리기 때문에(...) 별 거리낌 없이 써볼 수 있다.
  • 앞의 고려를 뺀 방자(빵즈, 棒子) 단어 자체의 뜻은 몽둥이를 들고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중국 현지에서는 직접 국수를 뽑는다는 의미(봉 밀대로 반죽을 직접 편 후 잘라서 제면) 로 식당 간판에 간혹 쓰이기도 한다. 그런 곳에서 혐한이니 뭐니 따지면 망신만 당할 뿐이므로 그냥 밥만 먹고 나올 것. 가끔 남성의 성기가 큰 사람을 지칭할 때 쓰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용례는 아니고 상황이나 문맥에 따라 은유적으로 쓰이는 경우이다.
  • 르번구이쯔와 같이 이쪽도 모에화가 시도되긴 했지만 결과가 미약하다.
  • 한국전쟁기 북한군대상으로 중공군과 이간질을 의도한 삐라에서도 쓰였다.

5. 관련 문서



[1] 고려는 18세기가 넘도록 중국에서 한국을 지칭하는 단어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옛날에는 각 나라마다의 정보부족으로 나라 이름이 바뀐다고 외국에서 부르는 이름이 바로바로 바뀌지는 않았는데, 일본이 당이 망하고도 한동안 중국을 가리켜 당이라고 한 것이나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을 계림(신라의 다른 이름)이라고 부른 사례들, 그리고 조선이 망한 현대에도 다른 한자문화권에서 조선이 한국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이는 현재 북한의 국명이 조선이라는 것도 있다. 대한민국과 북한의 서구명칭에 '''Korea'''가 들어가 있는 이유와도 같다.[2] 실제 중국인에게 물어보면 방쯔(棒子)는 그렇게까지 나쁜 뜻은 아니라고 한다. 그냥 장난삼아 부르는 정도로 한국 사람 중에 반중감정 없는 사람도 때로 장난삼아 짱깨라고 하는것과 비슷한 수준. 물론 짱개가 비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방쯔도 비하적 의미가 없는 건 아니며, 중국인들끼리 한국인을 쉽게 부를 때 자주사용한다. 특히, 高麗棒子를 다 붙여서 사용할 때는 비하적 의미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3] 이는 중국어 특유의 발음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의 평범한 인사말인 你吃饭了吗?(Nǐ chī fàn le ma?)가 한국에서는 욕처럼 들린다.[4] 청나라 북경 견문록[5] 학회지가 아니고 대학의 학보다.[6] 춘향전의 그 방자를 말한다[7] 아래 반론은 고려봉자의 유래를 황푸지가 작성한것으로 오해해서 쓴 글이 아니다. 황푸지가 청나라 왕일원의 주장을 근거로 논리를 확장했다는 걸 알고 적은 글이다.[8] 다만 구개음화 현상이 나타난 17세기 중후반 이전의 한국어에서는 ㅈ이 치경 파찰음, 다시 말해 중국어의 z같은 음으로 발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