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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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花小錄. 조선 세조 때 강희안(姜希顔)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일본 동양문고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인 강희안은 세종 23년인 1441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보직되었고, 이후 예조좌랑, 돈녕부(敦寧府)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는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운(正韻) 28자를 해석하였고, 용비어천가 주석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단종 2년, 1454년에는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으며 이때 산천형세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 지도에 밝은 직전 양성지와 함께 수양대군이 주도한 8도 및 서울지도를 제작하면서 세조와 처음 안면을 가졌다.
다시 대사헌 신석조와 좌사간 이종검이 그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사실 강희안이 사육신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처벌 내용도 성삼문의 부친 성승의 집에서 가서 술마셨다더라, 이개가 '민심이 흉흉하다'라고 하는데 이거 고발 안했다 같은 정말 별것 없는 내용이었고, 세조는 당연히 이를 넘어간 것이다. 세조 6년(1460년)년에는 호조참의 겸 황해도 관찰사를, 세조 8년(1462년)에는 인순부윤을 지냈다. 당시 시와 그림, 글씨에 매우 뛰어나 세종 때의 안견(安堅), 최경(崔涇) 등과 더불어 시서화의 3절(三絶)이라 불렸으며, 교두연수도, 산수인물도, 고사관수도, 고사도교도, 강호한거도 등의 그림과 여러 글씨를 남겼다. 아우인 강희맹은 금양잡록 등을 남겼다.
아우 강희맹이 남긴 글에 따르면, 형 강희안은 평소 꽃에 취미가 있어 출근하는 시간이나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때를 제외하면 꽃을 키우는 일로 소일하였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거처였던 사우정(四雨亭)에서 소나무, 대나무, 국화, 매화, 난초, 서향화, 산다, 석류나무, 귤나무, 창포 등 향기 좋은 꽃과 나무를 땅과 화분에 심어 가꾸었다고 한다. 벗들과 좋은 나무를 선물로 주고 받았고 집에 귀한 꽃이 많아지자 벗들이 꽃구경을 하러 들르기도 했다. 강희안이 혼자 꽃을 감상할 때는, 매화가 피면 그 아래에서 혼자 술을 따르면서 시를 지었고, 대나무를 심고는 그 흥을 시에 담았다. 가을이면 국화 곁에서 도연명의 흥취를 따라 술을 마시고, 작은 수레를 타고 단풍 구경을 나서곤 하였다.
양화소록은 강희안이 세조 재위 시기에 사우정에서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사우정에서 책을 저술하였다는 근거는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강희안의 "사우정에서 읊은 시"(四雨亭雜詠)와 양화소록에 수록된 16종의 화목이 대부분 겹친다는데 있다.
책의 처음에는 아우 강희맹의 서문과 강희안이 직접 지은 짧은 글이 있다. 다음으로 소나무(老松), 향나무(萬年松), 대나무(烏班竹), 국화(菊花), 매화(梅花), 난혜(蘭蕙), 서향화(瑞香 花), 연꽃(蓮花), 석류꽃(石榴花), 치자꽃(梔子花), 사계화(四季花), 산다화(山茶花), 자미화(紫微花), 왜철쭉(日本躑躅花), 귤나무(橘樹) 등 16종의 화목과 괴석을 소개하고 있다. 모란(木蘭)과 작약(芍藥)은 화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하여 다루지 않았지만, 실제 강희안이 특별히 키우고 가꾼 화목은 18종 남짓으로 볼 수 있다.
각 조목에는 주로 해당 화목의 고유한 성질과 이상적인 형태, 상징과 의미 등이 자세하게 나오며, 화목의 품종과 품격에 대한 설명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강희안의 주관적 경험과 취향은 양화(養花) 부분에서 잘 드러나는데, 화분에서 재배하는 법부터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꽃이 싫어하는 것, 종자나 뿌리를 보관하는 법은 물론, 꽃에서 찾아야 할 것이나, 꽃을 기르는 뜻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화목을 재배하면서 터득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며, 화목을 키우면서 알게 되는 소소한 즐거움, 혹은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자신의 경험담을 곁들여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양화소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화훼 원예서로, 우리나라 고유 원림 문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국문학자 이종묵의 논문에 따르면 18세기 대표 학자인 김이만(金履萬)과 장현광(張顯光) 등의 여러 거두들이 양화소록을 소장하고 평소에 애독하였으며 그 외에도 수 많은 독자층이 있었다. 또한 이후에 편찬된 허목의 석록초목지(石鹿草木志)나 이만부의 노곡초목지(魯谷草木志), 신경준의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 류박의 화암수록(花菴隨錄),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와 증보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양화소록은 일본에도 전해져서 일본 동양문고 소장본과 마쓰오카(松岡玄達)의 필사본, 오노본(小野蘭山本)이 만들어졌다.
1. 개요
養花小錄. 조선 세조 때 강희안(姜希顔)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일본 동양문고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저자인 강희안은 세종 23년인 1441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보직되었고, 이후 예조좌랑, 돈녕부(敦寧府)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는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운(正韻) 28자를 해석하였고, 용비어천가 주석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단종 2년, 1454년에는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으며 이때 산천형세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 지도에 밝은 직전 양성지와 함께 수양대군이 주도한 8도 및 서울지도를 제작하면서 세조와 처음 안면을 가졌다.
다시 대사헌 신석조와 좌사간 이종검이 그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사실 강희안이 사육신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처벌 내용도 성삼문의 부친 성승의 집에서 가서 술마셨다더라, 이개가 '민심이 흉흉하다'라고 하는데 이거 고발 안했다 같은 정말 별것 없는 내용이었고, 세조는 당연히 이를 넘어간 것이다. 세조 6년(1460년)년에는 호조참의 겸 황해도 관찰사를, 세조 8년(1462년)에는 인순부윤을 지냈다. 당시 시와 그림, 글씨에 매우 뛰어나 세종 때의 안견(安堅), 최경(崔涇) 등과 더불어 시서화의 3절(三絶)이라 불렸으며, 교두연수도, 산수인물도, 고사관수도, 고사도교도, 강호한거도 등의 그림과 여러 글씨를 남겼다. 아우인 강희맹은 금양잡록 등을 남겼다.
아우 강희맹이 남긴 글에 따르면, 형 강희안은 평소 꽃에 취미가 있어 출근하는 시간이나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때를 제외하면 꽃을 키우는 일로 소일하였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거처였던 사우정(四雨亭)에서 소나무, 대나무, 국화, 매화, 난초, 서향화, 산다, 석류나무, 귤나무, 창포 등 향기 좋은 꽃과 나무를 땅과 화분에 심어 가꾸었다고 한다. 벗들과 좋은 나무를 선물로 주고 받았고 집에 귀한 꽃이 많아지자 벗들이 꽃구경을 하러 들르기도 했다. 강희안이 혼자 꽃을 감상할 때는, 매화가 피면 그 아래에서 혼자 술을 따르면서 시를 지었고, 대나무를 심고는 그 흥을 시에 담았다. 가을이면 국화 곁에서 도연명의 흥취를 따라 술을 마시고, 작은 수레를 타고 단풍 구경을 나서곤 하였다.
양화소록은 강희안이 세조 재위 시기에 사우정에서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사우정에서 책을 저술하였다는 근거는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강희안의 "사우정에서 읊은 시"(四雨亭雜詠)와 양화소록에 수록된 16종의 화목이 대부분 겹친다는데 있다.
3. 구성
책의 처음에는 아우 강희맹의 서문과 강희안이 직접 지은 짧은 글이 있다. 다음으로 소나무(老松), 향나무(萬年松), 대나무(烏班竹), 국화(菊花), 매화(梅花), 난혜(蘭蕙), 서향화(瑞香 花), 연꽃(蓮花), 석류꽃(石榴花), 치자꽃(梔子花), 사계화(四季花), 산다화(山茶花), 자미화(紫微花), 왜철쭉(日本躑躅花), 귤나무(橘樹) 등 16종의 화목과 괴석을 소개하고 있다. 모란(木蘭)과 작약(芍藥)은 화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하여 다루지 않았지만, 실제 강희안이 특별히 키우고 가꾼 화목은 18종 남짓으로 볼 수 있다.
각 조목에는 주로 해당 화목의 고유한 성질과 이상적인 형태, 상징과 의미 등이 자세하게 나오며, 화목의 품종과 품격에 대한 설명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강희안의 주관적 경험과 취향은 양화(養花) 부분에서 잘 드러나는데, 화분에서 재배하는 법부터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꽃이 싫어하는 것, 종자나 뿌리를 보관하는 법은 물론, 꽃에서 찾아야 할 것이나, 꽃을 기르는 뜻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화목을 재배하면서 터득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며, 화목을 키우면서 알게 되는 소소한 즐거움, 혹은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자신의 경험담을 곁들여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4. 의의
양화소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화훼 원예서로, 우리나라 고유 원림 문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국문학자 이종묵의 논문에 따르면 18세기 대표 학자인 김이만(金履萬)과 장현광(張顯光) 등의 여러 거두들이 양화소록을 소장하고 평소에 애독하였으며 그 외에도 수 많은 독자층이 있었다. 또한 이후에 편찬된 허목의 석록초목지(石鹿草木志)나 이만부의 노곡초목지(魯谷草木志), 신경준의 순원화훼잡설(淳園花卉雜說), 류박의 화암수록(花菴隨錄),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와 증보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양화소록은 일본에도 전해져서 일본 동양문고 소장본과 마쓰오카(松岡玄達)의 필사본, 오노본(小野蘭山本)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