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전투

 


1. 개요
2. 배경
3. 전투
4. 결과


1. 개요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8일까지 강원도 강릉에서 국군 제8사단이 38선을 넘어 남침해온 북한군 제5사단 등과 벌인 전투이다. 우세한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양면에서 압박해온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국군이 제천으로 철수하면서 강릉이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2. 배경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강원도의 인제군과 양양군은 38선 이북 지역과 이남 지역으로 나뉘었다. 미군정은 38선 남쪽에 있는 인제군 지역을 홍천군으로, 양양군 지역은 강릉군으로 통합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군이 미군에게서 38선 경비 업무를 넘겨받았는데, 강릉 일대 동해안 지역의 경비는 1949년에 창설된 국군 제8사단이 담당했다. 제8사단의 제10연대는 춘천·홍천 지역의 경비를 담당한 제6사단의 동쪽으로부터 동해안까지 26㎞에 이르는 구간의 38선 경비를 맡았고, 제21연대는 삼척 일대에 주둔하며 해안선 경비와 후방지역의 작전을 담당했다.
한편, 북한은 1948년 2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민군을 창설한 뒤 38선 인근에 군사력을 집중 배치하면서 꾸준히 남침을 준비해왔다. 동해안 지역에도 38선 경비를 담당하는 제1경비여단만이 아니라 북한군 제5사단이 양양에 추가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고성군 간성에는 상륙작전이나 오지전투를 담당하는 제766유격대와 제945육전대 병력을 배치해 침투 작전을 준비했다.

3. 전투


1950년 6월 25일 새벽 동해안 지역에서도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되었다. 북한군 제1경비여단과 제5사단은 38선을 넘어 주문진 방면으로 남하했으며, 북한군 제945육전대의 병력은 강릉에 주둔하던 국군 제8사단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강릉과 삼척 사이에 있는 정동진 등명리 해안에 상륙해 강릉 방면으로 북진했다. 북한군 제766유격대 병력도 삼척 남쪽의 임원진리에 상륙해 태백산맥의 산지와 옥계 방면으로 이동했다. 북한군은 양방향에서 협공하여 신속히 강릉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6월 29일까지 동해안을 따라 포항까지 남하한 뒤에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은 제8사단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곧 강릉 일대에 비상을 선포하고, 삼척에 주둔하던 제21연대의 병력을 강릉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38선을 지키던 제10연대에게는 연곡천(連谷川) 일대에 방어선을 치고 남하하는 북한군 제5사단의 병력을 막게 했으며, 제21연대에게는 강릉 남쪽의 군선강(君仙江) 일대에 방어선을 치고 북상하는 북한군 제766유격대와 제945육전대의 병력을 막게 했다. 강릉에서는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보급품 운반과 환자 구호 등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27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자 병력이나 무기 등에서 모두 열세였던 국군은 수세에 몰렸다. 결국 사단장 이정가 대령은 병력 피해를 줄이기 위해 6월 27일 오후 2시에 대관령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강릉은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4. 결과


38선 방어가 주임무인 제8사단은 26km의 정면을 겨우 1개 연대로 전담시킨데다 연대 일부가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실제 38선 경계임무는 2개 대대가 담당하였다.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전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대관령으로 철수한 제21연대 병력은 횡계리에 집결했으며, 제10연대는 유천리에 주둔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제8사단은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제1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병력 피해를 최소화하여 퇴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열을 정비한 뒤에 곧바로 반격에 나서 6월 28일에는 강릉 탈환 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육군본부에게서 원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자 강릉을 공격하던 제21연대의 병력을 다시 대관령으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원주로 퇴각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빠른 남진으로 원주에 주둔하던 제6사단도 퇴각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천으로 이동했다. 그 뒤 제8사단은 낙동강 전투에 참여해 영천 전투 등에서 큰 전공을 거두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