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모노가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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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헤이안 시대의 작가 및 궁녀인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일본 최초의 고전소설이자,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소설'''로 알려졌다. 그래서 일본학 연구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
2. 특징
겐지 이야기가 최초의 소설로서 평가받는 이유는 11세기 초 작품인데도 작가가 근대소설[3] 의 두드러진 특징인 등장인물간 심리와 동기 같은 내면묘사에 상당히 공들였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근대를 거쳐 현재까지 계속되는데, 소설의 등장하는 인물들의 충실한 내면 묘사는 이제는 소설이라는 분야의 거의 필수요건으로 간주된다.'''특히 겐지모노가타리는 일본 문학의 최고봉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책과 비교할 만한 소설은 하나도 없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일종의 자부심으로 여기며, 실제로도 겐지 이야기의 발견 이후 연대상 겐지 이야기보다 빠르게 출간된 소설은 세계 어디에도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소설을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폭넓게 정의한다면, 겐지 이야기는 세계 최초의 소설이 아니고 170년 즈음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가 쓴 《황금당나귀》가 이미 있었고 기원전에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대개 이런 작품은 소설의 초기 형태로 분류한다.
문제는 겐지모노가타리가 제대로 책의 형태로 보존되지 못했다는 것.[4] 두루마리 형태로 여러 개 쪼개어 만든 탓에 온전한 모습을 갖춘 판본이 하나도 없다. 명필이 쓴 시나 글의 사본을 부분 부분 잘라 서예 감상용으로 수집하거나 장식하다 보니, 가뜩이나 분량이 많은 겐지모노가타리 필사본 역시 여기저기 잘려나갔다. 일례로 일본의 유명 미술관 내지 박물관에는 겐지모노가타리를 소장했다고 선전을 많이 하는데, 전부가 아닌 일부분을 소장했을 뿐이다. 일본에서도 제일 많은 분량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나고야의 도쿠가와(德川) 미술관밖에 없다. 특별실에 전시하는데 당연히 복제 인쇄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헤이안 시대 이후부터 <겐지모노가타리>라고 하면 흔히들 고풍스런 고대 일본문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집필 시기는 11세기 초이지만 시대 배경은 그보다 1세기 전인 10세기 초반으로, 이를 보면 견당사 폐지 이후 시작된 국풍문화(国風文化)의 유행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당대 일본에 전래된 중국 문화나 고사 등이 종종 언급되는 동시에 10세기 중반 이후에 사라진 문화나 악기, 춤들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상 중국풍 소설에 가깝다.[5] 모티브로 추정되는 시기 역시 정편은 다이고 덴노, 스자쿠 덴노, 무라카미 덴노의 치세인 엔기~덴랴쿠(901~957) 즈음이며, 속편은 레이제이 덴노 치세이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와카 역시나라 ~ 헤이안 시대의 일본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던 백거이의 시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것도 있다.
한자로 음독하면 '원씨물어(源氏物語)'로, 물어(物語; 모노가타리)는 이야기를 뜻하는 일본어, 원씨(源氏, 겐지)는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의 성씨이자 현실에서도 실존한 미나모토 씨를 뜻한다. 따라서 해석하면 '미나모토(겐지) 가문의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한국어판에는 경우에 따라 '겐지 이야기' 등으로 제목을 정하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 중심으로 보면 총 2부인데, 정편은 겐지의 이야기인 정편 총 41권, 손자 니오노미야와 의붓아들 카오루의 이야기인 속편 총13권으로 나뉜다.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에 실린 기술을 보면 1008년 11월 중순, 여러 종이를 골라 모노가타리의 원본이 되는 책과 함께 서사를 의뢰하는 편지를 보내고, 한편으로는 서사한 것을 책으로 엮어 정리하였는데, 후지와라 미치나가가 지필묵을 지원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작업은 무라사키 시키부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겐지모노가타리의 서사 작업으로 추정되고, 정서 작업에 사용된 모노가타리의 원본이 있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형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겐지모노가타리는 1008년 무렵에 정립되었다고 추정된다.
겐지모노가타리에는 와카 795수[6] 가 실렸다. 이 와카들은 고킨와카슈, 고센와카슈 같은 칙찬 와카 집, 여러 사찬집, 사가집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다.
3. 저자
작가의 이름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는 정식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필명이자 별명이다. 학자들의 추정으로는 바로 이 겐지 이야기의 여주인공인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7] 참고로 본인의 원래 명칭은 성의 한 글자를 따고 시키부쇼(式部丞)인 아버지[8] 의 관직명을 따서 후지 시키부(藤 式部)였다. 음양도가 성행하던 헤이안 시대엔 이름에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관계로, 특히나 신분 있는 여자의 이름은 가족들 중에서도 부모만이 알 정도로 철저하게 감추는 것이 관례였기에 궁중에서 일하는 궁녀들은 전부 관직이나 처소 이름으로 불렸다.[9] 따라서 승진하거나 이사하면 이름도 바뀐다. 세이 쇼나곤의 이름 중에서 '쇼나곤(少納言)'도 관직명이다. 다만 남자들은 관직에 나가다 보니 본명이 기록에 남고 후세에는 자연히 본명으로 불리는 반면, 대부분 여자들은 아주 가끔씩 기록에 드문드문 남거나 이렇게 남은 기록들을 통해 추측하지 않는 이상 죽고 나면 본명을 알 길이 없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미도 간파쿠기(御堂関白記)에서는 후지와라노 카오루코(藤原香子)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 동기간인 노부노리가 아버지에게 한적, 즉 한문 서적을 배울 때 어깨 너머로 함께 공부하였다는 사실이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에 기술되어 있다.[10] 무라사키 시키부는 오늘날 후쿠이 현 동부 지방인 에치젠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임지로 내려가 지내다가, 20대 후반[11] 이던 998년, 단신으로 교토로 귀경하여 그해 늦가을 후지와라 노부타카와 결혼하였다. 노부타카는 여러 지방의 지방관을 역임한 사람으로, 당시는 종5위 우위문권좌 겸 오늘날 교토부 남쪽 지방인 야마시로 지방의 지방관이었다. 두 집안의 지체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지만 당시 노부타카는 중년을 넘긴 40대 중반의 나이로 전처와 이미 무라사키 시키부 또래의 장남 다카미츠와 자식 몇 명을 둔 상태였다.
노부타카와 시키부가 결혼한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다. 노부타카의 열정적인 편지가 지방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던 무라사키 시키부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그러나 (뒷날 다이니노산미슈라는 가집을 남긴) 겐시라는 딸 하나를 둔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3년도 지나지 않은 1001년 4월 노부타카가 역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뜨면서 끝이 났다. 1011년 6월 이치조 덴노가 사망한 뒤에도 무라사키 시키부가 1013년 가을까지 황태후가 된 쇼시의 측근에서 나인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은 기록에 남아 있어 확실하다. 그 이후 소식이 남아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1014년 봄쯤 사망한 듯하다. 향년 42세 또는 45세라는 설이 있다.
1965년에 유네스코의 세계 기념인물 명단에 등재되었다.
4. 줄거리
천황의 아들이자, 엄친아급으로 다재다능한 주인공 히카루 겐지가 여러 사람을 후리고 다니면서[12]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궁정 암투, 겐지 주변 캐릭터들의 다양한 삶을 다룬 소설이다. 작가가 귀족 출신에 궁녀여서 헤이안 시대의 상위 계층의 생활상 묘사와 고증이 사실에 부합하고 뛰어나다.
현대 일본의 모에 요소가 함축된 고전이라 할 수 있는데, 대략 열거하자면 계모 1(이자 사촌), 과부가 된 숙모, 키잡(전술한 계모의 조카이자 아버지 쪽으로 오촌), 형의 딸(이쪽은 네토라레 당한다), 계모 2의 여동생이자 본인에게는 이모 뻘인 동시에 형의 약혼녀(이것 때문에 히카루 겐지는 스마로 쫓겨났다), 부하의 후처와 딸, 친구의 애인, 그 애인의 딸, 사촌누나, 여러 시녀, 유배지에서 만난 여자, 어릴 적 여사친, 우연히 같은 숙박시설에 묵게 된 과부와 그 과부의 의붓딸, 심지어 자신의 젖형제인 남자 하인과 원나잇한 여자의 남동생(!) 까지 골고루 꼬신 희대의 바람둥이. 그야말로 '''색욕마인의 표본'''이다. 일본 내 여러 학자들의 성별에 따라 해석의 초점을 달리해서 흥미로운데 여자들은 겐지와 만난 여자들의 생활과 심리에 더 비중을 두고 해석하는 반면, 남자들은 겐지의 연애담과 출세기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13] 이 남녀의 차이가 심지어 오늘날 일본의 서브컬처에서조차 남성향과 여성향 작품의 차이로 나타날 정도이니 겐지모노가타리가 일본 문화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5. 등장인물
6. 등장 와카
7. 주요 인물의 거처
- 니조노인(二條院)
- 니조히가시노인(二條東の院)
- 로쿠조노인(六條院)
- 이치조노미야(一條の宮)
스자쿠인의 후궁 이치조미야스도코로(一條御息所)와 딸 온나니노미야(女二宮)가 거주하는 곳. 이치조노미야에 거주한다고 하여 이치조미야스도코로라고 불린다. 이치조미야스도코로가 병이 들었을 때 모녀가 오노의 산장으로 갔지만, 이치조미야스도코로가 죽고 살아갈 방법이 없어진 온나니노미야는 이치조노미야로 돌아간다. 유기리의 아내가 된 이후에도 이곳에서 지냈지만, 속편에서 거처를 육조원 여름 저택으로 옮기면서 빈 곳이 된다.
- 산조노미야(三條の宮)
작중 초반에 후지츠보 중궁의 사가로 나오며, 레제테이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후지츠보 중궁 이후에는 스자쿠인의 처소가 되었으며, 온나산노미야가 스자쿠인에게 물려받아 속편에서 육조원 봄 저택에 머물던 온나산노미야(女三宮)와 카오루 모자는 이곳에 머물게 된다. 본래 이들은 육조원 봄 저택에서 지냈지만 속편 초반부에 이곳으로 옮긴다. 카오루는 우지 10첩에서 오이기미와 결혼하면 산조노미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오이기미의 죽음으로 불발된다.
8. 출간 내역
8.1. 정편
8.2. 정편 2부
8.3. 속편
8.4. 속편 우지 10첩
9. 제목 및 부제
10. 번역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이고 문학사에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일본 관련 전공이 아니라면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번역본도 그리 많지 않아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상당수가 1970년대쯤 발간된 꽤 오래된 책이고, 2000년대에 발간된 3권짜리 번역본은 번역 자체는 큰 문제는 없지만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를 제외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한자 그대로 독음해 놓아서 읽기가 상당히 난감했다.[23] 하지만 2007년에 비구니 승려 세토우치 자쿠초가 현대에 부합하게 작업한 일역을 대한민국 출판사인 '한길사'에서 전문 번역가 김난주를 고용해 번역한 10권짜리 양장본이 '겐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가격은 대략 10만 원 선. 책등에 그림이 인쇄되어 10권을 순서대로 꽂아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 모습이 좋아서 샀다는 사람도 있다. 이 책은 막 나왔을 무렵만 해도 일본 문학 쪽에서 주목받아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한 겐지 이야기 관련 연구 논문까지 나와있는 상태였으며, 원전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여 문체가 꽤 고풍스럽다. 다만 이 때문에 읽기 어려워졌는지 인기를 오래 끌지 못해서 저런 번역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2014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겐지 모노가타리 1권이 출간되었다. 전6권으로 출간예정. 역자는 가게로 일기를 번역한 바 있는 이미숙 교수. 경어체로 되어 있어 이야기를 읽어주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한길사 판에 비해 이쪽은 일반적인 번역이지만 해설, 주석은 더 충실하다.
에도 후기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 작품에 드러난 특유한 정서를 '모노노아와레'라는 미학적인 개념으로써 논설했다.
또한 일본어의 옛 모습을 추적하는 자료로서도 꽤 중시된다. 유튜브를 찾아보면 헤이안 시대 당시 발음으로 읽은 녹음 파일을 들어볼 수 있다. 역사적 가나 표기법에 기반한 발음이 들리며, 'は(\[ha\])'를 '화'에 가까운'\[ɸa\]'로 읽고[24] , 'ち\[tɕi\]', 'つ\[tsɯ\]'를 곧이곧대로 '\[ti\]', '\[tɯ\]'에 가깝게 읽으며, 'ゐ'도 '\[wi\]'로 읽는다. 영상은 언어학자 긴다이치 하루히코의 지도로 배우 세키 히로코가 낭독한 자료이다.
헤이안 시대에 창작된 작품이니만큼, 매우 어려운 고어와 와카[25] 가 많이 들어 있어 일본어 고문(古文)을 깊게 공부하지 않으면 일본인이라도 원문을 그대로 읽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현대어로 많이 번역되었는데 그 중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으면서 고전이 된 번역은 요사노 아키코(与謝野 晶子)의 현대어역과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 潤一郎)'의 현대어역이다. 두 번역은 말 그대로 고전이고 그 뒤에 나온 수많은 현대어역 판본은 계속 축적된 연구 결과를 반영한다는 실정도 감안해야 한다.
11. 참고 사항
헤이안 시대의 풍습대로 신분 있는 인물들의 본명은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고, 특히나 여자들은 이름을 철저히 감추기 때문에 작중 등장하는 여자들의 이름은 전부 별명이나 경칭이다. 특히 천황의 후궁들의 이름은 모두 각 후궁이 기거하는 별궁의 이름을 따서 부른다. [26] 그런 탓에 같은 여자가 시간에 따라 불리는 호칭이 달라지고, 같은 호칭으로 불려도 시대에 따라 다른 인물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작중 현재 천황의 레이케이덴 뇨고가 후대 천황의 레이케이덴 뇨고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본명이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는 겐지의 시종인 후지와라노 코레미츠(藤原惟光)와 미나모토노 요시키요(源良清) 딱 두 명이다. 이들은 주요 캐릭터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편이다.
또한 당시에도 천황의 공식적인 명칭은 '천황(天皇)'로 고정되지만 작품 안에서는 아무래도 불경죄가 신경쓰였는지 덴노가 아니라 '미카도(帝)'라는 표현을 쓴다. 음독하면 '테이(帝)'가 되며, 양위하고 상황이 되면 '테이(帝) 대신 '인(院)'을 쓴다. 이 항목에서는 한국인이 태반일 위키러들의 가독성을 위해 설명문 부분에서는 '천황' 표기를 택한다.
자세한 것은 한길사의 김난주 번역본을 보자. 당시 문화에 대한 주석이며 각 인물(여자 캐릭터 한정)의 이름에 관한 유래, 작품 진행에 따라 변하는 인물들의 이름 등도 헷갈리지 않게 잘 정리해 놓았다.
이 소설은 작자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다는 자세를 취함을 알 수 있다.
12. 미디어 믹스
남자의 꿈이나 환상을 환기하는 것과도 같은 이야기다 보니 일본의 서브컬처에도 자주 활용되는 편이다.
12.1. 영화
1951년에 요시무라 코자부로가 감독한 흑백영화가 있는데, 이는 겐지 이야기를 처음으로 영상화한 작품으로, 고키덴 뇨고의 기리츠보 갱의 핍박으로 시작해 겐지가 스마/아카시 귀양에서 돌아오는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작중 초반부의 궁중연회 씬의 30명의 궁녀들이 입는 쥬니히토에를 제작하느라 예산이 초과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작중 후반부가 귀양에서 돌아온 겐지의 전후 이야기를 다루는지라 캐릭터는 아카시노키미를, 스토리는 정편 후반부의 온나산노미야와 카시와기의 불륜에서 모티브를 따와 각색한 아와지노우에(淡路の上)라는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한다. 아버지 아카시 뉴도의 욕심으로 겐지의 측실이 된 아와지노우에였지만, 아와지노우에는 이미 소꿉친구와 사랑을 나누며 임신했다. 이를 알고 노발대발하는 겐지를 무라사키노우에는 겐지의 옛 행적을 찔러가며 설득하여 진정시키고, 팩트폭격을 당한 겐지는 어쩔 수 없이 둘을 용서한다.
그 외 속편을 원작으로 1957년에 개봉한 키누가사 테이노스케 감독의 겐지 이야기 우키후네(源氏物語 浮舟)가 존재한다. 1961년에는 모리 카즈오 감독에 의해 신 겐지 이야기(新源氏物語)가 제작되기도 했는데, 당시에 네무리 쿄시로로도 유명한 가부키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市川雷蔵, 1931~1969)가 겐지 역을 맡아 주연했다.
12.2. 만화
'''あさきゆめみし'''
겐지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만화. 작가는 야마토 와키(大和和紀). 1979년 코단샤의 만화 잡지 mimi에서 연재를 시작했다가 자매지 mimi Excellent로 연재처를 옮겨 1993년에 완결되었다.
명작으로 꼽히는 만큼 출판본도 다양한데, 한국에서는 그 중 완전판 판본이 2008년부터 2009년에 걸쳐 AK 커뮤니케이션즈에서 정발된 바 있다. 현재는 절판.
원제는 상기한 대로 'あさきゆめみし'이지만, 한국에서는 원작과 같은 '겐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일단 표지에 알파벳으로 Asakiyumemishi라고 적혀 있긴 하다.
12.3. 애니메이션
12.3.1. 1987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의 극장 애니메이션.
12.3.2. 2009
2009년 1월 데자키 오사무 감독에 의해 '겐지 이야기 천년기 Genji(원제 : 源氏物語千年紀 Genji)'라는 제목으로 애니화되었다. 노이타미나에서 방영되어 총 11화 완결이며, 원래는 위의 야마토 와키의 만화를 토대로 애니화할 계획이었지만 감독 데자키가 조금 더 원작에 충실한 겐지 애니화를 제안하면서 계획이 변경되었다. 원작이 원작인지라 지상파 방영작 치고는 수위도 꽤 높은 편이다.[27] 참고로 데자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며 겐지의 스마 유배까지만 다뤘다. 그래서 무라사키노우에는 와카무라사키로 불리던 시점 및 나레이션 역할로만 등장하고 후지츠보의 비중이 높다.
국내에서도 2011년 1월에 애니플러스에서 자막으로 방영됐고, 이후 VOD가 무료로 서비스되기도 했다. 현재는 판권 만료로 삭제. 참고로 애니플러스에서는 같은 단어를 두 번 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Genji'를 빼고 '겐지 이야기: 천년기'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다.
12.4. 그 외
절대가련 칠드런의 캐릭터 이름은 대부분이 이 작품에서 따왔다.
문학소녀 시리즈로 유명한 라이트 노벨 작가 노무라 미즈키(野村 美月)의 히카루가 지구에 있었을 무렵도 겐지 이야기의 캐릭터들을 모델로 삼았다.
2010년부터 일본의 주간 영점프에서 여자 만화가 이나바 미노리의 미나모토군 이야기라는 만화가 연재 중이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근친상간 요소가 강렬하다보니... 정발은 사실상 어려울지도...였는데...2017년 5월에 정발되었다!
오버워치의 겐지가 리장 타워 상호작용 대사로 작중 내용을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언급한다.[28]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여러 번 무대화했었는데, 1957년에 카스가노 야치요(春日野八千代)[29] 주연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1981년, 89년과 2015년의 신 겐지 이야기(新源氏物語), 그리고 2007년에 위에 언급한 야마토 와키의 코믹스를 바탕으로 한 아사키유메미시(あさきゆめみし)가 있다.'''闇の現にはなほ劣りけり。(야미노 우츠츠니와 나오 토리케리. / 밤중의 생시에는 과연 미치지 못하는 것이로다.)'''
Fate/Grand Order의 이벤트 스토리 중 미혹의 명봉장의 고찰은 이 겐지모노가타리의 변주로 작중 컨셉이 영화 촬영인데 이 영화의 감독과 각본을 쓴 서번트가 무라사키 시키부다. 페그오 무라사키의 보구도 겐지모노가타리를 인용한 보구이다.
1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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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이 작품의 속편으로 여겨졌으나 구할 길이 없었던 '巣守帖'[30] 의 사본으로 추정되는 서적이 발견되어 학자들이 조사에 착수하고 있다. 만일 진짜로 판명되면 겐지 이야기 팬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속편이 '''1000년 만에 다시 나온다.''' 하지만 발굴된 분량이 극히 일부의 페이지인 탓에 진짜로 판명돼도 속편의 모습은 복원하기가 힘들 것 같다.
[1] 다만 '소설'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세계 최초의 소설은 달라진다. 단순히 가상의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로만 기준을 두는 소설의 초기형태까지 넓히면 로마의 황금 당나귀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소설이다. 인물들의 심리묘사까지 다룬 소설로 한정하면 겐지가 최초라고 한다.[2] 출처[3] 19세기 유럽에서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에 토대해 현실과 사회와 사람 문제를 주로 다룬 소설.[4] 이상할 것도 없다.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부터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가 되기 전까지 조용한 시기가 거의 없었다.[5] 첫장부터 기리츠보 덴노의 기리츠보 갱의를 향한 총애 밑 편애를 주변 사람들이 '''당현종과 양귀비의 관계'''에 빗대어 욕을 하고, 당대의 최신 유행으로 언급되는 국풍 문화과는 거리가 먼 스에츠무하나의 고풍스런 취향과 그 시녀들의 옷차림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6] '누구나 한 번 가야 할 저승길로 떠나는 슬픔 내 진정 가고픈 길 살아가는 길인데'가 첫 와카다.[7] 첫번째로는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1008년 11월의 기록으로 후지와라 긴토로 추정되는 좌위문독이 "이 근방에 와카무라사키는 계시는지요."라고 물었다는 대목이다. 그러자 무라사키 시키부는 속으로 '겐지와 비슷한 사람조차 보이지 않거늘, 하물며 무라사키노우에가 왜 여기 계시겠는가.' 생각하며 그 말을 들었다고 기술했다. 여기서 긴토는 무라사키 시키부를 겐지모노가타리의 작자로 간주하고 묻는 것이다. 둘째로는, "주상께서 겐지모노가타리를 사람들에게 읽게 하여 듣고 계셨을 때, '이 사람은 니혼기를 읽은 듯하구나. 정말로 학재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는 대목이다. 셋째로는 쇼시 중궁전에 겐지모노가타리가 있는 것을 보고 후지와라 미치나가가 '호색적이라 널리 알려졌기에 당신을 보고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 없을 듯하네.'라는 와카를 읊어 무라사키 시키부에게 주었다는 대목이다. 미치나가의 와카를 통해, 무라사키 시키부가 겐지모노가타리의 작자임과 동시에, 당시의 남자 독자들에게 겐지모노가타리는 호색적인 이야기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8] 이름은 후지와라노 타메토키(藤原為時)로, 지방관 출신의 중류 귀족이었다.[9] 이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실명을 드러내면 해코지를 당할 우려가 있다 하여 관직명이나 거주하는 저택명으로 호칭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겐지모노가타리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만 해도 이게 본명이 아니다. 光 源氏, 즉 원씨(겐지)네 빛나는 도련님이란 뜻으로 신적강하 당시 붙은 미나모토 氏를 이용한 별명일 뿐이다.[10] "내 남동생 노부노리가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울 때면 난 항상 옆에서 듣고 있었지. 그런데 나는 노부노리가 이해하고 외우기 어려운 문구들을 해독하는 데 몹시 능숙해졌어. 뛰어난 학자였던 아버지는 항상 "안타깝다, 이 애가 남자가 아닌 것은 정말 운이 나쁜 일이야!" 하며 아쉬워하셨지." 번역 출처는 문명 6 한국어 버전이다.[11] 26세 또는 29세로 추정.[12] 여자 남자 할 거 없이 그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고대 사회,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서는 동성애 묘사에 대해 거부감이 적거나 없었다.[13] 한길사판 번역본에 수록된 세토우치의 서평도 겐지뿐만 아니라 겐지 주변 사람들의 심리묘사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14] 기리츠보는 기리츠보 갱의의 처소명. 일반적으로는 주상(기리츠보인)의 청량전으로부터 제일 먼 동북쪽 구석의 숙경사를 말한다. 오동나무 때문에 오동나무 안뜰이라는 뜻의 기리츠보라고 불렀다. 히카루 겐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자는 기리츠보 갱의, 후지츠보 중궁, 무라사키노우에 셋인데 기리츠보 갱의의 상징은 오동나무, 후지츠보 중궁의 상징은 등꽃, 무라사키노우에의 상징은 자초로 이들 모두 보랏빛 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15] 여기에 나오는 여자가 유가오다.[16] 우츠세미는 매미 허물, 매미를 뜻하는 말로 우츠세미가 히카루 겐지를 따돌리기 위해 쥬니히토에의 겉옷을 놔두고 자신은 하카마 차림으로 빠져나간 것을 말한다.[17] 박꽃이라는 뜻이다.[18] 와카무라사키는 어린 지치 풀/자초를 뜻하는 말이다. 무라사키노우에의 무라사키는 지치 풀/자초를 뜻하는 말로 자초는 보라색 염료를 낼 때 사용하는 풀이기도 하다. 실제 자초의 꽃색도 보랏빛으로 기리츠보 갱의를 상징하는 오동나무와 후지츠보 중궁을 상징하는 등꽃의 꽃 색도 보라색이다.[19] 스에츠무하나는 잇꽃, 홍화를 뜻하는 말이다.[20] 모미지노가는 단풍 연회를 말한다.[21] 비쭈기나무를 뜻하며 일본의 제의에서 마를 몰아내는 신목으로 불린다.[22] 이세신궁의 재궁이 이세로 내려가기 전 머무는 곳으로 노노미야 신사라고 한다.[23] 예를 들자면, '무라사키노우에'를 '자의상'이라고 독음한다. 한자로 표기할 때에는 紫의上(...).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차라리 각주를 달면 몰라도 보기엔 너무 이상하다.[24] 순음퇴화 항목 참조.[25] 和歌. 일본에서 이어져 내려온 정형 시가. 31음을 정형으로 하는 단가를 지칭하는데, 광의로는 중국에서 온 한시와 대조해 일본에 고유한 시가를 지칭하기도 한다.[26] 예를 들면, 고키덴 뇨고: 별궁 고키덴에 기거하는 뇨고. 뇨고는 후궁 관직명. 황족, 태정대신, 좌대신, 우대신, 내대신의 딸만이 받을 수 있는 직책이고 중궁이 될 수 있는 신분이다. 이보다 신분이 낮은 후궁은 코우이.[27] 그나마 유두 노출은 안 나오지만.[28] 이름이 같다 보니 블리자드 측에서 의도했나 보다...[29] 1915년 출생의 다카라즈카 가극단 남역(男役)의 레전설로 불리는 인물로, 2012년 8월 29일에 향년 만 97세에 별세했다.[30] 우지 10첩과 같은 구도를 가진 작품으로, 카오루와 니오노미야의 치정싸움이 내용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작품의 승리자는 카오루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