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공립농업학교
'''경성공립농업학교'''는 일제가 산미증산계획 추진에 필요한 실무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립한 공립농업학교이다.
구체적으로 경성공립농업학교는 쌀(산미)과 면화(양잠)의 수탈을 위한 근대적 농업기술과 인력 양성을 목표로 2년 과정의 2개 학급으로 개교하였다. 첫 시작부터 당대의 일반적인 사립학교들과 달리,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치미치(長谷川好道)가 도지방비(道地方費)로 설립하도록 지시하였기에 한일공학으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입학자격, 수업연한, 학비 등이 모두 일본 본토 소재의 농업학교들과 같았다. 이후 1925년에는 학제를 5년 과정으로 대폭 늘렸으며, 4개 학과로 규모를 키워 수많은 전문 인력을 배출했다. 1934년 12월, 학교 규모의 확장을 위해 지금의 전농동과 휘경동 부지 8만 평을 매수한 뒤 1936~1937년에 걸쳐 기숙사와 신축 교사 등을 준공하였다. 또한 학생 1인당 교육비를 당시 일본 본토의 농업학교들에 비해 두 배 수준까지 책정하여 '''동양 최고의 농업학교'''라는 평을 얻었다.
중일전쟁 이후엔 가축병원을 준공하고 농공병진정책에 따라 양잠과를 폐지하고 농업토목 전수과를 신설했는데, 이는 1930년대 후반 세계적 공황으로 인해 산미증산계획이 다시 추진되면서 농법 개량과 더불어 개간, 수리(水利)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경지 개량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의 남면북양(南綿北羊) 정책에 따라 1939년 수의축산학과가 설치됐고, 1941년에는 장제사양성소(裝蹄師養成所)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는 중일전쟁의 격화에 따라 기마군이나 기마 경찰을 지원하기 위한 구체적 수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립농업대학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게 된다. 이후 해방됨에 따라 서울농업고등학교 개편되어 농업과, 농업토목학과, 수의학과, 임학과의 4개학과로 재정비되었다가 서울농업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 서울과기대의 전신 명칭 중에도 서울산업대가 있으나 이쪽은 서울시립대의 전신인 서울산업대와는 이름만 같을 뿐 별개의 역사이다. 정확히는 1981년 본교가 교명을 변경하며 주인이 사라진 서울산업대학의 이름을 서울과기대(당시 경기공업개방대)에서 채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