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군
1. 개요
고려의 정규군이었던 고려군에 대하여 서술한다.
2. 역사
2.1. 초기
초기 고려군은 통합된 정규군이라기보다는 동맹군이나 연합군에 가까웠다. 이는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일리천 전투 때는 고려 태조 휘하 국왕군 + 고려 호족의 사병[1] + 친 고려 호족의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규모는 약 75,000명으로 추정된다. 고려 왕실은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 친고려 호족들을 달래주고 중립적인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했다. 여기에다 복속시킨 이민족 부대가 약 10,000 명, 후백제 군대가 최소 70,000 명 이상이었다. 세력 간 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고려 왕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특히 호족들은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고도 독자적으로 사병을 거느렸다. 이렇게 중앙이 통제하지 않는 군사력이 지방에 있는 것은 국가적 불안 요소였다. 그래서 고려 조정은 무인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과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다. 절도사 출신인 송태조 조광윤이 절도사의 권한을 철저히 약화시킨 것과 흡사하다. 허나 이는 나중에 무신들의 불만이 커져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직위 또한 기록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추측이 가능하다. 사서 및 금석문에 나타나는 직위는 마군장군(馬軍將軍)과 대장군(大將軍), 우장군, 장군, 대장, 내사제군사, 군부서사, 호기위 등이 있다. 편제로는 국왕 친위대인 내군, 북벌군인 개정군, 일리천 전투 당시의 좌강 - 중군 - 우강 삼군 체제, 보천군, 우천군 등 다섯 천 자 돌림 부대가 있었다.
2.2. 과도기
거란의 침공이 임박하자 고려의 군대는 통합이 촉진된다. 후삼국 통일 이후 호족과 중앙의 갈등도 완화되고 다시 양측의 공조가 이루어졌다.[2] 제3대 국왕 정종은 무려 30만 대군을 조직해 광군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만 정종이 조직한 광군은 상비군이라기보다는 예비군에 가까웠다. 특히 이들은 각 지방의 호족들의 사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실제 전투보다는 노역에 주로 투입되었다. 이는 느슨했지만 어쨌든 호족들의 군대를 일원화시켜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종 및 4대 광종 대에 벌어진 정쟁에 고려군의 지휘체계는 다시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6대 성종은 지방을 정비하고 호족 사병들을 통솔하기 위해 12주목 절도사 군단을 만들었다.[3] 개경을 중심으로 북 황주와 남 양주에 좌우신책군을 만들고 각 지역의 대도시들에 절도사를 파견해 각 군단을 맡겼다.
이렇게 고려는 점차 군권을 통일시켰다. 성종은 2군 6위 및 주진군, 주현군을 조직하였고, 7대 목종이 6위를, 8대 현종이 2군을 완성하였다. 이로써 중앙군은 완비되었다. 목종은 절도사 제도를 축소하고, 현종이 이를 완전 폐지하여 지방군 체제도 완성시켰다.
2.3. 전기
고려 전성기의 군제이다. 일반적으로 고려군의 편제라면 이때가 기준이다. 가장 군제가 체계적이었던 시기이고 기록도 자세하기 때문이다.
2.3.1. 중앙군
고려 중앙군의 병종과 무장은 동시대의 여타 군대와 대동소이했다. 다만, 중앙군은 지방군보다 무장과 훈련의 수준이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종은 크게 보병과 기병으로 나뉘었다. 보병은 방패와 칼, 활이 기본 무장이었고, 기병은 칼과 창이 주무기였다.[4] 고려 보병들의 갖춘 장비는 <당육전>에 나오는 당나라군의 장비와 비슷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二軍六尉)였다. 2군 6위외에 별도로 조직된 특수부대도 있었다. 상비군이라 할 수 있는 2군 6위의 총 군사 수는 천 명씩 1령으로 계산하여 총 44령이었다. 즉, 44,000명이었다.
우선, 2군은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이었다. 이들은 고려 국왕의 직할 친위 부대였다. 그래서 6위보다 서열이 높았다. 2군 내에서는 응양군이 용호군보다 서열이 높았다. 응양군은 1령, 용호군은 2령이다. 훗날 무신정변을 일으킨 집단도 이 2군이었다.[5]
6위는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 여섯 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수도 방위군이었다. 전시에는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의 3군이나, 3군에 전군(前軍), 후군(後軍)까지 더한 5군으로 재편되었다. 여몽전쟁 당시 동선역 전투에서 몽골군을 야전에서 격파한 것이 고려의 3군이었다.
5군은 임시 편제여서 전후에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5군 편제는 천자는 6군, 제후는 3군 편제를 쓴다는 전통적 편제를 독자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이는 문벌귀족이 가장 강성했던 의종 대에 문관들의 견제로 3군으로 축소된다. 허나 무신정권이 시작되자 다시 5군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병력에 따라 3군과 혼용되었다.
6위 중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은 고려의 주력 전투 부대인 3위였다. 모두 32령으로 구성되었다. 1령은 1000명으로 3위의 병력은 32령으로 32,000명이었다. 이는 6위 전체 병력의 약 76%였다. '''금오위(金吾衛)'''는 개경의 치안을 담당하는 국가 헌병대였다. 7령으로 구성되었다. '''천우위(千牛衛)'''는 왕실 의장대였다. 상령(常領) 1령과 해령(海領) 1령으로 편성되었다. 마지막으로 '''감문위(監門衛)'''는 성문을 경비하는 부대였다. 예하에 1령만 편성되어 규모가 가장 작았다.
2군과 6위의 직렬은 동일했다. 모든 부대가 동일한 직함을 사용했다. 직함 간 상하는 소속 부대로 구분했다. 가령 같은 상장군이라도 좌우위 상장군 > 금오위 상장군이었다. 2군의 직렬에는 추가로 근장, 친종을 붙여 소속을 확실히 구분했다. 시간이 지나며 직렬에 섭직과 가직을 추가해 격차를 늘렸다. 그래서 형식상 9개의 직위가 있었지만 실제론 더 많았다. 검교직이 있어 명예직으로도 수여했다. 가령 척준경의 아버지 척위공은 예종에게 검교대장군 직을 받았다. 진짜 2군6위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명예 대장군 직위였다.
2군 직함은:
- 근장상장군(近仗上將軍) 정3품
- 근장대장군(近仗大將軍) 종3품
- 친종장군(親從將軍) 정4품
- 근장중랑장(近仗中郞將) 정5품
- 근장낭장(近仗郞將) 정6품
- 근장별장(近仗別將) 정7품
- 근장산원(近仗散員) 정8품
- 근장위(近仗尉) 정9품
- 대정(隊正) 종9품
- 상장군(上將軍)[6] 정3품
- 대장군(大將軍)[7] 종3품
- 장군(將軍)[8] 정4품
- 중랑장(中郞將)[9] 정5품
- 낭장(郞將)[10] 정6품
- 별장(別將)[11] 정7품
- 산원(散員)[12] 정8품
- 위(尉)[13] 정9품[14]
- 대정(隊正)[15] 종9품
- 장사(長史) 종6품
- 녹사(錄事) 정8품[16]
- 사(史) 무품
- 기관(記官) 무품
고려의 태자 또한 호위 부대를 두었다. 이는 문종 대에 상정되었다. 8솔부(率府)로 구성되었다.[17]
- 시위상장군(侍尉上將軍)
- 시위대장군(侍尉大將軍)
- 각 솔부의 솔(率)
- 각 솔부의 부솔(副率)
2.3.1.1. 중앙군의 구성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왕조 국가 시대의 중앙군 소속의 군인들은, 복무 방식에 따라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1. 중세기사처럼 세습적으로 군인 신분이 유지되는 방식.
2. 평상시는 농민이었다가, 순서가 되면 정해진 연수만큼 복무하는 방식.
1번의 경우 세습적으로 군인을 하는 직업군인들이 월급을 받으면 수도에서 근무하는 경우이며, 2번의 경우 평상시에 농사를 짓던 일반 농민이, 때가 되면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도로 오는 경우이다. 때문에, 항상 개경에 거주할 필요가 없고, 군역의 의무를 수행할때만 거주장소와 월급을 주면 된다.
고려의 중앙군은 1, 2번 모두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2개 다 사료에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1번을 군반씨족제설, 2번을 부병제설 이라고 통칭한다.
먼저,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여기서 '군반씨족의 장적'은 누가봐도 군반씨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두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문종18년) 병부에서 아뢰기를, ‘군반씨족의 장적(帳籍)이 작성한 지 오래되어 낡고 썩었습니다. 때문에 군인의 수효(軍額)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방식에 의거해 그 장적을 다시 만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고려사》권 8, 세가8, 문종 5년 윤 5월
1.최소 4만 5천 명(2군 6위의 서류상 총원수)이나 되는 군인들이 개경에 모두 거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고려 개경의 평상시 인구가 약 30만~50만호로 추정되는데, 이 군인들의 가족까지 쳐서 숫자를 계산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가 나온다.
2.월급이 너무 많다.
보통 군인들에게 월급으로 땅 20결을 주었는데, 4만 5천명에게 준다고 하면 90만결이 된다. 근데, 고려말인 공양왕 대에 한 토지조사 결과가 79만 8천 118결이었으므로,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개경 인구의 최소 절반이상은 군인이었고 고려 정부 예산의 90%이상이 군인월급으로 지급되었다는 소리가 된다.'''
다음으로 부병제설의 사료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는 삼한을 통일하고 비로소 6위를 두었는데, 위에는 38領이 있고,領에는 각기 천 명씩이 있으며, 상하가 서로 유지되고 >체통이 서로 연속하니, 당의 부위제도를 방불하였던 것이다
《고려사》권 81, 志35, 兵1, 序
(고려는)나라 안에 개인 사유지(私田)는 없다. 백성은 가족수에 따라 役을 부과받으며 16세가 넘으면 군역에 충당된다. 6군3위는 >항상 관부에 머물러 있다. 3년마다 선발되어 서북의 국경지대를 파수하는 군인들은 반년마다 교대된다. 군인들은 비상시에는 >무장을 하고 役事가 있을 때에는 징발된다. 일이 끝나면 농사처로 돌아간다
《宋史》권 487, 列傳246, 外國3, 高麗
(문종) 4년 10월 도병마사왕총지가 상주(上奏)하였다. ‘傳에 이르기를 안전할 때에도 위태로운 때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적이 오지 않는다 하여방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諸衛의 군사들은 국가의 爪牙이니 마땅히 >농한기에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
(《高麗史》권 81, 志35, 兵1, 兵制문종 4년 10월).
그러나 부병제설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는데, 먼저 부병제설에서는 군역을 수행하는 농민에게 군반씨족제설처럼 땅을 주진 않지만 대신 농민이 본래 가지고 있던 땅에 대해 면세권을 준다. 고로 중앙에서 복무하는 농민, 군역을 하는 대신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면세지를 줘도 똑같이 90만결을 줘야 한다는 군반설과 비슷한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고종 4년 10월) 安東․慶州․晋陜州․尙州․靈岩․羅州․全州․楊廣州․淸州․忠州등 10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諸州의 土貢을 독촉하고 또 >겨울옷을 가지고 오겠다는 이유로 귀향했다가 오랫 동안 번상(番上)하지 않는 군인들에게 빨리 서울로 올라오도록 명령하였다
《高麗史》권 22, 世家22, 고종 4년 10월).
이렇게 두 설이 대립하던 중 결국 둘을 합쳤고, 고려 중앙군은 월급을 받는 세습제 직업 군인 + 때가 되면 중앙으로 올라와 근무하는 농민으로 구성되었다는 군반씨족제설 + 부병제설 = 경외군 혼성제설이 탄생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이렇게 하자 상당수의 문제점들이 해결되었고, 이렇게 경외군 혼성제설이 자리를 잡는듯 했으나... 중요한건 '''사료가 없다''' 즉, '''상상력이 사료를 이기게 된 것이다.'''
2.3.2. 지방군
지방 5도는 주현군(州縣軍), 양계 지역은 주진군(州鎭軍)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양계인 북계와 동계에는 대규모 정예군을 상시 배치했다. 여진족이나 거란족과 인접한 북방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계 지역에는 주진군 뿐 아니라 3위인 좌우위(左右衛), 흥위위(興威衛), 천우위(千牛衛)도 주둔했다. 다른 주현군은 군역보단 요역이 위주였던 데 비해 주진군은 군역이 위주였다. 주현군과 주진군은 모두 호족들의 사병이었던 광군(光軍)이 국가의 상비군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고려군에 관한 기록이 미비해서 지방군의 편제 역시 깊이 알기는 어렵다. 서경군에는 좌영과 우영 두 부대와 그 산하에 감군(監軍)이 있었다. 감군 밑엔 또 맹군(猛軍)과 해군(海軍)이 있었다고 한다.
2.4. 후기
그러나 무신정변으로 전기 고려군의 체제가 모두 무너진다. 무신정변 이후에는 도방이나 삼별초와 같은 사병 집단이 정규군 노릇을 했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는 충용위가 국왕 친위대로 기능했다. 총 4위였고 장군(將軍), 중랑장(中郞將), 낭장(郞將), 별장(別將), 산원(散員), 위장(尉長), 대장(隊長) 직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고려가 한참 쇠퇴할 때라서 고려 전기와 같은 체계적인 중앙군이 부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성계 같은 신흥 무인 세력들의 사병과 징병군인 익군(농민군)이 정규군 역할을 했다. 게다가 공양왕 대에는 유명무실해진 2군 6위가 8위로 합쳐졌다.
3. 해군
고려는 해군을 상당히 중시했다. 이는 태조 왕건이 독자적인 해군을 이끌었던 무역상이었다는 점에서 영향을 받았다. 고려 해군의 전성기에는 개경의 중앙군에도 해군 담당 부서가 있었다. 심지어는 외국의 사신단을 맞이하기 위한 해상 의장대도 두었다.
특히 고려 해군은 대외적으로도 제법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몽골군이 1차 일본 원정 실패 이후 "남송의 배는 금방 부서지는데, 고려의 배는 튼튼하니 다시 일본을 공격할 수 있다"고 좋은 평가를 내렸다. 일본은 몽골군을 격퇴한 뒤 설욕을 위해 고려를 침공하려 했는데 고려 해군을 이길 전력이 없어 포기했다. 관련 블로그
게다가 고려 해군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도 제법 활약했다. 여진족 해적들을 토벌하는 것은 고려 해군의 주된 임무였다. 여진 정벌 당시에 고려는 육군이 수군과 함께 여진족을 양방향에서 공격하기도 했다. 당시 여진족은 통념과 달리 항해술이 미비하지 않았다. 이래 봬도 여진족들은 해적질이나 연안 침공도 많이 했다. 송에서도 여진족들에 대해 물에 들어가면 수달 같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사료에 의하면 여진족 해적들은 울릉도, 심지어는 일본의 규슈지역까지 내려가서 약탈을 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도이의 입구라고 부른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해군이 쇠퇴하며 유명무실해졌다. 이는 몽골의 침공과 통치 때문에 고려가 피폐해져서 해군에 투자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왜구를 제대로 막지 못하여 심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다만 고려 말기의 해군도 무력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왜구들을 막기 위해 새로운 무기와 전술을 개발하여 상황은 역전되었다. 최무선이 화포를 개발하자 화포가 고려 해군의 새로운 주력 무기가 되었다. 그 이후 고려는 소수의 해군으로도 왜구들을 격퇴할 수 있었다. 또한, 정지는 대왜구전을 위해 깃발을 활용한 신호체계는 완성했다. 이는 조선 수군도 이어받아서 쓴다. 이런 각고의 노력으로 고려 해군은 진포해전과 관음포 전투에서 왜구들을 격파하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재해권을 되찾았다. 이런 해군의 회복세는 박위의 대마도정벌까지 이어진다.
4. 병력 규모
고려의 병력 동원력은 전근대 한반도 왕조들중에서도 이례적으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역사서에도 고려가 외침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여러 차례 동원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 육군
- 해군
- 정종 시기에 예성강의 함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 삼별초의 난 시기에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하며 징발한 함선은 1천여척이나 되었다. 정부군이 탐라정벌을 위해 동원한 함선은 160척이다.
- 원나라의 일본원정의 시기에 고려수군은 함선 900척[20] 을 동원하였다. 이 많은 함선을 고작 4개월 동안 3만 5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제작하였다.
- 1366년 전라도도순문사 김유는 전선 100척으로 탐라의 목호를 정벌하려하였고 1374년 목호의 난 정벌시에는 병선 314척을 동원하였다.
- 이작도해전에 고려 해군은 전선 80척을 동원하였다.
- 최무선의 진포해전에 고려해군은 전선 100여척을 동원하였다.
- 제1차 대마도 정벌에 전선 100척을 동원하였다.
다른 국가들의 병력 동원 사례와 비교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위나라의 군세가 80만~100만이라고 호통쳤지만 실제로는 24만명 정도였다. 거기에 맞선 오나라와 유비의 연합군이 5만 남짓이었다. 이릉대전에서 유비의 병력은 연의에서는 72만이었지만 실제로는 10만 정도였고 오나라가 동원한 병력도 6만이었다. 비수대전에서 부견의 백만대군에 맞서 동진이 최대한 모은 병력이 8만 남짓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군이 13만, 신라가 5만이었다. 여당전쟁 때도 당나라군은 1차가 30만, 2차가 4만 4천 명에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고구려군은 15만 명, 건안성과 신성에 10만 명[21] , 국내성에서 4만 명이었다. 3차에 동원된 당나라군이 50만 명이었고 고구려군은 20만이었다.
일본도 사이메이 덴노가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전토에서 긁어모은 병력이 수만에 불과했다. 661년의 1차 원군의 수는 5천여명이었고 663년 2차 원군은 2만 7천여명이었다. 통일신라의 경우 839년 달벌 전투에서 10만 명을 동원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는 동원된 일본군이 47만, 조선군이 18만 8천, 명군이 22만여 명이었다. 특히 이 병력은 조선, 일본, 명나라 각국이 엄청나게 무리해서 쥐어짜낸 병력이었다.
특히 사료에 남은 고려의 동원력은 고려의 국가 규모 하에서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절대 왕정이 확립되지 않았던 당시 유럽에서도 이 정도 동원은 어려웠다. 임진왜란보다 조금 뒤에 벌어진 유럽의 30년 전쟁(1618년 - 1648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스페인 + 오스트리아)이 30만을 동원한 것이 최대치였다. 그 뒤를 이어 스웨덴군과 프랑스군도 각각 15만 정도를 동원했다.
고려의 동원력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는 많다. 일리천 전투 때는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소집했고, 그 중 기병만 약 5만이었다. 후삼국 통일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부터 동원력이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3차 여요전쟁에서는 20만 명을 동원했다. 심지어 이는 2차 여요전쟁에서 강조의 30만 군대가 궤멸당한 뒤에 소집한 병력이다. 무엇보다도 여진정벌 시기의 별무반 17만은 본토 방어군도 아닌 원정군이었다. 홍건적의 난 때도 동원한 병력이 20만인데 피폐해진 고려 후기의 상황에서 모집한 병력의 수였다.
송나라의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도 고구려가 멸망할 때보다도 고려 때에 병력이 2배는 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고려사절요에는 1268년 4월에 고려에서 이장용이 사신으로 몽골에 왔을 때 쿠빌라이 칸이 이장용에게 볼모 영녕공 왕준에게 듣기로는 고려에 강병 5만명 있다고 들었는데 1만 명만 남기고 나머지 전부는 원병으로 보내달라고 한 기록도 있다. 원순제 시절 어사 최유는 원나라의 반란 진압을 위해 고려에 병사 10만 명을 요구한 적도 있다. 왜구가 극성일때 최영은 전선 2,000척 건조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공민왕 23년(1374년)에는 명나라가 임밀과 채빈 두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북원을 치는데 필요하니 군마 2천 필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런 대규모 병력 동원은 고려가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지방분권제에 가까웠던 덕분에 가능했다. 이런 정치 구조는 조선과 고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고려의 지방은 향리에 의해 지배되었다. 개국 초의 소위 호족이란 집단에서 분화한 이들은 고려 조정에 세금만 올려보내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으며 촌락별, 읍별 방위체계를 총괄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지방은 독자적으로 병력을 양성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군제는 지방이 중앙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위험요소를 품고 있었다. 실제로 고려 정규군은 몽골의 침공 전에 이미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으로 심각한 내란에 시달렸다. 내란의 여파가 워낙 심해서 여몽전쟁 때 제대로 된 전쟁 수행도 힘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조휘, 탁청, 이안사처럼 적국과 기득권을 보장받으려는 지방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지방이 배신할 위험도 컸다. 여요전쟁때는 강조가 패했을때 현종이 수도를 버리고 소수의 인원만으로 파천하는데 지방에선 지원군 한 명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대군을 동원하고 나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각기 다른 집단에 속한 무장집단을 긁어모은 형태이다보니 일률적인 지휘가 쉽지 않았다. 상장군과 대장군들의 합좌기관이었던 중방에서 하듯이 야전에 나서서도 지방군대의 사령관들과 합의를 해서 가장 좋은 해결책을 끌어내야할 책임이 총사령관에게 주어졌다. 1차 여몽전쟁때의 안북성 전투는 대표적인 합의 실패사례인데 흔히 딸이 최우와 재혼한 대집성이 자신의 뒷배로 다른 지휘관들을 찍어눌러 성밖에 나가싸우려다 패한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최우 덕을 본 부분은 패전 후 처벌을 받지 않은 부분이다. 대집성이 최우의 권위를 내세워 다른 지휘관들을 찍어 눌렀다면 전투 당일 다른 진주와 지병마사가 성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대집성 혼자 나가게 놔둔 점이나 채송년을 비롯해 살아남은 지휘관들이 별다른 문책 없이 넘어간 점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고려의 군제에는 이렇게 문제가 많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장점도 많았다. 우선, 중앙과 지방의 공조가 원활하기만 하면 병력 동원에는 오히려 유리했다. 중앙정부가 무리해서 행정력이나 재정을 낭비하지 않고도 지방으로부터 병력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의 방위체계에도 제법 도움이 되었다. 지방이 상당한 자율권을 가지고 있어서 외침에 한결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가 조선보다 부족한 인구와 생산력으로도 외적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조위총의 난을 거치며 고려군은 주력군이 대거 소모된 상태에서 1차 여몽전쟁을 맞아 개경의 중앙군이 괴멸되고, 북계는 적을 막고 군사를 징발하는 체계 자체가 소멸되었기에 이어진 전쟁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다. 이어진 전쟁으로 주현군까지 차례차례 각개격파 당하며 고려군의 영광은 막을 내린다. 단순히 병력만 소모된게 아니라 전시과로 대표되는 기존 경제 체제 자체가 무너진터라 중기 이후론 말그대로 동원이 필요하면 나라를 거덜내고 백성의 피고름을 쥐어짜 군대를 유지하는 방식이 이어졌고 말기엔 상설화된 원수직이 제각기 특정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지방의 군대가 군벌화되기 시작한다.#, #
5. 참전 목록
※ 순서는 연대순대로 전쟁명, 상대명, 상대편의 병력순으로 기재함.
- 여요전쟁
- 상대세력: 거란족
- 상대병력
- 1차: 80만명(거란측의 주장이며 실제로는 6~8만명으로 본다.)
- 2차: 40만명(거란측의 주장이며 실제로는 20만명으로 본다.)
- 3차: 10만명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26]
- 상대세력: 가마쿠라 막부
- 상대병력
- 1차: 1만7천명
- 2차: 4만명
- 나하추의 침공
- 상대세력: 나하추
- 상대병력: 수만 명
- 삼선(三善)과 삼개(三介)의 침입
- 상대세력: 여진족
- 상대병력: 불명
-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의 침입
- 상대세력: 원나라
- 상대병력: 불명
- 고려 말 왜구의 침입
- 상대세력: 왜구
- 상대병력
- 1350년 제1차 순천부 침입: 100여척
- 1350년 제2차 순천부 침입: 66척
- 1350년 합포 침입: 22척
- 1351년 자연도, 삼목도 침입: 130여척
- 1352년 합포 침입: 50여척
- 1363년 수안현(守安縣)[27] 침입: 213척
- 1364년 갈도(葛島)[28] 침입: 200여척
- 1364년 진해 전투: 3천여명
- 1374년 합포 전투: 350여척
- 1376년 부령현(扶寧縣) 침입: 50여척
- 1376년 홍산대첩: 불명
- 1377년 제주도 침입: 200여척
- 1377년 하동군 침입: 40여척
- 1377년 김해 침입: 130여척
- 1379년 진주 침입: 보병 2천여명, 기병 7백여기
- 1380년 홍주 침입: 100여척
- 1380년 진포 해전: 500여척
- 1380년 황산 대첩: 불명
- 1383년 관음포 전투: 120여척
- 1385년 함주(咸州)[29] 침공: 150여척
- 제1차 대마도 정벌
- 상대세력: 대마도 왜구
- 상대병력: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