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고려사
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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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15세기 조선
권 수
137권
분량
918년 ~ 1392년 (475년)
고려태조 원년 ~ 공양왕 4년
1. 소개
2. 고려사의 구성
2.1.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2.2. 고려세계(高麗世系)
2.3. 수사관(修史官)
2.4.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2.5. 목록 상
2.6. 목록 하
2.7. 세가(世家) 46권
2.8. 지(志) 39권
2.9. 연표(年表) 2권
2.10. 열전(列傳) 50권
2.11. 단군편?
3. 역사
5. 한국어 번역
6. 인터넷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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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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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
고려시대를 다룬 사서(史書)로 완질본으로는 현재 보물 제2115-4호로 지정되어[1] 부산광역시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서 보유한 판본이 있다.[2] 삼국사기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역사서들과는 달리 아직 국보보물로 지정되진 않았다가 2020년 12월 보물로 지정예고 되었으며(관련기사), 2021년 2월 17일에 보물 제2114-1호, 제2114-2호,[3] 보물 제2115-1호~제2115-4호로 지정되었다.[4]
건국 후 조선 왕조는 태조 대부터 동양 유교적 왕조의 전례대로 전(前)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했는데, 이것이 고려사로서 5대 문종 대에 와서야 완성하였다.

2. 고려사의 구성


기전체 구성이다. 고려가 전 세 왕조의 정사에 대해 쓴 삼국사기와 체제가 같다. 그래서 구성도 비슷하다. 하지만 삼국을 각자 황제국 사서의 격인 본기로 서술한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고려사는 제후국의 체제를 따라서 구성하였다.

2.1.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고려사를 완성한 학자들이 임금에게 완성 사실을 알리는 전문(箋文)이다. 삼국사기 또한 진삼국사기표가 있다.[5]

2.2. 고려세계(高麗世系)


고려태조 왕건 이전의 족보를 기록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탓에 의종 대 편찬된 편년통록, 충렬왕 대 편찬된 편년강목, 강목에 덧붙혀진 이제현의 논평 이 세 가지를 모두 모아 두고 이를 평가했다.

2.3. 수사관(修史官)


고려사 제작에 참여한 신하들을 기록했다.

2.4.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고려사를 기록(찬수)할 때 정한 기준으로 왜 본기라 안하고 세가라 했는지, 왜 고려의 '참람한' 왕실 예법을 격하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는지, 열전 중 충신, 반역자를 나눈 기준은 뭔지 등을 설명했다.

2.5. 목록 상


고려사 세가부터 종실 열전까지가 목록 상이다.

2.6. 목록 하


종실 열전 이하는 모두 목록 하에 포함된다.

2.7. 세가(世家) 46권


제후국의 예로써 국왕의 기록을 본기(本紀)가 아닌 세가(世家)로 수록.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였지만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참람한 것이었다.

2.8. 지(志) 39권



2.9. 연표(年表) 2권



2.10. 열전(列傳) 50권


본시 한서에서 정립된 열전의 순서에 의하면 후비전, 종실전 다음에는 창업자와 자웅을 겨룬 군웅의 열전이 나와야 하기에 궁예, 견훤의 열전이 수록되고 그다음에 창업공신의 열전이 나와야 하지만 궁예, 견훤의 열전은 삼국사기에서 다룬 관계로 고려사에서는 생략되었다.
한편 우왕창왕조선 건국의 명분인 폐가입진론에 따라 신돈의 자손으로 취급되어 신우,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반역 열전에 수록되었다.[6]
외에도 열전 36권에는 이분희전이 실려있어 연안 이씨의 고려 선대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총 139권이다. 고려사의 축약판이 《고려사절요》인데, 때때로 《고려사》에 없지만 《고려사절요》에는 있는 기사도 있기에 서로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2.11. 단군편?


2014년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에서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고려사 단군편의 존재를 찾아내었다. 현전하는 고려사 판본에는 단군편이 없는데, 현 고려사는 문종대 완성한것이므로, 그 이전 본에서는 단군편이 있었을 수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편 영조 44년(1768) 5월 22일(흐리고 비가 내림)원문

(....)上曰, 儒臣持高麗史初卷入侍。出榻敎 副校理李秉鼎·李命勳進伏, 上曰, 上番讀帝王目錄。秉鼎讀訖。上曰, 下番讀檀君篇。命勳讀之, 上曰, "檀君之父, 古語有檀翁云然否?" 秉鼎曰, "此是好事者之說也。"必壽曰, "檀君似是氣化之物也。"秉鼎曰, "檀君, 旣是我東初立之君長, 而承旨奏語, 似涉 "如何? 請推考。"上笑曰, "過去之說, 勿推, 可也。"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유신은 고려사 초권을 들고 입시하라." 하고 탑교(搨敎)[7]

를 내리셨다.

부교리 이병정과 이명훈이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상번사관이 제왕목록(帝王目錄)을 읽으라."

(상번)병정이 읽기를 마치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하번(명훈)은 단군편(檀君篇)을 읽으라."

명훈이 읽으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단군의 아버지는 옛말에 단옹(檀翁)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인가 아닌가?"

병정이 아뢰었다.

"이러한 말은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좌승지) 필수가 아뢰었다.

"단군은 마치 기화지물(氣化之物)과 같습니다."

병정이 아뢰었다.

"단군은 우리 동방국의 최초의 임금이 되신분입니다."

승지가 아뢰었다.

"사섭(似涉)함이 어떠하신지요?"

좀 더 연구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지나간 이야기니 더 이상 추적하지 않음이 좋겠다." (하셨다.)


3. 역사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고려시대 역사의 편찬을 명했고 이에 정도전이 고려실록, 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을 모아 37권의 고려국사(高麗國史)와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을 편찬하였고, 정총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를 편찬했다. 이 때의 작업들은 역사가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기보단 고려 말 찬술된 역사서들을 모아 편집하는, 일종의 자료집 편찬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선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태종 이방원이 올바르게 개수를 명하여 1414년~1416년에 하륜이 한번 개수하였다. 이후 세종이 고려국사의 공민왕 이후 기사 서술에 조선 측의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올바르게 쓰라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을 천명하였고 이에 1419년 9월에 류관(柳觀)과 변계량(卞季良)이 다시 한번 개수하였다. 이후 1423년 류관과 윤회(尹淮)가 고려의 왕실 용어나 참칭(僭稱)의 개서[8]에 대하여 고려가 당시 썼던 용어를 그대로 직서(直敍)하도록 하여 제3차 개수 작업을 거쳤다.
그 후 1438년~1442년 사이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가 4번째로 개수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소략한 내용과 고려시대 개칭된 용어를 보충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교정 과정에서 아직 역사기술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제기하여 반포가 중지되었다. 1446년 세종은 또다시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이선제(李先齊) 등에게 개찬을 명했다. 1451년(문종 원년) 8월에 완성되었다.
세종 때 일단 완성되었으나, 세종은 이 책이 조선왕조의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고 판단, 김종서 등에게 새로 편찬하게 했다. 결국 문종 때 완성되었다. 하도 세종에게 빠꾸를 먹어서 아마 세종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편찬기간도 더 길어졌으리란 농담도 있다. 그만큼 세종이 신경을 각별히 쓴 책이다.

4. 크고 아름다운 사(史)서


조선왕조실록과 비교되다 보니 그렇지 《고려사》도 상당히 방대하고 상세한 편에 속하는 사서다. 오죽하면 너무 내용이 많다고 축약본인 고려사절요가 따로 나왔겠는가.
총 139권 75책, 글자 수 336만 9623자로 거대 국가였던 중국의 역대 사서들인 24사들과 비교해봐도 분량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든다. 24사 내에서도 고려사보다 권수가 많은 사서는 명사, 원사, 송사, 구-신당서 뿐이고, 그 중 송사와 원사는 각각 약 200만 자, 130만 6000자로 글자수는 오히려 고려사가 더 많다. 대륙 24사 전부를 다 합쳐서 3999권, 3996만 6383자로 글자수로 따지면 중국이 자랑하는 24사 전체의 1/10 정도 크기다.
다만 고려가 어지간한 중국의 왕조 국가들보다 약 2배 정도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고려는 중국이 오대십국말에서 북송, 남송, 몽골 제국, 원나라, 명나라 초까지 바뀌던 시기에 존재했던 나라다. 고려실록[9]이 유실되고 고려의 서적이 많이 남지 않은 것은 참 아쉽지만... 조선왕조실록이 1967권이다. 무려 10배 이상 차이나는 셈.
《고려사》는 고려 역사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이긴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대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편찬된 자료라는 한계점이 있다. 때문에 《고려사》를 연구할 때에는 《고려도경》 같은 당대의 기록이나, 《고려사절요》, 중국 사서 등의 다른 역사서를 통해 교차검증을 하는 게 중요하다. 사료 이외에도 금석문, 남아있는 고려의 서적, 조선시대에 고려의 풍습을 다룬 책[10] 같은 것들을 참조해야 한다.
다만 고려사는 철저하게 원 사료를 충실하게 재구성한, 즉 원전 자료를 편집하는 방식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는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묘지명 자료가 실제로 고려사 열전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편찬의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원 사료의 일부가 취사선택되는 경우는 있었으나, 찬술자가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용을 보충하지 않은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특히 조선 초기 역사가의 사론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점도 이 책이 사실을 충실하게 모은 자료집으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다.
고려사절요》도 그렇지만 혜종부터 목종까지 사료가 많이 부실한 편이다. 고려의 기틀을 세운 성종이 그나마 낫지만...이는 여요전쟁 당시 개경 함락으로 사초와 공문서같은 사료를 많이 날려먹은 탓에서 기인한다. 대체적으로 고려초의 경우는 최승로의 시무28조와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을 인용했고 중기는 이제현의 논평과 김부식이 쓴 예종실록과 인종실록을 그들의 여러 시를 종합했다.
2015년에 영국에서 고려사 필사본 전질 풀셋트가 하나 발견되었다.관련 기사 중국 청나라의 금석문 학자들이 조선 사신들에게 매달려 얻은 후 죽어라 연구하던 것이었다고. 8상자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만 108일이 걸렸다고 한다.

5. 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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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북한에서는 1962년에서 1966년에 걸쳐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이 세가 4책, 지·표 3책, 열전 4책 등 모두 11책으로 번역서를 내놓았다. 이를 '아름출판사'와 '신서원'에서 《북역 고려사》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는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소가 1960년 《고려사》 번역을 시작해 1965년에서 1973년에 걸쳐 《역주 고려사(譯註高麗史)》라는 제목으로, 색인 1책을 포함하여 총 11책으로 펴냈다.[11]
한편 2000년대에 들어서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고려사》역주사업단에서 《고려사》를 재번역했다. 동아대는 2001년 9월부터 재번역 사업을 시작해 2006년 11월에 열전(列傳) 9책, 2008년 8월에 세가(世家) 12책, 2010년 2월에 지(志) 7책을 간행하고 2011년 10월 색인 2책을 간행함으로써 총 30책으로 《고려사》 번역을 완성했다. 이 번역본은 네이버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아래 항목 참고.

6. 인터넷에서 보기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네이버 국역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고려사》는 고려시대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2012년까진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인터넷에서 무료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DB에서는 원문을 무료로 볼 수 있지만 국역이 안돼 있었고, KRpia에서는 기관 회원에게 국역본을 공개하긴 했는데 유료였다. 뭐 KRpia의 경우 대부분의 대학교나 지역도서관 회원이라면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절차만 거치면 집에서도 원격접속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2012년 12월 26일 부터 네이버에서 삼국사기 등과 마찬가지로 국역 《고려사》 서비스를 실시했다. 언제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원문과 번역본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의 링크를 참조.
2016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 《고려사》 번역본이 올라왔다.
[1]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04호에서 보물 제2115-4호로 승격 지정[2] 이 외에서 연세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소장되어 있다.[3] 제2114-1호와 2114-2호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다.[4] 보물 제2115-1호와 2115-2호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제2115-3호는 연세대학교 소장본, 제2115-4호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본이다.[5] 표문은 천자에게 바치는 문서 양식이다. 삼국사기가 표문(表文)인 것은 고려국왕이 국내에선 천자로 군림했기 때문이다.[6] 물론 현대에는 우창비왕설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엄연히 공민왕에 의해 아들로 인정되고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를 계승한 만큼 반역열전에 수록한 것은 부당하였다는 반성이 나오기는 했으나, 고려사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관찬 사서이므로 편찬 당시 조선의 공식 입장이 반영되었다.[7] 임금이 의정을 불러서 친히 전하는 왕명.[8] 고려의 외왕내제적 요소와 용어들을 제후국의 법도에 맞게 고쳐 서술했다.[9] 조선이 개국한 이후 한양의 춘추관에 보관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 소실되었다. 고려왕조실록이란 단어는 그래서 틀린 단어이다.[10] 용재총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같은 조선시대 책에서도 고려시대의 야사나 지리, 풍습 등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개성을 다룬 지리지 같은 경우, 개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유풍이 많이 남았었기에 많이 참조하는 듯.[11] 아래의 번역도 그렇고 이 책의 번역에 동아대학교가 주도적인 것은...국내에 남아있는 여러 판본들 중 완질본 중에서는 동아대학교 소장 판본이 상태가 제일 양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