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하라 츄야

 

1. 개요
2. 작품 세계
3. 대표 시
4. 인간 관계
5. 기타
6. 매체에서


1. 개요


中原(なかはら 中也(ちゅうや
[image][1]
1907년 4월 29일 ~ 1937년 10월 22일
일본 쇼와 시대 초기의 시인.
1907년 4월 29일 야마구치(山口)현 요시키군[2]에서 출생하였다. 옛 성은 카시와무라(柏村)로 아버지 쪽 성이었으나 이후 아버지가 나카하라 가계에 양자로 편입되면서 나카하라 성을 쓰게 된다.[3]
고작 13살 때 <보초신문>에 투고한 단카가 입선하고 그 이후로 3년간 해당 신문에 투고된 단카가 계속 수록됨으로써 문학 활동을 시작한, 소위 말하는 조숙한 문학 천재 계열. 그러나 문학에 빠진 대신 학업은 소홀하게 되어 다니던 야마구치 중학교에서 낙제했다.(...) 그래서 1923년에 교토의 리츠메이칸 중학교 3학년에 전입했다. 이 시기에 흡연과 음주를 배우고 연극 배우인 애인과 동거 생활도 하는 등, 만 16세 고딩이 꽤 거칠게 살았다.
1924년에 도쿄대학 불어학부였던 시인 도미나가 타로를 알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츄야의 작품 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 프랑스 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1925년에는 일본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가 퇴학하고 도쿄에 있는 프랑스어학당인 아테네 프랑스를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리고 이즈음에 문예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 전후문학의 대가인 오오카 쇼헤이 등과 교류한다. 1926년에 <아침의 노래>, <임종>을 썼는데, 1928년에 이 두 시는 츄야의 시들 중 최초로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1932년 드디어 생애 최초의 시집인 <염소의 노래(山羊の歌)>를 발간하려고 계획하지만 구매 후원자를 달랑 10명을 채우는 처참한 상업적 실패를 겪는다. 그러나 책 자체는 한정판인 만큼 꽤 호화스럽게 만들었다는 모양. 200부를 찍었다고 한다.
<염소의 노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카하라 츄야는 문학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베를렌, 랭보의 시들을 번역 출간하고 대표적 문예지 <문학계>에 신작 시들을 올리는 한편 <염소의 노래>를 분포도라는 출판사에서 1934년에 재간행하여 문단으로부터 재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창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면서 명성도 높아지던 중, 1936년에 첫 아들 후미야가 사망하자 충격으로 환청과 신경쇠약 등의 현상을 겪으며 요양소에 입소까지 하게 된다. 그러다 1937년 10월 22일에 급성 뇌막염으로 만 30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츄야의 부탁을 받은 고바야시 히데오는 그가 사망하고 1년 후인 1938년에 그의 마지막 시집인 <지난날의 노래(在りし日の歌)>를 간행한다. 차남 요시마사를 남겼으나 아버지가 죽은 다음해에 사망하여, 그의 집안은 넷째동생 시로가 잇게 된다.
최근의 연구를 통해, 그가 죽던 그 해에 도쿄에서 죽은 조선의 시인 이상과 교류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츄야는 조선에 관심이 있어서 그에 대한 시들을 남겼고, 특히 죽기 얼마 전에 이상과 비슷한 시풍의 시들이 쓰여졌기 때문이다.

2. 작품 세계


단카로 시문학을 배웠으며 다다이즘샤를 보들레르,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등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미야자와 겐지의 불교적 시세계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에도 영향을 받았다.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일본 문학 내에서도 굉장히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갖게 된 걸로 평가받는다. 오죽하면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문예평론가인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나카하라 츄야를 평하길 "그는 어떤 계보에도 들어가지 않는 시인이다."라고 말했을 정도.
독학+아테네 프랑세에서 배운 프랑스어로 폴 베를렌, 랭보 등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번역했다. 특히 <랭보 시집>의 경우 처음 나왔을 때는 그의 시집보다 잘 팔려서(...) 시만 써서 먹고 사느라 가난했던 생활에 금전적인 도움을 줬다. 또한 보들레르의 시를 자신의 시에서 서시 성격으로 곧잘 활용하곤 했다.
대표작 <염소의 노래>의 제목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흥미로운 것은 이 '염소의 노래'라는 명칭 자체가 고대 그리스어로 비극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리스어로 비극은 트라고디아(τραγῳδία)라고 하며 비극의 영어 표현인 Tregedy의 어원이기도 한데 이는 염소를 뜻하는 트라고와 노래를 뜻하는 오데가 결합된 단어다. 즉, 그리스어로 '염소의 노래'란 말은 곧 '비극'이 된다.
고대 그리스 연구학자들 상당수는 비극의 기원이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염소는 디오니소스 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기에 '염소의 노래'가 곧 비극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본다. 츄야가 이런 그리스 어원적 의미까지 파악하고 제목을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염소의 노래>에 실린 시들에 담긴 비애적 정서를 생각하면 흥미로운 점이다. 그리고 디오니소스 신이 츄야가 그토록 좋아했던 술의 신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츄야의 시는 낭송에 강점이 있다고 평가된다. 이는 그의 시들이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본어를 자유롭게 다루고 변형하며 의성어와 언어유희를 적극적으로 구사한다는 점, 그리고 아주 일찌감치부터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본인의 취향이 그런 만큼 당시 아방가르드 음악을 하던 사람들과도 일찍부터 친교가 있었다.
시의 소재로 절망과 허무를 다루지만 그러면서도 파멸과 죽음만을 무조건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으며 그보다 복잡한 무언가를 풀어놓는다는 게 츄야 시의 독특한 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 쪽 반응들을 보면 츄야의 시를 치유적 성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3. 대표 시


'''봄날 해질녘'''
함석이 전병煎餠 먹어서
봄날 저녁은 평온합니다
언더스로under throw된 재가 창백해져
봄날 저녁은 조용합니다
아아! 허수아비는 없나―없겠지
말馬이 히힝대는가―히힝대지도 않겠지
그냥저냥 달빛이 미끄렁한 채
순종하는 것이 봄날 해질녘인가
포득호득 들 안 가람伽藍은 붉고
짐마차 바퀴 기름칠 벗겨져
내가 역사적 현재에 무언가 말하면
조롱하고 조소하는 하늘과 산이
기와 한 장 벗겨졌습니다
이제부터 봄날 해질녘은
말言 없는 상태로 전진합니다
스스로의 정맥관 속으로 말입니다
'''봄밤'''
그슬린 은색 창틀 안에 오붓하게
가지 하나의 꽃, 복사빛 꽃.
달빛을 받고 실신해 버린
정원의 흙 표면은 먹으로 그린 점.
아아 아무 일 없어 아무 일 없어
나무들 쑥스럽게 돌아다녀라.
이 어쩐지 공연한 무슨 소리에
희망은 없노라니, 그렇다고 또, 참회도 없노라니.
산 속 고요히 사는 목공에게만,
꿈속 대상隊商들의 발걸음도 어렴풋 보이리.
창문 안쪽에는 산뜻하면서, 어슴푸레한
모래의 색을 띠는 비단 옷차림.
넓찍한 가슴팍의 피아노 소리
조상은 없고, 부모도 사라졌지.
개를 묻은 자리는 어디였던가,
사프란 꽃빛으로 끓어오르는
봄밤이로다.

4. 인간 관계


짧은 생을 살았고 단 두 권의 시집을 남겼을 뿐이지만 근현대 일본 문단의 거물들 상당수와 지인 관계였으며,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카하라 츄야의 강렬한 개성과 안하무인 등에 대한 증언들을 남기고 있다.(...)
츄야의 인간 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일본을 대표하는 문예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와 연극 배우 하세가와 야스코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삼각관계다.
1923년 교토에서 리츠메이칸 중학교를 다니던 16살의 츄야는 3살 연상의 하세가와 야스코를 만나 반하여 이듬해부터 동거에 들어간다. 한동안 잘 지내던 두 사람이었지만 1925년에 도미나가 타로가 소개한 도쿄제국대학 불문학과 1학년이었고 츄야보다 5살 연상이었던 고바야시 히데오가 끼어들면서 파탄나게 된다. 야스코와 히데오는 눈이 맞아서 결국 야스코는 츄야에게서 떠나 히데오와 동거하게 된다.
그런데 이후에도 츄야와 히데오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우선 야스코는 상당한 결벽증이었던 모양이어서 히데오는 그녀에게 염증을 느끼게 됐고 결국 3년 후인 1928년에 그녀 곁을 떠난다.
이후로도 히데오는 일본 근현대 문학이론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유명 문예지 <문학계>를 창간하고 거기에 츄야의 시를 여러 편 실어주는 등 여러 모로 도움을 줬다. 결정적으로 츄야는 자신이 죽기 전, 마지막 시집인 <지난 날의 노래>의 출간을 히데오에게 맡길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두 사람의 복잡하면서도 동지애적인 관계는 이후 히데오가 츄야를 추억하며 쓴 몇 편의 산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츄야와 야스코 사이의 관계도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영역에 있다. 그는 야스코가 자신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 그녀를 못 잊어서 그녀에 관한 시를 쓰고 그 시를 <염소의 노래>에 수록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그녀가 츄야도 히데오도 아닌 연극 감독의 애를 얼결에(...)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놀아준 사람이 츄야 본인이었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와는 사이가 나빴다. 서로 푸른 고등어(青鯖)[4]니 민달팽이(ナメクジ)[5]니 하며 까댔을 정도. 나카하라는 술에 취하면 다자이의 집에 찾아와 문을 발로 차면서 '바보! 바보!(バカ)'라며 괴롭혔고, 다자이는 이불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나카하라의 사후 다자이는 "죽고 나서 보니 역시 나카하라다. 격이 다르다"며 그의 재능을 아까워 했다고 한다.
사카구치 안고와는 한 번 싸운 후에 친해졌다고 한다. 같은 술집을 다녔는데 마음에 들어하던 종업원과 사카구치가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화가 나서 그만...
시인이자 동화작가였던 미야자와 겐지는 존경했다. 겐지의 대표 시집 <봄과 수라>를 오래 탐독한 것으로 유명하며 재평가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에 영향받은 시도 썼다.
전후문학의 거장인 오오카 쇼헤이는 나카하라 츄야와 함께 동인지 <백치군>을 창간했었다.[6] 그리고 첫 소설이자 대표작 <포로기>에서는 츄야를 '현대 일본 최고의 시인'이라고 칭했으며 전후에는 나카하라 츄야의 시전집을 자신의 연구에 기초하여 편집하여 출간했다. 1974년에는 아예 나카하라 츄야의 전기를 써서 발표한다. 이 전기로 그는 노마문예상을 수상했다.

5. 기타


키가 매우 작았다.('''150cm''') 말을 할 때 온갖 외래어를 섞어 말했으며, 항상 검은 모자와 망토를 착용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지나가던 학생에게 뜬금없이 자기가 외롭다고 말하며 주소지를 줬단 일화를 보면 의외로 외로움을 탔을 거란 견해도 있다.[7]
술을 좋아했다고 하며, 술버릇은 남을 패는 것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질펀하게 들이키고선 널 죽여버리겠다면서 남을 술병으로 공격하거나 갑자기 때렸다는 듯. 또한 음악을 좋아해서 레코드를 사고 남은 돈으로 술을 사먹으려다가 이를 말리는 친구와 함께 집에 돌아와 같이 음악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6. 매체에서



[1] 흔히 알려져 있는 나카하라 츄야의 사진이지만, 일본의 편집자이자 수필가 및 작가인 아라시야마 코자부로(嵐山光三郎)가 말하기를 이 사진은 복사와 수정을 반복해서 실제 나카하라의 얼굴과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아라시야마 왈, '어디에나 있는 주름이 많은 아저씨 얼굴'이라고.[2]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3] 나카하라 가문은 대대로 야마구치에서 병원을 하던 부잣집이었는데, 아버지가 이 집안의 외동딸과 혼인하면서 그 집안을 잇게 된 것이다.[4] 다자이 오사무의 별명.[5] 나카하라 츄야의 별명.[6] <염소의 노래>에 실린 시 상당수가 이 잡지에서 발표됐다.[7] 게다가 다자이 오사무가 나카하라를 '민달팽이'라고 칭할 때 '민달팽이 같이 번들번들한(てらてらした) 놈'이라고 했는데 이는 겉멋만 들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즉 겉모습과 실제 성격이 다를 수 있다는 것.[8] 작중에서 <때 묻어버린 슬픔에>의 마지막 부분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