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연석회의

 


1. 개요
2. 배경
3. 진행
4. 평가
5. 여담


1. 개요


1948년 4월 18일부터 4월 30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의 회담. 남북협상,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라고도 한다.

2. 배경


1945년 8.15 광복 직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 및 통치를 받게 되었던 한반도. 그해 12월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는 한반도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시키고, 그 이전까지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도록 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외상회의의 결정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미국과 소련은 1946년 1월과 1947년 5월에 2차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으나 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였으니 미국과 소련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두 번 모두 결렬되었다.
이후 1947년 9월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해서 해결하려 했고, 소련은 1948년 초까지 미소 양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정부 수립은 한국인들이 알아서 협의해서 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세웠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엔 총회에서 논의할 것을 추진했다. 결국은 유엔 총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져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시킨다는 결정이 나왔으나 유엔이 총선거 감독을 위해 한반도에 보낸 임시 위원단이 북한으로 들어오는 것을 소련이 막으면서 유엔은 선거 감시가 가능한 남한에서만 선거를 열기로 입장을 바꾸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대한 내용이 잘못 보도되면서 좌익과 우익이 극심한 대립과 갈등에 빠져들었고,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막 휴회된 시점이던 1946년 6월에 이승만이 일찍이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수립을 주장한데다가 결국 유엔 소총회에서도 남한만 선거를 열고 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하면서 분단은 현실화되어가고 있었다.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발언과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사이 시점에서 여운형과 김규식 등의 중도파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고 좌우익의 의견을 절충한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는 등 좌우 화해 및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펼쳤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지부진하게 되었고 여운형도 암살당하는 판국이었다.

3. 진행


1948년 2월, 김규식이 위원장으로 있던 민족자주연맹은 삼청장에서 회담을 가진 후에 김일성과 김두봉 등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청하는 서한을 16일에 소련군을 통해서 보냈다. 김구의 동의를 얻고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이 보내는 것으로 한 채였다. 유엔의 임시위원단도 이에 작지 않은 관심을 보이며 북한 측으로부터 회답이 오면 유엔 소총회에 반영하겠다는 모습도 보였지만 회답은 좀 오랫동안 오지 않았고, 이러니 26일에 소총회는 남한만의 선거를 결의한 것이었다. 한민당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은 소총회 결의안 통과에 대한 축하국민대회를 열고 선거를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북한의 9개 정당단체 대표자들은 3월 25일에 남측 17개 정당사회단체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요인회담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4월 14일에 평양에서 남측의 정당사회단체를 불러모아 민주 독립 국가 건설에 대한 연석회의를 열자는 답변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4월 8일에 진의 확인을 위해 안경근과 권태양을 먼저 평양에 파견했고 그들은 김일성의 긍정적인 회답을 전달해주었다. 김구는 방북행을 결심했고, 4월 19일 자신의 집을 둘러싸고 방북을 막으려는 청중을 피해 뒷문으로 차를 타고 나왔다. 비서와 아들을 대동하고 38선 팻말을 배경으로 찍은 그 유명한 사진도 이때 찍은 것이다. 망설이던 김규식은 자신이 이끌던 민족자주연맹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하고 5개조 항의 조건을 내걸고 북측이 수락할 것을 요구했고, 4월 18일에 권태양과 배성룡이 이 조건을 받아들고 방북하여 김일성의 수락을 받아냈다. 김규식도 22일 16명을 대동하여 북행길에 올랐다.
4월 19일 평양의 모란봉 극장에서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남측은 41개, 북측은 15개의 정당ㆍ사회단체가 참석하였고 이로부터 선출된 대표자는 695명이었다. 남조선로동당, 근로인민당 등 좌익 정당과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등 우익 정당이 총망라되어 참석한 것이었다.

4. 평가



5.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