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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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코스 카잔자키스[1] (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 1883년 2월 18일 ~ 1957년 10월 26일)는 그리스의 작가, 시인, 사회주의 계열 정치인이다.
2. 생애
1883년, 아직 그리스에 병합되지 않았던 크레타 섬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났다.(그 당시 크레타 섬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후 그는 아테네 대학에서 법을 공부했으며, 이후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앙리 베르그송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로 돌아온 이후, 그는 당시 배운 철학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데 많은 노력을 투자하였다. 1914년 그는 당시 그리스의 대표 시인인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Άγγελος Σικελιανός, 1884년 3월 28일 ~ 1951년 6월 19일)를 만났고, 2년간 동방정교회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시켈리아노스의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카잔차키스는 1911년 갈라티아 알렉시우(Γαλάτεια Αλεξίου, 1881년 3월 8일 ~ 1962년 11월 17일)와 결혼하였으나, 1926년 이혼한다. 다시금 1945년 엘레니 사미우(Ελένη Σαμίου, 1903년 4월 30일 ~ 2004년 2월 18일)와 결혼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많은 곳을 여행하였는데, 키프로스, 이집트,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심지어는 중국이나 일본도 다녀간 적이 있다. 특히 카잔차키스는 소비에트 연방을 많이 방문하였는데 이때의 여행문을 '러시아 기행'이라는 글로 남겼다. 러시아 기행에는 카잔차키스가 이상적인 공간으로 바라보는 소련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이를 보면 한때 그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영향을 받았고 외세에 포위당한 상태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몰두하는 소련을 지지했던 것이 분명하다.[2] 하지만 공산주의 사상을 확고하게 가진 적은 없고, 오히려 스탈린의 등장 이후 환상이 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공산주의적 사고를 거쳐가면서 초기에 그를 이끌었던 민족주의적 사상은 보다 범민족적인 이상주의로 옮겨가게 된다.
1945년, 그는 작은 비 공산주의 좌파 정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리스 정부의 내각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해 바로 그 자리를 사임하였다. 1946년부터 그리스 작가 연합은 카잔차키스와 시켈리아노스를 노벨 문학상에 추천하였고 그는 총 아홉 차례에 걸쳐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표결에 올랐을 때 그는 한 표 차이로 노벨상을 놓쳤다. 그 해의 노벨상 수상자는 알베르 카뮈였다. 카뮈는 이후 말하길, 카잔차키스가 자신보다 "수백배는 더 이 영예에 마땅하다"고 하였다. 1957년, 그는 백혈병을 앓는 와중에도 중국과 일본에 다녀왔으나, 돌아오는 길에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병이 악화되어 쉬는 중 생을 마감한다.[3] 그의 무덤은 고향인 이라클리오의 성문 근처에 있는데, 이는 동방정교회가 그의 무덤을 묘지 안에 두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비석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쓰여 있다.
나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나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나는 자유다. Είμαι λέφτερος.
3. 문학적 업적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해당 문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가 관찰하는 조르바는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일견 광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삶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을 가진 인물이다.
이것 외에도 유명한 카잔차키스의 작품으로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들 수 있다. 1988년에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그 외에도 그의 대표작으로는 "전쟁과 신부", "미할리스 대장" 등이 있다. 그리고 소설 외에도, 수많은 곳을 여행한 작가이니 만큼 기행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작가 스스로의 일대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풀어낸 "영혼의 자서전"에서는 이러한 여행들에 대한 작가 본인의 시선이 담겨 있다.
4. 한국에서의 인지도
한국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 작가의 이름보다 대표작인 그리스인 조르바가 훨씬 더 많이 알려진 상태이다. 특히 움베르토 에코 소설의 번역자로서도 명성을 떨친바 있는 번역가 겸 소설가 이윤기가 1980년 이를 번역하여 출판한 판본이 가장 유명하다. 이는 꾸준한 개역을 거쳐 지금도 나오고 있다. 이윤기 번역의 빽빽한 각주는 약간 읽기에 힘들 수 있지만, 그만큼 정성을 쏟은 번역이라 할 만 하다. 또한 그가 그리스어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중역된 것이라는 점도 미리 짚고 넘어간다.
한국의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전집이 나와 있으며, 이 전집 중에는 그의 대표작들을 포함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번역되어 나와 있다. 과거 "전쟁과 신부" 등은 고려원 미디어 등을 통해서도 출판된 바 있으나, 이것이 정식으로 라이센스를 획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와는 별도로, 심심할 때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기도 하다. 예수의 일생을 영화화 할때마다 스코세이지 감독의 88년 작품과 함께 꾸준히 도마에 오르는 중.
5. 대표작
- 그리스인 조르바
-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 미할리스 대장
- 전쟁과 신부
- 항연 외
- 오디세이아[4]
- 수난
- 성자 프란체스코
- 영혼의 자서전
- 알렉산드로스 대왕
6. 영화
제목은 카잔자키스로 2017년에 그리스에서 개봉하고 2020년 1월 30일 국내로 수입되어 개봉한 영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1] 라틴문자 표기인 Nikos Kazantzakis의 영향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표기가 관용적으로 쓰이지만 현대 그리스어 발음으로는 유성 치조 파찰음 [d͡z\]가 들어가는 [ˈnikos kazanˈd͡zacis\]이다. 'τ'가 철자와는 달리 [t\]가 아니라 [d\]로 발음되어 뒤의 'ζ[z\]'와 함께 파찰음으로 발음된다. 근사치로 옮기면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된다. 오랫동안 정정되지 않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그리스인 조르바 번역자로 한국외대 그리스·불가리아어과 명예교수이자 카잔자키스 연구자인 유재원 교수를 초빙하면서 조금이나마 본래 발음이 알려졌다.[2] 이와 관련해서, 카잔차키스가 폴란드인 친구에게 소련의 유토피아적인 사회상을 전해주자 폴란드인 친구는 포촘킨 마을의 일화를 인용하여 소련이 외부에 보여주는 이미지와 실제 실상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냉소하는 대화가 러시아 기행에 소개되어있다.[3] 잠시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찾아오기도 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연보 참조.[4]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그 뒷이야기를 다룬 서사시로, 호메로스 작품의 현대어 번역판이 아님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