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 영유아 연쇄유괴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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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범행장소 중 한 곳인 대천천 구시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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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 장면
1. 개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충남 대천에서 잇달아 일어난 의문의 영유아 연쇄 유괴·살인 사건.[1] 마지막 5차 사건의 공소시효가 2009년을 끝으로 만료되면서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팟캐스트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대천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
다시 보는 PD수첩 - 유아 연쇄 실종사건, 그 미스테리 현장을 가다(1994년 8월 30일 방영분)
E채널 용감한 기자들 141회 - 대천 영유아 연쇄실종 사건[2]
2. 사라진 아이들
1991년 8월 16일 새벽에 보령시 대천동[3] 에 살던 김모씨의 생후 2개월 된 아기가 실종되었다(1차 사건). 마을은 발칵 뒤집혔고 마을 주민들이 총동원되어 김모씨의 아기를 찾아다녔다. 다행히도 아기는 10시간 만에 마을 외곽 논두렁에서 가벼운 타박상을 입은 것을 빼면 별 탈 없이 발견되었다.[4] 그러나 누가 아기를 납치해서 논두렁에 버려둔 건지는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6개월이 지난 1992년 2월 16일에 같은 마을에 살던 가모씨의 생후 15일 된 아기가 실종되었다(2차 사건). 다시 한 번 마을은 발칵 뒤집혔고 다시 수색에 나선 끝에 몇 시간 만에 아기를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가 추운 겨울인 탓에 태어난 지 이제 겨우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가 견디기에는 가혹한 날씨였고, 결국 가모씨의 아기는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죽고 말았다. 소름끼치게도 가모씨의 집은 6개월 전 아기가 실종된 집이었던 김모씨의 집에서 불과 '''2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탓에 동일한 인물에 의한 범행으로 의심되었다.
4개월후 6월 4일에 같은 마을에 사는 유모씨의 생후 4개월된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3차 사건). 수색 끝에 찾아낸 유모씨의 딸은 온몸에 타박상이 나있었고 병원으로 옮겨 치료했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다시 3개월이 지난 9월 8일에 같은 마을 김모씨[5] 의 집에 와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던 산모의 생후 6일 된 아기가 실종되었다.(4차 사건) 온 마을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이 아이는 끝내 찾지 못했으며, 현재까지도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피해자의 어머니인 해당 산모는 이 사건의 충격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이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한다.
91년과 92년 내내 마을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사건은 4차 사건 이후로 잠잠해졌고 마을 주민들의 뇌리에서도 점점 잊혀지려 하고 있었는데...
1차 사건에서 정확하게 '''3년이 지난''' 1994년 8월 16일에 같은 마을의 광부 일을 하던 김모씨의 집에서 한밤중 자고 있던 김모씨의 5살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5차 사건) 당시 부모가 함께 자고 있었는데도 딸이 납치되는 기괴한 사건이었다. 수색 끝에 저녁 6시 무렵 마을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논에서 알몸으로 죽어있는 채 발견되었다.
시신을 부검한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였고, '''목을 졸라 살해한 후에 예리한 흉기로 복부를 갈라 간의 일부를 적출해낸 뒤 그것을 농수로에 던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3. 허점 투성이였던 경찰의 수사
전문가들은 경찰이 초동 수사만 확실하게 했더라도 연쇄 실종과 살인 사건은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을 한다. 실제로 경찰은 1991년, 1992년에 일어난 연쇄 실종 사건에 대해서 공개 수사를 하지 않고 사건을 극비에 부친 채 비공개 수사를 진행했다. 물론 공개 수사가 능사는 아니라지만 마을에서 잇달아 동일한 범행이 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비공개 수사로만 일관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5번째 사건의 경우 경찰은 허점 많은 수사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죽은 어린이의 시신을 빨리 부검해야 했음에도 경찰은 「'''부검의가 없다'''」라는 이유로 이틀이나 지난 뒤에야 부검을 시행했고 시신에서 잘려진 간의 일부분은 '''10일이나 지나서야''' 불과 '''2~3m 떨어진''' 농수로에서 발견할 정도였다.
또한 5차 사건 피해자의 시신 발견 당일 시신이 발견된 논 근처에서 과도와 여자스타킹, 면장갑을 지닌 채 주위를 배회하던 이모(당시 34세)씨를 붙잡아 조사하기도 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어준 일도 있었다.
비공개 수사의 경우는 경찰에게도 어쩔 수 없었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 당시 1991년에 일어났던 개구리 소년 사건이 워낙 파장이 컸던 탓에 경찰 입장에선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라는 것. 그럼에도 초반부터 확실한 수사를 했다면 이후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4. 사건에 대한 분석
사건들은 모두 반경 '''300m''' 이내의 아주 가까운 지역에서 일어났고 새벽이라는 시간대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동일범의 범행을 의심할 수 있다. 다만 1~4차 사건과 5차 사건의 양상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이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1~4차 사건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1. 피해자들은 반경 300m 이내의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2. 새벽 깊은 밤중에 아이들이 납치되었다.
3. 범행 대상은 생후 6일~4개월의 언어구사능력이 없는 영아들이었다.
4. 모두 보령 시내의 '특정 산부인과'에서 출생한 영아들이었다.
다만 5차 사건은 1~4차 사건들과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역시 1~4차 사건의 피해자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사는 어린이의 유괴 살인 사건이지만, 1~4차 사건과는 달리 5차 사건의 피해자는 5살 정도의 여자아이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단순히 아이를 납치해서 먼 곳에 내다버린 듯한 양상의 1~4차 사건들과는 달리 5차 사건에서는 어린이를 살해하고 복부를 절개하여 간의 일부를 적출해서 버렸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이유로 당시 경찰은 5차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 아닐까라는 추정을 했다.
그러나 동일범에 의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하긴 힘들다. 5차 사건이 1차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3년이 지난 같은 날짜에 일어났다는 점이 그렇다. 게다가 1차부터 5차까지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사건의 강도가 점점 더 흉악해지고 있다는 점도 동일범에 의한 사건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5차 사건의 경우는 미스테리한 게 실종 당시에 피해 아동은 부모와 '''생후 1년 된''' 남동생과 함께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1~4차 범인의 행동으로 본다면 범행의 대상은 오히려 1살배기 남동생이 되었어야 할 테지만 이때는 5살 어린이가 희생되었다.[6] 의문점은 큰 아이를 데리고 나갔는데도 '''가족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챘다'''는 점이다.
5. 사건 이후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못지않은 영유아 실종·살인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구리 소년 사건에 어느 정도 묻힌 감이 없지 않다. 결국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잡는 데는 실패했고 2009년에 마지막 5차 사건의 공소시효까지 만료되고 말았다.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지만 결국 적극적인 재수사의 동력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2006년에 MBC에서 방영했던 '현장기록 형사'의 취재진들이 당시 피해자들의 가족들과 인터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4차 사건의 가족들은 모두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으며, 5차 사건 피해자의 어머니만 인터뷰에 응했는데 범인에게 대체 왜 그랬는지 이유라도 묻고 싶다고 밝혀 안타까움을 더했다.
6. 둘러보기
[1] 4차 사건 피해 아동의 경우 생사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실종 사건에 해당한다.[2] 사건을 소개한 기자의 "법에는 공소시효가 있지만 천벌에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라는 마지막 멘트가 인상적이다.[3] 대천동은 1986년 충남 대천시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1995년에 보령군과 통합되면서 충남 보령시 대천동이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1991년~1994년 사이는 충남 대천시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대천 어린이 연쇄실종 사건으로 기록된 것.[4] 담요에 싸여서 대천천변에 놓여져 있었다는 당시 기사도 있다.[5] 1차 사건의 피해자인 김모씨와는 다른 사람이다.[6] 다만 당시 피해자의 집이 좁았기 때문에 방안쪽에서 자고있던 남동생을 납치하려 할 경우 부모에게 들킬 위험이 있었고 그래서 방문쪽에서 자고있었던 김양을 대신 납치한 거라는 가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