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머스/배경

 


1. 단문 배경
2. 장문 배경
3. 북쪽의 유랑민
4. 구 배경


1. 단문 배경


'''"좋아."'''
알 수 없는 신비의 존재 람머스. 누군가에게는 숭배의 대상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경외의 대상인 우상과도 같은 인물. 더러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람머스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 베일에 가려진 수수께끼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뾰족한 못이 박힌 갑옷을 입고 다니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내놓는다. 반신반인의 존재라느니, 신성한 사제라느니, 마술에 걸린 야수일 뿐이라는 얘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이든, 사막을 배회하며 뭐든지 제 생각대로 해버리고 마는 람머스의 의지를 꺾을 자는 아무도 없다.

2. 장문 배경


“좋아.”
알 수 없는 신비의 존재 람머스. 누군가에게는 숭배의 대상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경외의 대상인 우상과도 같은 인물. 더러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람머스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 베일에 가려진 수수께끼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뾰족한 못이 박힌 갑옷을 입고 다니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여려가지 추측을 내놓는다. 반신반인의 존재라느니, 신성한 사제라느니, 마술에 걸린 야수일 뿐이라는 얘기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이든, 사막을 배회하며 뭐든지 제 생각대로 해버리고 마는 람머스의 의지를 꺾을 자는 아무도 없다.
람머스를 두고 초월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도움이 절실한 순간 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나타나 슈리마인을 위기에서 구하는, 일종의 수호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미신을 믿는 이들은 사막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생길 것 같은 순간에는 꼭 람머스가 나타난다며, 그의 출현을 불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룬 전쟁의 여파로 슈리마 사막이 폐허로 전락하기 전, 사막을 이리저리 배회하던 멸종 직전의 종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실체가 무엇인지,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마법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온갖 터무니없는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슈리마인들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그의 지혜를 갈구한다. 예언자나 성직자는 물론 헛소리만 늘어놓는 미치광이들까지도 람머스를 한번 만나보는 게 소원일 정도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흔적만 남길 뿐이다. 슈리마 제국의 폐허에서도 그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남아 있다. 또 승천의 초기 시절에는 람머스의 모습을 본뜬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그가 불멸의 반인반신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 단순 명료한 주장으로 그의 실체를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람머스는 그저 우리와 똑같은 생명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항간에는 이런 말이 떠돈다. 람머스가 자신에 대한 믿음이 깊은 순례자들에게만, 또 그들에게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 람머스의 존재를 목격하는 것 자체로 인생이 뒤바뀐다고도 한다. 실제로 어느 왕국의 후계자는 큰 불길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람머스에게 구출된 후 부와 지위를 모두 포기하고 농부가 되어 염소를 키우며 여생을 보냈다. 또 나이 지긋한 석공 하나는 람머스와 나눈 짧은 대화에서 깊은 영감을 받고 작은 시장을 열었는데 이곳은 이후 나시라미 최고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이처럼 람머스와 만나면 인생을 깨우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독실한 사람들은 정성스런 의식을 치러가며 자기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빈다. 람머스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을 증명하는 표시로 일년에 한 번씩 모여 람머스의 유명한 구르기와 웅크리기 기술을 흉내 내기도 한다. 또 매년 수 천명의 슈리마인들은 람머스의 존재를 찾는 의식의 일환으로 사막의 가장 위험하고 외진 길을 따라 순례를 한다. 그를 만나 해결되지 못한 인생의 답을 구하길 염원하면서.
한편 람머스가 사막의 진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순례자들은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해 갓 짜낸 염소젖에서부터 개미를 가득 담아 밀봉한 나무 상자, 신선한 벌집 단지 등 온갖 진귀한 것들을 노새에 가득 싣는다. 그렇게 순례가 끝나고 나면 비록 람머스를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더욱 확신한다. 짐 꾸러미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또 람머스가 반인반신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람머스가 현명한 사제든, 초월한 신이든, 강력한 야수든, 용맹스러운 투지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면모를 지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 번은 그가 시람 요새라는 곳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아주 웅장하고 화려한 요새로, 한 미치광이 마법사가 설계한 곳이었다. 여태껏 그 누구도 뚫고 들어간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가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요새의 내부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참혹한 마법으로 가득하다고 전해진다. 무시무시한 야수에서부터 화염에 휩싸인 복도, 그림자 악령이 버티고 서있는 암흑의 통로까지. 그런데 람머스가 들어간 후 채 한 시간도 안 돼서 이 장엄한 요새는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폭풍같이 몰아치는 먼지 기둥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 가운데 람머스는 특유의 구르기 기술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했다. 람머스가 왜 이 요새 안으로 들어갔는지, 그 속에서 어떤 비밀을 알아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요새가 무너진 바로 그 해, 람머스는 망망하게 펼쳐진 아이말리 호수를 단 이틀 만에 건넜고, 깊고 깊은 지하까지 땅을 파헤쳐 거대한 개미 둑을 무너뜨리고 여왕개미를 죽여버렸다. 이 여왕개미의 새끼들이 근처 농지를 마구 휩쓸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람머스는 자비심 가득한 영웅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녹서스가 슈리마 북부에 침입하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은 초월체의 사원 아래쪽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하나로 연합했다. 하지만 이들은 병력의 규모로 보나 전술로 보나 좀처럼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녹서스 부대의 승리로 가닥이 잡힐 무렵, 람머스가 등장했다. 갑자기 나타난 괴생물체가 양쪽 진영 사이로 구르기를 하자 놀란 병사들은 일제히 공격을 멈추었다. 잠시 후 람머스가 우뚝 솟은 사원 옆을 지났다. 그러자 건물이 흔들리며 거대한 벽돌이 떨어져 녹서스 병사들을 덮쳤다. 그들 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이제는 슈리마의 병력 규모가 훨씬 앞섰다. 승리를 장담하던 녹서스군은 결국 쓸쓸히 퇴각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람머스가 슈리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구해준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슈리마에는 람머스가 좋아하는 선인장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실이 무엇이든, 슈리마 사람들은 람머스에 관한 이야기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긴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슈리마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람머스 이야기를 열 개쯤은 줄줄 읊어댈 수 있다. 물론 게 중에 반은 그 자리에서 지어낸 이야기일지언정. 이 람머스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슈리마 제국이 등장하면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주춤하다가 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될 즈음 다시 또 활발하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의 출현이 암흑의 시대를 예고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토록 자애롭고 소소한 즐거움만 찾는 영혼이, 정녕 멸망을 예고하는 존재일까?

3. 북쪽의 유랑민


칼을 잡은 오잔의 손끝에서 뾰족한 나무 모서리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했다. 이제 겨우 여덟 살, 물론 숙련된 기술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목판은 둥글고 뾰족한 나름의 모양새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오잔의 누나 지야마가 침대에서 몸을 숙인 채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게 뭐니? 로크샤 똥? 누가 그런걸 산다고 만들어 대체.”
“똥 아니거든! 갑옷으로 중무장한 모습이야.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내겐 신 같은 존재라고! 그리고 이건 팔 거 아니야. 행운의 상징으로 간직하려고 만든 거지.” 오잔이 열을 올리며 대꾸했다.
“철딱서니 없긴. 우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야. 그런 거나 만들고 있을 시간 없다고!” 지야마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모래 언덕 위를 지나자 낙타에 실려 있던 간이 천막이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천막 안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각종 향신료가 담긴 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외엔 가족 침대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남쪽에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어!” 밖에서 오잔의 엄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찰싹찰싹, 낙타의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휘두르는 엄마 채찍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지야마는 몸을 비스듬히 숙인 채 망원경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 화려하게 꾸며진 망원경은 지야마가 가진 것 중 가장 값비싼 물건이었다.
“크미로스, 크미로스야! 화살 가져올게. 쟤들, 오잔 네가 만든 그 로스카 똥 덩어리 찾는 게 틀림없어.” 지야마가 소리쳤다.
지야마가 자리를 뜨자 오잔이 망원경 안을 들여다봤다. 몸집이 개만한 딱정벌레 떼가 모래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지야마는 활과 형형색색의 화살이 담긴 화살 통을 가져왔다. 화살을 쏘자 딱정벌레 한 마리가 맞고 떨어졌다. 하지만 나머지 벌레 떼는 여전히 동요하지 않은 채 공격을 이어나갔다.
“화살 몇 개나 있지?” 오잔이 물었다.
“40개쯤.” 화살 통 안을 들여다본 지야마가 실망한 듯 대답했다.
앞쪽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빨리 달릴 거야. 꽉 잡아!”
낙타는 채찍이 갈라질 정도로 속력을 내며 달렸다. 간이 천막이 덜컹거리며 앞으로 쏠리자 오잔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지야마는 화살을 쏘며 계속해서 공격했다. 한 번에 두 개씩 쏘기도 했다. 화살에 맞은 딱정벌레가 우르르 쏟아졌지만 아직도 수 백 마리가 남아 있었다.
“기름 가져와! 보관함 왼쪽에!” 엄마가 황급히 소리쳤다.
오잔은 서둘러 등유 한 병과 헝겊 뭉치를 가져왔다. 헝겊을 한 조각 잘라 기름에 흠뻑 적셔 화살 끝에 빙빙 둘렀다. 그러고는 불을 붙여 조심스레 누나에게 건넸다. 그러자 지야마는 벌레 떼를 향해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살을 냅다 쏘았다. 불화살의 공격을 받은 녀석들은 반격할 틈도 없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타들어갔다. 오잔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승리는 오롯이 두 오누이와 엄마의 완벽한 호흡 덕분이었다. 엄마가 생각해낸 불화살을 오잔이 재빠르게 준비했고, 지야마는 그것을 정확하게 조준해 벌레 떼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매캐한 공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껍질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낙타는 다시 속력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고 딱정벌레들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오잔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세찬 불길 속에 타오르던 딱정벌레의 날개는 어느덧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 위로 치솟았다.
“멈춰!” 왼쪽으로 방향을 틀려던 찰나,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정벌레 떼가 지붕에서 우르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위에서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오잔은 그제야 천장 위에 수 백 마리의 딱정벌레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집게발이 천장의 기둥을 뚫고 나오자 거대한 딱정벌레 한 마리가 툭 하고 굴러 떨어졌다. 지야마는 재빨리 단검을 가져와 마구 찔러댔다. 하지만 벌레의 단단한 껍질은 좀처럼 부서지지 않았다. 지야마는 오잔을 잡아채 뒤로 끌어내고는 단검을 휙 앞으로 날렸다. 제아무리 거대한 딱정벌레라도 날 선 단검 앞에서는 독 안에 든 쥐였다.
그 순간, 수없이 많은 딱정벌레가 갈라진 천장 아래로 우르르 쏟아졌다. 수백 마리의 벌레가 입과 집게발을 통해 내는 딸각거리는 소리로 사막 주위는 무척 시끄러웠다. 벌레 떼가 할퀴려 들자 오잔은 있는 힘을 다해 차버리고는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둥근 나무 형상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이 만든 행운의 상징이었다.
“람머스, 제발……우리를 도와주세요!” 잔뜩 겁에 질린 오잔은 계속해서 기도를 했다.
벌레 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천막은 금세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마치 격랑에 소용돌이치는 배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결국, 얼마 못 가 모래더미 위로 미끄러지며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향신료 병이며 온갖 물건들이 아래로 쏟아졌다. 오잔은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이내 한쪽 벽으로 쿵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귀에서는 연신 윙윙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이러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래더미 위로 처박힌 천막 사이로 누군가 오잔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엄마였다. 오잔은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 사이로 가늘게 눈을 떴다.
엄마와 지야마, 그리고 오잔은 천막의 잔해 옆으로 쭈그리고 앉았다. 콜록콜록, 연신 날리는 먼지에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딱정벌레 한 마리가 눈 앞으로 공격해오자 엄마는 날카로운 창으로 벌레의 양 턱 사이를 찔러댔다. 이번에는 지야마 앞으로 날아들었다. 엄마는 또 사정없이 찔러댔다. 그러자 모래 위로 딱정벌레의 누런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또 다른 녀석이 천막 지붕 위로 뛰어올라 그들 뒤를 공격했다. “아아악!" 집게발에 발을 물린 지야마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많은 벌레 떼가 일시에 공격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땅 위로 낮게 둘러앉아 바짝 세우고 있던 더듬이를 슬그머니 내렸다. 딸각거리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 가운데 저 멀리서 뭔가 쉬익 하고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보일 듯 말 듯 서쪽의 지평선 사이로 모래 폭풍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또 다른 공격을 예감한 오잔과 지야마, 그리고 엄마는 갖고 있는 무기를 단단히 준비했다.
갑옷을 입은 둥근 모양의 형상이 모래 폭풍 위로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이내 가까이 있던 딱정벌레 떼를 강하게 내리치며 단숨에 뭉개버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쏜살같이 달려가 공중의 벌레 떼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이에 질세라 녀석들도 날카로운 집게발로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느 순간, 단 한 마리의 딱정벌레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래 폭풍이 다시 한 번 주위를 휘몰아쳤다. 못 박힌 갑옷을 입은 둥근 모양의 형상이 오잔의 눈으로 얼핏 스쳤다.
“저거 혹시……” 지야마가 입을 뗐다.
“람머스!” 오잔이 소리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일어나 그를 쫓아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람머스의 껍데기엔 나선형 비늘 문양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톱은 스치기만 해도 금세 베일 듯 날카로웠다. 털이 북실북실한 딱정벌레 한 마리를 갉아먹는 그의 입에서 육즙이 뚝뚝 떨어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오잔과 지야마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는 람머스에게 다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우리를 구해준 분이군요.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람머스는 벌레를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으드득 으드득, 씹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람머스는 모래 더미 아래 처박힌 천막 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뭔가를 찾더니 오잔이 나무로 만든 아르마딜로 조각상을 갖고 나왔다. 실물과 똑같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비슷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당신이에요 람머스. 가지셔도 돼요.” 오잔이 말했다.
람머스는 무릎을 꿇고 앉아 조각상을 입으로 가져갔다. 댕강, 이내 두 조각이 났다. 다시 일어나 몇 걸음을 걸어가더니 모래 위로 모두 뱉어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지야마는 겨우 웃음을 참는 눈치였다.
람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또 다른 딱정벌레의 다리 하나를 툭 잡아뜯어 손에 쥐고는 둥그렇게 몸을 말고 구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평선 너머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오잔은 모래 위로 달려가 람머스가 뱉어버린 조각들을 다시 집어 들었다. 톡톡 털어 주머니에 넣고는 람머스가 사라진 쪽을 향해 머리 숙여 인사했다.
“내 행운의 조각상.” 주머니 속 조각들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속삭였다.
그것은 틀림없는 행운의 상징이었다.

4. 구 배경


오래 전 룬 전쟁으로 황폐해져 버린 대장벽 남부의 대지는 혼돈의 마법 폭풍으로 더욱 황폐해졌고, 결국 대자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전락해 버렸다. 기이한 동식물이 오히려 더 정상으로 보이는 장소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람머스만큼 특이하고 흥미로운 생물은 없을 것이다. 슈리마 사막에 살던 아르마딜로가 어째서 쿠뭉구 정글을 가로질러 역병 정글까지 온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람머스는 이 힘든 길을 뚫고 왔다.
람머스는 얽히고 설킨 덩굴과 썩어가는 시체들 틈에서 우연히 푸른 식물들로 뒤덮인 기이한 미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미로를 탐험하던 중 그 중심부에 있는,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무엇인가에 이끌리게 된다. 가까이 다가가자 빛이 섬광을 뿜으며 폭발했고, 람머스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모든 게 뒤바뀐 후였다. 미로는 사라졌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오던 그에게 생전 처음으로 ‘인식’이라는 게 생겨났다. 람머스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가 부르르 몸을 떨자 주변의 대지가 울리기 시작했고, 점점 강해져만 가던 울림은 람머스가 진정하자 그제야 멎었다.
울림이 사그러들자, 람머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과 같은 이들을 찾아 나서기 위해 역병 정글을 뒤로 한 채 길을 떠났다. 대장벽 남부를 가로질러 모든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어디를 가건 그와 같은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람머스는 이 혹독한 여정을 겪으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갑옷을 직접 지어 입었고, 이 갑옷 때문에 '중무장 아르마딜로'라는 별칭을 얻었다.
람머스의 모험은 결국 전설의 리그에서 끝이 났다. 이곳에서는 지성을 가진 아르마딜로라는 존재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별 이상한 걸 다 봤지만 이건.... 이건 진짜 처음 본다."
– 방탕한 탐험가 이즈리얼, 람머스를 처음 만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