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사이/배경

 


1. 기본 배경
2. 사이 칼리크


1. 기본 배경


슈리마의 사막에는 땅굴 속에 숨어서 먹잇감을 노리는 흉포한 생물종이 서식하고 있다. 렉사이는 그 생물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크고 잔인한 포식자다. 렉사이의 그칠 줄 모르는 식탐 때문에 위대한 슈리마 제국 전체가 초토화되었을 정도다. 사막을 오가는 상인이나 여행자들은 아무리 철저하게 무장을 했더라도 렉사이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멀고 먼 길을 돌아가곤 한다. 그럼에도 방심할 수는 없다. 교활한 강도들의 유인 작전에 속아 자기도 모르게 렉사이의 영토에 발을 들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 괴물에게 발각되는 순간 끝장이다. 모래 속에서 덮쳐오는 죽음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2. 사이 칼리크


사이 칼리크라는 악명 높은 사막을 건너려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절박한 처지였다. 그래도 수중에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다면, 길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샤히브를 고용했다. 샤히브는 이 일에 경험이 많은 소년이었다. 사막을 건너는 일을 하면서 반 년 이상 목숨을 부지하는 소년은 거의 없고, 돈을 조금이라도 벌고 나면 이 바닥에서 손을 떼는 게 보통이었지만, 샤히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그마치 10년째 사이 칼리크를 건너 다니며 살고 있었다.
샤히브는 소년 여섯 명과 낙타 한 마리로 한 팀을 꾸렸다. 소년들 중에는 고아나 탈출한 노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버림받은 아이들이었다. 자식을 건사하기도 힘들 만큼 가난한 부모들이 열댓 살 먹은 아들을 내버리는 것이다. 자헤예 역시 그런 경우였다. 자헤예는 샤히브에게 이 일자리를 제안 받기 전까지 며칠이나 굶주리고 있었다. 소년들의 몸값은 낙타 한 마리의 값어치보다도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이 일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단 일행이 출발하기 전에 샤히브가 소년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소년들에게 주의 사항을 하나씩 일러주었다. 발에 생긴 굳은살을 잘라내는 법부터 시작해서, 소리를 죽이고 빠르게 걷는 법까지.
“한 발짝 한 발짝을 느끼면서 걸어야 해. 엄지발가락부터 땅에 딛고, 그 다음에 발의 바깥쪽을 디디다가, 발 전체가 완전히 땅에 닿았을 때에야 체중을 옮겨 싣는 거야.”
샤히브는 그렇게 설명하고 직접 시범을 보였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조용히 걷는 것만이 아니라, 빨리 움직이는 것도 중요해. 낙타가 너무 천천히 걸으면 우리 존재가 탄로날 거야. 연습을 많이 해둬.”
자헤예는 첫날부터 발에 물집이 심하게 잡혔다. 물집이 터져 피가 철철 흐르니 얼마나 아프던지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매일 저녁 상단 일행이 이동을 멈추고 야영을 시작할 때마다, 그는 서늘하게 식은 모래밭 위에서 한참을 연습했다. 넷째 날이 되자 고통이 너무 심해서 가죽 조각을 입에 물고 깨물면서 아픔을 삭여야 했다.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연습한 덕분에 샤히브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 봐. 자헤예는 나보다도 더 잘 하네.” 샤히브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헤예처럼 따라 해봐. 생쥐처럼 살금살금, 가젤처럼 성큼성큼. 그게 바로 사이 칼리크에서 살아남는 법이야.”
수련을 열심히 하는 것은 선배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자헤예는 샤히브를 늘 따라다니면서 그의 요령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 샤히브가 한쪽 발을 올리고 쉬는 모습이며, 아침마다 자기 창의 깃발을 손질하는 것도 유심히 눈여겨보았다. 샤히브는 창에 달린 깃발이 항상 야자나무의 잎사귀처럼 빳빳하게 펄럭이도록 매일 깃발을 단단히 고쳐 묶는 것을 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막 풍경을 세심히 관찰하는 것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주변을 경계하지 않을 때라고는 오로지 잠을 잘 때뿐이었다.

상단과 소년들이 사이 칼리크에 도착한 것은 두 번째 달이 떴을 때였다. 모래 언덕 저 아래에 놓인 거대한 해골이 드디어 일행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괴물의 뼈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 지점부터 사이 칼리크가 시작된다는 것만은 모두가 알았다. 상단 일행은 하늘로 삐죽이 솟아오른 거대한 갈비뼈가 드리운 그늘 속을 묵묵히 통과했다.
북부인들은 사이 칼리크를 ‘뼈의 바다’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번역이다. 라지 부족들은 바다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라지 부족의 언어에서 ‘사이’란 바위들이 흩어진 특정한 모래 평원 지대를 가리키는 단어로, 지나가기가 버겁고 고통스러운 곳을 의미한다. 지하에 땅굴들이 뚫려 있고, 그 땅굴마다 제르사이가 숨어 있는 곳. 모래 속의 사신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로 ‘사이’다.

이제부터 소년들은 상단 본대보다 앞서서 움직였다. 소년들이 늙은 낙타를 끌고 동 트기 전에 출발하면, 그로부터 한나절 후에 상단 행렬이 뒤따라왔다.
사이 칼리크에 도착한 지 둘째 날, 자헤예는 처음으로 땅굴을 발견했다. 자헤예가 깃발을 휘둘러 경고하자 샤히브가 그의 옆으로 가만가만 다가왔다. 소년들은 조심스럽게 땅굴 근처로 접근하다가 스무 걸음쯤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땅에 멜론 한 덩이만한 구멍이 있었고, 거기서 독성을 띤 증기가 부글부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샤히브는 소년 한 명을 상단 일행에게로 보내 경고를 전하도록 했다.
자헤예는 샤히브에게 물었다. “저만한 크기의 제르사이는 우리가 죽일 수 있을까요?”
“글쎄, 제르사이들은 오래 살수록 피부가 단단해지는데...” 샤히브는 턱을 긁적거리면서 말하다가 씩 웃었다. “나는 자칼만한 놈을 죽인 적도 있다고. 그때 우리 낙타가 희생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제르사이는 내 손에 죽었어.”
선배가 으스대는 걸 보니 자헤예도 기분이 좋아져서 덩달아 웃음이 났다. “그럼 렉사이는요? 렉사이가 정말로 있어요?”
그 질문에 샤히브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내 눈으로 직접 봤지.”
자헤예는 그 유명한 괴물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샤히브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지 이제 얼른 움직이자고 재촉했다. 그들은 땅굴 근처에서 살금살금 물러나 기다렸다. 허공에 귀를 기울이며, 지평선에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는지 주시하며.

처음으로 경보용 종소리가 들려왔을 때, 자헤예는 순간적으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동쪽 방향으로부터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걸 보고는 아차 하고 후회했다. 땅굴을 찾는 데에 너무 집중하느라고 지평선을 경계하는 일을 깜빡 했던 것이다.
낙타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자헤예는 다른 소년들의 깃발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시야 저편에 깃발 세 개가 얼핏 보였다.
또 종소리가 울렸다. 망꾼 소년이 지금 다시 종을 치는 건 놈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제 자헤예는 미끼가 될 낙타를 망꾼 쪽으로 보내줘야 했다. 그러면 제르사이는 낙타를 쫓아가느라 상단 일행의 이동 경로에서 비켜갈 것이고, 더 나아가 망꾼 소년이 도망칠 기회도 얻을 것이다. 그 사이에 망꾼이 제르사이에게 잡혀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그때 한쪽 지평선에서 샤히브가 나타났다. 늘 살금살금 걷던 그 깡마른 십대 소년이 지금은 힘껏 발을 구르며 질주하고 있었다. 샤히브는 들고 있던 창까지 내팽개치고는, 낙타와 자헤예가 있는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곧이어 샤히브의 뒤편에서 웬 먼지구름이 나타났다.
그걸 본 순간 자헤예는 낙타의 몸에 매달린 커다란 종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힘껏 후려쳤다. 종이 땅에 놓여 있는 탓에 소리가 완전히 울려 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귀가 먹먹할 만큼 소리가 컸다. 자헤예는 연거푸 종을 치고 또 쳤다. 그러나 샤히브의 뒤를 맹렬히 쫓아오는 먼지구름이 방향을 바꿀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그 먼지구름은 시시각각 더 커져가고만 있었다.
금방이라도 샤히브가 먼지구름에 집어삼켜질 듯하던 순간, 샤히브가 우뚝 멈춰서더니 고함을 질렀다. “일동 정지!”
소년들이 즉시 얼어붙은 것처럼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정확히 그와 동시에, 겁에 질린 늙은 낙타가 땅을 박차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낙타가 달려가는 걸 볼 새도 없었다. 그 뒤를 쫓아가는 제르사이의 모습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한 마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싹한 에너지가 소년들 모두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자헤예는 목덜미의 털이 쭈뼛 섰다.
“엄청 가까웠어요.”
자헤예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샤히브가 대꾸했다.
“아니. 가까웠던 게 아니야. ‘큰’ 거지.”
샤히브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의 얼굴에 진짜 공포가 드러나는 건 처음 보았다.
샤히브가 사막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자헤예의 눈에는 괴물도, 낙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먼지구름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런데도 샤히브는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상단 일행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는 저 바위들 쪽으로 이동하자. 이제 제르사이가 낙타를 쫓아갔으니 우리가 저기까지 도망칠 시간은 있을 거야.”
자헤예는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놈이 대체 어딨는데요?”
그때 자헤예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낙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에 가득 찬 그 비명은 시작되자마자 뚝 멎었다.
“대체 어떻게 낙타를 저렇게 빨리 죽이죠?”
샤히브는 대답 없이 일행을 재촉했다. “저 바위로, 어서!”
소년들은 즉시 그 자리를 떴다.
그들은 샤히브의 지시에 따라 이동했다. 샤히브가 멈추라면 멈추고, 조용히 걸으라면 조용히 걸었다. 자헤예는 자신이 못 본 무언가를 샤히브가 보고 있는 것이기를, 어련히 알아서 잘 행동하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바위들은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았다. 소년들이 아무리 걸어도 바위들은 그들에게서 자꾸만 물러나는 것만 같았다. 급기야 해가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고 사막이 어둑어둑해지자 소년들은 앞뒤 안 가리고 뛰기 시작했다. 모래에 찍힌 그들의 발자국은 바람에 쓸려 지워지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제르사이가 그들의 등 뒤에 있으니까. 그들이 발을 한 번 헛디디거나 휘청거릴 때마다 그 기척이 제르사이에게 모두 들릴 테니까.

소년들은 마침내 바위들이 있는 절벽 근처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위 벽에 거대한 아가리 같은 구멍이 뚫려 있고, 거기서 불길한 증기가 쉭쉭 뿜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이 너무나 커서 자헤예가 꼿꼿이 선 채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렉사이...” 자헤예는 공포와 경이감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있는 다른 검은 바위들에도 하나같이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소년들 중에서도 나이가 어린 잘리가 그 구멍들을 보고 말했다. “렉사이는 바위도 뚫고 땅굴을 파나봐요...”
모두가 피하고 싶었던 무시무시한 진실이 그들을 덮쳐왔다. 소년들이 피난처로 삼으려고 했던 곳이 실은 렉사이의 집이었던 것이다.
“돌아가야겠어요. 상단 일행과 합류하러 가요. 네?”
잘리가 말했지만, 샤히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고 싶으면 한번 해보든가.”
“조용히 걸으면 되잖아요.”
“꼬박 하루를 걸어야 하는데도? 하루 종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걸을 수 있겠어?”
자헤예가 끼어들었다. “샤히브,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지금 돌아가면 우리는 사이 칼리크 한복판에서 죽을 거야. 나는 저 골짜기를 따라 쭉 전진하겠어. 신이 굽어살펴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잘리가 물었다. “골짜기가 어디로 이어지는데요?”
“어디로 가는지는 상관없어.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소년들은 절벽을 조심조심 내려가서 골짜기 밑에 들어섰다. 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샘이나 시냇물을 만날 수 있기만을 바라면서. 무시무시한 땅굴 입구들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소년들은 렉사이가 자신들이 아닌 상단 일행의 기척을 듣고 그쪽을 쫓아가기만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골짜기 위로 먼동이 터왔다. 날이 밝아지자 소년들의 앞에 섬뜩한 장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골짜기에서 조용히 걷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발 밑에 온통 뼈다귀가 깔려 있었으니까.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텅 빈 죽음의 껍질들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냈다.

괴물은 아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소년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땅굴 구멍에서 렉사이가 펄쩍 뛰어나온 것이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자헤예에게는 모든 게 흐릿한 얼룩처럼만 보였다.
“물러나! 바람을 등져!” 샤히브가 고함쳤다.
그러나 잘리가 그 경고를 듣기에는 너무 늦었다. 렉사이는 늑대가 생쥐 한 마리를 잡아먹듯 잘리를 단숨에 낚아채버렸다. 그 거대한 송곳니에 물린 잘리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자헤예는 자신의 위로 드리워진 렉사이의 거대한 몸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그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튼튼한 앞발을 좌우로 움직이며 활보하는 그 몸에는 거머리처럼 생긴 꼬리가 달려 있었다. 그 꼬리만 해도 악어 한 마리의 몇 배는 될 만큼 컸다. 렉사이는 춤추는 코브라 같은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공기중의 냄새를 맡았다.
자헤예는 당장 도망치고 싶은 본능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온몸의 근육이 움직이려고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렉사이가 자기 쪽으로 고개를 튼 순간, 움직이고 말고 할 생각조차 더 이상 들지 않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온통 피에 뒤덮인 거대한 제르사이의 머리가, 그 눈 없는 얼굴과 탄탄한 부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너무나 이질적이고 너무나 완벽하게 공포스러웠다. 실로 경이롭기까지 했다. 자헤예는 멍하니 입을 벌리면서 자신의 창을 거머쥐었다. 저 단단한 껍질을 창으로 뚫을 수 있을까?
“엎드려!” 샤히브가 소리쳤다.
소년들이 일제히 땅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렉사이의 ‘지느러미’라고 불리는 신체 부위가 징그러운 초록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공중에서 파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렉사이가 몸을 돌려 이동하기 시작했다. 상단 행렬이 있는 방향이었다. 렉사이는 거리를 헤아려보는 듯 혀로 다시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윽고 지느러미가 원래의 보라색으로 돌아오더니, 렉사이는 잘리를 또 냉큼 낚아채고는 땅굴로 끌고 들어갔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잘리가 흘린 피를 제외하면, 렉사이가 여기에 있었던 흔적조차 없었다.
샤히브가 가자고 손짓했다. 소년들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골짜기를 나아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구멍 뚫린 검은 바위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소년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울 수도, 한탄할 수도 없었다.
긴장감에서 좀 벗어나고 나니 온몸에서 진이 빠졌다. 자헤예는 골짜기 안을 둘러보았다. 그들을 뒤쫓는 괴물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존재인지, 왜 샤히브가 계속 이동하라고 재촉할 수밖에 없었는지 불현듯 이해가 되었다. 실은 이 협곡 전체가 렉사이 혼자 차지하는 영토였던 것이다. 옛날 아지르 황제의 치세부터, 즉 슈리마 제국의 영광이 태양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었고 돌이 아니라 흙이었던 시절부터, 렉사이는 이곳에서 쭉 살아왔다. 제르사이가 모두 그렇듯 오로지 생명체를 잡아먹으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런데 제르사이들이 왜 꼭 여기서 사는 거죠?”
자헤예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 괴물이 다시 나타났다. 저 앞의 땅 속에서 튀어나온 렉사이는 곧장 자헤예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자헤예가 재빨리 엎드리자, 렉사이가 그의 위를 지나쳐 허공을 날아갔다. 그 거대한 몸뚱이에 하늘의 태양이 일순 가려졌다. 렉사이는 착지하자마자 앞발로 땅을 파헤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수풀 속에 숨어 있던 한 소년이 자헤예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일행의 막내인 베즈카였다. 그런데 베즈카가 손짓을 하다 말고 기겁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렉사이의 지느러미에서 나오는 특유의 에너지가 땅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렉사이가 땅을 찢어발기고 뛰어올라 베즈카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렉사이는 땅에 쿵 내려앉으면서 그 거대한 지느러미로 베즈카를 덮쳤다.
나머지 세 소년은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괴물은 소년들의 뒤를 마구 쫓아왔다. 방향이 틀어질 때마다 속도를 늦추다가 다시 맹렬히 내달리면서, 렉사이는 소년들을 협곡 안쪽으로 더욱 깊이 몰아넣었다. 아예 탈출할 수도 없도록. 소리 없이 걷는 것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었다. 괴물이 바로 등 뒤에 있는 지금은 목숨을 걸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희생자는 칼립이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던 칼립은 결국 렉사이에게 잡아 먹혔다. 그걸 본 샤히브가 문득 뜀박질을 멈추더니, 칼립이 떨어트린 창을 집어 들었다.
“지금 뭐 해요?” 자헤예가 다급히 물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샤히브 주변의 공기가 마치 물결처럼 일렁거리며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제 내가 낙타 역할 하려고. 너는 조용히 도망쳐. 사람들에게 가서 네가 본 것을 알려줘.”
샤히브는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절벽 전체를 둘러보았다. 자헤예도 그의 눈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절벽 표면에 뚫린 구멍들에서 어떤 무늬가 나타나고 있었다. 구멍들에서 잉크처럼 새까만 빛의 에너지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나와 다른 구멍으로 연결되면서, 커다란 원들이 서로 교차되는 모양을 그려나가는 것이었다. 그 도형들 안에서 현실의 차원이 일그러지고 뒤틀리는 게 보였다. 무언가 다른 차원이 이 세계로 흘러 들어오려고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이 외딴 골짜기 안에 숨겨진 제르사이의 진정한 서식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땅굴이었던 것이다.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연결되는 땅굴. 그 악몽 같은 세상은 제르사이들이 태어난 고향이자, 심지어 그보다도 더욱 흉악한 존재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리라. 그 굶주린 존재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땅굴이 완전히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이 세계로 침입하려 벼르고 있었다.
“어서 가, 자헤예.” 샤히브가 지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쥐처럼 살금살금, 가젤처럼 성큼성큼. 그래야 사이 칼리크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자헤예가 저편의 절벽에 이르렀을 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자헤예는 퍼뜩 뒤를 돌아보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샤히브가 누누이 강조한 대로, 발가락부터 디딘 다음 뒤꿈치를 마저 디디면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 요령을 가르쳐준 스승이 거대한 괴물의 입에 들어가는 걸 똑똑히 보면서도.
렉사이가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샤히브의 몸에서 끈적거리는 검은 에너지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렉사이는 그걸 이리저리 굴리면서 바닥에 뚝뚝 흘러내리는 에너지로 어떤 무늬를 그려나갔다. 그 무늬는 두 개의 땅굴 구멍 사이를 잇고 있었다.
자헤예는 다시 앞을 돌아보고, 조용히 걸음을 옮겨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다음날이 되자 땀이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수분이 말라버린 눈은 뻑뻑해졌고, 입술은 다 트고 갈라졌지만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탈수 증상 때문에 장딴지 근육에 쥐가 났다. 이제는 조용히 걸을래야 걸을 수가 없었다. 자헤예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샤히브를 따라 상단에 합류하기 전에 며칠을 굶주렸던 자신의 신세를 돌이켜보며 울었다. 다른 형제들은 젖혀두고 하필이면 자신을 내다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서 울었다. 그리고 그에게 처음으로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 샤히브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나니 비로소 쥐가 나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힘겹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자헤예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이 비틀거릴 때마다 근처의 제르사이에게 들릴 거라는 걸 알면서.

자헤예는 살아서 레넥 강가에 도착했다. 그때만 해도 그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곧 자헤예에 대한 소문이 인근에 퍼져나갔고,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사이 칼리크를 건너려는 사람들 중 수중에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는 이들은 반드시 자헤예를 고용하려 했다. 그래서 자헤예는 버려진 소년들에게 요령을 가르쳤다. 발에 생긴 굳은살을 잘라내는 법과, 발을 조용히 디디는 법과, 사이 칼리크에서 살아남는 법을. 그리고 렉사이라는 이름의 괴물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