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브라우티건
[image]
1. 개요
Richard Gary Brautigan[1]
미국의 시인, 소설가. 1935년 1월 30일 ~ 1984년 9월 16일(추정)
블랙유머와 패러디, 풍자에 정통한 작가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57년 시인으로 등단하여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1965년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으로 소설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1967년 《미국의 송어낚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시와 소설 창작 활동을 병행하다 1984년 자살로 생을 마쳤다.
2. 생애
1935년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에서 태어났다. 1944년 오리건 주 유진으로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고등학교 농구 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2]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과 함께 거리를 전전하며 방황하다[3] 195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거리를 돌며 자신의 시를 배부하고 몇몇 출판사에 투고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출판사는 그의 원고를 거절했다. 간신히 첫 시집을 낸 후 1960년대 초반까지 시인으로 활동하였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무명시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반문화적인 분위기[4] 를 경험했고 이는 훗날 그의 소설 창작에 주요한 양분이 되었다.
1961년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와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을 완성했다. 집필 시기상 《미국의 송어낚시》를 먼저 완성했고 그 역시 이 작품을 먼저 출간하고 싶어 했으나 원고를 투고한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제목만 보고 흔한 낚시 관련 서적인 줄 알고(...) 거부했다고 한다.[5] 결국 1965년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을 먼저 발표함으로써 소설가로 등단하였으나 비평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소설가로서 그가 빛을 보게 된 건 1967년이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았던 커트 보네거트가 그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서서 출판사들에 그의 원고를 추천해준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도움을 통해 출간된 《미국의 송어낚시》는 반문화 운동이 한창이었던 미국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6] 를 끌었고 그는 단숨에 미국에서 가장 장래가 유망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시와 소설 활동을 병행했는데,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워터멜론 슈가에서》와 장르문학적 실험 소설인 《임신중절: 어떤 역사 로맨스》등의 소설을 연달아 출간하면서 시인보다는 소설가로서 커리어를 더욱 탄탄히 다져 나갔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는 미국에서의 열광적인 인기가 다소 사그라들었으나 번역 출간된 작품들이 일본과 유럽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일본 문화를 중심으로 한 동양철학과 선불교에 심취하여 시와 소설에 동양적 요소들을 삽입하는 시도들을 해 나갔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현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의 한 명이었지만 개인사는 매우 불우했다. 그는 유년기에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고 청년기에 정신질환을 앓으며 방황했다. 작가로 성공한 뒤에도 그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고생했으며 다양한 여성들과의 관계에 집착했다. 그의 딸의 회고에 따르면,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십여 년 전부터 일상적으로 자살을 입에 담았다고 한다.
3. 사망
1984년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캘리포니아 주 볼리나스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오래된 자택에 혼자 살았는데 어느 시점부터 외부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출판사들이 사립탐정을 고용하여 그의 행방을 추적했고, 1984년 10월 25일 그의 자택 거실에서 44구경 리볼버에 의해 머리가 부서진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타살 흔적이 없었으며 시신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경찰은 마지막으로 그와 통화했던 그의 친구와 이웃들의 증언을 통해 9월 16일을 사망일로 특정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후 그의 소설 《임신중절: 어떤 역사 로맨스》에 등장하는 미공개 원고들을 위한 도서관이 버몬트 주 벌링턴에 브라우티건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실제 개관했다. 브라우티건 도서관은 1995년 플렛처 공공도서관으로 이관했고, 2010년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딸인 이안테 브라우티건과 워싱턴 주 클락 카운티 역사 박물관의 합의 하에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4. 영향
무라카미 하루키, 윌리엄 패트릭 킨셀라[7] , 크리스토퍼 무어[8] 등의 작가들이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 작가로는 장석주[9] , 최승자[10] , 신경숙[11] , 천명관[12] , 배수아, 김애란, 정영문 등의 작가들이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민속음악과 동요를 연주하는 듀오 미국의 송어낚시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에서 유래했다. 밴드 B-Flower의 이름은 Brautigan Flower의 줄임말이다.
1994년 3월 캘리포니아 주의 피터 이스트만이라는 사람이 미국의 송어낚시로 개명하여 유명세를 탔다. 미국 공영 라디오(NPR)는 아이에게 미국의 아기 송어낚시라는 이름을 붙인 신혼부부의 사연을 보도하기도 했다.
5. 문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난 계단을 하천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똑같은 일이 한때 내게도 일어났다. 나는 버몬트 주에서 한 노파를 송어하천으로 착각하고 용서를 구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전 할머니가 송어하천인 줄 알았어요.” “난 아냐.” 할머니가 말했다.
《미국의 송어낚시》
그 남자는 동료를 정신없이 먹어대는 쥐 한 마리에게 다가가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다. 그 쥐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해서 먹고 있었다. 총의 공이가 짤깍 하자, 쥐는 먹는 것을 잠시 멈추고 눈 가장자리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쥐는 우선 권총을, 다음에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친절하게 보였고,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 디나 더빈처럼 노래했답니다.”라고 말하려는 듯했다. 남자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에게는 유머 감각이 없었다.
《미국의 송어낚시》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13]
《미국의 송어낚시》
미국은 다른 증거가 필요 없다. 간디식의 비폭력 트로이의 목마의 ‘붉은’ 그림자가 미국을 뒤덮었고, 샌프란시스코는 그 목마의 마구간이다. 미친 강간범의 전설적인 달콤한 얘기도 이것에 비하면 시대에 뒤떨어졌다. 바로 이 순간에도 공산주의 에이전트들은 케이블카를 타는 순진한 아이들에게 미국의 송어낚시 평화 소책자들을 나누어주고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
일종의 이상한 진공청소기처럼 나는 그를 위로하려 노력했다. 우리가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이고 장황한 말로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라면 또 다른 인간의 목소리라는 것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말이란 이 세상에 없는 법이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봄이 되면 젊은 남자는 환상적인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그 남자의 환상에 커피 한 잔의 공간은 있을 것이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인생이란 빌린 지프차로 뉴멕시코에서 운전하는데 옆자리에 탄 여자가 너무 예뻐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은 그런 것과도 같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오, 주여. 때로 우리가 사랑을 찾기 위해 당하는 험한 꼴을 생각하면 슬프나이다.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