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푸익
1. 개요
마누엘 푸익은 아르헨티나 출신 소설가 겸 각본가로 국내에는 거미여인의 키스(El beso de la mujer araña)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작가 자신이 양성애자로 동성애자들을 주 등장인물로 삼은 작품들을 몇 편 저술했으나, 그의 소설의 주제는 동성애가 아니라 소외된 자들의 삶을 비롯한 현실을 반영하는데 있기 때문에, 이성애자들이 읽기에 저항감이나 부담감이 거의 없고[1] 작품 자체의 완성도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위계질서를 넘나드는 새로운 소설 양식에 도전한 그는 결국 다수의 독자들이 좋아하는 고급 문학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 1976년 발표된 그의 대표작 거미 여인의 키스는 1985년 영화화되고 1993년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2. 생애
푸익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 헤네랄 비예가스라는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가 소년 시절이던 당시 그의 고향에는 고등 교육 시설이 없었고, 가족들의 결정에 의해 푸익은 1946년부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수학 시절 푸익은 친구 오라시오의 도움으로 여러 문학 작품과 영화를 소개받게 되었으며 가족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양성애자로서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겼다. 푸익이 주로 영향을 받은 작가는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올더스 헉슬리,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토마스 만'''이 있다.[2] 이 시기 푸익은 친구 오라시오와 함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수입된 B급 영화를 보고 여기에 대해 관람평을 주고 받는 것을 즐겼는데 이는 그의 작품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 주인공들 사이의 대화에 반영되었다. 학업을 마친 이후 푸익은 한동안 영화 업계에서 일을 하다가 1953년부로 공군 통역병으로 군복무를 수행했다.
푸익은 군복무를 마치고 1956년부로 로마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영화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푸익은 이탈리아, 영국, 스웨덴, 미국 등을 전전하며 번역일이나 식당 아르바이트, 영화 조감독 등의 일을 하며 영어를 배우고 다양한 경력을 쌓았으며 1963년 미국에서 에어프랑스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65년 2월에 소설 리타 헤이워드의 배신(La traición de Rita Hayworth)을 탈고했으나 너무 좌파적이라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군부의 검열과 제재를 받아 출간이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1968년이 돼서야 출판이 허가되었다. 리타 헤이워드의 배신은 출간 직후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프랑스의 르몽드지에서 1968년 발표된 최고의 소설로 평가를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1967년 푸익은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두 번째 작품 색칠한 입술(Boquitas Pintadas)을 쓰기 시작하여 1969년 발표했다. 색칠한 입술은 해외 평론가들에게는 격찬을 받았지만 보수적인 군부 독재 치하 아르헨티나에선는 악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 번째 작품은 악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본국의 평론가 및 정부와 갈등을 반복하던 푸익은 1973년 자신이 발표한 작품에서 후안 페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표현한 것이 문제가 되어[3] 대중적으로 이미지가 안 좋아지자, 좌파 지식인들에게 더 우호적이던 멕시코로 이민을 결정했다. 그의 대표작 "거미여인의 키스"는 멕시코에서 쓰기 시작해서 미국에서 완성하여 스페인에서 출간했다. 멕시코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그는 70년대 중반 뉴욕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스페인어 강좌를 하며 생계를 해결하며 틈틈히 소설을 집필했다. 결국 1976년에 스페인에서 먼저 출간된 거미 여인의 키스는 정치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모국 아르헨티나에서 판매 금지를 당했으나, 해외에서는 역시나 대성공을 거두며 다시 한 번 마누엘 푸익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이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이민한 그는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Eternal Curse on the Reader of These Pages)을 비롯한 작품을 영어로 집필하는데 이 소설 역시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 사용했던 대화체 서술 기법을 사용하였다.
1990년 에이즈에 감염된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으며 살아생전 이미 저명한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례식 때는 어머니와 친구들을 포함해서 6명 정도만이 참여한 상태로 간소하게 치루어졌다. 본국에서 계속 탄압받고 떠돌이생활을 하던, 소외된 사람들의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직접 소외된 삶을 살아오던 그에게 걸맞는 죽음이었다.
3. 여담
러시아계 미국인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초기작들은 주로 모국어로 썼으나 후기 작품들은 영어로 초고를 썼다. 따지고 보면 둘 다 공통점이 많다. 나보코프가 미국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쳐서 생계를 해결했던 것과 비슷하게 푸익도 미국 내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해결했으며, 소설 내 사회적 금기를 언급한 것으로 인한 논란, 정치적인 이유[4] 로 본국에서 추방되어 아웃사이더로 평생을 살아온 점[5] ,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분야의 개척''' 등등. 작가로서의 삶이 비슷하다보니 공통점이 많았다.
한마디로 해당 작가들은 모두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결국 말년에 가서는 결국 모국에서 모국어로 소설을 출판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영어로 소설을 출간하는 편을 택했다.
[1] 굳이 부연설명하자면, 마누엘 푸익은 동성애가 후천적으로 생기는 성향이라는 견해를 표현한 적이 있어서, 다른 동성애 인권 운동가들의 지적을 듣기도 했던 사람이다.[2] 특히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로는 토마스 만을 꼽을 수가 있다. 만은 여성과 결혼했으나 남성에 더 끌리는 성적 취향이 있었으며 이를 자기 소설에 직간접적으로 투영하는 편이었다. 그의 소설에는 자신이 학창 시절에 짝사랑했던 남학생을 바탕으로 한 인물 묘사가 많으며 소설 주인공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는 여성 인물들도 대부분 보이시한 인물로 묘사된다. 실제 생활에서도 토마스 만은 자신이 학창 시절 좋아했던 남학생과 비슷한 외모의 여성과 결혼했다.[3]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후안 페론이 축출된 이래로 연 20%대의 인플레이션과 정치혼란으로 인해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던 후안 페론에 대한 지지여론이 매우 강했다. 1973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이 출마했을때 61%로 당선되었을 정도.[4] 나보코프의 경우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이유로 러시아 혁명 당시 어린 나이에 본국에서 정든 집을 놔두고 독일로 망명해야 했으며, 이후 동생이 나치에 살해당하는 등 비극적인 가족사가 이어졌다.[5] 말년에 나보코프는 자기 소유의 집에서 사는 대신에 스위스에 한 호텔에서 거주했으며, 마누엘 푸익도 평생 유럽과 중남미, 미국 등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각지를 전전하는 삶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