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막
馬邈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아래의 행적들 때문에 '''진정한 마레기'''라고 불리고 있다.
263년에 강유관(江油關)을 지키고 있었던 수문장이었다. 강유관은, 강유수(江油戍)이라고 불리기도 한다.[1] 여기서 수(戍)는 수자리(변경을 지키는 일), 둔영(屯營), 병사(兵舍)를 뜻한다. 즉, 강유관은 변경을 지키는 요새로 인식되었던 셈이다.
당시 촉한 정벌군을 이끌던 등애가 음평의 험난한 절벽을 넘었는데 그의 선봉이 강유관에 도착해 갑툭튀하자 항복했다. 이게 얼마나 큰 전략/전술적 패착이냐면 등애군은 음평 산길[2] 을 넘어온 통에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모두 굶주려 있었고(원준의 저서 원자) 들어올 때 '양주(凉州)의 병마(兵馬)와 강호(姜胡)의 건아들을 모집하고 무겁게 보답할 것이라 약속하여 등애를 뒤따르며 적을 쳐서 그 공이 모두 제일'이었다는 모집병 5천여명을 포함한 2만이 채 되지 않는 보승[3] 을 이끌고 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하며[4] 스스로 사지(死地)에 몸을 던진[5] 병력과 종회가 지원해 준 전장 등의 군사(종회전)를 합쳤음에도 1만명(원자, 진서 문제본기)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많은 수의 비전투손실이 났으며 이때 산길을 넘어왔던 단작이 사지(死地)라고 표현할 정도로 험난한 산길을 넘어와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심지어 등애 휘하의 전속은 강유관으로 내려와 들어올때 전의를 상실한 채 진격을 거부하다 사형당할 뻔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6] 당시 등애군의 몰골이 제대로 된 무기나 보급을 받았을 지나 의문일 정도로[7] 말이 아니었을 점을 감안하면, 강유관의 시점에서 이런 군대가 공성전 수행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등애군이 처들어온 뱡향이 강유가 수비하고 있던 동쪽 검각 방향이 아니라 보급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북쪽 마천령쪽에서 온 것을 걸 알았을것이다.[8]
그러나 등애군의 선봉(先登, 혹은 '먼저 올라가서' 번역하기도 한다)이 강유관에 도착하자 강유관의 수문장인 '''마막은 항복해 버린다.''' 진서 단작열전에서 단작의 말에 따르면 '양흔이 거느린 병사들 만이 강유(江由)의 세(勢)를 핍(逼)하였음을 이유로 30명이 봉해질 수 있었다.'(楊欣所領兵,以逼江由之勢,得封者三十人。) 번역하자면 '양흔이 거느린 병사들이 강유관의 형세(혹은 세력)를 핍박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실제 등애전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강유관은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비전투손실로 지치고 다친) 등애군이 도착하자 마막이 항복했다고 하는데[9] 이때 등애와 함께 도착한 양흔의 병사들이 강유관을 압박하며 몰아갔다고 할 수 있다.
또 진서 단작열전에서 단작의 말에 따르면 지방의 병사는 차별받아 제대로 된 상을 받지 못했지만 이 양흔의 병사들만이 강유의 세를 핍박했다는 것을 이유로 (그 중) 30명이 봉해졌다고 한다. 지방군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양흔의 병력 중 30명만이 봉해졌다고도 볼 수 있기에 실제로 30명만 투입되지는 않았을것이고 그것보단 많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차별 대우에도 상을 받은 것을 보면 어쨌든 이 30명이 주축이 된 병사들이 양흔의 군사적 압박에 뭔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상은 사료의 부족으로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만약 이 30명이 주축이 된 병사들이 무슨 공격을 했다면 이들을 이끄는 총사령관인 등애의 열전에 '강유관에 도착하니 마막이 항복했다' 라고 쓰여지지 않고 '강유관에 도착하여 이들을 이용해 (어떤식으로든) 공격했다'고 썼을 것이다. 어쨌든 강유관이 이런 비교적 소규모 군사 압박조차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초주전에서 등애가 강유관을 점령했다(鄧艾克江由)[10] 라고 서술하는걸로 봐선 양측의 군사적 접촉이 이루어졌고 등애군이 강유관을 군사적으로 위협했으며 이 때문에 마막이 투항해 등애가 강유관을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등애전이나 자치통감에서도 등애가 강유관을 공격해서 전투를 통해 성채를 함락해 얻은게 아니라 등애군이 도착하자 강유관이 항복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고, 진서 문제본기에서도 강유(江由)에 도달하였다고 쓰고 이후 실제 전투가 있었던 면죽(緜竹)에서는 촉나라 장군 제갈첨을 패배시켰다고 나와 강유에서는 단순히 도달했다고 쓴 것과 대비된다. 진서 단작열전에서도 만약 양흔이 강유관을 공성전, 전투를 통해 공격해 함락시켰다면 그런 공격을 통해 함락시켰다라는 표현을 쓰고 그 공으로 봉해졌을 것이라고 언급하겠지만 기껏해야 강유관의 세를 위협, 압박, 몰아갔음을 뜻하는 '핍(逼)'자를 써서 양흔의 군사들이 그 공으로 봉해졌다고 언급하며 다른 전과로 봉해진 병사들이 없는 걸 봐선 실제 공성전을 치루었다기 보단 강유에 도착한 등애군의 군사적 위협을 통해 강유관이 투항했다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문서에서 확인이 가능하지만 강유관은 혹시나 이 방면으로 올지 모르는 적을 막기 위해 잘 준비된 요새였다. 그럼에도 이 정도 군대의 비교적 소규모 군사적 위협에 그냥 뚫린 셈으로 제대로 된 관문의 지휘관이라면 양흔의 병사들이 강유관의 형세를 핍박하는것에 굽히지 않고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등애의 상대가 잘 준비된 군사와 지휘관이었다면 보급이 달려서 이미 강유관에 들어갈때부터 굶주리던 등애군의 전력상 수성의 여력은 충분했다. 공성전에서 보급이 부족한 등애군 입장에선 강유관을 점거하지 못했다면 어떻게든 재정비는 못하고 그냥 돌아갈 길 없이 그대로 끝장났을 가능성이 높으며, 등애군이 설령 이긴다고 해도 마막이 끝까지 항전했다면, 피해가 커서 더 이상 전진이 가능한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그냥 철저하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상대의 태세를 꾸준히 정찰하면서 지연전만 했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힘든 등애의 군사들이 성을 핍박하거나 위협해 공을 세울만한 상황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 각지의 촉한군이 지원을 올 수도 있다. 결국 그런 중요 직책에 마막 같은 인물을 배치한 촉한의 실책이 컸다. 덕분에 등애군은 강유관에서 잠시 재정비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황숭은 이곳 근처를 지켜 방비하자고 했고 제갈첨 역시 강유관을 지키지 못한 것을 탄식할 정도였으니 마막말고 다른 이가 여기를 지켰다면 상황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장서와 함께 황호 집권기에 늘어난 무너진 기강을 지닌 관원의 예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강유관은 지금의 쓰촨성 몐양시(绵阳市) 핑우현(平武县)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지역은 강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원래 광한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이후 광한속국에 속하게 된다. 동한 건안 24년(서기 219년)에 유비는 광한속국(廣漢屬國) 강저도(剛氐道) 경내에 군사 요새인 강유수(江油戍), 일명 강유관(江油關)를 설치해 북방의 조조 세력이 음평고도(陰平古道) 마천령(摩天嶺) 남쪽을 넘어 침입할 경우에 대비하였다. 이후 촉한 건흥 7년(서기 229년)에 새로 편입된 음평군에 소속됐다. 즉 강유관은 처음부터 위나라 세력을 막기 위해 지어진 요새였다.
반면 성도 무후사 박물관의 학예사 증궁석(曾窮石)의 논문 '대역사에 가려진 소사건, 강유성의 수비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따르면, 강유관, 그러니까 강유성의 설립계기를 달리 설명한다. 강유관은 제갈량의 2차 북벌 후 생긴 것으로 경곡 → 강유 → 부관으로 이어진다고 설명된다. 이 점으로 봐도 등애의 진군로가 처음부터 없었던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즉, 경곡이라는 산중 깊숙한 험지 계곡 사이로 길이 있었던 셈이다. 강유는 바로 그 길의 끝에 위치한 관애(關隘)였던 것.
또한 증궁석은 꽤 흥미로운 얘기를 제시하는데 바로 이 관애가 ‘한족 문화권과 비한족 문화권을 구분하는 경계’였다는 것이다. 즉, 부수 상류에 있는 이민족을 막기 위해서 설치되었다는 것. 그들이 바로 ‘백마씨(白馬氏)’였다는 것이며 이들은 저족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변의 강족 및 농우의 한인까지 유입되는 구간에 위치해 문화적으로 한화(漢化)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 바로 제갈량이 이들의 통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강유관을 이의 대비에 필요한 요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논문대로라면 괜히 연의에서 강유성의 존재가 제갈량의 개입이 있었다고 나오는게 아닌것이다.
증궁석은 논문에서 더욱이 백마씨는 조조의 서쪽 경략 후(즉, 한중전 이전) 위나라에 흡수되어 있었으므로, 촉한 입장에서 이들의 방비가 필수적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들이 만에 하나 이들이 경곡을 넘어올 경우 당장 촉한의 익주 분지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후일 등애가 강유성을 넘어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 점에서 꽤 오랫동안 요새화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제갈량의 정벌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되는 부분이다. 결국 이 주변 지역이 전부 위나라의 통제 하에서 촉한의 측면을 위협해왔고 제갈량은 그 위협을 제거하고 백마씨를 회유하기 위해 음평과 무도를 친 것이며 강유성은 바로 그 요새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또 화양국지 한중지에도 '(음평군) 무평현에 관위(關尉)가 있다. 경곡(景谷)에 보도로만 통행할수 있는 길이 있는데 강유의 좌담(左儋)을 경유하면 부(涪) 지역으로 나갈수 있다. 등애가 이곳으로부터 촉을 정벌했다. 유씨집안이 통치하던 당시에 의수(義守)를 설치했는데 관위(關尉)라 불렀다."고 한 점에 비추어 보면, 마막이 맡았던 관직과 강유성에 주둔할 상설직 여부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요새는 유비-제갈량 시절부터 요충지에 지어진 요새였으며 등애의 침공이 예기치 못했다 하더라도 아예 대비 자체도 못할 정도 역시 아니란 것이다.
또 기록들을 종합하면 당시 등애군은 비전투손실이 상당했고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굶고 있는 상태였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전투손실로 인한 전투력 저하는 필연적이고 재수없으면 군 자체가 와해될 수 있는게 비전투손실의 누적이다. 또 다리를 세우고 길을 만들며 험난한 산을 오르기 위해 칼로리 소비가 심각했을터이므로 식량을 비롯한 물자 손실은 어떻게보면 병력손실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전투 경험이 많았을 등충과 사찬이 전투 경험이 없고, 급조 전력으로 맞서던 제갈첨에게 한번 불리함에 퇴각해 적을 공격할 수 없다 보고한 것도 이 영향이 없다 보기 힘들다.
거기에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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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 지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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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어스 등에서 보면 강유관은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에, 산을 넘고 좁은 협로를 지나서 성을 처음 조우했을때 강(부수)가 둘러쳐 있는 반월형 평지에 서 있는 성이 길목을 막고 있고 삼면이 강이라는 자연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다. 관 아래 흐르는 부수 중류는 높은 산골짜기 밑으로 내려오는 것인만큼 물살도 급하고 수질도 탁한 편이다. 이런 지형은 방어자에게 있어 유리하고 공격자에게는 지형구조상 반드시 확보해야 할 곳이다. 전투 방식으로 보면 전면방어만 해도 좋다. 애당초 위군이나 이민족이 이쪽을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요새지이므로 이쪽 방면으로 언제든지 군사가 산을 내려올지도 모르는 지역인 만큼 미리 강을 건너 산에 올라 주변 감제를 하고 산 너머 군사가 나타나면 방어태세로 전환해 쉽게 막을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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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강유관 주변 지형은 가파른 산골 사이를 흐르는 강인 부수[11] 외에는 죄다 산지이다. 게다가 등애는 부수로 내려오지 않았고 부수와 반대 방향으로 음직여서 강유관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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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군의 루트, 주황색이 등애군의 진격루트고[12] 그 왼쪽에 있는 파란색 물줄기가 부수이다. 이를 보면 등애가 음평-마천령-강유관-한덕양을 거쳐 부현과 면죽으로 갔음이 보이고 강유관과 한덕양까지 가는데 부수를 거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완전 산지를 넘느냐고 보급문제로 거의 위기상황이었던 등애군을 상대로 수비 못할 지형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곳을 뚫렸다는 것은 방심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마막이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항복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마막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능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괜히 욕을 먹는게 아닌 것.
등애의 작전은 마막이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하면 재난이 될 수밖에 없는 무모한 것이었는데다가 마막이 너무 허무하게 항복했기 때문에 마막이 항복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된 게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밀약이 있었다면 촉한의 멸망 이후에도 그 내용을 계속 숨길 이유가 없으므로 지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등애는 원래 사마소의 정촉을 꾸준히 반대한 사람이고 음평을 넘어올때도 즉흥적으로 계획해서 내려온데다가 촉에는 처음 발을 내딛은 만큼 주변 지리에도 익숙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러가지 정황을 봤을때 차라리 장서와 비슷한 케이스로 봐야 마땅하지 않는가 싶다.
마막의 임장에서 보면 굳이 등애와 싸울 필요조차 없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시간만 축내고 있어도 정봉이 와서 마막 대신 등애랑 싸워줬을 것이다. 그러면 본인 병력 1명의 찰과상도 없이 오나라 군대로 등애를 막는, 한마디로 가만히 앉아서 방어 할 거 다 하고 군공은 군공대로 쌓이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자세한 설정들이 가미되었다. 우선 한중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정도 준비를 하긴 하는데 그저 큰 길만 수비하고, 그마저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군사를 훈련하고 돌아와 불을 쬐면서 술을 마시는데, 아내 이씨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여러 번 들었는데 왜 걱정하는 기색이 없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마막은 "나랏일은 강유가 다 알아서 하는데 나랑 무슨 상관인가"라고 대답했고, 이씨가 다시 "그래도 성을 지키는데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마막은 "지금 천자께서 황호의 말을 듣고 주색에 빠져서 나라가 말이 아니다. 적이 와도 항복하면 그만이니 걱정할 게 없다"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한다. 이게 장군이란 자의 마인드다.
이에 빡친 이씨는 마막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쓴소리를 하고, 마막은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이때 누군가 음평을 넘은 등애가 성안으로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전했고, 놀란 마막은 그대로 항복한다. 하지만 이씨는 항복한 남편이 부끄러워 자결했고 등애는 이를 의롭게 여겨 정중히 장사를 지내준다. 이후 마막의 병사는 등애의 휘하에 편입되었고 본인은 촉한 정벌군의 가이드 역할을 하며, 등애에게 지형도를 그려줘서 면죽관 공략을 돕는다.
싸우다 결국 항복한 것도 아닌, 아무 저항 없이 요충지를 내주었을 뿐더러, 가이드로 활약해 제대로 매국노 짓을 한 덕분인지 삼국지 시리즈에서 그의 의리, 능력치는 바닥을 기며 백하팔인의 한 자리를 꿰찼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7에서 복귀했는데 의외로 능력치가 통솔력 29/무력 56/지력 43/정치력 33, 통합 161로 백하팔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특기는 딸랑 수복 하나뿐이다. 마막을 수성전에서 쓸 일이 없으니 마막을 없는 셈 치고 기술 셔틀이나 찍어서 짱박아 두던가 아니면 반자이 어택으로 적진에 보내서 죽게 만들든가 하면 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무력 8/지력 7/정치력 30. 병법도 없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2/무력 17/지력 5/정치력 30/매력 15의 능력치를 자랑하며, 총합 89로 백하팔인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13] 당연히 특기 따윈 없다. 한데 열전에 써놓은 평이[14] 묘하게 좋다. 마치 본인은 멀쩡한데 촉의 멸망을 예견하고 처세를 잘 한 것처럼 써져 있다.
삼국지 11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능력치를 유지하며 여전히 백하팔인. 통솔력 19/무력 12/지력 7/정치력 35/매력 12로, 정치력이 삼국지 10 때보다 무려 5 상승하며 백하팔인 중 정치력 1위를 자랑하게 되었으나, 나머지 능력치가 모두 하향크리를 맞으면서 총합은 오히려 85로 전작보다 4가 줄어버렸다.
삼국지 11 콘솔판에서는 아내 이씨도 나오는데 마막보다 능력치가 훨씬 좋다. 심지어 무력까지도.
삼국지 12 원본에선 짤렸지만 PK에서 추가되었는데 여기선 매력 없이도 백하팔인을 면했다.[15] 그래봤자 능력치가 통솔력 34/무력 12/지력 44/정치력 35으로, 백하팔인에 근접한 수준이긴 하다. 전법은 '''도발'''에 뜬금없이 변설특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저 정치력으로는 쓸모가 없다.
백하팔인을 벗어났다고는 하나 이 낮은 능력치로는 얼핏 보면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장수 수가 적고, 내정 시설에 장수를 배치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내정 효율이 크게 차이나는 삼국지 12 특성상 완전한 잉여는 아니다. 낮은 의리치는 여전하지만 후방에 두면 적에게 뺏길 염려도 없는 등 전작에 비하면 훨씬 쓸 만하다. 물론 게임 전체로 보면 잉여급 장수인 건 맞고 이런 나쁜 놈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플레이어라면 명성 감소를 감수하고 처형하거나 병력 1000명만 줘서 반자이 어택을 보내면 알아서 폐기처분된다.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나오고 능력치는 삼국지 12 PK 때와 같다. 문제는 부인인 이씨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마막을 처형하면 이씨가 빡쳐서 하야한다. 단, 자세력 내에 이씨가 있고, 마막이 전사 처리되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며 결혼도 할 수 있다. 쓸모 없게도 특기는 상업 1 / 언변 1(이씨 인연 효과) 이 붙어 있는 게 단점. 전수특기는 상업이다. 상성은 유언과 유장쪽에 가까워서 컴퓨터의 경우 잉여무장은 1순위로 영입대상이다. 자신이 군주가 아니고서야 처단은 불가능하다. PK에 들어와서는 봉록수지가 적자상태로 돌아서면 알아서 추방해 버린다. 물론 봉록이 다시 흑자로 돌아서면 재고용 되는건 기본. 기병속공진이라는 거지같은 전법이라는 게 또 문제. 지휘를 3이나 쳐먹는 잉여에게 뭘 바라지를 말자. 성격 소심에 이상위명은 명경지수.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수준이다. 양송과 동급이지만 하후무나 전상 같은 핵노답 보다는 조금 낫다. 에딧이 가능하다면 이씨와 이혼시키자. 음성이 난폭남이라서 대사도 싸가지가 없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9, 무력 12, 지력 6, 정치 35, 매력 15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5, 지력이 38 하락했는데 특히 지력이 거의 4배나 깎여나갔다. 개성은 소심, 소침, 주의는 명리, 정책은 방원강화 Lv 1, 진형은 방원, 전법은 없고 친애무장과 혐오무장 역시 모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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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다른 항복하는 촉나라 태수들보다 그나마 분량이 어느정도 나왔다. 물론 안좋은 쪽으로(...)
삼국전투기에선 쉐임리스의 프랭크 갤러거로 패러디되었다.
아라카와 히로무의 삼국지 스피리츠 제 117회에서는 아내 이씨가 화를 내고 얼굴에 침을 뱉고 가 버리자 흥분해서 하악하악거리는 진성 M으로 묘사된다.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아래의 행적들 때문에 '''진정한 마레기'''라고 불리고 있다.
2. 정사
263년에 강유관(江油關)을 지키고 있었던 수문장이었다. 강유관은, 강유수(江油戍)이라고 불리기도 한다.[1] 여기서 수(戍)는 수자리(변경을 지키는 일), 둔영(屯營), 병사(兵舍)를 뜻한다. 즉, 강유관은 변경을 지키는 요새로 인식되었던 셈이다.
당시 촉한 정벌군을 이끌던 등애가 음평의 험난한 절벽을 넘었는데 그의 선봉이 강유관에 도착해 갑툭튀하자 항복했다. 이게 얼마나 큰 전략/전술적 패착이냐면 등애군은 음평 산길[2] 을 넘어온 통에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모두 굶주려 있었고(원준의 저서 원자) 들어올 때 '양주(凉州)의 병마(兵馬)와 강호(姜胡)의 건아들을 모집하고 무겁게 보답할 것이라 약속하여 등애를 뒤따르며 적을 쳐서 그 공이 모두 제일'이었다는 모집병 5천여명을 포함한 2만이 채 되지 않는 보승[3] 을 이끌고 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하며[4] 스스로 사지(死地)에 몸을 던진[5] 병력과 종회가 지원해 준 전장 등의 군사(종회전)를 합쳤음에도 1만명(원자, 진서 문제본기)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많은 수의 비전투손실이 났으며 이때 산길을 넘어왔던 단작이 사지(死地)라고 표현할 정도로 험난한 산길을 넘어와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심지어 등애 휘하의 전속은 강유관으로 내려와 들어올때 전의를 상실한 채 진격을 거부하다 사형당할 뻔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6] 당시 등애군의 몰골이 제대로 된 무기나 보급을 받았을 지나 의문일 정도로[7] 말이 아니었을 점을 감안하면, 강유관의 시점에서 이런 군대가 공성전 수행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등애군이 처들어온 뱡향이 강유가 수비하고 있던 동쪽 검각 방향이 아니라 보급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북쪽 마천령쪽에서 온 것을 걸 알았을것이다.[8]
그러나 등애군의 선봉(先登, 혹은 '먼저 올라가서' 번역하기도 한다)이 강유관에 도착하자 강유관의 수문장인 '''마막은 항복해 버린다.''' 진서 단작열전에서 단작의 말에 따르면 '양흔이 거느린 병사들 만이 강유(江由)의 세(勢)를 핍(逼)하였음을 이유로 30명이 봉해질 수 있었다.'(楊欣所領兵,以逼江由之勢,得封者三十人。) 번역하자면 '양흔이 거느린 병사들이 강유관의 형세(혹은 세력)를 핍박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실제 등애전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강유관은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비전투손실로 지치고 다친) 등애군이 도착하자 마막이 항복했다고 하는데[9] 이때 등애와 함께 도착한 양흔의 병사들이 강유관을 압박하며 몰아갔다고 할 수 있다.
또 진서 단작열전에서 단작의 말에 따르면 지방의 병사는 차별받아 제대로 된 상을 받지 못했지만 이 양흔의 병사들만이 강유의 세를 핍박했다는 것을 이유로 (그 중) 30명이 봉해졌다고 한다. 지방군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양흔의 병력 중 30명만이 봉해졌다고도 볼 수 있기에 실제로 30명만 투입되지는 않았을것이고 그것보단 많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차별 대우에도 상을 받은 것을 보면 어쨌든 이 30명이 주축이 된 병사들이 양흔의 군사적 압박에 뭔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상은 사료의 부족으로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만약 이 30명이 주축이 된 병사들이 무슨 공격을 했다면 이들을 이끄는 총사령관인 등애의 열전에 '강유관에 도착하니 마막이 항복했다' 라고 쓰여지지 않고 '강유관에 도착하여 이들을 이용해 (어떤식으로든) 공격했다'고 썼을 것이다. 어쨌든 강유관이 이런 비교적 소규모 군사 압박조차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초주전에서 등애가 강유관을 점령했다(鄧艾克江由)[10] 라고 서술하는걸로 봐선 양측의 군사적 접촉이 이루어졌고 등애군이 강유관을 군사적으로 위협했으며 이 때문에 마막이 투항해 등애가 강유관을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등애전이나 자치통감에서도 등애가 강유관을 공격해서 전투를 통해 성채를 함락해 얻은게 아니라 등애군이 도착하자 강유관이 항복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고, 진서 문제본기에서도 강유(江由)에 도달하였다고 쓰고 이후 실제 전투가 있었던 면죽(緜竹)에서는 촉나라 장군 제갈첨을 패배시켰다고 나와 강유에서는 단순히 도달했다고 쓴 것과 대비된다. 진서 단작열전에서도 만약 양흔이 강유관을 공성전, 전투를 통해 공격해 함락시켰다면 그런 공격을 통해 함락시켰다라는 표현을 쓰고 그 공으로 봉해졌을 것이라고 언급하겠지만 기껏해야 강유관의 세를 위협, 압박, 몰아갔음을 뜻하는 '핍(逼)'자를 써서 양흔의 군사들이 그 공으로 봉해졌다고 언급하며 다른 전과로 봉해진 병사들이 없는 걸 봐선 실제 공성전을 치루었다기 보단 강유에 도착한 등애군의 군사적 위협을 통해 강유관이 투항했다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문서에서 확인이 가능하지만 강유관은 혹시나 이 방면으로 올지 모르는 적을 막기 위해 잘 준비된 요새였다. 그럼에도 이 정도 군대의 비교적 소규모 군사적 위협에 그냥 뚫린 셈으로 제대로 된 관문의 지휘관이라면 양흔의 병사들이 강유관의 형세를 핍박하는것에 굽히지 않고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등애의 상대가 잘 준비된 군사와 지휘관이었다면 보급이 달려서 이미 강유관에 들어갈때부터 굶주리던 등애군의 전력상 수성의 여력은 충분했다. 공성전에서 보급이 부족한 등애군 입장에선 강유관을 점거하지 못했다면 어떻게든 재정비는 못하고 그냥 돌아갈 길 없이 그대로 끝장났을 가능성이 높으며, 등애군이 설령 이긴다고 해도 마막이 끝까지 항전했다면, 피해가 커서 더 이상 전진이 가능한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그냥 철저하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상대의 태세를 꾸준히 정찰하면서 지연전만 했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힘든 등애의 군사들이 성을 핍박하거나 위협해 공을 세울만한 상황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 각지의 촉한군이 지원을 올 수도 있다. 결국 그런 중요 직책에 마막 같은 인물을 배치한 촉한의 실책이 컸다. 덕분에 등애군은 강유관에서 잠시 재정비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황숭은 이곳 근처를 지켜 방비하자고 했고 제갈첨 역시 강유관을 지키지 못한 것을 탄식할 정도였으니 마막말고 다른 이가 여기를 지켰다면 상황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장서와 함께 황호 집권기에 늘어난 무너진 기강을 지닌 관원의 예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1. 마막과 강유관에 대한 고찰
강유관은 지금의 쓰촨성 몐양시(绵阳市) 핑우현(平武县)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지역은 강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원래 광한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이후 광한속국에 속하게 된다. 동한 건안 24년(서기 219년)에 유비는 광한속국(廣漢屬國) 강저도(剛氐道) 경내에 군사 요새인 강유수(江油戍), 일명 강유관(江油關)를 설치해 북방의 조조 세력이 음평고도(陰平古道) 마천령(摩天嶺) 남쪽을 넘어 침입할 경우에 대비하였다. 이후 촉한 건흥 7년(서기 229년)에 새로 편입된 음평군에 소속됐다. 즉 강유관은 처음부터 위나라 세력을 막기 위해 지어진 요새였다.
반면 성도 무후사 박물관의 학예사 증궁석(曾窮石)의 논문 '대역사에 가려진 소사건, 강유성의 수비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따르면, 강유관, 그러니까 강유성의 설립계기를 달리 설명한다. 강유관은 제갈량의 2차 북벌 후 생긴 것으로 경곡 → 강유 → 부관으로 이어진다고 설명된다. 이 점으로 봐도 등애의 진군로가 처음부터 없었던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즉, 경곡이라는 산중 깊숙한 험지 계곡 사이로 길이 있었던 셈이다. 강유는 바로 그 길의 끝에 위치한 관애(關隘)였던 것.
또한 증궁석은 꽤 흥미로운 얘기를 제시하는데 바로 이 관애가 ‘한족 문화권과 비한족 문화권을 구분하는 경계’였다는 것이다. 즉, 부수 상류에 있는 이민족을 막기 위해서 설치되었다는 것. 그들이 바로 ‘백마씨(白馬氏)’였다는 것이며 이들은 저족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변의 강족 및 농우의 한인까지 유입되는 구간에 위치해 문화적으로 한화(漢化)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 바로 제갈량이 이들의 통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강유관을 이의 대비에 필요한 요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논문대로라면 괜히 연의에서 강유성의 존재가 제갈량의 개입이 있었다고 나오는게 아닌것이다.
증궁석은 논문에서 더욱이 백마씨는 조조의 서쪽 경략 후(즉, 한중전 이전) 위나라에 흡수되어 있었으므로, 촉한 입장에서 이들의 방비가 필수적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들이 만에 하나 이들이 경곡을 넘어올 경우 당장 촉한의 익주 분지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후일 등애가 강유성을 넘어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 점에서 꽤 오랫동안 요새화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제갈량의 정벌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되는 부분이다. 결국 이 주변 지역이 전부 위나라의 통제 하에서 촉한의 측면을 위협해왔고 제갈량은 그 위협을 제거하고 백마씨를 회유하기 위해 음평과 무도를 친 것이며 강유성은 바로 그 요새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또 화양국지 한중지에도 '(음평군) 무평현에 관위(關尉)가 있다. 경곡(景谷)에 보도로만 통행할수 있는 길이 있는데 강유의 좌담(左儋)을 경유하면 부(涪) 지역으로 나갈수 있다. 등애가 이곳으로부터 촉을 정벌했다. 유씨집안이 통치하던 당시에 의수(義守)를 설치했는데 관위(關尉)라 불렀다."고 한 점에 비추어 보면, 마막이 맡았던 관직과 강유성에 주둔할 상설직 여부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요새는 유비-제갈량 시절부터 요충지에 지어진 요새였으며 등애의 침공이 예기치 못했다 하더라도 아예 대비 자체도 못할 정도 역시 아니란 것이다.
등애는 음평 길로부터 사람이 없는 땅을 7백여 리나 행군하였다.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게 하고 계곡에는 다리를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므로 작업은 매우 어려웠고, 또 식량 수송도 장차 다하게 되어 자주 위태로움에 이르게 되었다.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
등애전
등애의 열전이나 자치통감으로도 능히 알 수 있듯, 제갈서의 병력마저 종회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사실상 이걸 길이라고도 하기 힘든 경곡으로의 진군 또한 녹록치 않았던 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등애의 음평산길, 즉 경곡로 통과 자체가 즉흥적 발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위나라 군사에게 그 길이 매우 낯설었고 보급도 사실상 불가능 했기 때문으로 무려 700여 리(약 280㎞)나 되는 낯선 길, 그것도 서쪽 티벳고원의 끝자락을 잇는 절벽길을 가려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막이 어느 정도의 병력만 있었다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던 일인 것이다.마침내 음평에서부터 아무 사람도 없는 7백여 리를 가서, 산을 깎아 길을 통하게 만들고, 교각(橋閣)을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어서, 매우 어렵고 험난한 상황에 이르렀고, 또한 양식의 운반도 장차 다하게 되었으며, 형세가 매우 어려움에 임박하게 되어, 등애 자신도 자리를 싸들고, 밀면서 굴러 내려 갔다. 장수들과 병사들은 모두 나무에 올라가서 절벽을 이어가니, 물고기가 꿰인것처럼 나아갔다.
자치통감
또 기록들을 종합하면 당시 등애군은 비전투손실이 상당했고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굶고 있는 상태였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전투손실로 인한 전투력 저하는 필연적이고 재수없으면 군 자체가 와해될 수 있는게 비전투손실의 누적이다. 또 다리를 세우고 길을 만들며 험난한 산을 오르기 위해 칼로리 소비가 심각했을터이므로 식량을 비롯한 물자 손실은 어떻게보면 병력손실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전투 경험이 많았을 등충과 사찬이 전투 경험이 없고, 급조 전력으로 맞서던 제갈첨에게 한번 불리함에 퇴각해 적을 공격할 수 없다 보고한 것도 이 영향이 없다 보기 힘들다.
거기에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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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 지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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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어스 등에서 보면 강유관은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에, 산을 넘고 좁은 협로를 지나서 성을 처음 조우했을때 강(부수)가 둘러쳐 있는 반월형 평지에 서 있는 성이 길목을 막고 있고 삼면이 강이라는 자연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다. 관 아래 흐르는 부수 중류는 높은 산골짜기 밑으로 내려오는 것인만큼 물살도 급하고 수질도 탁한 편이다. 이런 지형은 방어자에게 있어 유리하고 공격자에게는 지형구조상 반드시 확보해야 할 곳이다. 전투 방식으로 보면 전면방어만 해도 좋다. 애당초 위군이나 이민족이 이쪽을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요새지이므로 이쪽 방면으로 언제든지 군사가 산을 내려올지도 모르는 지역인 만큼 미리 강을 건너 산에 올라 주변 감제를 하고 산 너머 군사가 나타나면 방어태세로 전환해 쉽게 막을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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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강유관 주변 지형은 가파른 산골 사이를 흐르는 강인 부수[11] 외에는 죄다 산지이다. 게다가 등애는 부수로 내려오지 않았고 부수와 반대 방향으로 음직여서 강유관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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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군의 루트, 주황색이 등애군의 진격루트고[12] 그 왼쪽에 있는 파란색 물줄기가 부수이다. 이를 보면 등애가 음평-마천령-강유관-한덕양을 거쳐 부현과 면죽으로 갔음이 보이고 강유관과 한덕양까지 가는데 부수를 거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완전 산지를 넘느냐고 보급문제로 거의 위기상황이었던 등애군을 상대로 수비 못할 지형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곳을 뚫렸다는 것은 방심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마막이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항복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마막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능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괜히 욕을 먹는게 아닌 것.
등애의 작전은 마막이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하면 재난이 될 수밖에 없는 무모한 것이었는데다가 마막이 너무 허무하게 항복했기 때문에 마막이 항복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된 게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밀약이 있었다면 촉한의 멸망 이후에도 그 내용을 계속 숨길 이유가 없으므로 지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등애는 원래 사마소의 정촉을 꾸준히 반대한 사람이고 음평을 넘어올때도 즉흥적으로 계획해서 내려온데다가 촉에는 처음 발을 내딛은 만큼 주변 지리에도 익숙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러가지 정황을 봤을때 차라리 장서와 비슷한 케이스로 봐야 마땅하지 않는가 싶다.
마막의 임장에서 보면 굳이 등애와 싸울 필요조차 없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시간만 축내고 있어도 정봉이 와서 마막 대신 등애랑 싸워줬을 것이다. 그러면 본인 병력 1명의 찰과상도 없이 오나라 군대로 등애를 막는, 한마디로 가만히 앉아서 방어 할 거 다 하고 군공은 군공대로 쌓이는 것이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자세한 설정들이 가미되었다. 우선 한중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정도 준비를 하긴 하는데 그저 큰 길만 수비하고, 그마저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군사를 훈련하고 돌아와 불을 쬐면서 술을 마시는데, 아내 이씨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여러 번 들었는데 왜 걱정하는 기색이 없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마막은 "나랏일은 강유가 다 알아서 하는데 나랑 무슨 상관인가"라고 대답했고, 이씨가 다시 "그래도 성을 지키는데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마막은 "지금 천자께서 황호의 말을 듣고 주색에 빠져서 나라가 말이 아니다. 적이 와도 항복하면 그만이니 걱정할 게 없다"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한다. 이게 장군이란 자의 마인드다.
이에 빡친 이씨는 마막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쓴소리를 하고, 마막은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이때 누군가 음평을 넘은 등애가 성안으로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전했고, 놀란 마막은 그대로 항복한다. 하지만 이씨는 항복한 남편이 부끄러워 자결했고 등애는 이를 의롭게 여겨 정중히 장사를 지내준다. 이후 마막의 병사는 등애의 휘하에 편입되었고 본인은 촉한 정벌군의 가이드 역할을 하며, 등애에게 지형도를 그려줘서 면죽관 공략을 돕는다.
4. 미디어 믹스
싸우다 결국 항복한 것도 아닌, 아무 저항 없이 요충지를 내주었을 뿐더러, 가이드로 활약해 제대로 매국노 짓을 한 덕분인지 삼국지 시리즈에서 그의 의리, 능력치는 바닥을 기며 백하팔인의 한 자리를 꿰찼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7에서 복귀했는데 의외로 능력치가 통솔력 29/무력 56/지력 43/정치력 33, 통합 161로 백하팔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특기는 딸랑 수복 하나뿐이다. 마막을 수성전에서 쓸 일이 없으니 마막을 없는 셈 치고 기술 셔틀이나 찍어서 짱박아 두던가 아니면 반자이 어택으로 적진에 보내서 죽게 만들든가 하면 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무력 8/지력 7/정치력 30. 병법도 없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2/무력 17/지력 5/정치력 30/매력 15의 능력치를 자랑하며, 총합 89로 백하팔인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13] 당연히 특기 따윈 없다. 한데 열전에 써놓은 평이[14] 묘하게 좋다. 마치 본인은 멀쩡한데 촉의 멸망을 예견하고 처세를 잘 한 것처럼 써져 있다.
삼국지 11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능력치를 유지하며 여전히 백하팔인. 통솔력 19/무력 12/지력 7/정치력 35/매력 12로, 정치력이 삼국지 10 때보다 무려 5 상승하며 백하팔인 중 정치력 1위를 자랑하게 되었으나, 나머지 능력치가 모두 하향크리를 맞으면서 총합은 오히려 85로 전작보다 4가 줄어버렸다.
삼국지 11 콘솔판에서는 아내 이씨도 나오는데 마막보다 능력치가 훨씬 좋다. 심지어 무력까지도.
삼국지 12 원본에선 짤렸지만 PK에서 추가되었는데 여기선 매력 없이도 백하팔인을 면했다.[15] 그래봤자 능력치가 통솔력 34/무력 12/지력 44/정치력 35으로, 백하팔인에 근접한 수준이긴 하다. 전법은 '''도발'''에 뜬금없이 변설특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저 정치력으로는 쓸모가 없다.
백하팔인을 벗어났다고는 하나 이 낮은 능력치로는 얼핏 보면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장수 수가 적고, 내정 시설에 장수를 배치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내정 효율이 크게 차이나는 삼국지 12 특성상 완전한 잉여는 아니다. 낮은 의리치는 여전하지만 후방에 두면 적에게 뺏길 염려도 없는 등 전작에 비하면 훨씬 쓸 만하다. 물론 게임 전체로 보면 잉여급 장수인 건 맞고 이런 나쁜 놈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플레이어라면 명성 감소를 감수하고 처형하거나 병력 1000명만 줘서 반자이 어택을 보내면 알아서 폐기처분된다.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나오고 능력치는 삼국지 12 PK 때와 같다. 문제는 부인인 이씨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마막을 처형하면 이씨가 빡쳐서 하야한다. 단, 자세력 내에 이씨가 있고, 마막이 전사 처리되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며 결혼도 할 수 있다. 쓸모 없게도 특기는 상업 1 / 언변 1(이씨 인연 효과) 이 붙어 있는 게 단점. 전수특기는 상업이다. 상성은 유언과 유장쪽에 가까워서 컴퓨터의 경우 잉여무장은 1순위로 영입대상이다. 자신이 군주가 아니고서야 처단은 불가능하다. PK에 들어와서는 봉록수지가 적자상태로 돌아서면 알아서 추방해 버린다. 물론 봉록이 다시 흑자로 돌아서면 재고용 되는건 기본. 기병속공진이라는 거지같은 전법이라는 게 또 문제. 지휘를 3이나 쳐먹는 잉여에게 뭘 바라지를 말자. 성격 소심에 이상위명은 명경지수.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수준이다. 양송과 동급이지만 하후무나 전상 같은 핵노답 보다는 조금 낫다. 에딧이 가능하다면 이씨와 이혼시키자. 음성이 난폭남이라서 대사도 싸가지가 없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9, 무력 12, 지력 6, 정치 35, 매력 15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5, 지력이 38 하락했는데 특히 지력이 거의 4배나 깎여나갔다. 개성은 소심, 소침, 주의는 명리, 정책은 방원강화 Lv 1, 진형은 방원, 전법은 없고 친애무장과 혐오무장 역시 모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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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다른 항복하는 촉나라 태수들보다 그나마 분량이 어느정도 나왔다. 물론 안좋은 쪽으로(...)
삼국전투기에선 쉐임리스의 프랭크 갤러거로 패러디되었다.
아라카와 히로무의 삼국지 스피리츠 제 117회에서는 아내 이씨가 화를 내고 얼굴에 침을 뱉고 가 버리자 흥분해서 하악하악거리는 진성 M으로 묘사된다.
[1] 출전: 『中国历史地图集』第三册 22-23쪽.[2] 지금 이 문서에서야 산길이라고 하지만 당시 기록에서는 무작정 산을 깎고 다리를 세우고 길을 만들면서 온 것이라고 적혀 있다.[3] 步乘, 보병과 수레(치중병)라는 뜻인 듯.[4] 속마현거(束馬縣車),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는 수사적인 표현.[5] 실제로 단작이 상소에 쓴 표현이다.[6] 극도로 험난한 행군을 강요당한 강유관의 원한을 잊지 못한 전속은 후일 휘하 병력과 함께 등애를 습격해 죽여버린다.[7] 당장 사령관 등애부터가 모전으로 몸을 감싸고 굴러떨어지는 식으로 산을 탔고 또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보급이 있을리 만무하다. 수만 명의 군대가 이렇게 보급도 못 받는 위험지에 있다간 자칫하면 군세 자체가 싸우기도 전에 와해될 가능성도 크고 실제로 등애군도 전속의 항명 및 이탈로 거의 그 꼴까지 갈 뻔했다.[8] 종회가 만약 강유관으로 온다고 하면 덕양정을 거쳐서 와야 하는데 덕양정과 강유관은 지척이라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리 없다, 실제로 등애가 돌파하려던 곳도 덕양정이고, 굳이 성도까지 가는데 종회가 북쪽의 강유관으로 갈 필요도 애당초 없지만.[9] 중국전사-위진남북조군사사에서도 마막이 싸움없이 항복했다고 나온다.[10] '克'에는 '이기다'라는 말 외에 '점령하다', '함락하다'의 뜻이 있다. 예를 들어 '克+특정지명'의 형태라면 '특정지명이 점령(정벌, 함락, 정복)되었다'라는 뜻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등애전을 보면 등애가 도착하자 마막이 항복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점령하다', '함락하다'의 뜻이 더 정확하다.[11] 확대하면 알 수 있겠지만 왼쪽 위 핑무현부터 가운데 Nanbazhen(강유관) 사이에 나이는 가느다란 줄이 부수이다.[12] 물론 등애가 직선거리로 곧장 강유관과 한덕양으로 갔다는 보장은 실제론 없다. 이 지역은 길조차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으므로 중간에 다른곳으로 새기도 하다가 다시 맞는 방향으로 가는 식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13] 그래도 백하팔인 중에선 능력치 합은 제일 높다.[14] "궁정의 부패로 촉의 멸망이 필연적인 것임을 예견, 촉한으로 침공해 온 등애에게 항복하고 성도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15] 마막의 매력이 높다는 소리는 아니고, 능력치 하나가 줄기 때문에 당연히 총합에서 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