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소설)

 

1. 개요
2. 비판
3. 반론: 오독을 다시 오독하여 비판하는 무리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1871년프랑스작가알퐁스 도데가 쓴 단편소설. 원문(프랑스어)
1871년 당시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겨주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프란츠는 매일 학교를 지각하던 아이인데, 어느 날 그날도 학교에 늦게 갔더니만, 뜻밖에도 마을 어른들이 교실에 들어와있어 의아해한다. 알고보니 그 지역이 독일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어 이외의 언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하달된 뒤였다.
프란츠는 마을 사람들과 다른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받게 된다. 수업이 끝남과 함께 아멜 선생님이 "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 라는 구절을 칠판에 쓰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소설로, 민족의식과 모국어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는 소설이다.
명대사로는 "프랑스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국민이 설혹 노예의 처지에 빠지더라도 국어만 잘 지키고 있다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와 마지막에 아멜 선생님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직하게 내뱉는 말인, '''"다 끝났다... 돌아들 가거라."'''
이 소설은 '''한국의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없었던 슬픈 역사를 상기시켜''' 한국에서도 유명해서 1980년대에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2. 비판


이 소설의 중요한 문제점은 실제 알자스-로렌 지역 주민들의 언어 및 민족 의식과 다르게 일방적으로 파리 중심의 프랑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사실을 왜곡하여 쓰여졌다는 점이다.
실상은 알자스-로렌 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알자스 지방은 이미 아주 오랜 옛날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전 시절부터 이미 독일계 민족이 살던 땅이었다. 알자스와 로렌(로트링겐)은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그런데 17세기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유럽을 침공하여 신성 로마 제국이 열심히 오스만 투르크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의 뒤통수를 때리며 알자스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알자스를 점령한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주민들의 독일어 사용을 억제하고 강제로 프랑스어로 교정 중에 있었던 것이다.[1] 알자스보다 먼저 프랑스에 합병된 로렌은 결국 프랑스어화되었지만, 알자스는 프랑스에 강제로 병합된지 100여년이 지난 작중 시점(1871년)에서도 주민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프랑스식인 프랑수아(François)가 아니고 독일식인 프란츠(Franz)이다. 이는 당시 알자스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 독일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소설에 명확히 나오는 인명인 하우저(Hauser)[2]나 바히터(Wachter)[3]도 분명한 독일계이다.
일제강점기와 굳이 연결시킨다면, 당시 프랑스의 정책은 민족 말살 통치를 연상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알자스-로렌에서 초등교육이 시작된 것은 보불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 해였다고 한다. 즉 초등교육 자체도 이런 반독일어(지방어) 국민국가 교육정책들 속에서 시작된 것.
따라서 만약 국내 실정에 맞게 번안한다면, 오히려 이런 내용에 가깝다는 것이다.

가타카나 쓰기가 끝나자 메이지 유신을 배웠다. 다음에는 꼬마 패들이 모두 '카, 키, 쿠, 케, 코'를 합창했다. 저기 교실 뒷전에서는 카네다 유이치로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영감님이 안경을 끼고 두 손으로 황국신민서사를 든 채 꼬마 패들과 함께 한 자, 한 자 읽고 있었다. 그도 몹시 열중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감동으로 떨고 있었다.

쇼와 덴노의 무조건 항복 선언 풍문을 접한 일본인 요시다 센세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조선인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일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충량한 황국 신민이라면 설혹 귀축영미의 노예가 될 처지에 빠지더라도, 황국어만 잘 지키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문득 신사의 종이 정오를 알렸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침통한 음성. 바로 이 시각에 창 밖에서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왔다.

일본인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초라해 보였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미나상, 미나상. 와따시와…! "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은 끝내 말 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을 향하여 돌아서시더니 분필 한 조각을 집어 온 힘을 다하여 되도록 크게 쓰는 것이었다.

"'''大日本帝國萬歲! (다이닛폰테이코쿠 반자이!/대일본제국 만세!)" '''

그러고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 있다가 말없이 학생들에게 손짓으로 알렸다.'''"다 끝났다... 돌아들 가거라."'''

마지막 수업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진실-도데의 추악한 내셔널리즘과 그 한국적 변용
실제로 일제강점기로 내용을 변용해 만든 패러디 소설. 북한 버전도 있다. 제목은 '마지막 혁명력사 수업'.
실제로 보불전쟁 시기는 물론 제1차 세계대전때까지도 알자스 지역에서 지역민의 대다수는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독일어의 방언인 알자스어를 사용하고 있고, 많은 주민들이 능통하다고 한다.
사실 알자스-로렌 지역의 이러한 현실이 작중에서도 은연 중에 반영되어 있다. 주인공인 프란츠(Franz)가 프랑스어에 젬병인 이유도 사실 이게 익숙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프란츠라는 이름 자체가 독일식 이름이다. 이탈리아 출신 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틴어식 표기인 프란키스쿠스(Franciscus)에서 기원한 이름이긴 하지만, 프랑스식으로 지었다면 프랑수아(François)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친불파라면 몰라도 일반 주민들이 저런 감동 스토리를 연출했을지는 의문이다.
알퐁스 도데가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다는 것과 이 소설이 나올 당시 프랑스 문인들의 태도가 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반독일정서가 강했고, 그로 인한 자문화 우월주의에 바탕해 쓰여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실 프랑스 혁명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를 쓰는 인구는 전체 프랑스 국민 중 1/4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 북부 지역뿐이었고, 남부 프랑스에서도 고유한 언어인 오크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지역 언어의 상위로서 프랑스어를 표준화하고 국어로서 교육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다.
프랑스가 지금의 국경을 확정한 것이 상당히 오래전이고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프랑스는 그때까지 수백 년간 점진적으로 동, 서, 남, 북의 국경지방과 섬 지역을 외교와 전쟁으로 병합해 확장하며 성장했다. 유럽 주요국이 근대 이후 국경을 결정하며 강탈하거나 교환한 영토는 알자스-로렌만이 아니며, 그런 지역에서는 소속국가의 대표 언어가 지역민의 단독 공용어가 아닌 곳이 아직도 여럿 있다. 조선중국의 국경을 생각하면 안 된다.
다만 알자스-로렌은 2차대전 후 프랑스가 유화적으로 바뀐 뒤에 프랑스 편입에 동의한 것이며 알자스-로렌 문서를 참고. 사실, 왕가의 혈통을 따져 지배자를 다른 나라에서 모셔오고 깃발을 정하던 시대가 19세기 중반까지였는데 백성이 쓰는 언어 따위 누가 상관할까. 하지만 '''이 소설의 배경과는 상관없이, 묘사하는 내용은 우리의 감성에 호소하는 바가 있다.''' 비유하면 개신교에서 비유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한민족처럼. 즉, 박해와 희망.

3. 반론: 오독을 다시 오독하여 비판하는 무리


알자스-로렌의 미묘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알퐁스 도데에 대한 비난이나 위의 패러디 역시 지나친 면이 있다. 한국적 상황을 알사스 로렌에 무리하게 대입하다 보니 빚어진 것. 이 소설을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상황에 감정이입해서 읽은 것부터 오독이며 이런 오독을 가지고 다시 알퐁스 도데를 비난하는 것도 무지에서 비롯된 오독이다.
애초에 독일의 원문인 도이치란 말에는 본래 어원적으로 특정한 단일민족이나 단일국가 또는 단일언어라는 의미가 없었다.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에서 독일어를 쓴다고 해서 오스트리아나 스위스가 독일이 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도이치는 광범위한 내륙 서게르만 부족의 후예들이 사는 지역을 뭉뚱그려 부르는 호칭에 불과했다. 알자스-로렌인들이 계통적으로 도이치인 것은 100% 맞지만, 당시에는 통일된 도이치 민족이나 국민 개념 자체가 없었다. 즉 혈통이 동일하다고 같은 나라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후대의 관념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합병된 17세기 유럽에는 봉건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지배자가 누가 되든지 주민들의 혈통과 똑같을 필요는 없었다. 알사스-로렌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17세기에 프랑스 왕국의 왕실인 부르봉 왕가로 지배자가 바뀌었을 뿐이므로, 딱히 프랑스 왕국의 지배에 반항하거나 인근의 독일계 국가 영토에 편입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봉건제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힘들 뿐, 유럽에 이런 곳은 상당히 많다. 프랑스 자체가 원래 다민족국가였으며, 사투리와는 별개로 아예 프랑스어와 계통이 다른 지역언어도 상당히 많을 만큼 다종족 사회였기 때문에, 17세기 후반 프랑스 왕국에 편입된 알사스-로렌인들의 다수도 당연히 자기나라를 프랑스로 여겼다. 게다가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는 유럽 최강대국이었고 프랑스어는 현대의 영어와 같은 지위를 누렸으며 알사스-로렌인들이 프랑스 이외에 자신의 "조국"이라고 여길만한 나라같은 것은 없었다. 도이치인이 주가 된 신성로마제국은 허울만 그럴듯한 느슨한 연방제국가인데다가, 그 영역 내에 수많은 이민족이 포함되어 있었고, 강대국도 아닌 야만족 촌동네인데다가, 나폴레옹 전쟁당시 망해버렸다. 먼 훗날 통일독일을 만들어내는 독일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적어도 100년 전부터 알사스-로렌인들은 프랑스에 속해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는 당시 보불전쟁 전까지만 해도 독일계 그 어떤 국가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통일 독일은 이 소설의 배경 후에 나온 이야기다) 문화적으로나 국력면에서 강대국이었으며, 그렇게 200년간 알사스-로렌인이 유럽대륙의 1등국가인 프랑스에 속해 있는 것을 딱히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알사스-로렌인들은 이렇게 200년간을 지내왔으며, 딱히 독일계 국가로 귀속되거나 프랑스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프랑스 왕국은 다민족국가였기 때문에 딱히 이민족을 동화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4], 그리하여 민족주의가 우세해지는 시대가 되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도 이곳은 계속 독일어의 방언인 알사스-로렌어 우세지역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국가의 개념이 정립되자,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알사스-로렌인들은 종족적으로는 프랑스인보다는 독일인에 가깝지만,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이 있던것도 아니었다. 민족이니 애국심이니 하는 개념은 종교나 왕의 핏줄로 민중을 동원하던 중세에서 벗어난 근대에 수립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중세 이전에는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희미한 정체성이야 있었겠지만 근대의 그것과 같은 강렬함은 찾기 어렵다.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 독일제국이 수립될 당시 소독일주의를 지향하던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의 합병에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당시 프랑스 국민으로 남기 원했던 주민들은 프랑스로 떠나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당시 주민의 10%가 고향인 알자스-로렌을 떠났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역으로 90%의 주민들은 새로 독일제국이 지배하게 된 알자스-로렌에 남아있었으니 이 사실이 독일인으로 정체성이 희박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그 논리대로라면 알자스-로렌이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는데 나머지 90%의 주민들은 왜 모두 독일로 떠나지 않았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대까지 줄곧 알자스-로렌 지역 주민들이 이사를 가지 못하도록 총칼로 막고 있지도 않았고, 아무리 국가가 이주를 제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심각한 재해나 강제추방이라도 있지 않는 한 대다수의 주민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단체로 자신이 사는 지역을 떠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당장 자기 고향이 전쟁터가 되는 것도 아닌데 단기간에 10%씩이나 고향을 떠났다는 것은 상당히 높은 비율이지 결코 낮은 비율이 아니다. 일제시대에도 10%씩이나 되는 조선인들이 한반도를 떠나는 일은 없었다.
이들이 독일인으로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는 증거는 독일에 병합되어 독일에 다시 동화될 시간이 어느정도 있었던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 일부 알자스-로렌 주민들이 독일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알자스-로렌인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잠적하거나 스위스로 도피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군국주의가 대세였던데다 보불전쟁에서 짧은 기간동안 싸운 후 승리한 기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이후와는 달리 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참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자원해서 입대했다. 그러나 알사스-로렌에서는 많은 이들이 독일군으로의 징집을 거부했으며 아예 프랑스로 넘어가서 프랑스군에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주민들이 독일군에서 싸우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당시 독일 관료들의 증언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독일군에서는 알자스-로렌의 징집 대상자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징집통지서를 불과 몇 시간 전에 보내고 무장병력을 동원하는 방법을 써야 했고, 알자스-로렌 출신 병사들은 프랑스와의 전투보다는 동부전선에 투입했다. 1917년 7월을 기준으로 알자스 출신 병사들의 탈영 비율은 그 외의 지역 출신에 비해 '''80배'''가량 높았다.#
하지만 정작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 본국에선 애국주의+내셔널리즘 반프러시아 풍조의 영향으로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들에 대한 대우가 미묘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알프레트 드레퓌스 대위는 알자스 출신으로, 병합 이후 그의 형제들은 프랑스 국적을 택할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소속감이 깊었지만 당시 프랑스군 내에서 알자스-로렌 출신은 백안시당했다. 또 알자스 지역의 독일어 방언을 탄압하기도 했고[5] 드레퓌스 대위가 범인으로 지목된 데에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 외에 알자스 출신에 그의 아버지는 독일 국적으로 알자스에 남아 있었다는 점도 꼽혔다고 한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계 시민들의 상점들이 약탈이나 방화 등의 린치를 당하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여기엔 알자스-로렌 출신 사람들이 운영하는 상점도 포함되었다.
알퐁스 도데의 입장은 분명 편향된 것이지만, 그 역으로 덮어놓고 이 작품을 일제강점기의 한민족에 대입하여 해석하는 등의 "오히려 프랑스가 압제자였다"는 해석 역시 편향되기는 마찬가지다. 굳이 이 작품의 내용을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안한다면, " 홍콩이 아직 영국지배를 받고 있을 때, 영어로 강의를 하고 있던 학교에 다니던 홍콩인이 있었는데,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자 중국 정부는 홍콩 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금지했고,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었던 그 홍콩인은 영어공부를 게을리하던 과거를 후회하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6]"는 식으로 말할 수 있겠다. 애초에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비교적 명확하게 나뉘던 동아시아의 관점에 알자스-로렌 지방의 역사를 대입하는 것 자체가 오류의 근원이다.
국제관계란 단순하지 않고 훨씬 복잡 미묘하다는 것을 상기하게 하는 부분.
어쨌든 일제강점기를 연상시키는 내용 때문에 한국에서 큰 호응이 있었고 이것은 일종의 오독이지만, 그 오독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알퐁스 도데의 원작까지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마찬가지의 오독을 저지르는 일이다.

4. 기타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에 의하면 국외에서는 한국에서 왜 이 작품이 명작으로 칭송받는지 의문이라는 반응이라고 한다. 다만 아주 듣보잡은 아닌듯 한게,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단편으로 꽤 유명한 작품이다. 구글로 la derniere만 쓰면 바로 classe 가 자동완성되어 이 소설이 검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만 보더라도 도데는 19세기말 자연주의 성향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마지막 수업은 "별"과 함께 도데의 대표 단편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간결한 문체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대학 중급 프랑스어 교재에는 대부분 실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임지현이나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역사학자들 (조한욱 등등) 이 이 소설의 강한 쇼비니즘(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민족주의는 19세기말 서양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행사조였다.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 작가인 데 아미치스가 쓴 아동소설인 사랑의 학교만을 봐도 민족주의, 국수주의로 가득하다. 그 당시 프랑스인 대부분은 보불전쟁 패전과 알사스 로렌지방을 빼앗긴 것을 국가적 수치로 생각하고, 독일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루이 파스퇴르와 같은 과학자조차, 보불전쟁 패배후, 자기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준 베를린 대학에 학위증을 우편으로 반환하면서, "폭력적인 독일 황제 이름으로 된 학위증을 가지고 박사노릇 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덧붙였을 정도.[7]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비판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만들어진 인조물이라 한들, 프랑스에서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엄연히 있기에, 프랑스인 다수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염두해 둬야 할 점은, 문학사적인 부분에서 높이 평가한다고 그것이 불문학계가 아닌 역사학계 등의 다른 분야의 지식인들이나, 일반 대중들에게 꼭 유명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도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과 문인이라고 다 기억하지 못하고, 인지도가 높지 않는 경우가 있듯이 말이다. 한편으로는 알퐁스 도데의 내셔널리즘 성향은 나름 알려지긴 했고 작품들도 저명성이 있긴 하지만 마지막 수업 작품 자체만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66298(가입 필요, 하지만 카페홈에서 '마지막 수업 인지도'로 검색하면 열람 가능.) 댓글에 주목할 것.
어이없게도 알퐁스 도데의 장남 레옹 도데는 2차대전 나치의 앞잡이로 활동했다.

5. 관련 문서




[1] 이 지방 태생의 유명한 인사인 슈바이처도 보불전쟁 후에 여기서 태어난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포로생활을 했다.[2] 삼각 모자를 쓰고 있던 영감님. 국내에서는 주로 '오제'라는 프랑스식 발음으로 번역됨[3] 프란츠에게 지각하지 않았으니 굳이 뛰어갈 필요 없다고 말해준 마을 대장장이. 국내에서는 프랑스식 발음인 '와슈떼르'라는 이름으로 번역됨[4] 유럽의 대부분의 언어는 민족국가 성립 후에 표준화된 것이다. 프랑스도 마찬가지고 19세기 이전만해도 같은 로망스어 계통이라고 해도 지역끼리 말이 안통하는 곳이 많았다. 이렇게 언어면에서 지역어가 우세했기 떄문에 알사스-로렌이 딱히 독일어를 쓴다고 해서 이들을 동화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오히려 1차대전 이후 이곳이 프랑스로 다시 귀속되면서 프랑스는 알사스-로렌에 본격적으로 프랑스어 정책을 폈다.[5] 다만 이는 브르타뉴나 프랑스령 바스크 지역도 마찬가지였다.[6]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베이징은 홍콩의 자치를 보장했기 때문에, 홍콩학교는 현재도 계속 영어로 강의하고 있으며, 홍콩인 상당수는 스스로 중국인(정확히 말하자면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이라는 정체성 보다는 민족적으로 중국계, 혹은 한족으로써의 정체성이다.)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친중파 홍콩 행정장관 캐리람 마저도 광동어를 사용하던 홍콩학교에서 표준중국어로 대체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7] 황우석이 자기 말처럼 써먹은 "과학에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말은 이 때 파스퇴르가 한 말 (If science has no country, the scientist should have one, and ascribe to it the influence which his works may have in this world)에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