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성씨)
1. 성씨
梅.
매(梅)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 충주 매씨는 경기도 부천시, 시흥시, 안성시, 전라북도 김제시, 충청남도 논산시, 황해도 서흥군, 함경북도 청진시 등지에 살고 있었다.
1960년에는 93명, 1985년에는 41가구, 193명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22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충주 매씨, 해주 매씨가 있다.
시조 매군서(梅君瑞)는 중국 산둥성 제남(濟南)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관직이 행성제공(行省提控)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매원저(梅原渚)가 조선 태종 때 관직이 가선 의주 목사(嘉善義州牧使)에 이르렀다. 3대손 매우(梅佑)는 세조조 공신으로 종1품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세종실록 81권의 기록에 따르면, 1439년(조선 세종 21년) 윤2월 2일 세종이 통례문 봉례랑(奉禮郞) 매우(梅佑)에게 충주를 관향으로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로는 매위영(梅煒英), 매세검(梅世儉) 등이 있다. 조선 중종 때 매한손(梅漢孫)은 아버지의 병환을 치유하기 위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였던 효자로 후에 정문이 건립되었다.
2. 인물
매군서(梅君瑞) : 고려 때 행성제공(行省提控)
매원저(梅原渚) : 조선 태종 때 가선 의주 목사(嘉善義州牧使:종2품)
매우(梅佑) : 조선 세종 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종1품)
매세검(梅世儉) : 조선 선조 때 별제(別提 )
매윤신(梅潤身) : 조선 때 사과(司果)
매위영(梅煒英) : 조선 정조 때 장용위(壯勇使 : 정3품아문)
매한손(梅漢孫) : 조선 중종 때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병구완을 하여 그 효행(孝行)으로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충북 영동군 황간(黃澗) 출신.
[과거]
무과매위영(梅煒英) : 정조(正祖)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취재
매세검(梅世儉) : 선조(宣祖) 1년(1568년) 무진(戊辰)주학(籌學)
[조선실록]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439년(조선 세종 21년) 윤2월 2일(경진) 통례문 봉례랑(奉禮郞)인 매우(梅佑)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아비 원저(原渚)는 일찍 죽은데다 또 집에는 문적(文籍)이 없사와 할아버지 군서(君瑞)가 중국에서 나온 근본 이유는 자세히 알지 못하오나, 신의 할아버지가 처음에 고려 때에 벼슬하여 관직이 행성제공(行省提控)에 이르렀고, 신의 아비도 또한 우리 태종 때에 벼슬하여 편벽되게 성은(聖恩)을 입사와 관직이 가선 의주 목사(嘉善義州牧使)에 이르렀습니다. 신도 또한 성은을 입사와 이름이 사판(仕版)에 있사오니 할아버지 때부터 신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이미 3대에 이르렀으나, 본관(本貫)은 아직도 중국이라 칭하오니 심히 민망하게 여기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일향(一鄕)의 적(籍)을 내려 주시어 외로운 신하의 소원을 이루게 하옵소서.
하매, 이조에 내렸는데, 이조에서 아뢰기를,
“예전 제왕들은 다른 지방의 풍속이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하고 오면, 혹 성(姓)을 내려 주고 혹 씨(氏)를 내려 주어 회유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高麗) 때에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의 애비 손(遜)이 원나라에서 나왔는데, 관향을 경주(慶州)로 주었고, 상산군(尙山君) 이민도(李敏道)도 또한 원나라에서 나왔사온데, 우리 태종 때에 이르러 관향을 경주로 주었습니다. 이제 매우(梅佑)의 할아버지 군서(君瑞)가 처음으로 왔고, 아비 원저(原渚)도 청렴하고 근신한 것으로 벼슬하여 관직이 목사에 이르렀으며, 매우에 이르기까지 양대가 본국에 복무하였사오니, 청하옵건대, 그전 예(例)에 의하여 관향을 하사하게 하옵소서.”
하니, 충주(忠州)로 관향을 내려 주었다.[2]
매우(梅佑)는 1463년(세조 9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3]
[1]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윤2월 2일 경진 3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2102_003
세조실록 30권, 세조 9년 2월 3일 임술 1번째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ga_10902003_001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2월 15일 신사 1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모화관에 거둥하여 창성을 전송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12015_001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윤1월 18일 계해 3번째기사 / 수양 대군에게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대행케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118_003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9월 19일 병술 1번째기사 / 매우(梅佑)로 하여금 한어(漢語)와 중원(中原)의 일을 가르치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9019_001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2월 27일 무진 3번째기사 / 의정부에 전지하여 매우(梅佑)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12027_003
세조실록 30권, 세조 9년 5월 28일 병진 2번째기사 / 사은사 매우 등이 명에서 돌아오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905028_002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2월 6일 무인 2번째기사 / 천추사 매우가 돌아와 복명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12006_002
세조실록 21권, 세조 6년 7월 17일 신묘 1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중궁과 더불어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7017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