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오가이

 


[image]
森 鷗外[1] (もり おうがい)
(1862 - 1922)
1. 개요
2. 생애
3. 문예인으로서의 모리 오가이와 주요 작품
3.1. 주요 작품
3.2. 주요 번역서
4. 군의관으로서의 모리 오가이
5. 기타
6. 캐릭터화


1. 개요


일본소설가, 평론가, 군의관. 시마네현의 츠와노(津和野)[2] 출신이다.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근대 일본 소설의 거장, 메이지 정신의 화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3][4]
모리 오가이는 필명으로, 문학인이 아닌 군의관으로서는 본명 모리 린타로(森林太郎)로 활동했다.

2. 생애


대대로 츠와노 번주의 시의를 맡아온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사서 오경과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등 상당히 고등 교육을 받고 자랐다. 1872년 도쿄로 상경하여 독일어를 공부하였고, 관직에 있었던 친족 니시 아마네(西周)의 집에서 숙식하며 공부하여 1873년 현 도쿄 대학 의학부의 전신에 해당하는 도쿄 의학교에 진학하였고 1881년 19세의 나이로 졸업하였는데, 이는 2020년대에도 깨어지지 않는 최연소 졸업 기록이라고 한다.[5]
이후 모리 오가이는 일본 육군 군의관이 되었고, 1884년 독일의 의학과 위생 제도를 배워오기 위해 독일 유학을 명 받고 유학길에 오른다. 이곳에서 그는 의학 이외에도 문학미술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겪은 체험이 그가 소설가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대표작 무희(舞姫)도 이곳에서 독일 여자와의 연애 경험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6]
이러한 독일 유학 경험 덕분에 독일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 독일어로 이루어진 연설도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1888년 귀국한 후 군의 학교 교관으로 재직했다. 이때는 주로 유럽 문학 번역과 평론 등에 치중했다. 1889년 번역 시집 오모카게(於母影)를 냈는데, 이는 당시 일본 근대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90년 '무희(舞姫)'를 시작으로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고,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 부임했다가 1896년 일본에 귀국했다. 이후 1899년 6월에는 소장 계급에 상당하는 군의감이 되었고, 이때 현재의 기타큐슈시에 속한 고쿠라(小倉) 주둔 육군 제 12사단 군의부장으로 좌천된다. 모리 오가이는 1902년 3월 제 1사단 군의부장으로 발령받아 도쿄로 되돌아온 뒤 1904년에서 1906년까지는 러일전쟁에 참전하였고, 1907년에는 중장에 상당하는 육군 군의총감에 올라 군의관의 최고봉인 육군성 의무 국장이 된다. 또 같은 해에는 제 1회 문부성 미술 전람회의 서양화 부문 심사 위원 주임을 맡기도 했다.
1916년 육군에서 퇴역한 이후에는 현 도쿄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제실박물관장 겸 도서관장, 제국 미술원장 등을 역임하다 1922년결핵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

3. 문예인으로서의 모리 오가이와 주요 작품


창작, 번역, 평론 등 그 활동의 폭이 매우 넓은 편이었다. 그는 또한 문학 뿐 아니라 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오모카게(於母影)와 즉흥시인(即興詩人) 등의 번역시는 일본 근대시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극문학 번역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소설은 청춘기 그의 경험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에서,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한 소설,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 등을 다룬 소설 등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국내 번역서로는, 각기 '기러기', '아베일족', '모리오가이 단편집'이라는 타이틀의 중단편집이 출간되어 있다. 나쓰메 소세키에 버금가는 작가임에도 한국에는 번역현황이 열악하다. 전술한 중단편집들은 모두 수록작이 겹쳐서 실상 번역된 작품수가 얼마 안된다.
간결체에 가까운 군더더기 없는 문체이면서도 절제되고 세련된 문체를 주로 사용했다.

3.1. 주요 작품


  • 무희#s-4(舞姫)(1890년)
  • 마리 이야기(うたかたの記)(1890년)
  • 아씨의 편지(文づかひ)(1891년)
  • 청년(青年)(1910년)
  • 기러기(雁)(1911년)
  • 아베 일족(阿部一族)(1913년)[7]
  • 사카이 사건(堺事件)(1914년)
  • 최후의 한마디(最後の一句)(1915년)
  • 타카세부네(高瀬舟)(1916년)[8]

3.2. 주요 번역서


  • 오모카게(於母影)(1889년)
  • 즉흥시인(即興詩人)(1901년)[9]
  • 파우스트(1913년)[10]

4. 군의관으로서의 모리 오가이


문학가로서의 그는 매우 뛰어났지만, 군의관으로서는 일본군각기병 환자 증가를 부르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일본군은 비타민 B1 결핍으로 생기는 각기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독일 유학파로 육군 군의관의 높은 자리에 올랐던 모리 오가이는 당시 의학계의 주류였던 각기병 병원균설을 지지했다. 사실 각기병은 전통적인 대처 방법으로 보리, 메밀 국수 등을 먹으면 낫는다는 민간요법이 퍼져 있었다. 그 당시에는 비타민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원인 자체는 몰랐지만, 보리에는 비타민 B 성분이 들어있으며 경험적으로 이걸 먹으면 각기병이 나아진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모리 오가이는 이를 당시 최선진 의학이었던 독일 의학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보리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 당시 육군에서만 25만명의 각기병 환자가 발생했고 이 중 약 2만 8천여명이 사망했다. 후술할 이유로, 이 환자 및 사망자는 거의 총원 육군이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 그 상황을 참지 못한 러일전쟁 당시의 육군장관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이 군의부의 의견을 깔아 뭉개고 흰쌀밥을 혼식으로 바꿨다. 완전 편성된 사단 1개(평시 상비 사단 2개)분이 각기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엉망인 징병 제도로 인해 당시 동원 인력의 1할만을 채우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있어서 1개 완편 사단의 병력이 전사도 아니고 질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극히 심각한 사태였다.
모리 오가이가 소속되었던 일본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에서는 이미 1884년 잡곡밥이 각기병 방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여 식단에 혼식을 넣어 각기병을 예방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에서 결국 서로의 발목을 잡기까지 했듯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이미 이때부터 극심했던데다가, 이 방식을 시행했던 해군 군의관 다카기 가네히로가 영국 유학파였기 때문에 육군 군의관인데다 독일 유학파였던 모리 오가이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병력 수만 명이 각기병으로 사망한 참사가 벌어졌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사실 비타민의 존재와 각기병의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기 이전이어서 모리 오가이로서는 과학적 근거에 의한 치료를 하려 했다는 옹호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비록 당시로서는 과학적 근거가 없기는 했으나, 이미 경험과 임상례로 증명된 예방책을 지나치게 합리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가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사실 시대를 앞서서 극단적인 과학주의 내지 과학적 회의주의를 신봉하다가 덫에 걸렸다고 볼 수도 있다.[11]
모리 오가이는 비타민의 존재가 밝혀진 뒤에도 죽을 때까지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려 들지 않았다. 모리 오가이가 워낙 고집을 부린 덕분에 일본 육군의 군의부가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 B의 부족이며 이의 예방을 혼식 등 식단 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인정한 시기는 그가 죽고 난 1923년이었다.
그렇지만 군의관으로서 공훈은 없지 않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어기지 않고 인체실험 및 민간인 학살 등의 전쟁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12] 다만 청일전쟁에서 여순 전투 직후 학살을 목격했다.

5. 기타


  • 일본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모리 오가이는 뛰어난 소설가로서 매우 잘 알려져 있으나, 문학사 관련 서적에서 그의 군의관 시절의 실책이 나와 있는 책은 거의 없기 때문에 모리 오가이를 뛰어난 소설가로서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실책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군의관일 때는 그의 본명인 '모리 린타로'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둘이 동일인물인지 모르는 사람도 꽤 된다.
  • 문인으로서의 자신과 군인으로서의 자신을 엄격하게 구분했다고 한다. 하루는 문단의 친구가 군복을 입고 정거장에 있던 모리 오가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네자 크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13]
  • 모리 오가이의 굴욕 : 군인으로서 자긍심이 높아서 산책할 때도 항상 군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딸 안느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자니, 아이들이 "우와, 중장이 걷고 있네" 라며 몰려들었다. 당시는 러일 전쟁 직후라 군인이 어린 아이들에게 영웅처럼 생각되던 때였다. 그런데 뽐내는 얼굴로 서 있던 모리 오가이의 옷깃의 녹색 단추를 보고는 한 아이가 "뭐야, 군의관이잖아" 라고 김 샜다는 듯이 말했고, 다른 아이들도 그 말을 듣고는 그대로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상심한 모리 오가이는 집에 돌아올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14]
  • 세균학을 주로 전공했던 탓에 결벽증에 걸려 과일조차도 끓이거나 데쳐서 먹어야만 했고, 남이 들어갔던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도 매우 꺼렸다고 한다. 다니구치 지로도련님의 시대에 보면 모리 오가이는 업무가 끝난뒤 입욕을 습관화하지 않고 한숨 자고나서 온몸에 데운 물에 적신 깨끗한 수건으로 온몸을 닦았는데 다도를 하듯 흐트려지지 않고 경건하게 하고 면도를 하고 책을 새벽까지 읽는 습관을 가졌다.
  • 탈아입구 광풍이 불던 시절의 독일 유학파였던 탓에 서양 문화를 매우 동경했고, 심지어 아이들 이름조차도 서양식으로 지었다. 그의 첫째 아들의 이름은 오토(於菟)(=Otto, 오토), 첫째 딸의 이름은 마리(茉莉=Marie), 둘째 아들의 이름은 루이(類=Louis), 둘째 딸의 이름은 안느(あんぬ=Anne)였다. 심지어 그의 손자 중 하나의 이름도 그가 지었는데 유리아(由利亞=Julia). 즉 차례대로 풀네임을 말하자면, 모리 오토, 모리 마리, 모리 루이, 모리 안느, 모리 유리아(...). 웃기게도 첫째는 독일계 이름인데 셋째는 프랑스계다.
그의 장남도 그런 성격을 이어 받았는지, 장남 오토의 자식들은 각각 森真章(모리 막스), 森富(모리 톰), 森礼於(모리 레오), 森樊須(모리 한스), 森常治(모리 죠지)였다. 다행히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름들은 증손자 대에서는 사라진듯..
  • 군의관 시절에 벌인 각기병 대책 관련 병크에도 불구하고 군의 총감까지 승진하고 있던데는 육군내 쵸슈 군벌의 대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적어도 독일 유학시에는 유학 제한 연령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야마가타의 압력으로 인해 유학갈 수 있었다는 점은 이러한 논의가 추정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진실처럼 통용되게 한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그를 그렇게 존경하고 그처럼 소설을 쓰고자 갈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강조했던 모리 오가이에 비해, 아쿠타가와는 개인성과 심리 묘사를 중시하는 등, 소설로 하려고 했던 일이 너무나도 판이했고, 실제로 만난 적도 별로 없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존경해왔던 모리 오가이 식의 소설은 현대 일본 문학에는 생명력을 다했다는 평가이지만, 아쿠타가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특징.
  • 박경리김용옥과의 일본에 대한 관점에 대한 논쟁 중에서, '일본의 문화는 야만'이라고 주장하면서 근현대 소설 중에서 모리 오가이의 작품이 그나마 읽을 만하다고 언급했다.
  • 모리 오가이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요절한 차남 후리쓰[15]를 제외한 4명의 자식들이 모두 모리 오가이에 관한 수필 내지 회고록 등을 썼다. 이 중에서 장녀인 마리(森 茉莉 : 1903년~ 1987년)가 쓴 '아버지의 모자(父の帽子)'와 차녀인 안느(小堀 杏奴 : 1909년 ~ 1998년)가 쓴 '만년의 아버지(晩年の父)'가 유명하다.
  • 모리 오가이는 장녀인 마리를 끔찍이 여겼는데, 마리가 16세가 될 때까지도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혀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 모리 오가이의 장녀 모리 마리는 1957년 수필 '아버지의 모자(父の帽子)'로 데뷔한 뒤 장편 소설 『달콤한 꿀의 방(甘い蜜の部屋)』, 『연인들의 숲(恋人たちの森)』 등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올렸다. 『달콤한 꿀의 방(甘い蜜の部屋)』은 3부로 나뉘어 10년에 걸쳐 연재되어 1975년에 완결되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연재되던 중 이 작품을 읽고 '어떤 음란한 여자보다도 그녀는 남자라는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실로 기이하다!' 라는 말을 하며 '관능적인 대걸작'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할복 자살하였고(미시마 사건) 결국 이 소설의 2부까지밖에 읽지 못하였다.

6. 캐릭터화


의사라는 점과 본명이 린타로인 점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1] 이 인물이 태어날 당시에는 일본의 신자체 규정 전이라 鴎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체 규정으로도 鷗는 鴎가 아닌 鷗라고 쓰는 것이 올바르다. 현재는 森 鷗外, 森 鴎外 표기를 병행하기도 한다. [2] 현재 시마네현 카노아시군 츠와노정[3] 둘 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격에 참가했던 노기 마레스케자살에 충격을 받고 그 영향을 받은 소설을 썼다. 덧붙여 노기 마레스케는 메이지 덴노의 부음을 듣고 죽은 것.[4] 나츠메 소세키는 『마음』에서 노기 마레스케의 자살과 선생의 자살을 연관시켰으며, 모리 오가이는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아『오키쓰 야고에몬의 유서(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를 썼다.[5] 당시 모리 오가이는 입학 당시 나이를 속여 2살 올려서 입학했다.[6] 실제로 모리 오가이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엘리제라는 독일인 여성이 그를 쫓아 따라와 모리와 결혼하려다가 모리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엘리제는 1개월 만에 도로 귀국했다고 한다.[7] 노기 마레스케의 순사에 감명받은 후 에도 시대 구마모토번을 배경으로 창작한 소설이다. 내용은 의외로 주군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냉소적인 해석이다. [8] 반쪽 달이 떠오르는 하늘 7권에 등장[9] 안데르센의 소설 'Improvisatoren'의 번역서. 국내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10] 괴테파우스트의 번역서이다.[11] 그런 입장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지 않은 경험에 근거한 판단은 유사의학에 불과하기 때문에 먼저 근거를 가져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입증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12] 실제로 어느 부하가 포로를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하자고 건의하자 뺨을 치고 욕설을 퍼부었다.[13] 모리 오가이는 중장 계급에 해당하는 군의 총감이었다.[14] 일본 위키피디아 및 여러 웹 사이트 교차 참고. 딸 안느의 회고록에서 인용했다고 한다.[15] 不律. 독어로 쓰면 프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