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풍

 


蒙古風
1. 개요
2. 설명


1. 개요


원 간섭기 시절 때 고려에 유행했던 원나라(몽골)의 풍속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양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2. 설명


몽골의 문화가 고려에 퍼져나간 경로는 다양하지만 가장 주요한 경로는 당시 몽골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친원파와 몽골 황실에서 성장했던 왕자[1], 몽골 황실에서 고려 왕에게 시집온 몽골 공주들[2]을 통해 들어온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들을 찾자면 먼저 식생활에서는 알코올을 증류해서 빚는 소주, 의 뼈를 물에 삶아 파를 넣고 끓인 설렁탕, 우유에 쌀가루를 곱게 갈아서 만든 타락죽순대 등을 들 수 있다.[3] 또 몽골식 버터인 수유(酥油)도 몽골풍 중 하나다.
의생활에서는 남자들이 변발[4]을 하는 것이 있고 여자들의 경우에는 예장에 쓰는 족두리와 신부가 머리 장식으로 쓰는 산호 구슬 꾸러미의 도투락 댕기 등이 몽골풍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어도 몽골어원나라시대 중국어의 영향을 받았는데, 왕실에서 왕자, 공주들이 국왕과 왕후를 각각 아바마마, 어마마마라 부를 때의 경칭 '마마(媽媽)'도 이에서 유래한 것이며 임금님의 밥상을 수라라고 부르는 것, 장사치나 벼슬아치 등과 같이 어미에 -치(赤)를 붙이는 것도 이 때부터다.[5][6]

당시 몽골은 몽골인 제일주의에 입각해 각 민족들을 4개의 계층으로 나누고 그에 맞게 대우를 했는데 1등은 당연히 몽골인이었고 2등은 색목인, 3등은 여진족거란족 그리고 옛 금나라 치하의 북중국 한족으로 이뤄진 한인, 4등은 옛 남송 치하의 남중국 한족으로 이루어진 남인이었다. 당시 원나라의 인구에서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5%에 불과했기에 부족한 숫자를 커버하고자 색목인들을 많이 등용했다. 그 때문에 당시 고려로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을 따라 색목인 관리들도 고려로 많이 넘어왔다. 이 색목인들은 아랍인, 위구르족, 탕구트족 등을 말하는데 주로 위구르족들이 많았다.
위구르족들도 몽골을 따라 고려로 넘어오면서 위구르족의 문화도 많이 전파되었다. 이 위구르족들을 고려에서는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그 회회 아비는 바로 위구르족 남성을 말하는 것이며 쌍화라는 것은 위구르식 군만두인 삼사를 말하는 것이다.[7] 쌍화 즉, 삼사 외에도 고려에 귀순한 위구르족의 후손인 송도 설 씨가 만든 데서 유래했다는 설적(薛炙)이란 음식은 쇠고기나 소의 내장을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으로, 터키에서 주로 먹는 케밥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먹는 사떼와 매우 유사한 음식이다.
고려에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은 위구르어를 쓰고[8]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며 개경에 예궁(禮宮)이라 부르는 이슬람 사원을 짓고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유지하며 살았다고 한다. 또 예궁에서 예배를 거행하고 이맘의 인도 하에 이슬람의 예배 의식인 대조회송축을 조정에서 거행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즉,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이슬람교가 기독교보다 한반도에 더 먼저 전파되었던 셈이다.[9]
그런데 공민왕 때 들어 몽골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린 친원파들을 숙청하면서 반원정책을 실시하여 몽골풍을 금지했고, 아울러 조선시대로 들면 조선에서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이 자신들의 풍속을 고수하며 이질적으로 생활한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들과 융합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위구르족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조선 사회로 동화시켜 버리면서 몽골풍과 함께 들어왔던 위구르족의 풍속들도 역사 속으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 이 왕자들을 한자로 질자(質子)라고 부르며 몽골어로는 툴루게(禿魯花)라 부른다.[2]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덕녕공주, 노국대장공주 등.[3] 순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다. 순대가 몽골풍이라는 견해는 몽골의 전투식량 중에 게데스라는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다. 게데스는 양의 피에 메밀가루, 야생 마늘, 부추를 넣고 소금을 섞어 간을 해 돼지 창자에 담아 솥에서 찐 음식이다. 다만 순대라는 이름은 몽골어가 아닌 만주어의 성이두하에서 유래한 것이다.[4] 이것이 변형되어 조선시대 상투의 특징인 백호치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5] 이 어미에 -치를 붙이는 몽골어 방식은 당시 고려시대의 인명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363년에 역적 김용이 흥왕사에서 공민왕 암살을 시도했을 때 공민왕을 대피시키고 대신 죽음을 맞은 환관이 '안도치'라는 인물인데 한자로는 '安都赤'라고 쓴다. 여기서 赤은 몽골 단어 '치'의 음차이므로, 한국식 한자음인 안도적이 아니라 안도치로 읽는 것이 옳다. [6] 하필이면 赤이 '적' 음가도 아닌 '치' 음가를 옮기는데 쓰인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이 당시 북방 중국어는 이미 근고한어로 이행하며 입성(入聲) 운미의 약화에 따라 赤의 발음이 /t͡sʰiʔ/ 로 변했기에 그리 된 것이다. 실제로 파스파문자로 한자의 발음이 표기된 원대의 운서 '몽고자운'에서도 赤은 齒, 恥 등과 함께 't͡sʰi'로 분류되어있다.[7] 빵 안에 양고기로 만든 소를 넣고 구운 음식으로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다.[8] 당시 몽골에서는 편지를 쓸 때 위구르 문자로 편지를 쓰는 일이 많았고 또 위구르족 출신 관료들도 고려 조정 내에 많았기 때문에 고려 후기~조선 초까지 역관들이 배우는 필수 외국어 과목 중 하나에 위구르어가 있었다.[9] 하지만 당시 고려불교가 국교였기에 고려 민중들에게까지는 이슬람교를 전파하지 못 했고 어디까지나 고려에서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에게만 국한하고 있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중들에게까지 전파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는 여전히 기독교(정확히는 가톨릭)가 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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