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득
1. 개요
文順得(1777년 ~ 1847년). 조선 후기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살면서 일대에서 홍어를 거래했던 어물 장수. 평범한 일개 백성이던 문순득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파란만장한 삶 때문이었다.
2. 생애
2.1. 1차 표류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 문순득은 작은 아버지와 마을 주민 6명을 따라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난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 1802년 1월 유구국(琉球國)에 표착한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주었고,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받고 하루 넘어 돼지고기를 제공받았으며, 병이 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유구국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유구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바로 중국으로 가는 유구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2년 10월, 그들은 유구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고, 다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으나…
2.2. 2차 표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난다'''. 덕분에 이번에는 유구국보다 더 남쪽으로 떠내려가 스페인 식민제국령 여송(呂宋, Luzon : 루손 섬)[1] 이라는 곳에 표착한다. 선단은 진공선 2척과 호송선 1척 등 세척이었는데, 진공선 중 한 척은 실종되었고, 호송선 또한 실종되어버리고 문순득이 탄 진공선만 표착에 성공한다. 당시 여송국은 조선이나 유구와는 왕래가 없는 섬이었다. 따라서 여송국에서는 유구에서 만큼의 대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여송국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배에 탔던 중국인 15명이 물을 길러 나갔다가 6명이 현지인들에게 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배를 댈 수 있는 섬은 곳곳에 있었지만 또다시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감히 내릴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 푸젠성 사람들이 모여사는 화교 마을에 도착했다. 그제야 배에서 내린 문순득 일행은 9개월을 그곳에 머물며 마을 곳곳을 구경했다. 그 때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신묘(神廟, 파블로대성당)를 방문하기도 했다.
여송에 머물던 문순득 일행은 조공선을 지휘하던 유구국 관리와 중국인 상인들간의 갈등[2] 으로 인해 일행중 4명이 먼저 중국으로 출항하고 문순득을 비롯한 2사람은 여송에 남게 된다.[3] 문순득은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여송국의 언어[4] 와 풍속을 빠르게 익혔다. 유구국에서는 식량과 의료를 지원받으면서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던 반면 여송에서는 약간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했는데, 문순득은 끈을 꼬아 파는 것과 소주(蘇州)상인들의 쌀 거래를 돕는것으로 생계와 용돈(술과 담배)을 해결했다고 한다.[5]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한 것은 아니고 그곳을 돌아다니며 풍속을 보고 나름대로 관광도 하고 살았다. 당시 인기있던 투계를 구경하거나 현지 성당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신묘는 30~40칸의 긴 집으로 비할 곳 없이 크고 아름 다웠으며 이로써 신을 모시는 대중을 대접하였다. 신상 을 모셔 놓았다. 신묘 한쪽 꼭대기 앞에 탑을 세우고 탑 꼭대기에 금계(金鷄)를 세워 바람에 따라 머리가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하였다.탑꼭대기 아래벽의 밖으로 크기가 같지 않은 종 4〜5개를 걸어 제사와 기도 등 일에 따라서 다른 종을 친다.
그 후 1803년 8월 여송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 중국 마카오로 이동한다. 문순득이 광둥성의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표해시말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카오 당국이 심문한 기록에 따르면 문순득은 3월 16일에 '여송국왕'을 만났다고 한다. 이 여송국의 왕이 당시 에스파냐 식민지였으니 에스파냐 현지 총독일지 아니면 그냥 관리였는지는 모르지만 문순득이 왕이라고 지칭한 걸 보면 상당히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을걸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왕'은 문순득과 중국인 표류민 일행을 심문하고 그들이 필리핀에 표류한 정황을 물은 후, 그들을 돌려보낼 조치를 취했다. 그렇게 송환 결정이 내려지고도 두 달이 지나고 마침내 5월1일, 그 광둥 성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바람의 때를 맞추기 위해 다시 3개월간의 기다림 후 배는 1803년 8월28일, 비간의 항구를 출발했다.[6] 그후 육로를 통해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1804년 12월 조선 한양에 도착하고, 마침내 집을 떠난 지 3년 2개월 만인 1805년 1월에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온다.
2.3. 그 후
문순득은 글을 배우지 못한 장사치였으나[7] 총명하고 입담이 좋았다.[8] 그의 표류 이야기는 곧 주변 사람들을 통해 퍼져 나갔다. 세상이 중국, 조선, 일본, 유구 정도라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문순득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어느 날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는데, 이때 흑산도에 유배 온 정약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문순득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쓴다.[9]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전해졌으며, 여송국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들은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하게 된다. 또한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제자인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하였고, 『운곡선설』(雲谷船說)[10] 을 집필하게 한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은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11]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에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다. 정약용도 형 정약전을 통해 문순득의 친절을 알고 있었기에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정약전이 사망한 후 문순득이 장례를 잘 치르어 준 것을 감사하는 편지도 보냈다.
참고로 '표해시말'의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필리핀어(54개)로 싣고 있어서 언어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 책이 완역되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아직도 완역판이 없다.
한편, 1801년(순조 1년)에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 외국인들은 신원불명인 채로 9년째(...)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는데[12] , 문순득은 이들이 여송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표류 당시 배운 여송어로 통역을 한 덕분에 문순득이 여송어로 말을 걸자, 여송 사람들은 "드디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마침내 고향인 여송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순조 실록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한국사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인 셈이다.[13] 이에 조정에서는 문순득의 공을 치하하고 가선대부 종2품 공명첩을 하사했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시대 관직체계에서 정1품부터 정3품까지는 당상관이라고 해서 고위직으로 분류되었다. 즉, 비록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고위직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얻었다는 것. 그야말로 '''인생살이 새옹지마'''.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1801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盛京)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1802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무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무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乙卯/命呂宋國漂人, 移咨盛京, 送還本國。 先是, 辛酉秋, 異國人五名, 漂到濟州, 而鴂舌聱牙, 莫辨魚魯。 寫其國名, 只稱莫可外, 未知爲何國人。 移咨入送于盛京, 壬戌夏, 自盛京禮部, 亦未能確指何國, 回咨還送。 而一名在塗病故矣。 命姑留該牧, 給公廨, 繼糧饌, 使之習風土, 通言語, 其中一人又故, 只餘三名。 至是羅州 黑山島人文順得, 漂入呂宋國, 見該國人形貌衣冠, 其方言, 亦有所錄來者。 而漂留人容服, 大略相似, 試以呂宋國方言問答, 則節節脗合。 而如狂如痴, 或泣或叫之狀, 甚可矜惻。 漂留已爲九年, 而始知爲呂宋國人, 所謂莫可外, 亦該國之官音也。 全羅監司李冕膺、濟州牧使李顯宅, 具由以聞, 有是命。
여러 일화를 볼 때 문순득은 비범한 기억력과 외국어 습득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자를 익힐 기회가 적고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조선 시대의 평민이 그랬다는 것이 더 놀라운 점. 박연의 사례나 하멜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지만 보통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뚝 떨어진 외국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며, 이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술한 일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은 9년 동안 자신들의 국적도 해명 못하는 상태였지만 문순득은 고작 3년 만에 류큐어와 필리핀어를 능숙하게 배워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에도 필리핀어 통역을 할 정도로 숙달된 실력이었다는 걸 보면 가히 외국어 마스터 달인으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또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표류국에서 언어와 생계수단을 빠르게 배워 적응하며 살았던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한 생활력을 가지고 매우 강한 강철 멘탈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고도 없는 외지에서 생판 모르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고 언어를 배웠을테니 대단히 외향적이고 친화적이며 붙임성이 좋았을 법한 성격도 짐작할 수 있다.[14]
문순득은 19세기 초에 필리핀과 마카오를 최초로 여행한 조선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표류는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필리핀과 서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특히, 정약용과 정약전, 이강회 등 실학자들의 세계관 확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3. 기타
- 목포대학교 최성환 교수에 따르면 문순득이 표착한 곳은 현 일본 가고시마현의 오오시마, 오키나와현의 나하 泊村, 필리핀의 Vigan, 마카오 San Ma Lo 일대이다.
- 표해시말은 우이도 문채옥의 집에서 최덕원 교수에의해 발굴 소개된 것이다. 문순득의 <표해록>은 내용상 ‘출범-표류-귀환-후기'의 4단계 구조로 되어 있고, 전반부는 일기체, 후반부는 풍토기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은 유구와 여송에서 견문한 사실을 풍속, 궁실, 의복, 해선, 토산, 언어 등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싣고 있다. 특히 후반 내용은 유구와 여송의 남방문화를 자세히 소개한다. 유구의 경우, 음식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입으로 빨아 먹는데 젓가락을 입에 넣는 것은 더러운 것으로 이를 싫어한다거나, 여송에서 가슴이 답답하면 빗물을 마시어 설사를 하게 한다는 사실 등의 특징적 정보를 제공한다.
- 아쉽게도 정약전이 집필한 『표해시말』의 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우이도에 전해온 『유암총서(柳菴叢書)』라는 책에 그 원문이 필사되어 있어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암총서』는 정약용의 제자였던 이강회(李綱會)가 1818년~1819년 사이 우이도에 머물면서 집필한 문집이다. 1권 1책으로 48장 분량이며, 크기는 가로 15.5cm, 세로 24cm이다. 문집에는 정약전이 저술한 『표해시말』이 서두에 실려 있고, 이강회의 저술로 선박제조에 관한 국내 최초의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는 「운곡선설(雲谷船說)」과 이용후생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레를 만들어 보급할 것을 주장한 「차설답객난(車說答客難)」, 「제차설(諸車說)」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유암총서』는 우이도 남평문씨 문중에 전해오다가 최근 신안군에 원본이 기증되었다.
- 이강회는“문순득과 함께 표류하였던 사람을 모두 만나보았으나, 이국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유독 문순득만이 두루 살펴본 바를 자세하게 구술하여 글로 남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순득은 상인이면서도 일정수준의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수있다.[15]
- 우이도에는 지금도 문순득 생가가 있으며 진리선착장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4. 매체에서
2015년 전남일보에서 문순득과 일본의 존 만지로를 비교하는 기사를 냈다.#
2016년 10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문순득의 삶을 다루었다.# 역사스폐셜에서도 이를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