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 와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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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종로경찰서 사진첩(사진집) (1926). 빨간 동그라미 속이 미와 경부.#, #
三輪和三郞
1884년 ~ ?년[1]
1. 개요
2. 생애
3. 의문사와 최후에 관한 설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왕조의 세월
4.2. 드라마 야인시대


1.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 유명했던 일본인 고등경찰관으로, 당시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에게 악명을 떨쳤다. 일명은 삼륜(三輪) 경부. 아이치현 출신.

2. 생애


일본의 메이린(명륜)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고야 기병(名古屋 騎兵) 제3연대에 입대, 이어서 동 제17연대로 전속되었다. 1905년 10월, 제13사단 기병 제17연대로 옮기고 한국 수비를 위해 한반도에 건너왔다. 1908년, 고등계 경찰관이 되어 훗날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조사계 주임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경찰관이 된 이때부터 조선인 사상범들을 체포해 악명을 떨쳤다.
사상범 사찰 업무에 두각을 나타내어 한용운, 이상재, 박헌영, 김구, 김좌진, 윤동주, 안창호, 이강[2], 나석주, 신불출, 김원봉, 이봉창, 나철, 안중근, 방정환 등 신분, 성향, 직업, 나이 등에 상관없이 항일성향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의 손에 거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없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악명을 떨쳐 "오니 게이부"(귀신 경부)라는 별칭으로 악명이 높았다. 고등경찰 방면에 정통하여 경찰 내에서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해방될 때까지 조선에 머물러 조선어도 유창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실제로 조선어장려시험 갑종 1등에 합격하고, 경찰관 공로 휘장(警察官功勞徽章)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이런 유창한 조선어를 무기로 그는 1930년대까지 일선 경찰관으로 활동했다.
주로 악평은 달지 않는 조선신사흥신록 평에 의하면, 의외로 평상시 성격이나 성품은 온후하고 독실해 부하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취미는 다도, 꽃꽂이.[3] 종교는 불교(선종). 다만 당시 동아일보가 전한 다른 평에 의하면, 1928년 총독부 경무국으로 전보된 이유가 경성 부호나 귀족들과 연줄을 맺게 된 미와가 거만해져 상관도 무시하고 전횡을 일삼는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복합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일단은 냉혹한 일제의 사냥개로 독립운동가나 사상범 잡기 위해 해외 출장까지 다녀올 정도로 집요하고 용의주도한데다가 잔인하고 질긴 놈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지만, 한편으론 독립운동가 이상재의 유머를 전하는 글에 의하면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 등 친근감을 과시했고, 또한 한용운조선불교청년회가 주최한 집회에서 연설할 때, 그의 사상적인 연설에 감화를 느낀 것처럼 행동하면서 열렬히 박수를 쳤다고 한다.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후 처형당했을때도, 그의 자식들에게 언론인 야마구치가 보낸 돈을 대신 전달해주면서 "일본 사람 중에도 이와 같이 좋은 사람이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4]
안창호를 심문한 후 그의 인격에 감화된 듯한 모습을 보인 적도 있고, 방정환에 대해서도 흉측하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놈이며 내지인이었다면 든든히 한자리 잡았을 거라며 그의 재능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악질 형사로만 알려진 미와를 생각해본다면 꽤나 괴리감이 있는 셈.[5] 그러나 이러한 일화를 종합해보면 독립운동가들을 냉혹하게 탄압하면서도, 몇몇 독립운동 명망가들에겐 격식을 갖추고 머리를 숙이면서 인간적인 친분을 맺으려고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것은 수사 대상에게 그만큼 밀착하기 위한 기만술에 능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는 것.[6][7]
1923년에 김상옥종로경찰서 투척 사건을 일으키면서 특별수사대가 설치되자 그 대장에 임명되었다. 김상옥이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에 숨은 것을 탐지하여 경찰서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며, 1926년에 허무당 선언의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최종 계급은 경시, 승진 후 원산경찰서장과 함북 고등과장을 지내다 1939년 퇴임하고, 이후 광복 전까지 종로쪽에서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44년까지 등장하는데, 총독부 어용신문이었던 매일신보 1944년 3월 27일자에 의하면 종로총궐기위원회(鍾路總蹶起委員會) 특별위원으로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3. 의문사와 최후에 관한 설


말년 미와의 자료가 거의 없어서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여러 말들이 떠돌고 있는데, 대중들에게 어느정도 알려진 설로는 1920년대부터 악연을 맺었던 김두한에 의해 해방 직후 야산으로 끌려가 생매장 당해 사망했다는 설, 해방 후 은둔 생활을 하던 중 일본으로 돌아가 1968년 쯤에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설 등이 있다.
전자는 그다지 신빙성 있는 설은 아닌게, 교차검증도 안되고 생전 김두한이 꽤나 뻥카를 잘친 인물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미와는 당장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삼륜경부만 쳐도 자료가 쫙 나올 정도로 일제강점기 당시 네임드 고등계 형사였기 때문에, 김두한이 그의 이름을 빌려서 자기가 건달 시절부터 나름 독립운동을 했다거나 미와와의 악연으로 사상적으로 검속을 당했다는 식의 주장을 했을 확률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8] 애시당초 김두한이 종로에서 주먹 좀 쓴다며 설치고 다니던 시절에 미와는 저 멀리 함경도에 있다가 1939년 퇴임했다.
다만 미와가 퇴임 이후 종로에서 경찰서 촉탁직이나 친정부 어용단체 활동을 하며 동네 유지로 있었고, 김두한이 그 동네 건달이었던만큼 1940년대쯤에는 어느정도 안면을 트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 후술된 김영식의 저서에서도 반민특위 조서를 보면 김두한이 1940년대 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미와와 척을 졌다고 쓰여져있다.
박세록은 김두한을 괴롭힌 형사가 미와 경부였다는 말도 잘못된 설일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김두한(1918~1972)이 건달 생활을 하던 1940년대에 미와는 함경도 경찰국장을 끝으로 경찰을 그만두고 총독부 고문으로 있었다는 것. 미와는 1884년생으로 서로간 나이차가 서른 넷, 즉 김두한이 20대 중반일때 미와는 이미 환갑에 달한 노인이었다. 박세록이 이와 관련해 확인해준 책은 <조선공로자명감>(민중시론사, 1935). 한겨레신문 2006년 8월 18일 한국의 책쟁이들 ‘박세록’편.
미와의 최후에 대한 또다른 설로는, 해방 후 그가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1968년이나 그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 일본에서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미와 와사부로의 공식적인 행적을 국사편찬위원회에 문의하여 확인한 결과, 미와 와사부로의 공식 자료는 1944년까지 자료가 있으며, 그 이후 자료는 현재 국내는 물론 미와의 고국인 일본에서도 자료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답변(링크가 삭제되어있다).
헌데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김영식, 2015, 호메로스) 45~47쪽 내용에 따르면, 미와는 1968년 정초에 연하장을 당시 동경에 거주하던 김을한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저자는 도쿄외국어대학 도서관 자료실에서 이 연하장의 존재를 발견했는데, 도쿄 거주 지인에게 부탁해 내용을 확인해본 결과, 미와는 해방 후 일본으로 귀국해 고향인 아이치현에 머물고 있으며, 기력이 쇠해 4남이 도쿄 미쓰이 본사에 근무 중이지만 아들 보러 도쿄에 갈 수 있을지 확답도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춘원 이광수의 부인이었던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이나 예구 김객진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9]
참고로 김을한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일보 기자로 종로서 담당을 한 바가 있었다. 이후 연하장 등의 자료가 아마도 없는 것으로 보아 1968년에서 멀지 않은 시기 미와가 사망한 것 아니냔 설에 무게가 실린다. 그리고 만약 이 글을 사실로 볼 경우, 미와는 해방 후 본국으로 돌아가서 칩거하며 지내다가 80세를 훌쩍 넘기고 죽었으니 그 시절 평균 수명까지 생각해보면 매우 장수한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4.1. 드라마 왕조의 세월


1990년 광복절을 기념해 KBS1에서 방영된 특집드라마로, 탤런트 이춘식이 해당 인물을 연기했다.

4.2. 드라마 야인시대




[1] 자세한 것은 하단의 '의문사와 최후에 관한 설' 문단 참조.[2] 이강을 요시찰 감시대상으로 감시한 인물이 미와 와사부로였으며, 이강은 망명 당시 미와 경부를 따돌려 망명시도를 했지만 목적지를 앞두고 일경에 발각되었다.[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三輪和三郞 문서.[4] 1921년 2월 27일 동아일보 휴지통. 당시 폭탄을 던진 자리엔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경성지국장 야마구치도 있었는데, 그는 이때 부상을 입고 일본에서 치료 중이었지만, 이후 강우규가 처형당하고 그의 자식들이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자 돈 10원을 전달해달라고 종로경찰서에 보낸 것.[5] 다만, 야인시대에서도 저런 모습을 보이긴 했다. 한용운이 오자 굽신굽신 거리며 반갑게 맞이한다. 한용운에게 뺨을 맞고 화를 내긴 하지만 잡아 고문하지는 않고 내쫓는 선에서 그쳤다.[6] 의외로 보이지만, 원래 이런 방식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감찰 업무를 보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수법이다. 군사정권 때도 중앙정보부나 경검의 요원들이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식사 대접을 하며 인간적인 교분을 쌓으려는 접근이 생각보다 흔했다. 내부 인사를 회유하거나 최소한 연락이라도 트면 필요한 정보를 얻기가 훨씬 쉽기 때문에, 무조건 강경적으로만 대하는 것보다 자신도 편하다. 실제로 김구도 백범일지에서 차라리 고문을 받으면 반항심에 악으로라도 버티는데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 방식으로 다가오면 오히려 버티기 힘들다며 회고한 적도 있었을 정도다.[7] 사실 큰 뜻을 품은 지사들을 보면 적이라 해도 일단 존중해주던 메이지 시대의 풍습이 당시 일본 사회에 아직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장교들이 권총을 반출해 독립운동가에 넘기고, 독립군이 될 것이 뻔한 탈영병들을 돌봐주었던 등의 "군기 문란"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도 덮어주는 일본인 상급자들이 간간이 있으리라는 시각처럼, 정말로 독립운동가들의 뜻에 감명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원래 고문을 하고 시찰 하는 쪽이 그걸 견뎌내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더 잘 아는 법 아니겠는가? 홍사익 참조.[8] 예를 들어 군부독재 시절에 비유하자면, 자기가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경찰한테 고문을 당했다고 뻥치는 사람이 팔아먹을 만한 경찰 이름을 말하라면 고문 기술자로 유명했던 이근안이 있을 것이다. 뭐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것.[9] 이 외에도 본문을 보면 미와의 경력과 가족관계, 여러 독립운동가나 김두한과의 일화 등도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