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훈
1. 개요
6.25전쟁 참전용사로, 9사단 29연대 수색중대 창립멤버이며, 이 글은 그의 한국전쟁 참전기를 담은 글이다.
1950년 12월 24일에 입대하여, 1958년 10월 31일에 제대하였다.
이 글은 휴전 되기 10일전인 1953년 7월 17일까지의 그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마 글의 디테일이 처음과 다를것이다.
처음 긴장속에서 시작된 입대, 입대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18살로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나이에 군에 입대하였다. 처음에는 주변사람의 이름을 모두 기억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전우들을 잃고 생과 사가 오가는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점점 삭막해지는 기억과 그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 2021년 기준으로, 당시 전투 중 전우들과 소대장, 중대장 모두를 잃어 훈장을 상신해 줄 사람이 없어 현재 훈장 하나 받지 못하셨다.
이에 본인께서는 휴전 후 군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훈장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셨다.
2. 출생
1931년 8월 2일 ~
출생신고 할 때 착오가 생겨서 주민등록상에는 1932년 2월 10일 기록됨.
3. 군대 약력
1950년 12월 24일 제 1 훈련소 제 5 교육대 입소
1950년 12월 30일 훈련 교육 이등병
1951년 01월 05일 보충대 입소 육본특 115호, 전보 9사단 29연대(수색중대 창설)
1951년 08월 30일 일등병 진급
1952년 05월 10일 사단교육대 파견 (9사특 166호)
1952년 06월 16일 9사단 29연대 원복 (9사특 216호)
1952년 09월 01일 하사 진급 (29연대 특 120호)
1953년 01월 20일 제1보충대대 (29연대 특 21호)
1953년 02월 02일 육군보병학교 49기 갑종후보생 (육본특 52호)
1953년 02월 03일 육군보병학교 전보 (1보특 25호)
1953년 07월 17일 소위 임관
1953년 07월 28일 제 3사단 통신중대 전보 (육본특 204-2호)
1953년 08월 31일 제 3사단 22연대 2대대 통신장교
1953년 02월 01일 제 29사단 창설요원 (제주도 모슬포)
1954년 02월 04일 제 29사단 통신중대 전보
1954년 09월 01일 중위 진급
1956년 05월 21일 제 502 장거리 통신단 (2사특 361호)
1957년 06월 23일 육군통신학교 초등군사반 입교 (2군사 특34호)
1957년 11월 29일 전보 제 27사단 통신중대
1958년 10월 31일 예편 (국320호)
4. 입대전
초등학교 시절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야욕에 따라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하여 전시체제로 돌입할 때라 학생들은 공부보다는 각종 노력 봉사에 동원되었던 기억 밖에 없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독립만세 함성 속에 갑자기 해방을 맞이하자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사회가 혼란스러웠고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의 이념 분열이 심화되어갈 무렵인 1942년 수원중학교(6년제)에 진학하였으나 정규교육보다는 어지러운 사회 안팎의 치안을 바로잡기 위한 데모와 동맹휴학으로 귀중한 시간이 흘러갔다.
1950년 중학 4학년 재학중 한국전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7월 2일 수원에 진입하여 부모님과 함께 수원 인근으로 피신하여 도피생활을 하였고, 9월 20일경 국군이 수원에 입성하면서 본가로 되돌아 왔으나 이미 많은 것이 변하고 있었다.
7월 22일 비상시국에 따른 비상시향토방위령 공포에 따라 국민군인 국민방위군과 학도호국단이 편성되면서 학도호국단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후 국군의 북진과 중공군 개입에 따른 후퇴 속에 12월에 접어들면서 서울 근교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피난소개령이 떨어졌다. 예상보다 빠른 중공군의 남진 속도로 또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면서 12월 14일에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른 국민방위군이 소집되어 피난을 못 가고 남아있다. 적화 될 경우 인민군으로 징집이 우려되는 학도호국단원을 비롯한 수많은 청장년들이 수원시청 부근의 광장에 소집되었다. 누군가는 손을 잡고 울고, 누군가는 겁먹은 얼굴로 서성이는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어느 육군 장교가 단상에 올라 행사가 시작되고 일척 건곤의 국가 운명 앞에 제군들의 힘이 필요하고 하는 연설이 끝나고 살아 돌아올지 알 수가 없는 행군을 시작하였다.
고향을 처음으로 벗어나 걸으면서 두려운 마음 밖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매서운 칼 바람 속에 얼어붙은 주먹밥을 먹으며 열흘에 걸쳐 용인-충주-문경-군위-하양-경산을 지나 대구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대구 시내 육군 보충 대대 대기소에 도착 집결하였다.
이때 학도호국단 출신들만 차출하여 단체 입대시키기로 결정되면서 중학교를 채 졸업 하지도 못한 많은 친구들과 함께 만 18세 되던 12월 24일 수성국민학교에 위치한 제1훈련소 5교육대에 입소하여 단 5일간 제식훈련, M1소총 분해 결합, 집총 훈련, 사격훈련을 받고 1950년 12월 30일 군번 0179701을 부여 받고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래도 학도병으로 참전해서 군번없이 싸우다 사라진 많은 친구들에 비하면 나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5. 정선 대 탈출
대구 제1보충대(대구제분공장)로 이동하여 보충병으로 대기하면서 체류중 출동 명령에 따라 1951년 1월 5일 야간 군 트럭(토요다제)에 승차한 후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밤사이 안동, 춘양을 거쳐 영월 상동광산(탄광) 인근 꼴두바위에 도착하여 동네 친구였던 신세균(간부후보생 임관 후 1사단에서 전사), 이규설(폐병으로 전역), 김선홍(타부대로 전출), 이화영(치질로 의가사 제대)등 많은 수원고향 친구들과 함께 작은 민가에 분산 배치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제9사단 29연대 수색대 창설 요원 집결지였던 것이었다.
29연대 수색중대는 3개 수색소대와 1개 중화기 소대 약 160명으로 편성되었으며 중대장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이춘화 소위(전 호림부대 출신)가 맡아 중대를 지휘하였으며 각 소대장에는 경험이 많은 상사급이 부임하였다.
수원 친구들과는 각기 다른 소대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앞 길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약간의 수색정찰요령을 교육받고 2소대 2분대에 배치되어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본격적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1월 11일 트럭편으로 북상하여 고한, 사북을 거쳐 17시경 정선에 도착하여 연초저장 창고에 임시 주둔하게 되었다. 정선은 강원도 오지 중 산악지대가 대부분으로 북쪽에는 가리왕산(1561m)이 솟아있고 그 동쪽에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 상류가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정선을 출발한 중대는 수색 정찰활동을 계속하면서 북상하여 북평면 나전부락에 도착하였다. 진눈깨비가 오고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와 살을 애는듯 한 바람 속에 중대 명을 받아 수색 2소대는 독자활동에 들어갔는데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얼어붙은 강에 길을 개척하며 전진하여 1월 15일 저녁 무렵에 목적지인 수항리에 도착해 긴급히 숙소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하였다.
밤사이 폭설이 내려 1m 가량 눈이 쌓이고 악천후가 계속되면서 전진할 수가 없었고 비상식량도 떨어져 후방부대 지원요청을 하였으나 악화된 기후로 보급이 지연되면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날씨가 개이면서 아군 비행기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어 부랴부랴 아군 대공표판을 설치하여 낙하산으로 탄약과 보급품(씨레이션, 비빔밥, 통조림 등)을 받아 오지 눈속에서 허기와 추위에서 벗어나면서 모두들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5일 만에 일기가 호전되어 눈이 많이 녹으며 길이 뚫리자 수색정찰활동을 재개하여 교통의 중심지인 하진부리를 확보한 후 계속 북진하여 속사리고개를 넘어 속사리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중 “당 소대 전면에 중공군 20만 대군이 남하중이니 즉시 철수하라”는 연대본부의 긴급 무선명령을 받아 그 길로 후퇴하여 하진부리 북쪽 산에 매복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또다시 후퇴하라는 명을 받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음을 이용하여 오던 길을 되돌아 정선을 향해 속보로 후퇴하였다.
소대가 정선에 도착할 무렵 중공군 일부 부대가 이미 정선강 뚝방를 이용 매복한 것이 보였고, 이를 피해 중대본부에 도착하였으나 아군 보병부대와 중대요원은 이미 후퇴하여 아무도 없었으며, 당 수색소대만 포위망에 걸려든 꼴이 되었다.
우리는 할 수없이 포위망 안에서 4~5명씩 조를 짜서 어둠을 뚫고 자력으로 탈출하여야 하였다. 급조된 우리 조 5명은 작전과 근무 경험이 많은 하사관을 중심으로 영하 25도를 넘는 강추위 속에 적을 피해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적진을 포복으로 돌파하면서 탈출에 성공하여 집결지인 여량에 가는 도중에 여기 저기 골짜기에서 삼삼오오 탈출병들이 모여들어 갈수록 인원이 늘어 제법 많은 인원들이 다음날 아침에 여량에 집결하였는데 긴급히 부대가 재편되고 교육훈련을 받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6. 빨지산 및 남하한 인민군 섬멸작전
2월 1일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빨지산 부대 약 30여명이 북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북상 중이니 이들을 포위 섬멸하라는 명을 받고 임계면과 하장면 산악지대를 매복 수색하던 중 이들과 조우하여 5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인민군 1개 사단병력이 경상북도에 출현하여 아군 17연대가 방어망을 구축하고 압박하니 보급이 끊긴 적군은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북쪽으로 퇴각하자 전선에 있던 9사단 29연대에 토벌명령이 하달되었다.
29연대장 고백규 대령은 임계면 직원리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당 수색대는 백봉령을 넘어 두타산의 삼화사 인근에 잠복하여 수색하라는 명을 받고 잠복에 들었갔다. 다음날 아침 무전으로 연대본대가 습격을 받았으니 속히 직원리로 복귀하여 지원하라는 명을 받고 백봉령을 다시 되넘어 연대본부에 도착해 보니 후퇴하던 인민군 주력부대의 습격을 받아 연대본부와 마을 이곳저곳에 많은 사상자가 치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급하게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차량편으로 임계를 거쳐 삽당령에 도착하여 매복한 후 도주하는 인민군 주력을 발견하여 대접전 끝에 많은 포로와 사상자를 내 큰 전과를 올리고 또다시 도주하는 잔당을 추적하여 구악리를 거쳐 대관령까지 가서 내륙쪽에 내린 대설로 집 지붕만 보이는 악천후 속에서도 추적 섬멸하니 사단병력 중 단지 100여명의 잔당만이 오대산을 거쳐 도주하였다.
3월 28일 군단장인 김백일 소장이 탄 비행기가 발왕산에서 추락 실종되자 인근에서 작전 중이던 당 소대에 수색 명령이 내려져 탐문활동에 들어가 수송계리, 동면, 하장면 일대 민가에서 10일간 탐문 수색활동을 하는 도중 한 민간인의 신고로 비행기를 찾으면서 수색이 종료되었다.
김백일 장군은 만주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친일파로 분류되어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국전쟁만 놓고 보았을 때는 영웅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인생에 하자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민족에 총부리를 겨눈 사람이 나중에 전쟁 영웅이 되니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7. 동해 안전선 이동 북진
당 수색소대는 명에 따라 강릉에 진입하여 농림고등학교에 주둔하여 부대 재편을 마치고 대기 중에 강릉 인근에 지방에 근거한 공산분자들이 준동하니 이를 소탕하라는 명을 받고 면당 1개 분대를 파견하여 수색작전을 한 결과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귀대명령이 떨어져 강릉농고로 복귀하니 북진 명령이 내려졌다.
강릉에서 행군으로 주문진을 경유하여 수색정찰하면서 양양 38선에 도착하니 보병부대는 양양 하천에서 최일선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 수색소대는 양양에서 도강하여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최대한 정숙을 유지하면서 야음을 틈타 전진하여 속초를 지나 천진리에 입성하여 내륙쪽인 토성면 성대리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 지역에서 10일간 주둔하면서 잔당 소탕과 수색정찰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이 부락에 저녁에는 인공기가 아침에는 태극기가 게양되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면서 누구의 편도 들수 없었던 힘없는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때에 따라서 인민군의 정보원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아군의 정보원이 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회색분자가 되어 힘겨운 삶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철수명령에 따라 11사단과 교대하고 후방으로 나와 강릉을 경유하여 대관령을 넘어 하진부리에 집결하여 부대가 재편되면서 얼마간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8. 인제군 현리 포위망 탈출 (현리 전투)
5월 초 3군단인 3사단 (유재홍 3사단장), 7사단 (김종오 7사단장), 9사단 (최석 9사단장)은 명에 따라 군단 전체가 인제군 상남면 현리에 진출하면서 많은 혼란상을 야기하고 있을때, 당 수색중대도 도보로 하진부리, 속사리를 거쳐 운두령을 넘어 북진하여 현리에 도착하고 몇일 후 5월 16일 중공군 대공세에 직면하면서 사단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5월 17일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 점령당하고 괴소문이 돌면서 3군단 전체가 고립에 빠지자 지휘계통 없이 각 연대별 혹은 대대별로 상황에 따라 각자 퇴로를 찾으며 모두가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당 수색대에 현리와 용포리 북방 뒷산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아군 주력 연대가 완전 철수할 때까지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중공군 남하를 최대한 저지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잠복한지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되니 보이는 곳은 전부 화염에 휩싸였고 이틀째 이곳을 사수하면서 보병부대가 모두 철수한 것을 확인한 후 제일 마지막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야음을 틈타 방태산(1436m)을 넘고 오대산을 지나, 3일만에 일반 보병부대보다 먼저 하진부리 집결지에 도착하였는데 수색중대도 낙오병이 속출하여 20여명에 불과하였다.
하여튼 현리에서 제일 늦게 나왔는데 집결지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평상시 없는 길을 만들어 다니고 산골 후미만 찾아서 은폐하며 다니던 수색정찰대 속성이 잘 드러난 것 같다. 하지만 주변에선 거의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날 보충병을 받고 부대를 재편하자 다시 후퇴명령이 내려 수항리를 거쳐 대화면 대화리에 도착해 예비대로 편성되어 약간의 휴식을 취하던 중 정선군 북면 일대와 평창군 진부면에 진출한 적군을 반격하라는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당 수색소대는 대화리를 출발하여 북상하면서 구절리 근방 민가를 가가호호를 수색한 후 노인병(1057m), 발왕산(1458m), 능선을 통해 북진하다 병두산(989m)에 도달하여 잠복에 들어갔다. 적 동정 정찰과 공격 기회를 노렸으나 이삼일이 넘으면서 강추위에 식량이 떨어져 상진부리로 하산하였다. 적군은 이미 상진부리에서 월정사, 상원사를 거쳐 퇴각한 직후였다.
그 후 몇일 뒤 미 제2사단 전차 10여대가 들어오면서 전차부대와 합동작전 대형으로 편성하여 다음날 오대산 월정사 방향으로 진출하여 인근 산쪽의 적군을 추적 섬멸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며 상원사까지 도달하였다. 이 후 전차부대와 별도로 단독으로 적을 추격하여 오대산을 넘어 명개리에 다다르고 강릉지역으로 이동하여 강릉 부근에서 준동하는 지방 공산당 폭동 진압에 참가하고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지리산 잔적을 소탕하고 올라온 제8사단과 교대함에 따라 당 수색대도 8사단 수색대에 점령지를 인계하고 오대산을 되넘어 하진부리에 집결하여 부대 재편성에 임했다.
동 지역에서 주둔하고 있는 가운데 지리산에서 활동하다 월북하려고 북상 중이던 빨지산을 저지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정선군 임계면에 진출하여 수색활동 전개 중, 어느 저녁 10시경 당 소대가 머물렀던적이 있던 민가로 빨지산 부대가 추위와 허기를 면하려고 찾아 온 것을 집주인이 발견해 우리에게 신고하여 그날 밤 그 마을을 포위하게 되는데 포위망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빨지산들이 눈치채고 탈출하면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발자국을 따라 추적하면서 동이 트고 추격 압박에 박차를 가할 때 잠복중이던 인근 부대 수색대에서 전부 포로로 잡았다. 죽 쑤어서 개 준 꼴이 되었다.
9. 서부전선 대이동
당 9사단은 산악지대인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으로 대이동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하진부리에 집결한 당 수색대는 미군 수송차량 수십대에 분산 승차한 후 야간을 이용하여 원주를 거쳐 이천에 다달으니 먼 동이 트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이동을 재촉하여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던 서울 시내에 이르르니 감회가 무상하였다. 파괴된 시내를 일주한 후 청량리를 통과하여 의정부를 거쳐 연천군 신탄리에 도착하였다.
다음날부터 참호 구축작업과 지뢰 제거작업이 5일간 계속되었다.
또다시 이동명령을 받아 사단 전체가 연천을 출발하여 포천을 거쳐 김화에 도착하여 주둔하기 시작했다.
이때 적군은 일부가 오성산(1062m)의 기존 광산 굴속에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주력부대는 평강지방 깊숙한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10. 철의 삼각지 김화지구 공방전
김화 북방에 위치한 오성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평강, 서쪽으로 철원, 동쪽으로 김화을 잇는 지역을 가리켜 철의 삼각지로 지칭하였다.
이 지역으로 증강된 중공군 대부대가 주둔하면서 오성산를 요새화하였고, 오성산에서 남쪽으로 향한 능선상에 우뚝솟은 봉우리인 603고지가 김화지구를 위협하고 있어 이를 탈취코자 대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한국전 발발 1주년이 되는 1951년 6월 24일 저녁을 기해 당 수색대가 활동을 개시하였고 수집된 정보에 의거 6월 25일 새벽을 기해 9사단 보병부대와 합류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화력 또한 만만치 않아 공방전이 치열하였다. 당 수색대는 팔부능선상에서 몇차례 백병전을 펼치며 정상을 점령하였지만 5분도 안되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면서 고지 점령-중공군 역습-아군 역습 과정이 반복되었다. 세 번째 공격 직전 작전회의에서 당 분대원들은 이번 역습이 성공할 경우 무슨일이 있어도 후퇴하지 않고 지원병력이 올 때까지 고지를 사수하기로 사전에 약속을 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백병전까지 치르면서 고지 재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에 고지 정상에 7~8명이 진지를 구축하고 지원병력을 기다리는데 또다시 중공군의 역습이 시작되자 포연이 앞을 가려 피아 구분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계속 총을 쏘고 있는데 옆을 보니 중공군이 보이는게 아닌가, 아뿔싸 순간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분대원들이 안 보였다. 옆 선이 뚫리면서 중과부적으로 다른 분대원 한명과 함께 불가항력으로 포로가 되었고, 무장해제가 되어 중공군 본대쪽으로 끌려 내려가려는 순간 아군의 포가 고지 정상으로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면서 우와좌왕하는 중공군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아군이 있는 능선쪽으로 무조건 뛰었다. 산 중턱에서 미끄러지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으나 운 좋게 칡넝굴에 걸려 중간에 걸리면서 많이 다치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김화 철도선을 넘어 부대에 다달으니 온 몸이 망신창이였다. 사단 의무대에서 긴급히 부상부위를 치료 받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후 다시 본대로 복귀하니 소대에서는 행방불명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먼저 후퇴한 분대원들과 포로로 함께 잡혔던 분대원도 무사히 탈출하여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재회하였으나 희생이 너무 컸다.
이번 작전에 당 수색소대는 40여명이 투입되었으나 소대장이 전사하고 선임하사는 부상으로 후송되면서 향도격인 이등상사가 소대장 대행을 하는 등, 결전 3일 만에 고지를 점령한 후 미군에 인계하고 하산하여 부대재편에 들어갔는데 잔류 병력이 10여명에 불과하였다.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한 상황이었다.
몇일간 병력보충 등 재편이 완료되면서 당 사단이 예비사단으로서 포천 지역으로 이동하여 3개월에 거쳐 교육 훈련에 전념하였다. 이때 당 수색중대는 잠시 해산되어 보병부대에 편입되어 교육훈련을 받았는데 교육후 이전 수색대원 잔류 병력을 중심으로 또다시 수색중대가 편성되었다.
이후 1951년 10월에 전방 사단과 교체하여 철원지구에 투입되어 월정리역 북방 주 저항선 내에 주둔하면서 매일 수색 정찰활동 임무를 수행하였다.
주로 보병 방어선 넘어에 있는 궁예 왕궁 인근을 중심으로 때로는 중공군 본대가 있는 오성산 인근까지 갔다 오는 경우도 있고 인민군 주 활동지역인 평강지역은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익숙한 지역이 되어갔다.
수색정찰시 민간인들로부터 정보를 많이 수집하는데 이곳에 사는 민간인들은 그야말로 회색분자인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때로는 한국군에서 발급한 HID 신분증을 갖고 한국군에 협조하고 인민군이 들어오면 당증을 소지하고 있다 인민군에 협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아군 수색대도 이러한 사실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적정 속에서 포로 획득 외에는 별다른 정보 수집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통상적으로 몇 일간의 비상식량을 소지하고 정찰활동에 나서지만 충분한 것이 아니기에 산토끼을 잡아 먹거나 운 좋으면 주인 잃은 소를 만나 푸짐하게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전선 경계 지역에 있는 마을에서 인민군 긴급 명령으로 비상 군량미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를 절대로 아군에게 알려주지 않았는데 운좋게 군량미 30가마 정도를 발견하여 후방 지원을 받아 이송 한 적도 있었다.
전선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지역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켈로부대 요원들이 남하할 경우 잠복하고 있다 수차례 이들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인도하곤 하였는데 이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적지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수색정찰을 나가면 인민군 낙오병 같은 경우엔 추월해서 전진하거나 어쩔수 없이 포로를 잡게 되는데 작전에 방해가 되는 경우 무장해제 시키고 북쪽으로 돌려 보내거나, 포로가 필요한 경우에는 본대까지 데려가기도 했다.
수색정찰중 만나는 적들은 대부분 피해가는데 어쩔수 없이 인민군 소부대와 만나서 총격전이 벌어질 때는 적당히 대응하다가 대공표판을 설치하고 항공 지원을 받아 그 자리를 빠져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수색활동을 할 경우 항공대와 직접 교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방에 대규모 적 부대가 있거나 곤란한 상태에 빠지면 그 자리에서 항공 지원을 요청하는데 아군 표시와 적 위치 식별를 위해 항공표판을 항상 지참하고 다닌다.
1952년 9월경 사단 우측에 인접하고 있던 미 2사단이 백마고지 서쪽 한탄강변에 있는 281고지에서 중공군으로부터 치열하게 고지 방어 중이었는데 병력 교체시 취약 지역인 사단과의 경계 지역인 281고지 하단부 한탄강 주위의 방어 지원을 요청 받고 잠복 중 적군의 공격으로 치열하게 전투 중 어디선가 날아 온 수류탄이 바로 우측에서 터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있던 전우(서울 출신)가 부상으로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고 있어 일부 병력이 후퇴하면서 부상병을 부축해서 같이 뛰는데 총을 쏘고 몸을 숨겼다 다시 뛰는 가운데 너무 아파서 못 가겠다는 부상병을 죽을 힘을 다해 끌다시피 언덕을 넘어 본대에 합류해서 의무대에 부상병을 인계하고 돌아서는데 바지를 보니 전투복이 온통 피투성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팔과 등에 수류탄 파편을 맞아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통증이 밀려와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침대에 몇일 누워있었더니 온 몸이 더 아픈 것 같아 의무대에서 만류한 것을 뒤로 하고 본대로 복귀하였다.
11. 백마고지 (395고지) 공방전
395고지(백마고지)는 9사단이 점령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상대인 중공군은 최정예 군단인 제38군 산하 3개 사단이 대치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사전에 백마고지와 비슷한 산을 골라 공격 연습을 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3일 당 수색소대가 395고지 우측 평원 지대에서 야간 매복 중 중공군과 약간의 접전이 있은 후 아침 무렵 중공군 고위 장교와 사병이 당 수색소대 앞으로 백기를 흔들며 투항을 하여 이를 연대에 인계하였는데(전사에는 30연대 6중대로 투항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음) 나중에 들어보니 그가 전한 고급 정보로 중공군 대 공세를 예견하여 철저히 방어 준비에 돌입하여 승리의 씨앗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10월 6일 서울 침공을 목표로 중공군이 395고지를 일제히 공격해 왔다. 이 고지를 빼앗기면 철의 삼각지대 전체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이를 기반으로 서울 공격까지 가능한 곳으로 피아간에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당시 29연대는 395고지 우일선 개활지에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중공군의 초반 공세에 밀리면서 당 수색대는 연대와 별도로 28연대 1대대에 배속되어 지원부대임에도 불구하고 대대 선봉이 되어 지형상 주 공격선이 예상되는 백마고지 서쪽지구 공방전을 담당하게 되면서 연대가 예비대 일때는 지원부대로서 또는 연대가 주 공방전을 펼칠 때는 본부대로서 백마고지전투에 누구보다 오래동안 참여하게 되었다. ''(첨언은 붙이자면, 매일같이 장병들이 싸우면 지치기 떄문에 연대별로 나눠져서 교대로 싸우는 것이 원칙이나, 그가 몸담고 있던 수색대는 의도치 않게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움을 이끌어 갔던 것 같다.)''
10월 9일 적의 대공세에 30연대가 무너져 395고지를 내주자 이를 되찾기 위해 29연대로 교체 투입하게 됨에 따라 빗발처럼 쏟아지는 포탄의 사이를 뚫고 철원평야의 개활지를 건너 백마고지로 붙기위해 사력을 다해 뛰어서 간신히 산 밑에 다다라 한숨을 돌리자마자 30연대와 교대하기 위해 동아줄처럼 달려있는 통신선을 따라 또다시 산을 올라 계속해서 공방전을 펼치면서 반격에 참여하였다.
본격적인 역습에 앞서 고지의 6부 능선으로 후퇴하여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공격 명령에 따라 각 소대원들은 소총과 수류탄 2개를 지참하고 2~3명씩 조를 짜서 고지 8부능선까지 진출하여 고지정상에 있는 적 진지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적의 집중화력으로 395고지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으나 당 수색대의 분산 전진으로 적의 초점을 이끈 다음 주력 부대가 이동 접근하는데 성공하였다.
아군은 후방 지역에 탱크부대와 많은 이동 포병부대가 막강한 지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도 인해전술로 끈질기게 공격해 왔으며, 고지 팔부능선상에 진지를 구축한 아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한번은 쌍방의 포격으로 진지로 뛰어들어 이를 피하였는데 포격이 끝나고 먼지가 갈아 앉고 보니 진지 저편에 중공군이 있지 않은가, 서로 놀래서 총도 못 쏘고 각각 반대편으로 뛰어갈 정도로 피아 구분이 안되는 전투였다.
고지 정상에는 쌍방의 포격으로 전사자들이 산처럼 쌓여 흙 한줌을 쥐면 먼지 1/3, 포탄 파편 1/3, 살점 1/3 이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먼지, 모래 같은 흙으로 변했는데 정상이 몇m 낮아졌다고 한다.
또한 정상 탈환 후 방어 참호진지를 구축하는데 사용할 흙과 돌이 없어 시체를 쌓고 먼지 같은 가루흙을 덮어서 진지를 만들었는데 진지 연결로를 걸어 다니면 튀어나온 시체의 팔과 다리가 걸렸다.
''이 전투에 투입된지 하루만에 수색중대장 최영철 중위가 수류탄에 맞아 큰 부상으로 후송되었는데 전후 어느 TV에 백마고지 전투 증언 프로에 나오는 것을 보고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여 상당히 아쉬웠다.''
10여일간 수류탄 백병전을 포함한 포탄전 끝에 395고지를 탈환하여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이동한 후 보니 200여명이 넘었던 중대병력 중 온전히 고지를 내려온 병력은 나를 포함 40여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 당하여 후송된 것이었다. 무사한 것이 역시 하늘의 도움이 있었나 보다.
예비사단으로 교대되어 산정호수-이동 지역을 거쳐 사창리에 주둔하며 1개월간 교육훈련을 받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때 연대장 김봉철 대령의 추천으로 갑종 간부후보생 신청서와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 당시 간부후보생 모집관이 연대에 직접 와서 대상자를 물색하거나 추천을 받아 현지에서 시험을 보고 추후에 합격 여부를 알려주었다.
예비사단으로서 포천지역에서 수색 훈련을 마치고 또다시 철원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후 전쟁 양상이 많이 변화하면서 평야지대인 철원과 평강 사이의 주저항선에 철조망, 지뢰설치, 방공호 및 연락로 확보 등 현 진지 사수 개념으로 바뀌고 수색정찰전이 강화되면서 수색대 역할이 더욱 커졌다.
당 수색소대는 철원 북방 주저항선인 월정역 언덕을 넘어 북방으로 500m 거리의 작은 언덕 뒤쪽에 호를 구축하고 그 곳을 거점으로 철원과 평강으로 이어지는 넗은 개활지를 수색정찰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야간에는 출몰하는 적의 정찰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잠복근무하고 주간에는 적 진지를 정찰 수색하기위해 움직이고 주야로 매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였다.
정찰 수색을 위해 적 진지 깊숙이 침투하여 접근하면 포탄과 총탄이 날아들고 야간 잠복근무시 적과 조우하면 총격전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이 와중에 잘하면 적을 사살하거나 포로를 잡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아군도 적의 작전에 휘말리면 사상자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적진에 침투하여 본대에 복귀하면 신체검사를 받기도 하였는데 전투 성과물로 중공군 권총을 노획하면 이를 지참해 가져오곤 하는데 이것이 한국군 지휘관이나 미군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좋아 신체검사로 압수하였던 것이다.
12. 김화 저격 능선 공방전
김화 동쪽으로 주둔지를 옮기고 투입된 곳이 저격능선이었다. 많은 병력이 교대로 투입되면서 많은 전상자를 내고 있는 곳으로 주저항선을 넘어 적진 팔부능선 일부를 확보하고 사수함으로써 적이 마음대로 전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곳이었다.
1953년 1월 25일 약 30여명으로 구성된 특공대에 선발되어 팔부능선 진지 방어에 투입되었는데 이곳은 더 많은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아침 6시경 식량(주먹밥, 고체알콜, 물)과 탄약 등을 3~4명의 노무자들이 운송하여 팔부능선 점령지로 보충병과 함께 올라오면 내려갈 때 부상자나 전사자를 싣고 내려갔다.
적 진지 연락로 50m 밑에 우리 특공대 참호가 있었는데 거리가 가까우니 낮에 심심하면 수류탄이 날아오고 저격수 총알이 시시때때 날아오는 아군이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어떤때는 야간에 적군 300여명이 산 아래로 우회하여 당 특공대를 밑에서 공격해 올 때도 있었는데 그럴때는 아군 고사포가 아군을 포함하여 그 일대 전체를 목표로 포사격을 하여 낮에 보아두었던 참호나 바위 깊숙이 피하는데 그야말로 재수 없으면 아군포에 죽는 것이었다.
지옥같은 하루가 지나면 5~10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계속 보충되는 날이 계속되었다. 6일째 되는 날 사단사령부에 알아보니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사단 전출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 수색대 입장에서는 고참 병력을 빼기 싫어서 사단 명령이 있었는데도 본인에게 알려주지 않고 계속 전투에 투입시켰던 것이었다. 전쟁 상황으로 사단 명령을 어긴 상황은 십분 이해하나 개인으로 보면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인데 하면서 전선에서 바로 사단으로 출발하였는데 전선을 통과하면서 보니 모두가 피곤한지 초병이 서있는 곳이 하나도 없어 사령부까지 무사 통과하다니 참으로 어느 누구도 하고 싶지 않았던 피곤한 전쟁이 아니었던 가 한다.
1953년 1월 30일 갑종 간부후보생 합격 통지를 수령하기 위해 사단사령부에 도착하여 신고하고 사령장을 갖고 후속 절차에 따라 병참구입 차량편에 서울로 나와보니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전투 복장 그대로 소총을 매고 서울 거리에 서니 몰골이 말이 아니어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거리에 있는 헌병이며 경찰이 쩔쩔맨다. 찝차를 얻어타고 도보로 한강을 건너 영등포에 도착한 후 기차편으로 1953년 2월 2일 대구 보충대(대구 제분공장)에 집결하여 광주 상무대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7월 17일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여하튼 제9사단 29연대 수색중대 창설요원으로 전쟁에 참가한 160여명 중 종전까지 성한 몸으로 버터낸 것은 나뿐이었다.
13. 결
지옥에서 천당으로 간 기분이었고, 좋고 나쁜 것이 무엇인지 그 후의 바쁜 삶 속에 묻혀 알 수 없었지만, 적진 속을 앞마당처럼 휘젓고 다니며 전투에 같이 참여했던 전우들 이름은 기억도 잘 안나는 나는 이제 모두가 잊은 노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