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어

 



1. 개요
2. 상세
2.1. 마한어와의 차이
2.2. 시대별 변천
3. 백제어가 일본어에 미친 영향?
4. 백제는 정말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나?
5. 백제어연구(도수희)에 수록된 백제어휘
6. 일본 기록에 남은 삼국시대 단어 목록
7. 참고 자료
8. 같이 보기


1. 개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어 항목
한반도 중부와 남부, 서해안 일대를 거점으로 했던 고대 국가 백제에서 쓰였던 언어를 일컫는다.

2. 상세


백제고구려의 유민들이 삼한의 옛 땅에 와서 건국한 국가로 고구려어와 삼한 지역의 영향을 받았다. 직접적으로 백제어의 뜻이 전해지는 단어는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 인명, 지명, 관직, 연호등에 전해지는 백제어를 비교언어학과 한자음 재구를 통해 추출하고 있다. 4세기 이후의 양서(梁書) 같은 사료와 기록에는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는 기록[1]이 있어 고구려어와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 '부여어족'에 속한다는 가설도 있다.
또한 역시 양서에서 신라에 대해 설명할 때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중국과)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라고 한다.
무왕(백제)이 지었다고 알려진 서동요가 백제어와 관련이 깊다는 주장이 있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은 서동요가 백제어로 쓰였다는 설을 내놓았다. 서동요에서는 대격 표지로 乙(을, ur)을 사용하는데 고려 광종(고려) 대의 승려 균여가 지은 보현십원가예종(고려)이 지은 도이장가를 제외한 신라에서 만든 다른 모든 향가가 대격 표지로 肸(힐, gur)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빈은 이를 백제어에서는 gur에서 g가 탈락했던 것으로 해석한다. g는 연구개음으로 탈락하기 용이하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백제 고유명사에서 乙은 여러차례 사용되었던데 반해 肸은 사용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에 근거해 이것이 고대 한국어의 방언인 백제어의 음운론적 특성이며 이런 특성이 서동요에도 반영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논문 링크 #
'''최근 서울대 언어학과의 연구에 의하면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8세기 목간에서 백제어의 수사가 발견되었는데 백제어의 수사가 한국어족과 동일하게 나와서 백제어는 한국어족에 속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이 연구에 따르면 백제어의 수사에서 숫자 2는 의털읍(矣毛邑), 숫자 3은 새태읍(新台邑), 숫자 5는 도스읍(刀士邑), 숫자 7은 일고읍(日古邑)이라 발음하고 숫자 8은 옅털읍(今毛邑)이라 발음한다.[2]
이승재 교수미륵사지 목간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 작성됐지만, 신라의 수사 표기법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백제 문자로 생각된다며 해당 목간이 신라인이 만든 것일 가능성은 낮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신라어의 수사는 '一邑', '二尸', '三邑' 처럼 한자 수사를 그대로 썼지만, 백제는 이두 형태로 수사를 적었다고 설명했다. 이승재 교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며[3] 부여어족을 일본어족과 연관시킨 이기문 교수의 제자이다. 이승재 교수는 저서 ‘목간에 기록된 고대 한국어’에서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 언어 표기 체계의 차이를 정리했다. 다만 이 교수의 논리는 이기문 교수의 남방한국어란 개념 설정에 근거하기에 여전히 백제어와 신라어를 같이 묶고 고구려어를 제외시키는 방법론에 함몰되어 있어 아쉬운 점이 많다.

2.1. 마한어와의 차이


간혹 많은 사람들이 백제마한을 같이 묶어서 '백제어'와 '마한어'를 똑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엄연히 틀린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는 백제는 마한의 터전(현재의 충청도전라도)에서 자리잡은 나라로 인식되어왔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사실로 엄격히 말해서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부 지역 즉, 한강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고구려계 유민들에 의해 한성백제로서 건국하였다.[4] 백제는 한강 이남의 한성에서 건국 한 이후 350여 년간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따로 존재해오다가 백제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결국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외면한 것이 백제어가 마한어를 계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5] 착각을 증명할 정답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추정)’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다.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6]’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7]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8]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가야어 지역의 ‘(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임병준의 고구려말 어휘 일람(2000)에 따르면 '홀(忽)' 자는 당시 발음이 'kuru'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현대 한국어의 고을과 대응된다. 당시 백제, 신라어 또한 忽, 屈, 骨로 표현의 차이만 있지 발음은 비슷하다. '벌' 또는 '비리'와 대응되는 어휘인 고구려의 어휘인 不, 別, 平吏도 당시 발음이 'pa, pere. pul'로 추정되며 당시 백제어와 신라어는 夫里, 火, 伐로 표기하였다. 이 또한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발음과 뜻은 통한다. '벌'은 들판을 나타내는 현대 한국어의 어휘이기도 하다. 지명을 표기하는 방법이 고을이냐, 벌판이냐의 차이라고 생각될 뿐이지 초기 백제어가 신라어, 가야어와 확연히 달랐을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別, 平吏 등의 지명어가 확인되는 경기도 파주시는 본래 백제 영역이었기에 이 단어들이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어라 볼 수 있으나 이 지역은 본래 고조선(위만조선)의 영역에 속했고 4세기 초까지도 진번군, 대방군 같은 중국 군현에 속해있었고 이 지역의 토착민은 주로 예맥족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지금의 한반도의 한강 이북의 경기도 북부 지역은 전부 예(濊)의 영역이라 나오며 뒤에 마한이 강성해져 북상했을 때도 예상강 유역은 대방군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때문에 이 단어들은 고구려어가 아닐지라도 고구려어와 동계어인 예맥어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백제가 마한을 적극적으로 통합한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의 일이라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 동안 별도의 국가로 서로 따로 공존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지워져야 한다. 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부여계어(語)에서 출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2.2. 시대별 변천


신라의 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를 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위례성)⇒한홀(한성)⇒고마나루(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시)⇒소부리(사비, 현재의 충남 부여군)’와 같이 언어권이 다른 곳으로 세 번이나 천도를 하였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보면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였으며, 전기 백제사회 또한 단일 부족국가에 의한 단일 언어사회였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였다. 
이후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뀌게 된다. 이 시기에 백제는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다. 말하자면 전기 시대 부여계 단일 언어사회에서 마한어를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마지막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로 옮긴 도읍지인 공주 시대로부터 그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부여계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백제어는 초기에 부여계어의 단일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 중기에 이르러 호남지역으로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그 당시 호남지방에서 주로 쓰이던 마한어까지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루었다. 이후 후기에 들어선 부여계어와 마한어가 서로 혼용되어 단일 언어사회에 다시 가깝게 됐다.
그러나 백제 후기에도 왕족과 귀족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명할 정도로 부여계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지배층과 상류층은 여전히 부여어계 백제어를 구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어를 토대로 부여계어가 혼합된 형태의 백제어는 주로 피지배층이 사용했다.

3. 백제어가 일본어에 미친 영향?


고대 백제어가 일본어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직까지 확정된 가설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연구결과들은 고대에도 백제어와 일본어는 완전히 달랐으며, 백제어는 한국어와 상당히 유사했다는 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백제가 이중언어 사회였다는 추정도 있는 만큼 아직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백제어 수사라고 주장되는 '''밀(3)''', '''옻(5)''', '''나는(7)''', '''덕(10)'''[9]은 현재의 일본어에서도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인 '''미츠(3)''', '''이츠(5)''', '''나나(7)''', '''토오(10)'''와 굉장히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중기 시대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수출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부여사마(扶餘斯麻), 계백(階伯)[10], 서부은솔 귀실복신(西部恩率 鬼室福信), 별부장 사탁상여(別部將 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 등[11] 고대 백제인들과 마찬가지로 두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주로 쓰고 있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백제어도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백제어 자료가 너무 적어 대조하기 힘든 관계로 아직 확정된 학설은 아니다.
이렇듯 위의 가설만으로는 백제어와 일본어의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없는게 수사만 보아도 백제어의 수사(數詞)와 관련하여 미륵사지 목간에는 5-刀士邑도사읍(다섭, 다섯), 7-日古邑일고읍(일곱), 8-今毛邑금모읍(훈독 이털읍, 여덟), 矣毛邑, 新台邑이라는 기록이 있어 일본어보다는 한국어와 상당히 유사하다. 또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백제어로 앞, 아래, 남쪽은 아리비(アリヒ) 뒤, 북쪽은 디(知), 위는 우(雨)라고 표기하고 있어 방향어 또한 한국어와 더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물론 백제가 이중언어 사회여서 지배계층의 부여계 백제어와 마한 지역의 삼한계 백제어의 수사와 방향어가 서로 달랐다고도 추정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또한 백제식 성씨와 일본식 성씨의 유사성도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며 현대 일본인들의 성씨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나 보급된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고대와 중세시대 일본 귀족들의 성씨도 백제계 성씨와 유사하므로 아직은 함부로 판단 할 수 없는 부분이다[12].
하지만 일본서기 비다츠 덴노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야마토 왕조는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따로 구분했다. 때문에 언어적 유사성이 있었다 해도 서로 상당히 달랐을 거로 보인다. 즉, 고대 일본어는 백제어와 다른 계통이었지만 백제어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백제어와 비슷해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13]

4. 백제는 정말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른다. 한국 고대 기록이 전반적으로 전란 등의 이유로 매우 부실하여 남아있는 자료들로 간접적으로만 추측할 뿐이다. 아래 내용은 마한어와 백제어가 '다른 언어'라는 전제에서 서술된 현재 학계 트렌드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글이기에 읽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또 현존하는 그 어떤 역사서도 백제어가 이중 언어 체계라는 기록 자체가 없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꾸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다고 추정된다. 말하자면 전기 시대 부여계 단일 언어사회에서 이후 마한어를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 일컫고 왕비를 ‘어륙’이라고 불렀다.[14] 그런데 ‘어라하’와 ‘어륙’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반면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여기서 지배층의 언어가 부여계어이고 피지배층의 언어가 마한어임을 추정 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의 경우 처럼 단일 언어사회인데도 사대부와 신하들은 주상 혹은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평민, 백성들은 나랏님이나 임금님, 상감마마 같은 식으로 서로 다르게 부른 사례도 있기 때문에 이것 만으로는 당시 백제가 정말 복수 언어사회였는지 확실하게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피신한 백제계 귀족들도 '건길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일본서기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 위 주장도 이견이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왕'을 나타내는 어휘의 순우리말을 '긔지'로 표현한 바 있으며, 민요에는 심심찮게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어라 만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건길지라는 표현과 어라(하)라는 표현 모두 조선시대까지 잘 사용되었다.
최근 우석대 역사학과 조법종 교수의 '광개토대왕비 비문' 연구에 의하면 해당 기록에 백제 지역의 한(韓)인과 예맥인들이 둘 다 고구려언어가 통한다는 기록(정확히는 백제 지역의 '인'이 '고구려인'과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서술된 내용이 있다.)이 있다고 한다.[15][16]
'''하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 한/예인들과 고구려맥인들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그저 한/예들이 고구려의 묘지를 수호하고 관리하는 법칙을 모를까봐 고구려 사람들을 더했다는 말이 나올뿐이다. 게다가 백제 지배층이 예인이라는 것도 확실치않다. 예인이라고 정확하게 불렸던 것은 옥저동예지역사람들 뿐이고 막상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양맥으로 불렸었다. 한성백제 시절 동예지역 예인들이 백제에 편입했고 광개토왕비에 언급된 한예인들은 백제의 피지배계층이었을 것이고, 애초에 고구려가 아무리 백제를 밟았아도 귀족등 지배계층한테 묘지관리를 시킨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백제가 이중언어체계가 맞다면 백제지배층은 고구려인 주류와 언어가 같을테고 남쪽 마한계 백제인들은 신라어와 같은 한어를 구사했을것이다.
또한 백제의 마한 정복 이후 부여계 언어를 사용하는 백제의 지배층이 마한을 언어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동화시켰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광개토대왕릉비는 5세기 초에 세워진 것이다. (정확히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아들 장수왕이 서기 414년(장수왕 3년)에 세웠다.) 5세기면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병합하고 난 뒤의 일이다. ('''단''',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히 백제에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예한인들이 백제 지배층을 가리키는지 마한인을 가리키는지도 확실치 않다. 예한인이 백제 지배층을 가리킨다면 백제 지배층과 고구려 지배층은 같은 부여족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그 둘의 언어는 서로 통하는게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는 예인한인부여계인 자신들과 서로 다른 이질적인 종족으로 구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 약탈해 잡아옴)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로 나의 무덤을 수호, 소제케하라."는 대목에서 고구려는 그 둘을 부여계인 자신들과 분리해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17][18]
알렉산더 보빈의 고대 한국어 관련 주장을 살펴보면 좋다. 그의 연구는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문서에서 주장되는 도수희 교수의 이론과 상당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사서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를 건국한 진한의 6촌 유민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와 동국통감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고조선의 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마한을 정벌하고 스스로 헌왕이 되었다고 한다. 수서 신라전에는 관구검의 침입 당시 피신한 고구려 유민들이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전란 등의 이유로 북쪽에서 남하하였고 신라가 건국되기 직전에는 이미 한반도 남부까지 고조선 유민들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접어들기 전 한반도는 이미 예맥 계열의 민족들의 터전이 되어있었다. 계통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상황에서 "한"과 부여계, 고구려계의 백제를 크게 구별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이는 고대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북방에서 남하하여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몰아내고 지배했다는 보빈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5. 백제어연구(도수희)에 수록된 백제어휘


백제 전기어의 단어
(1) 접미 지명소의 의미
買(매(*mai)): 川
南+買~ 南+川, 省知+買~ 述川, 於斯+買~橫+川, 伏斯+買~深+川, 也尸+買~牲+川 등과 같이 買와 川이 대응하므로 川의 뜻으로 '買'가 쓰였음을알수있다.
買(매): 水
買+忽~水+城, 買+旦忽~水+谷城등과 같이 買와 水가 대응하므로 水의 뜻으로 '買'가 쓰였음을 알수 있다. 한편 彌+鄒忽~買召忽은 買가 彌와 대응할 뿐이다.
勿(믈):水
非勿~僧梁, 德勿>德水에서 '勿'이'水'에 대응한다 또한 신라지명 史勿: 泗水의 대응을 추가할 수 있다. 여기'勿'의 뜻은 '水'이다. 이'勿'은 중세국어 '믈'에 이어진다. 현대국어 '물'(<믈)로 변화하였다.
추가예정

6. 일본 기록에 남은 삼국시대 단어 목록


'''일본서기 백제어'''

쿠치(俱知 ; クチ): 매

코무(久麻 ; コム): 곰

수키(須祇 ; スキ): 마을

에파시토(女子 ; エハシト, *epasto)[19]

: 아가씨

키시(王 ; キシ): 왕

오루쿠(后 ; ヲルク, *əlku): 왕비[20]

시토로(帶 ; シトロ), *stoṛ>ㅅ듸>ㅅ디>띠): 띠

니리무(主 ; ニリム), *niṛm): 님

파시카시(夫人 ; ハシカシ, *paskas)[21]

: 부인

페수(倉 ; ヘス, *pesu): 창고

오사(通事 ; ヲサ): 통역가

소쿠(上; ソク): 위

'''시무(中; シン): 가운데[22]

'''

오토(下 ; オト): 아래

세시무(子 ; セシム, *sesmu): 아들

'''고구려어'''

오리코케(王 ; ヲリコケ, *oṛkoke): 왕

오리쿠쿠(夫人 ; おりくく, *oṛkuku)[23]

: 부인[24]

마카리(正, 世, 上 ; マカリ): 큰[25]

'''쿠노(中 ; クノ): 가운데[26]

'''

'''시무(小 ; シム): 작은[27]

'''

요모 (子 ; よも): 아들

'''가야어'''

수나라(須奈羅 ; スナラ): 쇠나라

아리피시, 아로시 (南, 下 ; アリヒシ, アロシ, *aṛps, aros>앒, 앐>앞, 알): 남쪽, 아래

오코시(上 ; ヲコシ, *okos): 위

'''신라어, 공통어'''

나리(那利 ; ナリ, *naṛ>ㄴㆍㄹㆍ>나루): 나루

무라(牟羅 ; ムラ): 마을

무레, 모로(山 ;ムレ, モロ): 산

코포리(己富利, 縣 ; コホリ, *kəpəl>*kəbəl>*kəβəl>ㄱㆍ옳>고옳>고욿>고을): 고을

'''코니, 코(大 ; コニ, コ, *kən): 큰[28]

'''

다로(臣, 陁魯 ; ダロ): 신하

사시(城 ; サシ, *sas>잣): 성

세마(島 ; セマ): 섬

파토리(波珍 ; ハトリ, *patəṛ>*바ㄷㆍㄹ>바ㄹㆍㄹ/바닿>바다): 바다

목록출처
위 목록의 훈은 석일본기(釋日本紀)등의 사서에 적혀있는것으로 10~14세기에 적혀 변형된 상태다.
단, 그렇더라도 카타카나 음이 실제 해당 단어들의 옛 발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어의 음운 변천 과정 및 역사적인 외국어의 가나 표기법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순음퇴화 및 어말 자음을 '자음+[i]'로 옮기는 것이 그 예이다. 예를 들어, 위 목록에서 '니리무'를 오늘날 일본어의 외국어 표기법처럼 '니림'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들 및 중세 한국어의 어휘를 참조해 추정한 음가가 위 표의 각주 속 재구음이다. 어디까지나 재구음이니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 고마
공주의 옛 이름을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적고 ‘고마’라 불렀다. 이 이름이 ‘용비어천가’(1445)에 나오고 ‘일본서기’(720)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고마’는 ‘곰’이란 뜻이고 ‘나리’는 현대 한국어 ‘나루’로 변하였다.
● 소부리
소부리(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이름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소부리주>소부리군’으로 쓰이다가 신라 경덕왕이 서기 757년 지금의 부여로 고쳤다. 백제 성왕은 천도하면서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北扶餘)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남에 있는 부여’란 의미로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라 고쳤다. 경덕왕은 남부여에서 ‘부여’만 따다가 소부리를 부여로 바꾼 것이다. 현재도 부소산 기슭 마을은 ‘소부리’라고 불린다. ‘소’는 ‘동쪽’이란 뜻(샛바람의 새)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소부리’는 ‘동쪽 벌판’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은 경북 상주(尙州)의 옛 이름인 ‘사벌국(沙伐國)’의 ‘사벌’과 같은 말이고, 신라의 서울 ‘셔벌(徐伐)’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이 변해서 오늘의 ‘서울’이 되었다. 그런데 어형 변화 과정으로 따져볼 때 ‘고마’가 줄어 ‘곰’이 되었듯이 ‘부리’가 줄어 ‘벌’이 된 것이니 ‘소부리’가 ‘사벌’ 또는 ‘셔벌’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 ‘서울’의 본 뿌리는 ‘소부리’이다.
● 구드래나루
고지도에 한자로 ‘龜巖津’(구돌나루)이라 적혀 있다. 소부리에서 은산 및 정산(定山) 방향으로 건너가는 나루를 ‘구드래나루’라 부른다. 백제 시대에는 이곳이 나루라기보다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사신의 배들이 군산포(白江口)를 거쳐 강을 따라 올라와 입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빈을 맞는 항구였다면 ‘구드래나루’는 그에 알맞은 뜻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백제를 ‘구다라’로 불렀다. ‘구드래’와 ‘구다라’는 비슷하다. 따라서 동일어로 믿을 수 있다. ‘구드래’는 ‘굳+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백제어는 유기음이 없기 때문에 ‘大’를 ‘근’(>큰)이라 하였다. 따라서 ‘굳+으래’는 다시 ‘그우+ㄷ+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그우>구’(大)로 변한 것이고 ‘ㄷ’은 사잇소리이다. ‘으래’는 전기 백제어로 왕을 일컫던 ‘어라+하’의 ‘어라’에 해당한다.
‘어라’는 지금까지도 즐겨 불리는 민요의 마지막 대목인 ‘어라 만수’(왕이시여 만수 무강하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구드래’의 본말은 ‘근어라’이며 ‘대왕(大王)’이란 뜻이다. 따라서 ‘굳어라’가 일본어로는 ‘구더라’ ‘구다라’로 변하였고, 우리말로는 ‘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이 말은 ‘근어라(大王津)’란 뜻이다. 백제의 선진 문화가 후진 일본 문화의 밑거름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일본인들이 백제국을 ‘구다라나라(대왕국)’로 높여 불러온 겸손을 이해할 수 있다.
● 부소산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전기 백제어 지역에서 이 ‘부소’가 많이 발견된다. 한 예로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을 들 수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홀에 도착하여 먼저 오른 산이 ‘부아악’(負兒岳=三角山)이었다. 그런데 兒의 고음이 ‘·’이었으니 부아(負兒)는 당시의 백제어 ‘부·’를 적은 것이다. 이 ‘부·’도 솔을 뜻한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가 침투한 것이다. 참고로 이 부소산에 있는 부소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왕성'이며, 당시에는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이라고 불리었다.
● 니리므

……곤지가 왜로 향할 때, 축자도(筑紫嶋)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돌려보냈고 왕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各羅;가카라)의 바다에는 주도(主嶋;니리무세마)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일본서기부레츠 덴노 4년 백제에서 말다왕이 국인들에 의해 제거되고 무령왕이 즉위함'''

전기 백제어로 왕을 부를 때 지배층은 ‘어라하’라 하고, 백성은 ‘건길지’라 불렀다. 그러나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이 됐다. 이처럼 현대어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
황산벌
황산벌 전투를 백제어로 표현하면 ‘누르리모이부리(黃等也山夫里)’ 전투다. 황산(黃山)은 고려 태조 때 연산(連山)으로 개명되었다(940년). 백제 시대에는 황등야산(黃等也山)으로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으로 개명한 것이다(757). 따라서 서기 757년까지는 ‘황등야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했듯 백제인들은 ‘黃等也山’을 ‘누르리모이’라 불렀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은 ‘누르리모이부리 싸움’이라 불렸을 것이다. 거의 100년 뒤인 서기 757년에 중국식 두 글자 지명인 ‘黃山’으로 개정된 뒤부터 백제식 이름은 점점 약해져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동부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36개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산이 늘어섰다’는 의미로 ‘누르리모이(늘어선 )’라 명명한 것이다.
한자 黃, 等은 음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이 ‘黃等也山’에서 ‘等也’ 두 자를 줄여 ‘누르모이(黃山)’가 됐다. ‘누르’는 곧 ‘느르(連)’와 동음이어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에 ‘느르모이(黃山)’는 ‘連山’으로 다시 한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산벌 싸움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누르기재’(黃嶺), 누르기(마을), 누락골(於谷里 또는 於羅洞), 누르미(마을), 황산리(新良里 동쪽) 등의 지명이 파생되었다.
목록 출처

7. 참고 자료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이 문서의 상당 부분은 이 글을 참조해서 작성되었다. 도수희 교수는 이기문 교수처럼 백제가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고구려어와 현대 한국어가 친연성을 가지며 백제어가 신라어가 유사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에 해당 교수의 주장을 전부 수용하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8. 같이 보기



[1] 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 (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2] 중세 한국어로 8을 여듧으로 표기하고 여드릅으로 발음한다.[3] 이전 문서에 언어학과 출신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언어학과는 그가 현재 재직하는 학과일 뿐 출신 학과는 국어국문학과이다.[4] 사실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백제가 가장 오랫동안 도읍한 곳은 충청도의 웅진성사비성이 아닌 한강 이남의 한성(위례성)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백제의 역사는 공주·부여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이러한 한성백제의 역사는 그동안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5] 그 당시 마한어는 현재의 충남·전라도 지역에만 분포해 있었다. 충북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는 마한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온조 비류 형제가 각각 나라를 세운 곳의 지명에서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부리’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홀’(위례홀, 미추홀)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6] 현재의 인천[7] 물론 이들 지명에 붙은 ‘홀’이 고구려 장수왕이 중부지역(황해·경기·충북)을 점령한 서기 475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식으로 새로 붙인 '어미'가 아니라는 가정이 필요하기는 하다.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가 약 77년간 점령한 이후에 신라의 북진으로 경기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되었으므로 반세기 넘게 엄연한 고구려의 영토였던 적이 있었다.[8] 마한어의 특징은 지명 어미 ‘비리’에서 나타난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 ‘점비리’ ‘내비리’ 등 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이 ‘비리’는 후기 백제어에서 ‘부리’(夫里)로 계승된다. ‘고량부리’는 오늘날의 청양이고, ‘소부리’는 부여다. ‘모량부리’는 고창이고, ‘인부리’는 능성이다. 이 처럼 '부리'가 사용된 지명은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9] 출처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10] '계백'은 이름으로 성씨는 따로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11] 귀실복신(鬼室福信), 사탁상여(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경우 '귀실', '사탁', '흑치'는 성씨이며 '복신', '상여', '상지'는 이름이다. 역사서에 이들의 성명이 ‘복신, 상여, 상지’로만 빈번히 기록된 것을 보면 생략된 앞부분은 성씨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성씨가 두 자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로 미루어 생각할 때 계백은 성명이 아니라 오로지 이름일 뿐이며 그도 두 자로 된 별도의 성씨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2] 사실 성씨가지고 출신 민족을 운운하는 것부터가 웃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당장 한국의 성씨부터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접한 삼국시대 각국의 귀족들이 중국물 먹은 티 좀 내려고 중국의 네임드 역사 인물의 성씨를 사칭하거나, 대대로 내려온 이름을 성씨처럼 쓰기 시작한 게 그 기원이다. 당연히 이렇게 했다고 고구려인이나 백제인, 신라인중국인인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에서도 백제로부터 선진 문물을 대거 받아들임에 따라, 백제궁이라는 이름의 궁전이 지어질 만큼, 황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백제빠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당연히 우리나라 귀족들이 중국 따라한답시고 중국인들의 성씨를 사칭했듯이, 일본 귀족들이 한국 귀족들의 성씨를 사칭하는 일이 없었을 리도 없다.[13] 이런 현상을 언어동조대라고 하며, 인도 아대륙이나 발칸 반도의 언어들, 현대 한국어현대 일본어, 중국어, 스웨덴어핀란드어가 이런 케이스에 속한다.[14]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이 됐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추정이 맞다면 현대 한국어의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15] 조법종, 2005, 「고구려 광개토왕 수묘제 개편 검토」,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Vol.6,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해당 논문 (기관회원에 한하여 무료)[16] 다음의 동영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17] 그런데 부여도 예인들과 마찬가지로 예계이다. 고구려는 맥계였으며 현대 사학계에서는 예와 맥을 거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예맥 문서를 참조.[18] 고요묘 집안은 진변(辰卞)에서 존귀했고 명성은 순기(珣琪)처럼 두터웠다, '''고진''' 공은 곧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辰韓)의 영족(令族), '''고현'''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 '''고모''' 군의 휘는 모요 자는 구이고 안동사람이다. 가문은 진한에서 융성하고 다른 명문의 명예를 모두 압도하였다. 부여융 공은 이름이 융이고 자도 융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다.[19] '딸'의 중세한국어 형태가 'ᄯᆞᆯ'이었는데, '시토' 부분이 이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故이기문 교수에 의하면 아래아 발음이 고대 한국어에서 좀 더 원순형으로 났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는데, 그렇다면 모음이 '오'와 비슷해지기도 한다.[20] '올케'가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http://kostma.aks.ac.kr/dic/dicViewY.aspx?searchid=DIC_B8_000165[21] 순우리말로 남편은 '버시', 부인을 '가시'라고 부르는데 이와 관련있는것으로 보인다[22] 고구려어에서는 "작다"라는 뜻으로 쓰였다.[23] 일련의 '올-' 계열이 오늘날 '올되다', '올벼' 등의 접두사 '올-'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24] 현대어의 부인(婦人)이 아니라, 삼국시대에 왕후를 달리 이르던 표현이다. 영부인(令夫人) 등에 이 호칭이 남아있다.[25] 대막리지에서 막리(莫離)와도 상통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6] 백제어에서는 "크다"라는 뜻으로 쓰였다.[27] 백제어에서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쓰였다.[28] 고구려어에서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