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람 지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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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람 지퍼스''' (Wolfram Sievers)
(1905년 7월 10일 출생 - 1948년 6월 2일 사망)
힐데스하임에서 교회 음악연주자의 부친아래 태어난 지퍼스도 어릴적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어 첼로, 피아노, 오르간 등을 잘 연주했다. 독일의 바로크 음악을 좋아한 그는 학생시절에 반 유대주의 단체인 <독일민족방어동맹>에 참가하여 과격활동으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 후 세일즈맨으로 일하던 지퍼스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전문대학을 다니면서 역사, 철학, 종교학을 공부한 후 예술가 동맹에 가입해 <대지로 돌아가는 운동>등에 참가했다. 1929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그는 1933년에 친위대의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가 설립한 엑스테른슈타이네 재단에서 일했다. 1935년에 친위대에 입대한 지퍼스는 이 해에 아넨에르베의 사무장으로 취임했다. 아넨에르베의 장관은 따로 있었지만 아넨에르베의 실무는 완전히 지퍼스가 장악했다. 초자연연구와 인종학 등을 담당하던 이 부서에서 일한 지퍼스는 1943년에 군사과학 연구회의 감독관이 되기도 했다. 지퍼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나치가 여러가지로 실행한 인체실험에 깊이 관여했다. 그 중 하나가 스트라스부르 라이히 대학의 아우구스트 힐트의 인종연구를 위해 인골을 모아보내 협력한 것이다. 지퍼스는 이 인골수집을 위해 112명의 유대인 수용자를 골라내 살해했다고 한다. 독일의 패전 후, 연합군에 의해 체포된 지퍼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범죄적인 인체실험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혐의로 1947년 8월 20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1948년 6월 2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지퍼스는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