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

 

1. 개요
2. 역사
3. 분류
3.1. 간다라 불경
3.2. 팔리어 경전
3.4. 한문 경전
3.6. 관련 사이트
5. 불경 일람


1. 개요


'''불경'''(佛經)이란 불교경전을 말한다. 엄청나게 방대하며 한 가지 경전의 의미만 깨우치는 것도 굉장히 오래 걸린다. 불경을 더 크게 편찬하여 모은 것은 "대장경(大藏經/Tripitaka)"라고 한다.

2. 역사


석가모니는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남기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는 직접 말로써 가르침을 전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사리불이여, 여래께서 설하셨을 때 그것을 믿도록 하여라. 위대한 성인(聖人)인 여래께서는 잘못된 것을 설하지 아니 하시며 오랫동안 최고의 진리를 설하고 계신다". 이는 아함경에 여러 차례 나오는 표현이다.
석가모니의 불멸 이후,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생전의 가르침과 언행을 모으기로 결심하고 석가모니의 직전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언행을 '결집'한다. 이때 십대제자아난다와 우파리가 서로 기억한 것을 암송해 정리했다.[1] 이때 아난다와 우파리가 암송한 내용을 듣고 '석가모니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아라한 500명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반박하면 석가모니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결집해 현재의 불경이 완성되었는데 불경들 중에서도 석가모니의 직접적인 언행을 기록한 경전은 <아함경>(아가마)이다. 물론 이는 불교의 전승이고 학술적으로는 최근 들어 팔리어 불경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승은 70인역 성경 등도 전한다. 꾸란은 가장 확실한 보존을 위해 칼리파 시기에 국가적으로 기록되었으나 내용의 일관성 문제가 있다. 즉 완전 무오한 종교경전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이것은 불경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쨌든 이런 전승 때문에 대부분 불경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 하는 말로 시작한다. 이후 석가가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같이 있었고 청중이 얼마나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온 후 본 불경이 시작한다.
최초의 경전으로 인정받는(글자로 옮겨 적힌) 패엽경도 만든 이유를 생각하면 불제자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지키려 했는지 알 수 있다.

3. 분류



3.1. 간다라 불경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발견된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패엽경들. 성립 연대는 기원전 2세기로, 불교를 신앙하면서 인도 곳곳에 불경의 내용을 인용한 비문과 석주를 세운 아소카 대왕 시대와 거의 겹친다. 이 카로슈티 문자 불경이 발굴되면서 팔리어 불경은 독점적으로 누려오던 위상에 타격을 입었다.[2]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경전 중에는 법구경과 코뿔소 경[3]도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는 장아함경도 나왔다.

3.2. 팔리어 경전


스리랑카에 전해지는 상좌부 불교의 경전. 프라크리트어(중기 인도아리아어군) 중 팔리어(빨리어)로 기록되었다.
과거에는 팔리어 경전이 성립시기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측했기에 세계 불교학계, 특히 상좌부 불교를 중시하는 서구 중심으로 매우 권위가 높았다. 지금도 국내 남전 불교 지지자들은 이 점을 강조하는 때가 잦다.
하지만 아소카 왕이 남긴 비문과 석주에 인용된 불경[4] 내용과 빨리어를 문헌학에 기초해 비교하여 연구한 결과, 빨리어는 석가모니가 활동했던 인도 북동부 지역 방언보다는 중서부 방언의 요소가 강했다.[5]
네팔인도 중남부 지역에 발견된 패엽경과 금석문 일부를 제외한 현존 빨리어 경전도 실제로는 기원후 5세기 스리랑카에서 마하위하라 부파와 마하위하라 소속 학승 붓다고사가 자파의 교설과 전승을 중심으로 기틀을 잡았고[6] 17세기에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스리랑카 불경이 산실되자,[7] 태국미얀마에 잔존하던 필사본을 옮겨 적어 정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제 불교학계에서는 그 위상이 많이 작아졌다.
2009년에 국내 불교학계에서 팔리어 삼장의 권위와 관련하여 논쟁이 벌어졌는데 빨리어 경전의 절대성을 주장했던 측[8]에서 마하위하라 부파[9]의 주장만을 근거[10]로 빨리어 불전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주장했다가 학계의 역풍을 맞은 전례가 있다.[11]
팔리어 경전의 니까야는 모두 한 부파에서 전래되었으나, 한역 아함경의 4아함은 여러 부파(설일체유부, 법장부, 대중부)에서 전래된 것이 각각 별도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팔리어 경전이 아함경보다 내용상 일관성이 있고, 한역 4아함은 부파 간의 공통점과 차이 연구에 많이 이용된다.

3.3. 산스크리트어 경전


대승불교의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써진 것이 많다. 초기 경전은 팔리어를 포함한 프라크리트어들로 기록되었는데 차츰 문어인 산스크리트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경전은 대부분 본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다. 산스크리트어는 한역하여 범어(梵語)라고도 한다. 이 외에도 불교를 다룬 고대 인도의 서사시로 “붓다차리타”[12]가 높은 문학성으로 유명하다.

3.4. 한문 경전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이다. 불경의 한문 번역은 후한 대부터 개시되었는데 초기 번역가들은 주로 안세고와 같은 서역승들로서 구술로 번역한 것을 제자들이 베껴적는 형태로 번역됐다. 또한,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번역했다기보다는 산스크리트어가 속화한 프라크리트나 팔리어, 중앙아시아의 토하라어에 기초해 번역된 때도 있어 번역의 질은 중구난방이라서 초기 번역에는 후대 번역보다 그 내용이 대폭 생략됐거나 음역이 다른 점이 상당하다.
그 후에도 불경은 꾸준히 번역되다가 북조 서역승 구마라습이 엄격한 기준을 두고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해 불경 번역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대에 들어서면 현장인도에 다녀와 불경을 당시 언어 상황에 맞게 재번역하여 그 후에는 현장역 불경이 많이 사용되었다. (대표로 반야심경은 현장역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현장역을 '신역', 그 전의 번역을 '구역'이라고 칭한다.
주로 중국, 대한민국, 일본, 대만 등에서 쓰고 지역마다 불경을 대규모로 편찬하는 사업을 벌여 대규모 불교 경전 집성이 발간되었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송 대부터 대장경이 몇 차례에 걸쳐 발간됐고 한반도에서는 신라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시작으로 불경을 목판인쇄해 고려 대에 만들어진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이 유명하고 일본에서는 다이쇼 연간에 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아 당시까지 존재하였던 한중일 불교 문헌을 집대성하여 <다이쇼신수대장경(대정신수대장경)>을 발간하여 현재까지 존재하는 불경 총집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남아 있다. 동아시아의 옛 민족들이었던 거란요나라, 당항서하, 여진금나라도 대장경을 만들었다. 다만 이들은 한자뿐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 문자들로 번역하여 쓰기도 했었다. 이들의 대장경들도 송이나 고려에 영향을 주기도 했었다.

3.5. 티베트어 경전


티베트어로 번역된 경전이다. 티베트 불교인도와 직접적인 교류를 거치면서 발전했고, 티베트어는 오로지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재정비하는 과정[13]까지 거쳤으므로, 티베트어 경전은 사료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거기에 티베트 불교는 8세기 불교가 인도에서 소멸되기 직전의 불교가 유입되었기에, 현재 한문/산스크리트 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경전이 남아 있다. 그 덕에 우리는 신라 출신의 승려 원측의 논서 <해심밀경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티베트에서 주로 썼으며, 그 외에 티베트 문화권과 가까웠던 몽골이나 청나라,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인근의 나라에서도 티베트어 경전을 썼다.
여담이지만, 북경판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 영인본을 동국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고,[14] 동국대학교는 달라이 라마로부터 기증받은 라사판도 소장하고 있다.

3.6. 관련 사이트


ID
Title
Vol/Page
Parallels
MN 151
Piṇḍapāta­pārisuddhi
MN iii 293
SA 236, EA 45.6*
가령, MN 151은 탁발음식의 청정 경(Piṇḍapāta­pārisuddhi)으로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Vol 3의 293쪽에 해당되고 잡아함(SA 236)과 증일아함(EA 45.6)에 유사한 내용이 있다는 의미이다.

4. 위경


불경에도 위경, 즉 저작자가 석가모니나 그의 직계제자가 아닌 자가 후대에 지어 내려오는 경전이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굳이 석가모니의 말을 그대로 편찬한 것이 아니라도, 깨달음을 얻은 자는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철학적 요지만 동일하다면 위경이라도 진경과 동등하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웬만하면 위경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다만 저자가 불제자가 아니라서 다른 사상과 섞인다든가 종파에 따라 중시하는 요소가 달라 이견이 발생한다면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위경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나왔다. 아래는 그중 대표적인 것들.
물론 상좌부 불교에서는 이런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정말로 그런 주장대로라면 왜 저자가 자기 이름을 숨기고 석가모니의 친설인 양 위장하느냐는 것. 위경은 어디까지나 위경으로 석가모니의 친설과 동등하게 볼 수 없으며, 아무리 좋게 평해도 논서(論書)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부모은중경>: 부모님의 은혜가 깊으니 효도하라는 내용이다. 지극히 유교적 효도 논리가 강해서 중국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한중일 삼국에서는 엄청나게 흥했다. 현대에는 그 사상적 배경이 이전부터 존재하기에 위경이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는 한다.# 하지만 부모은중경이라는 경전 자체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게 맞다. 범어/팔리어 원전(원본)이 없으나 후한(後漢)시대에 안세고가 번역한 '불설부모은난보경'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부모은중경'을 만든 듯하다. '불설부모은난보경'은 팔만대장경에도 수록되었다. [15]
  • <노자호화경>: 도교불교를 까내리기 위해 만든 위경이다. 줄거리는 "우리 노자님의 만년이 쪼~까 애매모호 하신데, 그 이유는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중국인들이 못 알아먹으니까 서역(천축)에 가서 진리를 설하시고 번성한 게 불교임!! 즉 석가모니는 사실 노자임!! 그러니까 불교는 오리지날 도교보다 한 수 아래다!!"라는 내용이다. 이에 불교에서는 공자, 안회, 노자가 석가의 제자인 유동보살ㆍ광정보살ㆍ마하가섭이라는 삼성화현설(三聖化現說)을 내밀었다. 그러나 노자화호경의 근간인 노자화호설 자체가 초기 불교에서 포교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불교의 중국 정복>(에릭 쥐르허 저)에서는 노자화호설 자체가 불교 쪽 문헌에 먼저 나온다는 점을 근거로 이쪽을 긍정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18세기 일본의 학자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는 대승경전은 모두 석가모니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주장하였다.

  • <불설상법멸의경>: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위경. 영조 11년(1735)에 창령 화왕산에 있는 관룡사라는 절에서 만든 위경이다.[16] 당시의 한국 불교계를 더럽히던 파계승들의 타락한 모습과 조선 조정의 지나친 승병 동원을 비판하면서도, 왕실의 안정을 바라는 모습과 참선/염불/시주를 중시하면서 불교계의 정화를 주장하여 당시 사회상 연구에서 자료가 된다.

5. 불경 일람




[1] 사실 대부분의 내용은 아난다가 기억하였고, 우파리는 계율에 관한 부분을 암송하였다.[2] 카로슈티 문자 불경의 소품반야경방사성 탄소 측정 연대가 기원후 75년으로 현존하는 불경 중(상좌부 불경 포함해서) 가장 오래된 경전이고 성립 연대가 기원전 100년경으로 추정된다.[3] 코뿔소 경은 간다라어로 되어 있으며 팔리어 숫타니파타의 Uragavagga 챕터의 3번째 경에 해당한다.[4] 숫타니파타와 담마빠다(법구경)의 내용 일부를 인용했다.[5] 인도중국과 비슷하게 넓은 국토에 인종이 다양하므로, 방언이 한반도처럼 그냥 지역 사투리 수준이 아니다.[6] 당시 마하위하라 부파는 스리랑카 불교계의 패권을 놓고 다른 불교 계파와 경쟁 중이었다. 니까야를 정리한 것도 자신들의 경쟁력 강화가 목적이었다.[7] 물론 스페인, 포르투갈 한정이다. 대영제국은 이런 일에는 별로 딴지를 걸지 않는 편이었다. [8] 마성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인 전재성 박사.[9] 일명 대사파. 상좌부 불교의 각 부파 중에서도 보수 경향이 가장 강하고 교조주의적인 교파로, 자신들을 표현할 때 자기네는 나무고 다른 부파는 나무에 돋은 가시로 비유한다.[10] 상좌부 불교의 팔리어 경장과 대승불교의 아함경은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도 존재한다. 부파별로 분화하면서 경전들도 조금씩 달라졌으리라.[11] 참고로 학계의 학자들 중 논쟁의 핵심에 섰던 동국대학교 권오민 교수는 초기불교 전공자이기도 하고 팔리어 절대주의를 비판할 때도 상좌부 불교 문헌들을 기초로 하였다.[12] 한역 제목은 불소행찬(佛所行讚)이다. 제목대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다룬 서사시이다. [13] 쉽게 말해 불경 하나를 번역하기 위해 기존의 언어체계를 뜯어 고쳤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티베트어에는 관사 혹은 관계대명사가 존재하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다른 티베트버마어파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4] 특기할 것은, 서울대학교 것은 김종필이 일본에서 구입하여 기증한 것이다.[15] 불설부모은난보경 佛說父母恩難報經 [16] 지금도 존재하는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