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라가한

 

서돌궐의 역대 가한
13대 을비사궤가한

14대 사발라가한

서돌궐 멸망
沙鉢羅可汗
(? ~ 658)
서돌궐의 제14대이자 마지막 가한. 이름은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642년에 을비사궤가한이 가한이 되면서 엽호에 임명되어 다라사수에 살았으며, 648년 여름 5월 25일에 무리 수천 장을 인솔하고 안으로 소속했다. 당나라로부터 조서를 받아 정주의 막하성을 지키면서 좌교위장군이 되었으며, 당나라가 구자를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안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수십 기를 이끌고 들어와서 당 조정에 조현했다.
648년에는 곤구도행군총관, 좌교위장군으로 있다가 니복사발라 엽호가 되어 북, 독기를 하사받고 649년 2월 13일에 요지도독이 되고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면서 점차 여장이 번성하다가 651년에 당태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당나라의 서주, 정주 두 주를 습격하여 당나라에서 이를 알아채고 사신을 보내 위로했다.
아들 아사나질운을 당나라에 보내 아사나질운이 우교위중랑장에 임명돼서 돌아왔는데, 아사나질운의 설득으로 서쪽으로 달아나 을비사궤가한을 공격해 세력을 합쳤다. 스스로 사발라가한이라 칭했고 돌륙의 다섯 철, 노실필의 다섯 사근이 그에게 귀부하고 정예 군사가 수십 만이라 을비돌륙가한과 연합해 처월, 처밀, 서역의 여러 나라들을 귀부시키고 아사나질운을 막하돌 엽호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정주, 금령성, 포류현 등을 공격해 당나라 귀족수천 명을 붙잡아 끌고 갔으며 당나라의 진주, 성주, 기주, 옹주를 공격해 당나라 인구 3만, 회흘 지역의 5만 기병을 가져갔다. 하지안 653년에 을비돌륙가한이 죽자 그의 아들인 아사나힐필달도와 틈이 생겨 그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어 1천여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656년에 아사나힐필달도가 사발라가한의 토벌을 요청해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가한으로 책봉해 벼슬을 주기 위해 쇄엽성에 도착하자 군사를 보내 막아서 나아갈 수 없게 했으며, 아사나힐필달도를 공격해 그 세력의 대부분을 합쳤다. 당의 총산도행군총관 정지절의 공격을 받아 약해지다가 657년에 당나라군이 예질하에서 10만을 이끌고 싸웠고 소정방의 군사가 적은 것으로 인해 가볍게 여겨 포위했다.
당나라군이 남쪽 들판을 점거해 삭을 한 곳으로 모아 밖으로 향하면서 그 자신은 기병을 거느려 북쪽 들판에 진을 쳐서 대응했는데, 사발라가한은 보병을 먼저 공격해 세 번 부딪쳤지만 움직이지 않았고 당나라군이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자 패했다. 결국 이 패배로 다섯 노실필이 도망가자 수백 기병을 이끌고 서쪽으로 달아났으며, 당나라의 추격을 받아 소돌성까지 달아났지만 붙잡혀서 당나라의 군사에게 호송되었다.
658년에 당나라인들은 당태종에게 사죄해야 한다면서 소릉[1] 앞에서 형벌을 주어 사과를 요청해야했지만 사형을 면제받았다. 681년 돌궐 제2제국이 건국되어 도호부 지역과 절도사 가족들을 생포해 모두 정복하고 사발라가한은 죽어 힐리가한의 무덤 옆에 장사지냈다.

[1] 당태종의 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