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의 집
生長の家(Seicho-no-ie)
1930년에 설립된 일본의 신흥종교 단체이다.
교조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는 원래 오모토라는 일본 신흥종교에서 편지 포교를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이후 오모토를 탈퇴해서 개인잡지인 <생장의 집>을 발간하게 되는데,[1] 이것이 바로 생장의 집 종교의 시작이다. 주요 교리는 다니구치 마사하루 자신이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쓴 저서를 열심히 읽기만 하면 모든 병이 치유되고 인생고가 해결된다는 흔한 사이비 종교의 모습을 띄고 있었으며, 역시 흔한 성공한 사이비 종교가 늘 그렇듯, 실제로 병이 나았다는 신자가 쇄도하면서 그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으나,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신흥종교를 세우기 이전부터 '일본은 세계의 지도국이며, 일본인은 세계의 지배자로서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자민족 중심주의에 심취해 있었으며, 생장의 집이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는 한창 태평양 전쟁이 임박한 시기였다. 이 시기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예수 그리스도도 천황에게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식의 '천황 신앙'을 설파했으며, 이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대일본제국은 신국이며, 천황은 절대적인 신이다'라는 식의 극단적인 교리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천황 신앙' 중심의 교리와 전쟁 당시의 광기를 발판으로 생장의 집의 교세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났으며, 그 교세는 육군과 해군에 전투기를 헌납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종전 후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GHQ에 의해 집필이 금지당했으나, GHQ 체제가 종결된 후 생장의 집은 다시 활동을 시작, 전후 헌법을 '점령헌법'으로 규정해 부정하고, 모든 주권을 천황에 봉헌해야 한다는 등의 극우적 발언을 담은 저작을 연이어 출간하면서 우파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렇듯 전후 체제에서 두각을 드러낸 생장의 집은 1964년에 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정치결사인 생장의 집 정치연합(이하 생정련)을 결성하였으며, 당시 전공투가 맹위를 떨치던 안보투쟁 국면의 학생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생장의 집 학생회전국총연합(이하 생학련), 생장의 집 고교생연맹(생고련)을 결성하였다. 생정련과 생학련에 소속 인사들은 종교계 출신 인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대다수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천황 신앙'과 극우적 논조가 가득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체화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우파 내에서 촉망받는 인사들로 성장하였다.
생정련은 적극적인 로비 및 지원을 통해 정계 인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국회의원 후보 17명 중 13을 당선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전 참의원이며 노동성 장관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다. 이렇게 생정련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교조인 다니구치 마사하루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활동하며 생정련의 핵심 정책 목표 중 하나인 우생보호법 개정에 힘썼다.
생학련은 각 대학에서 전공투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몇몇 대학에서 우파계 학생조직이 학생회 선거에 승리하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우파계 학생회 전국 조직인 전국학생자치회연락협의회(전국학협)의 결성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성장한 우파 학생회 조직은 안보투쟁의 국면을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 내 좌파 운동권 세력의 소멸이라는 전환을 이루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생장의 집 계열 우파 활동가들은 이후 '일본청년협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은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양쪽 모두에서 핵심 사무를 맡으며 우파 조직 실무진의 인적 구성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교조인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죽고 새로운 교조가 들어선 생장의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정련과 생학련 등 일체의 정치결사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의 중지와 특정 후보의 선거운동 지원 중지를 발표하며 정계와 스스로 단절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에는 초대 교조의 극우적 사상을 비판하고 이런 교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극우 인사들의 행적, 즉 일본회의의 활동과 아베 총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면서 교단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따라서 현재 생장의 집은 일본회의 및 일본 내 우익과는 연관이 없으나, 이 종교 출신 인사들이 여전히 그 당시의 교리를 믿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고, 그러한 행동들이 일본회의의 운영과 행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베 신조의 씽크탱크이자, 일본회의와의 연관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일본정책연구센터의 장이자 아베 신조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이토 데쓰오와 현 총리보좌관인 에토 세이치가 생학련 출신이다. 또한 일본회의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1970년 경 원호법제화 운동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회의의 모든 '국민운동'을 설계하고 실무를 책임져온, 현 일본회의 사무총장 가바시마 유조 역시 생학련 출신이다.
1. 개요
1930년에 설립된 일본의 신흥종교 단체이다.
2. 상세
교조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는 원래 오모토라는 일본 신흥종교에서 편지 포교를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이후 오모토를 탈퇴해서 개인잡지인 <생장의 집>을 발간하게 되는데,[1] 이것이 바로 생장의 집 종교의 시작이다. 주요 교리는 다니구치 마사하루 자신이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쓴 저서를 열심히 읽기만 하면 모든 병이 치유되고 인생고가 해결된다는 흔한 사이비 종교의 모습을 띄고 있었으며, 역시 흔한 성공한 사이비 종교가 늘 그렇듯, 실제로 병이 나았다는 신자가 쇄도하면서 그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으나,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신흥종교를 세우기 이전부터 '일본은 세계의 지도국이며, 일본인은 세계의 지배자로서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자민족 중심주의에 심취해 있었으며, 생장의 집이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는 한창 태평양 전쟁이 임박한 시기였다. 이 시기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예수 그리스도도 천황에게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식의 '천황 신앙'을 설파했으며, 이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대일본제국은 신국이며, 천황은 절대적인 신이다'라는 식의 극단적인 교리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천황 신앙' 중심의 교리와 전쟁 당시의 광기를 발판으로 생장의 집의 교세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났으며, 그 교세는 육군과 해군에 전투기를 헌납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종전 후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GHQ에 의해 집필이 금지당했으나, GHQ 체제가 종결된 후 생장의 집은 다시 활동을 시작, 전후 헌법을 '점령헌법'으로 규정해 부정하고, 모든 주권을 천황에 봉헌해야 한다는 등의 극우적 발언을 담은 저작을 연이어 출간하면서 우파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렇듯 전후 체제에서 두각을 드러낸 생장의 집은 1964년에 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정치결사인 생장의 집 정치연합(이하 생정련)을 결성하였으며, 당시 전공투가 맹위를 떨치던 안보투쟁 국면의 학생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생장의 집 학생회전국총연합(이하 생학련), 생장의 집 고교생연맹(생고련)을 결성하였다. 생정련과 생학련에 소속 인사들은 종교계 출신 인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대다수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천황 신앙'과 극우적 논조가 가득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체화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우파 내에서 촉망받는 인사들로 성장하였다.
생정련은 적극적인 로비 및 지원을 통해 정계 인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국회의원 후보 17명 중 13을 당선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전 참의원이며 노동성 장관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다. 이렇게 생정련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교조인 다니구치 마사하루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활동하며 생정련의 핵심 정책 목표 중 하나인 우생보호법 개정에 힘썼다.
생학련은 각 대학에서 전공투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몇몇 대학에서 우파계 학생조직이 학생회 선거에 승리하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우파계 학생회 전국 조직인 전국학생자치회연락협의회(전국학협)의 결성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성장한 우파 학생회 조직은 안보투쟁의 국면을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 내 좌파 운동권 세력의 소멸이라는 전환을 이루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생장의 집 계열 우파 활동가들은 이후 '일본청년협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은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양쪽 모두에서 핵심 사무를 맡으며 우파 조직 실무진의 인적 구성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교조인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죽고 새로운 교조가 들어선 생장의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정련과 생학련 등 일체의 정치결사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의 중지와 특정 후보의 선거운동 지원 중지를 발표하며 정계와 스스로 단절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에는 초대 교조의 극우적 사상을 비판하고 이런 교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극우 인사들의 행적, 즉 일본회의의 활동과 아베 총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면서 교단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따라서 현재 생장의 집은 일본회의 및 일본 내 우익과는 연관이 없으나, 이 종교 출신 인사들이 여전히 그 당시의 교리를 믿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고, 그러한 행동들이 일본회의의 운영과 행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베 신조의 씽크탱크이자, 일본회의와의 연관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일본정책연구센터의 장이자 아베 신조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이토 데쓰오와 현 총리보좌관인 에토 세이치가 생학련 출신이다. 또한 일본회의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1970년 경 원호법제화 운동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회의의 모든 '국민운동'을 설계하고 실무를 책임져온, 현 일본회의 사무총장 가바시마 유조 역시 생학련 출신이다.
[1] 현재 동명의 잡지는 더 이상 발간하지 않고, 대신 산하 출판사인 일본교문사에서 1998년부터 발간한 <시로하토>(白鳩)가 기관지 노릇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