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 방언
1. 개요
한반도의 북서부 지역인 평안도 일대에서 쓰이는 한국어의 방언이다.
2. 상세
사용 위치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북도(북한의 행정구역상 자강도 포함) 일대, 그리고 사리원 이북의 황해도 일대다.[1] 사리원 이남의 황해도 지역은 본래 중부 방언권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분단이 길어짐에 따라 문화어의 영향이 짙어졌다. 평안도와 가까운 중국 랴오닝 성이나 지린 성같은 지방의 동포들 사이에서도 사용된다.
그리고 이촌향도 현상으로 지방의 주민들이 평양으로 많이 이주해왔는데 함경도 출신의 로동당 간부들이나 권력층이 부분적으로 들어간데다가 평양 말씨는 동북 방언의 영향을 받아서 부분적으로 함경도 말씨도 들어갔다. 예를 들면 '오마이'나 '아바이'(평안도에선 '오마니' '아바디'라고 한다)가 있다.
원래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경기 방언과 큰 차이는 없었으나 (서남 방언과 표준어의 차이 정도), 분단이 길어지면서 기술적인 어휘 등에서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평안도 방언 연구자 한성우의 '문화어 수업'이라는 책에서는 평양은 문화어 보급의 영향으로 '할아버지'와 같은 기본적인 어휘는 서울말과 비슷해지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네다'라는 표현도 발음을 그렇게 하더라도 문화어 보급 정책의 영향으로 글로 잘 쓰지 않아 이런 표현을 생소하게 여기기도 한다.
북한의 표준말인 문화어는 공식적으로는 평양말을 기반으로 함을 지향하나, 실질적으로는 서울말을 기초로 조선어학회가 정한 규정에 평양 방언, 사회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규범을 넣어 수정한 것이라는 평이 있다. 서북 방언의 요소가 반영이 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북 출신 1세대 실향민들도 평안도 사투리를 썼다고 한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서 들을 수 있는 말투였다고 한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에는 이 말투를 쓰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평이 나왔다. 현재는 반 세기 넘는 세월 동안 중부 방언의 영향을 받은 사람만 남게 되었다. 가수 현미가 평양에서 대구로 피난을 간 것도 10대 초중반이다. #
남한에는 서북 방언으로 번역된 성경이 있다.# 일본에 칸사이벤으로 번역된 성경이 있지만, 칸사이벤 성경은 거의 만담스러운 책이지만 서북 방언 성경은 진짜 예배 때 쓸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진지한 번역본이다. 게다가 원래 개신교 신자들은 수도권보다 평안도에 더 많았으니…[2][3]
남한에서 '북한말'이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사투리에 속한다.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인 야인시대 시라소니 말투, 오데로 갔나라는 90년대의 노래에 나오는 말투다. 강성범이 봉숭아학당에서 연기한 연변 총각의 방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변은 동북 방언(특히 육진 방언)의 영향을 받은 지방이라 연변에 계신 분들이 기분이 매우 언짢아 했다. 문화어라고 하는데 사실은 평안도 사투리를 흉내내는 경우가 많으며, 문화어는 들어보면 이런 말보다는 서울말과 비슷하다. '고조', '에미나이' 같은 말이 평안도 지역의 말이다. 탈북민은 함경도 북쪽 출신이 많은데, 북한에 관심없는 사람들은 이쪽 말을 경상도나 강원도 사투리, 조선족 사투리로 오해한다.
강준식의 《적과 동지》에 의하면 이 지역(평안남도)에 연고를 둔 김일성과 안창호[4] 가 서북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3. 특징
다음은 표준어 화자 및 다른 지역 방언 화자들이 지각가능한 서북 방언의 특징의 예. '''문화어의 특징이 아니다!''' 다만 아래와 같은 특징은 교과서적인 서북 방언의 특징으로, 두음 법칙과 관련된 사항 등은 문화어 보급에 따라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 구개음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디, 티'가 그대로 발음되며, ㄷ, ㅌ 뒤에 반모음 y[j]가 오는 경우 구개음화 대신 y[j]가 탈락 된다. '정거장'의 본음인 '뎡거댱'의 경우 '덩거당'이 된다.
예) 가디 마(가지 마),
- ㅈ, ㅊ을 각각 t͡s/d͡z, t͡sʰ/d͡zʱ로 발음한다. 이는 17세기 이전의 한국어 발음과 일치한다.
- ㅅ·ㅈ·ㅊ 뒤에서 전설고모음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예) 승겁다(싱겁다), 슬건(실컷), 아츰(아침)
- 종성에 자음군(ㄺ, ㄼ)을 가진 체언이나 용언 어간은 'ㄱ'이나 'ㅂ'을 탈락시켜 발음한다.
예) 흘(흙), 발찌만(밟지만), 널따(넓다), 일따(읽다)
- 주격조사로 '가'가 쓰이지 않고 '이'만 쓰인다. 다만 모음 뒤에서는 '래'가 쓰이는 경우도 있다.
예) 바다이(바다가), 내래(내가)
- 접속 조사, 공동의 부사격 조사로는 '과'만 쓰인다.
예) 친구과(친구와).
- 특징적인 어미로는 과거시제선어말어미 '-뎃-, -드렛-', 미래시제선어말어미 '-갓-'가 있으며 존대, 평대, 하대에 따라서는 존대의 설명종결어미 '-(슴)무다, -(소)와요, -(사)와요'·'-왜다, -쉐다, -쉬다, -수다', 평대의 설명종결어미 '-슴매, -구레', 하대의 의문종결어미 '-안, -언', 존대의 명령종결어미 '-라요', 하대의 명령종결어미 '-라' 등이 있다.
- 예) 철수 못 봔?(철수 못 봤냐?), 밥 먹언(밥 먹었냐?)
- 예) 갔댔습니다/갔뎄습니다(갔었습니다)
- 예) 이거 내가 개와서(이것 내가 가져왔어)
- 용언 및 서술격 조사 어간 뒤에 붙는 존경의문의 '-(으)나요'가 있음
예) 사람이나요? 검으나요?
- 자음이 선행한 'ㅕ'가 'ㅔ'로 발음된다. 즉 'y[j]'가 후행 'ㅓ'를 전설 모음화시키고 그 자신은 탈락한다.
4. 어휘
'서북 방언 - 표준어' 순으로, 본 문서 이외에 네이버 사전에서 더 찾아 볼 수 있다. '평안도' 키워드, '평안북도' 키워드, '평안남도' 키워드.
가시짱 - 찬장
가이 - 개
가지 - 금방,아까
강애 - 가위
거저, 고조 - 그저
예) 거저 운명이 데일 힘셉디다.
기다 - 그렇다
기당구 - 길이
과이 - 고양이
나케 - 나중에,좀 후에
날래 - 빨래
눅다 - (가격이)싸다
티껍다 - 더럽다
달마구 - 단추
댕가지 - 고추
숱한 - 많이
말째다 - 편치 않다
매띰 - 매짐,매(를 맞다)
미추과이 - 미친사람
디실 - 바닥
벼케 - 부엌
사리마다 - 속팬티
송구 - 아직
시방 - 지금
시라소니 - 스라소니
우틔 - 옷[5]
이따위 - 이따꾸
일렁감 - 토마토
쩨까치 - 젓가락
주이 - 쥐
텅간 - 헛간
끄대기 - 머리카락
끄내끼 - 감을 끈
빼람 - 서랍
싸다 - 비싸다[6]
찔게 - 반찬
4.1. 상대 높임법
서북 방언의 상대 높임법은 '-ㅁ네까'체, '-으라(우)요'체가 있다. 통일부 자료 특히 하라우체는 "동무, 날래날래 하라우" 같은 형식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아주 특징적인 어체처럼 알려져 있다. 정작 탈북민들에게는 '~네까'체 같은 경우 노인 말투, 없는 말투 등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탈북민 중 함경도 출신이 많고 타지 방언을 듣기 힘든 환경, 문화어 보급 정책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5. 예시
새터민에게서 들어보는 평양말. 문화어라고 하지만 '알간 모르간', '있갔니' 같은 말은 진짜 문화어가 아닌 평안도 사투리다. 문화어는 '~자요', '~라요', '~댔다'라는 어미를 빼고는 거의 서울말의 어미나 서울말과 더 비슷한 어미를 쓴다. (북한의 경어법) 평양말이 문화어라는 주장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서울말'과 구분되는 정치의식을 주민들에게 심기 위해 북한 당국이 세뇌에 가깝게 강조하는 말인데, 북한에서 이렇게 지냈다는 것을 그냥 표현하는 것이거나 아예 '문화어와 다른 평양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함경북도 청진시 출신이지만, 자강도에서 5년 동안 살아본 새터민에게서 들어보는 자강도 사투리이다. 그런데, 자강도 사투리와 비교하면 제주어는 서울말이라는 것은 과장이다. 제주어라는 표현을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 부근의 방언 중 제주어 만큼 이질성이 큰 방언은 없다. 이것은 자강도는 북한 내에서도 출입이 강하게 통제되어 그 지역 사투리를 외지인이 알기 힘들게 되어, 그 결과 매우 이질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어 나온 발언으로 보인다. 아니면 다른 지역은 문화어로 사투리가 대체되어가나, 이곳은 교통이 불편하여 사투리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고향이 자강도에서 거리도 먼 청진[7] 이라는 것도 영향을 끼친듯 하다.
좌측은 평안남도 순천군이 고향인 코미디언 남보원이다. 오른쪽은 코미디언 백남봉. 1985년 9월 평양 대극장에서 공연된 이북 사투리를 선보이는 무대다. 남보원 씨는 평안도 사투리, 백남봉 씨는 '북부 지방의 옛날 사투리', 즉 함경도 사투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녘의 사람들에게 고향 사투리를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나, 정작 현지에서는 문화어 교육으로 사투리를 구수하다기 보다는 촌스럽게 여기게 되어 이 무대를 불편하게 여겼고, 상당수가 과장되거나 없어진 말투라고도 여겼다고 한다. #
좋다는 양주 얻어마셔 볼수록 우리 술이 낫다는 생각을 더욱 절감하디요. 내 4대조께서 페양[8]
외성에서 양조업으로 성공하셨고, 나도 광성고보 나오자 스물 둘에 가업을 물려받았으니께니 지금도 훈훈한 문배 냄새가 코에 배어있읍니다레. 일제 때에도 하루 10섬씩 빚었고 해방 직후엔 평천양조·대동양조 두 군데서 최고로 벌여도 봤디요.
1988년, 서울에 거주하던 평양이 고향인 당시 73세의 이경찬 옹이 평양 문배주에 대해 언급하는 인터뷰에서
이 대화는 평안북도 시골의 일제강점기의 방언을 묘사한다. 이 소설의 작가 황순원은 평안남도 출신 실향민이다.뒤이어 누구의 입에선가, 누가 빈 틈을 냈어? 하는 흥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저마다 거 누구야? 거 누구야? 하고 못마땅해 하는 말소리 속에 간난이 할아버지 턱 밑으로 디미는 얼굴이 있어,
“아즈반이웨다레.”[9]
[10]하는 것은 동장네 절가였다.
그러자 저편 어둠 속에서 궁금한 듯 큰 동장의,
“어떻게들 됐노?”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투웨다”
- 황순원,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6. 관련 문서
[1] 연백 이북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황해도의 대부분이 서북 방언 사용지역이 된다.[2] 한국의 개신교 발전의 기폭제가 되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도 여기서 발생했고, 한국의 개신교 교회에선 다 하는 새벽기도회도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양의 별명이 조선의 예루살렘. 현재는 공산화가 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증거로 남한으로 옮겨온 미션스쿨들이 있다. 현재도 북한 지역에 토대를 두고 있는 개신교 미션스쿨이 꽤 있는데, 그게 바로 숭실대학교와 삼육대학교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서북 방언으로 번역된 성경인 예수셩경전서를 보관하는 곳도 숭실대학교 박물관이 되겠다.[3] 사족이지만 주체교의 교주 김일성도 본래는 개신교 집안이었다. 어머니의 이름인 강반석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4] 실제로 서북 방언을 사용했다고 한다.[5] 만주어의 영향[6] 표준어와는 정반대의 뜻이다.[7] 자강도의 중심인 강계시와 발언자의 고향 청진은 직선 거리로 270km 정도인데, 그 직선 경로 인근에 해발 1000m~2000m 이상의 험준한 산이 많다. 철도로 가려면 백두대간을 넘어야 한다.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직선 거리(240km 정도)보다 조금 더 멀다.[8] 평양[9] 아즈반이(아주버니)+웨다(외다)+레(~그려)로 이루어진 문장이다. 즉, "아주버님이외다그려", "아주버님이로구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대적인 말투로는 "아주버님이시군요" 정도의 의미다.[10] 9급 공무원 시험 문제에 출제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외다'라는 어미는 사어화되고, 요즘 세대는 과거의 '~했수다레'같은 실향민의 말투를 모르기 때문이다. 정권이 친북 성향이라 북한말을 출제하냐는 말이 있는데 #, 이건 현미 같은 사람이 일제강점기 일을 두고 고향의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이라 북한 정권과 무관하다. 저런 말투로 고향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겨 빨갱이가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옛날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