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관 전투

 



'''석주관 전투'''
'''시기'''
1597년 음력 9월~11월
'''장소'''
조선 전라도 구례읍 석주관
'''원인'''
왜군의 전라도 진공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조경남
<^|1> 우키타 히데이에
'''병력'''
불명
불명
'''피해'''
의병 전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의병의 패배
1. 배경
2. 전투
3.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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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정유재란이 시작된 이후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와는 다르게 전라도로 침공해왔다. 또한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방화, 약탈, 살육, 코베기가 이어졌고 이는 산속까지 진행되어 의병 활동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싸우다가 죽는게 더 낫다는 생각하에 자생적인 향보의병이 일어났다. 하지만 임란 때와는 다르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고 향촌 중심의 소규모 의병대가 구축되어 향토방위전을 전개했다.
구례현감 이원춘은 섬진강에 상륙한 일본군을 막기 위해 석주관에 진을 쳤지만 적의 기세에 눌려 남원으로 퇴병했고 이에 따라 8월 7일, 구례는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남원성으로 퇴병한 이원춘은 남원성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구례에서는 왕득인이 군사를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려 했고 전주와 남원으로 향하는 요충지인 구례를 잃을 수 없었던 일본군은 구례로 향했다.

2. 전투


왕득인은 휘하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석주관에 매복했다. 의병들은 돌을 던지면서 일본군에 맞섰지만 중과부적으로 왕득인을 위시한 의병은 전멸당했다. 그의 애마 백전마까지 모두 전사했으며 이들의 피는 석주관을 피로 물들였다. 이것이 제 1차 석주관 전투이다.
11월 초, 왕득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 왕의성이 일으킨 의병과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 5의사들이 읍내 각 면에서 구축한 군사들은 연합하여 구례로 향했다. 그러면서 인근 남원 의병장 조경남과 합세해 연곡에서 적병 60명을 죽이고 200명의 포로를 구출했다. 그러자 인근의 화엄사에서 승병 153명과 군량 103석을 지원해주어 의병의 사기가 높아졌다. 일본군은 연곡에서의 패배에 보복하기 위해 석주관으로 향했다.
조선군은 석주성 아래 협곡을 사이에 두고 5의사군과 승병을 좌,우에 진을 쳤고 왕의성은 산 정상부에 진을 쳤다. 의병은 일본군이 접근하자 피내로 불리는 계곡으로 적을 유인한 이후 석주성에 접근하자 좌,우군이 합세해 공세를 가했으며 정상부의 왕의성군은 큰 돌을 굴리며 적을 공격했다. 그러나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일본군 속에 중과부적으로 5의사군과 승군이 무너지며 의병은 전멸당했다. 왕의성은 산 정상에 있어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외 의병들은 모두 전사했다.

3. 그 후


구례에는 석주관칠의사묘가 세워져 이날 전사한 의병장들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