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어
The Journals of the Royal Secretariat
프랑스어
Les Journaux du Secrétariat Royal
국가·위치
대한민국 서울
소장·관리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01년
제작시기
1623년 ~ 1894년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303호'''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소재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103호 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신림동,서울대학교)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필사본 / 일기류
'''수량/면적'''
3,243책
'''지정연도'''
1999년 4월 9일
'''제작시기'''
인조 1년∼순종 4년(1623∼1910)
1. 개요
2. 방대함
3. 구성과 내용
4. 작성 방법
5. 번역과 전산화
6. 기록의 철저함
7. 바깥고리
8. 국보 제303호
9. 관련 영상
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image]
조선에서는 승정원이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과 같은 곳으로, 왕과 부서들 간의 소통을 맡아 각종 서류들을 정리해 왕에게 올려 보고하고 왕이 내린 명령을 부서들에 전달하는 비서실의 소임을 맡았다.
이렇게 승정원에서 왕이나 부서들에서 올라온 일들을 시시콜콜 기록한 기록물이 승정원일기이며 조선왕조가 시작된 이후부터 작성되어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도중에 이름이 몇 번 바뀌었지만 역사가들도 편의를 위해 그냥 승정원일기라고 부른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기록유산이자,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조선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하는 기록물이다.''' 국보 303호로 등록되어 있다.

2. 방대함


안타깝게도 승정원일기는 완전하게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의 기록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화재로 모조리 불타버렸기 때문. 그나마 다시 시작한 기록분도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또 타버렸고 영조 시대에 또 불타 일부 기록이 또 소실되었으며 세손이 요청하여 사도세자 사건이 기록된 승정원일기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현재까지 남은 기록은 인조 1년(1623)에서 순종 4년(1910)까지 '''287년 정도''' 분량이다. 이전 일기들과 중간중간 있었던 기록들이 소실됨은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토록 소실된 결정적 이유는 실록은 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어 서너 곳의 사고에 보관한 반면, 승정원일기는 필사본 1부만 제작 보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양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일기는 분량이 엄청나다.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가 4964만 6667자인데, 현재 남은 승정원일기는 '''대략 2억 4250만 자(!)'''[1]다.
게다가 승정원일기는 1차 사료인 데다[2] 기록도 매우 세세하고 공문서의 성향이 강해서 사관의 성향에 따라 기록이 첨삭될 우려가 있는 실록보다도 실제 역사에 더 근접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모든 국정을 기록한 자료이니만큼 조선사뿐만 아니라 조선 주변국들의 정세까지도 세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유네스코에서도 승정원일기를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3. 구성과 내용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고 사서를 만들기 위한 1차 공문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적이었다.
일단 가장 서두엔 일기답게 당연히 날짜가 들어간다. 여기엔 연호, 갑자년, 월일시, 날씨까지 기록하였다. 매시간 대마다 새로 하였으며 날씨의 변화 정도와 측우기를 통한 강수량의 정도까지 세밀하게 기록했다. 이런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기본적으로는 왕이 거한 궁을 중심으로 기록하지만, 행궁으로 행차 시에는 행궁과 본궁 양쪽을 기록하여 조선의 날씨 연구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해무리가 끼었다 안개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시거리 어느 정도로 끼었다, 몇 시에 개었다 등 날씨의 수준도 대단히 세밀하게 작성했다.
또 임금의 경연 장면에서는 왕이 언제, 어디서, 어떤 신하들과(모든 참석자 이름을 다 나열함) 경연을 하였고, 저번에 읽다 만 어떤 책의 어디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읽었으며, 임금이 평한 내용과 신하가 평한 내용, 그리고 왕과 신하들이 계속해서 책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공부하는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러한 기사에 나온 것을 읊으면 그냥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과 같다. 의원이 임금의 건강을 살피는 대목에서는 어제 왕의 건강상태가 어떠어떠하였으며 요즘 날씨가 환절기라 일찍 기침을 하면 몸에 안 좋을 수가 있다는 내용과 그날 임금의 맥박이 어떠어떠했다는 등 내용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다음 칸에는 이 시간대의 근무한 승지와 일기를 작성한 주서의 이름이 적었는데 이를 좌목(座目)이라고 한다.
좌목의 다음에는 국왕의 위치와 현재 업무 상황[3]이 적히고 중요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왕비, 대비, 세자 등의 안부가 나온다. 날짜와 좌목에 이어서 여기까지도 정형화된 불변정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기의 본문인 그날의 국정이 대화와 처결 여부를 포함하여 기록했다. 여기에 포함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각 관서에서 국왕에게 올린 문서와 거기에 대한 국왕의 결재여부와 후속처치
  • 의정부의 인사행정, 여러 상소와 장계
  • 당일에 근무하는 승정원 소속 관리 명단
  • 당일 국왕의 행적
  • 국왕 & 신하 간 모든 토론 대화내용
  • 그 날 임금의 진료여부와 처방받은 약의 약방문
공문서 성격을 띠는 터라 사도세자 신원을 상소하는 유생 1만 57명의 이름을 적어놓은 사례도 있으니 할 말 다한 셈. 영조대 청계천 공사에 대해선, 실록이 홍봉한 등과 대화한 것을 몇 줄로 간략히 처리했다면 승정원일기에서는 대화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기록 분량만 비교해도 몇 자 vs 몇 장의 차이.

임금이 말씀하시길

"저번에 광충교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이 말하길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강가의 집들은 대부분 떠내려 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중략)"

임금이 말씀하길

"서울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은 듯 하다. 설령 하천을 준설한다 해도 모래와 흙을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이 말하길

"어떤 이는 배로 운반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수레나 말로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한번 시험해 보면 알맞은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씀하시길

"한성 안으로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이 말하길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비가 내린다면 가능한 방법인 듯 합니다."

임금이 말씀하시길

"사관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각자 소견을 말해 보라."

ㅡ 《승정원일기》 영조 34년(1758) 5월 2일.

임금이 준천의 가부를 물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영조 34년(1758) 5월 2일.


정조 1년(1777) 7월 28일, 새벽에 궁궐 옥상에서 기와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지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조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수색을 명령했더니, 사람이 기와를 차서 깬 듯한 자국이나 모래를 밟은 자국이 발각되었다.#[4] 이 일이 발각된 후 기사를 비교해보자.

(홍국영이 "자객이 새나 짐승이 아니면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을 터이니,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길 청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말씀하시길

"조금 전에 별감들에게 먼저 차비문 안밖을 수색하게 하였는데 의 말이 매우 옳다. 경은 금위대장도 맡고 있으니 금군 20명을 인솔하여 승헌문에서부터 무덕문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색하고, 또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 20명에게 궁궐의 담장 안을 순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홍국영이 말하길

"그러면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는 표신을 풀어 보냅니까?"

임금이 말씀하시길,

"일이 급박하니 지체할 수 없다. 이 영전으로 인솔하면 되겠다."

ㅡ 《승정원일기》 정조 1년(1777) 7월 28일

(홍국영이 "자객이 새나 짐승이 아니면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을 터이니,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길 청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그것을 옳게 여겼다.

ㅡ 《조선왕조실록》 정조 1년(1777) 7월 28일.


3.1. 승정원일기 마지막 내용


隆熙 四年 八月 二十九日 月曜 晴 / 陰 庚戌 七月 二十五日 丙寅

卿 趙同熙 進。

記注官 金天洙 進 李龍九 進。

典製官 金裕成 圖書課進 尹喜求 進。

主事 趙秉億 進 趙性翕 進 鄭樂鵬 進 張錫駿 進。

上在昌德宮。

勅諭, 皇帝若曰, 朕이 否德으로 艱大 業을 承야 臨御以後로 今日에 至토록 維新政令에 關야 亟圖고 備試야 用力이 未嘗不至로 由來로 積弱이 成痼고 疲弊가 極處에 到야 時日間에 挽回 施措無望니 中夜憂慮에 善後 策이 茫然지라 此를 任야 支離益甚면 終局에 收拾을 不得기에 自底진 則無寧히 大任을 人에게 托야 完全 方法과 革新 功效 奏케만 不如 故로 朕이 於是에 瞿然히 內省고 廓然히 自斷야 玆에 韓國의 統治權을 從前으로 親信依仰든 隣國大日本皇帝陛下긔 讓與야 外으로 東洋의 平和를 鞏固케고 內으로 八域民生을 保全케노니 惟爾大小臣民은 國勢와 時宜를 深察야 勿爲煩擾고 各安其業야 日本帝國文明新政을 服從야 幸福을 共受라。 朕의 今日此擧 爾有衆을 忘이아니라 爾有衆을 救活 至意에 亶出이니 爾臣民等은 朕의 此意를 克體라。

內閣書記官長勳一等韓昌洙特賜太極章, 掌禮院樂師長勳六等白禹鏞特陞敍勳五等, 賜八卦章。 財務官勳五等趙在榮特陞敍勳四等, 賜八封章。

융희 4년 8월 29일 월요 맑음 / 음력 경술년 7월 25일 병인일

경 조동희(趙同熙) 진(進)

기주관 김천수(金天洙) 진 이용구(李龍九) 진

전제관 김유성(金裕成)도서과(圖書課) 진 윤희구(尹喜求) 진

주사 조병억(趙秉億) 진 조성흡(趙性翕) 진 정낙붕(鄭樂鵬) 진 장석준(張錫駿) 진

임금이 창덕궁에 있었다.

칙유(勅諭).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내각 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훈1등 한창수(韓昌洙)에게 특별히 태극장을 하사하였고, 장례원 악사장(掌禮院樂師長) 훈6등 백우용(白禹鏞)은 특별히 훈5등에 승서(陞敍)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으며, 재무관(財務官) 훈5등 조재영(趙在榮)은 특별히 훈4등에 승서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다.

경술국치 당일의 일이다. 이 기사를 작성한 이후 승정원은 바로 한국통감부에 의해 전격 폐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달 뒤에 세워진다.

4. 작성 방법


이름은 승정원일기라서 승정원의 핵심인 승지가 작성할 것 같지만, 승정원일기는 주서 2명[5]이 주로 작성했다.
두 사람이 2부제로 하루 업무의 반씩을 담당해 국왕의 모든 행정처리와 회의에 참여하여 속기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속기록이 초책(草冊). 당연히 혼자서 하다보니 모자라는 부분이 있게 되는데 이 경우는 다른 승정원 직원들이나 사관들에게 물어서 채워넣었다고 한다. 속기 외에 올라온 상소문과 같은 자료는 주서가 아닌 서리가 '''베껴서''' 첨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에 두개씩 나오는 초책들을 모아서 한 달 혹은 반달마다 모아서 책[6]으로 만들어 일월년을 기록해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5. 번역과 전산화


이렇게 엄청난 기록유산임에도, 번역을 끝마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일반인이 접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1. 위에서 말한 엄청난 분량. 조선왕조실록만으로도 번역하는데 몇 년은 넘게 걸렸는데 적게 잡아도 실록의 5배는 될 엄청난 분량을 번역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겠는가.

  1. 초서의 압박. 승정원일기는 임금이 바뀔 때마다 최종 정리를 위해 역사서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각종 공무에 대한 누적된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승정원일기에는 초서가 많이 쓰이는데 초서를 이해하는 데는 별도의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독이 쉽지 않았었다. 승정원일기 전산화 작업을 통해 초서를 정체자로 풀어쓰는 작업은 끝냈다. 그러나 지금도 수많은 학자들이 승정원일기를 한국어로 번역 중이지만 완전히 번역하려면 앞으로도 최소한 수십 년에서 길게는 백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7]
당연하지만, 승정원일기의 번역이 완전히 끝난다면 조선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외국 사절 방문과 그 내용 그리고 당시 조선에 떠돌던 외국의 뜬소문까지 포함된다면 일본, 중국, 오키나와 역사도 어느 정도 다시 써야 할 정도로... 더불어 모든 작업을 완료한다면 조선말 실록 중 순조실록, 헌종실록, 철종실록은 분량 자체가 적은 데다가 기록이 워낙 부실하고, 고종 순종실록은 일제가 만들어서 역사왜곡이 상당히 심하기에 일기가 주요 사료가 되고 실록이 보충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도정치기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만 보면 아주 먼 일도 아닌 게 고종 시기의 번역이 완료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순서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실록의 내용이 부실해서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중요한 시대의 것을 우선하여 번역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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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시대(1623~1649) 승정원일기 번역본. 중간에 두 차례의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사초와 사료를 많이 날려먹어 다른 시대에 비해 양이 적다. '''적은 게 저 만큼이다!'''
승정원일기 본문 전산화는 2015년에 마무리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1년부터 시작한 승정원일기 DB 구축을 완료했으며 2015년 12월까지 홈페이지 업데이트를 끝마쳤다. 방점이 없이 적힌 한문에 표점을 찍어서 문장 구별을 하는 작업을 위해 한학자, 역사학자 등 전문 인력이 연 130∼140명씩 투입됐다. 국편은 DB 작업을 마친 책부터 업데이트를 해왔고, 철종과 고종대 일부가 포함된 남은 책도 2015년 내에 모두 업데이트했다. 승정원일기가 워낙 방대한 역사물이어서 이 정도 규모의 사료를 DB화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 승정원일기
물론 이건 원문이 다 데이터베이스화 되었다는 소리지 국문화까진 아직 먼 얘기, 승정원일기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진행 중이며 위에서도 나왔듯이 '''수십 년이 더 걸릴 것'''으로 추정한다. 고종, 인조, 순종 시기 승정원일기 번역을 끝냈으며 지금은 영조시기 승정원일기를 번역 중이다. 해석본은 한국고전종합DB라는 곳에서 볼 수 있다. 2017년 한국고전번역원의 ‘인공지능 기반 고전 문헌 자동 번역 시스템 구축 사업’이 이루어져 예상되는 번역 기간이 기존의 45년에서 18년으로 단축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2017년 7월 시스트란이 이 사업을 수주하였다. ##
바로 위에 언급된 시스트란에서 만든 AI의 성능이 꽤 좋은 듯하다. 성능 자체는 아직 전문번역가의 70% 수준이라 초벌번역을 하면 전문번역사가 검토해서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는 하는데, 초벌번역이라도 해주는 게 인력 절감에 엄청난 도움이 되는지 이 AI와 병행하면서 번역하면 '''2062년'''으로 예상하는 완역 시점을 30년은 앞당길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2018년도 국정감사에서는 전문인력 부족으로 인해 남북 공동번역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 바 있다.

6. 기록의 철저함


조선왕조실록이 사관들의 깐깐하고 철저한 기록으로 유명하지만, 승정원일기도 그에 못지 않다. 한 예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결정짓고 이후 사태 수습과 처리 방안등을 논의하기 위해 삼전도의 굴욕 전날 김류와 이홍주, 최명길을 호출했다. 이때 인조는 승지였던 이경직에게 "중요한 나라일이니 쓰지 마라." 명했는데 이경직은 "밀담이라 기록하지는 못했다."라며 엿들은 이야기를 전부 써두었다(...).

이른 아침에 김류, 이홍주, 최명길이 청대하였다. 주상이 침전(寢殿) 안으로 들어올 것을 명하여 밀담을 나누었는데, 승지와 사관은 문밖에 있었으므로 밀담을 기록하지 못하였다.[8]

상이 이경직에게 명하기를

'''"오늘 한 말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 사책에는 쓰지 말라."'''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눈앞의 위급한 일은 인보(印寶)와 가도(椵島)에 관한 일이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인보를 잠시 가지고 가서 말하기를, '엄한 위엄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가져오긴 했지만 조종(祖宗)에서 전해 온 구물(舊物)을 차마 하루아침에 마멸할 수가 없으니, 조묘(祖廟)에 보관해 두고 새로 새 인보를 받기를 원한다.'라고 한다면 저들도 혹 옳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백관들이 여울물을 건널 수 없으니, 오늘 가는 것은 반드시 배가 있어야 가능할 듯하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어제 이미 말했지만 오늘도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척화한 사람은 지금 이영달(李英達)을 시켜 보내되 저들과 수작하는 일이 반드시 처리되기를 기다렸다가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밀담이므로 기록하지 못하였다.'''

인조 15년(1637) 1월 29일. 청대한 김류 등이 입시하여 인보와 가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기록하지 말라 했는데도 기록한 것도 모자라 마지막 멘트까지 서술해둔 이경직의 태도가 압권. 이경직에게 인조가 직접 쓰지 말라고 했었으니,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무튼 밀담임 아무튼''' 정도라 하겠다. 물론 사책, 다시 말해 실록에 적지 말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경직이 왕의 말을 거역한 것은 엄밀히 따지면 아니긴 했다.[9] 실제로 이 내용은 실록에는 빠졌다.

7. 바깥고리



8. 국보 제303호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 왕명의 출납, 각종 행정 사무와 의례(儀禮) 등에 관해 기록한 일기이다. 『승정원일기』는 편년체로 기록하였으며, 1개월분의 일기를 1책으로 만들었는데 분량이 많은 경우에는 2책으로 나누어 장정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초기 세종대부터 작성되었으나 조선전기의 일기는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을 거치면서 소실되었고, 현재는 1623년(인조 1) 3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 288년간의 일기만 전해지고 있다. 조선후기에도 궁궐 화재로 인해 『승정원일기』가 소실된 경우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조보(朝報)』·『춘방일기(春坊日記)』·『일성록』 등을 참고하여 보완하였다.

『승정원일기』의 작성은 승정원의 정7품 관원인 주서(注書)가 담당하였다. 주서는 원래 2명이었다가 기록할 국정 업무가 늘어나면서 가주서(假注書) 1명이 추가되었고, 또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 관련 기록을 전담하는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명이 더 추가되었다. 그 결과 조선후기에는 2명의 주서와 2명의 가주서가 『승정원일기』의 작성을 담당했다.

일기 작성 과정은, 먼저 주서들은 국왕을 수행하면서 국정 운영 내용을 속기한 ‘초책(草冊)'을 작성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매일의 일기를 정리하였다. 정리된 일기는 승정원의 서리가 정서하였으며 1개월분의 일기가 모이면 책으로 묶어 승지(承旨)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승지가 이를 다시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음으로써 일기가 최종 완성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총 3,243책 중 서명이 ‘승정원일기’인 것이 3,045책이고 나머지 198책은 ‘승선원일기’, ‘궁내부일기’, ‘전비서감일기’, ‘비서원일기’, ‘후비서감일기’, ‘규장각일기’ 등으로 서명이 다르게 되어 있다. 이는 갑오개혁 이후 승정원의 명칭이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비서원’ 등으로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한 자료인 만큼 국왕의 동정과 관련된 내용들이 매우 자세하다. 특히 국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내용,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 등이 축약 없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서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조선후기사 연구에 있어 1차 사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01년 9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9.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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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련 문서




[1] 순수하게 '''글자 수로만''' 462.5메가. 650 MB짜리 CD 한 장을 2/3 이상 차지한다. 한글 한 글자가 고작 3바이트(UTF-8 기준)임을 감안하면...[2] 승정원일기와 비교할 만한 1차 사료 중 사관들이 매일매일 기록한 사초는 실록이 편찬된 후 파기되었고(세초)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은 승정원일기에 비해 분량이 적다.[3] 현재 있는 궁이나 부서의 위치, 상참(常參 회의), 경연(經筵) 참석상황 등을 기록했다.[4] 이 사건은 2014년 개봉한 영화 역린의 모티브가 되었다.[5] 승지는 정3품 주서는 정7품[6]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1책=1권이 된다.[7] 약 290년 정도의 기록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번역 분량이 장난 아닌데 1994년부터 계속 번역 중이지만 완료 예정 연도는 2064년. 다시 말하지만, 소실된 200년 정도의 분량은 제외한 거다. 만약 한 권도 소실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었으면 거의 두 세기에 걸친 대 프로젝트였을 것. [8]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자이고, 승지는 승정원의 정3품을 이르는데, 현대식으로 보면 비서라고 보면 된다. 기록자 이경직은 주서로 승정원의 정7품이었다.[9] 승정원일기는 내용의 방대함 때문에 현대에는 역사 연구를 위한 주요 사료로 활용되긴 하나 엄밀히 따지면 당시에는 그저 '공문서'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다. '국가가 편찬한 사서'는 아니기 때문에 '사책(史冊)'에는 포함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