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나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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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志賀 直哉(しが なおや
'''생몰'''
1883~1971
1. 개요
2. 생애
3. 주요 작품
4. 평가
5. 그 외


1. 개요


일본소설가. 시라카바파(白樺派)[1]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자신의 신변 체험을 써내려가는 사소설(私小說)과 심경소설에 능하였으며, 간결한 문체와 필치로 당대에 명성이 드높아 '소설의 신(小説の神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2. 생애


1883년 2월 20일 미야기현 오시카군 이시노마키마치[2]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 때 도쿄로 이주한 이후 가쿠슈인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를 거쳐 도쿄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이후 국문학과로 전향하였다가 대학을 중퇴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와의 불화로 고뇌하였는데, 그 발단이 된 사건이 바로 1901년 일어났던 아시오 광독 사건이었다. 시가는 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보려 했으나 시가의 아버지는 이 광산에 시가의 할아버지가 관계되어 있다고 하여 이를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또 1907년 시가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신분의 차이 때문에 온 집안 사람들이 반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가의 아버지는 시가 몰래 하녀를 강제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강경조치까지 취하면서 시가는 아버지와 심하게 대립하게 된다. 거기에 시가가 소설가를 지망하는 것까지 불만족스럽게 여긴 아버지에 대해 시가는 극도의 증오를 품게 되면서 부자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10년 이후 같이 시라카바파로 꼽히게 되는 무샤노코지 사네아츠(武者小路実篤), 사토미 톤(里見弴), 아리시마 타케오(有島武郎)[3] 등과 함께 '시라카바(白樺)'를 창간하고 창간호에『아바시리까지(網走まで)』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 해에 징병검사를 받고 입영하지만 중이염으로 인해 8일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된다.
이후 시가는 『오츠 쥰키치(大津順吉)』, 『정의파(正義派)』등의 소설을 발표하고 원고료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려 했으나, 그가 소설가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와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집을 나오게 되었고, 도쿄를 떠나 히로시마현의 오노미치(尾道)시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계속했으나 잘 풀리지 못했으며, 특히 스모 구경을 하고 귀가하던 길에 전차(電車)에 부딪혀 큰 부상을 입고 온천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쓰인『키노사키에서(城の崎にて)』라는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다. 1914년 무샤노코지 사네아츠의 사촌 카데노코지 사다코와 결혼하게 되지만 이 또한 이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고[4], 결국 결혼 후 시가 부자의 호적관계는 폐적 처리된다.[5]
시가 부부는 교토로 이주하였으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부족함을 몰랐던 시가는 생활력이 전무한 수준이었고, 따라서 시가 부부는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장녀 케이코가 태어나지만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돌연사하고 만다. 이때 시가의 아버지는 시가 가문의 묘지에 딸을 묻으려던 시가의 부탁을 거부하면서 또다시 시가와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1917년 시가의 부인이 다시 임신하여 딸 루메코를 낳은 뒤 시가와 시가의 아버지는 마침내 화해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和解(화해)』라는 소설로 표현되었다.
아버지와의 화해 이후 시가는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어린 점원의 신(小僧の神様)』등 그에게 명성을 안겨다준 단편 작품들을 계속해서 발표하였으며, 특히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인 『암야행로(暗夜行路)』에서 그의 문학적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진 이후인 1949년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이후에는 주로 소설보다는 수필을 많이 썼다. 1971년 폐렴으로 입원하였고, 10월 21일 만 8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본인의 생전 희망에 따라 무종교식으로 치러졌으며 유골은 유명 도예가 하마다 쇼지가 만든 유골함[6]에 봉안되어 아오야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 유골함이 1980년 도난당하는 사건이 생겼고, 그 이후로 시가의 유골은 지금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7]

3. 주요 작품


  • 『어느 아침(或る朝)』(1908)[8]
  • 『아바시리까지(網走まで)』(1910) - 시가 나오야의 공식적인 데뷔작.
  • 『세이베와 표주박(清兵衛と瓢箪)』(1913)[9]
  • 『키노사키에서(城の崎にて)』(1917)
  • 『아라기누(荒絹)』(1917)
  • 『아카니시 카키타(赤西蠣太)』(1917) - 센다이번에서 일어난 '다테 소동[10]'을 소재로 한 시가 나오야 유일의 역사소설.
  • 『화해(和解)』(1917)
  • 『유행감모(流行感冒)』(1919) - 이 당시 악명 높았던 스페인 독감을 소재로 한 단편.[11]
  • 『어린 점원의 신(小僧の神様)』(1920)
  • 『암야행로(暗夜行路)』(1937) - 시가 나오야 유일의 장편 소설. 초안은 '토키토 켄사쿠(時任謙作)'라는 제목이었으나 후에 작중의 설정 자체를 아예 갈아 엎어서 새로 쓴 작품이다.[12]
  • 『잿빛 달(灰色の月)』(1946)

4. 평가


시가 나오야는 당대에 이미 '소설의 신(小説の神様)'[13]으로 불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의 소설은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자연스럽게 자신의 심경을 묘사하는 사소설에 특히 뛰어났으며 사소설 최고의 작가로 꼽힌다. 그렇기 때문에 단편소설에서 특히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시가 나오야의 소설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창작상의 이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처럼 당대의 소설가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시가 나오야는 거의 숭배의 대상이었는데, 이런 일을 다자이 오사무는 매우 혐오하여 그의 작품『츠가루(津軽)』속에서 작중 화자의 이름을 빌려 시가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대놓고 시가를 디스해버린다. 당연히 이를 읽은 시가는 격노하였고, 직후 시가는 잡지사의 좌담회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극렬 비난하였으며, 이후에도 다자이 오사무와 시가 나오야는 계속해서 상호 비방을 계속하였다.
다자이와 같은 사조인 사카구치 안고도 시가의 소설을 사상도 별로고 희작성(다른 말로 하면 재미)도 없으면서 태도만 진지한 소설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군대와 전쟁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싱가폴 함락(シンガポール陥落)」등 전쟁을 찬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이런 점이 비판받는다. 다자이 오사무는 당연히 시가 나오야를 공격하는 데 이 떡밥을 써먹었고, 실제로 까여도 싸다(...). 하지만 적어도 적극적인 태도로 협력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고, 다른 시라카바파의 동료 문학가인 무샤노코지 사네아츠가 적극적으로 전시체제에 찬동하여 활동했던[14] 것에 비하면 상당히 소극적인 활동이었다는 참작 사유는 있다. 당시 일본이 미쳐 돌아가던 상황 속에서는 전쟁에 전혀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이다.

5. 그 외


시가 나오야는 패전 직후였던 1946년,「국어 문제(國語問題)」라는 글을 통해 프랑스어 공용화론을 주장한 일이 있다.
나는 60년 전, 모리 아리노리[15]영어를 국어로 채용하려고 했던 일을 이 전쟁 중 때때로 떠올렸다. 만약 그것이 실현되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일본의 문화가 지금보다 월등히 진보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과 같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학업도 보다 쉽게 진전되어 있었을 것이며, 학교 생활도 보다 즐겁게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우리들은 척관법을 모르는 아이들처럼, 낡은 국어를 모른 채 외국어라는 의식 없이 영어를 말하고, 영문을 썼을 것이다. 영어 사전에 없는 일본의 독특한 말도 잔뜩 생겨났을 것이며, 만요슈겐지모노가타리도 그 말에 의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을 것이라는 것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중략)
거기서 나는 이 경우 일본은 큰 맘을 먹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언어,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가져와 그대로 국어로 채용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한 언어로는 프랑스어가 가장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60년 전 모리 아리노리가 생각했던 일[16]을 지금이야말로 실현한다면 어떨까. 철저하지 못한 개혁보다도 이것은 옳은 일이다. 모리 아리노리의 시대에는 실현은 곤란했다지만, 지금이라면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반대 의견도 여러가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국어를 완전한 것으로 고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이상 바랄 나위가 없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우리들의 감정을 버리고, 100년에 100년 후의 자손을 위하여 결심할 때라고 생각한다.
외국어에 어두운 나는 프랑스어 채용에 자신을 가질 정도로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어를 생각한 것은 프랑스는 문화가 진보한 나라이며, 소설을 읽어봐도 무언가 일본인과 통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며, 프랑스의 시에는 와카, 하이쿠 등의 경지와 공통되는 면이 있다고 언급되고 있으며, 문인들에 의해 때때로 정리된 언어라고도 하며, 그러한 의미로 프랑스어가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채용설에서 그 일을 생각하여, 어중간한 개혁으로 몇 년, 몇 십년 동안 불완전한 국어로 잘못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확실하며, 철저한 것이며,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어의 전환에 대해서 기술적인 면의 일은 내게는 잘 모르는 일이나, 그렇게 곤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교원의 양성이 완료된 때에 소학교 1학년부터, 프랑스어로 전환한다면 좋다고 본다. 조선어를 일본어로 전환했을 때는 어땠을까.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 공용화론이 이미 60여년 전 엄청난 비판을 받고 버로우했고[17], 시가 나오야 자신이 프랑스어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막연하게 프랑스어를 받아들이자고 한 이 주장은 당연히 엄청나게 비판받았으며, 시가 나오야를 비판할 때 종종 언급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한창 자전거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어디를 가든 항상 타고 다녔고, 윌리 주행이 가능하도록 자전거(정확히는 자전거의 기어)를 개조한 일도 있었다. 한번은 공도 레이싱 도전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 개조된 자전거로는 아무리 해도 자기에게 승산이 없었던지라 택한 방법이 '''상대방에게 자전거째로 태클을 걸어서 자빠뜨리고 튀기'''(...).[18] 만년에도 젊은 지인에게 자랑할 심산으로 거꾸로 앉아서 탈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실제로 이걸 시전해 보였는데, 언덕길을 후진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걱정하는 지인에게 괜찮다며 여유롭게 손을 흔들다가 '''그대로 논바닥으로 다이빙'''을 한 일도 있었다고(...).
대학생 시절에는 무샤노코지 사네아츠와 함께 최면 실험을 보러 갔다가 사네아츠가 갑자기 뇌빈혈을 일으켜 쓰러진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사네아츠가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문이나 창문조차도 제대로 열지 못할 정도로 허둥댔었다고. 또한 만년에는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느닷없이 문 상방에 거꾸로 매달리더니 "박쥐다"라고 말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예술과 사상은 양립할 수 없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특정 사상이 문학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해서는 '주인을 섬기는 문학'[19]이라고 표현하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20]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작가들 중 시가가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게 가공선(蟹工船)'으로 유명한 코바야시 타키지였다.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고[21] 코바야시의 초기 작품들도 상당히 많이 읽고 그에 대한 비평을 해주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만났던 것은 1931년에 코바야시가 나라의 자택을 방문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22]이었다. 비록 프롤레타리아 문학 자체는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시가는 인간적인 면에서 코바야시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 자칫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을 시가의 비평[23]에 대해서도 반박이나 비판 없이 겸허하게 수용하는 모습이나, 편지에서 자신의 소설에 대해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언급했던 점 등에서 작가로서 노력하는 성실한 모습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24] 또한 작가로서의 모습이나 작품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순박하고 붙임성 좋은 성품을 보고 상당히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이 당시에 대해 시가는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는 실로 느긋하게 이야기를 했다. 취미가 전혀 없고 장기도 마작도 할 줄 모른다기에, 할 수 없이 아야메가이케의 유원지[25]

에 놀러 갔다. 나는 그 때 아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벚꽃이 피어 있었다.[26] 벚꽃 아래 울타리에 기댄 채, 코바야시 군은 뭔가 활발하게 아이와 놀아주기도 하고, 내게 말을 건네기도 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때 험한 일(고문)을 당한 이야기를 하기에 우리 아이는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모르지만 아들이 더 크면 이제 코바야시 군은 자주 못 오게 해야겠다고 농담을 했더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뭘요, 아드님이 크면 그 때는 더 자주 와서 온 집안에서 마구 뛰어놀 거니까요'라고 응수했다.

여기에 왔을 때도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면서 조금도 자기가 먼저 변명을 한다거나 비판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을 대부분 긍정하고 있었다. 그 긍정이 나의 입장에서의 긍정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훌륭한 인품이라고 생각했고 완전히 어른이 다 됐다고 느꼈기에, 그때까지 갖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작가라는 이들에 대한 생각을 바꿔 준 사람이었다.

원래 프롤레타리아주의를 비롯해 각종 사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가였지만, 사상 문제를 떠나서 코바야시의 예술에 대한 태도와 성실한 모습은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한번은 시가를 사사한 소설가 중 한 명인 오자키 카즈오가 도쿄에서 방탕한 생활과 여자 문제로 고민하다 시가가 살고 있던 나라에서 한동안 머문 적이 있었는데[27], 이 무렵 오자키를 만난 시가는 코바야시가 평소 느긋하게 앉아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전차 안에서 틈틈이 글을 썼다는 이야기와 함께 코바야시를 본받으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 오자키 카즈오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온갖 '주의'라는 것들을 싫어하는 선생님(시가)이 코바야시 타키지에게 호의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은 언뜻 모순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다. 그 당시로부터 몇 년 전, 무명 시절의 코바야시가 『창작월간』에 쓴 단편을 읽어보고 '이 사내는 시가 나오야의 소설을 제대로 배웠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선생님이 먼저 코바야시의 예술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인정하신 것이라고 깨달았기에,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바야시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후에 코바야시가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사망했을 때는 일기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코바야시 타키지가 2월 20일(내 생일)에 체포되어 경관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실로 마음이 편치 못하다. 비록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코바야시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고 그가 마음에 들었건만, 암담한 심경이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개인의 일기나 편지조차도 모조리 검열 대상이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런 일기를 쓰고도 시가가 무사했던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집필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다 상담을 청했을 때 '그러면 한 몇 년 동안 작정하고 아예 집필을 쉬어보라'고 권했지만 시가의 이 말을 들은 아쿠타가와는 오히려 더 실의에 빠져버렸고 그대로 상담이 끝난 일이 있었다. 무리도 아닌 것이, 시가는 유복한 집안이라는 배경이 있었지만 아쿠타가와의 경우는 그가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기에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가 없었기 때문. 이 일화도 시가를 비판할 때 간혹 언급되기는 하지만, 소위 '인텔리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시가로서는 타인의 곤궁한 생활 같은 것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그렇다보니 의도치 않게 아쿠타가와에게 상처를 주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일종의 방랑벽이 있었는지 생전에 이사를 무려 '''23번'''이나 다녔다고 한다. 만년에 지냈던 도쿄 토키와마츠 정과 1920년대 중후반에 살았던 나라현 정도를 제외하면 한 곳에 머물렀던 기간이 5년을 넘는 시기가 손에 꼽을 정도.
작가로서는 드물게 운동신경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학생 시절에는 자전거 외에도 각종 스포츠를 즐겼는데, 학교 체육시간에 세운 장대높이뛰기 기록이 무려 3m 17cm였다고. 참고로 당시 세계기록이 4m였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나[28]의 이름 앞글자에 영감을 주었다

[1] 1910년 창간된 문예동인지 '시라카바(白樺)'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동인에 참가한 작가들은 주로 인간주의, 이상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주로 당시 일본 사회의 상류층의 자제가 많았는데, 때문에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상류층 도련님들의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2] 現 이시노마키시[3] 이들 중 아리시마 타케오와 사토미 톤은 친형제간이며, 사토미 톤은 암야행로의 작중 등장인물인 '사카구치'의 모델이기도 하다.[4] 사다코가 학교를 중퇴한데다(화족 가문의 딸들이 다니는 여학교에 다니다 중퇴) 초혼이 아닌 재혼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한 것이다.[5] 정확히는 사다코와 결혼한 다음 해에 시가가 스스로 아버지의 호적에서 폐적한 뒤 자신의 시가 가문을 새로 창설한 것.[6] 시가가 생전에 미리 하마다에게 의뢰해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7] 일설에는 유골함 도난 사건 당시 묘 주위에 흩어져 있던 유골을 관계자들이 실수로 치워버리는(!) 바람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도 한다.[8] 시가 나오야의 데뷔작은『아바시리까지(網走まで)』이지만, 그가 처음 쓴 작품으로 든 것은 이것이었다. 더 이전에 쓴 소설로는『유채꽃과 소녀(菜花と小娘)』(1904) 라는 습작이 있다.[9] 드라마로 제작된 적이 있었으나 원작의 내용에 지나치게 살을 붙이는 바람에 졸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원작자인 시가도 처음에는 기대했지만 막상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는 두통이 생겨 앓아 눕기까지 했다고(...).[10] 센다이번 3대 번주 다테 츠나무네의 방탕한 행실로 촉발된 다테 가문의 내분 사건.[11] 작중의 양상이 2020년부터 전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 19 사태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일각에서 재조명되고 있다.[12] 당초 이 작품에서는 시가의 초기 단편소설 '오츠 준키치'처럼 부자간의 갈등을 소재로 다룰 예정이었으나 부친과 화해한 이후 이 소재가 무의미해졌다고 판단한 시가는 주인공의 설정과 소설의 내용 자체를 아예 갈아 엎고 제목도 '암야행로'로 고치게 된다. 참고로 토키토 켄사쿠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조부와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켄사쿠의 아버지가 유학으로 집을 비운 틈을 타 조부가 모친에게 손을 대서 관계를 가졌다) 자식이라는 설정. 작중에서 켄사쿠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형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된다.[13] 그의 작품인 『어린 점원의 신(小僧の神様)』을 한자음 그대로 번역하면 '소승의 신'인데, 여기에 빗대어 지어진 별명이다.[14] 무샤노코지의 경우 러일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반전주의자였으나, 유럽 여행 중에 겪은 황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경험을 계기로 전쟁 찬동자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한다.[15] 메이지 유신 이후 초대 문부대신.[16] 영어공용화[17] 그냥 비판 정도가 아니라 영어 공용화론에 반발한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아예 모리 아리노리를 찾아가 칼로 찔러 죽여 버렸다. 이 사건 이후로 일본에서 한동안 영어 공용화론은 자취를 감췄다.[18] 당시 상대는 2명이었는데, 둘 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기 때문에 싸움이라도 나면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시비가 붙기 전에 냅다 튀었다고 한다(...).[19] 프롤레타리아 문학 전반에 강하게 나타나는 특유의 당파성과 사상성을 말한다. 애초에 프롤레타리아 작가들 상당수가 공산당과 깊게 연관된 만큼, 사조 전반에 사상적인 색채가 짙게 드러나는 것이 당연했다.[20] 이에 대해서는 당시 노동운동가와 학자들이 시가를 찾아와 프롤레타리아주의를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들에게 질려버린 것이 원인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21] 코바야시는 학생 시절부터 시가의 소설에 심취했고 편지도 자주 보내곤 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편지를 많이 보냈던 것을 기억한다는 시가의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고.[22] 코바야시는 2년 후인 1933년에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다.[23] 단순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코바야시의 문학을 부정하는 뜻에 가까웠다.[24] 코바야시에게 보낸 편지에는 게 가공선과 '오르그', '1928년 3월 15일'의 세 작품에 대한 비평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에서 시가는 작품의 사실적인 묘사를 높게 평가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어떤 사상을 가지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문학이 결코 사상의 선전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작가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예술가여야 한다는 취지의 당부를 담고 있다.[25] 1926년 오사카 전기궤도(현재의 킨키 일본 철도의 전신에 해당)가 설립한 유원지. 2004년 6월 6일에 폐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26] 실제로 코바야시가 시가를 방문한 시기는 1931년 11월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시가의 기억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27] 오자키는 여기서도 소설을 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빈둥빈둥 놀고만 있었다고 한다.[28] 시가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