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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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년 6월 21일 ~ 1840년 5월 2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인도공략이라는 허망한 꿈을 박살낸 아크레 전투의 주역. 영국 로얄 네이비의 괴짜 제독으로 유명하다.
근위보병대의 대위, 존 스미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톤브릿지 스쿨을 나와 1777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13살부터 군함에 탔으며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의 프리깃함 USS 랠리(USS Raleigh)와 전투를 치루는 등 경험을 쌓고 19살에 함장이 되는 등 빠르게 출세하였다. 그러나 이후 몇 년간은 전쟁 시기가 아니라 예비역 장교들이 받는 하프페이를 받으며 지내는데 이 기간에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코로 여행을 다녔다.[1]
1790년, 대(對) 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시드니 스미스는 구스타프 3세를 찾아갔는데 구스타프 3세는 그에게 해군 장교직을 주고 자국의 해군 고문으로 삼았다.
그 해 7월, 핀란드의 스펜스쿠즌트에서 해전(Battle of Svensksund)이 발발, 러시아 함대에게 대승을 거두었는데 러시아 함대는 135척의 군함 중 64척이 격침되거나 파괴되었고 적어도 7천~9천명이 죽었으나 스웨덴 함대는 4척을 잃고 171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데 그쳤다.
이 승리에는 영국 해군 출신의 인물들의 공로가 컸다는 것을 안 구스타프 3세는 스미스에게 기사의 작위를 내렸고 영국의 왕 조지 3세에게 허가를 받아 영국에서도 기사로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러시아 함대에는 그와 같은 처지의 예비역 장교들이 입대하였었고 이들 중 6명이 죽으면서 많은 영국 해군장교들의 반감을 받았고 그를 스웨덴의 기사라고 부르며 조롱하였다.[2]
귀국한 후에도 예비역으로 지내게 된 스미스는 1792년 그의 동생 존 스펜서 스미스가 영국의 오스만 투르크 대사관으로 임명되면서 이스탄불로 가게되어 그도 이스탄불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도 오스만의 해군에 지원하면서 술탄 셀림 3세의 호감을 산다.
1793년 혁명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영국에서 선원들을 모집, 사무엘 후드의 함대와 합류하면서 툴롱 항구를 포위하였다.
1793년 12월, 혁명 프랑스군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의 포격을 이기지 못한 영국군은 퇴각, 스미스에겐 항구의 군수창고와 남은 프랑스 군함들을 파괴하는 명이 내려졌고 이를 수행할 스페인군이 주어졌지만 이들은 그의 임무를 돕지 않았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하였다.
넬슨과 콜링우드는 이것을 빌미로 시드니 스미스를 비난하였다.
그래도 그의 공로를 인정한 해군성은 그에게 존 볼레이즈 워렌경(Sir John Borlase Warren) 휘하의 서부 프리깃 대대(Western Frigate Squadron)의 함인 HMS 다이아몬드호의 제독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1796년 4월, 프랑스의 항구에 선착되있는 배들을 탈취하러 갔다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탕플 감옥에 옥살이를 한다.[3]
그를 출소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당파와 영국의 인사들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 그를 탈옥시켜준 것이 펠리포(Antoine Le Picard de Phélippeaux)로 그들은 후에 아크레 전투(1799) 때 재회하게 된다.
'''“그 남자가 나의 운명을 놓치게 하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의 회고록에서.
1. 개요
1764년 6월 21일 ~ 1840년 5월 2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인도공략이라는 허망한 꿈을 박살낸 아크레 전투의 주역. 영국 로얄 네이비의 괴짜 제독으로 유명하다.
2. 생애
근위보병대의 대위, 존 스미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톤브릿지 스쿨을 나와 1777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13살부터 군함에 탔으며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의 프리깃함 USS 랠리(USS Raleigh)와 전투를 치루는 등 경험을 쌓고 19살에 함장이 되는 등 빠르게 출세하였다. 그러나 이후 몇 년간은 전쟁 시기가 아니라 예비역 장교들이 받는 하프페이를 받으며 지내는데 이 기간에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코로 여행을 다녔다.[1]
1790년, 대(對) 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시드니 스미스는 구스타프 3세를 찾아갔는데 구스타프 3세는 그에게 해군 장교직을 주고 자국의 해군 고문으로 삼았다.
그 해 7월, 핀란드의 스펜스쿠즌트에서 해전(Battle of Svensksund)이 발발, 러시아 함대에게 대승을 거두었는데 러시아 함대는 135척의 군함 중 64척이 격침되거나 파괴되었고 적어도 7천~9천명이 죽었으나 스웨덴 함대는 4척을 잃고 171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데 그쳤다.
이 승리에는 영국 해군 출신의 인물들의 공로가 컸다는 것을 안 구스타프 3세는 스미스에게 기사의 작위를 내렸고 영국의 왕 조지 3세에게 허가를 받아 영국에서도 기사로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러시아 함대에는 그와 같은 처지의 예비역 장교들이 입대하였었고 이들 중 6명이 죽으면서 많은 영국 해군장교들의 반감을 받았고 그를 스웨덴의 기사라고 부르며 조롱하였다.[2]
귀국한 후에도 예비역으로 지내게 된 스미스는 1792년 그의 동생 존 스펜서 스미스가 영국의 오스만 투르크 대사관으로 임명되면서 이스탄불로 가게되어 그도 이스탄불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도 오스만의 해군에 지원하면서 술탄 셀림 3세의 호감을 산다.
1793년 혁명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영국에서 선원들을 모집, 사무엘 후드의 함대와 합류하면서 툴롱 항구를 포위하였다.
1793년 12월, 혁명 프랑스군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의 포격을 이기지 못한 영국군은 퇴각, 스미스에겐 항구의 군수창고와 남은 프랑스 군함들을 파괴하는 명이 내려졌고 이를 수행할 스페인군이 주어졌지만 이들은 그의 임무를 돕지 않았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하였다.
넬슨과 콜링우드는 이것을 빌미로 시드니 스미스를 비난하였다.
그래도 그의 공로를 인정한 해군성은 그에게 존 볼레이즈 워렌경(Sir John Borlase Warren) 휘하의 서부 프리깃 대대(Western Frigate Squadron)의 함인 HMS 다이아몬드호의 제독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1796년 4월, 프랑스의 항구에 선착되있는 배들을 탈취하러 갔다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탕플 감옥에 옥살이를 한다.[3]
그를 출소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당파와 영국의 인사들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 그를 탈옥시켜준 것이 펠리포(Antoine Le Picard de Phélippeaux)로 그들은 후에 아크레 전투(1799) 때 재회하게 된다.
[1] 이 세 나라는 모두 자국과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인 국가였으며 프랑스 여행 때 새로 건설하던 해군 항구인 셰르부르옥트빌을 다녀온 것을 보아 단순히 즐기는 여행만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2] 대국인 러시아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까 걱정한 해군성은 스미스의 스웨덴 해군의 입대를 만류하였으나 이를 무시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3] 당시 장교들은 포로가 되어도 정중한 대접을 해주었지만 프랑스는 그가 1793년 툴롱 포위전 당시 현역 장교가 아니었음을 알고 기록해두었고 이가 반영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