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무/배경
1. 장문 배경 #
"고독, 죽음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 뼛속까지 사무치는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살아가는 아무무. 평생을 오로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를 찾아 헤매는, 고대 슈리마 제국의 가엾은 영혼이다. 끔찍한 저주를 받은 아무무는 영원히 혼자인 채로 남겨졌다. 그 저주란 지독하리만큼 잔인한 것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아무무와의 신체적 접촉은 죽음을 의미했고 정서적 교류는 파멸을 불러왔다. 그의 운명을 아는 한 누구도 그를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다. 간혹 아무무를 봤다는 이들은 그를 두고 ‘살아있는 시체’라고 표현했다. 푸르스름한 붕대로 전신을 감고 있는 작은 체구의 그 존재는 마치 미라와 같다고도 했다. 아무무에 관한 이야기는 수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 오면서 갖가지 신화나 설화, 그리고 구전동화 등 여러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분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유달리 강한 정신력을 지닌 슈리마 제국의 백성들. 이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말에는 별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를테면 아침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 온다든가 초승달의 배가 볼록하면 불길한 징조라는 것, 또 땅속 깊이 묻힌 보물은 가장 무거운 바위틈에 있다는 등의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아무무에 관해 내려오는 이야기만큼은 다르다. 사람들마다 그에 대해 믿는 내용이 아주 명확하게 갈린다. 아무무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 이것은 곧 아무무가 슈리마 제국의 제1대 황태자라는 설이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하게만 살아오던 아무무. 그러나 황족 전체가 살이 급격히 썩어 들어가는 끔찍한 병에 걸리자 그의 운명도 송두리째 바뀌고 만다. 황제의 막내아들 아무무는 자신의 방에 격리된 채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벽을 통해 그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하녀 한 명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말벗이 되어 주었다. 하녀는 외로운 황태자를 극진히 보살피며 이런 저런 얘기로 마음을 달래 주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는 신비한 주술 능력을 가진 그녀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이따금 등장하곤 했다. 어느 아침, 하녀는 아무무에게 비통한 소식을 전했다.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그의 형님마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자연스레 아무무가 슈리마의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이 애통한 상황을 오직 홀로 감당해내고 있던 아무무. 그가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던 하녀는 황태자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아무무는 하녀에게 툭 하고 스러지듯 어깨를 기대고는 팔을 둘렀다. 그런데 그 순간! 아무무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자신과의 접촉, 그것은 곧 하녀 역시 그의 가족과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결국 하녀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유일한 혈육을 잃은 그녀의 할머니는 원통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무에게 복수하듯, 그를 저주하며 주술을 부렸다. 할머니에게 아무무는 자신의 손녀를 죽인 원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주술의 효력이 시작되자 아무무는 고통의 덫에 갇혀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덫이었다. 아무무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 여기서도 그는 황태자로 등장하지만 그 내용은 많이 다르다. 두 번째 전설 속 아무무는 무례하고 포악하며 극도의 허영심으로 가득 찬 황태자로 등장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슈리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아무무는 자신이 태양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임을 확신하고 급기야 백성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무는 수 년 간 찾아 헤매던 유물을 발견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말로만 들어오던 고대의 조각상. 이름하여 ‘고통의 눈.’ 누구든지 담대하게 이 눈을 바라보는 자에겐 영생이 허락된다는, 매몰된 지하 도시에 묻혀 있던 고대 유적이었다. 이 보물을 찾아 헤매는 동안 그의 곁에는 항상 수많은 부하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지하 공동묘지의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도 큰 어려움 없이 헤쳐나갈 수 있었다. 험난한 여정 끝에 드디어 거대한 금빛 아치형 길에 다다른 아무무. 그는 대동한 석공들에게 굳게 닫힌 돌 문을 뚫도록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아무무가 필살의 각오로 조각상을 바라보던 순간, 부하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돌 문을 굳게 닫아 막아버렸다. 그를 안에 놔둔 채 말이다. 결국 어둠 속에서 수 년을 홀로 견딜 수밖에 없었던 아무무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자신의 온몸을 손톱으로 긁어 상처를 냈고, 이를 흉측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는 붕대를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고통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행한 죄악을 뉘우친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생의 축복은 아무무에게 양날의 검일 수 밖에 없었다. 곁에 아무도 두지 못한 채 평생토록 홀로 살아야 하는 저주의 그림자. 그것은 감내해야만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중 슈리마 제국에 참혹한 지진이 발생했다. 아무무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웠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진의 여파로 아무무가 갇혀 있던 지하무덤의 돌 문이 완전히 열려버리는 바람에 그는 바깥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대체 얼마의 시간을 깜깜한 지하에서 보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오직 모든 것을 무덤에 갇히기 전의 본래 상태로 돌리고만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 속 아무무가 황태자로 등장하는 반면 세 번째 전설 속 아무무는 슈리마 제국의 요들족 족장으로 전해진다. 이야기 속 아무무는 사람은 본래 착한 심성을 타고난다는 성선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 같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는 진실한 친구 한 명을 만들기 전까지는 거지로 분하여 생활하겠노라 맹세했다. 이토록 자신 있게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도움의 손길을 뻗으면 누구든지 기꺼이 손 내밀어 주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요들족 마을을 지나쳐갔지만 누구 하나 아무무의 손을 잡아주는 이는 없었다.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던 그는 결국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하지만 죽음의 고리는 결코 아무무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수많은 요들족 생명들이 성선설을 증명해 줄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며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줄 그 누구도 찾지 못한 채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살펴본 아무무에 관한 세 가지 설은 비록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아주 흡사하다. 그것은 곧 철저하게 홀로 고립되어 살아가야 하는 운명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평생토록 인생의 동반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무무의 숙명. 아무무는 그 존재 자체가 저주이며 그의 손길은 곧 죽음의 씨앗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은 불씨조차 허락되지 않은 긴긴 겨울 밤, 슬픔을 나눌 단 한 명의 벗조차 허락되지 않는 자신의 운명을 개탄하며 구슬프게 눈물짓는 슬픈 미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아무무가 찾아 헤매는 것이 가족이든, 잃어버린 시간이든, 인간의 선한 마음이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것도 아무무가 아직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
1.1. 탐욕과 눈물 #
“신들이 화가 나서 땅을 흔들었어. 그래서 땅에 금이 갔는데...” 늙은 칼둔이 이야기했다. 절벽 표면처럼 거친 그의 얼굴에 모닥불의 빛이 어른어른 비쳤다. “한 젊은 남자가 그 금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가, 어떤 무덤의 입구를 발견한 게야. 그게 언제부터 그 땅 속에 파묻혀 있었을까? 아무도 모르지. 아무튼 까마득히 오랫동안 거기서 잠들어 있었던 무덤이야. 그걸 보니까 남자는 혹하지 않을 수 없었어. 집에 먹여 살려야 할 아내랑 어린 자식들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무덤 안으로 과감히 들어가보기로 했단다.” 늙은 이야기꾼의 주위에 둘러 앉은 사람들이 더 바싹 모여들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칼둔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오늘 그들은 슈리마의 무자비한 뙤약볕에 시달리며 먼 길을 여행했기에 모두 녹초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칼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그들은 싸늘한 밤 공기를 막기 위해 망토를 단단히 여미고 몸을 옹송그렸다. “무덤 안은 어두웠지만 시원했어. 남자는 바깥의 땡볕에서 벗어나니까 좀 살 것 같았지. 등불을 켜니 주위가 좀 밝아지고, 남자의 그림자가 발 앞에 어른거렸어. 남자는 등불을 들고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어. 아주 조심해야 했지.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 남자는 가난하긴 했지만, 그런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어.” “그런데 자세히 보니 벽 전체가 매끄러운 흑요석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 고대 문자랑 그림이 새겨져 있는 거야. 문자는 어차피 읽을 줄을 모르니까, 봐봤자 뭔 뜻인지 모르지. 남자는 배운 게 많지 않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거든. 그래서 그림만 살펴봤어.” “그 벽화에는 앳된 왕자가 그려져 있었어. 왕자는 태양 원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벙긋 웃고 있고, 하인 여러 명이 그 태양 원판을 받쳐 들고 있었지. 그리고 그 앞에 동전이랑 보물이 가득한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고,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절을 하는 거야. 아마 외국 사신들이 선물을 바치는 걸 그려놓은 거겠지.” “그 옆에는 또 다른 그림이 있었는데, 그건 왕자가 백성들 앞에서 걷고 있는 그림이었어. 왕자는 여전히 웃고 있고, 백성들은 납작 엎드려서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왕자가 쓴 왕관에서는 햇빛이 뿜어져 나왔지. 햇빛이라고 해 봤자 여러 개의 선으로,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지만.” “그리고 이 그림들이 새겨진 벽 앞에는 작은 조각상이 하나 서 있었어. 그것도 황금으로 된 조각상. 그것 하나만 팔아치워도 남자가 천 년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보물이었지. 그래서 어떻게 했겠어? 냉큼 가방에 챙겨 넣었지.” “그것만으로 충분했어. 남자는 이제 얼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이 냄새를 맡고 찾아올 텐데, 그 전에 빠져나가는 게 신상에 이롭잖겠어? 도굴꾼들은 남자가 가진 보물을 빼앗기 위해서라면 그를 죽이는 짓쯤은 서슴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남자는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어. 무덤의 더 깊은 곳에 있을 보물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게 놔두고 말이야. 위대한 영웅들조차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바보가 되는 법인데, 다행히도 이 남자는 욕심이 별로 없는 성격이었던 게야.” “그런데 나가는 길에 또 다른 벽화 하나가 눈길을 끌었어. 먼젓번 그림들에서 봤던 왕자가 죽어서 상여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어.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지. 상여의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은 울고 있는데... 더 멀리 있는 사람들은 환호를 하고 있지 뭐겠어? 남자는 아리송해졌지. 그 왕자가 성군이었던 건지, 폭군이었던 건지 긴가민가하고...” “바로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왔어. 어둠속에서 희미한 목소리 같은 게... 남자는 오싹해져서 주위를 둘러봤어. 등불을 높이 쳐들고, 눈을 크게 뜨고.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어.” “‘거기 누구요!’라고 소리쳐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어. ‘어이구, 내가 미쳤나보다.’ 남자는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자신을 다그쳤어. 당연히 바람 소리였을 거다,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릴 리 없다, 하면서.” “그런데 그 소리가 또 나는 거야.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무슨 소리였게? 무덤 저 안쪽의 어둠 속에서 웬 남자애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 “여느 때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남자는 당연히 아이를 찾으러 가봤을 게야. 아버지로서의 본능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러겠어? 어두컴컴한 무덤 속에서? 남자는 당장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 “하지만 차마 도망을 못 치겠는 거야. 그 울음소리에 마음이 아렸거든. 웬 아이가 그리도 구슬프고 처연하게 우는지... 혹시 이 무덤에 또 다른 출입구가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애가 실수로 여기까지 내려왔다가 나가는 길을 못 찾아서 저러는 게 아닐까? 남자는 사뭇 걱정이 되었지.” “그래서 결국 등불을 높이 쳐들고 무덤 안쪽으로 슬금슬금 걸어 들어갔어. 그 동안에도 흐느끼는 소리는 계속해서 무덤의 벽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었어.” “이윽고 널찍한 방 하나가 나타났어. 새까만 바닥은 거울처럼 모든 게 선명히 비쳤고, 벽에 박힌 보석들과 황금 공예품들이 바닥에 반사돼서, 그야말로 온 사방이 반짝반짝 빛났지. 남자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어.” “그런데 남자는 화들짝 놀라 발을 뒤로 뺐어. 그 안에 발을 딛자마자 바닥에 파문이 일어나는 거야. 물결이 퍼지듯이 말이야! 그래, 물이었어. 사실 그 바닥은 거울 같은 흑요석이 아니라, 시커먼 수면이었던 게지.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어. 남자가 물을 손으로 떠서 살짝 맛을 보니, 글쎄, 물 맛이 짠 거야. 소금물이었단 말이야. 이 슈리마에, 바다에서 천 리그는 떨어진 이 사막 한가운데에, 소금물이라니!” “그때 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어. 이번에는 더 가까웠지. 남자가 등불을 더 멀리 뻗어서 방 안 저편의 어둠 속을 비춰보니, 맨 안쪽 벽 앞에 어떤 사람 형체가 어슴푸레 드러났어. 남자 쪽을 등지고 웅크려 앉아 있는 아이인 것 같았어.” “남자는 다시금 수면에 발을 디뎌봤어. 다행히 물은 별로 깊지 않았지. 그래서 남자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어. 어휴, 무섭기야 했지. 말도 못 하게 무서웠지. 목덜미에 털이 쭈뼛 서고,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고,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고... 그래도 꾹 참고,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걸어봤어.” ‘길을 잃었니? 어쩌다가 여기 들어온 거야?’ “아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대답은 했어. ‘기... 기억이 나지 않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오.’라고.” “그 목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치면서 남자를 휩싸는 것 같았어. 뭣보다, 소년의 말투가 희한하지? 그래, 그건 아주 고풍스러운 말투였어. 옛날 사람들이나 쓰던 말 있잖아. 그래도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 “‘울지 마라, 얘야. 이제 괜찮아.’ 남자는 그렇게 달래면서 더 가까이 다가갔어. 그런데 아이의 형상이 눈앞에 선명히 드러난 순간,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어!” “왜냐, 그게 사람이 아니라 그냥 조각상이었거든. 신의 모습을 표현한 오닉스 조각상 말이야. 남자는 엉뚱한 물건을 붙잡고 말을 걸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조그마한 손 하나가 남자의 손을 덥석!” 이 대목에 이르자 청중들 중에서 어린 아이들이 숨을 헉 들이켰고, 다른 아이들은 짐짓 무섭지 않은 척 깔깔 웃었다. 칼둔도 빙그레 웃었다. 그의 입 안에서 드러난 금니가 모닥불 불빛을 받아 번뜩거렸다.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이쿠,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조그마한 소년이 그의 손을 잡고 있지 뭐겠어. 아니, 소년의 시체라고 해야겠지. 옛날에 죽은 왕자의 시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게야! 부패 방지용 천으로 얼굴까지 꽁꽁 싸매어져 있고, 뻥 뚫린 눈구멍에서 으스스한 빛이 새어 나왔어.” “소년이 남자의 손을 잡고서 말했어. ‘내 친구가 되어주겠소?’ 천에 가로막힌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멀리 떨어진 듯 아득하게 들려왔지...” “남자는 펄쩍 뛰어 물러나면서 손을 뿌리쳤어. 그런데 손을 보니까 상태가 이상한 거야. 피부 색깔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쪼그라들고 있었거든. 소년의 손길이 죽음의 기운을 불러온 거지. 그 증상은 순식간에 손목을 타고 점점 번지면서 팔뚝까지 올라오고 있었어.” “그래 남자가 어떻게 했겠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지! 소년이 흘린 눈물이 가득히 고인 그 넓은 방 안에서, 남자는 정신없이 허겁지겁 뛰었어. 그러다가 아뿔싸, 등불을 물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불이 꺼지고 말았네. 그래도 완전히 깜깜하지만은 않았어. 저 앞의 출구 쪽에서 희미하게 햇빛이 비치는 게 보였거든. 남자는 그 빛만 바라보며 달리고 또 달렸어... 그 와중에도 죽음의 기운은 계속 번져나가면서 심장까지 좀먹고 있었지만.” “엄청 겁이 났지. 당장이라도 그 소년에게 덜미를 잡힐까봐 얼마나 오금이 저리던지. 출구로 달려가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어. 실제로는 몇 분 정도였겠지만... 그래도 결국 남자는 무사히 무덤에서 빠져나와, 뜨겁고 눈부신 햇볕이 내리쬐는 사막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그런데 무덤 입구에서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오더라고. ‘미안하오. 나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소.’라고...” “그래, 바로 그렇게 해서 아무무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아무무도 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거란다.” 칼둔이 말을 맺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녀석이 소리쳤다. “에이, 말도 안 돼! 아무무 같은 게 세상에 어딨어요!” 그러자 가장 어린 아이가 받아쳤다. “아무무는 진짜 있어! 지금도 친구를 찾으러 다니고 있단 말이야!”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진짜 있긴 있지. 그치만 아무무는 소년이 아니잖아요. 요들이죠!” 칼둔은 껄껄 웃고,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자, 늦었다. 이 할애비는 이만 자러 가야겠구나. 우리는 내일 또 먼 길을 가야 하잖니.” 사람들이 자리를 털고 하나 둘씩 일어섰다. 저마다 정겨운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을 지으면서. 그런데 한 아이만은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그 소녀는 칼둔을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할아버지, 한쪽 팔은 어쩌다가 잃으셨어요?” 늙은 칼둔은 자신의 어깨 밑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팔이 통째로 잘려나간 그 자리에는 텅 빈 소맷자락만 펄럭이고 있었다. 칼둔은 소녀에게 씩 웃어 보이고 윙크를 했다. “잘 자라, 얘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