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르/배경
출처
1. 단문 배경
불멸을 꿈꾸던 고대 슈리마의 거만한 황제, 아지르. 그의 오만은 생애 최전성기에 그를 배반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그 후 수천 년이 흘렀고, 아지르는 가공할 힘을 지닌 초월체로 다시 태어났다. 사막 아래 묻혀 있던 그의 도시가 지표면 위로 솟아 오르는 장관을 목도하며 아지르는 슈리마 제국의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고 다짐한다. |
2. 장문 배경 #
'''"룬테라의 찬란한 대제국, 슈리마. 그 영광을 기필코 되살리리라."''' 불멸을 꿈꾸던 고대 슈리마의 거만한 황제, 아지르. 그의 오만은 생애 최전성기에 그를 배반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그 후 수천 년이 흘렀고, 아지르는 가공할 힘을 지닌 초월체로 다시 태어났다. 사막 아래 묻혀 있던 그의 도시가 지표면 위로 솟아 오르는 장관을 목도하며 아지르는 슈리마 제국의 옛 영광을 되살리겠노라고 다짐한다. 수천년 전, 슈리마 제국은 초월체라 불리는 무적의 전사들의 휘하에 정복한 수많은 속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권력에 목마른 야심찬 황제의 통치 아래 슈리마는 당대 최대의 영토를 거느리고 있었다. 수도의 심장부에 세워진 사원 위에서는 거대한 태양 원판이 영롱한 빛을 내리쬐며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어 주었다. 슈리마의 천덕꾸러기 막내 황자 아지르는 옥좌에 오를 운명이 아니었다. 손위 형제가 많았기에 서열상 황제가 되긴 어려웠으며, 기껏해야 사제가 되거나 지방의 최고 관리로 보내질 공산이 컸다. 그는 초월한 영웅 레넥톤의 엄격한 지도 아래 무예를 닦기보다는 나서스 대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서책을 정독하기를 좋아하는 호리호리한 책벌레였다. 두루마리 문서와 책, 서판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의 미로 속에서 아지르는, 주인이 원하는 문서를 찾으러 매일같이 도서관에 드나드는 한 노예 소년을 만났다. 슈리마에서는 노예가 이름을 갖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노예 소년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아지르는 법을 어기고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은 제라스. ‘함께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아지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라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제라스를 자신의 전속 노예로 임명했다. 두 소년은 슈리마 제국의 지난 과거와 초월 영웅들의 오랜 업적을 속속들이 탐구하며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지르는 아버지와 형들, 레넥톤과 함께 연간 시찰을 떠났고, 어느 유명한 오아시스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아지르와 제라스는 그동안 대도서관에서 본 것과 같은 천체도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하고 별자리를 그리기 위해 한밤 중 침소를 몰래 빠져 나왔다. 두 소년이 별자리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황제의 반대세력이 보낸 자객단이 침소를 급습했다. 사막에 나와 있는 두 소년을 발견한 자객은 아지르의 목을 치려 했다. 자객이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제라스가 자객의 등 뒤로 몸을 던져 가까스로 공격을 막았다. 제라스는 자객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고, 그러는 동안 아지르는 품 속의 단검을 꺼내 자객을 처치했다. 죽은 자객을 뒤로 하고 아지르는 서둘러 오아시스로 돌아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자객단은 이미 전멸되어 있었다. 레넥톤이 황제를 구하고 적들을 모두 처치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아지르는 형들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끔찍한 사실을 확인했다. 아지르는 아버지에게 제라스의 용맹한 대처에 대해 소상히 고하고 포상을 청했지만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황제의 눈에 제라스는 별 볼 일 없는 미천한 노예일 뿐이었다. 그 날 아지르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제라스와 형제를 맺겠다고. 열다섯 살 난 아지르는 그렇게 하루 아침에 황세자가 되었고, 황제는 수도에 귀환하자마자 암살단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유혈 숙청을 감행했다. 조금이라도 반역이 의심되면 가차없이 처형되는 살벌한 정세가 지속되면서 슈리마는 불안과 살육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지르는 황세자가 되었지만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황제는 “네가 형들 대신 죽었어야 했다”며 노골적으로 그를 원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후는 새로운 후사를 볼 수 있을 만큼 아직 젊고 건강했다. 아지르는 오아시스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전투 실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무예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레넥톤의 가르침 아래 검술과 창술을 익히고, 군대를 지휘하고 전세를 읽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이 유일하게 신임하는 벗 제라스의 입지를 승격시키고 오른팔로 내세웠다. 그는 제라스에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습득하라고 지시했고, 제라스는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그를 자문해 주었다. 그렇게 수년이 흘러갔다. 황후는 유산을 거듭할 뿐, 새로운 후사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황후가 출산을 하지 못하는 이상 아지르의 목숨은 안전했다. 궁전 내에서는 황후가 저주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몇몇 궁인들은 아지르의 소행이라고 수근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지르는 결백을 주장했고, 공개적으로 음해를 일삼는 자들은 처형시키기도 했다. 오랜 노력 끝에 황후는 유산을 피하고 무사히 출산을 했다. 건강한 사내아이었다. 그 날 밤, 별안간 거센 폭풍이 몰아와 슈리마 전역을 집어 삼켰다. 황후의 처소는 무시무시한 벼락을 연달아 맞은 후 불이 붙었고, 황후와 아기는 그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같은 날, 황제도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황후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세간에 떠도는 소문은 달랐다. 궁전 바닥에서 발견된 황제와 근위병들의 주검이 까맣게 탄 해골과도 같았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들려왔다. 아지르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옥좌에 올랐다. 제국이 지도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되어서도 그는 제라스와 함께였다. 재위하고 십 년 동안 아지르는 제국의 영토를 넓혀 가며 엄중하면서도 공정한 정치를 펼쳤다. 노예 인권 개선을 위한 개혁에도 힘을 쏟았다. 아지르의 궁극적인 목표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진 관습을 뒤엎고 전국의 모든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 혼자만의 비밀 계획이었다. 제라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비밀을 지키려는 아지르와, 그의 의중을 알지 못하는 제라스에게 노예 문제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슈리마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세워졌고, 귀족 가문들은 강제 노역을 바탕으로 방대한 재산과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예제는 하룻밤에 없애 버리기엔 너무 뿌리가 깊은 제도였다. 계획이 공개되는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아지르는 제라스를 형제로 명하고 싶었지만 제국의 모든 노예가 해방되기 전까진 그럴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도 제라스는 변함 없이 아지르를 정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제국의 영토 확장을 도왔다. 아지르는 혼인을 하여 적출, 서출을 가릴 것 없이 많은 자손을 보았다. 이제 아지르는 슈리마를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제라스가 북돋워 준 꿈이었다. 제라스는 세계를 통치하려면 아지르가 불사신에 가까운 신적인 존재, 즉 초월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슈리마의 권세는 날로 높아져 갔고, 그 정점에서 아지르는 중대한 발표를 했다. “짐을 위한 초월 의식을 치르라. 이제 짐은 나서스와 레넥톤, 그리고 위대한 조상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초월 의식은 슈리마에 평생을 헌신하며 뛰어난 업적을 쌓은 위인들을 위해 그들의 생애 막바지에 치러지는 의식이었고 상당한 위험이 수반되었다. 게다가 초월 의식의 대상자를 결정하는 권한은 태양의 사제단에 있었다. 황제가 자기 자신을 직접 대상자로 정한 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다. 아지르의 콧대는 슈리마의 권세만큼이나 높아져 있었다. 그는 초월 의식의 준비를 강행시키며 반기를 드는 자는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겁박했다. 마침내 의식이 날이 밝았고, 아지르는 수천의 군사와 수만의 신하를 거느리며 초월의 제단으로 향했다. 레넥톤과 나서스는 자리를 비웠다. 위급한 문제가 생겨 제라스가 다른 곳으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르는 자신이 그린 장대한 운명으로부터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수도 심장부에 있는 사원 꼭대기의 거대한 태양 원판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제단이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제라스에게로 몸을 돌려 노예 신분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다. 제라스와 다른 모든 노예의 해방을… 놀란 제라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아지르는 아직 지켜야 할 약속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는 제라스를 품에 꼭 안고 영원한 형제로 명했다. 수년 전에 약속한 그대로… 사제단이 의식을 시작하고 태양의 경이로운 힘을 끌어 내리자 아지르는 몸을 돌렸다. 그는 제라스가 역사와 철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제라스는 어둠의 마법을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 자유에 대한 갈망은 암덩이처럼 자라나 불타는 증오가 되었다. 의식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 이제 막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제라스가 어둠의 힘을 발산했고 아지르는 그 자리에서 폭발해 버렸다. 룬 표식의 보호를 받지 못한 아지르가 태양의 불길에 타 사라져 버린 그 자리에 제라스가 섰다. 태양빛이 온몸을 힘으로 가득 채웠고, 제라스는 필멸의 육체가 변화하는 동안 천지가 울리도록 포효했다. 하지만 의식의 마법은 제라스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방향이 바뀐 천체 에너지는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초월 의식의 힘이 사방으로 폭발하여 슈리마 전역을 파괴하고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사막 모래가 솟아 오르며 도시를 집어 삼키는 동안 백성들은 불에 타 재가 되었고 우뚝 솟아 있던 궁전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늘에 떠 있던 태양 원판이 추락했고 수백년 역사의 제국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한 사람의 야망과 한 사람의 잘못된 증오 때문에… 남은 흔적이라고는 모래 속으로 가라 앉은 폐허와 밤바람에 메아리치는 백성들의 비명이 전부였다. 아지르는 이 모든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는 무(無)의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고통과 불길만을 마지막으로 기억했다. 사원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슈리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슈리마가 몰락하고 수천년이 지난 어느 날, 영겁의 무의식 속을 헤매던 아지르는 마지막 후손이 사원에서 흘린 피가 몸에 닿자 생명을 되찾았다. 아지르는 그렇게 부활했지만 온전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불굴의 의지가 실오라기처럼 남아 모랫덩이 같은 몸뚱이를 겨우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씩 육체의 형태를 갖추어 가며 슈리마의 잔해 사이에서 휘청이던 중, 아지르는 한 여인의 주검을 발견했다. 여인의 등엔 칼에 베인 치명적인 상처가 있었다. 모르는 여인이었지만 먼 혈족의 잔영이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제국과 권력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망각한 아지르는 슈리마의 딸인 여인을 들어 안고 그 옛날 ‘새벽의 오아시스’로 불리던 곳으로 향했다. 샘은 바짝 말라 있었지만 아지르가 한 걸음씩 발을 내딛자 청명한 물이 딱딱한 돌바닥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지르는 치유의 물이 차오른 오아시스에 여인의 몸을 담갔다. 피가 씻겨 내려가며 상처가 아물었고 마침내는 흐릿한 흉터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무아의 선행이 이루어졌고, 그와 동시에 아지르는 불기둥 속으로 떠올랐다. 슈리마의 마법이 되살아나 그를 그토록 원했던 초월체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불멸의 태양빛이 그에게로 쏟아져 매 형상의 갑옷으로 무장한 거대한 몸을 빚어내고 모래를 움직이는 힘을 부여했다. 아지르가 두 팔을 번쩍 들자 슈리마의 수도가 수백년 동안 쌓인 모래를 털어내고 사막 위로 올라왔다. 태양 원판이 다시 떠올랐고 황제의 명령으로 찬란하게 되살아난 사원들 사이로는 치유의 물줄기가 흘렀다. 아지르는 새로이 솟아 오른 태양의 사원의 계단을 오르며 사막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제국의 마지막 순간을 재현시키기 위해서였다. 모래로 만들어진 환영들이 오래 전 슈리마의 마지막 순간을 되살렸고, 아지르는 제라스의 배반이 눈 앞에 펼쳐졌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족이 죽어가고, 나라가 무너지고, 권력이 찬탈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에야 옛 친구이자 조력자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증오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 초월체로서의 힘과 예지력으로 아지르는 슈리마 밖의 세상 어딘가에 제라스가 살아있음을 감지했고, 함께 싸울 사막의 전사들을 소환했다. 황금빛 원판에서 활활 타오르는 태양 아래 아지르는 굳게 맹세했다. ‘내 땅과 내 것이었던 그 모두를 기필코 되찾으리!’ |
3. 일어선 자 #
아지르는 황금으로 포장된 황제의 길을 걸었다. 그의 조상들, 고대 슈리마의 지배자들이 거대한 조각상의 모습으로 그의 걸음을 내려다보았다. 해 뜨기 전의 부드러운 어스름이 도시를 적셔왔다. 가장 밝은 별들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해가 뜨면 곧 햇빛에 가려 사라질 것이었다. 밤하늘은 아지르의 기억과 달랐다. 별들의 배치가 뒤틀려 있었다. 수천 년이 흐른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 소리가 제국 수도의 텅 빈 거리에 외롭게 울려 퍼졌다. 아지르가 마지막으로 이 길을 걸었던 때엔, 만 명의 제국 근위병이 뒤를 따랐으며 군중들의 환호성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를 위한 영광의 순간이 되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영광은 도둑맞아 버렸다. 남은 것은 이 유령 도시뿐. 그의 백성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지르는 도도한 몸짓으로 명령을 내려 길가의 모래를 일으켜 세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과거를 보여주는 거울, 슈리마의 잔영에 부여된 형상이었다. 모래 인형들은 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리 밖 초월의 제단 위에 떠 있는 거대한 태양 원판을 향해 고개를 한껏 들어올린 채. 태양 원판은 아지르의 제국의 영광과 권세를 선언하는 듯 여전히 제 자리에 있었다. 다만, 원판을 바라보던 자들은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지르를 깨웠던 슈리마의 딸, 그의 핏줄을 이어받은 여자는 떠났다. 저 멀리 사막 어딘가에서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계속하여 황제의 길을 걷고 있자니, 모래로 형상화된 그의 백성들이 태양 원판을 가리키며 기쁨에 가득했던 얼굴들을 끔찍한 공포로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듯 입을 벌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서 달아나는 자, 걸려서 넘어지는 자... 아지르는 절망적인 침묵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그의 백성들의 마지막 순간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힘의 파동에 파괴되어 먼지처럼 흩어져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초월 의식에 어떤 문제가 생겨 이러한 대재앙을 초래했던 것일까? 아지르의 생각이 한 장소를 향했다. 걸음걸이가 좀더 단호해졌다. 초월의 계단에 다다른 그는 한 번에 다섯 단씩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신임하는 병사들, 사제들, 그리고 황족들만이 계단에 발을 올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신하들의 모습이 모래로 빚어져, 위를 쳐다보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람에 쓸려 사라져버렸다. 인간에겐 도저히 불가능한 속도로 아지르는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쇠 발톱이 석조물을 파고들어가 흠집을 냈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양 옆으로 모래 인형들이 솟아올랐고, 다시 파괴되었다. 드디어 꼭대기에 다다랐다. 마지막 목격자들의 자리였다. 가장 가까운 신하들, 조언자들, 고위 성직자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지르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눈앞에 가족들의 형상이 있었다. 가장 섬세한 부분까지 완벽히, 가슴이 찢어질 만큼 생생하게 떠올라 있었다. 아이를 가져 몸이 무거웠던 아내. 엄마 손을 꼭 잡고 선 수줍은 딸. 이제 막 남자가 되어가던 아들. 공포에 사로잡혀, 아지르는 가족들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지만,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딸은 아내의 치마폭에 얼굴을 감추었으며, 아들은 용감하게 소리지르며 칼자루에 손을 뻗었다. 아내의 크게 뜬 눈 속엔 슬픔과 절망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그들의 형상을 산산조각냈다. 참을 수 없는 광경이었으나 아지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초월한 존재가 된 그에게 슬픔에 젖는다는 간단한 행위는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무거운 가슴을 움켜쥐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혈통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질문이 남았다. 후손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에. 마지막 잔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지르는 제단 바로 아래까지 나아가 모래로 재연된 최후의 장면을 지켜보았다. 필멸자 시절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태양 원판 아래 공중에 떠올라 양 팔을 벌리고 등을 뒤로 젖힌 상태였다. 이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힘이 아지르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와 존재를 가득 적시고 천상의 힘으로 그를 채웠다. 또 하나의 형상이 떠올랐다. 아지르가 신뢰했던 종복, 그의 마법사... 제라스. 그의 벗이 들리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형상이 유리처럼 산산이 조각나 모래먼지로 흩어졌다. '''“제라스.”''' 아지르가 숨을 삼켰다. 배신자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지르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살인자의 얼굴이었다. 이러한 증오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지르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라스의 모래 형상이 공중으로 더 높이 떠올랐고, 태양 원판의 에너지가 그의 존재에 응축되었다. 제국 근위대가 그를 향해 돌진했으나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모래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져 나와 슈리마의 마지막 잔영을 먼지로 흩어버렸다. 아지르는 자신의 과거가 남긴 잔영이 죽어가는 가운데 혼자서 서 있었다. 그의 백성들은 이렇게 죽어갔던 것이다. 머리 위의 태양 원판에 여명의 첫 햇살이 비쳐왔다. 아지르는 돌아섰다. 볼 만큼 보았다. 변화한 제라스의 모래 잔영이 그의 뒤편에서 무너져내렸다. 아지르의 흠 없는 황금 갑옷에 새벽의 햇빛이 무정하게 부서져 흩어졌다. 그 순간, 아지르는 배신자가 살아있음을 알았다. 공기에 그 마법사의 정수가 섞여 있음이 느껴졌다. 그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초월의 계단 밑단, 한 무리의 정예병이 모래 속에서 솟아나왔다. “제라스,” 아지르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했다. '''“너의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를 것이다.”''' |
4. 다르킨의 전설 #
다르킨은 세 번의 저주를 받았다. 한 번은 그들과 맞섰던 고대의 적에게, 다음은 그들의 영광스러웠던 제국의 몰락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영원한 지옥에 떨어뜨린 배신자들에게 말이다. 이케시아의 반란군이 어리석게도 전투에서 공허를 불러냈을 때, 전설적인 초월체들은 언제나 그랬듯 슈리마를 지켰다. 태양 원판의 힘을 흘러넘치도록 부여받은 이 "신성전사"들은 필멸자인 병사들의 머리 위로 우뚝 솟아올라 검과 마법을 동시에 휘둘렀고,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전쟁의 공포는 엄청난 피해를 낳았고, 이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결코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수 세기 후, 황제 아지르가 초월 의식에서 목숨을 잃자 슈리마는 몰락했다. 불멸의 신성전사들조차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을 인도해 줄 황제가 죽자 살아남은 초월체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되고 사소한 야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그들의 목적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초월체들은 금지된 마법을 익혔으며 스스로를 세계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지게 된 필멸자들은 이 폭군들을 고대어로 "타락한 자"라는 뜻을 가진 다르킨이라고 부르며 저주했다. 그러나 다르킨조차도 공허와의 오랜 전쟁이 지속되면서 영혼이 쇠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수 세기 동안 이어졌던 불안한 동맹은 끝을 맺었고, 그들은 마치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는 듯 서로에게 등을 돌렸다. 그것이 다르킨 전쟁의 서막이었다. 이 싸움은 슈리마에서 발로란을 거쳐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변절한 신성전사들과 그들이 일으킨 군대는 막을 수 없었고, 온 국가가 종족 사이의 전투에 휩쓸려 무너졌다. 모든 것이 멸망할 것처럼 보였지만... 우연히도 룬테라의 마법사들이 살아남은 다르킨을 봉인하는 마법을 알아내게 되었다. 은밀하고 교활한 계략에 속아 넘어간 초월체들의 육체는 그들 내면에 존재하는 천계의 힘과 융합되어 그들이 사용하던 무기에 갇히게 되었다. 지도자들이 영원히 봉인되자 광란을 일으켰던 무리는 산산이 흩어졌고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후유증을 겪은 필멸자들은 이 다르킨 무기들을 감추어 엄격하게 지켰다. 이 힘을 파괴할 수는 없어도 가둬 둘 수는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러한 힘이 사악한 자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다르킨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이다. |
5. 신들의 황혼 #
그들은 어둠을 틈타 산그늘에 가려진 죽은 도시로 향했다. 전사 천 명에 달하는 신성군단들은 각각 핏빛 토템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태양의 자손인 초월체의 고대 혈통을 나타내는 토템이었다. 도시와 그곳에 거주했던 시민들의 유골은 이미 사막과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모래와 뒤섞인 잿더미와 뼛조각을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도시에서 가장 높았던 탑만이 모래 언덕 위에서 자리를 지켰다. 무너진 첨탑은 산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구슬프게 웅웅거렸고, 무너진 주춧돌 위로는 몸통이 부서진 석상의 다리 두 개가 보였다. 그 옆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새 석상의 머리가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아주 오래전, 훗날 이 도시가 세워지기도 전, 이 계곡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슈리마의 시작이라고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사건은 그 끝을 향해 흘러갔다.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폐허가 된 도시로 향하고 있는 신성전사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들의 황제가 배신당했을 때 도시의 백성들을 베어 버린 바로 그 신성전사들이었다. 백성들이 죽어가는 동안 이들은 도시를 불태우고, 쓰러지지 않은 비석과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도시의 이름을 모두 지워 버렸다. 그들의 말살 행위에는 헛된 분노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헛되었던 건 이 도시에서 노예로 거두어졌던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그 아이의 출생을 기억하는 일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노예 소년은 제국을 무너뜨렸고, 그들의 형제애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그것이 신성전사들로 하여금 네리마제스와 그곳의 백성들을 잿더미로 만들게 한 이유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황금 두루마리도 그 빛을 잃기 마련이다. 우리와 다를 바 없군. 타아나리는 발톱으로 북부의 카즈훈에 새로 건설된 무역항에서 보낸 공물 이름과 수량이 꼼꼼하게 새겨진 목록을 훑어내리며 생각했다. 새로 건설되었다고...? 카즈훈은 인간들이 수백 년 동안 거주해 온 도시였다. 그들의 미개한 언어는 그곳의 이름을 익숙하지 않은, 천한 이름으로 변질시켰다. 대학자에게는 이 두루마리에 담긴 내용이 흥미로울지 몰라도 타아나리에게는 세상이 이치에 맞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연결 고리에 불과했다. 이 방은 한때 온갖 기록으로 가득했다. 황제에게 바치는 찬사나, 그가 일으킨 전쟁과 그의 기나긴 업적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대리석 벽을 따라 쌓여 있었다. 원래는 텅 빈 장소였지만 수백 년 전에 지붕이 무너진 이후로 모래가 이 지하 공간의 대부분을 채웠다. 공기가 바뀐 것을 느낀 타아나리는 두루마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입구에 마이샤가 서 있었다. 입구 크기 때문에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새카만 털로 뒤덮인 타아나리의 정수리가 천장 대들보에 닿을 정도였지만, 그는 반듯이 서 있을 수 있었다. 타아나리는 자신보다 가냘프고, 심지어 깨질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 마이샤에게서 자신조차 완전히 갖지 못한 깊이를 느꼈다. 추운 북부 지방 인간들의 금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겉모습은 어려 보였지만 한쪽은 짙은 푸른빛, 다른 쪽은 해질녘의 자줏빛으로 물든 그녀의 두 눈동자에서 나이를 뛰어넘는 지혜가 엿보였다.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얇은 비단 옷을 입은 그녀의 허리에는 금색 열쇠 한 개가 달린 가느다란 밧줄이 묶여 있었다. 마이샤는 목에 두른 밝은 분홍빛 스카프 끝에 달린 술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말했다. "그들이 도착했어요." "몇 명이나?" "신성군단 아홉. 전사 만 명 정도요." 타아나리는 누렇게 변한 송곳니를 혀로 핥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많이 왔군." 마이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두 와야죠." 타아나리는 말을 이었다. "수백 년 동안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 너무 많은 증오가 싹텄고. 대부분 우리에게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생각조차 용납하지 않을 거야." 마이샤는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전쟁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었어요. 게다가 당신 손에 목숨을 잃은 당신 동족이 공허에 죽은 자보다 많고요." 그녀의 건방진 어조를 질책하려던 타아나리의 말은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어쨌든 그녀의 말은 옳았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타아나리가 동족을 불러 모은 이유였을 것이다. "아지르 황제가 서거하던 순간 태양의 자손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 타아나리는 읽고 있던 고대사 두루마리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동족의 야망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원대했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해 많은 예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걸 실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상태였어." "그렇다면 결국 당신들도 필멸자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네요." 예전의 타아나리라면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자를 죽였을 것이다. 수백 년에 걸친 전쟁과 그들이 일으켰던 엄청난 규모의 학살이 그 증거였다. 마이샤가 그의 밑으로 들어왔을 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필멸자들의 삶은 너무 짧아서 하나가 죽고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운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마이샤는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관심을 끌었다. 반항적이고 건방진 태도 역시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필멸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아나리와 그의 동족이 더 큰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인간성을 버린 이후로 잃어버린 능력이었다. 타아나리가 인간이었던 시절은 먼 과거의 일이었다. 필멸자의 기분이라든가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야속함 같은 감정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고대의 마법과 태양 원판의 힘으로 조악한 인간의 몸에서 신적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완전하지 못하고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도 신은 신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전쟁을 거듭하면서 청동 갑옷을 두른 타아나리의 표범 같은 형상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지만, 여전히 위엄있는 모습이었다. 상체의 털은 한때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이었으나 입가와 팔다리에는 군데군데 회색이 섞여 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의 모습을 재구성했었다. 한때 눈빛만으로도 전군을 공포에 떨게 했지만, 지금은 흉터가 난 한쪽 눈에는 금이 간 루비가 대신 자리했고 다른 쪽 호박색으로 길게 뻗은 눈은 절망의 기운만을 풍겼다. 그의 척추는 칼리크 강 전투에서 도끼에 맞은 이후로 휜 상태였다. 너무 강력한 일격이라 그의 불같은 재생력조차도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었다. 타아나리는 탁자 위에 놓인 무기를 집어 들었다. 네 개의 날이 달린 명검 '샬리카'였다. 날카로운 날들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균형은 아름다웠지만, 무기에 실린 책임감의 무게는 그 이상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는 어깨 띠에 검을 매곤 절뚝거리며 마이샤에게 다가갔다. 세월의 흐름과 오래전에 입은 상처로 등이 굽었지만, 타아나리는 마이샤보다 훨씬 키가 컸다. 필멸자들이 다른 이름, 더 '어두운' 이름으로 불렀던 태양의 자손들이 벌인 전쟁은 마이샤의 동족에게 지독한 상처를 남겼음에도 그녀는 타아나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끔, 타아나리는 마이샤가 보내는 연민의 눈길을 느꼈다. 어떤 때는 죄책감이 들게 하는 경멸의 눈길이었다. 마이샤의 작고 매끈한 손이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거대한 타아나리의 주먹을 감쌌다. "당신은 여전히 신성전사예요, 타아나리." 마이샤가 말했다. "그들에게 신성전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면... 그러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 "설득하지 못하면?" 그녀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간단하죠. 다 죽이면 되잖아요." 타아나리를 섬기는 생명의 그릇들이 모래에 파묻힌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한때는 여왕이었거나 필멸자들의 왕국을 통치했던 지배자들이었지만, 그가 이끄는 무적의 군대 앞에서는 충성을 바치겠노라고 서약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전사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신성전사와 함께 싸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타아나리가 다가오는 것을 본 투쉬파는 머리를 숙였다. 문신이 새겨진 그녀의 근육질 팔뚝을 비취 고리가 감싸고 있었다. 저항적이지만 동시에 충성스럽기도 한 그녀는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설패는 사막 태생으로, 그녀의 혈통은 아지르의 부왕이 통치하기 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아나리를 본 설패는 긴 창으로 땅을 쿵 찍었다.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밀어 버린 정수리에는 격자 모양의 자국이 나 있었고 선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금구슬이 박혀 있었다. 자존심 강하고 건장한 이드리-미는 자루가 긴 도끼를 어깨에 걸머지고 있었다. 양쪽이 대칭을 이루는 도끼날은 대부분의 남자들조차 들어 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무거웠다. 이드리-미는 동쪽의 여왕으로, 그녀의 모친과 조모 역시 타아나리를 위해 싸웠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는 상앗빛을 띠었고, 검은색 긴 머리는 은색 고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타아나리는 세 여전사들 앞에 섰다. 그녀들은 타아나리의 호위무사가 아니었다. 타아나리는 자신보다 하등한 존재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없었다. 단지 자신의 목숨을 원하는 오만한 전사들을 굴복시키겠다는 그의 뜻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긴 해도 그녀들은 실제로 타아나리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전사였다. 타락한 형제애로 이어진 타아나리의 형제자매들도 각자 생명의 그릇들을 데려왔겠지만, 타아나리의 전사들보다 뛰어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타아나리가 말하는 동안 누구도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신성전사와 눈이 마주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나는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생명의 그릇들을 봐 왔지만, 그대들이 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타아나리가 말했다. 그는 반응을 살폈지만 수년에 걸친 주종 관계는 미약한 감정조차 사라지게 한 듯, 그녀들은 죽은 도시의 폐허에 남겨진 무너진 조각상만큼이나 무표정했다. "너희들의 충성심은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내가 죽길 바라겠지. 자네들의 눈에 비친 집념을 보면 확신할 수 있다. 마이샤가 만든 영약의 힘이 사라지면 날 괴롭히는 악몽처럼 지독한 집념." 투쉬파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빛났던 걸까? 과거의 타아나리였다면 한순간의 흐트러짐만으로도 그녀를 처형했겠지만, 살육에 대한 욕구도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졌다. "그럴 만도 하겠지." 타아나리는 말을 이었다. "내 동족이 죽음과 공포 외에 그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한 세기 전, 태양의 자손들은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이 세계를 '지켜'냈지만, 결국 세계를 파멸의 문턱으로 이끌고 말았다. 초월체들의 영광스럽던 나날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우리가 벌인 전쟁의 어둠 속에서 빛을 잃었지. 필멸자인 그대들의 덧없는 기억 역시 마찬가지고." 그와 그의 동족이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타아나리의 마지막 말에는 쓰라림이 배어있었다. 지나친 자만심, 전쟁으로 인한 상처, 고대부터 이어진 불화가 벼려져 만들어 낸 검은 그들에게 부여된 의무의 사슬을 끊어 버렸다. 타아나리는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순간을 향해 싸워 왔다. 이제 때가 되었고 죽음은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밤에 살아남는 자들은 자유의 몸으로 새벽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해가 뜨면 각자의 동족에게 돌아가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전하도록 해라." 타아나리는 돌아섰다. "마이샤, 준비되었나?" "모두 원형 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타아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내러 가지." 그곳은 원래 원형 경기장으로 설계된 공간이 아니었다. 타아나리의 노예들이 사막에서 과거 네리마제스의 시장터를 발굴했고, 그가 마법으로 뿜어낸 열이 모래를 유리질로 만들었다. 분화구 형태의 유리 경기장은 잿빛과 청록빛, 신비한 무지갯빛을 띠었고 부드러운 달빛이 표면에 내려앉으면 너울거리는 은빛 장막이 반사되었다. 타아나리는 파도가 솟구치는 순간을 얼린 것 같은 곡선 모양의 아치를 통해 입장했다. 긴장감이 공기를 무겁게 했다. 신들이 군단을 불러모을 때 감도는 기운이었다. 만 명의 남녀가 원형 경기장의 층계식 단을 가득 채웠고, 신성전사들의 투사들은 그 아래 늘어섰다. 누구도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 주군의 명령만 떨어지면 학살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타아나리는 그의 동족인 태양의 자손들을 둘러보았다. 한때 절대 깨지지 않는 애정과 의무로 이어져 있던 형제자매들의 유대는 금세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이 그들의 육신에 작용하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몸을 빚어내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 필멸자와 다름없지. 놀라울 정도로 나약하기도 하고. 타아나리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사이팍스는 그를 이해한다는 눈빛을 전했다. 지간투스는 혐오감을 내비쳤고 슈얀은 노골적인 경멸을 보냈다. 칼리크 전투에서 타아나리를 불구로 만든 것은 슈얀의 도끼였다. 거북머리 형상의 신성전사, 슈얀은 타아나리가 절뚝거리며 원형 경기장의 중앙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곤 땅에 침을 뱉었다. 까마귀 깃털을 두른 예언자 쌍둥이 샤바카와 샤바케는 세공된 뼛조각으로 점을 치는 데 몰두하여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발리바는 그녀의 형제가 항상 그랬듯 경멸의 눈빛으로 타아나리를 쏘아보았다. 타아나리는 그 형제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늑대 세보타루는 이 비밀회담이 빨리 끝나기를 안달하며 왔다 갔다 했다. 그의 신성군단은 먼 북부에 이어 서쪽 바다 건너편의 땅을 파괴했다. 세보타루는 동족 중 가장 먼저 피의 교착 상태를 끝낼 수 있던 자였다. 주레타의 나가네카는 꽈리를 튼 몸에 긴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눌러쓴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독에 중독되어 시력을 잃은 생명의 그릇들은 그녀가 친히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을 언제든 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오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녀의 쉿쉿거리는 속삭임을 들어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에나카이만이 경의를 표했다. 피부에 강렬한 주황색과 검은색 줄무늬를 새로 새긴 그가 앞으로 나왔고, 타아나리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에나카이의 모습에서 세월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의 힘과 긍지, 또렷한 눈동자는 전쟁으로 보낸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었다. 먼 옛날 그들은 함께 황금 계단을 올라 태양 원판 앞에 나란히 섰다. 두 손을 마주 잡자 원판의 작열하는 빛이 그들에게 천계의 힘을 불어넣었다. 에나카이는 이케시아 전투에서 후퇴할 때 부상당한 타아나리를 후송했고, 칼리크의 진창에서 형제로서 함께 싸웠으며 빙하 항구에서는 적으로 만났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몇 번이고 굴러가리라... 에나카이는 타아나리의 손을 감쌌다. "타아나리." "에나카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를 부르는 이름에는 평생에 걸친 경험과 기쁨, 상실, 고뇌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신이 된 존재였다. 사소한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타아나리의 등에 걸린 무기를 본 에나카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하자 타아나리가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길 바라네." 에나카이는 나직하게 말한 후 원형 경기장 끝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타아나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수년간 이 순간을 준비해 왔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수 있었다. 그의 동족들은 신성전사였다. 그에 걸맞게 오만하기 그지없었으며 성질이 급했다. "형제자매들이여." 마법에 실린 첫 마디가 원형 경기장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파르네사의 벽 앞에 천 명이 모인 이후로 태양의 자손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건 처음이군."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선명한 기억이 그들의 영혼 속에 있던 과거의 희미한 불씨를 건드린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면 된다... "내 앞에 권능이 보인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어 하나하나에 힘주어 말했다. "한때 필멸자였던 신들이 보인다. 고귀하고 위대하며 경외스러운 존재들이. 어떤 자들은 우리의 오랜 형제애가 분열됐다고 한다. 그들은 고대의 언어로 우리를 '다르킨'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렇게 모인 걸 보니 그들이 틀린 것 같군." 동족을 향한 찬양에 모두가 젖어 들도록 타아나리는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대부분에게는 별 감흥이 없을 터였다. 고통받는 백성들이 밤낮으로 찬양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형벌에 처했다. 하지만 나머지의 동조를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세타카가 신성군단을 이끌고 제국의 권세를 세상 끝까지 떨쳤을 때, 모두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진했던 때를 기억할 것이다. 나 또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영광의 시대이자, 영웅들의 시대였다! 세보타루, 우린 황혼의 용을 타고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을 올랐고,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된 그곳에서 우주의 창조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돌아서서 사이팍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이팍스, 내 형제여. 우린 동부 해안의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는 심해의 괴물들에 맞서 함께 싸웠다. 열흘 밤낮을 싸우는 동안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지만, 결국 우린 놈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사이팍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아나리는 그 전쟁에 대한 기억이 비늘로 덮인 사이팍스의 피부에 보라색과 검은색, 빨간색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때 일은 말하고 싶지 않군." 사이팍스가 여러 개의 눈을 감고 말했다. "슈리마의 황금 전사 칠천 명이 그 붉은 해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살아 돌아온 건 우리 둘뿐이었지." "그래. 우린 승리를 위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지.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하지만 얼마나 위대한 싸움이었는가! 필멸자들도 그날의 전투를 기리며 그 해안의 이름을 다시 지었다네." 사이팍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날 본 끔찍한 광경은 모두 잊었나 보군, 타아나리. 계속 영광에 대해 떠들어 보게. 난 듣지 않을 테니.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날 죽은 이들의 비명이 들리고 심지어 그것들이 그들의 영혼까지 집어삼키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네. 네 찬란했던 과거에 나는 없었어. 내겐 그런 기억이 없어." "그래, 끔찍한 전투였지. 내가 과거를 미화한다고 볼 수 있겠군." 타아나리가 말했다. "하지만 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알고, 또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라네. 위대한 영웅으로서, 우린 무적의 군대를 앞세워 세계를 평정했고 불멸의 황제에게 지휘를 받아—" "하지만 아지르는 죽었어." 슈얀이 유리 바닥에 금이 갈 정도로 거대한 장도끼를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황제가 죽고 지도자가 없으니 태양의 자손들이 전쟁을 일으켰지. 먼지와 잿더미 속으로 사라진 그 과거는 이젠 아무 의미가 없어. 그때의 영광을 되새기는 걸로 이 싸움이 끝날 거라 생각했다면 우리 중 가장 미친 신은 네 놈이겠군." 타아나리가 말했다. "과거를 되새기자고 모두 이곳에 부른 것만은 아니야." "그럼 목적을 말해. 아니면 다시 피를 보든지." 타아나리는 몸을 곧게 세우려 했지만, 뒤틀린 등뼈가 휜 나뭇가지처럼 삐걱거려 주춤했다. 공허의 공포가 할퀴는 듯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날 입은 상처 때문이지, 슈얀." 타아나리가 말했다. "전혀 낫질 않더군. 칼리크 전투, 기억하나?" "물론이지. 불구가 되어 버렸군." 슈얀이 증오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위대한 태양 원판의 빛을 받은 순간부터 내가 참전한 모든 전투를 기억하지. 한때 형제자매였던 이들의 배신이나 위대한 업적은 여기 모인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야." "우리가 한때 이케시아였던 곳에서 함께 전선을 지켰을 때 자네가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했잖나." "이미 지나간 일이야." 세보타루가 끼어들었다. 그의 턱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발음이 부정확했다. "과거는 과거에 묻어야 해." "어째서지?" 타아나리가 벌컥 화를 내며 물었다. "왜 과거를 과거에 묻어 둬야 하지? 우린 슈리마의 초월체가 아닌가! 우린 단순한 화신이 아니라 신이라고! 신! 지금 우리의 현실과 우리가 결정한 미래가 어떻지? 우리 중 누구라도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만, 다들 하찮은 다툼과 더 이상 아무런 의미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네. 심지어 전쟁의 이유를 아는 자도 거의 없는데도 말이야."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격양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간투스, 폐허가 된 왕국을 재건해 아지르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고 했지. 에나카이는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고 했고. 발리바, 너와 네 형제는 모두의 눈에서 증오를 보고 모욕에 대한 복수를 원했지. 그게 사실이든 상상이든." "아니, 사실이었어." 반박하는 발리바의 매끄럽고 흰 피부에는 보랏빛 핏줄이 비쳤고, 어깨에는 독가시가 돋아 있었다. 타아나리는 그녀를 무시했다. "우린 각자 서로 다른 미래를 생각했다. 하지만 태양의 자손이 가진 힘을 합쳐 신성한 과업을 이루는 대신,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들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싸웠지. 그렇다. 세타카는 오래전에 죽었고, 다신 볼 수 없게 됐다. 그래, 황제도 배신당했지. 제국은 폐허가 돼버렸고, 백성들은 겁에 질려 흩어졌다. 슈리마의 재건을 이끌 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남은 우린 심연을 오랫동안 바라본 나머지 그 공포로 미쳐 자멸해 버린 괴물이 되고 말았어." "결국 재건 대신 남은 세상을 파괴하며 멸망한 제국의 잔재를 위해 싸웠다. 이대로라면 공동의 목적을 찾긴커녕 모든 것이 멸망하게 될 판이지. 우리 각자는 강력한 존재다. 하지만 함께라면...?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은 단언컨대, 아무것도 없다. 우리만 원했다면 천계의 관문을 통해 이 잿빛 세계를 떠나 천상에 새로운 제국을 세울 수도 있었어!" 회한에 찬 타아나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유례없이 지속된 오랜 전쟁에서 서로를 죽이며, 오히려 미천한 존재들과 다를 바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커져 원형 경기장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 타아나리가 어깨 뒤로 손을 뻗어 샬리카를 풀었다. 고대의 무기, 샬리카를 본 이들이 충격에 휩싸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원형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타아나리가 말을 이었다. "우리 중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세타카의 무기다. 산 너머에서 가져와 슈리마가 탄생한 날에 높이 들어 올려진 검. 언젠가 비를 부르는 자인 시부나스 알라하이르가 지닐 검이기도 하다. 그 손에서 파괴의 무기가 될 수도, 화합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샬리카를 들어 동족들에게 보였다. 금빛으로 빛나는 칼날은 이 세계가 아닌, 슈리마에서 가장 현명한 자도 이해하지 못한 우주의 힘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동족들의 얼굴에서 존경심과 경외, 자긍심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소유욕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뻔하군. 당연히 슈얀이지. 슈얀이 도끼를 빙빙 돌렸다. 타아나리는 슈얀의 흑요석 도끼날이 갑옷을 가르고 척추를 산산조각 냈을 때의 고통을 떠올렸다. "널 해치우고 샬리카를 가져가겠다." 슈얀이 돌출된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우두머리가 되는 건가?" 그의 어깨 위로 튀어나온 딱딱한 갑각에는 뾰족한 가시와 칼날이 박혀 있었다. 전성기의 타아나리라도 그를 이기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크 전투는 수 세기 전 일이었다. 타아나리는 그 이후 새로운 능력을 터득했다. "그걸로 싸울 텐가?" 슈얀이 도끼로 샬리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 타아나리가 돌아서 마이샤에게 샬리카를 건넸다. 샬리카는 마이샤가 들기 버거운 무게였지만, 마이샤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타아나리는 그녀의 기분이 금세 또 즐거워진 것을 눈치챘다. 곧 신들의 싸움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 듯했다. 슈얀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럼 뭐지? 맨손으로 날 상대하겠다고? 동족들 앞에서 죽고 싶은 게로군." "그것도 아니야." "네 이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슈얀이 말했다. "칼리크 전투의 승부를 여기서 내도록 하지." 슈얀은 마치 산사태가 몰아치듯 타아나리를 향해 돌격했다. 피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번개가 우르릉거리며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 같았다. 타아나리는 슈얀의 돌격으로 부대 전체가 괴멸되고 거인들이 쓰러지며 요새 입구가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타아나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원형 경기장의 유리 바닥에 손바닥을 대었다. 바닥에 마법의 기류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바닥 위의 모든 생명체가 황금빛 힘의 줄기로 연결되었다. 필멸자들은 불에서 튀어 오르는 작은 불똥 같았지만, 신성전사들은 마법의 힘이 소용돌이치는 갓 태어난 태양처럼 보였다. 그는 마이샤가 가르쳐 준 대로 동족의 힘을 흡수했다. 샤바카와 샤바케의 저주가 깃든 예지력을 받아들이자, 몸 안에서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이팍스가 가진 도마뱀의 민첩함이 쇠약해진 육체 속으로 밀려들었다. 지간투스의 분노와 에나카이의 의로운 정신도 함께였다. 타아나리는 눈을 감았다. 슈얀이 어디에서 공격해 올지 아는 듯 했다.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도끼날이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목을 스쳐 지나갔다. 슈얀의 움직임은 마치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타아나리가 재빨리 몸을 돌려 슈얀의 갑각에 달린 구부러진 뿔을 잡아채고 등에 올라타자 슈얀이 분노로 포효했다. 슈얀이 타아나리를 떼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돌렸지만, 잡은 손아귀 힘이 너무 셌다. 타아나리는 예언자 쌍둥이의 무의식적인 능력으로 격렬하게 날뛰는 그의 움직임을 전부 예측할 수 있었다. 슈얀은 도끼를 바꿔 쥐고 어깨 뒤로 휘둘렀다. 마치 격렬한 참회라도 하듯 자기 자신에게 가시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타아나리는 도끼날이 날아오는 순간 옆으로 몸을 피했고, 도끼날은 슈얀의 갑각을 부순 후 깊은 상처를 입혔다. 분노에 휩싸인 슈얀이 고함을 치며 딱딱한 살에서 도끼날을 뽑아냈다. 상처는 커 보였다. 타아나리는 슈얀의 갑각에 달려 있던 뿔 하나를 잡아 뜯었다. 시미터처럼 휜 상아색 뿔은 끝이 쇠로 감싸져 있었고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슈얀이 원형 경기장 벽에 부딪히자, 그 엄청난 충격에 날카롭게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필멸자 수십 명이 경기장으로 굴러떨어져 격렬하게 싸우는 신성전사들의 발에 짓밟혔다. 슈얀이 등에 매달린 타아나리를 거칠게 내던졌다. 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쥐고 있던 날카로운 뿔을 놓치지 않았다. 슈얀은 몸을 틀어 사형 집행인처럼 도끼를 내려찍었다. 타아나리는 옆으로 잽싸게 피했고, 대신 바닥이 깨지면서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폭발했다. 이때, 슈얀의 울퉁불퉁한 발이 그의 가슴을 짓눌러 바닥에 고정시켰다. 타아나리를 벌레처럼 짓뭉개 버릴 정도의 엄청난 무게였다. "샬리카는 내 것이다!" 슈얀이 소리쳤다. 질기고 딱딱한 슈얀의 투구 같은 머리는 그의 갑각과 이어져 있었다. 창백하고 두꺼운 목에서는 동맥이 고동쳤다. 또 다른 경쟁자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에 삭막하고 차가운 검은 눈이 툭 불거져 나왔다. 슈얀은 단언한 대로 이곳에서 칼리크 전투의 승부를 낼 참이었다. "아니." 타아나리가 금이 간 송곳니 사이로 중얼거렸다. "그럴 일은 없어." 그는 새로 터득한 힘을 폭발시키듯 방출했다. 동족들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힘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무한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저 너머 흉측한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곧 감각이 사라졌지만, 마치 긴 세월이 지난 것만 같았다. 눈을 뜬 그 순간, 슈얀이 호를 그리며 도끼를 내려찍었고 타아나리는 그의 등에 올라타 있었다. 그 뒤로 차원문이 닫히자 방출된 공기가 쾅하고 폭발했다. 타아나리는 뿔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고 슈얀의 눈을 향해 휘둘렀다. 뾰족한 끝이 슈얀에게 꽂혔다. 타아나리의 힘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잔인한 마무리였다. 슈얀은 초월체인 그의 육신이 아직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잠시 후 산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가 털썩 무릎을 꿇자 타아나리는 그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슈얀의 몸이 타아나리를 향했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튀어나온 입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타아나리는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마이샤가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대견한 제자를 보며 자랑스러워하는 스승 같았다. 그 소리에 역겨움이 일었다. 그는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어도 동족 한 명쯤은 죽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상황이 오길 바란 것은 아니다. 그와 슈얀이 가까이 지낸 적은 없었지만, 이들은 오래전 태양의 축복을 받았을 때 슈리마의 영광을 위해 함께 싸웠고 태양의 힘을 부여받았다. 타아나리는 쓰러진 슈얀 옆에 무릎을 꿇고, 털로 뒤덮인 손을 그의 머리에 얹었다. 용이 창조한 별의 빛이 유리에 반사돼 반짝였다. "미안하다. 형제여." 타아나리는 그렇게 속삭였다. 슈얀의 투사들이 있는 쪽에서 고뇌의 포효가 들려왔다. 그들의 신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엔 슈얀은 그들에게 많은 미움을 받았고, 그렇다고 복수를 갈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박탈된 목숨에 대한 고뇌였다. 그들은 양옆으로 살기 서린 칼을 뽑았다. 신성전사들이 자신의 종들을 잘 가르친 것이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신이 없는 인간은 박멸해야 할 해충에 불과하다고, 신성전사들은 항상 그렇게 가르쳐 왔다. "잠깐!" 타아나리가 소리쳤다. "투사들은 모두 검을 넣어라!" 그들은 타아나리의 군대가 아니었지만, 타아나리는 태양의 자손이었다. 목소리에 깃든 위엄에 모두가 동작을 멈췄다. 다른 신성전사들은 타아나리가 한 일에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주레타의 나가네카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와 상체를 숙이고 차가워져 가는 슈얀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의 살에서는 옅은 연기가 올라왔고, 천계의 기운은 운명을 다한 육신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두건을 젖혔다. 잿빛이 둘러진 몽환적인 여러 개의 눈이 드러났다. 비늘 덮인 입술 뒤로 길고 검은 송곳니가 솟아 있었다. 그녀는 슈얀의 등에 난 상처 위로 몸을 숙이고 죽음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라아스트가 실망하겠어." 그녀는 뱀이 쉭쉭거리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슈얀을 직접 죽이겠다고 다짐했거든." 그녀의 독에 눈이 먼 생명의 그릇들이 뒤에서 서성였다. 나가네카가 큰 소리로 말하자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탓이다. 다른 이들도 조심스레 앞으로 나왔다. 에나카이와 사이팍스는 새로운 경의의 시선으로 타아나리를 바라봤다. 나머지는 죽은 슈얀을 응시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아무리 신성전사라고 해도 믿기 힘든 타아나리의 힘을 목격했다. 샤바카와 샤바케가 죽은 슈얀을 둘러쌌다. 이들의 위축된 날개가 동요로 떨렸다. 그들은 수의를 입은 것처럼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신성전사 모두를 집어삼킨 타락은 이 둘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많은 것을 봐온 칠흑 같은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늘 죽을 거라고 말해 줬는데. 그렇지, 샤바케?" "우리 말을 안 듣는다니까." 샤바케가 답했다. 그 말에 샤바카가 키득거렸다. "맞아, 맞아. 미친 까마귀들 말은 절대 안 듣지. 우리가 뭘 알겠어? 그저 다 아는 것 뿐인데!" "이미 알고 있었나?" 지간투스가 물었다. "그럼, 그럼. 그의 눈에 뿔이 다가오는 걸 봤거든. 그래서 귀띔했는데 웃기만 하더군." "이젠 안 웃네. 안 그래, 샤바카?" "그래, 샤바케." "또 뭘 봤지?" 사이팍스가 물었다. 예언자 쌍둥이는 가까이 모여 속삭이더니 앞뒤로 작은 뼈를 던졌다. 그들의 마음은 이케시아의 대균열을 봉인하는 전투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 누구도, 아무리 신성전사라도, 심연의 거대 존재들을 응시했을 때 조금이라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샤바케가 눈살을 찌푸렸다. "미래가 너무 촘촘히 엮여 있어..." 샤바카가 덧붙였다. "지금부터 나올 수 있는 결과가 너무 많아. 확신할 수 없어." 샤바케가 말을 이었다. "오늘 모두 죽을 수도 있어. 아니면 일부만 죽거나. 모두 살 수도 있고. 지간투스, 지금 네가 타아나리를 죽이면 모두 살 수 있어." "살려면 죽여야 해!" 샤바카가 키득거렸다. "그녀가 원하고 있어. 그녀는 산사태를 일으키는 돌멩이야." "쉽게 말해!" 지간투스가 소리쳤다. "누가 뭘 원한다고? 돌멩이? 산사태?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저 여자!" 샤바카가 타아나리 뒤에 있는 마이샤의 작은 형체를 가리키며 꽥 소리쳤다. "신들의 눈엔 티끌 같은 빛으로 보이겠지." 마이샤는 샬리카를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아버지의 검을 움켜쥔 아이 같았다. 세보타루가 으르렁거리며 타아나리의 몸을 끌어올렸다. 늑대인 그의 몸은 호리호리했지만, 괴력을 지녔고, 회색빛 털로 덮인 네 개의 단단한 팔 끝에는 발톱이 달려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세보타루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저 여자는 누군가?" 타아나리는 뒤틀린 척추가 눌리는 고통에 비명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냥 필멸자일 뿐이네." "넌 항상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지." 세보타루가 길게 휜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진실을 말하라, 형제여.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목을 물어뜯어 주마." "내가 샬리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줬어." 세보타루가 고개를 저었다. "이케시아가 멸망한 후 대학자가 세타카와 함께 샬리카를 묻었다. 미천한 필멸자가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고?" "아니. 대신 날 나서스에게 데려갔지." 슈얀 쪽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타아나리에게 쏠렸다. "대학자를 봤다고?" 대답을 기대하듯, 발리바의 등에 달린 가시가 흔들거렸다. "그는 폐허가 된 나시라미의 대도서관을 파헤친 모니라를 죽인 후로 종적을 감췄을 텐데." "만나긴 했지만 예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었네. 짊어진 짐에 짓눌려 피폐해져 있더군. 지금은 숨겨진 절벽에 세워진 탑에서 별들의 춤을 보며 살고 있지. 그가 마이샤에게 명령해 날 찾아 탑으로 데려오라고 했네." "왜 너를?" 나가네카가 쉭쉭거렸다. "왜 하필 우리 중 널 선택한 거야?" "나도 몰라." 타아나리가 말했다. "그의 관심을 받을 만한 자는 많으니까." "나서스와 얘기했나?" 에나카이가 물었다. "그래." "그랬더니 세타카의 검이 어디 있는지 알려줬다고?" "응." "그렇게 쉽게?" 사이팍스가 내뱉었다. "아니, 그렇게 쉽게는 아니야." 타아나리가 멱살을 잡고 있던 세보타루의 손을 떨쳐 냈다. 그는 마이샤에게 맡긴 샬리카를 되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무기에 깃든 힘은 강력하고 무한했다. "동족들이 전쟁을 벌여 낙원을 불태우고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있다고 전했네. 그 비극을 끝내려면 세타카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지." "나서스는 황제가 죽은 순간 우리를 버렸다." 지간투스가 말했다. "왜 이제 와서 우리를 돕겠다는 거지?" "그가 태양의 자손을 버린 건, 지독한 시기와 비뚤어진 경쟁심이 우리를 좀먹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형제를 잃었다는 기억으로 비탄과 방황에 빠져 이 세계에서 잊힌 길을 따라 떠돌았지. 하지만 항상 고향 땅으로 이끌렸어." 타아나리는 몸속에서 마법의 기류가 일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복부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올라와 가슴을 찔렀다. 드디어 끝이 다가오는군... 마이샤는 자신이 가르쳐 준 마법을 쓰면 인간의 몸에 불멸의 힘을 잡아 둔 족쇄가 깨져 아무리 초월체라도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생길 거라고 경고했었다. 끝없는 전투와 천 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상처를 버텨낸 힘이었지만, 모든 것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공포가 엄습하자, 추위와 낯섦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스멀스멀 다가오는 고통과 나약함을 물리쳤다. "네 말이 맞다, 지간투스. 나서스는 절대 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것이 동족의 운명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네. 별들이 먼 미래를 알려 줬다더군. 모래 속에 묻힌 슈리마가 다시 일어서고, 정당한 지배자가 나타나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날이 온다고." "슈리마가 다시 일어선다고?" 세보타루가 애가 타듯 재촉했다. "언제?" "우린 살아서 보지 못할 거야." 타아나리가 말했다. "우리 모두 말이지." 샤바케가 그들 사이로 앙상한 몸을 밀어 넣었다. 말라 비틀어진 팔을 허공을 찌른 그녀는 검은 눈을 번뜩거리며 말했다. "오늘 우리 모두 죽거나 일부만 죽을 거야!" 그녀가 새된 소리로 외쳤다. 사이팍스가 그녀를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 "샬리카도 슈리마의 부활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래. 결과가 좋든 나쁘든." 타아나리가 말했다. "슈리마의 백성을 단결하는 상징이 되겠지. 샬리카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네. 과거를 떠올리고, 다시 그때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같은 깃발 아래에서 함께했을 때처럼 우리가 다시 형제애를 되찾으려 했다면, 모두가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세보타루가 재미있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제야 진짜 속셈을 알겠군. 가장 위대한 전사의 무기를 들고 나서스의 선택까지 받았으니, 지도자로서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모두를 불러 모은 거였어." 타아나리가 털로 뒤덮인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난 절대 세타카나 나서스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어. 그저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을 뿐이었네. 다 함께 해내길 바랐는데, 헛된 꿈이었던 것 같군." 타아나리는 동족들 곁을 지나 원형 경기장 중앙에 섰다. 여덟 명의 신성전사와 수천 명의 필멸자들이 모두 그를 바라봤다. 온몸으로 퍼지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침을 삼키자 목구멍 뒤쪽에서 모래 맛이 느껴졌다. 성길게 뭉친 털이 그의 몸에서 자유로이 휘날렸다.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 매서운 고통이 느껴졌다. 타아나리는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해 말했다. "무한한 힘으로 우리는 자만해졌고, 누구도 우리를 거스를 수 없다고 믿었다. 결국 우린 세상을 파괴했고, 주인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한때 우린 스스로를 초월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다르킨?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필멸자들이 붙인 치욕스러운 이름이다." 그는 흐릿해지는 눈을 떠 원형 경기장 계단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 명을 마주했다. 떨어져 나가는 피부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그들은 우릴 증오하지만, 심연의 공포가 다시 떠오르면 우리가 돌아오길 바랄 것이다." 타아나리가 마이샤의 열렬한 시선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라질 것이고, 그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불완전한 신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입에 오르고 내리겠지." 타아나리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원형 경기장의 투명한 바닥에 샬리카를 내리꽂았다. 천지를 강타하는 듯한 소리로 귀가 먹먹해졌다. 그 충격으로 생긴 균열은 멀리 뻗어 나갔다. 맑은 하늘은 막 탄생한 별이 내뿜는 광채로 밝게 타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찬란한 황금빛이 아니었다. 차갑고 불길한 은빛이었다. "달이 태양의 창조물을 소멸시킬 것이다!" 타아나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밤하늘에서 하얀 불기둥이 번쩍이며 내리꽂혔다. 불기둥은 샬리카의 날에 떨어져 퍼져나갔다. 신성전사들을 끌어당겼고 그들을 압도했다. 불길은 그들을 태우고 초월체의 신비한 근원까지 도달해 태양의 힘을 집어삼켰다. 샤바카와 샤바케는 그 순간 증발하여 흩날리는 잿빛 깃털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비명은 그들이 짊어진 숙명의 예지력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에 찬 웃음소리였다. 사이팍스는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빛 속에 갇혀 몸을 비틀었지만, 그의 힘도 우주의 빛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황소 머리 형상의 지간투스는 도망치려 했지만, 그의 엄청난 속도로도 타아나리가 소환한 달빛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타아나리는 뜨거운 빛을 맞는 와중에도 그들의 최후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형제자매들이었다. 아무리 잔혹한 전쟁이 수백 년간 이어졌다고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에나카이가 빛에 소멸되는 것이 보였다. 신성한 육체가 빛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는 타아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눈빛이었다. 타아나리는 자신이 한 짓에 흐느껴 울었다. 빛이 모조리 태워 버렸고 어둠이 몰려왔다. 마지막 힘이 육신을 빠져나가자 그의 몸이 유리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인간들은 신들이 죽어간 영문도 모른 채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싸웠다. 결국 더 많은 피를 흘렸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동족들이 시작한 전쟁을 필멸자들이 이어갈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필멸자들의 전쟁이니 언젠가 끝날 것이다. 타아나리는 행복한 시절을 회상하며 어둠 속에서 헤맸다. 에나카이와 함께 황금 계단을 올라 태양의 힘을 받기 전의 삶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천계의 힘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기억들이 아스러져 갔다. 발소리가 들렸다. 장화를 신은 발이 부서진 유리를 밟는 소리였다. 땀과 썩은 내와 함께 필멸자의 냄새가 났다. 익숙한 냄새였다. 타아나리의 생명의 그릇들이었다. 타아나리는 손을 들어 누군가의 손길을 찾았지만, 아무도 잡지 않았다. "설패?" 쉰 목소리가 나왔다. "그대인가? 투쉬파? 이드리-미? 도와줘. 아무래도... 아무래도 다시 필멸자가 된 것 같다. 내가... 내가 다시 인간이 된 것 같아..." "맞아요." 곧 웃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타아나리는 속삭였다. "마이샤, 모두 다 죽었나?" "아뇨, 나가네카, 발리바, 세보타루는 불길이 닿기 전에 달아났죠. 하지만 꽤 약한 자들이니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거에요. 문제라면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은 자들이죠. 함정에 빠뜨리기 훨씬 어려울 테니까." "안 돼! 모두 끝장내야 해." 타아나리가 쌕쌕거렸다. "상처 입은 신성전사 한 명이라도 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어." 마이샤가 말했다. "절 믿으세요. 오늘 일을 시작으로 당신 동족을 멸하게 될 테니까." "그럼 해낸 거군. 우리가 평화를 가져온 거야." 그러자 마이샤가 진심으로 웃었다. "평화? 아니, 이 세계에는 평화가 오지 않을 거야. 그럴 리가." 혼란에 빠진 타아나리가 일어서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창 자루가 가슴을 세게 치자 다시 주저앉았다. "아니, 그대로 있어." 마이샤가 말했다. "제발 일으켜 줘. 난 이제 인간이라고." "그랬지.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쌓은 죄가 깨끗하게 사라질까? 그동안 죽여 온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 봐. 인간이 됐다고 그들이 흘린 피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말해 봐, 결국 그 알량한 양심에 찔려 반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참극을 저질렀지?" "이해가 안 돼." 타아나리가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마이샤가 킬킬거렸다. 갑자기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아주 먼 고대의 존재 같기도 했다. 원형 경기장 바닥에 박힌 샬리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뽑혔다. "당신은 오래전에 죽을 운명이었어, 타아나리." 마이샤가 말했다. "당신 동족 중에 괜찮은 자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공허와의 전쟁에서 타락하고 말았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신기할 정도야. 어쩌면 당신들 존재 자체가 실수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바로잡아 주겠어." 타아나리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황금빛을 내뿜는 샬리카의 기운이 머리 위를 맴도는 것을 느꼈다. 쇠약해진 그의 육신에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샬리카가 가슴에 닿자 비명을 질렀다. 마이샤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 무기에 흐르는 힘이 당신들 모두에게 닿았지. 이제 신들의 약점을 이해하게 된 거야. 내가 그 신의 불을 인간들에게 전해 주겠어." 마이샤는 타아나리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타아나리는 남은 생명력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숨이 붙어 있었다. 단 몇 초뿐이었지만. "이드리-미." 그녀가 타아나리의 심장을 넘기며 말했다. "샬리카와 함께 대장장이에게 가져가. 그... 남은 놈들을 처리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해." 마이샤가 멈칫했다. "그 놈들을 뭐라고 부르더라?"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그래. 다르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