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저

 


楊著
(116 ~ 168)
후한 말의 인물. 양진의 손자.
오관연공조, 사례종사를 역임하고 태위에게 벽소되었다가 정영후상으로 옮겼으며, 의랑이 되었다가 고양령으로 옮겼다. 덕으로 백성을 부드럽게 하고 형벌을 위엄있게 시행하는 등 정치를 잘했으며, 어머니의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사도가 벽소해 다시 관직을 지내 사선후상으로 옮겼다.
조부 양진은 124년에 태위부에서 고서가 번풍 등이 거짓으로 조서를 쓴 것을 알아내 번풍이 이를 모면하기 위해 양진을 모함했는데, 이 일로 인해 양진이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짐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양진이 자결해서 사망한 지 46년이 지나 168년에 양진에 대한 비석인 태위양공신도비를 세워졌고 양진의 집안 자손이라서 비석에 이름이 적혀 있다.
이 비가 세워진 지 얼마 가지 않아서 같은 해 10월 28일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비석인 고양령양군비를 세웠고 그의 이름을 자신의 비석에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앞서 비석 건립에 참여한 태위양공신도비로 인해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 그의 비석에서 패상 양통이 그의 종형인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