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십일
1. 개요
揚州十日.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고도 한다.
명청교체기 당시 청나라 침략군에 의해 명나라의 제2~3의 대도시인 양주성에서 10일에 걸쳐 일어났던 대학살극을 담은 양주성 생존자의 일지
2. 배경
명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산해관을 넘어 오삼계군을 편입시킨 청군은 별다른 교전 없이 승승장구하며 남하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양주성만이 사가법의 지휘 아래 결사적 항전을 벌였고 이로인해 청군의 전사자가 늘어나자, 성이 함락되고 다른 성들에 본보기를 보일 필요성이 있어진 청나라 장수들의 묵인과, 악에 받친 청군 병사들에 의해 조직적 대학살이 일어났다.
3. 내용
열흘간에 걸쳐 학살된 양주성민은 무려 '''80만'''에 육박하며, 당시 황도 북경성에 이은 제2~3의 대도시였던 양주성의 인구를 약 80~100만정도로 추측하고 있는데, 대략 '''도시 인구의 80% 또는 아예 전체가''' 깡그리 몰살당한 처참한 대학살극이었다.
심지어 근대에 일본제국군에 의해 일어난 난징대학살도 15~30만의 희생자로 추론되는 판국인데, 근세에 일어난 학살이 근대에 일어난 학살의 규모를 세배 이상 초월하고 있다(...).
양주십일 일지는 이 처참한 학살과 살육의 현장을 그림을 그리듯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청군이 대로를 휩쓸고 다니면서 아이를 가진 여자들을 납치하는 과정에 대로변 흙탕물에 버려진 수백구의 갓난아이들의 시체들, 성 안과 밖에 성높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쌓인 산처럼 많은 시체들과 시체들에서 흘러나와 세개의 하천줄기를 형성해 온 도시를 휘감은 핏물...
도를 한참 넘은 너무나도 처참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후 청을 건국한 만주족 지배층들도 '와...이거 들키면 정권 무너진다' 라는 위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청조 내내 양주십일은 금서중의 금서로 지정되어 이후 수백년간 중국의 한족들은 양주성의 학살극에 대한 역사 자체를 모르고 살았다.
4. 후대의 재발견
그러나 청조말 일본에 유학간 중국인 유학생들이 이미 수백년전부터 일본에 출판되어있던(조선 사신단이 올 때 줬던 징비록을 갈 때 보니 대량으로 양판해서 팔아먹고 있던 에도인들이었으니(...)) 양주십일 책자를 결국 발견하게 되었고, 당시 유학생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으며, 청조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서적을 공수해와 청나라 식자층들에게 뿌렸고, 이는 한족들이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넘어 살의를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 멸망 후 대다수의 만주족들이 한족들에게 인종 탄압을 당해 만주족이 극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린 향후 역사는 결국 양주성에서 뿌린 업보가 수백년에 걸쳐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돌아온 것이라고 후대사람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