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

 


BOAC Flight 781
1. 개요
2. 사고 과정
2.1. 기종
2.2. 출발
2.3. 사고 발생 그리고 추락
2.4. 조사과정
3. 사고 원인
4. 사고 후


1. 개요


1954년 1월 10일 오전 10시 51분 경, 영국해외항공(BOAC, 현 영국항공) 781편 싱가포르발 로마 경유 런던행 드 해빌랜드 코멧 제트 여객기(등록번호)가 비행 도중에 공중분해되어 지중해 앨바 섬 인근에 추락한 사고. 이 사고로 탑승객 29명과 승무원 6명, 총 35명이 전원 사망하였다.

2. 사고 과정



2.1. 기종


[image]
사고기 드 해빌랜드 DH-106 코멧은 당시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로서 명성을 날렸다. 지금 보면 42명 밖에 못 태우는 굉장히 작은 여객기지만, 당시에는 최첨단 여객기로 기술 시대의 상징이었다. 1950년대에는 당시 여객 시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행기를 설계할 때, 동력 추진 장치로는 고스트 제트 엔진을 사용하는 등, 제2차 세계 대전에 사용된 군용 기술이 상당히 반영되었다. 속도는 시속 800km로 당시 일반 여객기 속도의 2배였다. 또한 효율적으로 비행하기 위해 공기층이 희박한 12000m 상공에서 비행하였다.

2.2. 출발


사고 당일, 로마 공항에서 정비사 게리 불이 비행기를 점검하지만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고, 오전 10시 31분 이륙 전에 모든 비행 관련 점검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당시 BOAC 781편은 앨런 깁슨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이 운행하여 로마에서 출발하여 2시간 이내에 런던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 날은 같은 비행사 소속의 구형 여객기 아르고넛이 오전 10시 19분 경에 이륙하여 코메트와 비행 도중에 교신을 하였다. 아르고넛은 '하우지그', 코메트는 '요크피터'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했다.

2.3. 사고 발생 그리고 추락


오전 10시 38분경 BOAC 781편은 당대의 다른 여객기들보다 2배 이상 높은 11000m까지 고도를 높이고 승객들의 호흡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여압장치를 작동시켰다. 오전 10시 51분 경 깁슨 기장은 아르고넛과 교신하다가 갑자기 중단되었다. 아르고넛은 이를 로마 공항에 알리고 로마 공항 관제소는 BOAC 781편과 교신을 시도하지만 응답이 없었다.
한편 동일한 시각에 엘바섬에서는 어부들이 갑자기 폭음이 들려서 하늘을 보자 비행기가 큰 소리를 내면서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은 즉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시신과 잔해들이 물 위를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시신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사해보였는데 목격자 중 한 사람인 루이피 파피는 이리 오라며 다가가면 이미 시체였다고 말했다.
소식이 알려지자 히드로 공항에서는 781편이 연착 비행기 항목에 올랐다가 오후 1시 30분 정도에 도착 항공편 알림판에서 제거되었다. 그 원인을 전해들은 탑승자들의 가족이나 지인들은 망연자실했다.
사고 발생 이후, 영국 해군은 781편의 기체를 찾기 위해 정말 온 힘을 쏟아부었다. 당시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추락 지점을 찾아 코메트를 회수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에는 블랙 박스가 없었기 때문에 엘바 섬 근처의 모든 바다를 이 잡듯이 수색해야만 했다. 군함과 해난 구조함까지 보내어 샅샅이 훓었다. 그렇게 해서 잔해를 수집한 결과 사고의 원인이 밝혀지는데...

2.4. 조사과정


이 사고를 조사하기 위하여 아놀드 홀 경을 중심으로 조사위원회가 꾸려졌으며 초기에는 폭탄테러의 가능성도 제시되었으나, 이탈리아의 병리학자 안소니 박사의 부검 결과는 많은 승객들이 두개골 골절이나 폐가 한계까지 부풀려지다 파열하여 사망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홀 경은 이 부검결과를 바탕으로 비행기 자체에 결함이 있었다는 의심을 품었고 왕립 항공기 시설에 의뢰하여 회수한 781편의 부품들을 조립하는 한편 대형수조에 코메트 모형을 만들어서 이론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에 돌입했다.. 그리고 기내와 비슷한 여압상황을 만든 다음에 모형의 윗부분을 파손시켰다. 그 결과 승객들이 분해 직후 좌석에서 튀어나간 다음 동체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이 과정에서 두개골이 골절된다) 11,000m 상공에 던져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실험은 비행기가 공중분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으나 항공기의 어느 부분이 파손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진짜 항공기를 가지고 더 자세한 실험을 했다.(BOAC 소속 G-ALYU, 항공기 이름 Yoke Uncle)의 좌석과 값나가는 물품을 제거하고 물탱크와 기체에 물을 채운 다음 기체에 물을 더 넣었다 빼는 방식으로 비행의 가압순환을 재현하여 균열부위를 발견했다.
그러나 조사가 한창 진행되던 그 때, 영국항공은 막대한 적자를 우려하여 코메트의 재운행을 강행했으며, 사장인 마일즈 토머스 경이 직접 나서서 "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승객들을 모시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결국 1954년 4월 로마발 이집트행 남아공 항공 201편이 나폴리 근처 해안에 추락했다. 그러나 이 항공기는 상당히 깊은 바다에 추락했기 때문에 인양이 불가능했으나, 희생자들은 781편 승객들과 같은 치명상을 입었음이 밝혀졌다. 그 후 홀 경의 실험 결과 조사관들은 비행기가 분해된 순서를 알게 되었는데 그 순서는 균열이 동체 지붕을 파괴하고 창문이 승강타를 친 다음에 항공기의 뒷부분이 통째로 분리되어 날아갔으며 추락 중 바깥 날개와 윙팁이 빠졌으며 마지막으로 조종석이 부서져 날아가고 남은 파편들은 항공유가 타면서 화염에 휩싸여 바다로 떨어졌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3. 사고 원인


사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금속판을 연결하는데 쓰인 리벳이었다. 코메트를 제조할 때, 금속판 연결 과정에서 나사 대신 리베트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리베트를 박는 과정에서 드릴 작업 없이 박다보니 금속판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이 균열이 감압과 여압을 반복하면서 부담을 받게 되면서 점점 그 균열이 커진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비행기가 공중분해되어 추락한 것이다.
한편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이 현상을 '피로 현상'이라 설명했다. RAE의 3000명의 항공기 조사위원들은 기밀실의 파괴 원인을 감압과 여압의 반복으로 인한 금속피로(metal fatigue)로 규정했다. 또한 조사위원들은 현미경을 통해서 금속피로가 발생했던 잔해의 미세한 균열을 확인했다.
이 사고때문에 비행기 창문 모양이 바뀌었다. 코메트의 균열은 리베트을 박는 과정에서 일어났지만 균열을 확대시킨 것은 사각형 모양의 창문이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각 코너에 압력이 집중되면서 원형 창문에 비하여 몇배의 압력을 받게 된다. 이것이 현대 여객기들이 타원형의 창문을 설치한 이유이다.

4. 사고 후


이후 코메트는 진상 조사가 끝나고 나서 4년 뒤에 다시 운항이 이뤄졌지만 보잉과 같은 후발주자들이 내놓은 제트 여객기에 밀려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고, 결국 드 하빌랜드는 호커 시들리에 합병되고 드 하빌랜드 캐나다는 캐나다의 봉바르디에에 인수되었다.
이 사고의 여파로 고고도 항공기 설계와 제작방식이 개선되었고, 민항기 사고조사에 대한 제도가 확립되었다.
현재 781편의 잔해는 런던 위트니에 있는 런던 제국대학에서 보관 중이며 NGC 다큐멘터리 <사상 최악의 참사 - 최초의 제트 여객기, 코메트의 추락>편 제작 과정에서 폴 휘트니가 781편의 잔해를 현미경으로 800배 확대하여 그 당시 아놀드 홀의 보고가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