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용
潁容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자엄(子嚴).
진국 장평현 사람으로 박사로써 여러 학문에 통달해 춘추좌씨전에 밝았으며, 태위 양사를 가르쳤다. 군 태수가 그를 효렴에 천거하거나 주에서 그를 초빙하면서 공거를 보냈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다고 하며, 초평 연간[1] 에 이각과 곽사의 싸움으로 벌어진 삼보의 난으로 경조윤, 우부풍, 좌풍익 일대가 초토화되어 30만 가구에 이르는 인구가 단 2년 사이에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전란을 피해 형주로 떠나면서 천여 명의 제자를 모아 가르쳤다.
유표가 무릉태수에 임명하려고 했지만 관직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으며, 춘추좌씨조례 5만자를 저술했다고 한다. 건안 연간[2] 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삼국지집해에서 당양의 장판파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을 얘기할 때 호삼성이 춘추전에 이르길 초나라가 미 지역을 정벌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여기서 영용이 해석한 예로 미는 당양이라고 짧게 언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