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하시 타카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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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橋孝至
1941년 3월 15일~2009년 3월 9일.
일본의 모터스포츠 감독, 도쿄 출신으로 마쯔다스피드의 창립 멤버로 모터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는 1991년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 우승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아일톤 세나의 죽음을 일본인 최초로 확인한 인물로도 유명하다.[1]
1960년대 카레이서로 활동했으며 이후 1968년에 마쯔다 오토 도쿄 내의 모터스포츠 상담실에서 상주, 투어링카 레이스 관련 상담을 하다가 1973년부터 르망 레이스에서 마쯔다 팀의 감독으로 출장, 1991년에 우승을 지켜봤고 1994년 FIA의 심사원으로 활동한 이후 2000년대에는 토요타 덴소 사드팀의 감독을 맡아 2007년 슈퍼다이큐 토카치 24시간 내구 레이스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참고로 이 당시 하이브리드 엔진을 얹은 수프라가 우승을 차지해 더욱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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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 덴소 사드팀 감독 시절의 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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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망 24시간 우승 후 시상대 밑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린 고인(선글라스 낀 사람이 고인이다.)
1991년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 당시 787B를 우승시킨 장본인으로 메르세데스-자우버와 격돌했을 당시 페이스를 올림으로서 상대를 리타이어시킨다는 작전을 고안해냈던 인물로 일본차와 로터리 엔진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 우승을 이끌어냈던 인물이다.[2]
NHK의 프로젝트 X~도전자들~(プロジェクトX〜挑戦者たち〜)에서도 로터리 엔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당시 후편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거물급 레이서인 재키 이크스를 어드바이저로 쓴 것만 봐도 능력을 인정받을 정도.
잠깐 그의 커리어를 보면...
1968년 : 테라다 요지로와 함께 당시 마쯔다 오토 도쿄의 모터스포츠 상담실에 상주
1974년부터 르망 24시에 출장, 테라다 요지로와 함께 마쯔다 팀의 레이서로 출장.
1991년, 르망 24시 우승.
1994년, FIA의 심판원으로 F1에 참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TRD의 고문, 토요타 덴소 사드 레이싱팀 감독[3] 등을 지내면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2009년 1월에 몸을 추스를 수 없게 되면서 요양했으나 결국 그해 3월 9일 향년 67세로 타계.
2009년 11월 10일, 일본 자동차 전당에 헌액, 헌액 배경은 「자동차 레이스에 끝없는 열정을 가지고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18년 간 도전해, 마쯔다 로터리 엔진차에 의해서 일본차첫 종합 우승을 완수해 모터스포츠 문화의 발전에 막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그 위업을 현창해 영원하게 전승해 옵니다.」라면서 헌액 사유를 밝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감독님께서 이미 고인이 된 관계로 부인인 오오하시 치에코씨가 인삿말을 대신 발표했다. 마쯔다와 관련해서 일본 자동차 전당에 헌액된 인물은 그가 3번째로 마쯔다의 3대 사장인 마쯔다 쯔네지가 2003년에, 초대 로터리 엔진 개발 총 책임자였던 야마모토 켄이치가 2007년에 헌액[4]되었다.
[1] 이에 대한 이야기는 국내에 나오지 않은 책인 쿠로이 나오시(黒井 尚志)의 '레이서의 죽음(レーサーの死)"이란 책에 등장한다.[2] 일본차로서 클래스 우승은 있었으나 완전 우승은 마쯔다가 현재까지 최초이자 최후였다. 로터리 엔진은 말할 이유도 없다. 사유는 1992년부터 로터리 엔진이 르망에서 뛰지 못했기 때문.[3] 3대째였다.[4] 헌액 10년 뒤인 2017년 12월 20일 사망, 부고기사가 25일에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