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윅(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1. 장문
2. 그들이 도망치면
3. 악몽의 설계


1. 장문


자운의 잿빛 골목을 무대로 사냥감을 찾는 괴수 워윅. 극한의 고통을 동반하는 각종 실험으로 완전히 변형된 그의 육체는 약품통, 펌프, 여러 기계가 결합된 복잡한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으며, 정맥에는 연금술을 통해 조합한 분노가 주입된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곤 하는 그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도시의 범죄자들을 단숨에 사냥한다. 피 냄새를 맡고 나면 이성을 잃고 마는 워윅. 조금이라도 피를 흘린 자는 그 누구도 워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워윅을 그저 야수에 불과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러나 강한 분노 뒤에 가려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생각 역시 자리하고 있다. 사실 워윅은 전직 갱단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를 내려놓은 채 새로운 이름으로 보다 나은 삶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새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죄악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로 지난날의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워윅에게 찾아왔다는 듯. 이제 그 모든 기억의 공간은 신지드의 연구소에서 겪은 끔찍한 기억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사지가 묶인 채 겪었던,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혹독한 실험이었다. 신지드, 그 미치광이 화학자의 얼굴이 수술대 위에 묶여 있는 워윅의 모습 위로 어렴풋이 스쳤다.
더 이상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극한의 고통을 겪은 탓에 워윅은 자신이 어떻게 신지드의 실험체로 전락했는지, 언제부터 이 고통이 시작됐는지조차 좀처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저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기억해내려 무진 애를 쓸 뿐이었다. 그렇게 실험을 시작한 신지드는 워윅의 몸 이곳저곳에 펌프와 호스를 연결해 정맥으로 각종 화학 물질을 주입하는 등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했다. 그의 목표는 모든 연금술사가 꿈꾸는 그것. 바로 실험체의 변형이었다.
신지드는 실험체의 진짜 본성, 즉 인간의 선한 모습 뒤에 숨겨진 잔혹한 야수의 본능을 끌어내려고 했다.
워윅의 정맥으로 주입된 화학 약품은 신체의 기능 회복을 도왔고, 이를 통해 신지드는 점진적으로 그의 몸을 개조해 나갔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실험 도중, 워윅의 손이 분리되자 신지드는 전보다 훨씬 강력한 힘과 압착된 갈퀴가 장착된 새로운 손을 다시 달아놓았다. 그러자 워윅은 한층 더 원시 상태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워윅의 등에는 화학 약품통이 설치되었고 이는 그의 신경계와 통합되었다. 그래서 분노나 증오의 감정, 혹은 두려움이 느껴질 때마다 액체 상태의 격분한 감정이 그의 정맥 깊은 곳으로 주입되고, 이를 통해 마음속 깊은 곳 야수의 본능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이렇게 개조된 워윅은 실험 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신지드는 변형 과정에서 고통은 반드시 필요한 매개체이며 ‘대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험 과정에서 입은 신체적 손상은 각종 화학 약품을 통해 신속하게 치유되었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결코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산산이 부서져 가고 있었다.
워윅은 단 한 순간만이라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그저 붉은 피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한 작은 소녀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큰 소리로 뭔가를 부르짖는데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워윅은 이미 자신의 이름마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육체의 고통은 모든 정신을 압도해 버렸다. 피, 워윅을 지배하는 것은 이제 그것뿐이었다.
몇 주간 계속된 수술대 위에서의 개조 작업 후, 워윅의 몸과 마음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몸속으로 주입돼 육체를 변형시키는 화학 물질에는 끊임없이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 대신 독소가 흘러나왔고, 숨을 쉴 때마다 심한 기침과 함께 끈적한 부식성 가래가 흘러나왔다. 이 가래는 워윅의 가슴팍에서 지글거리다 연구소 바닥까지 녹여 얕은 구멍을 만들어 놓곤 했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 묶인 채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던 워윅은 몇 시간이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생각보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신지드는 자운의 지하동굴 깊은 곳, 납골당 역할을 하는 장소에 워윅을 버리고 곧바로 다음 실험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워윅의 변형에서 가장 핵심적인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죽음이었다. 시쳇더미 위에서 그의 몸이 서서히 냉각되자 그제야 비로소 몸속 화학 물질이 제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등에 설치된 화학약품통도 펌프질을 시작했다.
몸은 기이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뼈는 구부러지거나 툭 부러졌다. 작고 가지런하던 치아는 점점 더 커지고, 힘줄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그 순간, 희미한 빛깔의 연금술적 광채가 살며시 워윅을 감싸 안았다. 그를 괴롭히던 모든 신체적 고통이 단숨에 사라지고, 거무스름한 빛깔의 죽은 살갗은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피부로 탈바꿈했다. 쿵쾅쿵쾅, 다시금 심장이 뛰기 시작하던 그때, 지난날 모든 삶과 육신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배고픔에 눈을 떴다.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피가 필요했다.
첫 번째 사냥 대상은 근처 동굴 속 시쳇더미를 뒤지고 다니는 지하동굴 채집꾼, 두 번째는 함께 할 일원을 찾고 있는 영광된 진화단의 여사제, 세 번째는 종종걸음으로 지름길을 가고 있던 필트오버 견습생이었다. 이 외에도 취한 얼굴로 갱단을 피해 숨어든 상인, 위스키 딜러, 검수원, 화공 펑크족 등 워윅의 사냥은 그 대상과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완전히 야수로 변한 후에도 워윅의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그래서 그곳 가까이에 은신처를 만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에 걸려드는 것이라면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냥감으로 삼았다. 피를 마주한 순간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이 밀려왔다.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피를 향한 끝없는 허기는 그 모든 것을 압도해 버렸다.
비록 워윅의 영혼은 야수에게 완전히 굴복한 상태였지만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이 마치 조각난 사진처럼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한 번은 어느 거지를 물어뜯으려는 찰나, 그의 눈에서 수염이 난 한 남자의 모습이 스쳤다. 침울해 보였지만 얼굴은 왠지 낯이 익었다. 그리고 팔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어두침침한 골목 귀퉁이에서 떠도는 깡패들의 피를 빨아들이며 칼끝의 번뜩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 옛날 피가 묻은 어떤 칼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예리한 칼날을 적신 피는 워윅의 손으로 옮겨갔고,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은 피로 물들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비명을 지르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그곳에도 여전히 피가 있었다.
현재든 과거든 그의 삶 내내 피가 존재했음을, 워윅은 그제야 온전히 깨달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힘으로는 그 피를 씻어낼 수 없었다. 곳곳에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겼기에 설령 워윅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도시 전체가 그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갱단 두목에서부터 살인자, 도둑에 이르기까지 자운의 각종 범죄자를 들여다본 워윅은 자신 역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 위에 설치된 약품통은 그의 몸을 증오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왔다.
사냥에 나섰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잡아먹지는 않는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목표물만 사냥감으로 삼는다. 뭔가에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신지드의 연구소로 발길을 옮겼던 바로 그 날처럼.
하지만 이 상황이 진정 자신이 원한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생각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신지드가 옳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선한 인간’ 따위는 표면적인 거짓말에 불과했다. 재앙이 닥치자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워윅이다. 그는 살인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가 사냥할 살인마가 너무나 많다.

2. 그들이 도망치면


그녀를 발견한 곳은 블랙 레인, 잡다한 물건을 파는 각종 상인들과 도둑들이 판을 치는 곳이다. 어두컴컴한 이 자운의 뒷골목에서는 무엇이든 팔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물건은 장물, 즉 훔친 것이다. 나는 이 범죄자들을 다 처치할 수 있다.
저들은 이 모든 악행을 어둠의 그림자 뒤편으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싸늘하게 빛나는 칼끝의 퍼런 서슬마저 암흑 속에서는 가려질 것이라고? 남의 눈을 피해 이루어지는 모든 뒷거래가 짙은 어둠 위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암흑의 도시 자운 거리, 이곳에서라면 나는 길가의 걸인에게서 풍겨오는 희미한 술 냄새까지도 단번에 잡아낼 수 있다.
나는 저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를 알고 있다. 하나하나 아주 선명하게 느끼고 맛볼 수 있다.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스핀들로우 남작의 부하로부터 쪽지 하나를 받아 들고 있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에 퉁퉁한 얼굴을 찡그린 놈. 매섭게 노려보는 눈매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소녀는 받아 든 쪽지를 이내 압축 공기 튜브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남작의 부하는 그녀에게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몇 가지 안내 사항을 전달하는 듯 보였다.
저 녀석이 글씨 쓰는 것은 고사하고 저렇게 말도 할 수 있는 놈이라는 걸 과연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들은 그의 목소리라곤 고작 꽥꽥 소리 지르는 것이 전부였다.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 이후 의족을 끼웠지만 그마저도 이미 녹슨 지 오래였다.
땡그랑땡그랑 제법 큰 소리가 울렸다. 톱니 모양의 동전 몇 개가 갱단 조직원의 두툼한 손아귀에서 그녀의 손으로 옮겨갔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또 저 사람에게서 이 사람에게로 끝없이 전달되는 고통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 도시에서 뭔가를 갖고 싶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갖고 있어도 소용없다. 오직 고통만이 거래의 수단이 될 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모든 피와 동전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주무르던 자.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으르렁! 제법 거칠게 큰 소리를 내자 두 사람은 깜짝 놀라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초록빛에 겁에 질린 듯 뒤로 물러섰다. 소녀는 쓱 하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도망쳤다.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깊은 뒷골목 쪽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기 튜브 위를 자유자재로 뛰어넘었다. 섣불리 쫓기 힘든 짙은 어둠 속으로 그녀는 점점 더 높이, 더 멀리 내달리고 있었다.
‘잔뜩 겁을 먹고 있음. 빠르지만 약함. 화공 남작의 직인이 붙어있는 압축 공기 튜브를 소유 중.’ 힘 좀 쓴다 하는 여러 갱단에서 그녀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완벽했다. 그녀는 모든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렇게 나는 사냥을 시작했다.
나도, 그 소녀도 무척 빠르게 이동했다. 잿빛 스모그가 가득한 도시,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나는 소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손으로 디딜 곳을 찾으며 옥상 위를 훌쩍 뛰어올랐다. 이렇게 도시의 중심부를 파고들 때면 도시는 골목길 곳곳에 유독성 폐기물 웅덩이를 만들어내며 각종 화학 물질을 토해내는 듯 보였다.
그녀는 알코올 혼합물로 가득 채워진 수레 밑을 잽싸게 지나가며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자 했다. 이 도시 자운을, 그녀는 나만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자신을 어디로 몰고 있는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곳은 보호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누구나 두려움에 떠는 그런 장소였다. 자운의 잿빛 대기가 유일하게 사라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어둠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리라 생각했다. 으르렁! 마치 맹수가 포효하듯 거센 분노를 표출하며, 나는 그녀 앞에 정면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갈퀴로 증기 도관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순간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가던 방향으로 계속 달려나갔다. 작전 성공! 바로 내가 원하던 바였다.
헉헉,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수없이 이어지는 벽을 오르고 난간을 내려가며 지칠 만도 했다. 힘에 부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그녀는 바람의 여신에게 간절히 빌고 있었다. 제발 구해달라고. 제발 도와달라고. 어쩌면 그녀의 간구를 들어주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안의 동물적 본능은 살인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허기.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를 처치할 수 있었다.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이미 양손의 갈퀴는 서슬이 퍼래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왜 내가 그녀를 놓아주어야 하는지 잠시 잊어버렸다. 그러고는 그녀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절벽 가까이에서 발을 헛디딘 그녀는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금세라도 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이 낯설지가 않았다. 꼭, 어디서 본 것만 같았다.
나는 뒤로 물러나 어둠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소녀는 이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공기 배관 시설 속으로 뛰어들어 갔지만 얼마 못 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나는 천천히 그 뒤를 쫓아갔다.
소녀는 내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자신을 물어버리기 위해 내가 허연 이빨을 드러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끼일 뿐이었다. 내가 쫓는 사냥감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 막다른 골목에서 그녀가 그 사냥감을 꾀어낼 터였다.
요컨대 그녀를 먹잇감으로 삼을 그들이, 내가 진정 원하는 사냥감이다.
“이런, 이런. 용감하게도 잿빛 대기를 벗어난 녀석이 있었네?”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갱단 두목이 말했다. 그를 중심으로 제법 많은 무리가 소녀의 주위를 빙 둘러쌌다. 그들 손에 들린 단검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있었다. 갱단의 누더기처럼 다 해진 옷을 나는 금세 알아챘다. 그레이 네일즈. 지금은 죽어버린, 한 남자도 그들과 거래를 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흔들며 애써 지워버렸다.
“야, 너 걔잖아.” 무리 가운데 얼굴에 피어싱을 잔뜩 한 여자가 말했다. “너 보긴 심부름하는 여자애지?” 스핀들로우 패거리 말이야. 그 정신 나간 녀석이 또 우리 몰래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나?” 그녀는 갖고 있던 단도로 공기 튜브를 쿡 찌르곤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제발……그런 게 아니에요!” 소녀는 흐느꼈다. 등 뒤에 짙게 깔린 잿빛 어둠을 살피고는 재빨리 앞으로 도망쳐 나왔다.
“이봐, 꼬마 아가씨. 뭘 모르는 건 너도 마찬가지지!” 무리 중 맨 앞에 서 있던 자가 말했다. “자, 이제 슬슬 재미 좀 볼까?”
갱단의 무리가 소녀의 손에 있는 공기 튜브를 툭 건드리며 뺏으려 하자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그들의 목숨보다도 훨씬 값어치 있는 물건이었다. 동시에 그 튜브만 있으면 그들은 이 비참한 구덩이 속에서,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곳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종의 티켓인 셈이었다.
그 공기 튜브가 갱단의 관심을 돌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커다란 바위에 내동댕이쳐진 튜브에는 이내 금이 가고 말았다. 스핀들로우의 직인 역시 둘로 쪼개져 버렸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레이 네일즈 한 명이 소녀를 거칠게 잡았다. 잔뜩 겁을 먹은 소녀는 이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둘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고 번쩍, 금속이 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는……피가 흘렀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 냄새는 내 안의 분노를 한껏 자극했다.
등 뒤의 약품통은 펌프질을 시작했다.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맹수의 포효 같은 울부짖음이 어둠을 가득 메웠다.
“하울러다! 하울러가 나타났다!” 나는 그들이 있는 공터로 내달렸고, 무리 중 한 명이 나를 알아채고선 다급하게 소리쳤다. 순간 나는 놈을 내리쳤다. 골목 벽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소녀가,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나는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포위당했다. 단검들이 엉성한 이빨처럼 내 몸을 찔러댔다. 아래턱이 놈들을 물어뜯고 뼈는 방호복과 함께 부서졌다.
피 맛이 났다. 그리고 아직 더 남아있었다.
그제야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네일즈 무리 가운데 한 명이 그녀를 짓밟은 채로 자신의 칼을 쳐들고 있었다. 그를 제압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등 뒤의 화학약품통이 또다시 펌프질을 시작했고, 이내 팔다리는 강한 힘에 사로잡혔다.
붉은 안개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그저 피. 생각나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내가 그녀를 구했는지, 아니면 내 손으로 죽였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레이 네일즈 일당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물어뜯고 있었다는 것만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몸을 돌렸다. 그들을 쫓아 다시 어둠 속으로 향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들은 내가 사냥하는 괴물, 그리고 나 역시 그 괴물 중 하나다.

3. 악몽의 설계


신지드/배경 문서 참고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