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1. 개요
2. 상세


1. 개요


[image]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William Childs Westmoreland, 1914년 3월 26일 - 2005년 7월 18일)는 미 육군 장군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 주월미군의 총 사령관을 지냈던 것으로 유명하다.[1]

2. 상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1914년 3월 26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색슨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중산층으로 금융업과 직물 산업에 종사했다. 15살 당시 그는 보이스카우트에서 실버 버팔로 훈장과 이글스카우트 훈장을 받았으며, 미육군사관학교의 입학생으로 지명되어 사관학교에 입학함으로써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6년 그는 22살의 나이로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고, 포트실에 있는 제18포병야전군의 포병장교로 복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1939년에 그는 하와이에 있는 제8포병야전군에서 중위로 승진했다.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웨스트모어랜드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가 처음으로 실전에 참전하게 되는 경험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장교로 참전하게 된 웨스트모얼랜드는 북아프리카 전선인 튀니지와 비시 프랑스 그리고 독일본토까지 유럽전선에서 활약했으며, 튀니지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포병대대를 지휘했었다. 그는 전시기간에 대령까지 진급할 수 있었고, 1944년 10월 13일에는 미국 제9보병사단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웨스트모어랜드는 1946년 공수부대 훈련을 마무리했으며 제82공수사단 예하 제504강하보병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냉전의 서막을 알리던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대략 3년간 제82공수사단의 참모총장으로 복무했으며, 이후 1년동안은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의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1952년 강사생활을 마친 웨스트모어랜드는 두 번째로 실전에 투입되게 되는데 바로 그의 부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약 1년간 한국전에 참전했으며[2], 무사히 귀국하여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육군의 병력을 담당하는 인사참모부의 부차장이 되었다.
또한 1954년에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3년간 경영학을 수료했으며,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육군 작전 참모의 비서로 복무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는 제101공수사단을 지휘했고, 그로부터 3년간 육군사관학교 감독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1960년대 그는 마지막 세 번째로 또 다른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1963년쯤에 베트남으로 가게 되었고, 1964년 1월 이른바 MACV-SOG의 지휘관이 되었다.[3] 그러던 7월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전임 총사령관인 폴 하킨스로부터 남베트남 주둔 미군 부대의 총사령관 자리를 계승받았다. 이로써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총사령관이 된 웨스트모어랜드는 이른바 미국의 자작극인 통킹만 사건 계획을 지휘했고, 그의 명령에 따라 남베트남군 특수부대가 북베트남의 섬 두 개를 습격했다. 미국의 조작극인 통킹만 사건에 따라 1965년 미국은 이른바 북폭을 시작하고, 대규모의 지상 병력을 증강했다. 1965년 3월 3500명의 미해병대가 다낭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주둔하는 미군 병력이 증가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비정규전이었고, 이러한 주둔 병력은 계속 증가했으며 1967년 말에는 베트남 전쟁 미군 전사자가 거의 2만 명을 돌파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웨스트모어랜드는 남베트남에 미군 병력을 증강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베트남 전쟁의 전망을 “미국이 승리할 것”이라 내다보았다. 그가 베트남 전쟁에서 사령관으로 있는 기간 동안 미군의 숫자는 16,900명에서 54만 9,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68년 1월 31일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가 있으면서 전황은 역전됐다. 구정 공세 초기 웨스트모너랜드가 지휘하던 미군은 잠시나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밀렸었다. 특히나 구정공세 10일 전에 북베트남군의 포격으로 시작된 케산 포위전(Seige of Khe Sanh)의 경우 ‘제2의 디엔비엔푸’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케산 포위전이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가 되지 않기를 원했던 그의 바람에 따라 미공군은 케산에 엄청나게 많은 화력을 쏟아 부었고, 77일간의 포위전 끝에 1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후퇴하면서 끝났다. 케산 포위전 당시 그는 실패를 감안하여 디엔비엔푸 전투 때와 같이 이 전투에서 핵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물론 이 사실은 철저히 기밀에 부쳐졌다.관련기사
구정공세 이후인 1968년 6월 웨스트모어랜드가 담당하던 총사령관의 지휘는 크레이튼 에이브람스(Creighton Abrams)가 이어받았고, 이 발표는 구정공세 이후에 발표되었다. 남베트남 주둔 총사령관직에서 떠난 그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 일했고, 미국의 민간인 학살인 미라이 학살이 공론화되었던 1970년에는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의 육군에게 포괄적이고 중대한 지도력 연구를 집대성한 조사를 요구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1972년 그는 군에서 은퇴했고,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경선에 도전하기도 했다. 1975년에는 자서전을 출판했으며, 1986년에는 시카고에서 열린 베트남전 베테랑 퍼레이드에서 20만 명의 베트남 베테랑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은퇴한 이후 웨스트모어랜드는 일반적인 삶을 살다가 2005년 6월 18일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1]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까지 미국이 크게 참전했던 3번의 전쟁에 참가했다.[2]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참전한 것이라 전투지역에 있었다면 38선 부근에서의 전투를 치렀을 것이다.[3]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특수작전을 위해 만든 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