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
劉寛
(120 ~ 185)
후한 말의 인물. 자는 문요(文饒). 유기[1] 의 아들, 유송의 아버지.
홍농 화음 사람으로 젊어서 구양상서, 경씨역 등을 배우고 특히 한시외전에 능했으며, 별을 보고 점을 치는 것, 네 귀퉁이의 바람으로 점을 보는 것, 달력을 계산하는 것 등 학문을 탐구하는 것에 힘써 통유(通儒)로 불렸고 권세과 이익에 대해 남과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 유관이 나가던 중에 어떤 사람이 소를 놓쳤고 그 소는 유관의 수레 안에 다가오자 그 소를 자신의 것으로 오인했는데, 유관은 아무 말 없이 수레에 내려 걸어서 돌아갔다. 잠시 후에 그 사람이 찾아와서 소를 되돌려주고 사과했으며, 그 사람이 어르신을 거스른 것이 부끄럽다면서 처벌해달라고 했다.
유관은 물건에는 비슷한 것이 있고 일에는 실수가 있는 법이라면서 고생이 보답받았으니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주리에서는 그 사람이 잘못을 했는데도 따지지 않는 것에 감복했다.
뜬 구름과 같은 뜻을 품고 있어 방정으로 천거되었고 삼공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양기가 고제로 그를 부르면서 양의 현령이 되었으며, 5번 승진해 사도장사가 되었다. 낙양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조칙에 따라 이변에 대해 상담했고 시중에서 상서로 전임했다가 동해국의 상, 남양태수로 승진했으며, 남양태수 때는 산뽕나무의 재배법, 누에를 기르는 법, 짚신을 짜는 법 등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가르쳤다.
3개의 군을 역임해 온후하고 관용있는 정치를 베풀었고 바쁠 때 일이 갑자기 발생해도 말을 빨라지거나 안색을 바꾸는 일이 없었으며, 백성이나 관리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프지 않은 부들로 만든 회초리로 가벼운 벌만 줘서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일이 잘된 때에는 공을 세운 그 사람을 천거하면서 자신은 겸손했으며, 재해가 일어났을 때는 자신이 책임을 뒤집어 썼다.
각 현을 순찰할 때 정자에서 휴식하면 언제나 학문관, 좨주, 처사, 서생 등을 불러 경서를 들고 강의했으며, 노인에게는 농사, 마을에 관한 말로 위로하고 소년에게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교훈으로 가르쳤고 사람들은 은덕에 감명을 받아 덕행에 힘써 교화되었다. 학생들에게 경전의 의의를 강의했고 엄격하게 하지 않아도 잘 풀렸다.
159년에 양기가 주살되면서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삼공부로부터 박사에 초빙되었지만 병을 구실로 취임하지 않았으며, 무재, 유도 등으로 천거되면서 의랑, 사도장사가 되었다. 영제 초기에 중앙의 부름으로 태중대부가 되어 화강전에서 영제에게 강의를 했고 시중으로 승진했다가 옷 한 벌을 하사받았다.
둔기교위로 옮겼다가 종정, 광록훈 등을 역임했고 영제는 유관을 접견할 때 늘 경전의 강의를 하도록 했으며, 연회 때 술을 마시고 잠든 적이 있어서 영제가 취한 것이냐 물었다. 얼굴을 들면서 취하지 않았다면서 책임의 막중함에 마음을 걱정하고 취한 것처럼 되는 것이 답해 영제는 그 말을 존중했으며, 유관은 솔직한 성품으로 술을 즐겼고 손을 씻는 것이나 목욕하는 것을 좋아해 낙양에서는 이를 자랑했다.
어느날 유관이 주연으로 초대하면서 손님들이 하인에게 술을 사러 보냈지만 하인은 오랫동안 취하고 돌아오자 손님이 참지 않고 꾸짖는데, 유관은 잠시 후에 사람을 시켜 하인의 모습을 엿보도록 했다가 그가 자살할 것을 의심했다. 유관은 좌우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인간이지만 축생으로 책망하는 것은 심하니 그 사람이 죽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했다.
유관의 부인은 그가 성내는 것을 보기 위해 조회에 참석하기 위한 조복을 입을 때 시녀를 시켜 고깃국을 쏟게 해 옷을 적시게 했지만 유관은 기색이 변하지 않고 국물에 손이 데지 않았냐고 물었으며, 이처럼 도량이 높아서 천하에서는 그를 덕망이 있는 윗사람으로 기렸다.
177년 7월에 태위가 되었고 일식으로 파면되었다가 위위로 임명되었다고 하지만 태위유관비에는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광록대부로 임명되었다가 위위로 승진했다고 하며, 179년 5월에 태위가 된 후에 181년에 태양에 이변이 일어난 이유로 면직되었다가 영락소부로 임명되었다. 광록훈으로 승진했다가 황건적의 반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채고 그 사실을 상주했으며, 그 공로에 따라 녹향후에 봉해지고 식읍 6백호를 받았고 185년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때는 66세로 거기장군의 인수와 특진의 벼슬에 추증되어 시호를 소열후라 봉해졌다. 그의 아들인 유송(劉松)이 계승해 관직은 종정에 이르렀다.
1. 창작물에서
소설 비열한 성자 조조에서는 최열이 늙어서 아들을 낳은 일로 연회를 열자 그 곳에 참석한 조조와 만났는데, 조조가 낙양북부위를 지내면서 엄격한 법 집행을 하는 것에 대해 칭찬했다.
[1] 순제 때 사도를 지냈다.